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KS 엔터 회장 문규완은 생생히 기억한다.
최초의 KS 엔터. 허름한 꼬마 빌딩 한 층에 세 들어 살던 그때를.
손에 닿을 듯 느껴지는 헌 소파의 딱딱한 촉감. 코에 맴도는 중국 음식 냄새와 담배 냄새. 얼기설기 망가져서 햇볕도 제대로 못 가리던 때 탄 블라인드. 음료수 살 돈도 아까워 냉장고에 재워두던 보리차의 쌉싸름한 맛. 소파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던.
정호환의 목소리.
“회장님.”
정호환의 목소리.
문규완은 회상에서 빠져나와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정호환이 단출한 가방과 꽃다발을 든 채 KS 엔터 정문을 나오고 있었다.
“날씨도 더운데 안에 있으시지 않고.”
문규완은 대답하지 않고 하늘을 보았다. 손으로 햇볕을 가리며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덥네.”
“그렇네요.”
정호환이 문규완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니지먼트 총괄 남홍범.
최고 재무 책임자 구유한.
참으로 조촐한 환송(歡送)이었다. 정호환이 화려한 배웅을 거부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람 하나 떠난다고 전 직원이 몰려와 고개 숙이는 광경은 보고 싶지 않았다.
“호환아 너 말야, 운전하는 법은 기억나냐? 근래 10년을 회사가 주는 차랑 운전사로 다니던 애가 말이야.”
“가족이랑 놀러 갈 땐 어떻게 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문규완이 큭큭 웃었다.
“세월 참 빠르다. 연예인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매니저가 된 정신 나간 애가 이렇게나 잘 빠진 옷 입고 있고.”
“아 그런 말씀은 왜 하십니까.”
남홍범이 부끄러워하며 말을 돌렸다.
“그리고, 머리에 나사가 빠져선 음악이 좋다고 냅다 사업을 시작했던 인간은 이렇게 회장님 소리를 듣고. 또…….”
또, 문규완은 눈앞에서 보듯 과거를 그려냈다.
꿈이 뭐냐고 물어보던 순간.
30년 전의 KS 엔터.
정호환이 부끄러워하며 답했었다.
‘빌보드 차트 1위에 우리나라 가수가 올라가는 걸 보고 싶어요. 아, 아니다. 저희 가수가 1위가 됐으면 좋겠어요.’
문규완은 하늘로부터 아래로 눈을 돌렸다. 그제야 정호환을 똑바로 보며 손을 내밀었다.
“고생 많았다, 호환아.”
정호환이 미소와 함께 악수를 받았다.
“회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30년, 길었다 참.”
“예, 정말 길고…….”
정호환이 눈을 감았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길고, 달콤한 꿈이었습니다.”
정호환이 눈을 떴다. 주름이 둘러싼 그의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채 빛을 발했다.
“이젠 깨어날 때겠지요. 꿈속에서 사는 건 청춘의 특권이니.”
정호환은 차례로 남홍범, 구유한과 악수를 하곤 터덜터덜 떠나갔다.
“저…….”
그때, 구유한이 정호환을 잡으려는 듯 짧게 손을 뻗었다. 그 부름에 정호환이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
구유한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아닙니다.”
구유한은 다시 한번 더 정호환을 말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구유한은 똑똑한 사람이다. 똑똑한 사람답게, 논리적인 공감 능력 또한 뛰어났다.
구유한은 정호환을 이해했다.
정호환은 개척자였다.
그는 빛 한 점 들지 않고, 나침반이 없으며, 누구도 가본 적 없던 길을 오래도록 걸어왔다.
그건 두려운 일이었으나, 동시에 스스로 길을 만든단 점에서 즐겁고도 자부심 넘치는 일이었다.
정호환은 뒤로 돌아본다. 그러면 자신을 따라오는 수많은 후배들이 있다. 그걸 위안 삼아, 그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앞에 다른 사람의 등이 나타났다.
‘박성필.’
그 사람은 정호환을 앞질러 걸어갔다.
정호환은 당황스러웠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어둠 속에서 한평생을 살아왔다. 어둠 속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를 빛을 갈구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정작 다른 사람이 밝힌 길을 마주하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빛 대신 어둠을 사랑한 사람이다.’
그에겐 ‘저쯤에 있겠지’라며 평생을 향해 나아가던 목적지가 있다.
목적지의 이름은 꿈이었다.
그 꿈에 누군가 먼저 발을 디뎠다.
그 꿈을 향한 명확한 길이 보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만든 길이었다.
정호환은 포기했다.
그가 나아가는 길이 꿈의 영역이 아닌 확률과 가능성의 영역이 된 순간.
더 이상 선구자도 아니고 선도자도 아니고 개척자도 아니게 된 순간.
그렇게, 그의 청춘은 져버린 것이다.
“안녕히 가십시오.”
구유한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정호환은 싱긋 미소를 짓곤 가던 길로 향했다. 대로에서 택시를 잡아, 이 자리에 없었던 사람처럼 아예 사라졌다.
그의 마지막 모습엔 특별함 따윈 없었다. 지극히 평범하게 걸어갔고, 사라졌다.
“정말 가버렸네. 진짜로, 가버렸어.”
문규완이 혼잣말했다.
더위로 인한 땀이 그의 턱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셋은 태양 볕 아래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누구도 들어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침묵이 대화인 것 같았다. 침묵 속에 감정이 휘몰아치고, 엉키고, 엮였다.
문규완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빛을, 태양을 정면으로 보려 노력했다.
“아…….”
…….
…….
만약에.
만약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서.
가로 엔터가 거대한 기획사가 되고.
성필이 오랫동안 품어온 꿈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 좌절된다면.
비록 그 사람이 의도하지 않고.
그 사람이 피해를 줄 생각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으로 인한 실패로 성필이 좌절하여.
성필이 업계를 떠나게 된다면.
평생의 꿈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럼, 홍규헌은 어떻게 하려고 할까?
“……음.”
문규완이 더위로 신음했다.
“오랜만에 기획사들이랑 유통사들, 방송국들에 인사나 하러 갈까.”
문규완이 손부채질하며 KS 엔터 정문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남홍범과 구유한이 말없이 뒤따랐다.
* * *
노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앞엔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 위엔 자장면과 탕수육이 있었다.
“먹어라.”
윤상열이 젓가락을 주었다.
먹어라, 라는 말을 들어도 노아의 혼란이 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혼란을 넘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건 날 멕이는 건가?’
자장면은 노아에게 트라우마 스위치다.
노아가 연습생 시절 몰래 자장면을 시켜 먹은 일로 성필과 윤상열이 싸웠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성필이 석세스 엔터에서 탈출했다.
‘아닌가? 이건 고마움의 표시인가?!’
박성필 그 못 배워처먹은 고졸 새끼를 내쫓을 계기를 줘서 고맙다, 그런 의미인가?!
노아는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면서 자장면을 섞기 시작했다.
노아의 생각과는 달리, 윤상열은 딱히 노아를 멕이려거나 우회적으로 칭찬하는 게 아니었다.
윤상열은 최근에 그토록 멸시해왔던 자기계발서를 읽었다. 바로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다.
그곳엔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코 실천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그중 윤상열의 마음을 끄는 법칙은 이것이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게 하라. 단, 성실한 태도로.’
노아는 윤상열의 임시 동맹이다.
임시 동맹의 목적은 윤상열이 글로브의 지지를 얻어 프로듀서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노아는 모르지만, 윤상열은 노아의 서포트를 높게 평가했다. 그녀의 충고 덕분에, 요즘 들어 글로브 멤버들의 불평이 조금 줄어든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윤상열은 데일 카네기에게서 배운 원칙들을 되새김질하며 말했다.
“노아.”
밥시간이 지나 사료를 받은 애완견처럼 자장면을 퍼먹고 있던 노아가 흠칫했다.
“잘해줬다.”
“…….”
노아가 마음의 눈물을 흘렸다.
‘시이발 그때 자장면만 안 시켜 먹었어도 박 팀장이 여길 안 떠났을 텐데…….’
그냥 글로브 성적이 잘 나와서 칭찬해주려고 불렀나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사람 꼽을 먹이다니…….
“자장면을 좋아하나 보군? 많이 먹어라.”
“끄흐으윽…….”
노아가 감동(感動, 마음이 움직임)하여 자장면을 먹자, 윤상열은 만족하며 자신의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때 작업실 문이 열렸다.
매니지먼트팀 쪽 직원이었다. 그는 입가가 자장면으로 범벅이 된 노아를 보곤 놀랐으나, 금세 정신을 차렸다.
“피디니…….”
“노크.”
“예?”
“노크, 노크 말야 노크, 노크 몰라?!”
“아, 아, 죄, 죄송합니다!”
직원이 밖을 나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노크했다. 윤상열이 짜증스레 들어오라고 하자, 그가 헐레벌떡 들어와 말했다.
“소,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누구?”
“그분이, 그, KS 엔터 프로듀싱 총괄이시라고…….”
최대한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장면을 퍼먹던 노아, 그리고 막 나무젓가락을 집은 윤상열 둘 다 깜짝 놀랐다.
윤상열이 드물게도 더듬으며 말했다.
“케, KS 엔터 프로듀싱 총괄이…… 왔다고?”
정호환이?
윤상열이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왠지 모르지만 노아도 벌떡 일어났다.
윤상열이 황급히 작업실을 나서자 노아도 입가에 자장면 소스를 잔뜩 묻힌 채 뒤따라 나섰다.
윤상열은 흥분했다.
‘정호환이 여기를 직접 찾아와?’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나를 데려가려고!’
다시 KS 엔터로 데려가려는 거다.
윤상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 글로브의 그 어마어마한 성과를 보고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내가 탐이 났을 거야. 누가 가능하겠어? 누가 가능하겠냐고!’
누가 의도적으로 한 시장을 타겟팅하고, 그 타겟팅을 성공시켜 반향을 불러일으키겠는가!
‘나야 나!’
이건 천재의 업적이다.
이건 왕의 업적이다.
이건 신의 업적이다.
‘나는 천재이고 왕이고 신이다!’
윤상열의 걸음이 훨씬 빨라졌다.
눈을 떴더니 창밖으로 눈이 쌓인 걸 보곤 신나서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어린아이 같았다.
윤상열의 얼굴도 어린아이다운 생기를 담아 발그레 붉어졌다. 입가엔 미소가 지워질 생각이 없는 듯 계속 머물렀다.
‘소녀연맹을 보곤 똥줄이 좀 타나 보지? 이 천재이자 왕이자 신인 윤상열이 없고선 이길 길이 보이질 않나? 그렇겠지. 좋아, 보여주마. 소녀연맹을 넘어서는 기적의 프로듀싱……!’
그런데 가던 도중, 한 단어가 윤상열의 뇌리에 팍 걸렸다.
‘글로브.’
KS 엔터로 돌아가면, 글로브는 어떻게 되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윤상열은 로비에 도착했다. 그곳엔 과연 외부인이 있었다.
사람이 사람인지라 석세스 엔터 대표인 김태훈이 직접 상대하는 중이었다.
“저, 이런 데 있지 마시고 응접실로 가시는 게 어떠신지…….”
“괜찮아요.”
외부인은 김태훈에게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외부인은 정호환이 아니었다.
“느, 너…….”
“음?”
외부인은 쪼그려 앉아 있던 다리를 폈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스니커즈라는 극히 심플한 복장. 머리칼은 펌한 의미도 없이 꽁지머리로 한데 모여 있었다.
“아, 오빠다.”
그녀, 윤희연이 윤상열을 향해 씩 미소 지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껏 말 상대를 해주던 김태훈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단 듯 윤상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김태훈은 당황해선 윤상열을 쳐다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말하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윤상열은 김태훈 같은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감을 지닌 사람이 있었으니까.
“오빠, 오랜만이네.”
KS 엔터 총괄 비주얼 디렉터, 윤희연 이사.
그녀를 본 윤상열은 짧게 굳어 있다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정호환 이사님은?”
“정호환 이사님을 왜 찾아?”
“프로듀싱 총괄이 왔다면서. 거짓말한 거냐? 나, 나를 보려고……?”
“무슨 소리야. 거짓말한 적 없어. 여기 있잖아.”
윤상열의 머리가 사고하기를 멈췄다.
‘윤희연’과 ‘총괄 프로듀서’라는 단어가 연결되지 않았다. 아니, 뇌가 연결시키길 거부했다.
윤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녀는 신나게 웃고는, 윤상열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윽고 둘 사이엔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틈도 없어졌다.
윤희연은 윤상열의 눈동자 안에 소용돌이치는 혼란을 즐겁게 감상했다.
“오빠, 봤지? 노래 한 줄 못 만들어도, 총괄 프로듀서 될 수 있다니까?”
KS 엔터 프로듀싱 총괄.
윤희연.
그녀가 윤상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빠, 돌아가자. 이 개집에서 나가서.”
‘개집’의 주인인 김태훈은 얼이 빠졌다.
“오빠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자.”
윤상열, KS 엔터 영입 제안.
그리고.
‘글로브 비상! 비사앙! 쵸(超)비사아아아아아아앙!’
얼굴을 박고 자장면을 먹은 것 같은 몰골의 노아가 마음속으로 광분했다.
노아는 윤상열의 어깨 너머로 황망한 얼굴의 김태훈을 보았다.
그리고.
‘석세스 엔터도 비상! 비사앙! 쵸비사아아아아아아아앙!’
석세스 엔터, 초비상(超非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