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7화
[소녀연맹 ‘송 포 피플’ 초동 기록
6일 차 판매량: 7,1**장]
7,100장.
김채현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곤 옆을 보았다.
친구 이선주는 아직도 에세이 베스트셀러 코너를 기웃거리는 중이었다.
10분도 넘은 것 같다.
“돈도 많은 애가 걍 다 사면 안 돼?”
“많이 사둬도 안 읽는단 말야. 하나씩 사두고 읽어야지.”
결국 이선주가 책을 고른 건 그로부터 또 10분이 지나갔을 때였다.
평범한 직장인이 피아노를 배우면서 느낀 바를 쓴 에세이였다.
이선주는 벌써 그 책을 다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나도 피아노 배워볼까?”
“갑자기 왜?”
“취미지 뭐.”
“너 케이팝 댄스 배우고 싶다면서.”
“아 맞다. 그럼 춤을 배울까?”
“배울 시간은 있고?”
“시간이야 만들면 되잖아.”
하긴, 이선주는 사장이니 원한다면 타임 조절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점을 나가려던 순간, 김채현이 멈춰 섰다.
“지하 가자.”
서점 지하에선 문구와 음반, 전자기기나 잡동사니를 판다.
김채현과 이선주는 음반 판매 코너로 향했다. 벽면 한쪽을 점거한 음반 판매장엔 어린 나이의 여자들이 많았다.
김채현이 신보(新譜) 코너를 둘러보았다. 찾는 게 없어서 점원을 부르려던 때, 이선주가 그녀의 옷소매를 붙잡고 끌었다.
“왜?”
이선주가 검지로 한쪽을 가리켰다.
A4 용지에 인쇄한 투박한 문구가 보였다.
[소녀연맹 음반 전량 매진]
“아…….”
김채현은 이미 소녀연맹의 음반을 구매했다. 3종 모두 말이다. 하지만 6일 차 판매량을 보곤 아쉬워서 한 장 정도 더 사려고 했었다.
“다른 매장 가볼래?”
차트에 판매량이 반영되는 매장이 따로 있다. 아무 곳이나 들어간다고 되는 게 아니다.
김채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바로 가자. 배고파.”
김채현과 이선주는 매장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순간 이선주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100만 장 넘는 거 보고 싶었는데, 그치?”
“그럼 좋았겠지.”
좋았겠다.
사실 그 이상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현재도 90만 장을 돌파했다.
역대 걸그룹 초동 판매량 2위에 이름을 걸 예정인 것이다. 이름 없는 중소 기획사 소속 아이돌이 이루었다기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성과다.
‘게다가 소녀연맹―케이어스 법칙도 증명됐고.’
케이어스의 팬덤인 유스는 소녀연맹의 판매량은 특별한 게 아니라고들 한다.
케이어스가 개척한 시장의 수혜를 받아먹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받아먹는 것뿐이니, 판매량이 높아봤자 케이어스의 1/2에 불과할 거라고 말했다.
그 비아냥 섞인 주장은 발매 첫날부터 깨졌다.
‘소녀연맹이 케이어스의 절반이 아니야.’
소녀연맹이 독자적으로 2배씩 판매량이 증가해온 것이다.
솔직히, 김채현도 놀라웠다.
판매량이란 게 이렇게나 폭증할 수 있는 건 줄 처음 알았다. 이전 시대의 아이돌과 비교하는 게 불가능할 수준이다.
“채현아, 너 진로 되게 잘 고른 거 아냐?”
“응?”
“아이돌 시장 계속 커지고 있잖아.”
중소 기획사도 기적을 거머쥘 수 있단 증거, 소녀연맹. 그리고 소녀연맹으로 대표되는 케이팝 시장의 양적 팽창.
이선주의 말마따나, 김채현은 시대를 잘 타고난 걸 수도 있다.
“촉 좋다 너.”
이선주의 칭찬에 김채현이 픽 웃었다.
“커져봤자 얼마나 커진다고. 음악 산업은 영향력과 파급 효과에 비해 규모가 엄청 작아. 세계의 절반을 삼킨 미국도 그렇고.”
“대학생 되니까 이야기 주제가 달라지네. 너 먹물 먹은 티 난다.”
“암튼, 돈 벌려면 엔터 같은 덴 가면 안 돼.”
“그럼 넌 왜 가?”
“내 최우선 목적은 돈이 아니니까.”
“내 친구 멋지다!”
이선주가 깔깔 웃으며 김채현과 어깨동무했다. 김채현도 흐뭇하게 웃으며 그녀와 함께 걸었다.
이선주가 짐짓 젠체하며 말했다.
“내가 소련이들 앨범 10장 더 살까?”
“그걸로 누구 코에 붙이게? 됐어. 이만하면 세계가 경악하고 일본이 피눈물을 흘리고 중국이 오열하는 성과 아니야?”
[소녀연맹 ‘송 포 피플’ 초동 기록
1일 차 판매량: 532,8**장
2일 차 판매량: 199,1**장
3일 차 판매량: 100,8**장
4일 차 판매량: 57,0**장
5일 차 판매량: 10,1**장
6일 차 판매량: 7,1**장
누적 판매량: 907,9**장]
“그리고 또, 우리한텐 특별한 의미잖아.”
김채현은 아이돌에 대한 과몰입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여러 요소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대결이다.
음원 순위, 콘서트 규모, 앨범 판매량 등으로 정해지는 순위가 있다.
아이돌 팬덤은 응원하는 아이돌의 자체적인 성장만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다른 아이돌과의 비교로 더 큰 성취감을 얻는다.
1세대 아이돌부터 그러한 대립 구도로 커다란 반향을 얻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인민이들한텐 이번 성과가 특별해.”
어째서 김채현이 중소 기획사 소속 소녀연맹을 응원하게 되었던가.
처음에는 그저 소녀연맹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좋아하지 못했으리라.
김채현은 소녀연맹이 그려가는 스토리에 반했고, 몰입했다.
“다음에는 분명.”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라이벌리.
그건 강팀과 약팀의 싸움에서 약팀을 응원하는 심리를 김채현에게 심어주었다.
김채현이 응원하는 팀은 성과가 좋다. 리그에서 항상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그래도 부동의 강호팀엔 매번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듣는다.
아니, 처음에는 몇 수나 아래였다.
그런데 차이가 점점 줄어든다.
“케이어스를 이길 거야.”
응원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김채현은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이기는 날까진 인민일 것이다. 그녀들과 함께 샴페인을 터뜨리고 기쁨을 만끽하고 싶다.
응원하던 팀이 6부 리그부터 시작해서 EPL 우승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보고 싶다.
“그러니까.”
[6일 차 판매량: 7,1**장]
“만족해.”
* * *
이번 주 첫 번째 음방 출연이다.
소녀연맹은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왔다.
멤버들은 돌아오는 길, 장하양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줄곧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밴의 뒷좌석에 앉은 리카와 조아라는 속삭이며 대화했다.
“하양 언니 저기압인 거지……?”
“아타시(나)한텐 그렇게 보여…….”
당황스럽다.
리카와 조아라는 일이 없을 때도 회사로 와서 직원들의 호들갑을 들었다. 그래서 현재 상황을 굉장히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보았다.
판매량 90만 장 돌파!
세계 각국 음원 차트 1위!
거기에다 ‘송 포 피플’은 한국 차트에서도 주간 1위에 걸릴 게 확실하다.
소녀연맹에게도 공전절후의 히트다. 앞으로도 이만한 성공이 있을까 걱정될 정도로 히트했다.
“으, 나 속이 메스꺼워…….”
리카가 배를 살살 쓸었다.
다음 ‘우리들의 프로듀싱’ 타자는 리카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안 그래도 ‘송 포 피플’이 벌여놓은 커다란 성과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장하양의 반응이 저렇다니.
“하양 언니는 이 정도로도 만족 못 하시나 봐. 아라쨩 도시요(어떡해)……. 다음에 판매량은 증가한다 쳐도 음원 성적이 안 좋으면 언니한테 코로사레루(살해당해버려)…….”
조아라는 리카의 심정을 이해했다.
백설하가 프로듀싱한 ‘애플 크러쉬’는 역대 최고 수준의 음원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 뒤가 바로 조아라였다. 판매량은 당연하단 듯 증가했지만, 음원 점수가 개판이었다. 해외에서 성공했다지만, 본진에서 망했는데 무슨 소용인가?
한국엔 소녀연맹이 ‘오토마타’를 냈단 것도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요즘은 좀 알려졌다지만, ‘애플 크러쉬’에 비해 ‘오토마타’는 취급이 박했다. 그런 곡이 있었지, 이런 취급을 받고 있으니.
“그러게.”
의외로 조아라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우리의 인기가 지속되는 한, 판매량은 규칙적으로 상승해. 그런데 음원 점수는 안 그래.’
사실 판매량은 부차적인 거다.
전 앨범의 음원이 좋은 성적을 거두면 다음 판매량에 반영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즉, 아이돌의 주요한 무기는 음원이라고 봐야 한다. 일단 음악이 좋아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다음 앨범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으니.
‘나는 해외에서 잘 먹혀서 국내에서의 참패가 상쇄됐다지만. 다음 타자인 리카는 걱정이 크겠지.’
어쩌면, 리카는 ‘우리들의 프로듀싱’ 역사상 가장 자율성을 발휘하지 못할 멤버가 될 수 있다.
백설하 다음인 조아라는 막연히 ‘음원도 우리 인기 따라서 그냥저냥 잘되겠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조아라라는 예시가 있으니, 다음 사람은 뮤직 프로듀싱 과정에서 고민이 많아질 것이다.
‘하양 언니도 그랬어.’
이지리스닝 계열의 듣기 편한 곡을 골랐다.
소녀연맹의 독창적인 색을 보이기보다 먹히는 음악을 고른 것이다. 어쩌면 그건 장하양이 바라는 색깔과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전무후무한 대히트를 거두었다. 다음 타자인 리카는 ‘내 마음대로 하면 망할 테니까 무난한 곡으로 해야지’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카와이 퓨처 베이스 같은 걸 좋아하는 애가…….’
누구도 모르는 새에, 성필의 계획은 망가지고 있던 거 아닐까.
창조성을 발휘하는 게 ‘우리들의 프로듀싱’의 목적인데. 후속 주자가 될수록 창조성을 발휘하는 데 리스크가 따른다.
‘그럴 수밖에.’
조아라는 앞자리에 앉은 장하양을 보았다.
‘이만한 성공을 거둔 멤버가 생겼는데, 어떻게 부담이 안 생겨.’
판매량이 높다.
해외 차트들을 올킬한다.
거기에 국내 차트에선 월간 1위마저 차지할 기미도 보인다.
이런 성적을 다시 거둘 수 있을까?
‘없어.’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은 한 번 히트했던 공식을 가져와도 똑같이 성공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멤버에 따라 색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니, 성공 방식의 재현(再現) 따위는 절대 불가능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조아라는 신아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마지막 주자.’
만약 리카가 장하양을 뛰어넘는 성공을 구가한다면, 소녀연맹은 그야말로 월드 클래스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다.
가로 엔터의 기둥 수준이 아닌 가로 엔터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그런 그룹의 프로듀싱 권한을 얻은 신아름은 맨정신으로 사고할 수 있을까.
“얘들아, 오늘도 수고했어.”
매니저 안이상이 인사하자, 멤버들은 그에게 차례로 고개를 숙이며 회사로 들어갔다.
장하양이 가장 빨랐다. 거의 뛰는 것과 비슷한 걸음걸이로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다른 멤버들이 잡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장하양은 계단을 날 듯이 뛰어 올라가 사무실로 도착했다.
사무실 벽면의 스크린엔 소녀연맹이 출연했던 음방 채널이 틀어져 있었다. 음방은 끝났기에 다른 프로그램이 나오는 중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서 사무실엔 소수의 인원만이 있었다.
당연히 성필도 있었다.
그는 구부렸던 허리를 펴며 장하양에게로 의자를 빙글 돌렸다. 그가 미소 지으며 축하를 전했다.
“음방 1위 축하해. 이제 2관왕이네. 이러다가 10관왕도 넘을 거 같아. 기록이야.”
“이제 끝인가요?”
사무실엔 들뜬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장하양이 오기 전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소녀연맹이 1위를 차지하자마자 축포를 터뜨렸겠지.
남은 이들은 그 잔향을 기분 좋게 음미하고 있던 중이었다.
“끝일까요?”
그러나 장하양의 그 물음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밀리언셀러는…….”
장하양은 ‘송 포 피플’을 완성하고 이렇게 말했었다. 하늘에 서겠다, 라고.
걸그룹으로선 꿈의 영역인 밀리언셀러에 들어서고 싶단 포부를 밝혔었다.
처음엔 자기암시 같은 것이었다.
못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지르고 본다는 식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며 밀리언셀러가 가까운 목표로 느껴졌다. 정말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못 할까요……?”
성필은 홍보팀 파티션 너머의 강지혜를 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성필이 다시 장하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양아.”
[소녀연맹 ‘송 포 피플’ 초동 기록
1일 차 판매량: 532,8**장
2일 차 판매량: 199,1**장
3일 차 판매량: 100,8**장
4일 차 판매량: 57,0**장
5일 차 판매량: 10,1**장
6일 차 판매량: 7,1**장
누적 판매량: 907,9**장]
케이어스 ‘헬리오스’의 86.4%.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어.”
장하양이 팔을 늘어뜨렸다. 경기를 끝낸 선수처럼 힘이 탁 풀렸다.
* * *
SMS 엔터 3층.
아티스트 연습실이 빽빽이 들어선 공간.
강성욱이 한 아티스트의 평가를 마치고 복도로 나왔다. 그의 뒤를 비서 한 명이 따랐다.
그때 복도 맞은편에서 아카이브 멤버들이 다가왔다. 무표정했던 강성욱의 얼굴이 순식간에 활짝 펴졌다.
“어, 대표님이다!”
“대표님!”
“얘들아!”
아카이브 멤버들이 화기애애하게 맞아주자 강성욱은 둠칫둠칫 춤을 추며 그녀들에게로 다가갔다.
멤버들이 박장대소했다.
강성욱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지…….
“대표님.”
비서가 그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귓속말했다.
“아카이브분들 현재 촬영 중이십니다.”
“촬영 중?”
강성욱의 눈이 재빨리 아카이브의 뒤를 훑었다. 옆방 문 쪽에 촬영 스태프들이 있는 게 보였다.
“아.”
강성욱이 재빨리 얼굴을 가리고 아카이브를 지나쳤다. 사라지는 그의 뒤로 멤버들의 웃음소리가 배웅을 대신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강성욱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손부채를 부치고,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오르자 붉어졌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원래대로, 차가운 무표정이었다.
그는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등을 대곤 다리를 떨었다. 짜증을 풀풀 풍기는 그의 앞으로 비서가 스포츠 음료를 가져왔다.
강성욱이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비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세심한 어투로 물었다.
“이제 그만두셔도 되지 않을까요?”
강성욱이 비서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만두라구요? 이건 복수예요!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시대착오적 발언입니다.”
“아.”
비서의 업무는 강성욱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언어 사용도 그중 하나였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요즘 사람들은 무심코 던진 한마디를 가지고 개처럼 물어뜯곤 한다.
대표로서 단어 한마디 한마디를 세심하게 골라야만 했다. 그의 사소한 실책은 회사 전체에 영향을 끼치니 말이다.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어요?”
비서는 그의 다리를 보았다.
여전히 짜증을 담아 달달 떨리고 있었다. 저럴 거면 복수인지 뭔지, 그만두면 좋을 것을.
소녀연맹과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런 짓을 하는 건지 원. 비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강성욱은 진지했다.
깍지로 턱을 받친 그의 눈엔 불길이 타올랐다.
“절대, 주워 담지 않아요.”
평소엔 부드러워 비단 같기까지 한 그의 분위기가, 지금은 막 담금질을 끝낸 칼처럼 날카롭고도 단단했다.
* * *
“너도, 나도.”
성필의 어조는 단호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성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하양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위로를 담아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음 그만 쓰고, 돌아가. 내일 스케줄도 있으니 쉬어야지. 편히 있어.”
“……죄송해요.”
“뭐가?”
“만약에, 제가 ‘르 스모킹’ 의상을 고집하지만 않았어도…….”
장하양이 떨리는 손을 천천히 위로 들었다.
“지금보다 음방에 더 많이 출연하고…….”
장하양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린 얼굴로부터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었다.
“예능이랑…… 방송국 홍보 채널에도 출연해서…… 더, 더…….”
장하양은 특별하다.
성필은 그리 생각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했던 백설하·조아라와 달리 침착함을 잃지 않았으니까.
장하양은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비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성공할 미래가 보이던 사람처럼.
그렇기에 그녀는 강인했다.
“더, 성공했을 텐데…….”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그럴까.
성필마저 앨범을 발매할 때면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프로듀싱 과정에서도 확신이 서지 않아 술로 밤을 달랬던 날이 꽤 있었다.
그의 장난스러운 면모는 그러한 불안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그 방어기제가, 장하양에겐 꾸며낸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정작 결과가 눈앞으로 다가오니, 장하양은 더 이상 강한 척할 수 없었다.
“케이어스를 이번에야말로…….”
“하양아.”
성필이 다시 그녀를 위로하려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주려 할 때, 그보다 빨리 장하양이 몸을 기대왔다.
성필은 급속냉동당한 어육처럼 굳었다.
양팔을 부자연스럽게 들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있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보았다.
강지혜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성을 냈다. 뭐 하고 있느냐고. 빨리 위로해주라고.
성필은 팔을 뻣뻣하게 움직여 장하양을 가볍게 포옹했다.
“박 이사님의 기대를…….”
“하양아. 이게 진 거라고 생각해? ‘송 포 피플’은 음원에서 압도적으로 ‘파에톤’을 눌렀어. 뮤직비디오는? ‘파에톤’이 일주일 걸린 기록을 하루 만에 달성했어. 월드 세일즈 송 차트는? 세계적으로 ‘파에톤’과 비교가 안…… 비교…… ‘송 포 피플’이 ‘파에톤’보다 성적이 좋아.”
“하지만…….”
“효민이랑 소유 씨가 비슷한 시기에 음방에서 만났었잖아.”
“…….”
“효민이가 진 거야? 효민이한테 가서, ‘넌 졌어’라고 말할 수 있어?”
“…….”
“아니지. 예의로써 못 말한단 게 아니라, 효민이는 이겼던 거야. 더 조악한 무기를 들고, 골리앗을 쓰러뜨린 거야. 안 그래? 우리도 그렇고.”
성필이 장하양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조금 현실적인 말을 할게. 옛날에 한 이사님한테 이런 말씀 들었다면서.”
장하양이 ‘아니’ 퍼포먼스로 난항을 겪고 있을 때였다. 장하양은 한구인에게 푸념을 늘어놓았었다.
자신은 멤버들보다 못하다고.
그때 한구인이 말했었다.
장하양이 멤버들보다 못한 게 당연하다고.
“시간이야. KS 엔터와 가로 엔터 사이엔 30년의 세월이 있어.”
조아라는 장하양보다 춤을 몇 년 일찍 시작했다. 백설하는 장하양보다 노래를 몇 년 일찍 시작했다. 리카는 장하양보다 일찍 아이돌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신아름도 리카와 마찬가지다.
그때의 한구인은 단호했었다.
장하양이 멤버들보다 못한 건 당연하다. 멤버들보다 잘하길 바란다면, 그건 분수에 맞지 않는 바람이노라고.
“고작 3년 6개월 만에 30년을 어떻게 따라잡겠어. 그런데, 우리는 따라가고 있어. 하양이 네가 KS 엔터의 역작인 케이어스에게, 케이어스의 바로 뒤까지 쫓아가게 만든 거야.”
한구인이 했던 말은 이러했다.
만약 장하양이 정말 멤버들보다 퍼포먼스를 잘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불합리한 게 아니겠냐고.
신이 세상을 잘못 설계한 거라고.
그런데 그 잘못된 설계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결과가, 소녀연맹의 앞에 펼쳐지고 있다.
아니, 펼쳐졌다.
“판매량을 제외하곤 압승이야. 물론, 하양아.”
성필이 장하양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가 기억하는 어릴 적 어머니의 손길처럼 부드럽고도 따스하게.
“네가 분해하는 마음은 이해해. 모든 과거가 후회되겠지. 이때 이랬으면, 저 때 저랬다면, 그랬다면 지금이 달라졌을까. 그러면 안 돼. 과거의 너는 그때 최선의 선택을 내렸어.”
“…….”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네가 말했잖아. 과거의 너도 너라고. 과거를 후회한다는 건, 과거의 너를 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어째서 과거에 그랬냐고. 과거의 너는,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택한 것뿐인데.”
울어도 된다.
분해해도 된다.
하지만, 과거를 후회하진 마라.
“충분하고도 넘쳐, 하양아.”
“……끅.”
마침내, 장하양이 참고 있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성필에게 사과하고 싶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번의 성과를 보고 놀랐다. 감탄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판매량.
케이어스를 완벽히 이기지 못한다면 최소한 밀리언셀러라도 되고팠다. 그랬다면 체면치레가 됐을 테니.
그 한 가지 오점이 거대한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 오점으로, 성필이 아쉬워한다면, 장하양은 평생토록 씻기 힘든 죄책감을 느꼈으리라.
그래서 성필에게서 받은 위로는 그 어떠한 것보다 큰 가치를 지녔다.
“박 이사님…….”
장하양이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눈물로 범벅이었다.
그녀는 뗀 손을 성필의 겨드랑이 사이로 넣어 그를 꽉 끌어안.
“박 이사님!”
강지혜가 외치자 장하양이 흠칫했다.
성필도 놀라선 장하양에게 하던 포옹을 풀고 그쪽을 보았다.
“연락이, 왔어요!”
그 말에 성필의 얼굴이 이제까지 본 적 없던 색으로 환히 밝아졌다. 장하양은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뭐, 뭐가 와요?”
“라스트 스퍼트.”
성필의 말엔 열기가 섞여 있었다.
라스트 스퍼트.
장하양은 멍하니 그 단어를 되새기다가, 놀라 말을 더듬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면서요……?”
“없지. 나는.”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해줘야 했어.”
“뭘요……?”
“아까 네가 ‘르 스모킹’ 의상 택한 걸 후회했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더 잘됐을 수도 있겠다고.”
“네…….”
“아니야. 네 선택은, 다른 형태로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