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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93화 (693/760)

693화

회사로 돌아가는 동안 홍규헌은 말이 없었다.

핸들을 붙잡은 그녀의 눈에는 형용할 길이 없는 감정들이 몰아쳤다. 조수석의 성필은 조신하게 무릎 위에 손을 두고 입을 다물었다.

“박 이사, 사장실.”

“예.”

홍규헌은 급한 걸음으로 회사로 들어갔다.

들어오고 몇 걸음 안 가 웨이퍼센트 담당 매니지먼트 2팀 팀장이 된 유하음이 나타났다.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유 팀장. 고생해.”

“넵. 와, 성필이 너 돌아왔구나.”

“할 일 끝냈으니까 뭐…….”

“소련이들 미주 콘서트까지는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총괄 프로듀서다. 우리 애들 컴백 맞춰서 와주니 나도 우리 애들도 면이 산…….”

“유 팀장, 나중에.”

홍규헌의 싸늘한 명령에 유하음이 바짝 얼어붙었다.

“마, 말씀하신 대로…….”

대답도 이상했다.

홍규헌은 복병을 물리치고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2층에 도달하자마자.

“사장님!”

한구인이 혼비백산하여 홍규헌에게 달려왔다.

“아, 한 이사님 안녕하…….”

한구인이 홍규헌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렸다.

“사장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충성했잖습니까! 홍 씨 일가에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어째서!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저를 제발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하, 한 이사님……?”

“끄어, 끄어허, 제발, 제바알…….”

한구인은 거의 혼이 나가 있었다. 홍규헌에게 매달려서 ‘살려달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

홍규헌은 다리를 살짝 움직여 그의 손을 떨쳐냈다. 한구인의 얼굴이 좌절로 물들었다.

“즈, 증명하겠습니다. 뭐든지 좋으니까 시켜주…….”

“그런 거 아니야. 오빠야한테 무슨 말을 들었든 사실이 아니고, 내가 지켜줄 테니까 안심하고 기다려.”

“아흐윽…….”

성필은 점점 더 두려워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사장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재빨리 책상으로 달려가 서랍에서 술을 꺼냈다. 병째로 몇 모금을 들이켠 그녀는 그제야 눈동자가 맑아졌다.

“사장님, 무슨 일이…….”

“오빠야한테 초대받았어.”

“예? 아, 그쵸…….”

성필은 홍문헌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홍규헌과 같이 가기로 했다.

“오빠야는…… 내가 너랑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부정한 일이요?”

“아.”

홍규헌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사귀는 줄 안다고.”

“네? 아, 그래요……?”

“뭘 부끄러워하고 있어?!”

홍규헌이 손을 벌벌 떨면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힘겹게 불을 붙여 깊이 빨았다.

“우리 집은 천주교야.”

알고 있었다.

십자고상 목걸이와 묵주를 가지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지.

“집이 좀 보수적인가요?”

“그냥 보수적인 게 아니야! 우리 집은 로마 교황청 교황 직속 추기경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추기경보다 보수적이야!”

“근데 담배는……?”

“신약 성경 쓰일 때 담배는 없었으니까!”

“술은……?”

“넓게 봐서 예수님의 피야!”

“과음…….”

“성경은 박 이사보다 내가 백 번은 더 읽었으니까 태클 걸지 마 나 진짜 심각해! 아까 한 이사 그러는 거 못 봤어?”

“봤죠…….”

“우리 오빠야한테 연락받은 거야!”

“그, 으, 사장님은 연애도 마음대로 못 하시나요……?”

드디어 성필도 홍규헌처럼 심각해졌다.

“연애? 할 수 있지. 그런데 어떻게 증명해?”

“뭘요?”

“우리 집 사람들, 오빠야들이랑 언니야 전부 혼전순결을 지켰어.”

“…….”

“우리 오빠야들 결혼 언제 한 줄 알아? 하나도 빠짐없이 20대 초반에 전부 했어. 왜 그랬겠어? 혈기를 못 참은 거야. 결혼을 해야만 그거, 그거……!”

“손으로 표현 안 하셔도 돼요.”

“결혼 해야만 그거 할 수 있으니까! 속일 수가 없어! 감시하니까!”

“네?!”

그건 진짜 소름 돋는다.

아무리 그래도 감시라니.

그럼 홍규헌도 감시받는 건가? 성필이 물으니 홍규헌이 단답했다.

“한 이사.”

“…….”

…….

“……!”

“그래, 한 이사가 감시자야. 내 형제자매 전부 한 이사 같은 친구가 있어. 우리 아빠가 직접 고르고 고른 친구. 심지어 내 둘째 오빠는 그 친구랑 결혼했어.”

“손나(그런)…….”

“내 옷 봐!”

봤다.

정장이다.

“무슨 1년 내내 상 치르냐?!”

“저, 저는 영락없이 사장님이 정장의 매력을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

“나도 원피스 입고 싶어! 스키니진 입고 싶어! 귀여운 옷 입고 싶어! 우리 애들처럼 입어보고 싶다고! 근데 못해! 바디 프로필이 내가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일탈이었어!”

“그래서 그렇게 목숨을 거셨던 거군요…….”

“큰 오빠야도 찍은 적이 있으니까! 그래, 그랬던 거야. 그랬던 거라고…….”

홍규헌은 힘을 잃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성필은 쭈뼛거리다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냥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되잖아요?”

“박 이사, 나 연애한 적 있어. 대학 때. 근데 일주일도 안 돼서 헤어졌어.”

“왜요?”

“오빠야가 걔를 죽이려고 했거든.”

“하하.”

“진짜 죽이려고 했다고!”

“손나(그런)!”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둘러싸고 ‘네 대가리는 철모냐?’라고 물으면 안 헤어지겠어? 안 도망가겠냐고?! 덕분에 난 인생 제일 꽃다운 나이에 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었어! 도서관 집 학교만 반복해서 다녔어! 그런, 그런, 그런 사람한테, 오빠야한테, 박 이사가 초대받은 거라고…….”

“……드디어.”

홍규헌은 성필을 쳐다보았다.

“드디어 모든 퍼즐이 풀렸네요.”

“……무슨 퍼즐?”

“사장님이 술과 담배에 집착하시는 이유요. 사랑할 수 없으니, 다른 대안을 찾아내신 거였어요. 그럼 사랑할 수 있으시면 담배와 술도 끊으실 수 있으시겠네요.”

“뭔 개소리야?”

“사실 오지랖 같아서 말씀을 계속 못 드렸는데, 사장님 건강을 걱정했어요.”

“…….”

홍규헌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말했다.

“박 이사 머리는 철모야? 총 맞아도 안 뚫려? 왜 심각성을 못 느끼지?”

“요컨대, 형님께 인정받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단 뜻이잖아요.”

“누가 박 이사 형님이야.”

“남자의 대화로 오해를 풀게요. 걱정 마세요. 당당히 한 명의 남자로서 인정받을 테니까요.”

홍규헌이 서랍에서 리볼버를 꺼내어 성필을 겨누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장난감 보고도 놀라는데 진짜를 보면 버티겠어?”

홍규헌이 ‘웨스턴 불렛’의 주인공인 시세리처럼 총을 빙글빙글 돌렸다.

“안 봐도 뻔해. 오빠야네 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론, 박 이사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은 화상회의 프로그램 안에서뿐이겠지. 미리 많이 봐둬야겠네.”

“걱정하지 마세요. 저에겐 놀라운 능력이 있어요.”

“박 이사의 말빨도 오빠야한테는 안 통해. 박 이사를 ‘내 동생 등쳐먹어서 신분 상승을 노리는 기생오라비’로 확정 지었을 거야. 그냥 가서 적당히 고개만 끄덕여줘,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게…….”

“……그런데, 홍문헌 사장님께서는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셔서 뭘 하시려는 걸까요? 가면 감금돼서 콘크리트에 담기진 않겠죠?”

“일단 물어보겠지. 나랑 어떤 사이인지.”

“음…… 뭐라고 대답할까요?”

“뭘 고민해. 사장이랑 부하 직원이지.”

“음…….”

“그니까 뭘 고민하냐고?!”

“그 설명은 부족해요.”

“뭐?”

“꿈을 공유하는 관계.”

성필이 소년처럼 해맑게 웃었다.

“같은 꿈을 향해 나아가는 관계. 그리고 그 꿈속에서 영원히 함께할 사이. 이게 옳은 표현이에요.”

“그러면 박 이사는 진짜 죽을 거야. 아니, 박 이사, 제발, 장난 그만치고…….”

홍규헌이 애원했다.

“만약 오빠야가 만족 못 하면, 가족 전체에 박 이사에 대해 떠벌리고 다닐 거야. 그럼 이후에 일어날 일은 불 보듯 뻔해. 박 이사를 떨어뜨려 놓을 거야. 회사에서 잘라내든, 새로 건물을 줘서라도 떨어뜨릴 거라고. 그리고 한 이사는 어떻게 될지 몰라. 제발…….”

“저기…….”

“어, 물어봐. 전략 짜자고?”

“오지랖인 건 아는데, 그 가풍(家風)을 지키는 게 중요한가요?”

“너 무슨 말을……!”

“저는 가족이 없어서…….”

홍규헌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성필이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그, 가족 사이의 규칙? 같은 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건지 잘 몰라서. 그런 걸 알기 전에, 그니까 철이 들기 전에 그게…….”

“됐어, 그만해. 내가 미안해.”

홍규헌은 한숨을 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

…….

“생각해보니까 화나네?”

“네?”

“내가 왜 그 규칙을 지켜야 해? 내가 뭐 아쉬울 게 있어서? 내가 아빠한테 받을 게 있어 뭐가 있어? 그야 아빠 이름 팔아서 투자금을 모으긴 했지만, 전부 상환하고 은행에 빚도 없는데. 이젠 이 회사가 다 내 건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오빠야 언니야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사장님……?”

“맞아, 그래. 난 착각하고 있었어.”

홍규헌이 천장을 보았다. 그건 마치 계시를 얻은 선지자가 하늘을 보고 기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정한 규칙이 아니야. 내가 원해서 따른 게 아니야. 그걸 어긴다고 비윤리적인 게 아니야. 그걸 따른다고 윤리적인 게 아니야. 그냥 말 잘 듣는 애완견이잖아. 맞아, 내가 미쳤지!”

홍규헌이 벌떡 일어났다. 아까 들이켠 술기운이 올랐는지 얼굴이 벌겋다.

“조선 시대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따르던 여자들이 윤리적 인간이었나? 아니야! 삼종지도는 여자가 만든 게 아니야! 여자들이 지키고 싶어서 지킨 게 아니야! 그걸 따른다고 윤리적인가? 아니지! 그 사회 내에서 그렇다고 판단할 뿐이지, 전혀 아니었어! 아, 맞아, 드디어 모든 퍼즐이 풀렸어. 고맙다 니체……. 마침내 망치를 들 때가 왔어…….”

홍규헌이 책상을 돌아 성필의 앞으로 다가왔다. 성필은 그녀와 마주하며, 아까까지 그녀가 홍문헌에 대해 설명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공포를 느꼈다.

홍규헌이 무슨 결론을 내릴까 두려웠다.

“박 이사.”

“네, 넵.”

“그냥 저질러버릴까?”

“네……?”

“이참에 모든 사슬을 끊어버리자.”

성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약 2초의 고민 끝에, 성필이 조신하게 팔로 몸을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저, 저는 우리 애들과 연애 금지 맹약을……!”

“내가 박 이사를 지켜줄게.”

“하지만 저는, 그치만 저에겐 약속이……!”

“오빠야가 해하려고 해도 절대 못 하게 둘 거야. 정말 만약 신변의 위협을 받으면 그냥 내 집에 와서 살아. 내 집까지 뭔 짓을 하진 않을 거 아냐.”

“여긴 프랑스가 아닌데에……!”

“편견을 부술 거야, 도와줘.”

“……편견을 부숴요?”

홍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필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되물을 의지를 잊었다.

홍규헌은 희망에 차 있었다.

인생에 그늘을 드리우던 거대한 천막을 벗겨낼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그녀의 눈동자엔 미래를 향한 짙은 의지가 느껴졌다.

“아예 태연하게 나가자. 정말 연인인 것처럼. 오빠야 속을 박박 긁고 선언하는 거야.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한다고!”

“……그러니까, 제가 사장님 연인 행세를 하라는 건가요?”

“맞아.”

“별로 안 좋은 생각 같아요. 그냥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빠분 앞에서 닥치고 있는 편이 좋을 거 같아요.”

성필이 뜬금없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홍규헌이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밝은 내일을 향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빠야에게 빼앗긴 청춘의 가장 희망찬 날들을 늦게나마 되찾을 생각으로 가득했다.

홍규헌이 반짝이는 눈망울로 성필을 올려다보았다.

“박 이사, 안 도와줄 거야? 내 부탁인데?”

“…….”

“오빠 앞에서 키스하자거나 그런 짓은 안 해.”

“안 하는 건가요.”

“그냥 심리적 저항선을 낮추자는 거야.”

“예를 들어?”

“내가 남자 보는 눈이 있단 사실을 알려주는 거지. 오빠야는 아직도 내가 장롱에서 떨어져서 머리에 유리가 박힌 유치원생이라고 생각하니까.”

“……?”

“내가 박 이사를 완전히 오빠야 취향으로 바꿔줄게.”

“사장님 말씀이 이상해요.”

“작전이야. 작전이라고. 작전명은…….”

재벌집 막내딸 데릴사위가 되었다.

“박 이사, 부탁해. 내 잃어버린 청춘을 지금이나마 되찾을 수 있게 해줘.”

“…….”

성필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쇼가나이나(어쩔 수 없구만).”

재벌집 막내딸 데릴사위가 되었다 작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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