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3화
“어떻게 된 거야.”
김태훈과 노아에게서 해방되고, 윤상열과 윤희연 둘만 남게 된 순간. 역시나 윤상열이 가장 먼저 요구한 건 상황 설명이었다.
윤희연은 윤상열의 작업실을 박물관이라도 온 듯 한가롭게 거닐었다.
“뭐가?”
“네가 총괄 프로듀서가 됐다면, 정호환 이사님은?”
“오빠 되게 깍듯하다.”
“뭐?”
“자기를 쫓아낸 사람인데 아직도 ‘님’을 붙이고 있잖아.”
“…….”
“정호환 이사님은 퇴임하셨어.”
어째서.
윤상열은 정호환이 총괄 프로듀서를 그만둔 경위를 A부터 Z까지 모두 듣고 싶었다.
하지만 윤희연이라고 알 도리가 있을까 싶었다. 그녀가 수작질을 부려서 정호환을 내쫓을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하니 말이다.
정호환은 모략으로 내쫓아내기엔 너무나도 거대한 인간이다. 그 스스로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영원토록 권좌에 있을 것이다.
정호환의 총괄 프로듀서 직 사임은 자의(自意)다. 그러니 정호환만이 알 사임의 이유를, 윤희연이 알 리 없다.
“미안.”
갑자기 윤희연이 사과했다.
그 순간, 윤상열은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 고개를 숙이고 있단 걸 깨달았다.
윤희연의 사과를 듣고 그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서야, 자신이 고개 숙이고 있었단 걸 눈치챈 것이다.
윤상열은 정호환이 떠나갔단 이야기를 듣자마자 고개를 떨어뜨렸었다.
왜?
“오빠가 쏘아 떨어뜨릴 별을 내가 떨어뜨렸네.”
윤희연의 답은 윤상열이 지닌 의문의 답이기도 했다. 아마 그가 고개 숙인 건, 그의 숙원 중 하나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 느낌이지만, 오빠는 그냥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지? 변해버린 정호환 이사님을 밀어내고, 오빠가 그 자리에 올라 증명하고 싶었던 거야.”
정호환은 변했었다. 다키스트의 해체를 결정한 후부터였다.
정호환은 개심이라도 한 것처럼 참회의 눈물을 쏟아냈더랬다. 지금까지의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윤상열은 생각했었다. 틀린 건 지금까지의 정호환이 아니라, 자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지금의 정호환이라고.
“지금도 똑같아? 아직도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
“…….”
“모르는구나.”
윤희연은 싱긋 웃곤 윤상열의 곁에 와 앉았다. 둘의 어깨가 맞닿자, 윤상열은 소름 끼친단 듯 화들짝 놀라며 살짝 거리를 벌렸다.
“일단 KS 엔터로 돌아가자. 거기서부터, 끊어졌던 오빠의 삶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내가 필요한가?”
“글로브는 멋졌어. 오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한 역작이야. KS 엔터였으면 그보다 더 뛰어났겠지. 데미우르고스가 완벽했고, 그가 택한 에이도스도 적절했지만, 결정적으로 휠레가 잘못됐어.”
윤상열과 그의 이상은 문제가 없었지만, 석세스 엔터에 있는 게 문제였단 뜻이다. 석세스 엔터에선 윤상열이 꿈꾸던 이상을 마음대로 그릴 수 없으니.
“오빠가 필요하냐고? 필요하지.”
“나한테 새 그룹을 맡기려고?”
“아니, 케이어스를 맡길 거야.”
윤상열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케이어스……?”
윤상열은 과거 케이어스의 대성공을 보며 감출 수 없는 울분을 느꼈었다. 며칠간 술에 빠져 살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글로브를 실패작이라 여겨, 최대한 빨리 새로운 그룹을 만들려 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비유했던가.
케이어스는 아름답게 개화한 꽃.
글로브는 꽃봉오리를 맺었으나, 피지 않는다.
윤상열은 울타리 너머 정원을 부러워하기만 했다.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었다. 그리고, 그곳에 핀 저 꽃과 같은 것을 만들겠노라고 다짐했었다.
“응, 케이어스.”
그런데 윤희연은 그 꽃을 직접 윤상열의 품에 안겨주겠다고 말했다.
“총괄 프로듀서가 새로운 그룹을 메인으로 프로듀싱하는 건 3년이야. 그 뒤는 수석한테 메인 프로듀서 직을 넘기잖아.”
정호환이 제한을 둔 3년은 A&R팀에게 보고 배우는 시기다. 그리고 3년을 보고 배웠으면, A&R은 정호환의 미학을 거의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
그게 정호환이 구축한 힘이다. 인간 한 명에게 의존하지 않는 시스템 말이다.
케이어스에게도 3년이 지났으니, 정호환은 철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새로운 그룹에게 집중할 예정이었다.
물론 정호환은 새 둥지로 떠나는 게 아니라, 아예 바다로 떨어져 생을 마감했지만 말이다.
“오빠한테 그 역할을 맡기려구. 물론 전권은 없어. 오빠가 나간 지 시간이 꽤 흘러서, 지금 돌아가봤자 이방인일 거잖아. 그리고 오빠는 마음에 안 들겠지만.”
윤희연이 엄지와 검지로 브이를 그려 자신의 턱에 척 가져다 대었다.
“이 총괄 프로듀서님의 허락이 있어야지.”
“네가 어떻게 총괄 프로듀서가 됐지?”
“못 될 건 뭐야? 그럼 정호환 이사님은 어떻게 총괄 프로듀서로 있었는데? 비주얼 파트를 전부 내가 디렉팅했는데, 그게 무슨 총괄이야?”
“…….”
“줄곧 생각했지만, 총괄 프로듀서란 이름은 바뀌어야 해. 총괄 뮤직 디렉터처럼. 나랑 정호환 이사님은 음양(陰陽)이었어. 정호환 이사님이 나보다 나았던 건 능력의 양이 아니라, 그냥 직함이었던 거지.”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가 있었을 텐데.”
윤상열은 윤희연이 곧바로 총괄 프로듀서가 된 게 의아했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를 윤희연이 했던 말마따나 총괄 뮤직 디렉터 같은 직함으로 올려도 좋지 않았을까.
윤희연에게 디렉팅 전권을 주는 것보다, 두 명의 프로듀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게 하는 편이 더 합리적일 듯한데.
“그 인간 뭐 돼?”
윤희연이 윤상열의 의문을 순식간에 일축했다.
“KS 엔터에 있는 인간 전부를 합쳐도 내가 이룬 업적의 절반도 안 돼.”
‘직장인 신화’라는 단어가 있다. 평사원에서 임원까지 승진한 사람에게 곧잘 붙는 수식어다.
부장까지 승진해서 정년 퇴임하는 사람들도 ‘회사 생활 잘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임원까지 승진하는 인간은 오죽하겠는가.
태도든 능력이든 야망이든,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인간이다.
심지어 윤희연은 고작 30살 때에 KS 엔터 임원에 올랐다. 한국 최고의 뮤직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임원이 된 것이다.
“이사회가 나를 선택하는 건 당연하지. 누구보다 회사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들이잖아. 아니, 누구보다 회사가 잘돼서 돈 벌길 바라는 사람들이잖아. 최적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안 그래?”
“그렇더라도…….”
“오빠.”
윤희연이 그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KS 엔터 이사회가 나를 선택했다니까? 저질 한국 영화·드라마만 본 등신들처럼 이사회가 암투만 일삼는 무능한 늙은이들로 차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능력 없는 인간을 20대에 실장 명함 붙여주고, 30대에 사장 명함 붙여주는 건 등신 같은 재벌들이나 그렇지. 우린 그럴 수가 없어. 알잖아?”
예술 하는 회사니까.
열심히 일하던 조각가를 밀쳐내고 공방 사장 아들을 그 자리에 앉힐 순 없는 노릇이다.
주변 사람들을 시키면 잠시 티가 안 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체적이고 장기적인 비전의 부재는 반드시 패착을 불러온다.
게다가 KS 엔터는 그러한 선례를 진즉 겪었었다. 십수 년 전, 문규완이 투자자들의 성화를 못 이기고 외부 인사를 대거 영입했을 때였다.
돈을 배경으로 자리에 앉은 이들이 KS 엔터를 망치던 꼴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투자자들이 먼저 정호환을 왕좌에 앉혀주었었다.
“그런 총괄 프로듀서님이 오빠가 필요하다잖아. 아니면, 오기 싫은 거야?”
윤희연이 윤상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윤상열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했다.
“오빠, 아까부터 이상해. ‘하지만’, ‘그렇더라도’, ‘네가 어떻게’, ‘그러면’, 이런 말이나 하면서 반박하려고 하잖아. 그냥 내가 총괄에 오른 게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 설마…… 오지 않을 이유를 찾고 있어?”
“…….”
“글로브 때문이야?”
윤희연은 윤상열과 팔짱을 꼈다. 그리고 몸을 천천히 그를 향해 기대었다. 윤상열은 뱀을 마주한 개구리처럼 꼼짝도 못했다.
“알겠지만, 글로브를 데려올 순 없어. KS 엔터는 순수하잖아. 이물질을 받아들이지 않아. 글로브는 어쩌다 생긴 사생아라고 생각해.”
“…….”
“에휴.”
윤희연은 반응 없는 윤상열에게 질렸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메모지와 볼펜을 들었다.
“생각할 시간 필요한 거 알아. 천천히 생각하고, 연락 줘. 번호는 여기 적어둘게.”
윤희연은 번호를 남기고 작업실을 떠났다.
그제야 윤상열은 압박에서 풀려났다. 그는 긴 한숨을 내뱉는 동시에 상체를 점점 앞으로 구부렸다. 이윽고 그의 눈은 바닥을 바라보게 됐다.
‘나한테 케이어스를 맡긴다고?’
바라마지 않던 상황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그녀가 떠나가는 순간까지 ‘알겠다’고 말하지 못했던가.
‘정호환이 직접 찾아오는 망상만 해서 그런가?’
정호환이 석세스 엔터로 찾아와 무릎 꿇고 ‘제발 돌아와주게!’라는 망상만 줄기차게 해왔지, 윤희연이 오는 상상은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즉각적인 반응이 안 나왔던 걸까?
‘아니면 희연이가 총괄 프로듀서가 됐단 것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그녀의 말마따나, 윤상열 본인이 쏘아 떨어뜨려야 할 별을 윤희연이 먼저 떨어뜨렸기 때문에?
아니, 윤희연이 그 별이 되었기 때문에?
삶의 목적이 순식간에 증발해서 머리가 제대로 안 굴러간 걸까?
‘그것도 아니면 글로브가 소중해서?’
이건 정말 일말의 고민조차 필요 없다. 이러한 가정을 떠올렸단 것 자체가 수치스럽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여자친구가 텔레비전 속의 아이돌보다 나은 점은, 여자친구는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텔레비전 속 아이돌보다 여자친구가 소중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신이 나타나서 텔레비전 속 아이돌과 여자친구 바꾸기 찬스를 준다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저 멀리 정원에 핀 꽃보다는 품 안에 든 말라비틀어진 꽃이 낫다. 그런데, 저 정원의 꽃이 자신의 것이 된다면 말라 죽은 꽃 따위 알 바인가?
비록 자신이 애정을 들여 키웠더라도…… 애정을 주며 키웠더라도…… 아무튼, 그렇다.
‘그럼 나는 왜…….’
윤상열은 똑똑하다. 그래서, 실은 진즉 이유를 알고 있었다. 굳이 세 번의 자문자답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세 번의 자문자답은 자신의 본심을 부정하기 위해 억지로 불러온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문자답이 끝나자, 윤상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작업실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뱉었다. 급작스러운 감정 인식과, 그로 인해 찾아온 수치심은 명상할 순간조차 없이 그에게서 비명을 뽑아냈다.
몇 초간 간헐적인 외침을 내뱉던 그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감쌌다.
‘두려워서.’
윤상열은 두려웠다.
KS 엔터를 배경에 두고, 케이어스라는 최강의 무기를 손에 쥐고서도.
‘진다면.’
소녀연맹에게 진다면.
‘난 무엇을 탓할 수 있을까?’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그때야말로 윤상열은 인정해야만 한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그가 품은 꿈이 성필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을.
‘내가 틀렸다는 것을.’
그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희연이가 날 찾아온 것도…….’
두려워서일 것이다.
그녀가 KS 엔터의 정점에 10년 정도 군림한다면, 모두가 그녀를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시간이 그다지 없다.
선임된 수장(首長)이 가장 목을 매는 게 바로 단기적인 실적이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 눈총을 받다가 쫓겨나게 되니까.
아까 윤희연이 드러냈던 자신감은 틀렸다. KS 엔터 이사회가 자신을 택했으니, 자신의 정당성과 능력이 입증된 거라고 했던 것 말이다.
이사회. KS 엔터의 경영권을 가진 이들의 모임. 즉, KS 엔터의 지분을 소유한 이들이거나 지분을 소유한 이들의 대리자다.
그들은 지고한 뜻이 있어서 KS 엔터의 이사회에 앉은 게 아니다.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 윤희연을 총괄 프로듀서로 선임한 것이다.
‘돈만 보는 놈들의 인내심과 비전이야 논의할 가치도 없지.’
배금주의로 머리가 물든 놈들의 머리는 지속가능성은커녕 생존에도 부적합하다.
인간의 평균적인 주식 보유 시간은 고작 22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시장경제가 카오스 상태이고, 주기적으로 공황이란 재앙이 찾아오는 거다.
눈앞의 이익만 짐승처럼 쫓는 놈들이 모여서 싸우는 곳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란 곳이다.
윤희연의 말처럼 이사회는 무능하진 않지만, 인내심이 많지도 않다.
‘희연이가 가장 신경 쓸 건 KS 엔터의 상징이 된 케이어스의 성적.’
다음에 소녀연맹에게 판매량이 따라잡히기라도 하면, 윤희연의 입지는 확실하게 위험해진다.
그녀가 10년 넘는 세월 동안 이룩해왔던 신화적인 업적들도, 케이어스가 지는 순간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된다.
이사회는 게거품을 물면서 윤희연을 해임하고, 또 어딘가에서 데려온 아무개를 위에 세우겠지.
“도와달라고 한 거야…….”
윤희연은 윤상열에게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그녀의 성격을 아는 윤상열은 그걸 간파했다.
하지만, 윤상열은 ‘알겠다’고 하지 못했다.
윤희연이 자신의 입지를 걱정하는 것처럼, 윤상열은 자신의 꿈과 신념을 걱정했다.
입지는 다시 세울 수 있지만, 꿈과 신념은 다시 세울 수 없다.
그렇기에 윤상열의 결단은 무겁다.
윤희연도 그걸 알고 시간을 줬으리라.
윤상열은 머리를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아주 오래 생각의 바다에 잠겨 아래로 침전해갔다.
* * *
글로브 멤버 최유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앞엔 입가에 자장면 소스를 덕지덕지 묻힌 노아가 찾아와 횡설수설해대는 중이었다.
따로 할 말이 있다기에 뭔가 했더니.
일단 최유현은 노아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자신의 몰골을 본 노아가 절규했다.
“이 거지는 뭔가!”
“너.”
노아는 어푸어푸 찰지게도 세수했다. 그리고 다시 최유현을 향해 횡설수설했다.
“윤 피디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석세스 엔터도 망할 거다! 아마게돈이다!”
그렇게 말하는 노아의 얼굴은 어째선지 큰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똑똑한 유현이한테 묻고 싶었다!”
“뭐를?”
노아가 최유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지켜줘라.”
노아가 한 이야기는 최유현에게도 놀라운 것이었다. 성필이 양소민에게 했다는 약속인데…….
“석세스 엔터를 인수한다고?”
“처음엔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길이 생기지 않았나!”
“왜?”
“왜냐니?! 유현이는 똑똑한 줄 알았는데 나보다 안 똑똑해! 그러고 보니, 윤 피디가 나 보고 지능이 높다고 했었다. 아, 그런 거였나…….”
노아는 열받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빈민에게 빵을 베푸는 귀족영애처럼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
“윤 피디는 KS 엔터에 있던 높으신 분이었어. 김 대표는 윤 피디를 볼모로 잡아 투자를 여러 번 얻어냈다고 들었다. 근데 윤 피디가 사라지면 석세스 엔터의 가치가 낮아질 거 아닌가! 당장 우리 글로브부터 초비상이야! 망할 거라구!”
“망한단 얘기를 참 흥겹게도 한다.”
“곧 가로 엔터의 식구가 될 거니까! 밑바닥에서 밀리언셀러 걸그룹을 만들어낸 박 팀장 아래에 들어간다면 우리 앞은 여전히 탄탄대로다!”
지유가 들으면 화낼지도 모르겠다고, 최유현은 생각했다. 지유는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의 두 번째는 되기 싫다고 했었으니까.
그건 최유현도 동감이다.
1차 지유의 난 때도 그녀의 궤변에 가장 먼저 반박했던 게 최유현이기도 했으니.
“일단.”
최유현은 노아의 말에 반박하려 했다.
물론, 지유처럼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두 번째는 싫다’ 같은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가로 엔터는 석세스 엔터를 살 수 없어.”
“……왜 그런가?”
“회사는 비싸, 노아.”
“하지만 가로 엔터에는 소녀연맹이 있잖은가……. 밀리언셀러 아이돌이야…….”
“순익이 얼마쯤 될 거 같아? 한 해 순익이?”
“…….”
“너 매출이랑 영업이익, 순이익은 구별할 수 있지?”
“…….”
“모르긴 몰라도, 회사에 순수하게 남는 이익은 100억이면 많을 거야. 우리 회사는 당연히 100억보다 훨씬 비싸. 소녀연맹 7년 계약 종료까지 돈을 모아도, 석세스 엔터를 살 돈은 못 모아.”
공무원 월급으로 몇십 년 일하면 집을 살 수 있다. 이런 계산 방식이 뉴스 같은 곳에서 흔히 보인다.
그런데 그 계산은 공무원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을 때의 값이다.
당연히 돈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으는 일은 불가능하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순익이 생기면 그걸 은행에 넣어두고 저축하겠는가? 어떤 식으로든 쓰게 되어 있다.
“그럼…… 박 팀장이 거짓말한 건가…….”
노아가 축 처졌다.
그녀는 오늘이 오기까지 성필이 했던 그 말을 달콤한 거짓말이라고 여겼었다. 윤상열이 있는 한 석세스 엔터는 계속 잘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윤상열이 있든 없든 가로 엔터는 석세스 엔터를 살 돈을 못 모을 거라고 한다.
그럼 성필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닌가…….
“아니, 박 이사님은 거짓말을 안 해.”
“박 이사가 누군가?”
“가로 엔터 박성필 이사님.”
“아…….”
“그러니까 방법은 상장(上場)이야.”
가로 엔터가 석세스 엔터를 살 정도로 많은 현금을 얻어낼 방법은 하나뿐이다.
상장하여 자사주를 판매하는 것이다.
“실제로 상장할 거야. 소녀연맹 하나만 성공해서는,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가로 엔터 주식을 안 사겠지. 그룹 하나 성공했다고, 비록 그 성공이 역대급이라 해도, 그 이유 하나로 미쳐서 주식을 매수하는 건 눈먼 개미들이나 하는 짓이야.”
“맞다, 소민이가 WTP 소속사 주식을 샀다가 피 봤다고 하는 걸 들었어.”
“그 예시가 있어서 사람들은 새로 상장한 엔터사 주식을 사는 데 더 조심스럽겠지.”
“오오, 유현이 똑똑하다. 나도 똑똑해지는 거 같아.”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 이외의 성과가 필요해. 아마, 그 성과를 만들어낼 거고. 빠르면 내년에 상장할 수도 있어.”
“그, 그럼 정말 가로 엔터가 우리를 사는 건가? 기대해도 좋나!”
“사려고 하겠지.”
“윤 피디가 나가도 우리 밥줄은 보장되는 거군, 음음.”
“……너는 한 번 꼬아서 생각하는 법을 모르니?”
“응?”
최유현은 또박또박 말했다.
“회사를 어떻게 사?”
“돈으로?”
“회사가 상품이야?”
“주식…… 인가? 어, 근데 석세스 엔터는 상장 안 했지 않나.”
“……넌 네가 바로 전에 한 말도 잊어먹어? 윤상열 피디님 이름으로 투자받았다고 했잖아. 어떻게 받았겠어?”
“아, 주식!”
“비상장 주식, 즉 지분으로 투자받은 거야. 윤 피디 전에도 그런 식으로 제작비를 마련했다고 박 이사님한테 들은 적이 있어. 그러니까 석세스 엔터의 지분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거야.”
“그걸 사면 되겠구나!”
“못 사지.”
“…….”
노아는 슬슬 최유현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녀와 대화하면 할수록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윤 피디가 인정한 고지능자일 텐데…….’
최유현이 똑똑해서 찾아오긴 했는데, 대화를 아예 못 따라가니 의기소침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노아야, 너 체스 둘 때 왜 매일 소민이한테 지는 줄 알아?”
“소민이가 오래 체스를 배워서?”
“근본적으로, 너는 네 최선의 수만 생각해서 그래. 상대가 어떻게 할지 생각을 안 하니까 지는 거야. 자, 이제 생각해 봐. 가로 엔터가 지분을 사려고 하는데, 왜 못 살까?”
“……안 팔아서?”
“누가?”
“지분을 가진 사람.”
“누가 가졌는데?”
“투자자들?”
“아니지.”
“잉?”
“지분은 곧 경영권이야. 경영권이 가로 엔터에 넘어가는 걸 가장 싫어할 사람이 누구야?”
노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김태훈 대표님…….”
김태훈이 투자자들에게 지분을 회수하려고 할 것이다.
둘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석세스 엔터는 전생과 확연히 달라졌다. 차이점 중 하나는 석세스 엔터의 규모다.
성필이 있었을 때 석세스 엔터는 문어발 확장의 대명사였다. 김태훈은 회사를 키우고 또 키웠다. 돈을 빌리고 또 빌렸다. 회사를 키우는 건 더 큰 빚을 지기 위함이었다.
그 아슬아슬한 사업적 선택들이 전부 성공하여, 마침내 석세스 엔터는 KS 엔터를 시가총액으로 누르는 규모까지 성장했었다.
그런데, 이번 생에선 그러지 않았다.
김태훈은 석세스 엔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확장 대신 내실을 다지길 택했다.
그러니, 석세스 엔터에는 전생처럼 돈 벌고 빚 갚고의 굴레에 빠져 있지 않았다.
사내 유보금이 충분하다.
그렇기에, 지분을 회수할 수 있다.
“맞아.”
최유현이 잘했단 듯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표님이 경영권 방어가 확실한 수준으로 지분을 사들이면, 결코 가로 엔터한테 지분을 안 팔 거야. 그럼 그걸로 게임 끝이지. 가로 엔터가 돈이 아무리 많아져도 안 파는 걸 살 순 없잖아.”
석세스 엔터는 가로 엔터에게 인수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아는 의아한 점이 하나 있었다.
“왜 김 대표가 이제 와서 지분을 사들이나?”
“윤 피디님이 떠나시잖아. 가로 엔터가 냄새를 맡을 걸 경계하겠지.”
“아…….”
“어떤 기분이겠어? 과거에 방생하듯 떠나보냈던 동생이자 동료가 보스로 자기 위에 서면? 그리고, 자기를 내쫓으면? 나 같으면 무서워서 밤에 잠도 안 올걸.”
“그래도, 너무 이른 대응 아닌가?”
“김 대표님은 확신하신 거야.”
가로 엔터가, 성필이 기적 같은 성공을 이어가리라고 말이다.
“만약 가로 엔터가 정말 소녀연맹에 이어 모든 뮤지션을 히트시킨다면, 그때 가서 대응해선 늦어. 이 시점밖에 없어. 경영권을 뺏기지 않으려면, 지금 지분을 모두 사야 해.”
“……일목요연하게 알려줘서 고맙다.”
노아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명확해졌다.
“그럼 우린…… X된 거로군?”
“그렇지.”
최유현이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우린 X됐어.”
윤상열이 떠나가고, 글로브는 평범해질 거다.
최소한 이전처럼 성장을 거듭하진 못할 거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이돌, 그 정도로 기억되고 끝나겠지. 은퇴하고 나서 집은 살 수 있을까? 은퇴한 뒤엔 뭘 해야 좋을까.
노아가 긴 한숨을 토하며 최유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몽환청순…… 해야겠지?”
“엘릭 피디님이 우리를 맡게 되면…… 해야겠지.”
“정말 X됐단 말이 피부로 느껴진 건 처음이다…….”
“…….”
“…….”
둘의 한숨이 세면대 주변을 맴돌았다.
* * *
“안 파신다고요?”
김태훈은 당황했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가정부가 두 사람 사이에 차와 과일을 두고 떠났다.
이 저택의 주인, 석세스 엔터의 초기 투자자는 곤란한 낯빛이었다.
김태훈은 차로 속을 달랜 후 다시 말했다.
“20억으로 다시 사겠다는 겁니다. 10배입니다 10배. 굉장한 이익 아닙니까? 버크셔 해서웨이(워런 버핏의 투자회사)의 금융 트레이더들이 봐도 엄청나다고 할 이익이잖습니까. 후하게 쳐드린 겁니다. 물론.”
김태훈의 낯빛이 누그러졌다. 그의 목소리엔 애정 어린 존경과 감사가 담겼다.
“그때 선생님께서 투자해주신 돈은 피보다 더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느꼈을 감사를 어떻게 10배로 단정 짓겠냐마는, 그래도 많은 돈이란 데엔 이견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말일세, 석세스 엔터는 더 커질 거 아닌가……?”
“아 그렇죠, 더 커지겠죠. 허나 지금보다 더 성장할 건 차기 뮤지션들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5년 후가 될 겁니다. 회사의 덩치가 눈에 띄게 커지는 것도 10년 후가 될 거고요. 혹은, 아닐 수도 있지요.”
“아니라니?”
“이 자리에서의 20억이, 제가 선생님의 은혜를 갚을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 업계가 어떨지 모르잖습니까? 성공이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아닐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지…….”
“선생님이 저에게 베푸신 은혜에 비하자면 모자란 감이 있으나, 결코 적은 액수라곤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여기서 조정할 수도 있…….”
“아니, 아닐세.”
초기 투자자가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난 자네가 계속 성공할 거라고 믿어. 돈이 급하지도 않으니, 자네가 말한 5년 후 10년 후를 보겠네. 나한테 지분 살 돈으로 사업이나 더 열심히 하게. 재촉하는 일 없을 테니.”
“…….”
김태훈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또다.’
이게 두 번째다.
지분 판매를 애매한 이유로 거절한 인간이.
투자자는 사람 좋은 얼굴로 김태훈의 면을 살려주고 있으나, 속마음은 결코 말과 같지 않을 것이다.
‘뭐냐 대체?’
* * *
몇 주 전.
한구인은 성필이 기억하는 석세스 엔터의 투자자들, 즉 지분 보유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들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김태훈 대표가 제시하는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언제?
“가로 엔터가 돈이 생겼을 때입니다. 아마 내년이나 내후년이 될 듯합니다.”
돈을 마련할 수는 있고?
“상장할 겁니다.”
자그마한 엔터사가 상장해봤자 돈을 얼마나 마련할 수 있겠는가?
그에 한구인은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보였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소녀연맹 아십니까? 아, 모르시는군요. 아시게 될 겁니다.”
온 세상이 소녀연맹의 이름을 부르짖게 될 테니.
* * *
김태훈이 돌아간 후, 투자자는 저택의 거실로 향했다. 텔레비전을 켜고 뉴스를 보았다.
투자자가 중얼거렸다.
“정말이군.”
이 늙은이에게까지, 소녀연맹이란 아이돌의 이름이 전해졌다.
그 젊은이의 말대로, 온 세상이 소녀연맹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