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화
김태훈은 오랜만에 윤상열의 작업실 앞에 섰다. 손에 배어 나온 땀을 바지에 슥슥 닦은 후 노크했다.
반응은 없었다. 그럼에도 김태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윤상열이 등을 돌린 채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짙푸른 모니터의 청색광이 을씨년스럽게 작업실 안을 비추었다.
김태훈이 다가가 그의 뒤에 섰다.
윤상열은 돌아보지 않았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은 가운데, 한숨과 함께 윤상열이 먼저 말했다.
“형, 후회해요?”
주어도 뭣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김태훈은 어렴풋이 윤상열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필이 쫓아낸 거 후회해요?”
김태훈은 다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자꾸만 땀이 난다.
그는 한동안 작업실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힘없이 웃으며 답했다. 일부러 기운이 있어 보이려고 꾸며낸 목소리였다.
“아니. 후회하고 말 것도 없지. 성필이가 계속 여기 있었어도 프로듀싱은 안 시켰을 거니까. 그래서…… 너도 떠나버릴 거냐?”
윤상열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고백할 게 있어요.”
“앉아도 되냐?”
김태훈이 근처의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사선 뒤쪽에 앉았다. 여전히 윤상열은 김태훈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내가 석세스 엔터로 온 건 다시 KS 엔터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어요.”
“어떻게?”
“KS 엔터가 석세스 엔터를 살 거라고 판단했어요. 제가 있으면, 제가 석세스 엔터를 반석 위에 올리면 반드시 그리되리라고 확신했어요.”
“그때면…… 기획사가 다른 기획사를 사들이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을 시기인데.”
케이팝 시장은 매우 매우 작았었다.
다른 공룡들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부스러기 파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부스러기가 먹음직한 크기로 불어났다.
최근 여러 기업들이 케이팝 시장의 주도권을 손에 넣기 위해 문어발로 확장하는 건, 몇 년 전까지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주도권을 손에 넣더라도, 그에 들어간 자원을 회수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던 시대니까.
“KS 엔터가 그랬을 거라고?”
“나는 거기 꼭대기 비스무리한 위치에 앉아봤어요. 그래서 알아요. 별 시답잖은 일들까지 대비하는 회사예요. 뭐, 자율 주행 자동차가 나오면 사람들이 남는 시간에 뭘 할지…… 그럼 아이돌의 어떤 콘텐츠가 그 시장에 진입할 수 있을지…….”
“이 상황을 예측했다는 거냐?”
“경우의 수 중 하나였던 거죠. 저는 보지도 못할 경우의 수를, 지금도 KS 엔터는 계속해서 보고 있겠죠.”
블루투스 중앙 제어 기능의 응원봉 특허.
세계 최초의 실시간 온라인 유료 콘서트.
팬덤과 아티스트의 소통 플랫폼.
최근의 업적뿐만이 아니라, 케이팝의 근간을 이루는 트레이닝―프로듀싱―매니지먼트 시스템을 창조한 것도 KS 엔터였다.
“저는 그 경우의 수가 들어맞을 거라고 봤었어요. 콘텐츠가 미디어를 집어삼킬 때, 그 파도 안에 석세스 엔터도 있기를 바랐어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라고 다짐했고.”
“내가 팔 줄 알고?”
“그것도 그렇게 만들려고 했어요. 박성필을 쫓아낼 때 형을 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죠.”
윤상열과 김태훈이 동시에 웃었다.
“잘됐네. 손 안 대고 코 푼 거 아니냐? 네 꿈이 절로 이뤄졌어. 그 여자가 개집이라고 했었지. 개집에서 나가게 된 걸 축하해야 하나.”
“……붙잡을 거예요?”
“붙잡을 순 있고? 네가 붙잡아달라고 하면 붙잡을게. 성필이 나갈 때처럼 너랑 누구 중에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얼마든지 매달려줄 수 있지.”
정상급 아이돌을 만들어낸 프로듀서 아닌가.
원한다면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 눈물 콧물 다 쏟아줄 수도 있다.
“근데…….”
김태훈이 듬성듬성한 두피를 긁적였다.
“내가 정으로 붙잡아봤자 네가 얼마나 열의가 있겠어.”
“유구성 그 인간이 있어서 마음이 조금은 편한가 보죠.”
“맞아. 인간이 어떨 때 절박해지냐면, 제2의 선택지가 없을 때 그래. 나한테는 이 길뿐이다, 더러워도 참고 버텨야 한다, 그런 인간들은 날을 거듭할수록 비굴하고 초라해질 뿐이지. 그러면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 절박함은 인간을 죽여. 노예로 만들지.”
사업가다운 답변이다.
“KS 엔터로 돌아가는 게 꿈이라고 했지. 네가 아직도 고민하는 게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넌 절박하지 않은 거야. 네가 일궈온 이 회사는, 글로브는, 결코 KS 엔터에 뒤지지 않아.”
김태훈이 윤상열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해도 존중할 테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숙고하고 또 숙고해.”
김태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여전히 윤상열은 그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내키지 않아도 애들 얼굴은 보고. 라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더라.”
그제야 윤상열이 반응을 보였다. 그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준비되면 불러서 뭐라도 얘기해봐.”
김태훈이 작업실을 떠났다.
윤상열은 을씨년스러운 청색광에 휩싸여 시간을 죽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쓸 소중한 시간들이 사라지고 있다. 만약 KS 엔터로 갔다면, 완성품인 케이어스를 다뤘을 소중하고 값진 시간이다.
그 시간이 하릴없이 작업실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무의미하게 사라지고 있다.
“내가 절박하지 않다고……?”
정호환이 윤상열을 내쫓았을 때부터, 윤상열은 절박했다. 자신의 것이 될 왕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왔다.
미움받는 것도 개의치 않고 살아왔다.
그딴 미움 따위 KS 엔터로 돌아가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니.
이곳은 자신이 있을 장소가 아니다. 자신의 인시(人時)를 허비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빠져나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
그런 절박함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절박하지 않아……?”
윤상열은 눈을 질끈 감아왔다.
현재의 자신은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 그러니 과거의 자신을 불러온다.
과거의 자신이 행해왔던 모든 일과 품어왔던 모든 생각들을 떠올렸다. 그건 무엇을 위해서였나. 과거의 자신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투쟁했던 것이었나.
적어도, 이 자리에서 힘없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풍경을 본다면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래.’
윤상열이 일어났다.
* * *
문이 열렸다. 초췌한 얼굴의 윤상열이 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비쳤다.
라희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윤상열은 말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둘 다 익숙하게 서로의 자리에 앉았다.
윤상열은 작업대 앞, 라희는 그보다 살짝 떨어진 의자에. 둘은 2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상열은 말없이 라희를 노려보기만 했다. 할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라는 듯했다.
그 폐쇄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는 과거의 윤상열을 연상시켰다. 라희조차 미워했던 때의 그를 짙게 떠올리게 했다.
결국 먼저 입을 여는 건 라희였다.
“아…….”
말을, 하려고 했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수많은 말을 생각했다. 어떤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추억이랄 건 없지만, 그나마 둘이 공감하는 추억으로 운을 뗄까 싶었다.
그땐 그런 일이 있었지.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정말 떠날 건지. 이유가 무엇인지. 꼭 그래야만 하는지 묻다가, 그렇게 묻다가, 가지 말라고 하려고 했다.
윤상열은 칭찬을 좋아한다.
칭찬도 해주려고 했다.
바란다면 애원도 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를 보니까.
“축하드려요…….”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듯 라희를 노려보기만 하던 윤상열.
축하한다는 한마디에 바로 반응이 왔다.
그의 얼굴은 봄을 맞이한 고드름처럼 단단함을 잃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라희는 발음을 뭉개지 않으려 또박또박, 간신히 한 글자씩 입 밖으로 꺼내었다.
“계속 바라셨던 거니까…….”
“…….”
“보였어요. 저희를 볼 때랑, 케이어스를 볼 때랑, 전혀 다르고. 뭐라고,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도 많이 했는데…… 아…….”
“…….”
“죄송해요, 케이어스처럼 될 수 없어서……. 그, 그리고…….”
라희의 입꼬리부터 뺨,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얼굴이 뇌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희는 노력했다.
겨우겨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축하드려요…….”
노려보던 윤상열의 눈매는 어느새 날카로움을 잃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그는 아랫입술을 물고, 또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고맙다, 라우라…….”
* * *
윤상열이 글로브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멤버들은 그 호출을 ‘퇴사 발표회’라고 말했다. 윤상열이 마지막으로 글로브와 마주하여 석세스 엔터에서 나감을 천명하는 것이라고.
정진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글로브 단톡방에 그 유명한 ‘퇴사짤’을 올렸었다.
[안녕히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오오오!]
라희가 노려보는 시바견 이모티콘을 올리자 곧 삭제했지만 말이다.
어찌 됐건, 오늘이 윤상열을 보는 마지막 날이란 건 확실했다.
최유현은 회의실에 둘러앉은 멤버들의 면면을 보았다.
지유는 윤상열의 호출을 받을 때면 언제나 그렇지만 뚱한 얼굴이다.
위세라와 정진은 무표정으로 폰을 만지는 중이었고, 양소민은 유독 얼굴이 어둡다.
윤상열에게 가장 많이 당했으면서, 그가 떠난다니 슬프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었다.
양소민은 WTP 소속사에 전 재산을 꼬라박고, 얼마 전에 마이너스 75%를 달성했다. 순식간에 전 재산의 75%가 사라진 것이다.
‘얘는 어떻게 사도 최고점에서 사냐.’
최유현은 최근 양소민을 아니꼽게 보았었다.
왜냐하면 양소민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인플레이션이라고 알아? 현금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떨어져. 저금도 똑같아. 차라리 주식을 사두는 게 나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단순히 자신만만한 얼굴이 아니라, 마치 세상의 이치를 모두 깨달은 듯 의기양양하기까지 했다.
거기에 ‘너는 이런 거 모르지?’라며 무시하는 말투는 덤이었다.
최유현은 그런 양소민을 보고 멍청이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아마 기초 경제 다큐멘터리나,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대단한 것인 양 떠드는 아이튜브 영상을 몇 편 보았겠지.
최유현은 현금이 주식과 비교할 수 없이 안정적이고 가치 높은 자본이란 것을 알려주려다가, 양소민의 행동이 아니꼬워서 그냥 두었다.
그리고 혹시 모르잖는가.
WTP 소속사의 주식이 계속 천장을 찍을지도.
그런데 혹시나가 역시나.
천장을 찍은 건 양소민의 우울함이었다.
“내 월마트 주주의 꿈이…….”
또 어째선지 노아도 우울해했다. 주식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양소민과 비슷한 꼴을 당했거나, 당하기 직전인 듯하다.
마지막으로 라희.
그녀는 의외로 평온했다. 평소에도 저랬지만, 느낌은 살짝 다르다. 달관했다고 해야 할까, 그런 종류의 평온함이 엿보인다.
다들 소통보다 저마다의 세상에 갇혀 있다.
최유현도 멤버들 살피는 것을 그만두고 폰으로 법원 경매나 찾아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윤상열이 들어왔다.
멤버들은 교실에 선생님이 들어왔을 때처럼 폰을 숨겼다.
“…….”
윤상열은 회의 탁상의 상석에 손을 짚고 섰다. 그리고 멤버들과 한 번씩 눈을 맞추었다.
한숨.
윤상열은 탁상에서 손을 떼고 곧게 섰다.
“나는 멍청한 인간을 싫어한다.”
양소민이 움찔했다.
전 재산 75%를 태워버린 멍청함을 자각해서는 아니었다.
윤상열이 양소민을 윽박지를 때 곧잘 하는 말이 ‘멍청한’이나 ‘지능이 낮은’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윤상열이 글로브 멤버들을 비난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때의 기억은 모두에게 트라우마 비슷한 것으로 남아 있다.
“지능이 낮은 녀석들. 그 공통점 중 첫 번째는 만족 지연 능력의 부족이다. 목적에 집중하지 못하고 눈앞의 쾌락에 휩쓸리지. 공부하다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일을 끝마치는 대신 술자리로 간다. 쉽게 말해, 참을성이 없다는 거다.”
지유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마지막이니 덕담이라도 들려줄까 싶었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자기 잘난 이야기나 하려는 건가. 말미엔 ‘너희는 멍청이다’ 같은 소리나 해대겠지.
‘잘나셨어.’
KS 엔터로 가서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라지.
“두 번째는.”
윤상열은 연설이라도 하듯 일관된 어조로 이야기를 이었다.
“지연 가치 폄하다. 이것도 참을성이 없는 것과 비슷하지. 보상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보상을 쓸모없는 것으로 봐. 사업가들이 당장의 이익을 말하며 훗날의 이익을 희생한다. 지금 당장, 바로 돈을 가져오라고 부하들을 윽박지르곤 하지. 스포츠 선수 중에도 그런 멍청이들이 있어. 부상을 입었는데도 쉬기는커녕 ‘지금 못 이기면 무슨 소용이냐’면서, 무슨 청춘 만화 속에 있는 것처럼 지껄이는 저능아들.”
윤상열이 낮게 웃었다.
“당장, 지금, 바로, 이 순간, 그딴 말밖에 못 하지. 참을성을 쥐어 짜낼 능력조차 없는 지능 낮은 인간들을, 나는 혐오한다. 어린애와 다를 바 없어. 아니, 굳이 어린애로 비유할 필요도 없지. 잘하는 거라곤 천재들을 향해 떼쓰는 것밖에 없는 등신 같은 대중들…….”
지유는 속으로 ‘그게 너잖아’라고 읊조렸다.
윤상열이 하는 짓거리가 딱 그것이었다.
당장 잘해라. 당장 해내라. 당장 이뤄내라.
그가 예로 드는 저능아가 바로 윤상열이었다.
떠나가는 김에 그에게 욕설이라도 퍼부어줄까, 그런 마음이 들었.
“그게 나다.”
지유가 화들짝 놀랐다.
그녀뿐만이 아닌 멤버 전원이 갑자기 탈선한 기차에 탄 것처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그 저능아였다. 나는 참을성이 없었어. 내 꿈과 현실의 괴리를…….”
윤상열이 뒷짐을 쥐고 입술을 꾹 물었다.
“꿈과 현실의 괴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너희들이 바로 정상에 서기를 매 순간 바라왔다. 그런데 그게 되나? 안 되니 너희를 학대하듯 했고, 또 화내고, 악순환의 반복이었지.”
다들 숨죽였다.
“내가 있는 곳은 KS 엔터가 아니고, 너희는 수만 명의 보석 중에 가려진 케이어스가 아니고, 또…….”
윤상열이 깊은 한숨을 토해내고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었다.
“내가 정호환이 아닌데…… 될 리가 없지…….”
본인을 천재이자 왕이자 신이라고 생각해온 남자. 그가 내뱉는 자조에 글로브는 숨소리도 낼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아니야.”
윤상열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패도적인 힘은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수단으로부터 비롯된 힘이었다.
애용하던 타인을 깔아뭉개는 권위 대신, 그는 다른 것을 꺼냈다.
진심이었다.
“오늘도 아니고, 다음 달, 내년도, 내후년도, 어쩌면 3년 뒤에도 아니겠지.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너희를 정상으로 데려갈 거다. 그때까지 겪을 모든 실패와 고난, 실망과 좌절은 뼈아플 거다. 누구보다도 나에게 그러하겠지. 그래도 나는 멍청이로 살고 싶지 않아.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된다. 99패 다음의 마지막 1승. 최후의 대역전극…….”
부족한 회사의 인프라.
부족한 인적 자원.
그리고 부족한 프로듀싱 능력.
KS 엔터와 비교하여 무엇 하나 나을 게 없는 현재이지만, 반드시 닿는다.
닿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의 가장 화려한 화관을 너희들에게 씌워주고 싶다. 그 순간만큼은 타인의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너희들만의 빛 안에 있도록. 더는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 되도록. 마지막 순간이나마, 아니, 마지막이기에 가장 값진 순간을 너희들에게 주고 싶다.”
윤상열은 고개를 숙였다.
뒷짐을 진 채 고개 숙인 모습은 마치 혼나는 사람을 연상시켰다.
“We are the one, we are the world, Globe. 세계 그 자체가 될 소녀들……. 최고의 아이돌이 되고 싶다던, 4년 전 너희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비록 힘들고 거친 길이겠지만, 따라와 주겠나?”
그가 애원했다.
“한 번만 더 나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까…….”
침묵만이 맴돌았다.
* * *
KS 엔터 1층의 카페.
윤상열은 조각 케이크와 아이스티를 받아와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엔 뚱한 얼굴의 윤희연이 있었다.
윤상열은 그녀의 뚱한 얼굴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케이크를 면밀하게 살폈다. 케이크 위에 크림으로 ‘Erika♡’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글자가 뭉개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에 넣었다.
달았다.
“정했어?”
케이크를 다 먹은 윤상열은 입가를 닦은 후 천천히 입을 열.
“아니다, 알겠어. 거절하려는 거겠지.”
“……그래.”
“이젠 KS 엔터가 예전만큼 매력적이지 않나 봐? 어디 야자수나 WTP 소속사 쪽에서 영입 제의라도 받았어? 안 그래도 우리 쪽 애들 죄다 빼가려고 하던데. 상도덕도 없지.”
“석세스 엔터에 남으려고.”
“글로브 때문에?”
“어.”
“진짜 말문이 다 막힌다. 수석 프로듀서야. KS 엔터 수석 프로듀서. 이 나라 최고의 인재들이 오빠 발밑에 있을 거라고.”
“알아.”
“아이돌 하고 싶은 애들은 전부 우리 회사 문을 두드려. 인재풀에서도 비교가 안 돼.”
“알아.”
“케이어스는?”
윤상열이 케이크를 두 조각으로 나누었다.
케이크 위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던 ‘Erika♡’가 갈라졌다.
“남이 가꾼 화원에서, 남이 심은 꽃을 돌보고 싶진 않아.”
“오빠네 꽃은 피지도 않았어.”
“평생 꽃봉오리일지라도, 내가 심었어.”
“내가…….”
윤희연의 애달픈 목소리에 원망이 섞였다.
“도와달라고 한 거잖아…….”
윤상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정호환 이사의 자리에 앉을 수도 있어. 오빠와 내가 그릴 그림이 펼쳐지면, 오빠가 제2의 정호환 이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정호환 이사님이 아니야.”
이번에야말로 윤희연이 할 말을 잃었다.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아.”
“꿈을 그렇게 쉽게 이룰 수 있는 줄 알아? 눈앞의 기회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이들한테나 허락되는 거야. 기회란 걸 판별할 수도 없는 저능아들이랑 오빠는 다르잖아. 이 기회를 잡을 수도 없던 무능력자들이랑도 다르고. 이것저것 재다 보면 결국엔 꿈의 문턱에 발도 못 디딜 거야. 오빠의 꿈은 그런 개집에서 이룰 수 없어.”
“최고가 되겠다고 약속했어.”
“……뭐?”
“그 애들, 글로브 애들은 최고가 되고 싶다고 말했었어.”
“어린애들은 다 그래! 뭘 하든 자신감이 넘쳐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뱉는다고! 그런 어린애 장난 같은 말을 섬긴다고? 그걸 KS 엔터에 오지 않을 이유로 가져다 대? 오빠가?”
“난 이뤄주기로 다짐했고. 그 애들이 진심이 아닌 말뿐이었을지라도, 내가 결심했어.”
윤희연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걸렸다.
“영원토록 결심으로만 남을 거야.”
“아니, 이룰 거야. 짧은 시일 내는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
“그 꿈이 깨졌을 때 오빠 표정이 볼만하겠네. 여기서 제 발로 걸어 나갈 때도 가관이었는데.”
윤상열은 포크를 내려두고 윤희연과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순박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 그때 비웃으러 와.”
* * *
‘파에톤 월드 투어’가 끝을 맺을 장소.
에리카와 케이어스 멤버들이 공항에 도착했다.
밖으로 빠져나가 밴에 타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곤한 한숨을 뱉었다.
“드디어 끝임미다……. 바이오리듬이 망가졌슴미다…….”
“아직 끝 아니지. 마지막 콘서트 남았잖아.”
“한국에 돌아왔으면 끝난 검미다…….”
‘파에톤 월드 투어’의 최후는 한국에서 장식된다. 태양처럼 동으로부터 떠올라 서쪽으로 향하여, 마침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서울로 돌아온다.
장소는 잠실 체육관.
케이어스는 1만 명의 팬들 앞에서 길고 화려했던 콘서트의 말미를 장식할 것이다.
“회사 먼저 가주세요.”
에리카가 매니저에게 그리 말하자 멤버들이 쳐다보았다.
숙소에 가서 쉬어도 모자랄 판에 회사라니. 최근 들어 연습을 훨씬 열심히 한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에리카는 그런 멤버들의 마음을 잃은 듯 설명을 덧붙였다.
“강동현 프로듀서님 뵈려구요.”
멤버들이 납득했다.
차는 KS 엔터로 향했다.
향하며, 에리카는 가방 안에서 스마트 패드를 꺼내었다. 그 안에는 에리카가 구상한 솔로 데뷔 기획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컨셉부터 가사, 뮤직비디오, 의상.
전부 다 레퍼런스를 찾아왔다.
지금 당장 시켜도 프레젠테이션할 수 있다.
기획을 검토한 에리카는 패드를 품에 꼭 안았다.
‘반드시 성공할 거야.’
케이어스의 성장은 이전에 비해 명백히 둔화되고 있다. 걸그룹의 현실적인 천장에 가로막혀서……, 그렇다면 좋겠다.
케이어스가 천장에 부딪혔다면 소녀연맹도 그러할 테니까.
만약 그게 아니라 정말 케이어스 자체가 성장 포텐셜을 전부 잃어버린 거라면…….
‘내가, 아니, 우리가 되살려야 해.’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는 그 발판이 될 수 있다.
케이어스라는 그룹만으로 보여줄 수 없던 매력을 드러내어 대중들에게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이다.
‘나는 일본 버전을 준비해서 일본에 따로 데뷔해도 되겠지. 최근 들어 케이팝의 일본 시장 의존도는 과거 전성기 수준에 이를 정도로 커졌으니까.’
일본인인 에리카가 케이어스의 일본 진출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에리카가 진행하는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는 각별한 의미가 있고, 있어야만 한다.
‘정호환 이사님이 틀리지 않았단 증명…….’
정호환이 직접 선택한 케이어스가 진정으로 정상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증명이 필요하다.
케이어스는 항상 왕좌에 있어야만 한다.
에리카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정호환을 위하여.
‘내 솔로 데뷔는 케이어스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날갯짓이야.’
구름보다 더 높이.
더는 위가 보이지 않는 정점을 향하여.
* * *
“헤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가 순박하게 웃었다. 평소엔 사람 좋아 보여서 좋아했던 그의 웃음도, 지금은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더 짙게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수석, 프로듀서님, 그, 뭐라고…….”
“아, 아니야.”
에리카의 말에 강동현이 부정했다.
“나 이제 수석 프로듀서 아니고…… 그냥 A&R팀…….”
에리카는 강동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시야가 넓어져 방 전체를 보게 되었다.
과거 그가 차지했던 작업실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 한 방이다. 그곳엔 급히 옮긴 강동현의 물건이 이리저리 쌓여 있었다.
거의 창고나 골방 수준이다.
유일하게 제 기능을 하는 건 책상과 그 위에 올라온 노트북, DAC과 스피커, 그리고 콘덴서 마이크 정도일 것이다.
“그으, 그래도 노력했어. 계속해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정호환 이사님이 남겨주신 마지막 유산…… 같은 거니까…….”
강동현은 에리카에게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폐지되는 건 어떻게든 막았지만…… 이게…… 하하…… 꼴이 그리 좋진 못하지……?”
“……그럼, 저희 프로젝트는 제대로 굴러가긴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내가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 디렉터야. 근데, 그으, 옛날처럼 전사적(全社的)인 지원은 못 받을 거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
예산과 지원 대폭 축소.
그 말을 곱씹던 에리카는, 본인이 생각해도 웃긴 얼빠진 소리를 냈다.
“헤……?”
그날, 에리카의 세상은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