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92화 (692/760)

692화

HPT 미디어 산하에는 수많은 사업부가 존재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화, 드라마, 음악, 뉴미디어, 연극, 애니메이션, 광고 등등.

그중 요즘 가장 큰 변화를 겪는 건 음악 사업부였다. 규모 확대에 힘입어 부서 명칭도 음악 사업 본부로 바뀌었다.

무엇이 바뀌었으며 무엇이 확대되었느냐.

바로 음반사, 즉 기획사를 소유하게 되었다. 인수한 기획사가 두 개이며, 따로 만들 기획사가 하나 예정되어 있다.

“양창환입니다…….”

곧 HPT 미디어 음악 사업 본부 산하 기획사의 대표가 될 인물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홍문헌은 앉으란 뜻으로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양창환은 그 손짓만으로도 황송하단 듯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의자로 와 앉았다.

“창환 씨?”

“예!”

양창환은 생애 다신 없을 수준으로 긴장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원래 양창환이 상대했던 인물은 음악 사업 본부 중에서도 ‘음반 사업부’의 부장급 인물이었다.

그 부장을 마주할 때도 손이 발이 되도록 비비면서 비위를 맞추어주었건만, 그보다 훨씬 높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음반 사업부장보다 높은 음악 사업 본부장보다 높은…….

‘HPT 미디어 사장…….’

양창환은 이곳에 들어와 처음 홍문헌과 마주했을 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인터넷으로 얼굴을 검색해보아서 그런 걸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홍문헌의 얼굴은 배우 같았다. 매우 잘생긴 30대 남자 배우를 연상시켰다.

그런 홍문헌이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커다란 집무실에 앉아 있으니, 드라마에서 많이 본 재벌 캐릭터처럼 느껴졌다.

양창환은 자신이 드라마의 엑스트라 캐릭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주연은 자신의 앞에 있는 홍문헌이다.

“계약 성사 축하드립니다. 이제 대표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아, 아닙니다! 부르시던 대로…….”

그리 말한 양창환이 이상함을 눈치챘다.

애초에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데 ‘부르시던 대로’라니. 그러면 계속 ‘창환 씨’라고 불러야 하지 않은가.

“마침 저희 사(社)에 발걸음하셨다고 들어서, 바쁘실 텐데도 불구하고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기획사를 차릴 수 있도록 돈을 대주는 인물이다. 그가 바란다면 밤 10시 그의 집으로 달려가 빨래도 대신해 줄 수 있다.

“다름이 아니라, 여쭐 게 있습니다.”

“예,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 대답해드리겠, 드리겠습니다!”

“저는 음반 산업을 잘 모릅니다.”

그럴 것이다.

HPT 미디어에 음반 사업부가 생긴 건 극히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홍문헌이 관여하는 사업 분야만 해도 열 개가 넘을 지경이니, 한 영역을 모른다고 하여도 어찌 흠이 되겠는가.

“그래서 여쭈고 싶은 건, 소녀연맹 같은 아이돌을 만들기 힘든 겁니까?”

“…….”

양창환은 잠시 그가 한 말을 되새김질했다.

그러니까, 소녀연맹 같은 아이돌을 만드는 게 힘든 거냐고?

“아, 아…….”

양창환이 절망했다.

‘이, 이 인간, 나한테 소녀연맹급 아이돌을 만들라고 강요하는 건가? 나한테 기대하는 게 그 수준인 건가?!’

말도 안 된다.

양창환은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 작곡가이자 뮤직 디렉터로 살아온 세월이 벌써 십수 년째다.

드디어 아이돌을 제작하여 자신의 아티스트십을 펼칠 기회를 얻었는데, 설마 투자자가 기대하는 수준이 소녀연맹이라니.

양창환은 필사적으로 말을 골랐다.

“그, 정확히, 상황이 어떤 건지…….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야 하는 건지…….”

“어떤 조건을 설정하여도 괜찮습니다. 이쯤이면 만들 수 있겠다, 그렇게 답하셔도 됩니다.”

“……설령.”

“설령?”

“제가 5년 뒤의 과거로 돌아가도, 못 만듭니다.”

홍문헌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시간여행까지 고려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 아, 그게, 엔터업의 불확실성을 설명해드리려는 거였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만한 성공을 만들 수 있는 건……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소녀연맹은 무엇입니까? 기적?”

“기적이라고 봐야겠지요.”

“100억이 있어도 못 만듭니까?”

양창환은 목구멍이 턱 막혔다.

‘뭐지? 나 혹시 웹소설 주인공이 된 건가?’

정말 제작비로 100억을 주려는 건가?

아닌데.

음반 사업부장은 트레이닝 단계까지 2억, 이후 데뷔 프리 프로덕션에서 5억을 추가로 지급하겠다고 했었는데…….

양창환은 침을 꼴깍 삼켰다.

대답을 잘해야 한다.

“배, 100억이든 1,000억이든 똑같습니다. 이 일은 투자한 만큼 대가가 돌아오는 일이 아닙니다. 정직한 일이 아니에요.”

“그럼 뭐가 가장 중요합니까?”

“운입니다.”

“그렇다면.”

홍문헌이 등을 의자에 더 깊이 묻었다. 의자가 뒤로 기울며, 홍문헌의 시야가 아까보다 낮아졌다.

자신을 향한 그의 시야가 낮아지자, 양창환은 그의 시야를 따라 몸을 굽히고 싶어졌다. 감히 그보다 시야가 위에 있으면 안 될 듯했다.

“어떻게 투자받으신 겁니까? 운이 좋은 걸 증명하셨습니까? 주사위를 세 번 던져서 모두 6이 나오기라도 한 겁니까?”

“아, 그게, 아…… 아! 레버 레코드 아십니까?”

“압니다. 글로벌 3대 유통사 중 하나.”

“그럼 ‘레이나’라는 가수를 아십니까?”

“모릅니다.”

“레버 레코드는 그녀의 제작비로 50억을 투자했습니다. 프로모션에만 30억을 썼습니다. 그런데 앨범은 일주일 동안 고작 1,000장이 팔렸고 6개월 후 레버 레코드는 그녀와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홍보에만 30억을 썼다고 한다.

과장을 보태자면, 그 돈이 있으면 서울의 모든 버스 전광판에 그 ‘레이나’라는 가수의 얼굴을 걸 수도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 광고도 몇 번이나 내보낼 수 있다.

그런데 앨범을 고작 1,000장 팔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록밴드 너바나를 아십니까? 너바나의 음반사 사장은 자기네 회사가 너바나와 계약했는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까 너바나는 슈퍼스타가 되어 있었고요. 예, 거의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은 겁니다.”

홍문헌의 표정이 오묘해지자 양창환의 얼굴은 역으로 밝아졌다.

“상식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업계입니다. 글로벌 3대 유통사라고 하면, 굉장히 철저하게 아티스트들과 계약할 것 같지 않습니까? 온갖 전문가들이 모여서 검토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발매하는 앨범 10장 중 수익을 거두는 건 고작 한 장입니다. 그 한 장이 9장의 손해를 메꾸는 구조입니다.”

“성공을 인위적으로 만들려면 시행 횟수를 늘릴 수밖에 없다…….”

“그겁니다!”

홍문헌은 양창환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창환은 홍문헌을 가르치는 말투였다.

그렇지만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그럼, 또 이상하군요. 한국의 아이돌 기획사들은 어떻게 계속 성공하는 겁니까?”

“계속 성공하는 거라기보다, 성공하니까 3대 기획사가 된 거라고 봐야겠죠. 자연선택은 자본주의에도 적용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연선택의 과정에 있는 저희들은 과정을 결과로 보…….”

이젠 자연과학 지식까지 가르치려는 건가.

홍문헌이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양창환이 급히 입을 닫았다. 그리고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그, 한국 기획사들이 내는 아티스트마다 성공을 구가하는 건 그으…… 능력이 입증된 프로듀서가 계속 전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해외에도 그런 프로듀서들이 있습니다. 프로듀서가 음반사의 전권을 가지는 형태는 우리나라가 특이한 겁니다만, 퀸시 존스라거나…… 있습니다, 예…….”

“프로듀서가 대단한 거다?”

“예, 일정 부분은…….”

“그렇다면 가로 엔터의 프로듀서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가로 엔터는 계속 성공한다는 뜻입니까?”

“…….”

양창환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3대 기획사의 성공엔 관성이 있습니다. 거듭된 성공이 신화를 만들어서…… 그러니까, 브랜드 가치를 지니게 된 겁니다. 그 기획사들이 데뷔시키는 아이돌엔 아이돌 자체의 매력만이 아니라, 기획사의 후광이 붙습니다. 회사 자체에 팬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통계적으로, 한 기획사가 다음에도 히트를 이어갈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3대 기획사들이 거의 유일한 예시일 정도로…….”

“그러면 가로 엔터는?”

그제야 양창환은 홍문헌의 심정을 눈치챘다.

최근 HPT 미디어는 기획사 두 개를 인수하여 산하에 두었다. 가로 엔터도 물망에 오른 게 틀림없다.

프로듀서로서의 관점을 듣고 싶어서 양창환을 이곳에 부른 게 틀림없다.

“예, 확률적으로 소녀연맹 이후에도 성공하기란 극히 어려울 겁니다.”

“소녀연맹만 한 성공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순 없습니까? 이미 그 성공을 만든 프로듀서가 있잖습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셋입니다.”

“누굽니까?”

“KS 엔터, SMS 엔터, YJS 엔터의 대표 프로듀서들입니다.”

케이팝의 전설을 써온 이들에게 배팅해야만 그나마 확률이 생길 것이다.

“적어도 가로 엔터와 같은 환경에서 소녀연맹을 인위적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기적이니까, 역사상 단 한 번뿐입니다. 설령 소녀연맹의 프로듀서라도, 같은 성공을 만들어내진 못합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그러한 곳이니까.

가로 엔터는 이제야 겨우 기지개를 켠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 숱한 실패와 고난을 맛보고서, 그러고도 살아남는다면 대형 기획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지.

홍문헌은 그 답을 듣고 손에서 펜을 굴렸다.

“소녀연맹의 프로듀서 이름을 압니까?”

“아, 예. 박성필 프로듀서입니다.”

“가로 엔터는 6년 차 보이그룹인 웨이퍼센트를 영입하고, 그 이후 또 차기 그룹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시기상으로 그럴 것 같긴 한데…….”

“어떨 것 같습니까?”

양창환은 심장이 아까보다 더 쿵쾅댔다. 어쩌면 이 답으로 홍문헌이 가로 엔터 인수를 결심하거나, 아예 마음속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으리라.

그러다가 수틀리면 양창환에게 화풀이를 하진 않을까 걱정됐다.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 높은 답을 고르는 수밖에 없다.

“차기 그룹은…… 그래도 3년 후엔 이익을 내는 그룹으로 성장할 겁니다. 아무래도 소녀연맹의 동생 그룹이란 이름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웨이퍼센트는 이전과 다름없이, 큰 반향을 얻지 못할 겁니다. 영입에 돈을 얼마나 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계약이 끝날 때까지 손해는 메꾸지 못할 겁니다.”

“그럼 왜 웨이퍼센트를 영입한 겁니까?”

“회사의 교섭력을 올리려고…… 인 것 같습니다. 보유한 뮤지션의 수가 곧 회사의 정치력이 되니까요…….”

그것도 애매하긴 하다.

가로 엔터가 웨이퍼센트를 영입한 저의가 애매하단 게 아니다. 웨이퍼센트를 영입한 목적이 애매해졌다.

회사의 교섭력을 올리려고 했으나, 그럴 일은 없으리라.

요즘 업계에 소문이 파다하다.

거인들이 가로 엔터를 견제하기 시작했다고 말이다.

‘소녀연맹에겐 직접적으로 어쩌지 못하겠지만.’

그 차기 그룹들까지 안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웨이퍼센트를 영입해봤자 뭐 어쩌겠는가. 오히려 그 행동이 다른 이들의 심기를 거스른 꼴일 것이다.

즉, 가로 엔터는 전략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양창환은 홍문헌의 물음에 착실히 답하길 이어갔다.

“아, 아마 웨이퍼센트는 소녀연맹을 위한 발판에 불과할 겁니다. 회사의 힘을 키우는 게 최종 목적이니, 웨이퍼센트 개인은 크게 주목받지 못할 거라…….”

“분기 순익.”

“예?”

“분기 순이익 100억을 달성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앞으로 두세 분기는 낼 수도 있을 겁니다. 지속적이진 않겠지만요. 소녀연맹의 월드 투어가 있는 해에…… 낼 수도 있을 듯합니다.”

“소녀연맹이 해체할 때까지 손에 쥐는 돈이 몇백억…….”

나쁘진 않다.

소녀연맹이 해체할 때까지 굴려도 HPT 미디어의 1분기 영업익보다 낮은 돈이겠지만. 그래도 바닥에서 시작한 것치고는 대단한 성과가 아닌가.

홍문헌은 동생 홍규헌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뤄낸 건지, 피부로 체감할 수 있게 됐다.

‘그래, 대단한 거구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제 들을 건 다 들었다.

양창환을 내보내려던 순간.

“그으.”

그가 힙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의 일인데……. 정말 만약일 뿐이지만, 웨이퍼센트가 전보다 성공하고 차기 그룹도 성공을 이루면, 가로 엔터는 지금보다 훨씬 거대해질 겁니다.”

“……고작 그룹 두 개가 더 잘됐을 뿐인데도 말입니까? 그 두 개 그룹이 소녀연맹 수준으로 성공했을 때의 일입니까?”

“아, 아니요. 다른 그룹들이랑 비교해서 두각을 나타내는 수준만 되어도 괜찮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다른 사업이란 또 다른 점은 이미지가 중요하단 점입니다.”

“그건 모든 사업이 같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요.”

홍문헌의 눈썹이 꿈틀했다.

“훨씬 더?”

“SMS 엔터와 YJS 엔터는 KS 엔터보다 영업 이익이 2배, 3배씩 꾸준히 낮습니다. 그런데도 시가 총액은 엇비슷합니다. 이미지 덕분입니다. 이미지가, 세 회사를 동급으로 취급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 만약 가로 엔터가 연달아 성공을 만들어낸다면…….”

그리하여 상장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훨씬 더 거대해질 겁니다. 인수하는 게 불가능해질 수준으로 커질 거예요. 그, 그렇지만 정말 만약의 일, 기적 같은 확률의 일이라서 말씀드리기도 죄송한데…….”

“인수?”

“예?”

“무슨 말입니까?”

“아…….”

양창환은 감탄했다.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거구나.’

확실히, 홍문헌쯤 되는 사람의 의견은 그 자체로도 힘과 가치를 지닌다. 쉽사리 사견을 표출하지 않으려는 자세에선 확실히 재벌의 품격이 느껴졌다.

양창환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아닙니다…….”

양창환이 나가고, 홍문헌은 나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가만히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그는 갑자기 실없이 웃었다.

‘기적 같은 성공이라 이거지…….’

홍규헌, 그 철부지 동생이…….

* * *

홍문헌은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맞은편의 홍규헌이 이어서 도장을 찍었다.

“직원들 고용은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거고, 내가 해왔던 복지도 그대로 유지해주는 거지?”

“걱정 마라. 계약서에 다 적혀 있지 않나.”

“오빠야 입으로 듣고 싶어서 그래.”

“약속한다.”

“……고마워.”

홍규헌이 뺨을 살짝 붉히며 감사를 표하자, 홍문헌은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이젠 정장도 퍽 잘 어울린다.

‘장롱에서 뛰어내리는 걸 놀이랍시고 하다가 책상에 머리를 박아서 유리 조각이 여기저기 박혔었지.’

홍규헌이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이었다.

홍문헌은 그걸 보고 대경실색하여, 운전수를 부를 생각도 못 하고 홍규헌을 안아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병원에 도착하고 지혈하려 그녀의 머리에 감싸둔 수건에 배어 나온 피를 보고선 어찌나 놀랐던지.

그 사건 때문에 홍규헌의 머리엔 아직도 흉터가 남아 있다. 머리카락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말이다.

‘그 철부지가 기적 같은 성공을…….’

아버지가 주신 유일한 선물인 제지 공장을 판다기에 나쁜 일이 벌어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성공 가도만 달려가고 있다니.

‘하긴, 상장하지 않았으니 자금을 확보할 방법이 가진 걸 파는 것뿐이겠지. 이 녀석 성격은 은행에 목줄 잡히는 걸 좋아하지도 않겠고.’

손에 쥐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필요할 땐 놓을 수도 있는 녀석이었나.

아니면, 이젠 그만큼 성장한 것일까.

홍문헌과 홍규헌은 서류를 나누어 가졌다. 변호사가 계약이 완료되었음을 선언하고,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나 악수했다.

홍규헌은 오랜만에 잡는 오빠의 손이 영 어색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홍문헌은 그걸 보고 또 과거를 떠올렸다. 그가 군대에 갈 때였다.

‘몇 년 만에 포옹해줬더랬지.’

그때도 지금과 비슷한 표정이긴 했으나, 잘 다녀오라면서 꼭 안아주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밥이나 먹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홍문헌은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제안했다.

홍규헌이 그러한 오빠야의 제안에 진심을 느낄 리 만무했다. 그냥 형식상 제안하는 걸로 생각했기에, 가방 안에 서류를 넣으며 대강 답했다.

“나 일 있어. 부하 직원이 오늘 귀국해서, 회사 돌아가는 김에 태워 가려고.”

“……회사에 몇 명 있지?”

“사람이 없어서 내가 발로 뛰는 거 아니야. 중요한 부하거든.”

그리 말하는 홍규헌의 입가에 희미한 온기가 번졌다.

홍문헌은 그녀의 변화를 예리하게 잡아냈다. 그리고 신경 쓰지 않는 척 가볍게 물었다.

“구인이냐?”

“구인이는…… 한 이사는 아닌데, 이사는 맞아. 우리 회사 프로듀서야.”

프로듀서.

며칠 전 양창환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소녀연맹의 성공을 기적이라고 했었다.

‘기적을 만든 프로듀서.’

HPT 미디어로 따지면 전략기획본부장인가.

확실히 중요한 인사이긴 하다.

“더 잘됐군.”

“어?”

“나도 얼굴 좀 보지.”

홍문헌은 답은 필요 없단 듯 먼저 방을 나섰다. 홍규헌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당황해선 재빨리 따라잡았다.

“뭐, 뭐라고? 얼굴 본다고? 오빠야가?”

“네 최측근이잖나.”

가서 얼굴 봐두는 것도 좋겠지.

홍문헌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모든 형제·자매들의 삶이 그러했다. 날파리들이 얼마나 꼬이던지.

또 다른 여동생인 홍연헌은 아예 임금 노동자 혐오증까지 생기지 않았던가.

하지만 형제들이 모두 겪었다고 막냇동생까지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만약 해괴한 마음을 품고 있는 놈이더라도, 내 얼굴을 비춰주면 자중하겠지.’

아직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지만, 그 박성필이란 인간이 어떨지 눈에 훤하다.

‘야망을 위해 다른 이를 이용하는 부류겠지.’

그런 녀석들은 윗사람에게 따르려 하기보다 윗사람을 설득하려고 한다. 본인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런 행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행동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요즘 각광받는 ‘가스라이팅’이다.

종국엔 본인의 사용인을 본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불구로 만들기도 한다.

자기들이 똑똑한 줄 아는 놈들. 실제로 똑똑하겠지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

‘돈으로 지혜를 살 수 있다.’

돈이 많으면 똑똑할 필요가 없다.

똑똑한 사람을 부리면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다.

가끔 자기 주제를 모르는 똑똑한 놈들이 있다.

만약 박성필도 그러한 부류라면, 이번 기회에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규헌이는 어려. 사람을 볼 줄 몰라.’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건 홍규헌도 마찬가지다.

“내 사람이지 오빠야 사람이야? 왜 굳이…….”

“굳이 안 봐서, 네가 어떤 꼴을 겪었었지?”

홍규헌이 한 번 실패했던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그녀는 즉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맘껏 봐.”

그녀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그래, 온갖 인간군상을 만나온 눈으로 똑똑히 봐주마.

* * *

봤다.

“사장님!”

그 녀석은 동생을 보자마자 안으려는 듯 팔을 활짝 펼쳤다.

“보고 싶었어요.”

그 녀석을 동생을 향해 스스럼없이, 애정을 잔뜩 담아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잘 지내셨죠? 저 없을 때만큼은 아니고요?”

그 녀석은 동생에게 있어서 자신의 가치를 굉장히 높게 치는 듯했다.

“일단, 시간이 시간이니 가는 길에 식사라도 할까요? 오기 전에 검색해봤는데 사장님이 좋아하실 만한 데가 있어서요.”

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장인 동생과 식사하려고 했으며, 홍문헌도 잘 모르는 홍규헌이 좋아하는 음식을 알았다.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동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갑자기 왜 거리 두세요? 제가 떠난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그 녀석은 홍규헌이 살짝 거리를 벌렸을 뿐인데도 배신이라도 당한 듯 ‘이전과 달라졌다’라고 말했다.

“설마 지금까지 저와의 관계는…….”

그 녀석은 동생과의 의미심장한 관계를 시사했다.

그 녀석을 향해, 동생은 뺨을 붉힌 채 당황하기만 했다.

홍문헌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씹었다.

‘이 기생오라비 같은 천박한 개새끼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