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8화
웨이퍼센트의 막내 유빈.
그는 훗날 아이돌 프로듀서가 되길 꿈꾼다.
본인의 믹스테입으로 능력을 증명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유빈이 준비하는 게 일명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이다.
현시대 톱 걸그룹의 일본인 멤버들을 모아 프로젝트 그룹을 꾸린다는 황당무계한 기획 말이다.
물론 명분으로 따지자면 믹스테입에 불과하니, 그다지 진지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이 믹스테입 프로젝트가 진짜 수익을 내는 사업 모델이 된다면, 각 멤버들의 기획사들이 가만히 있지도 않을 것이고 말이다.
어디까지나 일회성에다 유희용 프로젝트이다.
진지한 유빈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래서?”
성필은 유빈이 사 온 아이스티를 마시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휴게실은 비어 있다. 그럼에도 유빈은 마치 엿듣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주변을 살폈다.
이렇게 프로듀싱에 관해 상담해주는 게 처음도 아니건만, 유빈은 아직도 경계하는 중이다.
무엇을 경계하냐면, 타인에게 자신의 목표가 들키는 걸 경계한다. 듣는 사람 모두 황당하다며 웃을 이야기니 말이다.
“어떻게 되고 있어?”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에리카 씨는 그룹 멤버가 전부 모이면 오라고 한 상태고요…….”
“노아는 찾아가 봤어?”
유빈의 당면 목표는 노아를 만나고 설득하는 것이다.
리카에 이어 노아가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합류한다면, 에리카는 자연적으로 딸려 올 테니까.
“그으, 접근할 방법을 못 찾겠어요……. DM으로 연락해봤는데 답장이 없어요.”
“DM을 하루에 몇 개나 받겠어. 못 봤겠지.”
아예 노아가 자신의 공식 스타그래프 계정을 관리하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아이돌의 개인 계정은 엄밀히 말하면 사적인 계정이 아니다. 회사의 자산이자 홍보 수단이라고 봐야 한다.
계정 담당자가 유빈의 DM을 보았더라도 무시했을 가능성이 크다.
“직접 석세스 엔터에 찾아가 보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너 석세스 엔터 들어가는 사진 바로 박제당하고 기사 나올걸?”
“알아요. 썩 좋게 보일 광경은 아니죠. 다음으로 제가 실천한 건 방송국에 찾아가는 거였어요.”
“글로브가 출연하는 방송에……?”
실행력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다.
다만 이것도 영리한 방법은 아니다.
유빈이 촬영장에 따로 찾아온 것을 보고 다른 스태프들이 무어라 생각하겠는가.
글로브의 매니저가 면전에서 저리 가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뇨! 엡실론 선배님들한테요.”
석세스 엔터 소속 보이그룹인 엡실론은 얼마 전 마지막 컴백 무대를 가졌었다.
이후로 해체 수순을 밟기로 예정되어 있다.
“방송국에 갔다는 게, 엡실론을 보러 간 거라고?”
“네. 연결다리가 되어주시지 않을까 해서…….”
“넌…… 다른 회사 후배가 소녀연맹이랑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 만나게 해줄 거야?”
“안 해주겠죠…….”
성필은 유빈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바보 같은 짓이란 걸 유빈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선 정말 방도가 없어 실행한 최후의 한 수였다. 노아와 접촉할 방법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웨이퍼센트가 글로브와 같은 타이밍에 컴백하거나, 같은 방송에 나간다면 몰라도, 그럴 예정은 없다.
유빈은 눈에 띄게 의기소침했다.
성필은 이미 거절당했던 제안을 다시금 그에게 건넸다.
“내가 대신 연락해준다는 건 생각해봤어?”
“……제 일이니까요. 제가 해볼게요.”
유빈은 배려심 넘치는 미소로 화답했다.
남에게 신세 지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은 가상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남에게 신세를 진 전적이 있었다.
에리카를 RRBKZ의 아지트로 데려왔던 건 븨이에스의 박수련이었다.
그런데 노아를 데려오는 게 성필이면 안 된다는 건 누가 보아도 이상한 사고방식이다. 이상하기에, 성필은 유빈의 속내를 쉽게 파악했다.
‘내가 엮이는 게 달갑지 않은 거겠지.’
그보다는, 경계하고 있다.
만약 성필이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에 엮인다면, 유빈의 지위가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별다른 실적도 없는 프로듀서 지망생 유빈보다야, 당연히 성필이 훨씬 믿음직스럽다.
사무라이 걸즈 멤버들이 성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성필이 받아들인다면, 유빈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될 공산이 크다.
성필에게 도움을 받더라도 유빈을 통해서여야 한다.
“그래.”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성필은 그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그리고 유빈의 생각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사실 제가 오늘 상담드리려던 건 노아 씨 쪽 일이 아니에요.”
“그래?”
“돈이요.”
“돈 빌려달라고?”
“아, 아뇨. 그것도 제 일이니까요. 제가 해결해야죠.”
성필은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의 가장 큰 문제점을 자본으로 꼽았다.
그가 따로 모은 3,000만 원이 있다지만 금방 사라질 게 틀림없다. 유빈의 꿈은 고작 3,000만 원으로 실현하기엔 너무나도 크다.
또한 걸그룹 올스타를 모아두고(노아는 애매함) 고작 3,000만 원으로 프로듀싱을 하겠다니.
최고급 육류를 싸구려 조미료 범벅으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참고로 그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는 육류 요리에 손대본 적이 없다.
요리사의 실력을 믿을 수 없으니, 최소한 다른 요소로라도 단점을 덮어야 한다.
조미료, 즉 프로듀싱의 질적 퀄리티를 향상시킬 돈이다.
그걸 지적해주자, 유빈의 첫 번째 목표는 자본을 모으는 게 됐다. 정확히는 투자자를 찾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은행에 다녀왔거든요.”
“너 설마…….”
“대출이요. 근데 앨범 만드느라 돈이 필요하다니까 미친놈처럼 보더라고요.”
“당연하지. 넌 앨범을 만들고 싶은 거지, 앨범으로 돈을 벌고 싶은 게 아니잖아. 갚을 비전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빌려주겠어.”
은행 직원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아이돌 그룹인 웨이퍼센트의 막내. 그런 유빈에게 충분한 돈을 빌려줄 은행이 어디에 있겠는가.
적어도 번듯한 은행 중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투자자들 중에서도 없겠지.’
아티스트가 앨범을 내는 건 최종적으로 공연을 하기 위함이다.
앨범과 곡 발매로 적자가 나더라도 꾸준히 하여 팬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솔로로 활동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룹 활동에 비해 확연히 소득이 적고 아예 없을 수도 있지만, 꾸준히 활동하다 보면 팬이 모인다.
그렇게 팬층을 확보하면 정기적으로 콘서트를 열어 수익을 낼 수 있다.
‘그런데 유빈의 프로젝트는 일회성이야.’
게다가 유빈은 회사가 아니라서, 사무라이 걸즈로 얻은 이미지와 화제성을 따로 이용할 방법도 없다.
그래,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의 문제점은 바로 자본이다. 하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흔히 말하는 ‘엔젤 투자자’가 나타나서 ‘나는 자네의 꿈이 현실로 이뤄지는 걸 보고 싶네’라고 말하지 않고서야.
유빈은 3,000만 원으로 어떻게든 해야 하리라.
“은행은 안 되겠다 싶어서.”
유빈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다음 이야기가 있으리라 생각지 못한 성필로선 꽤 놀라운 일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좀 프라이빗한 파티를…… 부자들이 모이는 그런 파티에 갔어요.”
“혹시 수련 씨 소개야?”
“……비밀이에요.”
박수련이 소개해준 모양이다.
갑자기 유빈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 근데 진짜 신기했어요. 어디 저택으로 들어오라길래 거기서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뒷문으로 나오니까 차가 있고, 거기에 타서 또 다른 데로…….”
“그래서 투자자는 찾았어?”
“……확실히 파티에 돈 많은 사람은 많더라고요. 남자들은 다 젊은 사업가거나 부모가 부자였어요. 부모가 부자이면서 젊은 사업가이기도 했고요. 근데 여자들은 다 인플루언서였어요.”
“비즈니스적인 분위기는 아니었겠네.”
그냥 유희 상대를 찾는 곳인 듯하다.
또 갑자기 유빈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것도 신기했어요. 뭐랄까, 방송국에 가면 아이돌들이 되게 많잖아요? 근데 거기는 인플루언서들이 모이는 방송국 같은 느낌? BJ도 있고 스트리머도 있고 스타그래프 인플루언서랑 모델이랑 아이튜버랑…….”
“그래서 투자자는 찾았어?”
“……아뇨, 분위기가 안 좋아서.”
“분위기가 왜?”
“왠지 모르겠는데 거기 남자들이 다 저를 좀 놀리고 그랬어요. 돈 얼마 버냐 뭐 그런…… 근데 농담 같아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성필은 이해한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자존심의 전부인 남자들이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물을 많이 머금은 선인장들이 사막에서 위세를 부리는 곳 말이다.
그런데 그 사막에 흐드러지게 핀 꽃과 같은 유빈이 등장했으니, 선인장들이 어떤 마음이겠는가.
아름다움은 자연이 창조해낸 가장 강력한 매혹 수단이다.
“기분 나빠서 비싼 술 종류별로 먹다가 그냥 나왔어요…….”
“뭐 좋은 일은 없었어?”
“그냥 번호 몇 개 받고…….”
“투자 후보자들한테?”
“여자들한테요.”
성필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기회였던 거 같아요. 돈 자랑을 그렇게 하는데, 눈 딱 감고 치켜세워주면서 투자해달라고 하면 해주지 않았을까요?”
“그런 사람들한테 돈 받아봤자 결말은 뻔하겠지. 그리고 보이는 것만큼 돈 쓰는 게 헤프진 않을 거야.”
돈을 쓰는 것도 여타 기술과 비슷하다. 돈은 많이, 자주 쓰다 보면 어떻게 써야 하는지 보이는 법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쓸 기회가 없어서 익히지 못하는 기술이지만, 부자들은 익히기 훨씬 쉽다.
“그래서 여쭈고 싶은 건데…….”
유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님은 사장님을 어떻게 만나셨어요?”
“응?”
“사장님은 박 이사님의 투자자 비슷한 거잖아요.”
“어…… 사장님이 나를 고용하신 거지. 투자자……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초기 소녀연맹의 세 번째 앨범까지는 이사진 모두가 함께 머리를 모아 만들었다.
부족한 인력으로 어떻게든 지혜를 쥐어 짜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회사의 사정이 좋아지고 성필의 성과가 쌓이자, 성필은 온전히 프로듀싱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장님을 만난 건 순전히 운이었지. 애초에 내가 먼저 사장님을 찾은 것도 아니었고. 처음엔 매니저로 고용될 뻔했어. 실제로 소녀연맹 데뷔 전에도 후에도 얼마간은 매니저나 마찬가지였고.”
“결국은 유명해져야 하는 거네요.”
매니저 출신 기획사 대표가 많은 이유는, 매니저로 활동하며 다양한 인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매니저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구축하면 그 신뢰를 바탕으로 투자받기 수월해진다.
유빈은 앓는 소리를 냈다.
젊은이가 꿈을 위해 고뇌하는 모습은 아름답기도 했으나 또한 보기 썩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성필로선 줄 수 있는 게 말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
“네?”
“네 머릿속에 있는 사무라이 걸즈의 결과물은 엄청 대단하지? 소녀연맹이나 케이어스급으로.”
“이왕 하는 거니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옳아. 하지만 최고를 노리는 건 너무 성급하지 않을까?”
유빈은 힘없이 웃었다.
성필의 말은 어른들이 으레 하곤 하는 ‘자만하지 말라’는 조언과 비슷했다.
그런 말을 들은 젊은이가 보일 반응이야 뻔하다. 내심 마음속의 야망을 접지 않으면서, 마주한 어른의 심기를 상하게 하지 않으려 웃는 것이다.
그런 유빈을 향해 성필도 같이 웃어주었다.
“시작부터 최고를 달성하면 나중이 재미없잖아.”
생각도 못한 답에 유빈의 꾸며낸 웃음은 진짜 웃음이 되었다. 힘없던 웃음에 생기가 들어갔다.
“그러네요. 소녀연맹의 이번 승리가 값졌던 것도, 케이어스한테 당한 세월이 있어서였으니까요.”
“으음, 당했다는 표현은 좀 그렇고. 뭐.”
이내 성필도 유빈처럼 생기 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통쾌하긴 했지?”
“데뷔하고 일주일 동안 매일 소름 돋았어요.”
“뭐, 아무튼 내 말은 미리 최고를 목표로 골머리 썩지 말란 뜻이야. 프로듀서가 돼서 프리 프로덕션 계획을 짜고 난 후엔 알게 되겠지만, 뭐든 계획대로 되는 게 없거든. 난 그 혼돈을 즐기는 편이야. 물론 그것도 프로듀싱에 들어갔을 때 일이고, 일단은 눈앞의 목표에 집중해.”
“노아 씨를 섭외하는 거요?”
“응. 에리카 씨가 했던 말 있잖아. 일단 멤버들이 모여야 이야기할 게 생긴다는 거. 그리고 혹시 알아? 네 명이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면 좋은 수가 생길지. 항상 하는 말이지만, 내가 못 하는 건…….”
“남이 할 수 있다.”
“맞아.”
둘은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강현이 나타났다. 그는 휴게실 안쪽을 눈으로 슥 훑더니 성필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 현아.”
“유빈이 데리러 왔어요.”
유빈을 보는 강현의 표정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유빈은 호랑이를 만난 토끼처럼 어깨를 움츠리더니 강현에게로 향했다.
“이사님,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얼마든지 감사받을게. 상담할 거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넵.”
둘이 떠나갔다.
“너 또 이사님 시간 뺏었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
천천히 닫히는 문 뒤로 강현이 유빈을 질책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성필은 그걸 들으며 쓰게 웃었다.
강현은 유빈의 행동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웨이퍼센트의 컴백이 코앞으로 다가온 현재, 연습 외의 것이 정신이 팔린 유빈이 어떻게 좋게 보일까.
‘게다가 현이 입장에서 나는 은인이고.’
유빈은 그 은인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빼앗고 있다. 강현이 보기에 시답잖은 일로 말이다.
성필은 왼손에 찬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평소에 차는 스마트 워치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타츠야 디자이너에게 받은 롤렉스였다.
특별한 날에만 입으리라 다짐했던, 홍규헌에게 선물받은 맞춤 정장도 입었다.
성필은 옷매무시를 가다듬곤 사장실로 향했다. 가는 걸음걸음이 신중함을 담고 있었다.
노크하고 사장실로 들어가자, 홍규헌이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를 굴리는 중이었다.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다.
“사장님.”
성필이 홍규헌의 뒤에 호위무사처럼 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홍규헌은 뒤를 돌아보곤 씨익 미소 지었다.
“어, 박 이사.”
이윽고 둘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홍규헌은 손에서 굴리던 담배를 책상 서랍 안에 넣었다.
“요즘도 정호환 이사랑 만나고 다녀?”
“아니요. 최근엔 만난 적도 연락한 적도 없습니다.”
“친한 사이 아니었어?”
“빈말로도 그렇게 말할 순 없죠.”
“다행이네. 적어도 KS 엔터가 박 이사를 빼내 갈 생각은 없는 거잖아.”
“영원히 함께하기로 한 사장님을 두고 다른 회사로 갈 순 없죠. 사장님이 저를 배신하지 않는 한은…….”
“마지막 말에 뼈가 있네. 아무튼 한시름 놨어.”
“시름 하셨어요?”
“또 내가 먹이를 던져줬네.”
“아니면 저를 못 믿으셨어요?”
“음…… 다시 생각하니까 지금도 못 믿겠어. 케이어스랑은 아직도 연락하는 거지?”
“아뇨. 케이어스 멤버분들이랑도 딱히……. 그리고 옛날에도 많이 연락하진 않았어요. 진짜 가끔이었어요.”
“그래? 이젠 확신이 서네.”
“뭐가요?”
“KS 엔터가 박 이사에게 접촉하는 빈도가 줄어든다는 거잖아. 왜 그럴까?”
“어…… 글쎄요?”
“이젠 박 이사가 쉽게 안 넘어올 거라고 판단한 거잖아. 옛날에 우리 회사가 구멍가게였을 때는 가능성이 있겠다고 봤는데, 이젠 소녀연맹이 전대미문의 성공을 기록했으니까.”
“진짜 상상도 못 한 이유예요. 그럼 저는 미인계에 당하고 있던 거예요……?”
“박 이사의 우상과 최애 아이돌들이 수상하게 주변에 꼬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손나(그런)…….”
문밖으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필은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고쳐 맸다.
홍규헌은 책상 위에 가지런히 모은 손을 올려두었다.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홍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적인 미소를 띠었다.
손님이 사장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문을 잡고 있던 한구인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는 성필과 홍규헌에게 불안한 눈빛을 보냈고, 곧 문이 닫혔다.
손님은 홍규헌과 같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홍규헌이 손을 내밀었다.
그가 그 손을 잡았다.
악수.
“반갑습니다, 가로 엔터 사장 홍규헌입니다.”
“YJS 회장 이준호입니다.”
이준호는 홍규헌의 뒤에 선 성필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 잠시였다.
악수가 끝난 후 둘은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홍규헌이 먼저 운을 뗐다.
“직접 찾아오신다기에 놀랐습니다. 용건도 말씀해주시지 않으시고.”
“만남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놀라셨을 거고, 또 불쾌하셨을 텐데요.”
“불쾌하다뇨. 한국 최고 기획사의 수장 중 한 분을 만날 기회가 어떻게 불쾌할까요.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여쭈어도 될까요?”
어째서 만나자고 했는지.
어째서, 그토록 대단하신 분이 직접 가로 엔터로 찾아왔는지.
이준호는 앉은 의자가 불편한지 앉은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었다. 그리고 가장 편한 자세를 찾은 후 몸을 축 늘어뜨렸다.
“소녀연맹 컴백 때 방송 프로모션을 전부 틀어막은 건 저입니다.”
홍규헌이 눈을 부릅떴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으나 놀라움에 막혀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
“가로 엔터를 사고 싶습니다. 거부하시면 이번과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날 겁니다.”
홍규헌은 책상 위에 올려둔 손을 꽉 쥐었다. 엄지손톱으로 왼손바닥 중앙을 아주 강하게 찔렀다.
소녀연맹의 컴백 때 얼마나 괴로웠던가.
만약 프로모션이 제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이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쓸 수도 있었다.
미래에 자신이 가졌을지도 모를 영광이 빼앗겼다. 빼앗은 이가 바로 눈앞에 있다. 그가 직접 자신이 그 짓을 저질렀노라고 자백했다.
홍규헌 자신이 얼마나 비루하고 만만하게 보이면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까.
홍규헌은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비웃음이었다. 그를 비웃는 사소한 복수라도 하지 않고선, 화를 억제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의 소녀연맹에게 그런 짓이 통하겠습니까?”
“소녀연맹은 안 되겠죠. 그런데 다른 그룹들도 안 되겠습니까. 됩니다, 돼요. 외국에 나간답시고 방송국과 유통사들을 개무시하셨잖습니까. 그 인간들이 소녀연맹만 보고 고개 숙일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굉장히 나이브한 판단입니다.”
이준호는 눈가를 찌푸리면서 입가엔 미소를 걸었다. 마치 연기하는 것 같았다.
“사장님의 목적을 압니다. 웨이퍼센트를 영입하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홍규헌의 얼굴이 굳었다.
“웨이퍼센트가 열쇠죠. 사활을 걸어야겠고, 실제로 거신 듯한데, 계획대로 되진 않을 겁니다. 그 열쇠는 사장님이 목표로 하시는 그 어떤 문도 열지 못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 외에도 계획이 자빠질 요소가 아주 많은데, 사장님은 알고 계시겠죠. 제가 따로 말씀드릴 필요도 없이.”
“그래서 뭡니까? 협박하려고 오셨습니까? 이 회장님은 거래할 때 상대방한테 칼을 들이대나 봅니다?”
“오히려 선물을 가져왔죠. 말씀드렸잖습니까, 가로 엔터를 인수하겠다고요. 사장님의 경영권을 보장하고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겠습니다. 당연히 인력 교체와 조정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
홍규헌은 그에게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칼로 한껏 위협해두곤, 물건을 내놓기만 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한다.
그 물건은 자신의 집에 둘 테니, 원한다면 언제든지 보러 오라고 말한다.
이게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인가?
“경영권을 보장해드리니, 제가 사장님을 CEO로 고용하는 형태가 되겠군요. 연봉은 협상이 필요합니다만, 결코 실망하지 않도록 맞춰드리겠습니다.”
“제가…….”
홍규헌이 숨을 골랐다.
“그런 말을 회장님께 처음 듣는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온갖 말로 저를 구슬리려고 한 인간들이 지금 바로 그 자리에.”
이준호 회장이 현재 앉아 있는 자리에.
“그 자리에서 저에게, 이 회장님이 하신 제안을 앵무새처럼 읊었어요.”
“그래요? 그럼 그 사람들이 1,000억 원 정도는 제안했습니까?”
홍규헌의 숨이 턱 막혔다.
방금 뭐라고 했지?
“1,000억입니다.”
이준호는 홍규헌의 얼굴에 번진 당혹을 기분 좋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시선을 옮겨 성필을 보았다.
성필의 얼굴도 홍규헌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1,000억이라고…….
‘1,000억…….’
성필은 그 액수를 곱씹었다.
‘소녀연맹이 7년 활동을 마치고, 3년 추가 계약을 하고서도 벌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액수…….’
매출로는 1,000억이 무언가.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호가 제안한 건 쌩돈 1,000억이다.
소녀연맹의 추가 활동으로도 순익 1,000억을 벌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설령 벌더라도, 그 돈은 한 번에 홍규헌의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분기마다 조금씩 벌어들이는 돈을 총합하여 1,000억이다.
당연히 홍규헌은 그 순익들을 통장에 고스란히 박아두지 않는다. 정말 마음먹고 1,000억 원을 모으겠다고 다짐하여도, 이러저러한 비용으로 어떻게든 쓰게 되어 있다.
애초에, 순익 총합 1,000억에 도달할 수나 있을까? 아마, 확률적으로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즉 1,000억이란 돈은…….
‘사장님이 평생을 모아도 결코 손에 넣지 못할…….’
그러한 액수의 돈이다.
성필은 상상해보았다. 자신의 앞에 쌓인 10,000,000개의 만 원짜리 지폐를.
현금 1,000억 원.
만약 성필이 사업가라면, 그래서 이런 제안을 받는다면, 분명.
‘판다.’
팔 수밖에 없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수준의 이득을 올리는 거래다.
소녀연맹의 기대수익보다 확실히 높다.
“그런 돈이…….”
홍규헌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런 돈이 있습니까? 한국의 내로라하는 대기업들한테 내놓으라고 칼 들고 협박해도 바로 만들 수 없는 돈인데…….”
“어제오늘 준비한 일이 아니라서요. 모았습니다.”
“어떻게…….”
“제가 주식을 팔든 사업을 정리하든 집을 팔든, 뭘 팔아서 모았든, 그게 사장님께 중요한 일인가요? 중요한 건 사장님 앞에 놓인 만 원짜리 지폐 1,000만 개입니다. 이 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겠죠. 아니, 사실은 모르겠네요. 10,000,000개의 지폐로 이 방을 채울 수 있을까요? 저조차 살면서 본 적이 없는 돈이라. 은행에 가서 보여달라고 해볼까요.”
“…….”
“이제 제 진심이 조금이라도 전해졌습니까. 간단한 선택이 됐죠. 이대로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느냐, 아니면 한국에서 최고의 현금 부자 반열에 오르면서 가로 엔터 대표로서의 명예 또한 유지하느냐. 저였으면 팝니다. 아니, 저 아니라 우리나라 어떤 인간이든 팔 겁니다. 설령!”
이준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설령 제가 저희 ‘인티머시’ 애들을 팔아도 1,000억 원은 못 받습니다. 받으려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자, 이게 제가 드리는 제안의 전부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드릴까요, 아니면 바로 대답해주시겠습니까.”
홍규헌은 넋이 나가 한동안 정면의 이준호를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었다. 꽤 오랜 시간 후, 홍규헌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선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괴로운 마음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을 그녀의 귀로 가까이 가져가 속삭였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심이…….”
그러고서 성필은 홍규헌에게서 멀어졌다.
홍규헌은 갈등할 것이다. 갈등하는 게 당연하다. 이준호의 말마따나 한국의 누구라도, 세계의 누구라도 가로 엔터를 팔 것이다.
갈등하는 쪽이 이상하다.
홍규헌의 그 갈등이 가로 엔터에 대한 애정을 증명한다.
‘이준호 회장이 정확히 짚었어.’
웨이퍼센트는 가로 엔터의 미래 계획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가로 엔터는 기적의 프로듀싱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후 상장 과정에서 추진력을 얻어 대형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
한 번의 실패도 있어선 안 된다.
그렇기에 웨이퍼센트는 열쇠이면서 약점이다.
‘소녀연맹으로 협박했으면 씨알도 안 먹혔겠지만.’
웨이퍼센트를 가지고 협박했기에 먹힌다.
홍규헌은 상상할 것이다. 웨이퍼센트가 망한 이후 가로 엔터의 미래를 말이다.
방송국과 껄끄러운 관계를 형성했다.
소녀연맹을 글로벌 대형 유통사와 계약함으로써 국내의 유통사들에게 반감을 샀다.
사방이 적이다.
‘가로 엔터는 성장하지 못하면 죽는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희망찼다.
설마 온 힘을 다하여 가로 엔터를 죽이려고 작정한 인간이 있는 줄은 몰랐으니까.
성필은 이준호의 눈을 보았다. 수십 년간 가지고 싶은 것을 전부 가져온 자의 눈이었다.
그는 도시를 전부 불태워서라도 손에 넣을 인간이다. 그리고 도시가 전부 불탄 뒤, 홍규헌에겐 지금 받을 보상보다 훨씬 더 적은 보상이 주어지겠지.
‘이 시점, 그야말로…….’
완벽한 타이밍이다.
가장 약할 때 찌르고 들어왔다.
그렇기에, 성필은 홍규헌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라’라고 요청했다.
홍규헌의 생각은 결코 성필보다 짧지 않을 것이기에. 그만큼 갈등하고 판단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기에.
이성적으로는 파는 게 맞는 거겠지.
소녀연맹을 위해서, 가로 엔터를 위해서, 그런 것뿐만이 아니다.
거래를 받아들이는 순간 홍규헌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현금 부자가 된다. 대한민국에서 그녀만큼 즉각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현금을 지닌 이는 매우 드물 것이다.
그만한 현금을 가진다는 건, 어찌 보면 가로 엔터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큰 권력을 손에 쥔단 뜻이다.
이 거래는 등가교환 이상이다.
그래도, 그럼에도, 성필은 홍규헌이 짙은 고민과 갈등을 거쳐 ‘안 판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이기적인 생각이란 건 알지만, 그녀가 단호하게 ‘싫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랐.
“안 팝니다.”
성필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영원히 같은 꿈을 꾸기로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준호 회장님은 감히 같이 꿀 수 없는 꿈을요.”
성필은 홍규헌의 뒤에 서 있었기에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준호의 표정은 볼 수 있었다. 이준호의 표정으로 보아하건대.
“그리고, 제가 그 꿈을 함께 꾸고 이루고픈 인간이 회장님은 결코 아닙니다.”
홍규헌의 얼굴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듯했다.
“돌아가 주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