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화
성필과 장하양은 사람의 물결을 헤치며 메탈리카의 공연장을 향해 나아갔다.
“박 이사님이 메탈리카를 선택하실 줄 몰랐어요.”
“내가 록 안 좋아할 거 같아?”
“아이돌 노래 자체가 팝이잖아요. ‘두아 리파’나 ‘더 키드 라로이’를 보러 가실 줄 알았어요.”
“나도 네가 메탈리카 보러 올 줄 몰랐어. 갑자기 마음이 왜 바뀐 거야?”
“섹…….”
“갑자기 록 매니아가 된 건 아닐 테고.”
“이사님 음악사 강의 때문에요. 메탈리카가 중요한 뮤지션으로 소개됐었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정상으로 있는 그룹이니 배울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이 콜 씨를 못 보는 건 아쉽지만, 이게 더 가치 있지 않을까요?”
“가치는 네가 정하는 거지. 네가 좋아하는 걸 보러 가는 편이 나을 거야. 안 그러면 후회할걸? 지금이라도…….”
“이미 정했어요.”
이럴 때의 장하양은 웬만해선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부디, 성필은 그녀가 메탈리카를 택한 걸 후회하지 않길 바랐다.
사람들의 밀도가 더욱 진해졌다.
더는 성필과 장하양이 곁에 서서 갈 수 없어졌다. 성필이 앞서가고 뒤를 장하양이 따라갔다.
“그런데 김덕팔 부장님은요?”
“이 상황을 미리 예견하시고 돌아가셨지.”
“확실히, 벌써 기운이 빠지긴 하네요.”
장하양이 낮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웃음소리엔 옅은 피로가 섞여 있었다.
인간으로 이루어진 물결을 느릿느릿 한 곳을 향해 흘러갔다. 모두 메탈리카를 보기 위해 모여드는 것이었다.
앞지르거나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대론 공연장에서도 제일 뒤에 서겠는…….”
“아.”
당황한 음성이 들리자 성필이 반사적으로 뒤로 돌아보았다. 장하양이 사람들에게 밀려 성필에게서 몇 발자국 뒤로 떨어졌다.
성필이 급박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장하양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괜찮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아주 잠깐 밀려갔을 뿐인데도 호흡이 거칠었다.
성필은 과거 미국으로 떠났을 때의 조아라가 떠올랐다. 그녀는 미국에서 단기 미아 체험을 하곤, 성필을 보자마자 끌어안았었다.
이곳에서 홀로 떨어지는 경험도 조아라의 미아 경험 못지않게 두려운 것일 터다.
성필은 꽉 잡은 장하양의 손을 보곤, 조금씩 힘을 뺐다. 잡은 손이 풀리자 장하양은 성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떨어지면 안 되니까요.”
“응, 꽉 잡아.”
그때 저 멀리서 기타 리프가 들려왔다.
“아, 시작됐다.”
메탈리카가 공연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먼 거리에서도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공연장으로 향하는 물결이 조금 더 빨라졌다. 사람들도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양아, 조금 더 빨리 갈게.”
“네.”
한적한 곳에서부터 메탈리카의 공연장으로 가기까지 고작 몇 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아예 다른 장소에 온 것처럼 인간의 밀도가 크게 높아졌다.
나름 빨리 왔다고 생각했건만.
“떨려요.”
“응?”
“아직 메탈리카가 보이지도 않는데 주변이 떨려와요.”
장하양의 말마따나, 근처의 사람들은 메탈리카의 코빼기도 못 봤건만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메탈리카의 연주와 보컬만으로도 함성을 내지르는 이들마저 보였다.
“록밴드가 가진 장점이지.”
“록밴드의 장점이요?”
“록밴드의 라이브는 공간적 제약이 거의 없어. 실제로 10만 명 규모의 콘서트를 한 밴드도 존재해.”
10만 명 규모의 공연장이라면, 관객 거의 절반은 밴드 멤버의 얼굴도 제대로 못 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콘서트에 갔던 이들도 알았을 테지. 가봤자 록스타의 실물을 볼 수는 없단 걸 말이다.
하지만 간다.
“밴드의 무기는 목소리와 악기 연주야. 공간적 제약이 거의 없단 건, 시각과 달리 소리는 스피커를 통해 얼마든지 증폭할 수 있단 뜻이야.”
그러니 공연장과 조금 떨어진 이 장소에도 흥분이 전염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리를 듣고 상상한다.
밴드 멤버들의 악기 연주와 노래를. 그리고 그 소리 하나하나를 귀로 음미할 수 있다.
굳이 볼 필요가 없다.
“록밴드의 무기는 현장감을 압도적으로 넓은 범위까지 전파할 수 있단 거야. 보이지 않아도 돼. 느낄 수 있어.”
19세기의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은 과거의 기업가보다 당대 기업가들의 수입이 폭증한 이유를 분석했다.
이유는 통신 기술의 발달이었다.
기업가는 영국에서 차를 마시면서도 오스트레일리아의 목장을 경영할 수 있게 됐다.
세계를 가로지르는 자본가의 탄생이다.
마셜은 이러한 수입 폭증이 일어날 수 없는 직업을 예시로 들었는데, 바로 가수였다.
가수가 아무리 유명해도, 공연장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인간의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엔 고작 몇백 명, 많아도 천수십 명을 채울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가수는 아무리 유명해져도, 수입은 자본가의 발끝도 못 따라간다고 설명했었다.
그의 예언은 몇십 년 후 깨졌다.
게임 체인저, 음향 증폭 기술의 등장, 스피커의 발명이었다.
스피커는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재즈 빅밴드를 해체하고 작은 단위의 밴드를 주류로 만들었다.
“난 이걸 보려고 온 거야.”
록이 재즈의 뒤를 이어 시대를 강타한 건 필연이었다.
음향 기술 발전의 수혜는 록밴드와 록스타들에게 주어졌다. 아이튜브 뮤직비디오가 춤과 노래를 종합한 퍼포머, 아이돌에게 새 지평을 열어준 것처럼.
“시대를 바꾼 문화…….”
이윽고, 두 사람의 눈에 공연장이 들어왔다.
사람의 벽을 수십, 수백 번은 넘어야 겨우 무대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그럼에도 거대한 스피커가 내뱉는 굉음은 메탈리카의 노래를, 연주를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메탈리카다…….”
장하양이 황홀하게 읊조렸다.
메탈리카.
동시대 경쟁자 여럿의 앨범 총판매량을 합친 것보다 2배 이상의 판매량을 올린 록밴드.
40년의 활동 중 앨범 총판매량 130,000,000장.
그래미 어워드 8회 수상.
로큰롤 명예의 전당 입성.
살아있는 전설.
물론, 장하양은 그들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무대 위에 선 실물은 당연하고, 전광판에 뜬 멤버들의 얼굴조차 면봉보다 훨씬 작게만 보인다.
그런데.
‘울린다.’
피부가, 심장이, 머리가, 전신(全身)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전율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그건 아마 장하양만의 기분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인간들의 흥분, 감동, 환희가 전염된다. 그 모든 감정이 합쳐져 공기를 울렸다.
‘나는 메탈을 잘 몰라.’
메탈은커녕 록과도 친하지 않다.
듣는 록 음악이라곤 ‘브레멘 음악대’ 활동할 때 연습했던 수십 곡이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메탈리카의 대단함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세운 기록을 몰라도, 이 자리에 선 모두가 알 것이다.
아우라.
진정한 우상으로 시대 위에 군림했던 이들이 내뿜는 아우라가 거리를 무시하고 장하양을 관통했다.
장하양이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뒤에서 압력이 전해졌다.
[Master of Puppets(마스터 오브 퍼펫)―!]
메탈리카의 히트곡 중 히트곡이 시작됐다.
몇 명인지 모를 이들이 메탈리카를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앞줄을 밀어댔다.
장하양은 사람 사이에 끼었다. 뒤에서 미는 힘이 너무나 강하여, 자칫하면 넘어지거나 하여 다칠 수도 있겠다.
“읏……!”
대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 생각한 순간 두꺼운 팔이 장하양을 감쌌다. 아주 강하게 감싸서 끌어당겼다.
장하양의 시야가 뒤바뀌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성필의 얼굴이 보였다. 성필과 틈이 없을 정도로 밀착했다. 성필에게, 안겼다.
“…….”
장하양은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을, 등을 두른 팔의 온기를 적나라하게 느꼈다.
여름이다. 사람이 많다. 이 지독한 인파의 열기 안에서도, 성필의 온기는 나른한 안정감을 주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Come crawling faster
Obey your Master
Your life burns faster
Obey your master, master
(더 빨리 기어봐
네 주인에게 복종해
네 생명은 더 빨리 타오르지
네 주인에게, 주인에게 복종해)]
드럼보다 빠른 맥동이다.
심장이 뛸 때마다 혈관이 어떻게 몸으로 뻗어 있는지 알 것 같다. 목과 눈 주변, 큰 혈관이 있는 곳은 심장의 외침을 따라 박동하길 반복한다.
‘들킬 거야.’
이 커다란 고동이, 반드시 성필에게 전해질 것이다. 이 고동을 느낀 성필은 뭐라고 생각할까.
[Just call my name
Cause I’ll hear you scream
Master, Master
(내 이름을 불러봐
난 네가 주인님, 주인님이라고
소리치는 걸 들을 거거든)]
열기가 장하양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것을 느꼈다.
성필이 왼팔로 장하양을 안았기에, 그녀의 등은 성필의 왼쪽 가슴에 닿아 있었다. 성필의 심장 박동 또한 느껴진다.
장하양처럼 빨랐다.
그의 박동을 느낀 순간, 장하양의 심장이 그보다 더욱 빨라졌다. 장하양은 뻣뻣한 고개를 들어 성필의 얼굴을 보려 했다.
성필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Master of Puppets
I’m pulling your strings
Twisting your mind
and smashing your dreams
blinded by me,
You can’t see a thing
Just call my name,
Cause I’ll hear you scream
Master, Master
(꼭두각시의 주인
난 너를 맘대로 조종하며
너의 마음을 비틀고
꿈을 부숴버리지
나로 인해 눈이 먼 너는
무엇 하나 볼 수 없어
그냥 내 이름을 불러
주인님 주인님 외치는 걸 듣게)]
성필의 눈은 장하양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저 멀리,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메탈리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하는 걸까.
그도 장하양처럼 거칠게 뛰는 고동을 숨기려는 걸까.
‘아니야.’
이 심장의 주인은 장하양이 아니었다.
성필의 심장은 문화(文化)를 향해 있었다.
그 거친 박동은 인류의 가장 가치 있는 유산을 향해 있었다. 그의 눈에 서린 감격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장하양은 여전히 뛰는 심장을 간직한 채 귀를 기울였다. 아이돌인 그녀는 관객들의 마음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더없는 행복으로 가득 찬 인간들의 목소리다.
‘알겠어.’
성필이 아까 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피부로 느낀다.
록밴드의 무기.
현장감을 압도적으로 넓은 범위까지 전파할 수 있다. 연주는 춤과 달리, 스피커로 얼마든지 증폭할 수 있으니까.
연주는 보는 게 아니라 듣는 것이니까.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건만, 밴드가 줄을 튕기고 드럼을 두드리는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청각적 만족감.
그 힘을 느끼자, 장하양은 불안을 느꼈다.
과연 춤이란 무기를 지닌 아이돌이, 이러한 무대에 익숙한 미국이란 땅에서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우리의 무기가 닿을까?’
그리고 장하양의 이러한 불안은 동시적으로 멤버 전원에게 발생했다.
카이고(KYGO)의 무대를 보는 리카.
그녀는 주변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손을 위로 뻗는다.
곡이 빌드업을 거쳐 드롭으로 나아가는 시점, 사람들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탄성과 환호성을 내지른다.
‘이게 정상급 DJ의 무대…….’
카이고가 디제잉을 위해 손을 테이블로 가져갈 때마다 소리가 폭발하고, 사람들을 하늘 끝까지 데려간다.
미국의 클럽 문화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클럽이 성행하고, 그게 대중적인 놀이 문화로 받아들여진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탄생한 정수가 리카의 눈앞에 있다. 심지어 그 정수는, 미국이란 땅엔 발에 챌 만큼이나 많다.
미국, 숨 쉬듯이 세계 정상급 디제이를 뱉어내는 나라다.
리카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이들과는 달리 차분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의 무대도 이럴까?’
정답은 ‘아니’다.
리카 스스로가 알았다.
동시에.
조아라는 ‘머신건 켈리’의 무대를 보고, 신아름은 ‘더 키드 라로이’의 무대를 보고, 리카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저들과 자신들은 디디고 선 땅 자체가 다르다.
소녀연맹에게 미국은 철저한 이방(異邦)이다. 그리고 소녀연맹은 이러한 무대를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아이돌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뮤직비디오다.
아이돌의 정수이자 미학의 집합체.
아이돌에게 가장 중요한 건 현장에서의 무대 장악력보다, 카메라에 어떻게 보이는지이다. 그래서 아이돌의 춤이 ‘방송 안무’라고 불리지 않던가.
그러나, 무대 위에 선 저 팝스타와 디제이, 록스타들은 이러한 무대를 수없이 겪으며 성장해왔다. 그들에겐 현장 무대가 가장 중요한 전장이었다.
그들이 쌓아온 힘은 소녀연맹과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소녀연맹이 살아온 세계는 잘 꾸며진, 이물질 하나 없는 완벽한 수족관이다. 정해진 규격 속에서 최고의 퀄리티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정해진 규격.
그건 곧 올라야 할 무대에 유리 조각이 깔려 있더라도 정해진 춤을 추어야 하는 숙명과 비슷하다.
완벽하게 준비한 무대에선 가장 큰 빛을 발하지만, 많은 아티스트들이 공유하는 공용 무대에선 힘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곳은 미국.
소녀연맹의 전장이 아니다.
멤버들은 실감했다. 미국이 대중문화의 정점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를.
멤버 모두가 내일의 무대를 걱정하는 와중, ‘두아 리파’의 무대를 보는 백설하는.
‘와…… 노출이…….’
두아 리파의 복장을 보고 감탄하는 중이었다.
두아 리파는 몸에 밀착하는 드레스를 입었다. 그런데 드레스는 맨살이 절반이고 천이 절반이었다.
심지어 노출한 부위는 등이나 다리처럼 커다란 부분이 아니었다. 밀착한 드레스를 나선형의 선이 타고 오르는 형태로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두아 리파는 종아리의 일부와 허벅지의 일부를, 겨드랑이의 일부와 가슴의 일부를, 그리고 둔부를 그대로 드러냈다.
드레스를 입었는데 거의 벗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특히 둔부는 그냥 티팬티를 입은 것과 다를 바 없는 노출이다.
“…….”
백설하는 자신의 차림을 보았다.
박시한 티셔츠와 헐렁한 반바지다.
‘미국 사람들은 저런 걸 좋아하나……?’
백설하는 두아 리파의 복장을 입은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안 어울릴 거야 분명…….’
* * *
오늘의 모든 라인업 무대가 끝나자 그랜트 파크도 한가해졌다. 내일 출근할 숙명인 이들은 돌아가고, 남은 이들은 여기저기서 술을 마시며 돌아다녔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공연이 끝나자 처음 찢어질 때 모이기로 약속했던 나무 아래로 집결했다.
“더 키드 라로이는 직접 보니까 그저 그렇더라. 하이라이트 때 그냥 뿅뿅 뛰기만 하더라고. 나였으면 춤췄을 텐데.”
“머신건 켈리는 몸이 문신투성이더라.”
신아름과 조아라는 각자가 본 공연자에 대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내용이 그리 실속 있지는 않았다.
실속 없는 대화가 끝나자, 둘은 벤치에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는 리카에게로 다가갔다.
“야 리카, 넌 어땠어?”
“……아라쨩.”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어?”
“한국에선, 디제이로서의 경험을 어디서 쌓으면 좋을까?”
“아이돌 그만두면 클럽에 가서 쌓던가.”
“한국 클럽들은 작잖아! 뮤지션의 비애야! 한국에 태어나서 록스타를 목표로 하는 사람보다 더 가시밭길이야!”
“아니, 록스타 목표로 하는 사람이 더 가시밭길이지.”
“미국에서 활동해야 해!”
“미국 카와이 베이스 디제이도 있나?”
“……일본에서 활동해야 할까?”
“일본엔 있을 수도.”
일본의 음악 인프라는 한국보다 더 크고 다양하다.
도시마다 소극장, 라이브 하우스, 클럽이 몇백 개씩 있다는 모양이니 카와이 베이스 디제이를 받아줄 곳도 하나쯤은 있겠지.
“디제이 일 걱정하기 전에 아이돌 일이나 걱정해.”
신아름이 핀잔을 주자 리카가 버럭 대들었다.
“알아! 안다구!”
“왜 화내?”
“몰라!”
리카가 흥 고개를 돌리자 신아름이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그리고 턱을 슬슬 쓸어주면서 ‘왜 화내?’라고 거듭 물었다.
리카는 그럴수록 흥 흥 삐친 티를 낼 뿐이었다.
“쌤은요?”
조아라가 백설하에게 물었다.
“쌤은 어땠어요? 팝스타 직접 봤잖아요. 우리 중에 제일 실속 있었을 거 같은데.”
“대단했어.”
“구체적으로 뭐가요? 노래?”
“의상이랑 몸이랑 얼굴이.”
“쌤도 의상은 몰라도 몸이랑 얼굴이 대단하잖아요.”
“에이, 쌤 의상도 대단하지.”
신아름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 ‘르 스모킹’ 미쳤잖아.”
“두아 리파는 그거보다 대단했어.”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 그럼?! 아, 아예 벗지 않고선 쌤의 르 스모킹을 못 넘어설 텐데?!”
“……옷 얘기가 아니라 몸 얘기하고 있니 너?”
“쌤한테 몸 말고…….”
잠시 후, 신아름이 기절하여 벤치에 몸을 뉘였다. 리카가 콕콕 찔러도 반응이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인형(人形)이 다가오고 있다.
“아저씨랑 하양 언니다.”
장하양을 한 팔로 끌어안은 성필이 다가왔다.
“…….”
조아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신아름이었다. 그녀는 언제 기절했냐는 듯 뛰쳐나가 성필과 장하양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팀장님 뭐 해요! 왜 언니를 안아요?!”
성필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난 사심 없어.”
“누가 뭐래요?! 그러니까 더 수상하잖아요!”
“사람이 많아서 이사님이 나 보호해주시던 거야.”
“사람이 어디 많은데요!”
신아름의 말마따나 주변은 이제 꽤 한적해졌다. 신아름이 눈을 부릅뜨고 추궁하자 장하양이 간단히 답했다.
“메탈리카 공연장 안 와봤으면 말을 하지 마. 나 생명의 위기까지 느꼈어. 그렇죠 이사님?”
“미안…….”
“여기서 사과하시면 안 되죠. 저를 지켜주셨다고 해야 하잖아요.”
“메탈리카가 너무 대단해서 정신을 잃고 있었나 봐.”
“이사님은 정신을 잃으면 사람을 안으세요?”
“시험해보자!”
리카가 성필에게 달려와 뒤통수를 착 때렸다.
“정신을 잃으셨나요!”
“아니.”
“모 잇카이(한 번 더)!”
성필이 리카의 관자놀이를 엄지로 꽉 눌렀다.
“끼에에에에에에엑!”
“팀장님은 그렇다 치고요!”
“그렇다 쳐주는 거야?”
“하양 언니는 사람 없어지면 떨어져야죠!”
“내가 왜?”
이번엔 전부 다 할 말을 잃었다.
장하양이 양손을 펼쳤다.
“아하하, 농담. 내가 박 이사님 놀린 거야. 처음엔 사람이 많아서, 나 보호해주시려고 팔 안에 넣으셨던 거였어. 공연 끝나고 놓으려고 하셨는데, 사람 많으니까 계속해 달라고 했어.”
“근데 왜 여기까지……?”
“말했잖아, 놀렸다구.”
장하양이 성필을 향해 피시시 웃어 보였다.
“사심 있는 거 아니시면, 이대로 계속 있어 달라고 부탁드렸어. 아직 무서우니까. 곤란해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재밌던지, 여기까지 이사님 얼굴 보는 재미로 왔어.”
아까보다 더한 정적이 펼쳐졌다.
성필이 손을 벌벌 떨며 눈가를 문질렀다.
“나를 놀려……? 가로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을……?”
리카가 어디서 났는지 품에서 케이크용 플라스틱 칼을 꺼내어 검신(檢身)을 핥았다.
“죽일까요 마스터?”
“나는 하양이 네가 정말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너는, 넌, 내 마음을 배신했어……!”
“끼얏호우!”
리카가 호다닥 쇄도하여 플라스틱 칼로 장하양의 배를 꾸욱 찔렀다. 플라스틱 칼은 얇은 천 하나도 뚫지 못한 채 어처구니없이 휘어지고, 이내 똑 부러졌다.
“복근에 막혔다?!”
“아하하.”
리카의 장난 덕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여기저기서 리카의 촌극을 보곤 웃음을 터뜨렸다.
장하양도 주변에 융화되어 웃었다. 그러던 도중 신아름과 눈이 마주쳤고, 장하양이 움찔했다.
신아름은 입꼬리를 조금도 올리지 않고, 문자 그대로 찢어 죽일 것처럼 장하양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눈동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팀장님 놀리지 마요…….”
신아름의 목소리는 낮고 희미했다.
언니에게 말하느라 예의를 챙기느라, 가 아니었다. 모든 심력을 다하여 어떤 감정을 억누르기 때문에, 목소리도 같이 눌린 것이었다.
“알았어요, 언니?”
“어, 응…….”
그때 성필이 부러진 케이크 칼을 주웠다. 그리고 케이크 칼을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다들 오늘 어땠어?”
멤버들이 차례로 짧은 감상을 뱉었다.
공통적으로 좋은 경험이라고 했다.
성필이 버릇처럼 미소 지으며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좋았다’고 하긴 했으나, 느낀 감정은 그게 다가 아닐 것이다.
“혹시 낮 시간에 인기 없는 무대들도 봤어?”
“…….”
“사람들이 모이긴 해. 그중엔 무대에 선 뮤지션의 팬들도 있고. 하지만 반응이 그저 그런 편이었어. 마치, 한우 축제에서 어르신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느낌으로.”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우리 무대도 비슷한 느낌일 거야. 케이팝 팬들이 모인다지만, 그 수는 얼마쯤 될까. 최소는 몇백 명일 거고, 많이 모이면 천 명 정도겠지. 그리고 너희들을 모르는 사람들이 또 천 명 정도일 거야.”
성필이 손깍지를 끼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미국의 뮤직 페스티벌에 초대받았다. 너희들이 많이 들떴으리라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큰 반응이 오진 않을 거야. 어쩌면 실망할지도 몰라.”
소녀연맹의 무대에 반응해주는 인민이들이 일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멀뚱멀뚱 가만히 있을 수도 있다.
“인민이들의 사랑을 먹고 커다란 무대를 누벼온, 그리고 마침내 케이팝의 정상에 서게 된 너희들에겐 가슴 떨리는 상황일지도 몰라.”
미국의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한다.
부푼 꿈을 품었겠지.
하지만 정작 마주한 관객들의 반응은 그리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처음으로 섰던 HTP 뮤직 어워드처럼 말이다.
“너희한테 관심이 없어도 모여드는 사람들이 꽤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반응이 무뎌도 실망하지 말란 거야. 흔들리지도 말고. 무엇보다, 멘탈이 무너지지 마. 뭐, HPT 뮤직 어워드에서 ‘아라베스크’를 성공시킨 너희들한텐 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멤버들은 답이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백설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 페스티벌은 케이팝 페스티벌도 아니고, 저희만을 위한 콘서트도 아닌걸요. 게다가 고향이 아닌 외국이구요. 반응이 싸늘한 거에 마음이 꺾일 정도로, 이제 저희는 약하지 않아요.”
“음…….”
성필이 마음에 안 든단 듯 반응하자 백설하는 당황했다.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며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더 나은 대답이 있을 텐데?”
“네, 네에?”
“소녀연맹의 리더가 겨우 이 정도야?”
“으에……?”
“나요 나요 나 나 나!”
조아라가 손을 번쩍 번쩍 들었다.
성필이 그녀를 가리켰다.
“그래, 아라.”
“‘반응이 안 좋을 거다’라고 체념하면 안 되죠. 쌤, 안 그래요?”
“어……?”
“반응을 이끌어내야지.”
백설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하가 드디어 정답에 도달했…….”
“이 공연장들은 춤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어요. 대형 스크린이 있지만, 카메라 감독들도 우리나라 PD들처럼 아이돌의 카메라 워크에 익숙하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차라리 말해요.”
풀 포커스(Full focuse)로 잡아달라고.
“우리의 ‘방송 안무’를 살려주지 못할 거면, 차라리 풀 포커스로 잡아달라고 말하자고요. 그렇게, 보여주는 거예요.”
아이돌의 무기.
춤과 노래가 결합된 퍼포먼스를.
“우리를 모른다면, 우리의 노래를 내일 처음 듣게 된다면, 감탄시켜야죠.”
“맞아.”
장하양이 조아라의 이야기를 받았다.
“메탈리카의 무대를 보고서 계속 생각한 게 있어. 우리는 밴드처럼 노래만으로 승부할 수 없단 거야. 우리의 무기는 스피커가 아니라 스크린이야.”
애초에 아이돌의 노래는 오로지 ‘듣는 것’만 고려해서 설계되지 않는다.
‘보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다.
“첫 무대부터 혼을 빼앗자.”
장하양이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맞추었다.
신아름과 눈을 맞추는 시간이 유독 짧았다.
“무대 순서를 바꿔서, 첫 무대는 ‘오토마타’야.”
다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신아름 빼고.
“우리의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서 있던 관객들 전부, 한 시간 동안 아무 데도 못 가게 하는 거야.”
말 그대로, 혼을 빼앗겠다.
소녀연맹이 가진 최고의 댄스 퍼포먼스로.
“박 이사님, 가능할까요?”
“탁월한 선택이야.”
소녀연맹의 목표는 인민이들이 아니다.
인민이들보다 훨씬 많을 미국의 관객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한국어를 모를 테니, 전달력이 떨어지는 곡들을 첫 무대로 고르는 건 악수(惡手)가 된다.
“직접 롤라팔루자에 오기 전의 세트리스트는 지극히 인민이들을 상대로 한 거였어. 아마, 직접 공연들을 보지 않았다면 이 차이를 몰랐겠지. 한국이 아닌 장소, 케이팝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상대로 한 공연에서의 세트리스트를.”
“그럼…….”
“첫 무대는 ‘오토마타’로 하자.”
성필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너희들의 첫 무대를 보고 나서의 56분 동안, 감히 다른 공연장을 갈 생각도 못 하게.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거야.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너희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멤버들이 성필의 손 위에 손을 겹쳤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와아아아아!
“팀장님 놀리지 마요…… 알겠어요……?”
“아, 알겠어 아름아…….”
소녀연맹, 공연까지 18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