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8화
만약 국가가 정책을 결정할 때, 그 정책과 가장 밀접한 삶을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다면.
시민 하나하나의 지혜를 집대성하여 정책을 실행할 수 있다면 어떨까.
현대 국가의 행정력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를 ‘숨겨진 지혜’라고 불렀다.
문화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다.
‘오토마타’의 선율이 시작되자, 장하양은 과거 성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만약 모든 국민이 음악을 배운다면…….’
주요 과목처럼 철저하게 음악을 가르친다면.
1등급과 9등급으로 상대평가를 실행하고, 음악이 주요 교과목이 되어 교육과정 안에 들어선 국민 전원이 목을 맬 수밖에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숨겨진 재능들이 수도 없이 발견될 거야.’
본래라면 음악의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운이다.
부모가 음악 학원에 보내주는 게 시작이다.
피아노나 바이올린과 접하거나, 실용 음악 학원에 등록하여 보컬과 작곡 프로그램을 배우는 등의 운이 필요하다.
하지만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일정 이상의 음악 소양을 갖추게 된다면…….
‘물론 지금의 국영수랑 비슷하겠지. 음악엔 관심도 없어서 적당히 공부하고, 아니면 아예 공부하지 않는 4등급 3등급 이하의 사람들이 넘쳐날 거야.’
하지만 그 경쟁을 뚫고 1등급을 달성한 상위 4%가 존재한다. 한 해에 2만 명 정도가 상당한 음악적 소양을 지니고 사회로 나갈 것이다.
그중 단 1%라도 음악 업계로 진학한다면, 한 해에 200명의 음악 엘리트가 탄생한다.
전 국민의 모집단으로 하는 음악의 엘리트가 매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난다.
허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음악을 접해봤단 점이 중요하다. 재능을 지닌 이들은, 그 경험을 지닌 채 훗날 어떤 형태로든 재능을 개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세계의 대중음악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봐.’
그리 말한 성필은 실없이 웃었었다.
그는 이게 말도 안 되는 망상이라고 했었다. 음악이 국영수 이상의 필요성을 증명하거나, 음악 산업이 세계 총생산량의 일부를 점할 정도로 팽창하진 않곤 발생하지 않을 망상이라고.
‘그 망상과 가장 가까운 나라가 미국이야.’
세계 대중음악 시장 규모 1위. 평범한 나라에선 상상할 수 없을 규모의 대중음악 인프라가 존재한다.
스타가 될 수 있는 길은 좁지만, 그 좁은 길은 어느 나라와 비교하여도 넓다.
자신의 스타성을 증명할 수 있는 곳이 도처에 있다. 라이브 하우스, 클럽, 카페, 바, 심지어 이발소에서도 공연할 수 있다.
세계 1위·2위 규모의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이 모두 미국에서 발명됐다.
세계 최고의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또한 미국을 기반으로 한다.
규모가 뒷받침하는 만큼 장르적, 인종적 다양성 또한 보장된다.
그러한 인프라와 인구 수, 규모에 힘입어 스타를 꿈꾸는 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 그리고 당연히, 음악 소비자와 소비 금액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다.
‘미국이 꿈의 땅인 이유가 이해되지? 뮤지션으로서 미국의 무대에 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된다.
‘그리고 뮤지션을 평가할 미국 대중들의 눈높이가 어느 정도일지, 이해가 될 거야.’
루이 암스트롱과 마일스 데이비스를, 척 베리와 너바나를, 마이클 잭슨과 마돈나를, 스티비 원더와 투팍을 탄생시킨 대중들이다.
미국인들에겐 자국 문화의 대체재가 필요 없다. 선망하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 자체가 세계의 문화이며, 그들의 음악이 곧 세계의 음악이다.
미국의 대중음악은 라틴팝, 스웨디시팝, 제이팝, 케이팝, 굳이 팝 앞에 무언가를 붙일 필요가 없다.
아무런 수식어 없이, 미국의 음악은 팝(POP)이다.
그리고 소녀연맹은 그런 미국의 무대에 섰다.
성필이 과거에 해주었던 수업이, 하필 이 순간 장하양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다.
머리가 뜨겁다.
다행히 빗방울이 머리를 식혀준다.
뜨거운 이유는, 흥분해서다.
‘통할까?’
통할까.
이는 장하양이 아주 먼 옛날에 느꼈던 감정이었다. 데뷔할 때 그러했었다.
과연 장하양과 소녀연맹이 대중들에게 반응을 얻을 수 있을까? 걱정과 불안을 품고 매일을 보냈었다.
하지만 어느새 소녀연맹의 성공은 당연히 손에 잡히는 것으로 다가왔다.
케이어스나 KS 엔터는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이기고 난 뒤엔 ‘통할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소녀연맹은 당연히 통한다.
모두가 소녀연맹을 좋아한다.
‘우리는 그런 그룹이니까.’
그런데 그 법칙이 통하지 않는 무대에, 정말 오랜만에 오를 기회가 왔다.
3년 6개월 전, 데뷔 무대에 올랐던 장하양에겐 토할 것 같은 불안과 걱정만이 있었다.
남들에겐 강한 척을 해보았지만 자아의 밑바닥까지 파먹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번에도 그러한가?
‘아니.’
겁을 먹기엔, 소녀연맹이 그려온 성공의 역사가 너무나도 길고 깊다.
케이팝은 내수 시장으로 규모를 불린 게 아니다. 적은 인구수를 지닌 시장은 필연적으로 세계를 보게 되어 있다.
케이팝의 지난 10년은 세계를 상대로 싸워온 기록이었다.
그리고 소녀연맹은 그러한 케이팝 시장에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니 통하지 않을 리 없어.’
과거와 같은 심각한 걱정과 불안은 없다.
오직 성공만을 탐닉해 온 장하양은 이런 상황 뒤에 펼쳐질 일을 너무나 잘 안다. 무의식적으로 몸이 직감하고 있었다.
소녀연맹의 무대가 펼쳐진 이후엔, 반드시 박수가 따라온다.
간단한 조건반사다.
장하양은 흥분을 머금고 춤추고 노래했다.
소녀연맹이 춤추고 노래했다.
오토마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동인형.
* * *
[소녀연맹이 왔다(Girl’s League is here)!]
장하양이 재차 소리치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무대 곁에서 지켜보던 성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녀연맹이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튀어나와서 당황했을 텐데, 음향 엔지니어가 상황을 잘 캐치하고 음악을 재생했다.
하지만 안도는 잠시였다.
성필은 관객석까지 빠르게 달려갔다. 무대 앞을 메운 인파는 거의 만 명에 달한 듯했다. 관객석의 절반 지점까지 가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중간에 도달한 성필은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음향에 귀를 기울였다.
‘잘 들릴 리가 없지.’
일단 빗소리가 섞인다.
일반적인 상태와 다른 대기 상태에 비까지 쏟아지니, 음향의 상태는 엉망에 가까웠다.
전문적인 공연장조차 음향 장비나 인력의 수준, 공연장 설계 때문에 발생하는 음향 문제로 비난받기도 한다.
전문 공연장도 그러할진대 야외 공연의 음향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제대로 대응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과한 걸지도 모른다.
‘듣기 힘든 정도는 아니야.’
성필은 음악에 민감하다. 관련 직종에 종사한 지 오래된 데다가 음악을 듣는 게 업무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고가 스피커로, 저가 스피커로, 줄 이어폰으로,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컴퓨터 스피커로, 자동차 스피커로, 사운드 엔지니어링 과정에서 수십수백 번 가장 좋은 음향을 찾아낸다.
그런 민감한 귀이기에 무대 음향에서 큰 불쾌함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통 사람들이 막귀라는 건 아니야.’
그들이 느끼는 건 미묘한 이상(異常)이겠지.
하지만 그 미묘한 질적 차이가 공연 경험을 극단적인 수준으로 뒤바꾼다.
‘사람들을 잡아두려고 빨리 나간 건 좋았지만, 음향이 이러니 예민한 사람들은 떠나갈지도 몰라.’
소녀연맹의 퍼포먼스가 그런 관객들을 잡아둘 수 있을까?
최상의 상태였다면, 비가 오지 않고 시스템도 완벽하여 공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성필은 소녀연맹이 초면인 관객들도 붙잡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관객석 반응은 어떻지…….’
일단 갑자기 등장한 소녀연맹을 보고 당황이 번져갔다. 그 파문(波紋)은 약 만 명이 응집했을 사람의 웅덩이로 조용히 퍼져나갔다.
관객들의 덩어리가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꿈틀거린다.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는 거야.’
소녀연맹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느라?
그런 형편 좋은 움직임은 아닐 것이다.
‘나가려는 거야.’
관객들이 이곳으로부터 나가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음악을 3초 정도 듣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다음 곡으로 넘긴다고 한다.
공연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 없다.
소녀연맹의 퍼포먼스가 시작된 지 고작 십수 초가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으로도 호오(好惡)를 판단하기란 너무나도 쉬운 일이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비가 오니까.’
인내심의 임계치가 훨씬 낮을 것이다.
슥 보고 ‘아니네’ 싶으면 바로 떠나간다.
성필은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 눈을 돌리려던 때,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움직임이…….’
관객석의 움직임이 천천히 멈춘다.
관객의 집합은 곧 태어나려는 알처럼 흔들렸었다. 그런데 그 흔들림이 점점 멎어간다.
외곽에 있던 몇몇은 지금도 관객석에서 나가고 있다. 하지만, 안쪽의 움직임은 확연히 굼떠졌다.
나가지 않기로 한 건가?
‘우리 애들의 퍼포먼스를 더 보고 싶어서?’
혹은.
‘나갈 수 없어서……?’
그렇다면, 설마…….
“우산 필요해요?”
우산이 성필의 머리에 씌워졌다.
외국인다운 어눌한 한국어였고, 그런 말투로 성필에게 말을 걸 사람은 딱히 없었다.
성필은 깜짝 놀라 그쪽을 보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임에도, 성필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물들었다.
“케빈!”
조아라가 미국의 포스트 무브먼트 아카데미로 갔을 때 통역으로 있던 케빈이다.
케빈이 예전보다 성숙해진 미소로 반겨주었다.
“오랜만이에요 미스터 박.”
“정말요! 잘 지내셨어요?”
그를 보자 과거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가 자신의 직장(클럽)에 초대해서 갔던 일로 홍규헌이 면박을 주었더랬…….
‘아니지, 지금은 우리 애들 무대에 집중해야 해.’
비록 현재로선 성필이 도와줄 수 있는 게 없긴 하다. 하지만 성필에겐 그녀들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의무가 있었다.
마치 아내의 분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는 남편처럼, 도와줄 건 딱히 없지만 옆에서 머리칼이라도 쥐어뜯겨야 한다.
무대가 끝나면, 분만 때 아내한테 머리칼이 쥐어뜯기는 남편처럼 ‘이 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아프잖아아아!’ 같은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극악의 무대에 선 경험은 분명 트라우마로 남을 테니…….’
부디 잘 끝나기를 바라고 있을 때, 케빈이 성필의 어깨에 우산을 걸쳤다.
성필은 괜찮단 뜻으로 우산을 그에게로 밀었다.
“괜찮아요. 이미 젖을 대로 젖었잖아요.”
“여기서 한 시간 동안 비 맞고 있으려고요? 미국엔 비 맞으면서 억지로 연설하다가 폐렴으로 죽은 대통령도 있어요. 미스터 박도 그리되지 말란 법 없잖아요?”
“참 살벌한 권유네요……. 하지만, 그럼 케빈은요? 한 시간 동안 저랑 우산 쓰고 계시게요?”
이 우산은 1인용으로, 작다.
“아뇨.”
이번에야말로 케빈이 성필에게 우산을 온전히 넘겼다. 성필은 얼떨떨하게 그 우산을 받아 들었다.
“저는 할 일도 있고, 일행도 있어요.”
* * *
“운도 안 좋지.”
동료의 말에 음향 엔지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의 데뷔 무대나 마찬가지일 텐데, 비가 오다니. 관객이 떠나가는 건 둘째치고, 음향을 담당하는 그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최고의 상태에서 해도 모자랄 텐데.”
동료가 혀를 찼다.
엔지니어는 자신의 앞에 놓인 믹서(Mixer)를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일은 가수가 내는 원음을 청중들에게 가장 확실하고 깨끗하게 전달해주는 것이다.
널따란 공터에 무작정 소리만 키우는 공연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삼류 믹싱은 청중에게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을뿐더러, 가수에게도 끔찍한 일이다.
무대 위에 서 있을 땐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단 점에서, 가수에겐 더욱 화가 나는 일일 것이다.
엔지니어는 이 일에 일종의 소명 의식까지 느꼈다. 가수에게도 청중에게도, 모든 공연은 단 한 번뿐인 경험이다.
영원히 간직할 최고의 경험으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이 일에 불확정적인 변수는 재앙과 같다.
그 때문에 리허설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상황과 조건에 맞는 최적의 음향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소녀연맹의 무대도 그런 과정을 거쳤으나, 불확정적인 변수가 등장했다. 안 그래도 야외라서 불확실성이 높건만, 날씨까지 따라주지 않는다.
일부러 비 오는 날 음향 테스트를 하는 미친 엔지니어는 없다. 그에게도 이런 날 음향을 만져본 경험은 없다.
‘차라리 다음엔 대비할 수 있게 지금 음향을 만져볼까.’
무력감 때문에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게 된다. 소녀연맹을 재료로 연습하겠단 거나 마찬가지인 소리였으니까.
그의 손짓 한 번에 음향이 지금보다 더 최악으로 갈 수도 있다.
빗소리와 불안정한 대기를 꿰뚫는 최적의 음향을 찾는 법은 경험뿐이지만, 그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엔지니어는 하는 수 없이 그녀들의 보컬만 살짝 손보았다. 그나마 빗소리를 뚫고 청중들에게 목소리라도 잘 들리도록.
“안녕!”
공연 스태프들이 모인 천막 안으로 갑자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케빈이었다.
“어, 케빈? 너 내일 공연이잖아?”
리허설 중, 케빈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스태프들과 친해졌었다.
엔지니어가 케빈을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지금은 업무 시간이다.
“일하는 중이니까 나중에…….”
“어차피 손 못 쓰고 있지 않아?”
엔지니어의 표정이 굳었다.
케빈이 능글맞게 다가와 그의 옆에 섰다. 그는 믹서를 한동안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맡겨볼래?”
“네가?”
“나 믹싱이랑 마스터링도 혼자 해. 음, 아니지. 혼자 했었지, 아마추어일 때는 그랬지.”
“농담하지 마! 디제잉이랑 엔지니어링이 같은 선상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이런 경험도 있지.”
케빈이 천막 밖으로 손을 뻗었다. 비가 그의 손등을 적셨다.
“비가 오는 날 공연해봤어. 나나 엔지니어나 진땀깨나 뺐지.”
“야외에서?”
“어, 투어를 돌았었거든. 여름이어서 살았지. 다들 워터파크에라도 온 것처럼 신나게 흔들더라니까!”
“네가? 네 야외 공연에 사람이 모여?”
“당연히 프로모션 투어지! 음반사에서 투어 서포트도 받았었어. 아무래도 클럽이 많았지만, 야외 무대도 꽤 섰거든.”
“아무리 그래도…….”
엔지니어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이건 케이팝이야.”
“컴플렉스트로야.”
“뭐?”
“컴플렉스트로. 일렉트로닉이라고. 장르적 문법을 착실히 지킨. 물론 케이팝적인 요소도 많지. 그런데 난.”
케빈이 엄지로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케이팝 리믹스 많이 해봤거든. 관객들 반응도 좋았어. 아이튜브에 영상 있는데, 볼래?”
“아니 그래도…….”
“난 소녀연맹 팬이야.”
케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팬이니까 뭐든 해주고 싶어. 어쭙잖은 실력이나 확신으로 부탁하는 게 아니야. 할 수 있어. 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어.”
팬으로서 소녀연맹에게 최고의 무대를 선물해주고 싶다.
그 말을 들은 엔지니어는 다시 무대를 보았다. 빗속에서 춤을 추는 다섯 명의 소녀들이 있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감탄을 터뜨렸다.
“저런 춤을 추면서 저런 노래가 되나?”
공들여 스타일링 했을 머리카락은 진즉 미역처럼 얼굴과 목에 달라붙었다.
빳빳했을 옷은 물에 젖어 몸과 밀착했다.
발을 구를 때마다 물이 첨벙이고 손을 뻗을 때마다 물방울이 비산한다.
노래도 춤도 제대로 될 리 없건만, 그녀들에게서 절망이나 당황은 보이지 않는다.
엔지니어는 소녀연맹의 퍼포먼스에서 신성함까지 느꼈다.
유리 조각이 깔린 무대에서 춤추는 무용수들을 보는 듯했다. 시간이 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무대에 나가 정해진 춤을 추어야만 하는 이들의 숙명처럼 느껴졌다.
신성하며, 비장하다.
“많이…….”
엔지니어의 목소리에 우수가 담겼다.
“연습했겠지. 저렇게 인형처럼 춤추려면, 몇십 번 연습한 걸로 안 될 거야.”
수천 번의 반복 숙달 끝에 저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저건 장인(匠人)의 기예다.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일로 망가지면, 가수든 팬이든 속이 쓰리겠지.”
엔지니어가 믹서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망치면 가만 안 둬.”
“걱정 말고…….”
케빈이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들어.”
소녀연맹의 음악을 수만 번 들은 덕후(Stan)만이 펼칠 수 있는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