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78화 (678/760)

678화

‘브로드웨이를 이런 식으로 오다니.’

김덕팔은 대기실의 정경을 보았다.

세계적인 뮤직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대기실이라기엔 굉장히 단조롭다. 살구색을 연상시키는 옅은 주황색의 벽지와 목재 인테리어들은 절로 마음을 편케 해준다.

하지만 김덕팔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이곳에 들어올 때 보았던 ‘레버 레코드’ 본사의 어마어마한 위용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몇 층인지도 모르겠어.’

브로드웨이 중심가에 떡하니 박힌 초고층 빌딩.

음악 산업은 세계적으로 작은 규모의 산업에 속한다. 그럼에도, 3대 대기업이라 불릴 정도면 세계 문화 수도의 중심부에 이런 건물을 가질 수 있는가 싶었다.

하긴, 한국의 3대 기획사들도 서울의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으니.

“김 씨.”

옆자리의 개럿은 김덕팔과 달리 평온했다.

“할 수 있는 한 노력은 해보겠지만, 긍정적인 답변은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김덕팔은 벌써부터 초 치는 개럿에게 한 소리 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도 개럿에게 자신만만하게 조건을 내걸긴 했지만, ‘레버 레코드’의 본사 건물을 보곤 자신감이 싹 사라졌다.

이런 곳에 뭐가 아쉽다고 소녀연맹에게 호의를 베풀겠는가. 차라리 레버 레코드 산하 레이블에게 찾아가는 쪽이 훨씬 나았을 듯하다.

김덕팔은 한숨을 푹 쉬었다.

“걱정 마십시오. 거절당하는 덴 익숙합니다.”

“하긴, 저희 나이대의 비즈니스맨들은 모두 그러하니까요. 그건 그렇고, 꽤나 폭력적인 상사 밑에서 일하시나 봅니다. 그 나이에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온 것도 그렇고, 이렇게 불합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폭력적이라…….”

개럿은 모르겠지만, 이 말도 안 되는 교섭은 김덕팔의 억지였다.

그의 업무는 뭐든 좋으니 거대 유통사와 계약하는 것뿐이었다.

아마 본사에서 몇 단계 내려가서 자회사의 자회사인 작은 레이블과 계약하게 되겠지.

그래, 이건 김덕팔의 독단이다.

하지만.

‘폭력적이란 말은 틀리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홍규헌과 그를 보필하는 이사들.

그들이 주장하는 꿈은 폭력적이다. 폭력적으로 말이 안 되는 헛소리들이고, 폭력적으로 아름다운 꿈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매료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짓까지 하고 있겠지.

시간당 700달러의 거금을 부어가며 개럿을 며칠이나 붙잡고 있으니. 가로 엔터로 돌아가면 한구인이 기절하여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숙소는 싸구려로 잡아야겠군…….’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개럿이 먼저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명심하세요,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겁니다. 저돌적이지도 말고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압니다 알아요.”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한 명이 아니었다.

대여섯 명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김덕팔과 개럿의 앞에 섰다.

개럿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시발 뭐야(What the fuck)…….”

작은 소리였지만, 김덕팔은 개럿의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 욕설을 들을 수 있었다.

당황해서 그를 보았으나, 개럿은 욕설을 내뱉은 채로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김덕팔의 당혹 서린 눈은 개럿 대신 앞으로. 가장 앞에 선 이에게로 향했다.

곱게 다듬은 흰색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남자였다. 그가 씩 미소 짓자, 옆에 있는 사람이 그를 소개해주었다.

“리암 리튼, 레버 레코드의 회장님이십니다.”

“뭔(What the)…….”

김덕팔도 욕을 쓸 뻔했다.

* * *

입생로랑.

전 세계인이 인정하는 명품 브랜드.

이브 생 로랑 본인이 2002년 은퇴한 후, 생 로랑은 빛이 바래가는 듯 보였다.

경영진은 브랜드 그 자체인 전설적인 디자이너가 은퇴하자 회사의 앞날을 걱정해야 했다.

그러던 도중, 결론을 내렸다.

‘생 로랑을 대신할 디자이너를 구하자.’

생 로랑 패션 하우스의 개혁이 시작됐다.

2004년, 전설적인 디자이너인 이브 생 로랑을 대신할 사람이 나타났다.

생 로랑을 대신하여 전설이 된 패션 하우스의 얼굴이 될 인물.

그랑 쿠튀리에(grand couturier), 수석 디자이너의 탄생이다.

생 로랑의 수석 디자이너는 2대에서 3대로 이어지고, 그때마다 입생로랑 브랜드는 번영하였다.

그리하여 현재, 4대 수석 디자이너의 시대.

생 로랑 본사의 공방(工房) 중앙에 선 4대 수석 디자이너는 다른 디자이너들의 결과물을 눈으로 슥 훑었다.

옷을 입은 모델들은 나뭇조각이나 마찬가지란 듯, 그의 눈은 옷만을 훑었다.

“폐기. 폐기. 폐기.”

디자이너들의 혼신을 담은 옷들이 하나둘씩 폐기 처분을 받게 됐다.

모델의 뒤에 선 옷의 디자이너들은 피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그렇게 창조성의 살육이 이루어지던 때, 수석 디자이너에게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거만했던 수석 디자이너도 그 남자의 출현에 하던 일을 멈추었다.

“패탱.”

패탱.

입생로랑의 CMO(chief marketing officer, 최고 마케팅 책임자)였다.

패탱은 스마트 패드를 수석 디자이너에게 보이며, 용건을 짧고 간결하게 전달했다.

수석 디자이너가 흥미를 보였다.

“‘르 스모킹’이라고? 이게?”

‘르 스모킹’은 생로랑의 자랑인 컬렉션 중 하나이다.

아니, ‘르 스모킹’은 프랑스인의 자랑이다.

컬렉션 자체가 문화유산이 되어 프랑스인들의 가슴속 깊이 자부심을 새겼다.

그리고, 패드 화면 안엔 ‘르 스모킹’이라고 주장하는 옷을 입은 동양인 여자가 있다.

“이 구멍은 뭐야?”

“‘꼼데가르송’의 타공 패턴을 모방한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 얘가 새로운 앰배서더라고? 허락받으러 왔어?”

수석 디자이너는 패드 안의 모델, 장하양을 유심히 보았다.

“으음, 난 괜찮은데. 어차피 네가 할 일이기도 하고. 고급스럽네.”

“앰배서더는 아니야. 아직은.”

패탱이 패드를 조작하여 다음 슬라이드로 넘겼다. 그곳에는 어느 기록이 있었다.

“아이튜브 24시간 최다 조회 수……?”

“이 여자가 속한 그룹이 TOP10에 이름을 걸었어.”

“나한테 온 이유가 뭐야? 돌리지 말고 간결하게 말해.”

“과거에 왔던 요청인데, 우리 공식 SNS에 올려달라고 하더라고. 우리한테 영감을 받았단 걸 표시하는 조건으로 ‘르 스모킹’임을 밝혀도 된다고 했었거든. 우리 SNS에 올려달란 건 그쪽의 역제안이었지.”

“왜 안 받아들였어? 이렇게 유명한 그룹을?”

“그때는 안 유명했거든.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올리고 싶지만, 네 허락이 필요하니. SNS는 우리의 영혼의 일부니까.”

수석 디자이너가 피식 웃었다.

“아니 뭐, 이건 거의…….”

* * *

회의실.

‘꼼데가르송’의 디자인 총괄이 스크린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스크린엔 ‘꼼데가르송’의 디자이너들마저 잊어버린 타공 패턴 옷이 보였다. 소녀연맹의 ‘르 스모킹’이었다.

회의실 전원이 스크린에 나타난 장하양에게 혼을 빼앗긴 듯 멍한 얼굴이었다.

디자인 총괄이 ‘으음’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건 거의 뭐, 우리가 제발 올리게 해달라고 부탁해야 할 수준인데?”

아이튜브 24시간 최다 조회 수 뮤직비디오 TOP10.

아이튜브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열 번째다.

그 말은 즉, 소녀연맹은 현재 지구상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핫한 뮤지션이란 뜻이다.

만약 공식적인 통로로 그녀들에게 옷을 하나 입히려면, 어마어마한 돈과 인력, 시간이 소비될 거다.

그런데 저쪽에서 먼저 SNS에 올려달라고 제안이 왔다.

“옷과 모델의 짜임새이든, 소녀연맹이란 그룹의 인지도든, 안 올릴 이유가 없어.”

“그러면…….”

“몇 개국 애플 차트 1위라고?”

“어…… 저희가 파악한 건 38개국입니다. 이보다 더 많을 겁니다, 아마.”

“본사 SNS랑 전 세계의 각국 SNS에서도 올리라고 해. 그리고 저 타공 패턴, 우리 거라고? 누구 작품이야?”

“알아봤는데, 몇 년 전에 퇴사했습니다.”

“……그래?”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예술가로다.

* * *

‘진짜잖아?’

폰을 들여다보는 김덕팔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정말로 입생로랑이랑 꼼데가르송의 SNS에 올라갔어. 소녀연맹이란 이름도 박혀서!’

심지어 메인 SNS 하나에만 올라간 것도 아니다. 각국의 SNS에도 모두 올라갔다.

올라온 사진은 장하양이 ‘르 스모킹’을 입고 찍은 컨셉 포토 하나.

김덕팔은 이 사진을 찍을 때가 떠올랐다.

시간당 백만 원 이상을 받는 엄청난 포토그래퍼님을 불러서 찍었었다. 한구인이 눈물을 한 방울 또르르 흘리며 쓰러졌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이러면…….’

세계 유수의 브랜드 SNS 전체에 소녀연맹이 홍보되고 있다. 구독자 수는 전부 합쳐서 수천만 명이다.

수천만 명의 구독자가, 소녀연맹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앨범 판매량 상승은 대중에게서 기대할 수 없어.’

수천만 명의 구독자 안엔 케이팝 팬이 존재한다. 소녀연맹에게 관심이 없던 이들은 관심이 생길 거고, 천 명 중 한 명 정도는 앨범을 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앨범을 몇만 장 더 파는 것이다.

‘아냐, 이건 너무 낙관적으로 그린 거지.’

낙관적이긴 하다만.

“예스!”

김덕팔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로 엔터 홍보팀을 향해 무한한 애정이 솟아난다. 김덕팔은 잘은 모르지만, 홍보팀이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이 있었겠는가.

거의 악성 스팸 메일 수준으로 연락했을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이 나올 리가 없다.

아닌가?

소녀연맹이 그만큼 유명한 건가?

모르겠다.

김덕팔은 정신이 없었다.

인터넷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됐다.”

일이 끝났다.

김덕팔은 그제야 폰을 주머니에 넣곤, 그토록 기다리던 광경을 바라보았다.

먼저, 이곳이 어디인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일단, 그 이름도 유명한 뉴욕이다.

전 지구의 경제적, 문화적 수도다.

뉴욕 인구의 10%가 예술업에 종사한다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지나가는 사람 열에 하나는 어떤 종류든 예술가이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곳은 뉴욕.

그리고 타임스 스퀘어다.

웨스트 42번가와 웨스트 7번가, 세븐스 에비뉴와 브로드웨이가 교차하는 문화의 성지(聖地).

밤임에도 환히 빛나는 전광판이 가득하다.

전광판은 벽처럼 사방이 빽빽이 세운 빌딩들에 붙어 마치 낮과 같은 빛을 토해냈다.

사람들의 수는 또 어떠한가. 가장 혼잡한 시각의 서울 중심가를 방불케 한다. 그보다 더 복잡할지도 모른다.

세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심장부.

그곳의 중앙에, 김덕팔은 서 있었다.

서서, 보고 있다.

소녀연맹을.

“어때요?”

타임스 스퀘어 중앙 전광판.

세로로 길쭉한 그 전광판에 ‘르 스모킹’을 입은 장하양의 사진이 나와 있다. 그녀의 아래로 ‘Song for PEOPLE’ 문구가 새겨져 있다.

홍보 전광판답게 ‘NEW ALBUM RELEASE’라는 글자와, ‘스포티파잉’, 그리고 앨범 판매 사이트의 로고가 박혀 있다.

아,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소녀연맹의, 장하양의 얼굴이 세계 문화의 심장부에서 밝은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다.

“이, 이게, 이게, 가능, 가능한, 겁니까?”

김덕팔이 묻자, ‘레버 레코드’에서 나온 임시 담당자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예, 가능합니다.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니까요. 한국과는 노는 물과 힘이 많이 다르죠?”

“앨범이 발매한 지 6일이나 지났는데…….”

“예 뭐, 되네요.”

물론 여기엔 담당자가 굳이 밝히지 않는 뒷사정이 있다. 밝히지 않는 편이 낫다. 김덕팔은 엄청난 은혜를 입은 것처럼 느낄 테니.

실제로도 그러하고.

담당자는 폰을 꺼내어 그에게 보여주었다.

“‘스포티파잉’과 ‘애플 뮤직’에도 홍보가 올라갔습니다. 100만, 꼭 넘으면 좋겠네요.”

고작 하루밖에 안 남았지만 말이다.

김덕팔은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보다가, 소매로 눈가를 슥슥 닦았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담당자가 손을 내밀었다.

김덕팔이 그 손을 꽉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요. 레버 레코드의 식구가 된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소녀연맹.

세계 3대 유통사 중 하나, 레버 레코드와 직계약.

소녀연맹 컴백 145시간.

컴백 일주일째.

초동 집계까지 23시간.

라스트 스퍼트.

* * *

정호환은 퇴근하면 폰을 꺼둔다.

폰이 켜지는 건 출근하여 집무실 책상 앞에 앉은 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 소녀연맹의 반응이나 살피고 있을 듯해서였다.

약 일주일 전부터, 계속 그러해 왔다.

정호환은 하루하루 쇠약해지고 있었고, 오늘에야말로 그 쇠약의 종점을 찍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폰을 둔 정호환은, 그 폰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비서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정호환이 말했다. 오늘 스케줄은 전부 취소하라고. 비서는 당황했으나, 알겠다고 했다.

정호환은 폰을 바라보았다.

10시.

11시.

12시.

13시.

14시.

15시.

16시.

17시.

18시.

그리고, 마침내 손을 움직여 폰을 들었다.

전원을 켰다.

인터넷 창을 열었다.

소녀연맹을 검색한다.

“아…….”

소녀연맹 컴백 168시간째.

초동 집계 완료.

케이어스보다, 낮다.

“아…….”

낮지만.

“…….”

정호환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흐느꼈다.

책상이 종이였다면 찢겼을 기세로, 책상 모서리를 꽉 붙잡고 매달렸다. 눈물과 함께 흘러가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는 이 순간만큼은 전지전능한 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빌었다.

차라리.

차라리.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판매량으로 이기게 해달라고.

그 대신, 이 모든 결과를 무(無)로 돌려달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