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화
성필과 김덕팔은 시카고 그랜트 파크를 한가롭게 거닐었다.
그랜트 파크 여기저기엔 롤라팔루자의 스폰서들이 설치한 팝업 스토어가 들어서 있었다. 내일 축제가 시작되지만 아직도 구조물과 가게 설치는 끝나지 않았다.
보안 요원, 시공 관계자, 축제 관리자들이 공원을 빠르게 오고 다녔다.
그 가운데를 걷고 있자니 연차를 쓰고서 평소의 출근길을 걷는 듯한 여유가 느껴졌다.
“메탈리카의 노래를 아신다니 의외입니다. 현재로선 연식이 꽤 된 밴드 아닙니까.”
“어지간히 유명한 밴드여야죠.”
“그래도 박 이사님 시대의 밴드는 아니니, 조금 놀랐습니다.”
“음악으로 밥을 벌어먹고 사니까요.”
성필이 버릇이 된 미소를 지었다.
태양 볕이 강하여 눈은 찌푸렸기에, 그의 장기인 화사한 미소가 빛을 발하진 못했다. 눈가에 그늘이 져서 살짝 무서운 인상이기도 했다.
“그거 아세요? 요즘엔 록을 듣기 시작하면 최신 밴드를 찾아보기도 하지만, 옛날 밴드들을 먼저 찾아보기도 해요.”
“그런가요? 특이하군요.”
“록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쌓였잖아요. 세기를 풍미한 록의 역사엔, 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명곡들로 가득하죠.”
스트리밍 산업의 발달은 모두가 예상치 못한 어느 한 효과를 불러오게 됐다.
바로 과거 아티스트의 재조명이다.
사람들은 현대와 간격을 둔 뮤지션들인 멜 토메와 비치 보이스, 에이브릴 라빈 등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이 때문에 올드팝 저작권을 가지고 있던 대형 유통사들은 때아닌 호황을 맞았다. 그로써 옛 가수들의 저작권료가 상승하는 현상마저 일어났다.
“록의 변화는 재즈와 비슷해요.”
록은 최초의 대중음악 장르인 재즈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사람들이 재즈에 입문하면 컨템포러리 재즈 아티스트의 곡을 듣기보다 과거의 곡부터 듣거든요. 쳇 베이커와 빌 에반스, 소니 롤린스와 마일스 데이비스 같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박 이사님이 메탈리카의 음악을 잘 아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군요.”
“사실, 그다지 즐기진 않아요.”
“그럼 왜 보시려는 겁니까?”
“세기를 강타했던 뮤지션의 공연은 어떤 느낌일지 피부로 느껴보고 싶어서요.”
“소녀연맹과 비교하시려는 겁니까.”
“비교가…… 안 되겠죠.”
“하긴, 전설의 후광은 음악 그 자체보다 더 강한 힘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보다는, 록밴드와 아이돌의 힘이 다르단 뜻이에요. 비교가 목적이었으면 ‘두아 리파’ 쪽이 나았겠죠.”
김덕팔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둘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녀연맹의 공연이 펼쳐질 무대인 ‘BUD LIGHT SELTZER’였다.
롤라팔루자에는 총 7개의 무대가 있다. 각 무대는 롤라팔루자의 최대 스폰서 기업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무대 우측에는 대형 푸드 트럭이, 좌측에는 대형 바가 들어서 있다.
성필은 좌우로 팔을 펼쳐 관객석의 크기를 가늠해보았다. 초록 잔디밭의 넓이는 뒤까지 쭉 늘어선다면 만 명을 쉽게 넘을 크기였다.
“박 이사님.”
그때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달려왔다.
성필은 기쁜 미소와 함께 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조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공연 기획사 ‘아틀라스’의 사장인 조진만이었다.
“무대 세팅은 다 끝나셨나요?”
“진즉 끝났습니다. 소녀연맹 멤버분들의 리허설도 끝났고요.”
“고생하셨습니다.”
“사운드 엔지니어와 말 몇 번 섞는 게 끝이었는걸요. 고생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조진만은 성필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성필은 청바지에 흰 티셔츠라는 지극히 심플한 복장이었다. 그런데 옷걸이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조진만이 ‘오’ 소리를 내며 성필의 어깨를 팍팍 두드렸다.
“오다가 예쁜 아가씨들이 번호 안 주덥니까?”
“조 사장님은 받으셨어요? 아, 그럼 제가 덜 매력적이었나 보네요.”
“아니면 너무 매력적이어서 말을 안 걸었거나요.”
“참…… 얼굴에 금칠을 잘도 해주십니다.”
김덕팔이 어이없어하며 말하자 두 사람이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웃었다.
성필이 조진만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안 그래도 미주 투어 콘서트 때문에 힘쓰고 계실 텐데, 시간 내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녀연맹의 무대를 점검할 수 있으면 제가 영광이죠. 어차피 근처에 있기도 했고요.”
조진만은 소녀연맹의 미주 투어를 기획하고 실행한다. ‘송 포 피플’의 발매와 맞추어 기획해두었던 콘서트 투어였다.
“아, 축하가 늦었습니다. 소녀연맹, 5만 석 전 석 매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공연장마다 5,000명에서 6,000명 규모의 콘서트 9회가 전부 매진됐다.
“엄청난 성과입니다.”
조진만의 목소리엔 일종의 황홀함마저 감돌았다.
그야말로 엄청난 성과이니 말이다.
“한국에서 콘서트를 해도 5만 명을 모으진 못했을 겁니다. 소녀연맹은 해외에서의 인기가 더 크다더니, 체감이 확 됩니다.”
“해외 팬덤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죠.”
해외의 케이팝 팬들은 어느 한 그룹의 팬이라기보다, 케이팝이라는 문화의 팬이다.
굳이 덕질하는 그룹이 아니더라도 케이팝 콘서트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렇더라도 소녀연맹이 이룩해낸 성과가 바래진 않는다. 소녀연맹 정도 되는 아이돌이니 5만 석을 팔 수 있던 거니까.
“그래도, 이럴 줄 알았으면 공연을 더 늘렸으면 좋았을 텐데…….”
‘송 포 피플’의 대성공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 기세를 타서 투어 예정지를 늘렸을 텐데.
성필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나자 조진만이 위로했다.
“5만 명이 딱 적당합니다. 사실 저는 5만 석이 전부 팔릴 거라곤 생각 안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 이것도 엄청난 성공이죠.”
“압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미국 투어는 걸그룹으로선 최초니까요. 최초니까, 앞으론 누구도 따라잡기 힘든 최고 기록을 세워두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2년 안에는 그렇게 되겠죠. 그런 콘서트를 만들겠습니다.”
“그렇게 되길 저도 바랍니다.”
셋은 함께 식사하기 위해 공원을 빠져나갔다.
김덕팔이 말했다.
“소녀연맹의 공연 시간 말입니다. 제 친구가 말하길 잘 잡힌 거라고 합니다. 낮과 저녁의 사이, 해가 지는 시점이니 말입니다.”
롤라팔루자의 메인 시간대는 역시나 밤이다.
어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콘서트엔 낭만이 있다. 물론 낭만을 제외하고도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롤라팔루자는 평일에서 주말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평일 낮에 축제에 참여하기 힘들다. 직장이 있잖은가?
평일 낮에 롤라팔루자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생이거나 백수, 프리랜서다.
관객 수는 밤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쯤이면 퇴근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든다고 하더군요. 헤드라이너의 저녁 메인 스테이지에 비하면 적겠지만, 그래도 아예 낮 시간보다는 훨씬 낫다는 모양입니다.”
“사람이 적어서요?”
“아뇨, 낮의 몰골이 아주 볼 만하답니다.”
김덕팔은 친구에게 들은 낮 시간의 축제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다.
아직 숙취가 사라지지 않은 초췌한 몰골의 젊은이들이 좀비처럼 행사장을 배회한다고 하던가.
맥주캔을 한 손에 들고 비척비척 걸어 다니다가, 음악 소리가 들리면 몰려들어 ‘호우!’ 함성이나 질러대는 것이다.
“낮과 저녁의 사이는, 말하자면 아티스트가 감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관객 교양이 갖추어진 시간대란 겁니다. 숙취라면 깨어날 시간이고, 술을 마신다면 아직 취하지 않았을 때니까요.”
조진만은 공연 기획사에서 여러 해 일했다. 하지만 해외 페스티벌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는 김덕팔의 이야기를 홀린 듯이 들었다.
“페스티벌 시간대에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안 좋은 시간이 있는 건가요…….”
조진만은 살짝 질린 기색이었다.
“미국 최고의 뮤직 페스티벌 중 하나이지만, 딱히 특별하진 않군요. 저는 음악에 진심인 사람들만 모여드는 줄 알았습니다.”
“환상이 있죠.”
말한 건 성필이었다. 그는 공원 안쪽의 풍경을 살폈다.
“사실 롤라팔루자가 한국으로 따지면 이런 거잖아요. 어디어디 한우 축제?”
김덕팔이 풉 웃고, 조진만은 입을 떡 벌렸다.
“축제에 뮤지션들 불러두고 음식이랑 술을 파는 거죠. 한우 축제란 건 지나친 비유긴 하지만요.”
조진만은 그 말에 인지부조화가 왔다.
한국에선 소녀연맹의 성공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중이다. ‘빌보드 200’ 차트 1위를 대서특필하고, ‘롤라팔루자’ 출연을 그래미에라도 초청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무엇이든 ‘최초’라는 영광스러운 단어가 따라붙는다.
성필이 이야기를 이었다.
“축제 라인업을 보고 계속 생각했어요. 수백 명의 출연 뮤지션 중에, 정말 유명한 사람들은 손가락 발가락으로 꼽을 숫자밖에 없단 걸요. 미국 사람들조차 이름을 못 들어봤을 사람들이 가득해요. 여기에 초대받았다고…….”
성필은 공원 너머로 펼쳐진 강을 눈에 담았다.
그는 미국을 목적지 중 하나로 삼았었다. 그런데 직접 와서 본 미국의 풍경엔, 그가 기대했던 영광은 없었다.
“세상을 다 가진 건 아니에요. 비유하자면, 일본의 뮤지션이 한국 뮤직 페스티벌에 초대받아서 서는 정도겠네요. 우리나라 사람들 입장에선, 그다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니겠죠. 그저 특정 관객층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섭외한 것뿐일 테니까요.”
“……그렇게 이곳의 가치를 깎아내리진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해요. 저희 애들이 이룬 업적을 폄훼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다만…… 좀 심술이 나요.”
“심술요?”
“미국에서 태어나서 뮤지션이 됐다면, 조금 유명해져도 라인업에 이름을 올릴 페스티벌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나라에서 여기 오려면, 그 나라에서 톱이 되어야 해요. 우리가 죽을 각오로 노력해서 얻어낸 걸, 누구는 그보다 훨씬 쉽게 얻는단 생각이 들어서…….”
말 그대로 심술이 났다.
민족 국가에 반감을 가진 한구인이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다.
국적이란 혈통으로 계승되는 특권이라고. 중세 시대 귀족의 생득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권리라고 했었다.
누구는 중동 사막 나라에 태어났단 이유로 내전에 시달리며 여행조차 마음대로 못 가는데. 누구는 유럽에 태어나 공고한 사회체계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러한 태생적 불평등은 뮤지션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숨 쉬듯이 위대한 예술가를 배출해내는 장엄한 땅…….”
미국.
“여기서 인정받기 위해선, 앞으로 더 얼마나 큰 신화를 써내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걸 이루더라도, 그 업적은 미국의 뮤지션들과 비교해선 크게 대단한 것도 아니겠죠.”
이내 성필은 걸음을 멈추었다. 공연이 펼쳐지는 그랜트 파크와 꽤 먼 거리까지 왔다.
“미국엔 없는 거 같아요.”
“뭐가 말입니까?”
“최고의 아이돌이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미국에 없어요. 막연하게 AMA나 빌보드에서 상을 탄다고 최고란 이름이 붙을 것 같진 않아요. 여긴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에요.”
김덕팔은 성필의 눈에 맺히기 시작한 영감을 방해하지 않고, 그의 마음에 피어난 예지(叡智)의 격류가 사라지질 않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애초에, 꿈엔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없다고 생각해요. 꿈은 지점이 아닌 풍경이니까요.”
성필이 그리는 꿈의 풍경은, 적어도 미국에서 상을 받아 기뻐하는 소녀연맹이 아니었다.
풍경의 일부가 될 순 있겠지.
‘정호환 이사님이 케이어스로 그렸던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전생의 정호환은, 전생의 케이어스가 거머쥐었던 수많은 영광들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 풍경을 가슴에 담고 프로듀싱을 했을까.
이젠 막연히 전생의 케이어스를 뒤쫓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소녀연맹과, 세계를 강타했던 전생의 케이어스는 전혀 다른 성질의 아이돌이 됐으니.
최소한 전생의 케이어스는 성필이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녀연맹이 보아야 할 꿈의 풍경은 전생의 케이어스와 다를 것이다.
‘달라야만 하고.’
성필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진만과 김덕팔이 그의 뒤를 따랐다.
* * *
케이어스 파에톤 월드 투어가 드디어 미국에 도달했다.
케이어스는 텍사스의 휴스턴에서 공연하고 북상하여 애틀랜타에 도착했다. 그리고 며칠 후엔 시카고로 갈 것이다.
에리카는 호텔 방 침대에 누운 채로 샐러드를 먹었다.
한 손으로는 보울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포크를 든 채 포도를 오도독 오도독 씹었다.
‘시카고.’
며칠 후의 시카고.
현재 시카고엔 소녀연맹이 있다. ‘롤라팔루자’에 출연한다는 모양이다.
시일도 딱 맞는다.
도착한 후 택시로 이동하면, 아슬아슬하게 소녀연맹의 공연을 볼 수 있으리라.
보아야 하나?
아니, 보고 싶은가?
“…….”
밥맛이 사라졌다.
에리카는 보울을 침대 옆 협탁에 올려두곤 그대로 드러누웠다.
“민주야.”
침대 아래에선 거친 호흡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김민주가 푸시업 하는 소리였다.
“10번만 더…….”
열 번의 호흡이 끝나자 김민주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왜?”
“나는 세상살이가 너무 쉬워서 아이돌이 됐어. 바라는 건 전부 손에 들어왔어. 별다른 노력을 안 해도 그랬어.”
“어쩌라고.”
“삶이 지겨웠어. 그래서 아이돌이 된 거야.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운이라고,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거든. 근데 KS 엔터에 들어오고, 데뷔조로 뽑히고, 케이어스로도 승승장구만 거둬서, 이렇게 생각했어.”
세상이 나를 사랑하고 있어.
“아, 이러면 부족함 없는 삶을 살겠지만 평생토록 희열 같은 건 느끼지 못하겠다고 느꼈어. 어려우리라 생각하고 도전했던 곳에서도, 내 상상 이상의 성공을 거둬버렸으니까.”
“근데?”
“나는 내가 진심으로 도전을 바란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도전해야 할 때가 왔어.”
김민주가 짜증스럽게 수건을 방 어딘가로 던져버렸다.
에리카는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은 도전이 눈앞에 온 거야. 근데 전혀 기쁘지 않아. 속이 불편하고, 마음이 끈적하게 바닥에 달라붙는 것만 같고, 잠도 잘 안 와.”
“이제 주제 파악 끝났어? 넌 도전을 바랐던 게 아니라, 날먹하는 인생이 누구보다 좋았는데 그게 지루해졌던 거야.”
“전에 들었던 말이 또 떠오르더라.”
“내 말 듣고 있냐? 너 그냥 한탄하고 싶었던 거지?”
“뮤지션으로 성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운. 그건 곧 노력이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단 거잖아? 운이 나를 따를까? 세상이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지금의 내 좌절감은, 세상이 내게 더 큰 희열을 주려고 뿌린 조미료일까?”
“노력할 수 있어.”
그 답에 에리카가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어떻게?”
“아티스트십 프로젝트. 거기서 네가 뻥 대박을 터뜨리면 케이어스도 덩달아 성공하겠지. 이거야말로 네가 바라던 거 아니야? 넌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 했잖아.”
“…….”
에리카가 다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나는 나를 표현하고팠던 거지, 그런 막대한 사명감을 안고 싶진 않았어.”
“너 성격 진짜 더럽다. 어떻게든 인생 쉽게 살려고 하는 거잖아.”
“맞아. 쉽게 살고 싶어. 근데, 쉽지 않을 거 같아서 불안해.”
“정호환 이사님이 없어지셔서 불안한 거겠지.”
“…….”
“정호환 이사님이 네 파랑새였으니까. 너를 행복으로 인도할, 하늘이 내려보낸 선물이었어. 그런데 그 선물이 사라지니까 불안해진 거잖아. 운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지? 정호환 이사님이 네 운이었어. 아니, 우리의 운이었지. 확실한 행운. 근데, 이젠 불확실한 운에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게 됐네.”
“아깐 노력으로…….”
“네 정신상태가 그따위인데 무슨 노력? 네가 하는 일이라곤 손을 붙잡고 하늘한테 부탁하는 게 전부잖아.”
“……너 화났어?”
“화가 안 나?”
김민주가 벌떡 일어나 에리카를 흘겼다.
에리카는 그녀의 눈빛을 받곤 충격받았다. 김민주의 눈에 서린 감정은 경멸이었다.
“난 스포츠 선수였어. 그래서 알아. 승리를 향한 집념과 믿음, 위닝 멘탈리티는 신체 능력과 노력 이상으로 중요해.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진짜로 져. 네가 지금 그래.”
“하지만…….”
“소녀연맹이 우릴 어떻게 이겼는 줄 알아?”
에리카가 입을 다물었다.
“이길 거라고 생각하니까. 멤버 전원이, 그리고 뒤에 있는 백 오피스 전원이, 가로 엔터가 케이어스를 이기겠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니까. 그 의지가 쌓이고 쌓여서, 네가 그렇게나 바라는 운이 겹쳐서 결국 우릴 꺾은 거야.”
김민주가 조소를 머금었다.
“너 같은 애한테, 팬들을 감동시킬 아우라 같은 게 나오겠어? 자기 자신도 못 믿으면서, 어떻게 아이돌로 있으려고?”
“……근데.”
“근데, 뭐?”
“안 그려져.”
에리카가 김민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김민주의 시선을 받기가 부담스러웠다.
“승리한 풍경이 그려지지 않아. 우리가 소녀연맹을 뛰어넘을 성적을 내는 풍경이 안 떠올라. 운이 겹쳐도, 거기에 닿을 수 있을지…….”
아니, 에리카는 운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인생 전체를 풍요롭게 했던 운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느꼈다.
김민주가 침대 위로 펄쩍 뛰어올라 에리카를 다리 사이 아래에 두었다. 에리카가 화들짝 놀라 팔로 어깨를 감싸서 자신을 보호했다.
“뭐, 므…….”
“운 같은 말 하지 마. 넌 태어날 때부터 세상 사람들 대다수가 꿈도 못 꿀 운을 타고났어. 알아?”
“뭐…….”
“예쁜 거.”
에리카가 멍해졌다.
“눈이 돌아가게 예쁘잖아. 아냐? 예쁜 건 너 혼자 잘해서 되는 게 아니야. 네 위로 엄마 아빠, 조상님들 전원이 잘해야 얻을 수 있는 재능이야. 수십 세대가 너를 만들기 위해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끼리만 이어졌어.”
“뭐……?”
“너라는 완성작을 내려고, 수십 세대가 노력했다고. 수십 세대가 겹친 운이란 건 대통령 딸로 태어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잖아. 그런 주제에 운이 없다고 지껄이지 말라고.”
“그럼 못생긴 사람들은 엄마 아빠랑 그 위로 수십 세대가 노력을 안 해서…….”
“아니 칭찬을 뭐 그딴 식으로 들어?”
“진짜 듣도 보도 못한 패드립이다.”
“내 말 제대로 들었냐?!”
에리카가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 엄청난 운을 타고났으니까 남은 건 노력밖에 없잖아. 언제까지 얼굴 믿고 나댈 건데? 게다가 넌 아빠가 잘나가는 사업가라 돈까지 많잖아. 하나쯤은 노력해서 네 손으로 얻어내야지.”
김민주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에리카의 배 위에 앉은 김민주는 에리카의 멱살을 장난스럽게 잡고 흔들었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3년밖에, 안 남았, 다고. 그렇게 축 처져 있어선 될 것도 안 돼.”
“우리 민주, 다정하네…….”
“누가 네 민주야? 돌아가면 강동현 프로듀서님 붙잡고 앨범 구상이나 끝내. 당연히 소유보단 나아야 해. 내가 무리한 거 부탁하고 있어?”
에리카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김민주의 표정도 누그러졌다.
“알겠다.”
“그래, 드디어 정답을 찾았구나?”
“너한테 상담해봤자 기분이 안 나아지네.”
김민주가 에리카를 구타하는 시늉을 했다.
에리카는 필사의 가드를 올리며 말했다.
“소유가 옳았어.”
“진소유가 뭐가?”
“소유는 우울할 때 빈민이나 전쟁고아 다큐멘터리를 보잖아.”
“진소유 미친년인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
“우울할 때는 똑같이 우울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야 해. 물어볼 거야.”
“누구한테? 뭐를?”
“박 이사님.”
“……박 이사님 이름이 왜 나와?”
“직접 뵈고 들을래.”
도대체 어떤 정신으로 케이어스와 맞서 싸워온 것이냐고 말이다.
역사상 단 한 번 존재했던 기적을 목표로, 어떻게 3년이나 희망을 잃지 않고 달렸던 것이냐고 물어볼 거다.
“시카고에서 가면, 찾아볼 거야.”
에리카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보였다.
결론이 이상하긴 했지만, 김민주는 에리카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리더인 에리카가 며칠 동안 저기압이었어서, 케이어스의 분위기도 좋진 않았다.
이번에 시카고에서 성필을 보고 에리카의 의욕이 돌아온다면, 이전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다.
“투어 브이로그 촬영할 시간임미다.”
진저가 카메라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진저와 그녀의 카메라는 에리카 위에 올라탄 김민주를 보고, 찍게 됐다.
“…….”
“…….”
“…….”
진저가 울상이 됐다.
“나 혼자 이성애자였던 검미까…….”
“아, 아니야.”
김민주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진저가 1팀장에게 전화했다.
[어, 진저 왜 전화했어? 투어는 잘하고 있지?]
“숙소에도 경호원을 붙여주시기 바람미다…….”
[너 월클병 걸렸어?]
“제가 위험하단 말임미다!”
[몇 명 필요해?]
“내가 아니라고 했지!”
* * *
“메탈리카를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롤라팔루자가 시작되고, 메탈리카의 공연 시각이 다가오자 김덕팔은 눈에 띄게 흥분했다.
비단 메탈리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곳에 오다니, 다시 젊어진 기분입니다!”
“하하, 이렇게 좋아하시다니 다행이네요.”
10분 후.
사람이 붐비는 걸 넘어 서울 지하철 1호선처럼 변해버리자, 김덕팔은 근육을 잃어버린 시바견처럼 초라해졌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네? 메탈리카는요!”
“여기 더 있다간 기가 다 빨려서 머리칼이 빠질 것 같습니다……. 끝까지 함께 못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김덕팔은 자취를 감추었다.
성필은 망연자실하여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멀뚱히 서 있기를 잠시, 성필은 사람의 파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이동해야만 했다.
‘괜찮아. 혼자 콘서트 가는 정도야 많이 해봤으니까.’
혼자 보는 것보다야 여럿이서 보는 게 좋겠지만, 어쩔 수 없다.
성필은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메탈리카의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이사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하양의 것이었다.
성필은 기쁜 마음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하양…… 아?”
장하양이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걸었다.
“우연이네요.”
“…….”
성필은 얼이 빠졌다.
장하양의 모습이 어떻느냐.
‘메탈리카’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었다. 검은색 티셔츠에 새겨진 ‘메탈리카’의 로고는 굉장히 록스러웠다.
거기에다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메탈리카의 피켓도 들려 있었다. 근처의 스토어에서 구매하지 않았을까 싶다.
장하양이 짐짓 진지한 얼굴로 피켓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섹스 앤 드러그스 앤 로큰롤.”
“여긴 진짜 대마초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런 단어 꺼내지 마.”
“메탈리카 보러 가시는 거죠? 같이 가요.”
“제이 콜(J. Cole) 씨는 어떡하고?”
“역시 랩스타보다는 록스타죠.”
제이 콜, 의문의 1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