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96화 (696/760)

696화

얼빠진 소리, 라는 것을 성필도 인식했다.

‘네헤?’라고 대답했다.

성필이 짓궂은 질문을 할 때 백설하가 그런 소리로 답하곤 했다. 성필은 그걸 보고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서 성필을 귀엽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다.

즉답하려는 버릇이 밴 성필은 바로 답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아……’라는 추임새를 내뱉곤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선 그래선 안 된다.

한구인에게 지적받았다. 홍문헌은 그렇게 말 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여쭐 게 있는데.”

성필은 간신히 추임새를 참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필사적으로 홍문헌이 했던 이야기를 소화시켰다.

부디 시간 벌이가 되길 바라며 질문했다.

“부자를 현대의 귀족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제가 알기로 귀족의 특권과 지위는 혈통으로 계승됩니다. 그 지위는 왕권이 허락해주는 한 불멸하지만, 재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받는 사람의 능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귀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고정된 지위와 특권의 세습이지만, 부자는 지위도 아니고 그저 돈 많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인 게 아닌지…….”

“물론이지, 그 지위를 귀족처럼 왕국이 보장하지 않아. 자손의 능력이 매우 중요해.”

성필은 홍문헌의 왼쪽 편에 앉은 그의 딸을 바라보았다. 갓 중학생이 되었다는 그녀는 심드렁한 얼굴로 식사에 열중했다.

성필이 생각하기로, 그녀는 아버지인 홍문헌의 이러한 장광설에 꽤나 자주 노출되었던 듯하다.

“콜먼 보고서를 알고 있나?”

“모르…….”

성필은 ‘모른다’라고 말하는 데 꽤 큰 심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게,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해야 한단 것이다. 괜히 아는 척해봤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홍문헌을 향해선 그러기 힘들었다.

성필은 불량했던 학창 시절에 교사의 질문에 ‘몰라요’라고 자주 답했었다. 그럼 으레 ‘자랑이다’라는 비아냥이 돌아왔었다.

그래, 학교에 온 기분이다.

학교와 다른 점은 홍문헌이 성필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란 것이다. 그는 성필의 바닥을 자꾸만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모릅니다.”

“60년대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무엇이 교육 불평등을 야기하는가?’를 알려고 했지. 왜 누구는 좋은 학위를 얻고, 누구는 아닌가? 그걸 알면 국민의 교육 수준을 향상하고 평등에 가까워지리라고 여겼어. 결과가 어땠을까. 어떤 요소가 아이의 학업 성취도에서 가장 중요했을지, 맞춰보겠나?”

“……만족 지연 능력?”

“‘마시멜로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나 보군.”

홍문헌이 웃자 성필은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한구인이 예전에 마시멜로 이야기를 했던 게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그리 답했다.

“결과는 부모의 재력이었네. 학교의 시설, 도서관 장서 수, 교사의 유능함, 아무것도 유의미하지 않았어. 오직 부모의 재력만이 아이의 학업 성취도와 유의미한 인과관계를 보였네. 부모의 재력이 높을수록 성취도가 높아. 정확히는, 높을 확률이 높지. 끔찍한 일 아닌가?”

“끔찍한 일이요?”

“콜먼 보고서가 뜻하는 바는 명확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학력이 정해져 있어. 그가 어떤 일을 겪든, 어떤 유년기를 겪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든, 매우 높은 확률로 부모의 재력을 따라 그에 걸맞은 학력을 얻지. 능력주의 사회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나?”

급이 있는 거야.

홍문헌이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며 말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급이 있는 거야. 정해진 미래와 삶이 있어. 누가 부정하든 말든 그건 현실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렇게 부르지. 운이 좋다고. 자네는 운이 좋은 사람인 거 같아.”

인간은 급이 있다.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은 ‘성필은 운이 좋다’이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확하다.

홍문헌은 말하고 있다. 홍규헌과 성필은 태어날 때부터 급이 다른 인간이라고 말이다.

“하아.”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 한숨은 홍문헌의 딸인 홍유진이 있었다. 그녀는 식기를 내려두곤 성필을 보았다. 그리고 빙긋 미소 지었다.

성필도 아까까지 마음에 휘몰아치던 온갖 감정을 잃고, 미소 지었다.

“박 이사님, 저 소녀연맹 팬이에요.”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아가씨요?”

유진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짙푸르고 생기 넘치는 웃음을 보였다.

“유진이라고 부르세요.”

성필은 홍문헌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눈치를 다 보기도 전에 유진이 또 말을 걸었다.

“저 초등학생 때 반 애들 다 소녀연맹 노래 들었어요. 그거 곡을 박 이사님이 쓰시는 거예요?”

“아뇨, 곡은 작곡가들이 쓰죠.”

“프로듀서는 곡 쓰는 사람 아니에요?”

“아…… 이걸 뭐라고 설명 드려야 할지…….”

“사장이야.”

답한 건 홍규헌이었다.

“너네 아빠가 HPT 미디어 사장이잖아. 근데 너네 아빠가 드라마 만들고, 영화 만들고, 예능 프로그램 만들고 음반 만들고 뮤직비디오 만들고 광고 만들고 콘서트 만들고 다 기획하고 진행해?”

“아뇨. 제가 아는 아빠 일은 집무실에 근엄하게 앉아서 고개 끄덕이는 일밖에 없어요.”

“그렇지. 그거야. 허락하는 사람.”

“아아…… 프로듀서는 아이돌 담당 사장님이구나? 이해했어요.”

유진은 고모를 향해 히히 웃고는, 이번엔 꽤 겸연쩍은 태도로 성필에게 질문했다.

“소련이들도 연애해요? 연애 금지 끝났죠?”

“우리 업계 사람 전부 다 붙잡고 물어보세요. 한 명도 ‘한다’고 대답 안 해요.”

“하긴 한다는 거죠?”

“전부 다 ‘안 한다’고 대답하면 정말 안 하는 거겠죠.”

“에이, 하죠? 누구예요?”

“안 해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말씀해주시면 안 돼요 응? 으응? 으으응?”

“안 해요.”

“알겠어요, 믿을게요.”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홍규헌이 ‘믿는다’고 할 때와 묘하게 어조가 비슷했다.

유진은 홍규헌을 보며 ‘왜 웃으셔?’라고 눈으로 물었지만, 홍규헌은 애매하게 고개만 저었다.

딸과 웬 기생오라비의 즐거운 대화를 듣고 있던 홍문헌. 그는 대화가 소강상태에 들어선 듯하자 다시 이야기를 이으려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읍!”

아내가 몸을 살짝 자신 쪽으로 기울이자 그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성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진 못했지만, 대강 짐작은 갔다. 식탁 아래에서 홍문헌은 아내에게 공격당했을 것이다.

홍문헌은 못마땅한 얼굴로 포크를 쥐었다.

살얼음판 같던 테이블 위에 온기가 감돌았다. 홍규헌은 성필의 눈치를 보다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오빠야, 아직도 운동하지? 박 이사도 운동하거든.”

성필이 긴장했다.

드디어 홍규헌이 본격적으로 계획을 가동했다. 성필의 장점을 어필하여 홍문헌이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홍문헌이 접시를 바라보며 물었다.

“목적은?”

“건강과 미용입니다.”

“3대 몇 들지?”

“본격적으로 해본 적은 없습니다.”

홍문헌이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성필이 홍규헌을 쳐다보았다. 홍규헌이 테이블 아래로 OK 사인을 보냈다.

오빠인 홍문헌은 ‘3대 몇?’이라고 묻는 사람을 혐오한다. 자랑스럽게 그걸 떠벌리는 인간도 혐오하고 말이다.

역도 선수나 파워 리프팅이 목적인 인간은 이해하지만, 그것도 아닌데 굳이 무거운 걸 들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단 것이다.

침팬지가 날뛰면서 근력을 자랑하던 때로부터 한 치도 진화하지 않은 유인원이라고 표현했다던가.

3대 측정하다가 어깨가 나갔던 성필로선 자연스럽게 숙연해지는 질타였다.

“아이구.”

홍문헌의 아내분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아마 습관일 테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남편처럼 침실보다 헬스장을 좋아하진 말아 주세요.”

“…….”

뉘앙스가 묘했다. 그 묘함이 느껴졌기에, 성필은 그녀의 말 안에 든 속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 아, 네.”

성필이 속으로 혀를 깨물었다.

시간을 끌려는 추임새를 내뱉지 않겠다고 결심했건만, 예상치 못한 농담에 말을 더듬어버렸다.

홍문헌도 아내의 말을 이해했는지 그녀에게 눈총을 보냈으나, 아내는 그를 노려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홍문헌이 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홍규헌이 다음 공세에 나섰다.

“박 이사도 책 많이 읽어.”

문무겸비(文武兼備)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동서양에서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오랫동안 그려져 온 것이다.

들판에선 칼을 든 전사이면서 책상 앞에선 감상적인 시인이 되는 남자.

책을 읽어 쌓은 지식이야말로 현대에서의 문(文)일 것이다.

물론 성필은 책을 꽤 읽는 편이지만, 아이튜브에서 아이돌 관련 영상을 보는 빈도와 시간이 훨씬 높다. 그렇지만 이실직고할 수는 없는 노릇.

성필은 이성이 흘러넘치는 눈으로 홍문헌을 응시했다.

“최근에 읽은 책은?”

“‘블루노트, 타협하지 않는 음악’입니다.”

“대중음악에 몸담은 사람답군.”

성필은 살짝 당황했다.

이 책의 제목을 말하면 그가 반응하지 못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치 내용을 안다는 듯이 대답하는 게 아닌가.

“원래 재즈는 안 들었었는데, 한 이사님 덕분에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한 이사의 취향은 고풍스럽지. 시간의 세례를 받고 살아남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책 취향도 마찬가지이고. 요즘도 한 이사랑 잘 지내고 있나?”

홍문헌이 동생에게 물었다.

대화의 주제가 한구인으로 넘어갔다.

“뭐어, 옛날이랑 똑같지.”

“난 사람을 꽤 많이 보는 편인데, 구인이만큼 제대로 된 인간을 본 기억이 그다지 없다. 진실되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덕목이야. 곁에 두어야 할 사람이야.”

“나도 항상 감사하고 있어.”

그 뒤의 이야기는 한구인의 칭찬밖에 없었다. 둘 다 한구인의 과거나 현재를 이야기하며 정답게 꽃을 피웠다.

그러던 도중 홍규헌이 정신을 차렸다.

정신없이 한구인을 칭찬하다 보니 성필이 시무룩해져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느낄 수 없는 그녀만의 감각이었다.

“바, 박 이사도 그래. 사람이 진실되고 멋져.”

‘멋져’ 한마디에 성필의 기운이 되살아났다.

“어디가?”

홍문헌이 묻자 홍규헌은 바로 답할 수 없었다.

성필은 그녀를 지긋이 보았다. 두 눈엔 기대감이 흘러넘쳤다.

그런데, 홍규헌은 딱 집어서 성필이 한구인보다 나은 점을 말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인간의 장점을 간단하게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사적인 거라서…… 말을…….”

유진이 마시던 물을 뿜었다.

딸이 갑자기 물을 뿜자 아버지인 홍문헌은 놀라기 앞서 그녀가 왜 그랬는지 살폈다.

유진이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것을 보며, 홍문헌의 눈에도 무언가 깨달음이 서렸다.

“하.”

그 깨달음은 곧 부정적인 감정으로 바뀌었다.

홍문헌이 성필을 노려보았다.

“사적인 장점?”

“아, 아니, 오빠야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말할 수 없는 장점이 대체 뭐지?”

“여러 가지 있잖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그, 그거……!”

“그거어……?”

홍문헌의 목에 핏줄이 섰다.

눈에 핏발까지 섰다.

홍규헌은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함을 느꼈다.

“여보.”

그런데 그때, 아내가 가만히 남편의 등을 쓸었다. 남편이 쳐다보자 아내가 싱긋 웃었다.

“뭐 어때서 그래요? 우리도…….”

“아 언니!”

홍규헌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서 그녀를 말렸다. 도와주는 줄 알았는데 기름을 들이붓고 있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 아니야!”

그리고 홍문헌이 급히 부정했다. 그는 주방 벽면에 걸린 십자고상을 보며 또 말했다.

“아니라고!”

그리고 동생을 보며 말했다.

“네 새언니가 실언한 거다. 아니야!”

“여보 언제까지 이러려고요? 저희 유진이한테도 이럴 거예요? 신부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저희…….”

“그만!”

홍문헌이 발작하듯 외치자 아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주방을 밝힐 듯 싱그러운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홍문헌은 물을 벌컥이더니 딸을 보았다.

딸이 자기 엄마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홍문헌은 얼굴이 벌게져선 급히 심호흡했다.

“실언이다.”

그가 말했다.

“아니, 허언이다.”

그가 성필을 향해 말했다.

“알겠나?”

“네…….”

보건대, 의외로 홍문헌은 권위 있는 가장(家長) 타입이 아닌 듯하다.

성필은 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대화 주제를 돌렸다. 성필이 보기에 수제비처럼 생긴 것을 포크로 집어 먹었다.

감칠맛과 단맛이 났다.

“맛있네요. 이 요리 이름이 뭔가요 사모님?”

“몰라요.”

아내가 턱을 괴었다.

“제가 만든 게 아니라서요. 만든 사람이 주방에도 못 들어오게 했어요.”

아내는 남편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남편은 시선을 피했다.

“맛있죠?”

* * *

식기세척기가 규칙적인 소음을 내뱉으며 본인에게 주어진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홍규헌은 식탁에 기대어 식기세척기 안의 물 맞는 식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가 기댄 식탁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올라왔다.

“마셔.”

홍문헌의 아내인 은정이었다.

“고마워요 언니.”

둘은 함께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벽난로의 불을 바라보듯 식기세척기 안을 보았다.

“그거 진짜예요?”

“어떤 거 말이야?”

“혼전(婚前)…… 했다는 거요.”

“내 여보야가 실언이고 허언이래.”

“둘은 같이 쓰일 수 없는 단어잖아요.”

“그치. 상상하는 재미가 있지 않아?”

“상상이 안 가요. 오빠야는 진짜 절제의 화신 같은 건데.”

홍규헌은 홍문헌이 수능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존경심이 든다.

해도 안 뜬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며 밥을 먹고, 돌아와선 눈을 비비며 새벽이 될 때까지 공부하다가 잤다.

그 안에 그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홍문헌은 그 지옥을 견디며 ‘집안을 위해, 부모님을 위해’라고 말했었다.

물론 지금이야 그때의 오빠가 존경스럽다.

당시에 홍규헌은 오빠가 미웠다. 그깟 공부가 뭐라고 어머니의 병문안 한 번 오는 것도 힘들어했는지.

병원을 학교처럼 갔던 홍규헌으로선 오빠가 너무너무 매정해 보였고, 또 미웠었다.

“집안사람들은, 특히 네 오빠들이 하는 말 신경 쓰지 마. 원래 부조리를 당한 사람들은 그 시절을 미화하고 합리화하잖아. 안 그러면 부조리를 견뎌냈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이거든. 마음껏 사랑해.”

“……언니.”

“응.”

“저는 가족한테 인정받고 싶어요. 가족들이 밉기도 하면서, 저를 사랑해주길 바라요. 사랑도 제 마음대로 못 하는 제가 한심스럽기도 하면서, 저는 거기서 만족감을 느꼈어요.”

은정은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다른 모든 데선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나마 집안의 규칙을 지키는 한에선 저는 저희 집안의 일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젠 마음이 바뀌었어? 사랑이란 건 참 대단하다, 그치? 공포를 넘어서게 만들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에 집안의 규율을 벗어날 마음을 먹게 됐다.

은정은 홍규헌의 마음을 그리 파악했다.

홍규헌은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답할 뻔했다. 성필과 자신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누군가 농담 삼아 오해할 때마다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선 그러면 안 됐다.

‘재벌집 막내딸 데릴사위가 되었다’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좋은 사람 같아.”

“박 이사요?”

“응. 난 사람 보는 눈이 좋아. 그래서 네 오빠가 결혼하자고 했을 때 바로 했지.”

“오빠야는 좋은 남편이에요?”

“넌 믿기 힘들겠지만, 맞아.”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홍문헌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버지에게 배우지 못한 것이니, 스스로 알아내야만 했다.

“침실보다 헬스장을 좋아하는 걸 빼면.”

둘이 나지막이 웃었다.

홍규헌의 웃음이 먼저 멎었다.

“오빠야가 박 이사를 마음에 들어 할까요?”

그리 말한 홍규헌은 인지부조화를 겪었다.

성필은 분명 자신의 연인이 아닐 텐데, 굉장히 자연스럽게 연인인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굉장히 자연스럽게 연인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인정받고 싶어요.”

“네가 남자 보는 눈이 있다는걸?”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홍규헌은 또 ‘아니’라고 말할 뻔했다. 성필을 인정받고 싶다, 라고 순간 떠올렸던 듯하다.

아까부터 배역에 너무 몰입했다. 연애 흉내더라도, 연애 비슷한 게 오랜만이라 그런 걸까.

“네. 제가 보는 눈 있단 걸요.”

“남자들은 우리 여자들한테 고마워해야 해. 없는 장점도 만들어서 봐주잖아.”

“……네?”

“공감 안 해? 아이돌 좋아하는 것도 여자들이 더 빠지잖아. 직접 보지 않은 장점을 상상해서 여백을 채우고, 그 환상을 사랑해.”

“아…….”

돌판에 그런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긴 하다.

착즙이라고 한다. 있지도 않은 장점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덕질한다는 뜻이다.

다른 아이돌을 까고 싶을 때 주로 사용한다. 쟤를 뭐가 좋다고 빠냐? 이렇게 말이다.

은정은 여자의 사랑을 그리 표현했다. 환상을 사랑하는 거라고 말이다.

“내 남편한테 내 장점 말해보라고 하면 두세 개는 댈까? 나는 수백 개도 말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은정이 표현하는 환상은 환상이 아닌 듯하다. 그녀에겐 진실로 홍문헌의 장점이 수백 개 있는 것이다.

“남자들…… 자기가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줄 알아. 그걸 말하면서 자랑스러워하고. 네 오빠도 그런 편이야.”

“알아요. 이거 알아? 저거 알아? 그게 맞아? 그게 옳아? 아닌데? 고개 끄덕여 줄 때는 자기가 유도해낸 답을 말할 때밖에 없어요. 분하게도 거의 다 맞는 말이고요.”

“이번에는 안 그럴 거야.”

“……이번에는, 뭘요?”

“네 오빠. 직접 요리까지 했잖아.”

식기세척기가 다 돌아갔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던 거야.”

“그렇다기엔…….”

“식탁 위에서 너무 별로였지? 이해해줘. 만나는 사람이 다 자기 아랫사람이니 오죽하겠니.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인간이 지구에 하나뿐인데.”

홍규헌의 얼굴에 의외의 빛이 비쳤다.

“오빠야가 직접 말했어요?”

“응. 대체 내 동생이 뭐 때문에 그 남자를 만나는지 직접 봐야겠다고 하더라.”

그건 딱히 ‘장점을 찾겠다’는 뜻이 아니지 않나?

“최소한 시작부터 호감도가 마이너스를 찍고 마주하진 않겠단 거야.”

“…….”

“신경 쓰이지?”

“뭐어…….”

“엿들으러 가자!”

“네?”

“나도 계속 궁금했어! 가자!”

은정이 홍규헌의 손목을 붙잡고 2층으로 조용히 올라갔다. 홍규헌은 오빠야의 서재로 다가가는 내내 심장이 벌렁거렸다.

홍규헌이 뒤늦게 그녀의 손을 털어냈다.

“엿듣다뇨! 그러면 안 돼요!”

“왜?”

“왜냐뇨…… 엿듣는 건 나쁜 일이니까…….”

“엿듣지 말라고 한 적 없는데? 평소에 내가 제집 드나들 듯 들어가는 곳인데? 아, 내 집 맞지. 그러니까 괜찮아. 주인이 허락할게.”

은정이 다시 홍규헌을 붙잡고 계단을 올랐다. 이번엔 홍규헌도 거절하지 못했다.

“식기세척기…… 다 돌았는데…….”

이런 의미 없는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재 문 앞에 도착했다. 안엔 성필과 홍문헌이 ‘남자의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둘이 문에 귀를 대고 엿들었다.

성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과 저는 영원히 함께일 겁니다.”

은정이 무언의 비명을 터뜨렸다. 그리고 홍규헌의 어깨를 마구마구 토닥였다. 홍규헌도 소리 없이 소리치며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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