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화
인민가(人民歌, Song for PEOPLE)가 울려 퍼진다. 경쾌한 선율을 따라 수천 개의 횃불이 일렁여 시야를 어지럽힌다.
소녀연맹은 횃불이 자아내는 격한 기쁨 위에서 노래하고 춤춘다.
“아, 아…….”
진소유는 방금 ‘그래서 내가 일찍 오자고 했잖아’라며 투덜댔던 게 전부 거짓인 것처럼 공연에 몰입하고 있다.
무대와 꽤 멀리 떨어진 거리라 소녀연맹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진소유에겐 상관없었다.
진소유는 공연 덕후의 필수품인 오페라글라스를 눈가에 가져가, 바로 앞에서 만지듯 무대 위의 소녀연맹을 감상했으니까.
소녀연맹의 피켓과 응원봉을 들고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페라글라스를 챙겨온 건 진소유가 유일할 듯했다.
근처에서 폰을 높이 들고 확대 촬영 중인 이들은 진소유를 흘끔거렸다. 부러운 낯이었다.
“세상에 세상에(Oh my god oh my god)!”
에리카는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진소유가 말한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었다. 10대로 보이는 여자는 연신 방방 뛰는 동시에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감격했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그걸 보고, 에리카는 왠지 모르게 황망해졌다.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돌려 소녀연맹을 보았다.
[항상 꿔왔던 드림이야이야―]
‘송 포 피플’의 가사는 대부분 한국어다.
이는 소녀연맹의 특색이기도 했다. 에리카는 소녀연맹이 영어 사용을 꺼린다는 인상까지 받았다.
언어가 다름에도, 음악이란 이토록 타인의 가슴에 스며들 수 있는 거구나.
‘미안하다.’
정호환이 떠나기 전 남긴 말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 순간, 에리카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사님이 보고 싶으셨던 건 이런 광경이셨겠지.’
하지만 케이어스는 그가 떠날 때까지 이러한 광경을 보여줄 수 없었다.
케이콘 In USA에서 5만 명에게 환호받았을 때, 에리카는 기뻤었다.
케이어스가 나아갈 길이 맛보여주는 에피타이저라고 생각했다. 앞으론 이보다 더 달콤한 미래가 기다리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순백의 설원이어야 할 미답지(未踏地)에 다른 이들이 먼저 발을 들였다.
소녀연맹이다.
정호환은 그걸 참지 못했다.
‘다행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호환 이사님이 이 광경을 안 보셔서.’
정말 다행이다.
에리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지러웠던 정신이 순식간에 정리됐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소유야, 돌아가자.”
케이어스는 아직 지지 않았다.
적어도 완벽히 지지 않았다.
그건 곧 완벽한 승리는 아니지만, 전장 중 한 곳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케이어스는 앞으로도 승리할 거다.
다만, 이번처럼 불완전한 결과를 바라진 않는다. 완벽히 패배하지도 않고, 완벽히 승리하지도 않은 미지근함은 끝이다.
‘세계 최고의 에이전시, 세계 최고의 레이블과 계약했어.’
케이어스의 글로벌 커리어를 관리하는 모두가 일류다. 그냥 일류도 아닌,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이들이다.
케이어스는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은 풍족한 토양 위에 있다.
그러면 이제 해야 할 건 명확하다.
‘노력.’
김민주가 했던 말마따나, 할 수 있는 걸 한다.
케이어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최고의 상태로 맞춰두고 다음 싸움에 임한다.
그리고, 이번엔 에리카가 할 수 있는 게 조금은 있다. 케이어스의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다.
거기서 최선의, 아니.
‘최고의 결과를 낸다.’
에리카는 확신한다.
자신의 재능은 부족하지 않다.
자신의 노력도, 의지도 부족하지 않다.
환경도 부족하긴커녕 풍족하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한다.
그냥 성공이 아니라, KS 엔터 내에서 누구도 감히 얕보지 못할 성공을 거두어낸다.
‘그게, 내가 홀로 성공해내는 게…….’
에리카가 감았던 눈을 떴다.
‘정호환 이사님이 틀리지 않았단 증명이야.’
정호환에게 뮤직 프로듀싱을 배운 세월이 4년을 넘는다. 에리카는 그의 귀와 손을 그대로 자신에게 투영해냈다고 자부한다.
다음에 에리카가 달성할 승리와 성공은 정호환을 향한 진혼곡이다.
부디 그가 마음 편히 떠나가길 바라며, 가장 성대한 영예를 안겨줄 것이다. 만약 그녀가 그 업적으로 상을 받기라도 한다면, 첫마디는 정해져 있다.
‘정호환 이사님 감사합니다.’
시상대에서 상을 받아, 소녀연맹을 내려다볼 것이다. 내려다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서.”
에리카가 무대로부터 등을 돌렸다.
“연습하자.”
“갈 거면 너 혼자 가.”
마음을 강철처럼 담금질했던 에리카가 휘청했다. 그녀의 감정은 용암처럼 들끓건만, 돌아온 반응은 아까 내린 비보다 싸늘했다.
“난 다 보고 갈 거야.”
“너…….”
“애초에 왜 벌써 가? 박성필 이사님 뵌다고 했잖아.”
박성필.
그 이름을 듣자 에리카의 심정이 복잡해졌다. 끓는 용암 위에 비가 내린 것만 같았다.
에리카는 그 복잡한 심정도 순식간에 정리했다.
“안 봐.”
썸이 1호.
에리카 최초의 팬.
그 관계는 잠정 보류다.
다음에 만날 땐…… 적이다!
“괜찮아.”
“그래, 너 혼자 가.”
곡이 끝나자 진소유는 오페라글라스를 놓았다. 오페라글라스는 고무띠에 묶여 있었기에 땅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진소유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박수를 쳤다.
“파이팅 장하양! 브라보! 멋지다 하양아! 와우우―!”
진소유의 거센 박수와 환호에, 곡이 끝나고 그쳤던 박수가 되살아났다. 그녀의 주위로 다시금 환성이 퍼져나갔다.
에리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일이 콘서트야. 연습해서 조금이라도 더 완벽해져야지.”
“연습은 내일 리허설이 있잖아. 오늘은 공식적으로 휴일이야. 그래서 너도 여기 온 거 아니야?”
“소유야, 너 이 광경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어? 위기감이 안 들어?”
진소유는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박수를 치며, 진소유가 고개를 옆으로 슬며시 기울였다.
“알 바야?”
“…….”
* * *
소녀연맹은 한 시간에 이르는 공연을 마치고 백스테이지로 들어왔다.
준비된 의자에 앉아 저마다 수건을 집어 들고 몸을 닦았다. 성필이 가져온 박스 안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담요나 손선풍기가 들어 있었다.
“핫팩까지 있네.”
조아라는 핫팩을 흔들다가 그냥 박스 안에 던져 넣었다. 아무리 비를 맞았더라도 여름이다. 핫팩을 쓸 정도로 시리진 않았다.
다들 머리를 수건으로 닦다가 지쳤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하얗게 불태운 공연이었다.
“……하양아.”
백설하가 말했다. 목소리에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장하양은 베일처럼 머리에 쓴 수건 사이로 백설하를 쳐다보았다.
“고마워. 네 ‘송 포 피플’ 덕분에 이렇게 미국 무대에도 서봤잖아. 사실, 내 꿈 중 하나였어.”
백설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아이돌을 꿈꿨다.
아이돌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팝도 많이 들었다.
미국의 팝스타들은 백설하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백설하의 마음은 동경으로 그치지 않았다. 백설하는 그들처럼 되길 바랐다.
“고마워.”
그리고 그 꿈은 약 1년 전 훨씬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백설하는 그래미 어워드에 가기를 꿈꾸게 되었으니까.
‘더 언노운 싱어’에서 스승인 이인성과 만나고 난 후부터였다.
물론 그 사실은 성필을 제외하곤 아무도 몰랐다. ‘그래미 어워드에 갈 거예요’라고 떠들고 다니면, 훗날 창피한 일이 반드시 생길 듯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한다고 꿈의 진정성이 없는 건 아니다.
백설하는 진지했다.
진지했기에, 장하양을 향한 고마움이 더욱 깊고 진했다.
“희망을 봤어. 고마워, 정말…….”
“…….”
장하양은 백설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수건으로 다시 머리를 닦기 시작했다.
장하양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왜 재킷 안 벗으셨어요?”
“으, 응?”
갑자기?
“무모란 거 거짓말이라서?”
“어?!”
“제모 안 해서, 부끄러워서 안 벗으셨던 거죠?”
“미쳤어 너?!”
백설하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생 라인 사이에서 웃음이 번졌다. 백설하가 허둥지둥 변명하기도 전에, 장하양이 능글맞게 장난을 이어갔다.
“옆에 박 이사님이 계셨으니까, 이해해요.”
“이사님이 무슨 상관이야?! 지, 진짜 그래서 그렇다고 얘기한 건데!”
“박 이사님은 아이돌을 좋아하시잖아요. 꿈을 좇는 분이세요. 그래서인가 약간…… 여자한테 환상을 기대하는 느낌? 여자친구 선물로 분홍 원피스나 우파루파 잠옷을 줄 거 같지 않아요?”
“므, 뭐?”
“그런 박 이사님이 곁에 있으셔서, 괜히 없는 말 지어내신 거죠?”
장하양이 귀엽단 듯 백설하의 허벅지를 콕콕 검지로 찔렀다.
“이사님한테 잘 보이려구?”
동생 라인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백설하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장하양에게 놀림받은 적이 없다. 정확히는, 주변으로부터 호응받는 장하양의 놀림을 받은 적이 없다.
장하양의 유머 감각은 어딘가 살짝 엇나가 있어서 멤버들이 맞춰주기 쉽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다들 함께 웃는다.
장하양의 짓궂은 장난으로 주변이 웃음바다로 물들었다.
그 광경은 뭐랄까, 굉장히 비현실적이면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세상과 괴리된 곳에서 유머를 습득한 사람처럼 주변에 못 어울리던 하양이가 언제 이렇게…….
“모근 하나라도 보이면 넌 죽는다.”
백설하가 더없이 진지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재킷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그 재빠르고 서늘한 반응에 가해자인 장하양은 물론이고 배꼽 빠지게 웃던 동생들도 당황했다.
아니, 당황하는 건 장하양뿐이었다.
동생 라인은 초상난 사람들처럼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관계없단 사실을 필사적으로 증명하려는 듯했다.
툭, 백설하의 단추 하나가 풀렸다.
“보여주면 알겠지. 아는 순간, 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어, 언니, 아하하, 노, 농담…….”
“보여줄게.”
어느 순간 저벅저벅 성필이 다가왔다.
“뭘 보여줘?”
백설하가 조신하게 무릎 위로 손을 올렸다. 방금까지 보였던 기백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필은 박스 안에서 수건을 하나 꺼내어 얼굴과 머리를 닦았다.
“뭔데?”
“아녜요, 에헤헤.”
백설하가 순박한 웃음을 보였다.
멤버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필은 순박한 백설하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곤 수건으로 마저 머리를 닦.
“이거 누가 쓴 거야?”
성필이 수건을 코에 가져갔다. 확실하진 않지만 묘하게 체취가 묻어 있는 듯했다.
조아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 발 닦은 건데요.”
“이 씨……!”
성필이 기겁하여 수건을 박스 안에 던져 넣었다. 그가 손으로 얼굴을 막 문질렀다.
“아라 너 무좀 같은 건 없어?!”
“이 아저씨 막말하네. 내 발이 뭐요?”
조아라가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성필에게 가져갔다.
“봐요, 있는지 없는지.”
“클렌징 티슈 있는 사람 빨리! 빨리 좀 줘!”
“아니 기분 나빠야 할 사람 나 아니야?”
“박 이사님은 한 번 쓴 수건은 무조건 세탁기에 넣을 정도로 깔끔 떠셔! 젖은 수건은 박테리아가 번식한댔어!”
“아저씨가 그러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누구 클렌징 티슈 빨리 좀 줘봐아아아악!”
메이크업 스태프가 성필에게 티슈를 건넸다. 성필이 티슈로 얼굴을 닦은 후, 마치 중독됐다가 해독제에 맞은 사람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무 일 없었단 듯 다시 박스를 뒤졌다.
“이 수건은 아무도 안 쓴 거지?”
“사실 그거 발 닦은 거 아니에요. 걍 상체랑 하체 좀 닦았어요. 음, 전신을 닦았어요. 발은 빼고요. 안심해요.”
“안 쓴 거 맞지 아무도?”
“아라쨩 무시당하는데?”
“강한 부정은 긍정이랬어. 사실 좋은데 싫은 척하는 거야.”
“소난다(그렇구나).”
성필은 한숨을 쉬며 얼굴과 머리를 닦았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신아름이 탐탁잖은 투로 물었다.
“근데 팀장님.”
“응.”
“왜 팀장님이 우리보다 더 젖었어요?”
하필 면 티셔츠라서 밀착된 옷으로 성필의 살이 비쳐 보인다.
백설하는 비를 맞으면 속옷 라인이 비쳐 보일 거라고 걱정했었다. 그런데 성필의 모습은 그 걱정이 아무것도 아닐 수준이다.
거의 물에 빠진 생쥐 수준이다.
“객석에서 너희 공연 봤거든.”
“우리 시작하자마자요?”
“어. 덕분에 비 다 맞았지.”
“그 우산은요?”
“우산?”
성필은 의자 옆에 세워둔 우산을 보았다. 그가 뭔가 깨달은 듯 ‘아’ 소리를 냈다.
“원래 팀장님 우산 없었잖아요. 샀어요? 아님 누구한테 받았어요?”
“어…… 받았지.”
“누구한테요? 누가 비 오는데 우산을 줘요?”
신아름은 거의 취조하는 어투였다. 성필을 유혹하려는 여자가 주었을 거라고 확신한 듯했다.
“케빈이라고…….”
“남자한테 작업당했다고요?!”
“작업? 왜 얘기가 그렇게 가……?”
“케빈?”
조아라는 어디선가 그 이름을 들어본 듯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아까의 성필처럼 ‘아’ 소리를 냈다.
“그 케빈이요?”
“어, 그 케빈.”
“그 케빈이 누군데?”
“아, 신아름 넌 모르는구나. 나 미국에 갔을 때 있잖아.”
“너 미아됐을 때?”
“……그때 통역한 사람. 근데 그 사람 여기 왔구나.”
조아라가 훈훈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련함과 기쁨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소를 보고 리카가 곧바로 호들갑 떨었다.
“아라쨩 지금 너무 멋져 너무 좋아! 당장 사진 백 장 찍어서 화보로 내야 해!”
“아저씨, 케빈이 뭐래요?”
“몰라. 나한테 우산 주고 어디 가버렸어. 근데, 여기까지 온 걸 보면 확실하지.”
케빈은 소녀연맹의 팬이 됐다.
성필과 조아라의 얼굴에 뿌듯함이 떠올랐다. 아마 케빈이 소녀연맹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조아라의 통역을 맡았던 일이 큰 영향을 주었을 테니 말이다.
“뭐가 확실해요? 그 사람 게이란 거요? 팀장님한테 작업 건 거요?”
“신아름 너 진짜 분위기 더럽게 깬다. 이젠 하양 언니보다 더해.”
“아하하, 어……? 내가 분위기를 더럽게 깼었어……?”
“너 요즘 하는 거 보면 아주 가관이야. 뭐 아저씨한테 염색체 XX인 사람 다가가기만 해도 발작하고. 아저씨 너 때문에 어디 장가나 가겠냐?”
“무슨 장가. 이미 가족이 있는데.”
일동 정적.
신아름이 피시시 웃곤 장하양처럼 양손을 펼쳤다.
“에헤헤, 농담! 내가 언제 그랬냐? 조아라 호들갑 좀 그만 떨어.”
“호들갑은 뭔…….”
성필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주 오랜만에 전생의 두 사람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래, 그때도 이런…….
* * *
조아라가 악에 받쳐서 외쳤다.
“야 신아름 넌 우리 오빠 평생 홀애비로 두려고 작정했냐? 너 같은 년 있으면 전생의 인연도 기겁하고 도망갈……!”
* * *
그만 떠올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