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화
성필은 우산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케빈이 직접 가져다준 보람도 없이 우산의 끝이 땅과 입맞춤했다. 다행히 비가 가늘어서, 이전처럼 시야가 막히진 않았다.
시야가 막히지 않아, 성필은 모든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떻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런…….”
세 개의 대형 전광판엔 드론이 공중에서 찍은 관객석이 찍혔다.
수천 명, 수만 명이 응집한 인파 곳곳에서 붉은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건 횃불을 든 인민들의 시위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 빛은 결코 적지 않았다.
사람들 곳곳에 박혀 빛을 과시하듯 여기저기서 타오르고 있었다. 거의 절반이, 아니, 절반 이상이 빛을 발했다.
“아니었어…….”
이전 차례인 밴드의 무대에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관객 수가 응집했던 건, 그 밴드의 유명세가 오늘날 제대로 드러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많던 관객들, 그리고 지금도 자리하고 있는 관객들은, 아까 그 밴드를 보기 위해 모였던 게 아니었다.
그들은 기다렸던 거다.
소녀연맹을 보려고.
* * *
멤버들은 정신없이 무대 위에 섰었다.
성공을 향한 흥분에 집어삼켜진 장하양도, 정작 퍼포먼스가 시작되곤 낭패감에 입술을 물었다.
공연 문화가 가장 발달할 나라라면서, 형편없는 음향만이 장하양을 반겨주었다.
그 끔찍한 기분에 시야가 거세게 흔들렸다. 안 그래도 ‘오토마타’는 동선 이동이 매우 격렬하다. 그런 와중에 형편없는 반향만 듣고 있자니,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이건 최악의 무대가 될 거야.’
소녀연맹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이 무대는 소녀연맹 최악의 무대로 남을 것이다.
1절의 하이라이트에 들어설 시점.
갑작스럽게 장하양의 눈이 뜨였다.
아까와 비교하여 개안(開眼) 수준으로 깨끗해진 음향 때문에? 아니었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직한 낭패감이 그녀의 피를 식게 했을 때, 마침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객석에 총총히 박힌 화려한 붉은 빛의 향연이, 장하양의 눈으로 들어왔다.
‘뭐야?’
촛불인가?
횃불인가?
‘아.’
그래, 횃불이다.
저건, 관객석을 덮은 수천 개의 붉은 빛은 횃불이다.
소녀연맹의 공식 응원봉인 ‘횃불’이다.
그 불은 인민의 상징이다.
장하양은 인이어 한쪽을 뺐다.
―!
빗소리와 강렬한 스피커 음량마저 상쇄하는 거대한 기쁨의 비명이 그녀를 관통했다.
수천 명의 인민이들이 소녀연맹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건 한국어이기도 했고 영어이기도 했으나, 결국 소녀연맹을 향한 것이었다.
그 순간 다시금 장하양의 얼굴이 붉어졌다.
핏줄에 피 대신 환희가 내달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어 핏줄을 터뜨릴 기세로 기쁨을 전신으로 뜀박질시켰다.
장하양이 원래 안무보다 과격한 움직임으로 중앙에 섰다. 멤버들의 당황이 느껴졌다. 그리고 멤버들도 장하양의 움직임에서 느꼈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음을.
드디어 멤버들도 장하양과 같은 것을 보았다.
먼 이국의 땅에서도 불꽃으로 세계를 덮은 인민이들의 물결을.
그녀들에게도 횃불이 타올랐다.
불은 혈관 아래를 달려 그녀들을 태웠고, 그녀들은 사람이 아닌 불꽃이 되었다.
팬들의 환성에 답하기 위해 타오르는 불꽃.
그 불꽃을 비마저 태워버려 거센 연기로 화답해주었다. 연기가 황홀하게 세상에 휘몰아쳤다.
* * *
미국에 댄스 가수가 없는 게 아니다.
있긴 하지만, 춤은 곁다리에 불과하다.
댄스 가수들은 노래하며 율동 같은 안무를 하다가, 보컬이 사라지는 파트에선 학원에서 짧게 배운 나름 고난도 동작을 선보인다.
그건 댄스 가수라기보다는, 춤을 배운 가수가 개인기를 펼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이클 잭슨 이후, 미국인들은 그 정도를 댄스 가수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순간 댄스 가수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됐다.
아니, 댄스 가수의 의미를 되찾았다.
그녀들은 무거운 공기를 빨아들이면서도 전력을 다해 노래했으며, 그 노래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손짓이 수천 번의 움직임처럼, 수천 명의 손길처럼 강렬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녀들이 발을 구르고 몸을 쓸어내릴 때마다 피가 증발할 듯한 열정과 뇌쇄적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관능이 타고 달린다.
그녀들은 춤을 추었다.
춤다운 춤이었다.
그리고 노래도 불렀다.
노래다운 노래였다.
이 두 개가 한 무대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현재로선 환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일이, 과거엔 전설로 존재할 일이 눈 앞에 펼쳐진다.
지치지 않는다.
보기만 해도 호흡이 가빠져 오는 동작들을 연달아 펼침에도, 그녀들은 자신들이 강철로 만들어진 기계란 걸 증명하려는 듯 지치지 않는다.
그 치열함을 표현하기에 세 개의 스크린은 너무나 작았다. 작고도 부족했다.
[부르려면 불러라.]
가사는 한국어여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움직임은 춤이자 연기였고, 표정 또한 그 일부였으므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감정이 전해졌다.
더없는 자기 확신으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
스스로가 아름다울 것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과감함.
[내 이름.]
와이셔츠, 브라탑, 크롭티 등등 간편한 상의를 입은 이들과 다르게 턱시도 상의를 깔끔하게 걸친 가슴 큰 여자가 중앙에 섰다.
그녀는 보란 듯이 손을 뻗곤 검지를 아래로 내렸다. 멤버들이 동시에 실 끊어진 인형처럼 몸을 늘어뜨렸다.
[The most beautiful Doll.]
드디어 영어가 나왔다.
그리고 그건 매우 호소력 짙었다.
그래, 맞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형…….
[실이 없이 춤추는]
중앙에 선 가슴 큰 여자가 검지를 위로 향하고, 몇 번이나 보았음에도 또 새롭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춤이 펼쳐졌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어중간하게 서 있던 멤버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여 무대를 휩쓸었다.
[Automata.]
오토마타 3페이즈.
중앙에 선 여자가 내지르는 지극히 아름답고도 높은 선율을 배경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동인형들의 자기 증명이 펼쳐졌다.
노래하는 동시에 춤추는, 그것도 매우 어려운 보컬에 화음을 맞춰가며 고난도의 춤까지 소화하는.
그 광경은 신기하다 못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아주 오래전 잃어버렸던 향수, 이곳 모두의 기억을 일깨웠다.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잭슨…….”
댄스 가수의 시초이자 정점이며 현재까지도 정점에 위치한 위대한 예술가를, 떠올려야만 했다.
“오길 잘했죠?”
뒤에서 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비아는 돌아볼 생각도 못 하고 무대만을 바라보았다. 중앙에 선 장하양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얄밉게도 빗방울이 그녀의 손에 톡 떨어졌다.
그게 끝이었다.
비가 거의 그쳤다.
세상을 영원토록 뒤덮을 듯 펼쳐졌던 구름의 한가운데가 갈라지고 저녁의 붉은 빛이 비추었다.
그 붉은 빛 아래에는 그보다 더 붉은 횃불들이 가득했다. 그 불꽃은 아름답게 흔들리며, 광적인 갈채와 외침들을 뱉어냈다.
슈퍼스타들의 등장에 흔히 들리는 소음이었다.
올리비아가 무대로 검지를 뻗었다.
“이름이 뭐죠?”
케빈은 그녀의 곁에 섰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검지가 차례로 멤버들을 가리키게 했다.
“리카, 설하, 아라, 하양, 아름.”
“저기 저 사람은…….”
“하양.”
“프로네요.”
“프로죠 그럼.”
케빈은 자기가 칭찬받은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프로 중의 프로예요. 저 모습을 보세요.”
“그러게요. 겨드랑이가 엄청 깨끗해요.”
“으엉?”
“제모, 아플 텐데.”
“제, 제모?”
“레이저 제모요. 털을 태워요.”
“아…….”
“마취 크림 발라봤어요? 한 시간쯤 바르고 있으면 감각이 없어져요. 손톱으로 쿡쿡 찔러도 아무런 감각이 없어요. 그런데, 레이저로 지지면 너무 아파서 절로 눈물이 찔끔 나와요. 마취 크림을 발랐는데도, 너무 너무 아프다구요.”
“…….”
“저런 깨끗한 겨드랑이가 면도칼로 만들어질 리 없어요. 무대에 서기 위해서, 일 년에 스무 번도 넘게 그런 고통을 감수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말 알겠어요?”
“아뇨…….”
케빈의 표정이 울적해졌다. 알고 싶지 않은 걸 알아버렸단 얼굴이다.
“저는 매니저예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복장이나 피부 상태 하나로도 뮤지션을 파악해요. 네, 설령 겨드랑이만 보더라도 그 사람을 알 수 있어요.”
“레이저 제모를 했단 걸요?”
“뮤지션으로서의 마음가짐. 그리고,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무대를 보면 더욱 확실해지죠.”
소녀연맹은 일류다.
그리고, 통한다.
귀를 울리는 외침을 들어보라. 그녀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천 명을 보라.
‘아니.’
올리비아는 뒤를 보았다.
아까 여기 도착했을 때는 올리비아가 가장 뒤였다. 그런데 지금은, 끝을 찾기 힘들 만큼의 관객들이 또 그녀의 뒤에 모여들어 있었다.
‘수만 명이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관객석이 아니라 무대에서 들린 것이었다.
마이크를 쥔 장하양이 영어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분 늦게 나올 걸 그랬어요, 아하하.]
영어까지 굉장히 유려하게 잘한다. 왠지 모르게 뮤지컬이나 연극 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회사가 일부러 그런 식으로 훈련시킨 걸까?
[비가 와서 마음이 급해졌거든요. 여러분들이 가시면 어떡하지 걱정돼서, 가시기 전에 나와서 했어요. 다행히, 후회는 없습니다. 여러분 즐거우셨나요?]
다시 한번 귀가 떨어질 듯한 환성이 몰아쳤다. 소녀연맹의 팬이 수만 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듯하다.
[저희를 오늘 처음 봐주신 분들도, 비가 옴에도 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을 수밖에 없겠지.’
그런 무대를 보게 되면 떠날 수가 없다.
그래, 물론 퍼포먼스는 굉장했다.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역시나 소녀연맹의 팬들이었다.
‘처음부터 관객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가 떨어지자 소녀연맹을 모르는 관객들은 발길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상함을 눈치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군중심리는 공연에도 적용된다.
비가 왔는데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 다수다. 이러면 사람들은 먼저 찜한 자리에서 비키는 게 손해처럼 느껴지고, 어떤 뮤지션이기에 이토록 기다리는 이들이 많은지 궁금해진다.
이렇게 많은 관객이 떠나가지 않은 건, 재밌게도 그냥 군중심리에 휩쓸린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군중심리가 아닌 공을 돌릴 사람을 찾자면…….
“케빈 같은 사람들 덕이네요.”
“저 같은 사람들?”
소녀연맹의 팬덤, 인민이들.
비가 옴에도 꿋꿋하게 횃불을 들고 서 있던 인민이들 덕분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그걸 알기 때문일까, 무대 위에 선 소녀연맹 멤버들의 눈동자엔 깊은 감사가 서렸다.
그녀들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그러한 동양식 인사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은 귀엽다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 맞다.]
백설하가 옆구리를 콕콕 찌르자 장하양이 말했다.
[아직 자기소개를 안 했네요.]
장하양이 백설하에게 마이크를 넘기려 하자 백설하가 고개를 저었다.
장하양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곤 쭈뼛쭈뼛 중앙에 섰다.
[스읍.]
숨을 크게 들이켜고, 그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춤추며 노래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수였으나, 사람들이 웃음이 번지는 걸 인지할 정도는 됐다.
올리비아도 웃었다.
케빈이 의아하게 여겨 물었다.
“방금 하양이 웃긴 말 했나요?”
“웃기다기보다는…… 추억이죠.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데뷔 무대 소개말이에요.”
아이돌의 시초.
세계적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보이그룹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데뷔 소개말을 장하양이 입에 담았다.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증명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말이었다.
[아시나 보네요.]
장하양이 아하하 웃었다. 그러곤 다시 표정을 다잡고, 아까보다 진지한 투로 말했다.
그래, 그녀는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데뷔 소개말을 빌려왔다.
[춤추며 노래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춤추며 노래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미래의 밴드입니다!
하지만 장하양은 거기서 말을 끊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낮은 웃음과 함께 말했다.
[우리는.]
춤추며 노래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컨템포러리 밴드.]
그녀들이 미국을 향해 외쳤다.
[소녀연맹이 왔다―!]
미국에 찾아오지 않았던 미래를 우리가 가져왔다. 소녀연맹은 미국이 버렸던 문화를 자신들이 더욱더 발전시켜서 가져왔노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 * *
미국에 도착한 첫날 모두가 호텔에 모여 정했던 무대 인사말.
성필은 우산을 접으며 귀를 기울였다.
[춤추며 노래하고 노래하며 춤추는 컨템포러리 밴드, 소녀연맹이 왔다―!]
사생아는 세월이 지나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묻는다.
아버지, 내가 자랑스럽습니까?
답이 돌아왔다.
아까보다 더욱 선명한 박수갈채.
황홀하기 그지없는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