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701화 (701/760)

701화

에리카는 바로 윤희연을 만나보고자 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기다리셔야 합니다.”

비서로부터 들은 답이었다.

기다려야 한다. 그 답을 듣는 순간 에리카는 오랜만에 분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같은 총괄 프로듀서인 정호환에게는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를 몸소 찾아갔던 적도 그다지 없긴 했었으나, 정호환은 케이어스를 위해서라면 없던 시간도 만들어서 만나곤 했었다.

하지만.

‘그게 비정상적인 거였겠지…….’

에리카는 화를 가라앉혔다.

“얼마나요?”

“윤 이사님으로부터 답변이 오면 그때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에리카는 비서 데스크 너머 총괄 프로듀서 집무실 문을 눈에 담았다.

거리는 매우 가깝다. 문의 두께도 소리 지르면 반대편까지 쉽게 닿을 정도로 얇다.

그런데도 저 가까운 거리와 얇은 공간을 가로질러 바로 다가갈 수 없다.

KS 엔터 프로듀싱 총괄이란, 설령 KS 엔터 소속 아티스트더라도 그리 멀게 느껴야만 하는 자리였다.

“네.”

에리카는 짧게 답한 후 연습실로 왔다.

‘오히려 좋아.’

에리카는 이틀 뒤에 있을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홀로 연습해보았다.

퍼포먼스와 동선, 토크를 셀 수 없이 반복했다. 이미 수십 번은 한 것이라 대본을 안 보고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에는 ‘내가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복잡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끝날 때가 되니 아예 본능처럼 몸에 새겨졌다.

‘한국 콘서트는 선배님들도 보러 오신다고 했으니 더 완벽해야 해.’

그렇게 연습한 지 세 시간이 지났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에리카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도 윤희연으로부터 답은 없다.

에리카는 연습실 안을 빙글빙글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그녀의 산책은 또 한 시간이 이어졌다.

[너 언제 와?]

김민주는 저녁을 만들었는데 왜 오질 않냐며 전화해왔다. 에리카는 아직 일이 남았다고, 일이 끝나면 바로 가겠다고 답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일은 무슨.”

김민주가 걱정하지 않도록 그녀의 목소리엔 어떤 감정적 동요도 섞이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에리카는 벽에 기대어 앉아 가만히 벽과 벽의 이음새나 천장의 구조를 살폈다.

밤 9시.

윤희연이 에리카를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즈음, 전화가 왔다. 윤희연으로부터였다.

[집무실로 올래?]

에리카는 날 듯이 집무실로 향했다.

비서 데스크엔 아무도 없었다. 다들 퇴근한 후에도 윤희연은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정호환이 있던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인테리어가 반겨주었다. 이국적인 공예품이 진열장이나 바닥, 벽면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위치해 있었다.

“회장님이 인테리어를 새로 하는 데 돈을 따로 지원해준다고 하시더라고. 무얼, 그냥 집에 오는 걸 가져오기만 하면 됐는데.”

윤희연은 예전이었다면 정호환이 있었을 책상에,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했다는 듯 자리해 있었다.

“이젠 집보다 여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거잖아, 그치?”

에리카는 대답 없이 그녀의 앞까지 다가갔다.

에리카는 서 있었고, 윤희연은 앉아 있었다. 필연적으로 윤희연은 에리카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그 시선 차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윤희연은 미소와 함께 의자를 가리켰다.

에리카가 앉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이 시선을 맞추었다.

“어떤 용무일지 대강 예상은 가. 아티스트십 프로젝트 그거 때문이지? 미안, 급한 일은 아니어서 가장 늦게 불렀어.”

“……네.”

에리카도 윤희연처럼 미소를 둘렀다.

“급한 일은 아니죠.”

“말해봐.”

마치 에리카가 무슨 소리를 할지 안다는 듯했다.

그 여유롭고도 고압적인 태도는 설령 에리카가 설득하려 해도, 윤희연 자신은 마음을 바꾸지 않겠단 선언 같기도 했다.

에리카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따졌다.

“굳이 그러셨어야 하셨어요?”

“굳이 그래야 했냐니?”

“후대의 지도자가 전대 지도자의 위상을 폄훼하고 깎아내리는 건 자연법칙 같은 거라서 이해해요. 정호환 이사님의 후광을 지우고 싶으셨겠죠.”

“내가?”

윤희연이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어떻게 그래? 이 회사의 정신 그 자체이신 분을 내가 무슨 수로? 나도 정 이사님을 존경해. 존경 안 할 수 없으신 분이지.”

“그런데 왜요?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는 정호환 이사님이 남기신 마지막 유산이에요.”

“레거시…….”

아니지, 아니야.

윤희연이 고개를 저었다.

“정호환 이사님의 화려한 길, 그 마지막에 찍힌 오점이지.”

“오점, 이요……?”

“내가 정호환 이사님한테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걸 취소했겠니? 우리한테 돈 벌어다 줄 거였으면 기를 쓰고서 유지했겠지. 에리카, 물어보자. 솔로 음반을 내는 이유가 뭐야? 그룹 활동보다 확실하게 수익성이 적은데, 계속 음반을 내는 이유가 뭐야?”

에리카의 눈에 불안감이 서렸다.

윤희연의 반박 논리를 에리카도 너무나 빠르게 떠올릴 수 있었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솔로 팬덤을 결집하고 확대하기 위해서잖아. 음반을 계속 내는 거야 계에속. 적자를 감수하고 계속 내다보면, 어느 순간 그 시점이 오거든. 손익분기점. 손해를 메꿀 수 있는 시기. 너희들 그룹도 마찬가지지?”

팬미팅과 콘서트 등으로 지금까지의 손해를 메꿀 수 있는 시기가 온다.

그룹 멤버가 솔로로 데뷔하면 사람들은 그룹 성적에 비해 월등히 낮은 성과를 보곤 욕하기도 한다.

머리가 굵어져서 솔로로 데뷔했더니, 저거 봐라. 저럴 바엔 그룹에나 헌신하지 괜히 다른 주머니나 차고 말이야…….

기획사가 바보인가?

“그건 말이지, 월급 받고 사는 사람들은 감히 견딜 수 없는 긴 인내가 필요한 하나의 사업이야. 개인 사업자와 마찬가지인 아티스트 개인에게도 인내를 요하지. 그룹을 뛰쳐나온 자기가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시기를 버티고 버텨서 짜잔, 빛을 보는 거야. 솔로로 데뷔한단 건 그런 몇 년 후의 미래를 보고 벌이는 장기 목표지. 근데…….”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는 어떠한가?

“멤버별로 돌아가면서 솔로 앨범을 하나씩 내? 진짜 웃겨. 케이어스의 성공을 위해서? 그럴 거면 컴백 속도를 앞당기는 편이 낫지, 왜 너희를 따로따로 데뷔시켜야 하는데? 뭐, 고작 대여섯 곡으로 콘서트라도 하려고?”

“기획서를 읽어보셨으면…….”

“읽어봤지. 그건 더 웃겨. 너희들의 개인 가치를 높여서…… 무슨 아이돌 그룹의 인기가 덧셈, 뺄셈인 줄 아는 인간이 쓴 건가 보더라. 에리카, 잘 들어. 너희는 소녀연맹이 아니야.”

소녀연맹이 될 수도 없어.

“아티스트십…… 너희 아이돌의 아티스트십이란 건 말이야. 그냥 전문적인 기능인으로서의 예술성이야. 거기서 자부심을 찾아. 자기 자신을 표현해라!”

윤희연이 과장되게 말했다.

“진정한 자신이 되어라! 너를 찾아라! 이딴 싸구려 소비 욕구 충동질 광고 같은 말에 속지 말고. 아이돌이 되려고 이 회사에 들어왔으면, 아이돌 일을 잘해야지.”

“정호환 이사님은 거기서 가능성을 보셨어요. 강동현 수석…….”

아니, 이젠 수석 프로듀서가 아니라고 했지.

“강동현 피디님도…….”

“그 인간이 염병 떠는 거 아니었으면 진즉 폐기했을 거야.”

“반대해서, 윤 이사님을 거슬러서 그런 골방에 박아두신 거예요?”

“아니. 벌이야. 반짝임만 가득해야 할 정호환 이사님의 커리어, 그 마지막에 똥물을 뿌린 데에 벌을 준 거야. 아주 말야, 응? 돌아버리겠어 나는.”

“…….”

“안 그래도 프로듀싱 파트 수장 바뀐 걸로 이사회에서 말이 많아. 이 기회에 기강 잡으려는지 외부 감사 받아라, 이사회 인원을 늘려라, 아주 지랄지랄 말이 많은데. 그 인간들이 너희 아티스트십 프로젝트인지 뭔지 자료 보여달라고 할까 봐 무서워서 잠도 못 자겠어. 소유가 레코딩 악기 세션에만 1억 원을 썼다지?”

풀 오케스트라를 불러 녹음을 진행했었다.

“야, 레코딩 악기 세션에 1억 넘게 박혀 있는 걸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차라리 정호환 이사님이 호텔에서 술을 퍼마셨다는 게 더 설득력 있겠다. 거기에 과소비, 과소비, 과소비……. 비전도 뭣도 없는 계획에 돈을 퍼부었어. 거기서 빛을 봤다고? 그런 거라면…….”

윤희연이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렸다. 그곳엔 그녀의 명패가 있었다. 원래 정호환의 명패가 있던 곳엔, 윤희연의 이름만이 박혀 있었다.

“정말 그딴 데서 빛을 본 거라면, 정호환 이사님이 물러나셔서 다행이지. 정말 다행이야.”

“성공할게요.”

“뭐?”

“다음 차례가 저였어요. 이번만 믿어주세요. 지원해주세요. 반드시 성공해서, 케이어스의 성장에 일조할게요. 부탁드립니다.”

에리카가 고개를 팍 숙였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에리카가 마주한 책상 너머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에리카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이윽고 에리카의 뺨에 숨결이 느껴졌다.

윤희연이 쪼그려 앉아 고개 숙인 에리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싫은데?”

에리카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윤희연이 실실 웃었다.

“왜? 또 바닷가로 도망가게? 내가 그때 정호환 이사님의 자리에 있었으면.”

윤희연이 쪼그렸던 무릎을 폈다.

“그런 꿈에 그린 것만 같은 해피 엔딩으로 안 끝났어.”

윤희연이 에리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솔로 활동하고 싶은 거면 A&R팀과 긴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 그게 아니라 정호환 이사님의 유산에 집착하려는 거라면, 어리광은 그만두라고 말해주고 싶네. 또…….”

윤희연은 에리카의 귀 가까이 입을 가져갔다.

“솔로는 아무나 하니? 케이어스의 에리카.”

* * *

강동현은 율무차를 에리카에게 건넸다.

이 골방에 케이어스의 리더를 모신 게 죄책감이 드는지 쉽게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에리카는 율무차가 든 종이컵을 입술로 가져가다가, 한숨과 함께 도로 책상 위에 돌려놓았다.

“프로젝트가 폐기된 건 아니잖아요.”

“아니긴 하지…….”

“옛날이랑 어떤 점이 달라요?”

“일단 스튜디오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어.”

KS 엔터의 A&R팀 중 음악적 요소를 담당하는 팀은 각각이 스튜디오로 불리며 특별한 호칭까지 지니고 있다.

각 스튜디오가 저마다의 특색과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KS 엔터 그룹의 메인 프로듀서들은 각 스튜디오의 디렉터들과 음악적 방향성을 조율한다.

“아니 그럼 음악은 어디서 받아요……?”

에리카는 얼이 다 빠졌다.

KS 엔터의 프로젝트인데 KS 엔터가 곡을 안 준다고 한다. 이러면 뭐 어쩌라는 건가?

“내, 내가 작곡가잖아…….”

“……아.”

강동현은 수석 프로듀서 자리에 앉았을 만큼 음악적 감각과 실력이 탁월하다.

하지만 뮤직 프로듀싱 파트를 오직 그에게만 의존해야 하다니.

이러면 체계적인 인하우스 시스템이 강점이라는 KS 엔터의 수혜를 전혀 받을 수 없는 게 아닌가.

아예 내놓은 자식 취급이다.

“미안, 남은 게 나뿐이라서…….”

“아, 아녜요. 강동현 피디님이 계셔서 든든해요.”

“헤헤…….”

“…….”

조금 못 미덥긴 하지만, 강동현은 한국 최고의 뮤직 프로듀서 중 한 명이다.

그 명성이 결코 허황된 건 아니리라.

“그리고 또요?”

“KS 엔터의 프로모션 채널을 거의 이용할 수 없을 거야.”

이건 또 크다.

“돈도 많은데 그건 좀 쓰게 해주지…….”

“나, 나도 그렇게 말해봤는데…….”

KS 엔터의 당기 순이익은 마이너스 200억 원을 넘어섰다. 그 이전 분기에 역대 최고 성과를 냈던 것과 너무나 대비됐다.

다음 분기에 케이어스의 콘서트와 성장으로 만회하겠지만, 거의 몇 년만의 적자다.

이사회는 거의 눈이 돌아갔었다.

만약 정호환이 있었다면.

‘어이 어이 정호환 이사, 믿고 있다구!’

이렇게 이사회가 인내심을 가졌겠지만, 정호환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이사회는 2배로 눈이 돌아갔다.

윤희연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을 이사회에 천명하며, KS 엔터의 모든 자산을 아주 철저하게 감독하리라고 했었다.

“이미 폐기한 거나 마찬가지인 프로젝트에 KS 엔터의 자산을 쓰는 건 낭비라고…….”

“이거 그냥 접으라는 뜻이죠?”

“그럴 리가……. 접길 바랐으면 그냥 접으라고 하면 되잖아.”

“듣기로는 강 피디님이…….”

윤희연이 말하길 강동현이 ‘지랄 염병을 떨었다’고 했었다.

그 사건을 은근히 묻자 강동현은 아무것도 모른단 듯 웃기만 했다.

에리카는 추궁하기를 관두고 다른 것을 물었다.

“혹시 해서 묻는데 음방은 나갈 수 있죠?”

“그,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1팀장이 게거품을 물고 윤 이사님한테 달려들었거든.”

진짜 무서웠겠다.

화난 치와와처럼 바들바들 떨기만 해도 조금 무서운데 게거품을 물고 달려들다니.

혹시 1팀장의 힘을 사용하면 윤희연을 설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치와와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게거품 물고 돌진하면…….”

“응?”

“아, 아녜요.”

“음방은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나마 다행이네요.”

“활동은 일주일 정도가 고작이겠지만…….”

에리카는 습관처럼 한숨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소유를 밀어내고 첫 번째가 되는 거였는데.

‘소유만 좋았네.’

정호환의 비호 아래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었으니까.

‘케이어스가 첫 초동 100만 장 돌파 걸그룹이 될 수 있었던 건, 소유의 선전도 컸어.’

역대 솔로 여자 아티스트 초동 판매량 1위였다. 케이어스 팬덤의 힘을 증명하는 사건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윤희연의 관점에서는 전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솔로 데뷔할 시간과 자원으로 컴백을 앞당기고 자주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했다.

‘맞을지도 몰라.’

하지만 에리카의 직감이 말하고 있다. 그런 관성에 이끌린 활동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고 말이다.

‘정호환 이사님이 계셨으면…….’

아니, 그를 그리워하면 어떡하는가.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사라진 정호환을 위한 진혹곡(정호환은 죽지 않음)이어야만 한다.

세상을 울리는 가장 거대한 파동이 되어, 이젠 천국에서 편히 지내고 있을(정호환은 죽지 않음) 정호환에게 닿을 것이다.

“최소한 저희 아이튜브 채널에는 올라오죠?”

구독자 수백만 명에 이르는 채널이다. 그곳에 올라간다면 홍보 효과가 없을 수 없다.

“보고…….”

“네?”

“결과물이 좋을 리 없으니까…… 혹시라도 좋으면 올려주겠다고…….”

“즈, 제, 제에.”

에리카의 어깨부터 뺨, 귀, 머리 끝까지 분노로 붉어졌다.

“제가 케이어스예요! 제가 케이어스인데 왜 케이어스와 관련해서 제가 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죠?!”

“사실 케이어스 이름부터 시작해서 모든 SNS와 계정은 회사에 귀속된 자산…….”

“그딴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니었어요!”

“미안…….”

에리카가 이마를 짚었다.

잘못하다간 혼절할 것 같았다.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홍보할 방법이라도…… 없을까요……?”

“……내가 아는 한에서는.”

강동현이 죄지은 어린아이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총체적 난국이다.

뮤직 프로듀싱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예 홍보가 막히니 손발이 잘린 기분이다. 마치 이번 컴백 때의 소녀연맹처럼…….

“하하.”

에리카는 헛웃음이 나왔다.

소녀연맹은 시작부터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에리카 자신이 누려온 혜택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이제 와서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은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소녀연맹은 손발 없이 경기장에 들어와 케이어스를 따라잡은 것이다.

대체 어떻게 했지? 그런 말이 절로 나온다.

“폐기를 막은 게 아니네요.”

“응?”

“우리가 알아서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그, 그러, 엥, 진짜?! 그건 너무 악랄하잖아…….”

“정말 포기하는 수밖에 없겠어요.”

“어?! 그럼 나 오늘 퇴근도 못 하고 여기서 쭉 기다렸던 건 뭐가 되는데!”

“이상한 데서 발끈하시네요.”

에리카는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이렇게 철저하게 얻어맞으면 반격할 기분도 안 든다.

그래, 지금은 포기하자.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기다리며 발톱을 갈고닦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더는 칼처럼 날카롭게 갈린 발톱을 숨길 필요도…….

칼처럼…….

칼…….

칼?

“국화와 칼…….”

“응?”

에리카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은 그녀의 놀람을 표현할 만큼 크게 떠지진 못했다.

개안이다.

에리카는 개안한 사람처럼 눈동자에 들어선 놀라움을 지우지 못했다.

“홍보할 방법이 있을 거 같아요.”

“어, 진짜? 뭔데?”

“조금 어이가 없으실 수도 있는데…….”

그녀의 제안은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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