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화
낮 12시.
성필은 조진만과 함께 벤치에 앉아 맥주를 홀짝였다. 그리고 걱정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쾌청했는데…….”
먹구름이 짙게 끼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의 끝자락까지 무겁고 어두운 구름이 진을 치고 있다.
조진만이 성필을 안심시켰다.
“일기 예보 어플로 보니까 비가 올 확률이 높진 않아요. 오더라도 조금만 내리겠죠.”
“오더라도, 빨리 지나가는 소나기였으면 좋겠네요.”
“……박 이사님, 강수 확률은 50%예요. 절반이라면 오지 않을 거라고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요?”
성필은 쓴웃음과 함께 맥주를 홀짝였다.
조진만은 저 멀리 우비와 우산을 실은 트럭을 바라보았다. 트럭의 주인은 곧바로 가판대를 설치하고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얇은 비닐 우비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조진만이 성필의 어깨를 두드리곤 그곳을 검지로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사람들이 우비를 사요. 비가 와도 공연장에서 우르르 떠나가진 않을 거예요.”
“그것도 걱정이지만, 음향도 걱정이에요.”
“……음향이요?”
“갑자기 대기 상태가 바뀌면 음향도 바꿔야 하잖아요.”
성필이 맥주캔을 구겼다.
“비가 떨어지면, 우리 애들의 무대 상태는 물론이고 음향도 최상이 아닐 거예요. 최고의 무대를 보여줄 수 없을지도 모른단 게 더 걱정이에요.”
조진만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가만히 맥주를 마셨다.
음향과 관련된 이야기는, 물론 조진만도 아는 것이었다.
소리란 매질인 대기를 타고 전해지는 것이다. 기후가 바뀌는 건 곧 대기 상태가 바뀐단 뜻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대기 상태를 가정하고 최적으로 맞춰두었던 사운드엔 변화가 생긴다.
‘특히 이런 개방된 공간에선 더하지.’
공연장에 구조물 한 개만 새로 나타나도 음향이 전달되는 범위나 방향이 순식간에 뒤바뀐다. 음질이 바뀌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리허설이 필요한 것이다.
몇 번이고 음악을 재생해가면서, 공연장에 소리가 가장 잘 전달되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기후가 바뀜은 물리적인 구조물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만큼이나 큰일이다.
‘사운드 디렉터의 실력이 좋기를 바라는 수밖에.’
부디, 그가 이러한 환경에서도 음향을 만져봤기를 바라야겠다.
이왕이면 전미(全美) 노상 투어를 다녔던 경험이 있어, 이런 상황에 이골이 나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서 또 이왕이면 케이팝을 매우 매우 좋아해서, 케이팝 사운드를 0부터 100까지 모두 꿰뚫는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조진만은 공연 기획사 사장이며 연출 총괄이지 음향 기술자가 아니다.
“조 사장님.”
“네?”
“이번 공연은 중요해요. 미국의 대중들에게 우리 애들이 처음으로 노출되는 거니까요.”
“그렇죠…….”
“미국 사람들은 케이팝 아이돌을 좋아하는 데 도덕적인 거부감을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자율적인 아티스트가 아니라, 회사로부터 통제받는 아이돌을 소비하는 것 자체가 뮤지션의 자유를 저해하는 데 일조한다고 생각해요.”
인더스트리얼 베이비.
산업이 탄생시킨 인위적인 스타에게 거부감을 가지는 건 미국의 오래된 전통이다.
록과 힙합이 ‘진정성’이란 가치 기준을 대중음악 전반에 전파한 후였다.
그들이 뮤지션을 인정하는 첫 번째 기준은 ‘진짜인가 아닌가’이다.
케이팝을 소비하는 미국 사람들은, 소비하면서도 꺼림칙함을 느낀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또, 무대 장악력이 부족하다는 게 단점으로 꼽혀요.”
“대강 알겠네요.”
아이돌의 무대는 전투로 따지자면,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돌아갔을 때 병력을 투입하여 승리하는 것이다.
본인이 설정한 전장, 본인이 설정한 적, 그리고 본인이 싸우고 싶을 때 싸운다.
이물질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의 미학이다. 다른 면으로 보자면, 그건 곧 거짓의 미학이다.
“무대 장악력이란 건 무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니까요.”
무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일단 무대가 자신의 것이 아니어야 한다.
무대 장악력은 타인의 전장에 자신만의 깃발을 꽂는 것과 같다.
조진만은 어제 보았던 스타들의 공연을 떠올렸다. 그들은 정해진 곳에서 가만히 노래하기보다, 무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휘어잡았다.
그에 비해 아이돌의 무대는 오로지 정해진 것만을 수행한다. 군무(群舞)는 짜임새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지만, 그곳에 틈은 없다.
“하지만.”
조진만이 말했다.
“신기해하지 않을까요? 아이돌 문화에 익숙한 저희가 봐도 군무는 아름답고 신기해요. 라이브를 중시했던 소녀연맹은 더 그렇겠죠.”
“신기해하겠죠. 그런데 신기한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뭔가 방법이 있을까요?”
“아뇨, 이 상황까지 와서 방법이 있을 리가요.”
성필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저희가 만들어왔던 게 대중음악의 성지에서 통하는지 평가받을 시간이에요. 사생아가 부모에게 돌아와 적자(嫡子)로 들여달라고 주장하는 거죠.”
“사생아요……?”
“아시잖아요, 아이돌의 원류는 미국이에요.”
뉴 키즈 온 더 블록.
그들은 아이돌의 원류를 이루고, 춤추며 노래하는 밴드를 세계적으로 퍼뜨렸다. 하지만 미국의 대중음악은 종합 퍼포먼스 밴드를 버렸다.
왜일까.
성필이 생각하기에, 춤추는 동시에 노래하는 인간이란 건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아이돌이 저물어가던 시기는, 얼터너티브 록과 힙합의 가치인 ‘진정성’이 군림할 때와 시기를 같이했다.
춤추고 노래하는 건 신기하지만, 누가 시켜서 한다면 의미가 없다.
미국은 그렇게 판단한 거겠지.
“오늘의 무대는 버려진 문화가 인정받는 첫 발걸음이에요.”
아버지, 내가 돌아왔소.
당신이 버렸던, 당신이 잊었던, 당신의 자식이요.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네요.”
조진만은 성필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미세하지만, 떨리고 있었다.
조진만이 물었다.
“긴장되시나 보네요.”
“당연하죠. 우리 애들의 첫 무대인데요.”
“어제부터 여유롭기만 하시길래, 이젠 다 통달하신 줄 알았어요. 박 이사님은 이루신 거에 비해 자신만만하진 않으시네요.”
“저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요.”
“누구요?”
“마이클 잭슨이요.”
가수이자 무용수이자 작곡가.
고대에만 존재했던 악가무일체(樂歌舞一體)의 예술을 현대에 부활시킨 전무후무한 예술가.
그는 뮤지션인 동시에 프로듀서였다.
성필이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댄스 가수의 원류이자 아직까지도 역사상의 정점인 마이클 잭슨은 군무(群舞)를 싫어했어요. 인형 같다면서요. 그 말이 계속 떠올라요. 미국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까 해서요. 저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게, 다른 사람에겐 꺼림칙하게 보인단 건…….”
프로듀서로선 무엇보다 두려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조진만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성필처럼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은 군무로 인기를 끌었잖아요. 싫어했을 수 있지만, 그 힘은 인정했어요.”
“…….”
조진만이 성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늘, 질문의 답을 들으러 가요.”
아버지, 내가 자랑스럽습니까?
둘은 떠나갔다.
떠나가며, 조진만은 성필이 그저께 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성필은 미국에서의 성공이 최고의 아이돌이 되기 위한 전부가 아니라고 했었다.
‘풍경의 일부이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일부일지도 몰라.’
세상 누구도 종합 퍼포먼스 뮤지션인 아이돌이 어째서 한국에서 전성기를 맞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케이팝은 글로벌 장르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라틴 팝과 스웨디시 팝처럼 팝의 본고장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미국 말이다.
본고장을 바라본다는 건, 케이팝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일지도 모른다. 문화의 원류 자체가 미국에서 탄생했으니 말이다.
케이팝은 갈망한다.
아이돌을 탄생시키고 버렸던 미국을 향해 갈망을 드러낸다.
과연 진화의 끝을 이룩한 케이팝은, 수십 년 전 세계를 풍미했던 미국의 아이돌과 같은 선상의 힘을 가지고 있는가.
한국의 문화가 아이돌을 택했던 건 옳았는가.
아버지를, 따라잡을 수 있는가.
* * *
“가사가 별로네.”
“다른 데 갈까?”
음악을 듣던 두 남자가 다른 곳으로 떠나간다.
분홍색 우비를 걸친 에리카는 눈가를 가린 후드를 들어 떠나가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싸늘하네.”
검은색 우비를 걸친 진소유가 말했다.
에리카는 다시금 무대로 눈을 돌렸다.
이곳은 몇 시간 후 소녀연맹이 공연해야 할 ‘Bud light seltzer’ 스테이지다.
무대의 좌우에 설치된 거대 아이맥(멀리 있는 관객이 아티스트를 잘 볼 수 있게 설치한 프로젝션 스크린)과 정면 안쪽의 중앙 스크린이 위용을 자랑한다.
그런데 넓은 무대 크기에 비해 무대를 차지한 인원은 조촐했다.
록밴드였다.
드럼, 기타, 베이스, 세컨 기타 보컬 프론트맨.
에리카는 그 밴드의 이름을 아이튜브에 검색했다. 최신 뮤직비디오의 조회 수는 고작 수십만이었다.
“아, 저기 또 간다.”
관객석의 가장 앞에 있던 몇 명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에리카는 노래하는 메인 보컬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예리하게 감지했다. 그의 눈동자는 지진이 난 것처럼 위아래로 흔들리길 반복했다.
‘멘탈이 깨지겠지.’
사람들이 계속 떠나가는 걸 보는데, 어떤 뮤지션이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 롤라팔루자엔 공연장이 일곱 개나 있다. 굳이 마음에 안 드는 노래를 끝까지 듣고 있을 필요가 없다.
“우와…….”
진소유가 기분 나쁜 것을 보기라도 한 듯 신음을 흘렸다.
하필 스크린이 동요하는 메인 보컬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당혹을 숨기지 못하고 1초에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목소리마저 흔들렸다.
“이렇게 큰 무대에 섭외된 건 처음일까.”
“소유 너 오늘따라 말이 많네.”
“그러게. 나도 공감이란 걸 할 줄 아나 봐.”
영상 감독이 급히 스크린에 비치는 광경을 바꾸었다. 위에서 아래를 비추는 걸 보니, 드론으로 촬영 중인 관객석인 듯했다.
사람의 수가 그다지 없었다.
몇백 명은 되겠지만, 듬성듬성하다. 개중엔 관객석 뒤에 돗자리를 깔아두고 술을 마시는 이들도 보였다.
스크린엔 분홍색 우비를 입은 에리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작은 점이지만, 이질적인 분홍색 점이니까.
에리카는 이유 모를 한숨을 내쉬자 진소유가 위로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소녀연맹 때엔 이것보다 사람이 많을 거야. 저녁 시간이잖아.”
“그러길 바라야지.”
마침내 밴드의 공연이 끝났다.
메인 보컬은 스탠드 마이크를 붙잡고 연신 ‘감사합니다(Thank you)’를 말했다. 아마 그것 외에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수십 명이 박수를 쳐주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이들이 공연장을 우르르 떠나갔다.
롤라팔루자의 공연은 공연장마다 시각이 교차로 배치되어 있다. 한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다른 공연장으로 이동할 수 있게 시간을 짠 것이다.
시각이 밤에 가까워질수록 한 공연장에서 뮤지션이 등장하는 공백이 줄어들긴 한다.
“여기서 더 기다릴까?”
진소유가 물었다.
에리카가 고개를 저었다.
“저 밴드, 예정된 시각보다 10분 더 넘게 빨리 끝냈어.”
“도망가는 거구나.”
“안 그러면 저 사람 울 거야.”
“여기서 40분은 더 있어야 다음 공연자가 오를 거니까, 옮기자.”
둘은 팸플릿을 보며 공원을 거닐었다.
“에리카, 소녀연맹 이전 뮤지션은 누구야?”
“록밴드. 꽤 유명해. 뮤직비디오 조회 수도 1,000만을 넘어.”
“소녀연맹한테는 다행이네. 그 밴드 덕분에 무대에 사람들이 모일 거잖아.”
에리카는 다시 ‘Bud light seltzer’ 무대를 보았다. 이젠 관객들이 거의 남지 않았다.
아까 밴드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짜기라도 한 듯이 전부 떠나갔다. 드문드문 모여드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사라진 이들보다 많진 않았다.
“유명한 사람 뒤라서 더 안 좋을 수도 있어. 공연이 끝나자마자 전부 사라질 수도 있고.”
“소녀연맹은 백스테이지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지? 그걸 보면…….”
“멘탈이 꽤 부서지겠지.”
에리카는 관객의 입장인데도 가슴이 아플 정도다. 같은 뮤지션이라서 그런 걸까, 과하게 감정 이입이 된다.
톡.
물방울이 비닐을 때리는 소리.
에리카는 하늘을 보았다. 비가 내릴까 싶어 눈을 찡그렸지만, 오지 않았다.
흐린 하늘만이 반겨주었다.
“…….”
에리카는 다시 앞을 보고 나아갔다.
* * *
백스테이지.
소녀연맹 멤버들은 동그랗게 모은 의자에 모여 앉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저녁에 가까워져, 앞 무대가 끝나면 다음 무대에 서기까지의 공백은 고작 10분이다.
밤의 강수 확률은 저녁보다 훨씬 높다.
때문에 주최 측은 공연 시각을 앞당겼다. 헤드라이너 뮤지션의 공연 때 비가 우수수 내리는 사태만은 피해야 하니 말이다.
다행히 오늘 밤 Bud light seltzer에 서는 헤드라이너 뮤지션에게 시간을 당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모양이다.
덕분에 소녀연맹은 예정보다 일찍 무대에 서게 됐지만…….
“오히려 좋아.”
조아라가 긍정적인 말과 함께 주먹과 손바닥을 부딪쳤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일찍 하면 좋죠.”
“왜 매 맞는 걸로 확정이야?”
“……그러게?”
리카의 이의 제기를 받은 조아라는 잠깐 고민하더니, 말을 바꾸었다.
“빨리 관객들 얼굴 보고 싶어요. 빨리하면 좋죠.”
“영원히 다음 차례가 안 왔으면 좋겠어…….”
“쌤이 그러면 안 되죠. 리더잖아요.”
“토할 것 같아…….”
백설하는 가슴께에 손을 얹고 가늘게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소녀연맹으로 살아온 약 4년의 시간 동안 무대 체질이 됐다고 생각했건만, 이국의 무대에 오르게 되자 데뷔할 때와 같은 두려움이 찾아왔다.
서양권 무대에 오른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까지는 단독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콘서트에 오는 건 전부 케이팝의 팬이거나 인민이들이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해외 현장 공연 경험은 없었다. 케이콘도 케이팝 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니 제외해야 하리라.
“인민이들 많이 올까……?”
백설하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신아름이 폰을 들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트잇터랑 위어스 저희 공연 소식에 댓글 많이 달렸어요.”
소녀연맹은 얼마 전 공식적으로 위어스에 입점했다. 위어스의 커뮤니티 기능은 멤버들에게 새로운 소통의 장이었다.
인스타그램이나 트잇터와는 다른 맛이 있다.
게다가 팬들의 게시물에 댓글을 달 수 있어서, 다른 SNS보다 훨씬 팬들과 긴밀해진 기분이 들었다.
“봐요, 다 영어예요.”
신아름이 롤라팔루자에서 찍은 사진을 올리자 영어로 된 댓글이 굉장히 많이 달렸다.
“여기 댓글 단 사람들만 와도 체면치레는 되잖아요. 그니까 걱정하지 마요.”
“…….”
백설하는 그 말을 들어도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뮤지션들의 무대를 보러 다녔더랬다.
그런 뮤지션들에게도 호응이 좋다면, 백설하도 용기를 내어 무대에 설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직접 확인한 광경은 절망의 연속이었다. 공연을 보다가도 떠나가고, 술을 마시며 크게 웃고, 아무런 반응 없이 뚱하니 보기도 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많았지만, 인간이란 원래 부정적인 반응을 더 잘 기억하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진화심리학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에 더 잘 반응하는 이들이 오래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조상들에게 그러한 유전자를 잘 물려받은 백설하는 지금 이 순간, 부정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일본이 그리워…….”
“아앗, 쌤도 일본에 귀화하실 건가요!”
“누가 일본에 귀화한대?”
조아라가 묻자 리카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박 이사님!”
“개소리하지 마.”
“히도이(너무해)…….”
“팀장님 영원히 한국에 있을 거거든?”
“소녀연맹 준비해주세요!”
스태프가 크게 외쳤다.
멤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메인 스테이지로 이어지는 입구 근처에 섰다.
백설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저, 저 곡만 끝나면 나가는 거지?”
“아니에요!”
“응?”
“곡이 끝나면 인사하고, 무대 악기 치우고, 음향 조정 끝내고, 그때 나가는 거예요!”
“으, 으응…….”
멤버들은 밴드의 노래를 불안한 기분으로 감상했다. 그리고 입구의 틈으로 관객의 수를 어림짐작해보았다.
빽빽이 들어차 있다.
“수천 명이야…….”
“뭐, 만 명 넘을 수도 있겠는데요?”
“이 사람들 내년엔 서브헤드라이너급으로 오겠다. 벌써 이만한 집객력이면 헤드라이너도 될 수 있는 거 아냐?”
“사인받아 두자!”
백설하는 아까부터 조용히 있던 장하양을 힐끔 보았다. 장하양은 굳은 표정으로 관객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복장은 소녀연맹의 컴백 무대에서 입었던 ‘르 스모킹’이었다.
타공 패턴이 뚫린 턱시도와 정장 바지, 그리고 컨버스 신발. 턱시도 안쪽에는 브라탑 하나만 입었다.
원래부터 피부가 하얀 장하양이지만, 턱시도의 드러난 부분인 가슴께와 배가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끝났다.”
조아라가 말했다.
연주가 끝나고 밴드 멤버들이 관객석을 향해 손을 흔든다. 자기들도 엄청난 관객 수에 감동했는지, 감사하단 말이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드럼.
“어어……?”
또 곡이 시작됐다.
곡의 차례를 잘못 알고 있던 건가?
“시발 뭔데(What the fuck)!”
백스테이지가 소란스러워졌다.
스태프들이 낭패한 기색으로 고함을 질러댔다.
설마…….
* * *
“취했어.”
성필이 말했다.
조진만이 허탈하게 웃었다.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저 밴드들은 무대에 취했다.
관객들의 호응과, 단독 콘서트에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관객들의 숫자, 그리고 롤라팔루자의 명성에 취하여 시간을 어겼다.
자체적인 앙코르 공연을 펼친 것이다.
성필이 급박한 투로 물었다.
“보통 이럴 때 스태프들은 어떡합니까?”
“과격하면 아예 음향을 끌 수도 있겠지만, 안 하겠죠.”
저 밴드들을 보러 모인 이들이 수천 명, 어쩌면 만 명을 넘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음향을 꺼봐라.
관객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리고 저 밴드도 롤라팔루자에 안 좋은 기억을 가질 수도 있고 말이다.
“한 곡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겠고요.”
그래, 애교로 봐줄 수 있다. 평소 같았으면 씩 웃으며 ‘녀석들, 빛나고 있군’이라고 좋게 볼 수 있겠지.
근데, 지금은 안 된다.
“바람이 심상치 않아요.”
조진만은 기상 캐스터가 아니다.
기상학자도 아니다.
하지만 공연 연출가다. 비록 야외 공연이 전문은 아니지만, 날씨가 음향에 미치는 영향을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게다가 록과 케이팝의 음향 설정은 천지 차이로 다르다. 음향 감독이 즉흥적으로 최적의 상태로 조율해내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감내할 수 있다.
“이 한 곡만이면…….”
톡.
“아.”
그리고, 우려하던 상황이 찾아왔다.
조진만은 하늘을 보았다.
빗방울이 그의 얼굴을 토토톡 때렸다.
“비다…….”
조진만은 성필을 보았다.
성필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무대 위엔 지붕 대신 간이 천막을 설치해두었다. 하지만 조진만의 말마따나 바람이 거세다. 빗방울이 휘어서 무대를 때린다.
무대가 젖는다.
댄스 퍼포머에겐 최악의 상황이다.
음향도, 무대도, 시간도, 소녀연맹을 따르지 않는다.
* * *
무대가 끝났다.
밴드 멤버들은 허겁지겁 악기들을 챙기며 안쪽으로 들어온다. 소녀연맹을 빠르게 지나쳐서 ‘수건!’을 외쳐댄다.
수건을 받은 그들은 소중하게 악기를 닦는다.
드러머는 스태프들과 드럼을 함께 옮긴다. 비에 젖은 드럼을 본 그는 울상이 되었다.
“울고 싶은 건 우리라고…….”
조아라가 씹어 뱉듯이 외친다. 그녀는 정말 울 것처럼 목소리가 흔들렸다.
비다.
무대가 젖고, 음향이 망가지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최악인 건.
“관객들 없는 데서 공연하겠네…….”
비가 온다.
몇 명이나 남을까?
수백 명이라도 있으면 감사할 일이겠다.
하지만 만 명이 모였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고작 수백 명만 남게 된다면, 그 무슨 치욕일까.
그 광경이 영상으로 찍혀 떠돌기라도 한다면 뮤지션으로서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소녀연맹의 차례가 되자마자 수천 명이 자리를 떴다고, 악의적인 비방이 넘쳐날지도 모른다. 비가 왔단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인민이들 몇백 명만이 자리를 지키겠지.
아니, 그들도 나무나 천막 아래로 대피할지도 모른다. 비가 오는데 관객석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미룰까요?”
뒤에 연출 스태프가 나타났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답하지 못했다.
백설하가 드문드문 영어로 물었다.
“비는 언제 그칠까요?”
“모릅니다.”
“…….”
“소나기(Shower)겠지만, 언제 그칠지는 명확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춤을 추니, 무리해서 나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관객들에게 통보하겠습니다.”
연출 스태프가 떠나가려 했다.
백설하가 자그맣게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곧 손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허망이 무대를 보았다.
비가 왔지만, 춤출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소녀연맹이 신은 신발은 바닥에 울퉁불퉁한 컨버스화(靴)다.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고 성필이 미리 준비해둔 것이었다.
밑창의 마찰력이 일반 신발 이상이라, 물을 밟아도 미끄러지기 쉽지 않다.
비도 많이 오는 수준은 아니다.
그런데, 모르겠다.
비 올 때 춤춰본 경험은 없다.
동선이나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
아니, 비가 문제가 아니다.
텅 빈 관객석을 보고 제대로 퍼포먼스할 수 있을까.
정신이 버텨줄까.
“얘들아!”
멤버들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돌렸다.
비로 전신이 젖은 성필이 보였다. 그는 우비를 한 손에 든 채 백스테이지로 달려왔다.
리카가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세쿠시(섹시)!”
“어떡할래!”
다짜고짜 성필이 물었다.
멤버들이 혼란에 빠졌다.
어떡할 거냐고?
“우, 우리들이 정해요?”
조아라가 묻자, 성필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무대에 나가는 시각까지 6분 정도 남았어.”
성필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라면, 내가 아이돌이라면, 지금 나간다.”
“……!”
“관객들이 더 떠나기 전에 붙잡을 거야. 너희가 늦게 나가도, 공연 시간을 덜 소화해도, 돈은 그대로 받아. 그런 계약이야. 하지만, 너희가 늦게 나갈수록 너희를 보는 관객들의 수는 적어져. 나는 태양 아래에서 수백 명한테 너희들을 보여줄 바에야, 빗속에서의 수천 명한테 너희들을 보여주고 싶어. 돈을 벌러 온 게 아니야!”
돈을 벌러 온 게 아니다. 그 말이 멤버들의 가슴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너희들의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 온 거야!”
리카가 주먹을 꼭 쥐었다. 주먹이 이유 모를 감정으로 떨려왔다.
성필은 아까의 다그치는 목소리와 전혀 다른, 따스한 호기심이 깃든 투로 물었다.
“그리고, 궁금하지 않아? 너희의 무대가 비를 이길 수 있을지?”
비를 맞는 것도 감수하고 공연을 보게 할 수 있을지.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지.
“궁금해요.”
장하양이 흥분한 소리로 답했다.
“저도 이사님이랑 같은 생각이었어요. 저 밴드가 들어온 순간부터 바로 나가고 싶었어요.”
“……나도요.”
조아라가 동의했다.
“시간을 끄는 지금도 관객들이 조금씩 떠나가고 있을 거잖아요. 팍 튀어 나가서 ‘날 봐라―!’라고 외쳐주고 싶어요.”
신아름이 어처구니없단 듯 픽 웃었다. 조아라가 ‘뭐’라 톡 쏘며 신아름을 어깨로 쳤다.
“그래, 나가서 소리 질러. Look at me―! 쌤한테 핸드 마이크 받아서 해봐.”
“비꼬냐?”
“진짜 괜찮을 거 같아서 말하는 거거든? 최소한 한 명쯤은 돌아오겠지. 그 한 명이라도…….”
신아름이 멤버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 한 명이라도, 붙잡고 싶거든.”
“5분 남았어요!”
리카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근데에.”
그때였다.
백설하가 쭈뼛쭈뼛 말했다.
“비, 비 오는데 나가면 우리 옷이…….”
멤버들은 자기들의 옷을 보았다.
타공 패턴의 르 스모킹.
“조금 선정적이게 되진 않을까……. 안 그래도 달라붙는 건데 물에 젖기까지 하면, 그…….”
백설하가 성필의 눈치를 살폈다.
“라, 라인이 다 드러날 텐데…… 특히 아래쪽이…….”
침묵이 감돌았다.
리카가 ‘음음’ 고개를 끄덕였다.
“쌤은 위험하긴 하겠네요!”
“나만?!”
“괜찮아.”
장하양이 말했다.
백설하가 입술을 비쭉 내밀고 ‘하양이는 괜찮겠지……’라며 응수하려던 순간, 백설하는 깨달았다.
장하양의 눈이 맛이 가 있다.
그녀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얼굴은 열기 때문에 평소의 창백한 빛을 잃고 붉어져 있다.
“괜찮아요.”
“하양아……?”
“언니 제모했어요?”
“어어?!”
“난 미국 오기 전에 받았어요.”
“나, 난 그쪽은 무모인…….”
“그리고.”
장하양이 재킷을 거칠게 벗어젖혔다. 단추가 경쾌하게 터져나갔다.
멤버들과 성필, 백스테이지를 돌아다니던 스태프들이 동시에 숨을 헛삼켰다.
장하양이 입은 건 ‘캘빈 클라인’의 브라탑이 전부였다. 가슴을 가린 브라탑 부분을 제외하고, 장하양의 조각 같은 상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장하양의 미소가 흥분을 잔뜩 머금었다.
“오늘은 보여줘도 되는 속옷이야.”
장하양이 자신의 뺨이 붉어지도록 짝짝 때렸다.
“보여줘도 되는 속옷이라고―!”
장하양이 무대를 향해, 빗속을 향해 거친 걸음으로 성큼성큼 눈 깜짝할 새 나아갔다.
그녀는 핸드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가서.
“날 봐라(Look at me)―!”
어마어마한 고함에 스피커가 찡 울렸다. 잔향이 가시지도 않았건만, 장하양은 이전의 외침을 상회하는 음량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무대의 중앙, 거세게 때려 박히는 빗속에 서서 고고하게, 세상을 향하여 소리쳤다.
“소녀연맹이 왔다(Girl’s League is here)―!”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멤버들은.
멤버들은…….
“에이 씨!”
조아라가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곤 무대로 달려 나갔다. 다른 이들도 허겁지겁 재킷을 벗었다. 비를 머금으면 무거워져 방해만 될 옷을 벗어 던지고 장하양의 뒤를 따라 나갔다.
백설하도 뒤늦게 단추를 만지자, 성필이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백설하가 화들짝 놀라 그를 보았다.
“설하는 하지 마. 재킷이 물을 먹어서 거추장스러워도, 버텨줘.”
“……느, 네.”
백설하도 헐레벌떡 멤버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필은 백스테이지에서 그녀들을 보았다. 무대 위에 선 다섯 명의 뒷모습을.
중앙에 선 장하양이 검지를 하늘로 치켜든 채였다. 멤버들은 미리 맞춘 것처럼 함께 하늘로 검지를 들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없다.
오히려 어두운 먹구름뿐이다.
더욱 최악인 건 비까지 내린단 것이다.
그 누구도 반겨주지 않는다.
최고의 조명감독일 터인 태양마저도 오늘은 소녀연맹을 버렸다.
그럼에도 빗속에 당당히 서서 하늘을 가리키는 멤버들은, 누가 뭐래도 빛나고 있었다. 빛을 받아서 빛나는 게 아니라, 그녀들 자체가 빛이 났다.
하늘을 향한 손가락은 선언하는 듯했다.
네 도움 없어도, 우리는 이곳의 누구보다 빛나리라고.
그러니 지켜보아라.
우리.
“소녀연맹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