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9화
돌아가 달라.
홍규헌의 매몰찬 한마디에 이준호가 보인 반응은 딱히 극적이지 않았다.
답답함을 담아 크게 숨을 들이쉰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가 드러낸 답답함은 일이 틀어졌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홍규헌이 안쓰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 눈동자엔 연민이 서렸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합니다.”
의사가 ‘난 정신과 상담이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는 환자를 대할 때처럼, 이준호는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자기가 예쁘게 가꾼 화분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박히는 걸 달가워하지 않죠. 예전처럼 그 화분에 물을 주고, 잎을 관리하고, 진드기를 떼어낸다. 바뀌는 건 화분에 꽂은 이름표 하나뿐인데, 다들 그걸 못 견뎌하덥니다.”
YJS 엔터는 오랜 시간 다른 기획사들과 다른 전략을 펼쳐왔다.
기획사를 인수하여 산하에 두고, 때론 새로운 기획사를 만들어 밑에 두었다.
그렇게 YJS 엔터의 이름 안에 저마다 다른 개성과 특색을 가진 음반사들을 여럿 두었다.
이준호의 여유는 경험에서 나왔다. 홍규헌처럼 단호하게 거부하는 인간을 많이 만나온 경험이, 그에게 호수와 같은 평정을 부여했다.
“그런데 진드기가 들러붙으면, 훗날 자기가 관리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진드기가 들러붙으면, 결국엔 울상을 지으면서 저에게 먼저 연락합니다.”
그는 다른 회사들에게 불합리한 압박을 넣어왔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이름표를 바꾸겠다고요. 당연히, 제가 원래 주기로 했던 값보다 훨씬 낮은 값에 이름을 넘기죠. 다행입니다.”
이준호는 홍규헌의 실수를 나무라듯 씩 웃었다.
“이 순간 거부하셔서요. 다시 생각하니 1,000억 원은 아무래도 너무 값을 높게 잡은 듯합니다.”
“말씀 다 하셨습니까?”
“아뇨, 마지막으로 여쭈고픈 게 있습니다. 저와는 같을 꿈을 꾸고 싶지 않다고 하셨잖습니까. 왜입니까?”
이준호는 홍규헌의 뒤에 선 성필을 보았다.
소녀연맹을 만든 프로듀서다.
홍규헌이 말한 같은 꿈을 꾸는 이란 분명 성필을 말하는 것일 터다.
“사장님의 꿈이 무엇이든, 그게 아이돌과 관련된 거라면 저보다 더 나은 적임자는 없을 텐데요. 상상이 가십니까. YJS 엔터의 이름과 1,000억이란 자본이 있으면 어떤 꿈을 펼칠 수 있을지.”
“이준호 회장님이 겁쟁이이기 때문입니다.”
이준호의 얼굴이 갈라졌다.
겁쟁이.
그 단어가 뇌를 갈고 지나가듯 강렬한 통증과 불쾌감을 유발했다.
“무서우신 거 아닙니까? 다른 회사의 아이돌들을 실험하듯이 프로듀싱하고, 하는 일이라곤 앨범 후미에 ‘Directing by Lee’를 쓰는 것뿐이고, 회사 이익을 다른 회사를…… 아니. 다른 재능을 사들이는 데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재능을 산다.
그 소리에 이준호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홍규헌이 말한 재능은 아이돌도, 회사 자체도 아니었다. 이준호가 다른 프로듀서를 사들인다는 소리였다.
“이젠 본인 이름을 걸고 뭔가를 하는 게 무서우신 거죠. 본인한텐 더는 옛날과 같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조차 못 하겠고요. 이해합니다, 3세대의 정점을 만들어내셨으니.”
인티머시.
그 찬란한 이름은 걸그룹의 판도를 뒤바꾸었으며 동시에 정점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팬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어마어마한 공백기를 유지 중이기도 하다.
그렇게 긴 공백기를 가졌음에도, 인티머시의 인지도는 현재 초동판매량 1위인 케이어스와 비교가 안 된다.
한 세대의 정점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되어 남는 것.
“KS 엔터의 정호환 이사, SMS 엔터의 강성욱 대표와 수십 년 전부터 겨뤄오셨었죠. 항상 지는 역할이었고요. 그런데 몇 년 전, 인티머시로 그들을 아득한 차이로 따돌리셨고요. 예, 회장님은 승리하셨습니다.”
꿈에만 그리던 대역전극이었다.
그런데 정상에 서고 나니, 막상 이준호는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항상 옆에 있거나 앞에서 달리던 이들이 까마득히 아래에 있다. 이제 그가 나가야 할 길엔 길잡이가 없다.
그는 두려움을 머금고, 용기를 내어, 무엇이 있을지 모를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는 대신.
“도망치셨고요.”
그는, 도망치기를 택했다.
“회장님이 전무후무한 프로듀서란 건 인정합니다. 소녀연맹이 누리는 모든 혜택이 프로듀서님과 그 선배들의 공이고, 소녀연맹이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도 마찬가지겠죠. 하지만, 그 이상 앞으로 나가길 두려워하시는 분과…….”
홍규헌이 아까 표현하길, 겁쟁이와는 같은 꿈을 꾸고 싶지 않다.
“그런 분의 밑에 있고 싶진 않습니다.”
“…….”
이준호는 녹이 슨 기계처럼 굳었다.
세상은 그의 특이한 사업 전략에 대해 그저 ‘특이하다’고만 평해왔다.
최근 들어 공룡들이 기획사를 인수하는 모습을 보고선, 이준호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누구도 이준호가 겁쟁이라서 그런다고 표현하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설을 만들어낸 프로듀서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한 발을 내딛는 게 두려워서 그러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정상을 차지하는 건 극소수다.
그러한 극소수의 마음을 대부분은 모른다.
이준호는 그런 대중의 무지(無知)를 방패로 삼아 견뎌왔다. 대중의 무지로 돌아오는 예상치 못한 찬사들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홍규헌에게는 보인 모양이다.
“맞습니다.”
기계처럼 뻣뻣하던 이준호의 얼굴에 온기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제가 얼마나 필사적이고 절박한지도 아시겠군요. 저에겐 소녀연맹이 필요합니다. 가로 엔터를 아래에 두어야만 합니다. 제가 다시금 용기를 얻을 때까지, 저는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싶거든요. 그래요, 저는 절박합니다. 절박하니, 이 자리에서 제 제안을 거절하시면 돌아올 후폭풍은 더 거대할 겁니다.”
“두려우시다면 이젠 무대에서 내려가 관객이 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
“후폭풍이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부조리한 일이야 많이 당해봤으니까요. 이번 소녀연맹의 컴백을 방해하셨다고 했던가요?”
홍규헌이 무뚝뚝하게 턱을 까딱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이준호가 사람 좋게 미소 지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웨이퍼센트가 소속된 ‘옐로 서브마린 엔터’를 인수하려고 했었습니다. 웨이퍼센트가 아깝단 생각이 들었었거든요. 4년 전 일이고, 결국 안 했습니다. 이제 웨이퍼센트는 상한 과일이 됐죠. 제가 과거에 손을 댔어도 실패했을 건데…….”
내가 방해하고 웨이퍼센트가 맛이 가버린 지금, 너희가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준호는 그 말까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규헌과 성필에게 그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준호가 사장실을 나섰다.
성필이 한숨을 토했다. 그러자 홍규헌이 톡 쏘듯 반응했다.
“왜, 뭐. 잘못된 점 짚으려고? 말해봐.”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어요. 다만 걱정될 뿐이죠.”
“힘들 거 같아?”
“만약 제가 프리랜서였으면…….”
성필이 와이셔츠의 가슴팍을 붙잡고 펄럭거렸다. 가만히 서 있던 게 전부인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이 일을 맡는 데 10억 정도는 요구했을 거예요.”
“일을 맡는 데만? 아니면 성공시키는 것까지 포함해서?”
“계약서에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고요.”
홍규헌은 서랍 안에 넣어두었던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성필이 불을 붙여주었다.
“담배 끊었다면서 라이터는 왜 가지고 다녀?”
“사장님께 불을 붙여드릴 영광스러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이없네…….”
홍규헌이 픽 웃었다. 사태의 심각성 때문에 웃음이 오래 가진 못했다.
“성공 확률을 따지는 건 의미가 없지만, 그다지 높진 않은가 보네.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다…… 박 이사한테도 그런 수준의 난제인 거지?”
“사장님의 부하인 저는 어떤 일이든 반드시 해내야만 하죠. 프리랜서와는 신념과 의지 자체가 달라요.”
“박 이사, 솔직히 말해봐.”
성필은 홍규헌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다. 표정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담배를 쥔 손이 떨리는 걸 보아하니, 표정도 그리 좋진 않은 듯했다.
“받아들이는 편이 나았겠지? 나한테도 이득인, 아니, 상상도 못 한 수준의 이익인 거래였고. 박 이사한테도 딱히 피해가 가는 게 없었잖아.”
홍규헌은 거의 숨을 쉬지 않았다.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담배로 대신했다.
담배를 빨고, 뱉고, 다시 빨고, 뱉고.
그녀의 폐에 들어가는 건 연기뿐이었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겠지. YJS는 최초로 서구권 시장을 뚫었다고 자부할 만한 걸그룹을 가지고 있잖아. 우리랑은 노하우가 비교가 안 되겠지. 프로듀서로서 그런 지원 아래에서 그룹을 꾸리는 건 꿈 같은 일이잖아.”
“사장님.”
“박 이사한테는 오히려 가로 엔터가 YJS 아래로 들어가는 게…….”
“사장님!”
성필은 담배를 쥔 홍규헌의 손목을 잡았다.
홍규헌이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놀란 소동물처럼 동그랗다. 성필은 무방비로 웃을 뻔한 것을 겨우 참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장님과 함께가 아니면 제가 이루는 모든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
“아니, 방금 말은 너무 기분 나쁘니까 취소할게요.”
“왜 취소해.”
“가로 엔터의 모두와 함께 이룬 게 아니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사장님이 이준호 회장 앞에서 말씀하셨잖아요. 함께 꿈을 꾸고, 이루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꿈을 이루더라도, 그 풍경 안에는 사장님이 사장님으로 계셔야 해요. 그래야만 해요.”
“……이건 취소 안 해?”
“……안, 해도 될 거 같아요.”
홍규헌의 눈이 성필의 손으로 향했다. 홍규헌의 손목을 붙잡은 성필의 손으로.
성필이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계속 불안하실 거 알아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이게 옳았나, 저게 옳았나, 잠도 못 자고 뒤척이겠죠. 확신이 안 서시면 주주들을 모아 의견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사장님 지분으론 주주들의 의견 같은 건 신경 안 쓰셔도 되지만…….”
성필, 한구인, 손혜빈, 민경섭, 정지음.
모두 홍규헌이 잘했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리 지지받는다면 홍규헌도 한시름 놓을지도 모른다.
“괜찮아.”
홍규헌은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박 이사가 괜찮다고 해줬으니까, 괜찮아.”
침묵이 흘렀다.
성필이 느끼기론, 어색한 침묵이었다.
갑자기 홍규헌이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웨이퍼센트 애들 보러 갈까.”
“아, 좋은 생각이에요. 눈이 번쩍 뜨이는 완벽한 퍼포먼스, 그리고 오랜만에 제가 메인 프로듀서를 맡은 퍼포먼스를 보시면 불안이 다 사라지실 거예요.”
“그래.”
홍규헌이 책상을 돌아 문으로 향하자 성필은 자연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 홍규헌이 멈춰 섰다. 그리고 흘끗 성필을 돌아보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내 옆에 서도 돼.”
“……넵.”
성필은 그녀의 옆에 섰다.
* * *
글로브의 차기 앨범 프로젝트가 자꾸만 미뤄지고 있다. 미뤄진다고 해야 할까, 진척도가 한없이 느리기만 하다.
이전까지 윤상열이 보인 정력적인 실행력을 생각할 때, 명백히 이상한 상태였다.
그리고 글로브 전원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릇에 얼굴을 박고 자장면을 퍼먹은 것 같은 몰골의 노아가 정보를 입수했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로 오른 윤희연이 윤상열을 영입하러 왔다는 정보를.
“…….”
“…….”
활동 공백기를 맞아 기나긴 휴가를 손에 넣은 글로브다. 그녀들이 자주 쓰는 연습실엔 라희와 노아가 전부였다.
둘은 재산을 탕진한 사람처럼 망연자실하게 바닥에 앉아 있었다.
숙소에서도 비슷한 몰골이라 기운을 차리자고 연습실로 왔건만, 직원들로부터 접한 소문은 흉흉하기만 했다.
“윤 피디가 프로듀싱에서 손을 뗐다고……. 책임감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몽환 청순을 외치며 공중제비를 도는(비유임) 엘릭은 덤이었다.
안 그래도 엘릭은 차기 그룹 프로듀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하지만 듣기로, 김태훈이 엘릭에게 프로젝트의 관리 권한을 일부 넘겼다는 모양이다.
윤상열이 거의 없는 사람이 되어 일이 진행 안 되니, 최고 관리자로서 당연한 대응이었다.
석세스 엔터에도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라희,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
“윤 피디가 우리를 버리는 건가……?”
“…….”
“좋은 기억은 딱히 없지만, 미운 놈 입에 떡을 쑤셔준다고 나름 미운 정이 들었다……. 요즘 바뀌기도 했고, 능력은 의심할 나위 없이 좋고…….”
“…….”
“라희는 윤 피디랑 얘기는 해봤나……?”
아무런 응답이 없던 라희는 겨우 고개만 작게 저었다.
노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울분으로 입가가 파들파들 떨려왔다. 눈에는 물기가 서렸다.
“분하다……. 글로브가 개판 나기(몽환 청순 컨셉으로 컴백) 직전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분하다…….”
“…….”
“악마가 내 귀에 ‘힘을 원하는가?’라고 속삭이면 바로 거래할 정도로 분하다…….”
아니.
“윤 피디가 밉다…….”
기어코 노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그 인간을 바꾸려고 무슨 짓을 했는데, 어떤 짓까지 감내(비밀 동맹)했는데…….”
그 말에 라희가 움찔했다. 생기 없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움직여 노아를 바라보았다.
“온갖 추잡한 짓(윤상열 우쭈쭈 해주기)을 다 했다……. 근데 돌아온 게 버림받는 거라니…….”
“너 뭐라고 하는 거야?”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은 했지만 미워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맹렬하게 윤 피디가 밉다……!”
“추잡한 짓이라니? 너 뭘 한 거야?”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닌가……!”
“…….”
라희가 목을 붙잡자 노아가 실토했다.
“비밀 동맹……. 너도 노력하고 있었구나.”
“이제 다 무슨 소용인가. 케이어스가 좋으면 가라지. 다시 생각하니까 몽환 청순도 좋을 거 같다! 성공해서 윤 피디에게 복수한다! 근데…….”
노아가 또 시무룩해졌다.
“최근 나는 선생님의 기쁨을 알았다. 개차반이던 학생이 개과천선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였다. 물론 윤 피디는 개과천선하지 않았지만.”
“천성은 좋으신 분이야.”
“……?”
라희는 성선설을 지지하는 모양이다. 노아는 대충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발언을 넘겼다.
“라희.”
“응.”
“미래가 걱정되지 않나?”
“응?”
“아이돌이란 이름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젊을 때뿐이다.”
노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건 시간을 살피려 태양의 위치를 확인하는 농민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아이돌은 다른 직업과 비교해서도 자기 계발이 중요하다. 글로브는 성공해서 다행이지만, 해체한 이후에는 정말 각자도생밖에 없잖나. 나는 아이돌이 아닌 내가 그려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연기를 하고, 누군가는 솔로로 데뷔한다. 혹은 아예 다른 분야에 도전할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재에 집중하고 싶다. 많은 돈을 모아서 노후까지 걱정 안 하는 삶을 살고 싶다. 번 돈을 전부 월마트 주식을 사서 배당금으로 먹고사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런데, 윤 피디가 사라지면 그 미래가 위험해진다.”
“월마트에 전부 투자하는 네 생각이 더 위험한 거 같은데.”
“월마트는 안 망해! 전쟁이 나도 월마트엔 손님이 있다!”
“혹시 모르지. 나중엔 전부 다 가상현실에서 생필품을 쇼핑하게 될지도.”
“내 미래를 망치지 마!”
“…….”
“아무튼, 어중간하게 성공해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울 수 없다. 윤 피디가 석세스 엔터에서 나가는 그날이, 내가 미래에 월마트 소액 주주로 주주총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는 날일 거다…….”
“몽환 청순 좋아 보인다면서?”
“모르겠다. 내가 프로듀서도 아니고 대중의 취향을 어떻게 맞추나…….”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건 순전히 운에 가까운 일이다.
아주 운 좋게도, 프로듀서의 판단과 취향이 대중에게 들어맞는단 기적이 필요하다.
“하지만 윤 피디는 맞춰왔다. 내가 하지 못하는 걸 윤 피디는 할 수 있어. 나도 안다. 글로브와 케이어스가 선택지에 오르면, 당연히 케이어스를 선택하겠지. 당장 에리카와 나를 비교해도 그렇다. 에리카가 나보다 우월한 건 당연한 거다. 윤 피디가 밉다고 했지만, 에리카를 떠올리면 미워할 마음도 안 들어…….”
“…….”
“……미안하다.”
“뭐가?”
“5년 전에 내가 자장면만 안 시켜 먹었어도 박 팀장이 있었을 테고. 그럼 우리가 소녀연맹처럼 성공할 수도 있었을 텐데…….”
“노아야.”
“자려고 침대에 누울 때마다 그날이 떠오른다. 매일 체중계에 올라가는 게 무서웠어. 살찌면 박 팀장이 화내는 것도 무서웠다. 그런데, 너무, 너무 자장면이 먹고 싶었어. 매일 하루에 한두 끼만 먹고, 그마저도 채소와 과일이 전부인데. 그에 비해 자장면은 달고, 짜고, 부드럽다. 맛있어. 고향 동네 밥집에서 팔던 규동보다 맛있었어. 그날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했는데, 설마 그렇게 될 줄은…….”
노아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미안하다……. 나만 아니었어도…… 소녀연맹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다……. 박 팀장이 안 나갔을 수도 있었다아…….”
라희가 노아를 와락 안았다. 노아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내 인생 전부가 일그러졌다는 생각이 5년 전부터 떠나지 않아아아……. 내가 모두의 삶을 바꿔버렸어어…….”
“아니야 노아야, 절대 아니야.”
“나는, 난 사실, 글로브에 필요도 없다아……. 한국어도 못해애……. 노래 못 부르고 춤도 잘 못해애……. 나는 글로브로 데뷔하면 안 됐는데에…….”
한 명 한 명이 돋보이는 그룹.
그런 그룹은 매우 드물다.
흔히 사람들이 그룹 멤버의 이름을 모두 아는 그룹은 성공한 그룹이라고 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텔레비전의 시대가 마무리된 몇 년 전에 이미 끝났다.
그럼에도 그룹 멤버 각자의 개성은 중요하다.
때로는 한 명의 멤버가 그룹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진다.
노아는 그림자였다.
“차라리 백댄서가 됐어야 했어어…….”
글로브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무런 의미도 없다. 글로브의 성공을 견인했던 윤상열은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 앞에서, 노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멤버들에 대한 미안함만을 담아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울 수밖에 없었다.
“권선징악이야아…….”
무신론자가 본인을 부수는 강력한 파도에 맞서 버티지 못할 때, 결국엔 갖게 되는 생각.
악을 징벌하는 우주적 질서가 있다는 생각.
그게 노아에게도 들었다.
“그날 시켜 먹은 자장면 때문에…… 그 잘못으로오…….”
노아는 성필을 석세스 엔터에서 떠나게 했다.
우주의 질서는 그에 대한 벌을 노아에게 내리려 한다. 그래서.
“윤 피디가 나를 뽑은 거다아…….”
윤상열이 노아를 데뷔조로 뽑았다.
오늘, 지금, 노아에게 자괴감과 좌절감, 절망을 주기 위해서.
“나는 글로브가 되면 안 됐던 거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