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91화 (691/760)

691화

성필을 고개를 젓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얘들아, 오늘 공연 정말 좋았어. 너희의 공연 중 TOP5 안에 든다고 자부해도 돼. 특히, 관객들의 반응이 예상 이상이었어.”

소녀연맹은 데뷔할 때부터 라이브를 중요시했다. 라이브 퍼포먼스를 단련해온 그녀들의 노력은 확고한 무대 장악력이란 능력으로 돌아왔다.

안정적인 보컬과 현란한 동선 이동, 낭비 없는 안무는 보는 이의 눈을 빼앗는다.

“오늘 너희들을 찍은 직캠을 어떻게 악의적으로 편집해도, 절대 안 좋게 만들 수가 없을 수준이야. 빈틈이 없어. 아니, 완벽해.”

멤버들은 교사의 칭찬을 받는 학생처럼 멋쩍은 기색이었다.

“물론 이 축제 하나 돌았다고 너희가 막 미국에서 유명해지진 않을 거야. 토크쇼에 나가고, 미국 투어를 돌아도 마찬가지야.”

결국은 케이팝 팬덤 내에서의 인지도일 뿐이다.

“만약 너희들의 목적이 케이팝의 정점에 서고, 장르 자체를 깨고 나가서, 전설적인 뮤지션까지 도약하는 거라면…….”

성필은 백설하를 보고 말했다.

백설하는 그의 시선을 받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백설하는 성필에게 자신의 남모를 꿈을 말해주었었다.

성필은 백설하의 그 꿈, 신들의 전당인 그래미 입성을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은 앨범으로, 곡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너희는 앞으로도 이보다 훨씬 더 멀리,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거야. 하루하루가 기적처럼 느껴지겠지.”

때론 그 위치가 두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언제든지 아래로 처박혀도 이상하지 않을 높이이니 말이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리카와 아름이는 더 부담감이 클 거라고 생각해.”

리카는 여유롭게 씩 웃었다.

신아름은 딱딱해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성필은 둘을 향해 다정한 미소를 보였다.

“그럴 땐 언제든지 나한테, 회사의 모두에게 의지해도 돼. 이미 세 명이나 끝냈어. 그리고 그 셋을 곁에서 봐와서 알겠지만, 혼자서 하는 게 아니야. 너희들만 전쟁터로 밀어 넣는 게 아니야. 언제나 그랬듯이 모두가 뒤에 있어. 오늘 이 무대는…….”

성필은 백스테이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모두가 함께 걸어와서 볼 수 있던 풍경이고, 앞으로도 모두 함께일 거야. 다들 지금까지 너무 훌륭했고 잘해줬어. 매일 더 잘해지고 있어. 그러니까 닿지 못할 거라고 생각되는 드높은 하늘조차도,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 거야. 4년 전의 너희들이 이곳에 서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의 너희들도 미래의 너희가 보게 될 광경을 상상하지 못하겠지.”

“아저씨 너무 감상적인데요?”

“그럴 수밖에 없지. 어린애마냥 틱틱대던 18살 아라가 아직도 눈에 선한데.”

“그 얘길 왜 해요.”

“한 이사님의 명함을 버리던 18살의 아라는 이런 순간이 오리란 걸 몰랐겠지.”

“알았으면.”

조아라가 픽 웃었다.

“명함 받자마자 무릎 꿇고 제발 아이돌 시켜달라고 빌었겠죠.”

“들었지 얘들아?”

성필이 힘차게 외쳤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내가 보증할게! 3년 후, 7년 차의 너희들은 이 시간에 긴장했던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성공할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또…….”

“아앗, 천하의 이사님도 할 말이 다 떨어졌네요!”

“또…….”

성필은 결국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

멤버들은 서로를 바라보곤, 또 성필을 보았다. 그리고 웃으면서 동시에 답했다.

“하나, 둘.”

저희도요.

부끄러운 말을 끝낸 성필은 상자를 들고 백스테이지 뒤에서 대기하는 밴으로 향했다. 소녀연맹의 개인 스태프들도 성필을 따랐다.

멤버들은 마지막으로 백스테이지를 바라보곤, 후련한 마음으로 떠나갔다.

“읏?!”

그때 백설하가 신음을 흘렸다.

누군가 자신의 엉덩이에 손을 댔다.

백설하가 기겁하며 돌아보자, 장하양이 보였다. 그녀가 백설하의 바지를 검지와 엄지로 꾹 잡고 당겼다.

“뭐, 뭐해……?”

“속옷 라인 드러나서요.”

“아.”

백설하가 엉거주춤 서서 바지를 잡고 꾹 아래로 당겼다. 그리고 몇 번 다리를 움직이곤, 장하양을 향해 ‘됐어?’라 물었다.

“이제 괜찮아요.”

“젖어서 그런가 봐, 헤헤.”

“그래서 재킷은 왜 안 벗으셨어요? 역시…….”

“이사님이 벗지 말랬다 왜?! 아직도 보여줘야 믿겠어?!”

“언니, 아까 고맙다고 하셨잖아요.”

장하양의 어깨를 토닥토닥 마사지하듯 때릴 준비를 하던 백설하가 흠칫했다.

“어, 응.”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세요. 제 프로듀싱 때 이뤄낸 성공은 저 혼자만의 능력이 아니니까요.”

아까 성필이 했던 말마따나 모두가 도와줬기 때문에 이뤄낸 것이다.

그런 말일까.

“언니가 이뤄낸 성공 덕이에요.”

“어?”

“아라가 이뤄낸 성공 덕이기도 하고요. 제 차례 때 소녀연맹이 선 정점은, 이 시점에서 계단의 가장 위에 불과해요. 그렇잖아요?”

성공은 단발적인 게 아니다.

모두가 쉽게 착각하곤 한다. 누군가 성공하면, 그 성공이 별처럼 반짝 갑자기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그 뒤에 서린 치열함과,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고난한 여정은 간단한 단어 하나로 외면받는다.

노력.

노력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문장 하나가 성공에 이르기 위한 모든 것이다. 반짝이는 현재의 결과보다 더욱더 반짝이는 보물이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반드시 밟아야만 했던 계단.

“그리고 제가 선 지금의 위치도.”

처음으로 하늘에 서서 본 풍경도.

“몇 달 후엔 계단의 중간부에 불과해지겠죠. 정상을 향한 길은 그런 거잖아요. 모두 다 함께 필사적으로 쌓아온 걸 밟으면서 올라가는 길. 그러니까, 고마워하실 필요없어요.”

백설하 또한 성공에 반드시 필요한 파편이었기에. 성필이 했던 말은 매우 정확했다.

모두가 함께 이룬 것이다.

“소녀연맹은 하나잖아요.”

“……응.”

백설하가 장하양의 손을 잡았다.

둘은 함께 걸었다.

걸어가다가, 백설하가 부자연스럽게 다리를 뻗었다.

“또 바지 말려 올라왔어…….”

“제 재킷 허리에 둘러드릴게요.”

“아, 고마워. 근데 그거 비싼 거 아니야?”

“100만 원 정도였나 그럴걸요.”

“그런 걸 넝마짝으로 만들어놓은 거야?! 비 맞고 다 구겨졌잖아!”

“아하하, 괜찮아요. 언니 속옷 라인 안 보이는 게 더 중요하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100만 원보다는 안 중요하지!”

* * *

소녀연맹은 다음 스케줄이 있어 미국에 남고, 성필은 한국으로 돌아간다.

너무나 놀랍게도, 이코노미석이 아니다!

성필은 당당하게 비즈니스석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는 안락한 의자에 몸을 뉘이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사다운 대우를 받기 때문일까?

아니!

‘사장님이 직접 마중 나와 주신다니.’

의외로 홍규헌이 해외로 갔다가 돌아오는 이들을 직접 마중 나온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런데 설마 성필의 귀국에 직접 온다니.

‘근처에 일이 있어서, 일 보는 김에 박 이사 데리러 가면 인력 아끼고 좋지.’

홍규헌은 그렇게 말했지만, 성필은 믿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우시면(직원으로서) 직접 마중까지 나와 주실까.’

가로 엔터의 프로듀싱 총괄 박성필.

지금이야말로 성필은 확신했다. 자신은 가로 엔터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원이다.

전생에 그토록 후회했던 것은, 매니저는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대체 가능한 자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결국 성필은 석세스 엔터에서 쫓겨나는 미래를 보지 않았던가.

그랬기에 성필은 창조자가 되길 바랐다.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창조적 오리지널리티를 가져서, 결코 자리에서 비켜나지 않길 원했다.

홍규헌의 마중은, 성필의 그러한 꿈이 이뤄진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성필은 기분이 좋았다.

‘사장님, 지켜봐 주세요. 소녀연맹은 물론이고 웨이퍼센트와 카오틱 에너지까지 성공가도를 달리게 만들 테니까요.’

입국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성필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웠던 고국의 향기다.

이 안에 홍규헌의 숨결도 섞여 있으리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바로 지워버렸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성필은 캐리어를 끌고 나아가며 주변을 살폈다.

순식간에 홍규헌을 찾아냈다. 홍규헌도 성필을 보았는지, 그녀의 버릇인 언뜻 퉁명해 보이는 미소가 해처럼 떠올랐다.

성필은 캐리어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포옹하려는 모양새로 양팔을 활짝 펼쳤다.

“사장님!”

홍규헌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성필이 하하하 웃으며 다가오자 홍규헌이 질색했다. 그리고 더는 다가오지 말란 뜻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차가운 반응이지만 예상했던 반응이다.

성필이 캐리어를 내려놓고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홍규헌의 표정이 아예 시체처럼 굳었다. 성필은 그 반응에 나름 만족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잘 지내셨죠?”

“뭐어, 잘 지냈지.”

“저 없을 때만큼은 아니고요?”

“박 이사 왜 이래?”

“왜긴요, 오랜만이니까요.”

성필이 난간에 기대듯 캐리어를 짚은 손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자연스레 상체가 앞으로 나가 홍규헌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홍규헌의 표정이 2차로 굳었다.

어라, 오늘따라 옛날보다 반응이 훨씬 짠데. 평소의 그녀였으면 적당히 웃으면서 받아줬을 텐데.

뭐지…….

그 위화감은 금방 사라졌다.

“뭐어, 일단…….”

“일단, 시간이 시간이니 가는 길에 식사라도 할까요? 오기 전에 검색해봤는데 사장님이 좋아하실 만한 데가 있어서요. 여기요.”

성필이 폰을 꺼내어 미리 검색해두었던 식당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녀에게 폰 화면을 보여주려면 당연히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평소처럼, 예를 들어 소녀연맹의 무대 교차 편집 영상을 보여줄 때처럼 그녀의 옆에 서서 폰을 가져가는데.

“아니, 박 이사.”

홍규헌이 뒤로 성큼 물러났다.

그 순간 성필의 심장이 철렁였다.

“……사장님?”

“박 이사 있잖아…….”

“갑자기 왜 거리 두세요?”

“뭐?”

“제가 떠난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던 거예요……?”

“머, 뭐?”

“아님 회사에? 다른 프로듀서라도 영입하셨어요? 설마 지금까지 저와의 관계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 그냥 쓸모 있으니까 맞춰줬던 거…….”

성필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흐우으.

슬픈 한숨이 손바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무겁게 울렸다.

이쯤에서, 홍규헌이 당황하면 성필은 손을 펼치고.

‘농담입니다, 하하!’

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홍규헌은 반응이 없었다.

슬쩍 손가락 사이로 그녀를 보았다. 창피함인지 뭔지 모를 감정 때문으로 그녀의 얼굴은 붉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앞니로 문 채 눈동자를 옆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필이 손을 치우고 그쪽을 보았다.

키는 185cm 정도 되어 보였다. 한구인만큼이나 완벽하게 차려입은 정장에, 표정은 한구인보다도 더 감정이 없었다.

짙은 눈썹 아래에 위치한, 쌍꺼풀 없이 날카로운 눈매는 절로 사람을 주눅 들게 했다. 특히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검은 눈동자가 그러했다.

그리고 매우 특이하게도, 그의 얼굴에서 홍규헌이 보였다.

“박 이사아…….”

홍규헌이 무언가를 꾹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오빠…….”

“……오빠? 사장님의, 오빠분?”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성필도 그처럼 시선을 아래로 주었다.

그는 품에서 지갑을 꺼냈고, 또 그 안에서 명함을 꺼내었다. 그것을 성필에게 내밀었다.

“규헌이 큰오빠되는 사람입니다.”

성필은 그것을 받았다.

[HPT 미디어

사장 홍문헌]

H&P 문화 그룹의 장남이다.

‘큰일 났다.’

성필이 명함 지갑을 꺼냈다. 홍문헌의 명함을 그 안에 매우 공손한 태도로 넣고, 이번엔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가로 엔터 이사, 프로듀싱 총괄 박성필입니다.”

홍문헌이 성필의 명함을 한 손으로 받았다. 의도적으로 거만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아니면 불쾌한 티를 내는 것이거나.

성필은 혀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홍문헌이 여전히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입을 뗐다. 눈과 달리, 목소리엔 감정이 서려 있었다.

“제 동생과 많이 친하신가 봅니다. 식사하자고 하셨죠, 좋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같이 가도 괜찮겠죠?”

이제 큰일 난 수준이 아니다.

‘X됐다.’

아, 그래.

이건 미래다.

후회할 미래를 보고 있는 거다.

성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눈을 감고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떴다.

“인공눈물 드릴까요?”

홍문헌이 가슴팍에서 투명한 병을 꺼내었다.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렌즈를 끼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인공 눈물을 안구에 톡톡 떨어뜨렸다.

성필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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