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76화 (676/760)

676화

공중파 음방 PD 배현정.

그녀는 파격적이기 그지없는 소녀연맹의 ‘르 스모킹’ 의상을 허락해주었더랬다.

방심위에 불려갈 게 뻔함에도, 어째서인지 모를 미디어 종사자로서의 사명감이 불타올라 허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때 CP에게 보고하니, 그는 배현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네가 다 책임질 거지?”

그리 물었었다.

심의 규정을 고의로 무시함으로써 국민의 윤리의식과 건전한 정서를 해친 벌을 달게 받겠느냐는, 협박과 다름없는 물음이었다.

평소의 배현정이었으면 쫄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또 들었었는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규칙 제150호 제7조, 방송의 공적 책임!”

인류문화의 다양성 존중이니, 다양한 의견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다루어 사회의 다원화에 기여해야 하느니.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줄줄 읊었었다.

그에 CP가 답했다.

“방심위 가서 그렇게 말할 거란 거지? 알겠어. 네가 한 거다?”

허락해준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표현하자면 이건 허락이 아니었다.

소녀연맹의 출연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압도적일 때에만 ‘CP가 허락해준 것’이 될 터다.

그 외의 경우엔 배현정의 독단이 될 터다.

지어낼 말이야 많겠지.

“알겠습니다.”

사지로 나가는 것이지만, 배현정은 자신이 있었다. CP도 그러할 것이다.

소녀연맹의 공중파 단독 출연이다.

이렇게 커다란 파이를 어떻게 외면하기만 하겠는가? 거부한 다른 공중파 음방 PD들도 조금씩 엉덩이가 들썩거릴 것이다.

아마 소녀연맹이 컴백할 시기가 되면, 어쩔 수 없단 티를 내며 가로 엔터와 접촉하겠지.

그보다 먼저 배현정이 소녀연맹의 출연을 허락해준 건 상징성을 지닌다.

‘우리가 은혜를 준 게 되니까.’

가장 어려울 때 가로 엔터에게 손을 내밀어준 은인이 된다. 그 결과, 소녀연맹의 컴백 무대를 얻을 수 있게 됐다.

‘CP님이 별다른 설득 없이 허락해준 이유가 있지.’

이건 반드시 이익이 더 크다.

배현정은 내심 만족스러웠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배현정은 CP와 예능국장과 동시 면담을 하게 됐다.

듣게 된 말은 이러했다.

“네?”

소녀연맹의 음방 출연을 취소하라.

국장이 한숨을 토했다.

“YJS 있잖아. 걔네가 그러래.”

YJS와 배현정의 소속 방송국은 사이가 안 좋다. 몇 년 전, 이젠 이유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불화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때문에 YJS 소속 뮤지션들은 배현정 담당 음방에 몇 년째 출연하지 않고 있었다.

그건 굉장히 치욕스러운 시간이었다.

방송국 연말 무대나 시상식 때마다는 곤욕스러웠다.

하필 YJS 소속 뮤지션이 출연하지도 않고 1위를 할 때나, 출연하지도 않았는데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을 땐 창피하기까지 했다.

MC가 ‘대상 축하드립니다!’라고 하는데, 상 받을 사람은 오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대리 수상자도 오지 않아서, 참석한 이들끼리 박수만 치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렇게 해주면, 과거는 잊고 깨끗하게 다시 시작하자고 하더라.”

“현정아.”

CP가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다정스러운 투로 그녀를 불렀다.

“대충 상황은 알겠지?”

상황?

알겠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까지 시간도 거의 걸리지 않았다.

‘YJS 엔터 소속 뮤지션 전체와 소녀연맹 하나.’

저울에 올리는 것조차 미안한 계산이다. 무조건 YJS 엔터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배현정의 입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저희가 개예요?”

배현정이 단호히 거부했다.

“게네들이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말게? 방송국 가오 다 떨어졌네요 이게 뭔데요! 국장님, 옛날에 이준호 욕했던 거 전부 거짓말이셨어요? 그놈 싸가지 고치겠다면서요!”

“내 싸가지가 먼저 고쳐질 거 같아서 그래…….”

“여기서 꼬리 내리면요? 그쪽이 더 우릴 우습게 알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요즘 엔터사들이 우리 무시하고 아주 개판이 다 났는데! 이러면 안 돼요!”

“그러면 어떡하냐…….”

“최소한 저희가 먼저면 안 되죠!”

CP와 국장이 동시에 무슨 뜻이냐며 그녀에게 눈짓했다.

“엔터사와 방송국의 권력관계 역전이 슬슬 가시화될 거예요. 꼬리를 내리는 쪽이 분명 나와요. 그런데, 그게 저희가 먼저면 안 되잖아요. 이래 봬도 방송국 이름에 ‘Korea’가 떡하니 박혀 있는 곳이 이러면 안 되죠! 아, 솔직히 말해서 저희가 수십 년간 참 미안한 짓들 많이 했습니다! 엔터사들한테 갑질한 게 참 많아요!”

갑질한 당사자인 국장과 CP의 얼굴이 굳었다.

사실 배현정으로선 불합리한 상황이었다. 자신은 엔터사들에게 딱히 갑질한 적도 없는데, 선배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양새이니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상하를 나누지 말고, 진짜 협력관계로 나아갑시다!”

“그러니까 YJS 엔터랑…….”

“아뇨, 가로 엔터랑이에요.”

CP가 할 말을 잃었다.

“뭐?”

“제가 봤을 때, 가로 엔터가 포텐셜이 커요. 상장했으면 제 전 재산 털어서 주식 샀어요.”

정보: 허풍임.

“사랑의 응급 구조 요원 효민이도 봐요. 성공했잖아요? 다음으로 웨이퍼센트도, 그 차기 그룹도 성공할 겁니다. 제가 보장해요! 그리고 그보다 먼저, 소녀연맹이 진짜 공전절후의 대히트를 터뜨릴 겁니다!”

“너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

가로 엔터의 성장을 믿고 YJS의 요구를 씹자는 뜻이다.

한국 엔터계를 갈라 먹는 거인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손을 쳐내고, 새로 사귄 난쟁이 친구와 손잡고 잘해보겠단 뜻이다.

배현정이 미래를 보지 않고서야 이렇게 쉽게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당장 내일 주식이 오를지 내릴지도 모르는 인간 주제에, 어떻게 몇 년 후의 일을 점친단 말인가?

가치 투자를 주창한 워런 버핏도 배현정을 보면 ‘너무 비합리적인데요?’라고 할 법하다.

가치 투자는 가치 있는 곳에 투자하라는 원칙이지, 현재의 명백한 가치를 무시하란 뜻이 아니니까.

“YJS 엔터 산하에 아이돌 그룹 전부 합치면 10개도 넘을 거다. 걔네 거의 다 패싱하면서, 가로 엔터 하나 붙잡고 있자는 거야 지금?”

“아 꼴받잖아요!”

CP는 벙쪘다.

“꼴받아?”

“네! YJS 엔터 게네들이 뭔데요? 우리 공영방송이 사기업의 영향력에 좌지우지되어도 괜찮은 겁니까?”

“너 뭐 잘못 먹었…….”

“맞다.”

“국장님……?”

“내 감정을 아주 잘 표현해줬어 배 PD. 맞다, 나 꼴받는다.”

배현정과 국장이 뜨겁게 악수했다.

“배 PD, 그래. 그렇게 하자.”

“소녀연맹을 믿어주시는 거네요!”

“아니, 걔네는 잘 모르겠고 그냥 YJS 엔터 하는 짓 꼴받으니까 안 받아들일 거야.”

국장은 그냥 미친놈이었다.

“옛 원한을 그냥 잊자는 거면 몰라도, 이렇게 거래 형식으로 베푸는 듯 제안하다니. 수신료의 가치를 실천하는 우리가 받아들일 제안이 아니다. 고마워, 배 PD. 덕분에 눈이 떴다.”

“아, 네에…….”

둘의 대화를 지켜보는 CP는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그리고 결전의 날.

소녀연맹의 컴백, 으로부터 닷새째.

배현정은 아이튜브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신이시여…….”

소녀연맹 컴백 스테이지 방송 영상.

조회 수 1,000만 돌파.

기록적인 성과다.

보통은 이만한 조회 수가 결코 나올 수 없다. 그야말로 하늘이 돕지 않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하늘이 도왔어…….’

현재까지도 소녀연맹이 출연한 음방은 고작 세 개에 불과하다.

거기에다 공중파 음방은 배현정이 담당하는 곳 딱 하나뿐. 그리고 그게 컴백 무대, 즉 가로 엔터가 가장 많이 힘을 쓴 무대였다.

이번 소녀연맹의 컴백은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보고픈 자들이 넘쳤다. 소녀연맹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 주워 먹고 싶은 이들이 산과 바다를 덮고도 남았다.

그런데 볼 게 없다.

예능 출연은 아예 안 했다.

그러니 몰려든다.

빈약한 소녀연맹의 스케줄이 오히려 기폭제가 되어 컴백 스테이지 영상으로 몰려든다.

‘당일 시청률도 역대급이었는데, 후속 영상들도 전부 대박이 터지잖아.’

방구석 1열 직캠, 멤버 개인 팬캠, 기타 등등 음방으로 뽑아낼 수 있는 콘텐츠는 전부 수백만 조회 수를 기록 중이다.

이례적일 수준이다. 이만한 화제성은 비교할 그룹조차 마땅치 않다.

“PD님, 디자인팀이랑 조명팀이 기다리는데요.”

“5분만 더 기다리라고 해…….”

부하 직원은 배현정을 이상한 사람처럼 흘기곤 자리를 떠났다.

배현정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곤 모니터에 눈을 들이박을 기세로 가까이 가져간 채였다.

실제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때 테이블에 둔 배현정의 폰이 요란한 진동을 뱉어냈다.

한창 소녀연맹에게 몰입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정확히는, 이러한 무대를 연출해낸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배현정은 달뜬 한숨을 뱉으며 폰을 들었다.

“응?”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여보세요?”

옆 공중파 방송국의 음방 PD다.

딱히 만날 일도, 연락할 일도 없는 사람. 옛날에 선배의 술자리에 따라갔다가 만났었다.

“아, 네네.”

상대 PD, 성진우는 약 5분에 걸쳐 자기 할 말을 했다.

“저, PD님.”

그리고 아까 떠나갔었던 부하 직원이 다시금 배현정에게로 왔다. 배현정은 잠시 기다리는 뜻으로 그에게 손바닥을 보였다.

“네네, 아……. 네,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네에, 감사합니다. 네에.”

전화가 끊겼다.

배현정은 크큭 웃으며 폰을 보았다.

직원이 의아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피디님, 누구한테 연락 왔는데 그래요?”

“옆 동네 음방 PD.

“오, 뭐라고 하는데요?”

“아니 뭐, 그냥 만나서 얼굴 보자고.”

“뭐야, 드디어 피디님한테 들이대는 남자가…….”

“가로 엔터에 박 이사 데리고 보자고 하네.”

“아…….”

직원이 허허 웃었다.

“뭐, 피디님이야 그분 뵐 명분이 있으니까요. 근데 그냥 그쪽한테 만나자고 하면 안 돼요? 왜 굳이 피디님 통해서 만나려고 할까요?”

“왜겠어? 뻔하지. 오라고 했다가 까인 거야.”

“네? 피디가 불렀는데 깠다고요? 무슨 깡으로요? 가로 엔터 진짜 소녀연맹 하나 뚝딱 만들고 앞으론 장사 안 할 거래요?”

“모르겠다 나도.”

걱정되긴 한다.

“그래도, 시원하긴 하네.”

배현정도 연일 도배되는 소녀연맹 관련 기사를 보고 있었다. 부당한 압박에 맞서 싸우는 다섯 명의 소녀들…….

소녀연맹은 철저하게 억울하고 정의로운 약자였다. 보통 약자는 억울하기만 하지만, 소녀연맹은 정의로움까지 갖추었다.

열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이돌의 이미지가 전부 만들어졌단 걸 아는 배현정마저, 이제 와선 소녀연맹을 응원하게 됐으니.

* * *

공중파 음방 PD 성진우.

그는 YJS 엔터로부터 돌아온 대답에 안도했다. 소녀연맹을 음방에 출연시키더라도 상관없다고 한다. 그럼 이제 됐다.

이제 됐을 텐데, 마음에 쌓인 응어리는 여전하다.

‘제기랄…….’

소녀연맹이 컴백한 지 채 한 주가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성진우는 그 며칠 동안, 위로부터 1년 동안 받을 갈굼을 전부 받아내야 했다.

옆 동네 음방은 소녀연맹 컴백으로 역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건만, 너는 뭘 했느냐?

그깟 심의가 뭐라고 소녀연맹 컴백을 거부했느냐.

괜히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로 네가 역풍을 몰고 오지 않았느냐.

이런 건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

방심위 그거 한 번 갔다 오는 게 뭐 그리 큰 대수라고. 우리가 그거 하나 이해 못 해주고, 커버 못 해줄까 봐 그랬느냐.

사람이 왜 이렇게 대국적인 시야가 없느냐.

대체 PD 자리엔 어떻게 올랐느냐…….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다.

‘YJS 엔터가 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꼬락서니는, 성진우도 충분히 납득할 짓거리였지만 그래도 불합리하게만 느껴졌다.

진짜 윗사람이라면, 책임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문책 대신 위로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내 잘못이야?’

불가항력이었다.

의상 때문만이었다면, 그래.

성진우도 최소한의 책임 의식은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YJS 엔터가 칼 들고 협박하는데 뭐 어떡하란 건가?

옆 동네 배현정네처럼 YJS 엔터 소속 뮤지션을 전부 패싱하라고?

소속 아티스트들의 인지도가 세계적이고, 국내 홍보 채널과 유통 채널마저 보유한 회사에게 일개 방송국이 어떻게 큰소리를 내겠는가.

‘개 같은 놈들.’

상관없는 놈들 파이 싸움에 한 손 거들었다가 예상치도 못한 역풍이나 처맞아버렸다.

‘됐어.’

2주 차에 소녀연맹이 출연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으니.

가로 엔터로 연락하려던 순간, 성진우는 과거가 떠올랐다. 성필이 소녀연맹의 의상 컨셉을 들고 왔을 때였다.

고개 숙인 성필을 향해 뭐라고 말했더라…….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아쉬운 건 가로 엔터 쪽이다. 작은 회사로선 방송국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성진우는 가로 엔터에게 연락했다.

스케줄을 조정해볼 테니 방송국으로 찾아오라고 말이다. 그리고 돌아온 답이.

‘책임자가 바빠서 따로 시간을 뺄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답을 듣고, 성진우는 멍해졌다.

멍해진 후엔 분노가 들불처럼 번졌다.

저 답을 해석하면 이것이다.

네가 와라.

‘미친 새끼들…….’

시운이 따라주니 자기네들이 KS 엔터라도 된 것 같나?

물론 상대가 KS 엔터면 버선발로 달려가서 발을 핥을 수 있다. 애초에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았겠지. 그런데, 가로 엔터에게 달려가 죄를 고하라고?

성진우는 심호흡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이런 경우를 몇 번 겪었다.

‘약자의 울분인가?’

항상 갑질만 당하던 약자들은, 본인이 갑질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포악하게 변하곤 한다.

상담원을 향해 쌍욕을 날리거나, 알바생에게 폭언을 퍼붓는 이들이 적절한 예시다.

평소에 무시를 당하며 응어리를 품고 있으니, 굳이 공격적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성이 마비된 바보 같은 짓거리다.

“지금이라도 출연하게 해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일 텐데…….”

믿는 바가 있단 건가?

소녀연맹의 성공?

‘성공하면 얼마나 하려고?’

그리고 그 성공이 얼마나 갈까?

‘엔터 사업 몇 년 하고 땡 칠 거냐?’

잘 나가는 소녀연맹만 믿고 이런 짓거리를 벌이다니. 진정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소녀연맹이 성공했다고 후속 그룹과 아티스트들도 전부 성공하리라고 믿는 건가.

긍정적인 확증 편향으로 머리가 꽃밭으로 물든 게 확실하다. 몇 년 뒤면 이때 했던 짓거리를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

“피디님, 소녀연맹 나온답니까?”

보조 디렉터(AD)가 와서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 바로 연출 회의해야 하는데요.”

“……나 보고 직접 오랜다.”

“예?”

AD의 얼굴에도 성진우와 같은 색의 당혹이 서렸다.

성진우는 또 심호흡하곤 테이블에 손을 얹었다. 손에 열이 많아서 그런지, 테이블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옛날에도 이런 새끼들 많았어. 그룹 하나 성공시켰다고 하늘에라도 선 줄 알던 놈들. 시간 지나면 하나같이 후회한다.”

그룹 하나가 빵 터져서 중견 기획사로 오른 이들은 많았다. 그러나 또 히트를 이어간 기획사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히트를 이어간 이들은 대형 기획사, 흔히 사람들이 일컫는 3대 기획사가 되었다.

나머지 중견 기획사들은 사라지거나 이름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이 업계는 시간이 지나며 더욱 극단적으로 성패가 나뉘었다. 이유는 명백하다.

‘성공을 이어갈 수 있는 인간들은 진짜 천재들밖에 없어.’

SMS 엔터의 강성욱.

KS 엔터의 정호환.

YJS 엔터의 이준호.

신에게 재능과 성공할 운명을 부여받은 기적의 프로듀서들.

‘평범한 인간이라도 한 번쯤은 어찌어찌 된다. 하지만 그 뒤론 그대로 내리막길이야.’

역사가 증명하는 법칙이다.

과거 소녀연맹같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룹이 없었겠는가? 있었다. 대형 기획사에서 만든 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들은 분명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형 기획사들과 비비는 이들이 하나도 없다.

한 번 성공하는 것과, 성공을 이어가는 건 명백히 다른 성질의 일이다.

“한 번 터졌다고 기고만장해져선……. 안 그러냐?”

“아…… 예. 그렇겠죠. 소녀연맹이 자체 커리어 하이 경신하고 있다지만, 곧 다른 그룹들도 따라잡겠죠 뭐.”

“그래. 소녀연맹이 특별한 게 아냐. 이 시대가 특별한 거지.”

그 오판의 대가를 가까운 시일 내에 치르게 되리라.

“가로 엔터 놈들, 지금쯤 찐따 같은 망상이나 처하면서 자위질하고 있겠지. 뭐, 우리 방송국 시상식에서 대상을 줄 성적을 달성했는데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던가. 내가 봤을 때 올해 소녀연맹쯤 기록 깨는 그룹이 두세 개는 더 나와. 상 하나나 제대로 받겠냐? 또 케이어스 들러리나 서겠지. 벌써 그렇게 보이더구만.”

소녀연맹의 판매량은.

“벌써 꺾였어.”

그러니 케이어스가 최고의 앨범상을 받을 거다.

그리고 케이어스는 걸그룹 밀리언셀러 시대를 연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공로로 최고의 아티스트상도 받겠지.

최고의 앨범을 만든 최고의 아티스트이니 최고의 노래상도 받을 것이다.

케이어스가 3대 대상을 전부 싹쓸이할 거다.

대여섯 개의 대중음악 시상식 모두에서 대상을 타고, 명실상부 전설로 등극할 게 확실하다.

소녀연맹의 희망은 오늘로 꺾였다.

“……그.”

AD가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피디님이 내키지 않으시면, 제가 갈까요?”

“……뭐?”

피디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쾅 내리쳤다. 사무실 전체의 이목이 그들에게로 모였다.

AD는 깜짝 놀라 굳어선 눈만 크게 떴다.

“너 시발, 야, 파하, 야, 내 말 듣고도 그딴 말이 나와? 가로 엔터가 와서 기라고 진짜 가서 길 거냐고!”

“아, 아뇨, 저는…….”

“넌 젊어서 감이 안 잡히지? 이 업계에서 지낸 세월이 짧아서? 가로 엔터 저거 다 한철이고 거품이라고! 거품이 크다고 겁먹고 질질 짜냐고 어떻게!”

“걱정돼서요!”

걱정.

그 단어에 성진우가 입을 다물었다.

AD가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이, 일단 불이 났잖아요. 이, 그, 나름 저희가 공중파인데 이미지를 쇄신하긴 해야 하니까……. 저희가 진짜 나쁜 놈이 됐잖아요…….”

소녀연맹을 2주 차에 데려오기만 하면 수습할 수 있긴 하다.

성진우가 짧게 웃었다.

“너 진짜 젊긴 하구나. 사람들 들끓는 거 하루이틀이야. 금방 잊어. 사람 죽는 것도 정치인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 않으면, 하루 만에 잊는 게 인간들 평균이야. 우리 이미지? 그래, 나쁘지. 근데 그것도 잠시라고. 우리가 숙일 이유가 못 돼.”

대국적으로 생각해.

성진우가 말했다.

“회사에 소속감도 키우고. 네가 가서 고개 숙이면, 우리 방송국 전체가 고개 숙인단 거야. 금방 꺼질 불 때문에 영원해야 할 우리의 체면을 깎는 건 수지가 안 맞지.”

“……그렇지만, 피디님.”

그런데, AD의 두려움은 아직 그대로였다.

“사람들 끓는 게 짧은 건 맞는데요. 그게, 그런데요.”

“아 끌지 말고 말해.”

“정말 소녀연맹이 저희 방송사 시상식에서 대상을 타면, 그럼 식었던 게 다시 끓지 않을까요…….”

성진우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금 소녀연맹의 기록을 떠올렸다.

[5일 차 판매량: 9,5**장]

“……그럴 일 없어.”

성진우는 한숨과 함께 AD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로이자 격려였다. 그런데 그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너 임마 위로 올라오면 어쩌려고? 여기저기서 조금만 으름장 놔도 다 달려가서 잘못 빌겠다. 어? 담 좀 키워.”

“……네.”

성진우는 되새겼다.

‘그럴 일 없어.’

소녀연맹이 대상을 탈 일도.

방송국과의 불화를 택한 가로 엔터의 후속 그룹들이 성공할 일도.

‘절대 없어.’

3대 기획사들은 천재들의 능력과 말도 안 되는 운, 그리고 기적이 겹쳐서 생겨난 것이었다.

가로 엔터는 그때보다 환경이 열악하다.

‘YJS 엔터가 눈에 불을 켜고 죽이려고 하니까.’

KS 엔터는 안 그럴까? SMS 엔터는?

다른 대형 유통사들은?

‘가로 엔터는 낭중지추야. 주머니에 튀어나온 바늘. 분명, 다른 기획사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지거나 그보다 더 참혹한 꼴을 당할 거다.’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커다란 다른 우산의 아래로 들어가는 것뿐이겠지.

‘그래, 그럴 거야.’

분명 그럴 거다.

역사는, 경험은, 세월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가로 엔터도 역사대로, 경험대로, 세월이 알려주는 대로 스러져갈 뿐이다.

“걱정하지 마.”

그리고 하루 뒤.

성진우는 어제의 자신이 했던 말조차 믿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무슨 뜻이냐면, 걱정하게 됐단 것이다.

* * *

가로 엔터 연습실.

리카, 신아름, 조아라가 바닥에 둘러앉아 화투를 들고 ‘섰다’를 쳤다.

“세륙이다!”

조아라가 환호하며 패를 공개했다.

꽤 강한 패다.

그녀는 판 위에 올라온 보드게임 지폐(리카의 보드게임 중 하나에서 빼옴)를 쓸어가려 했다.

그때 신아름이 조아라의 손목을 잡았다.

“야, 놔. 나 6땡이야.”

“6땡?!”

최상급 수준으로 강한 패다.

신아름이 패를 공개하자 조아라가 흐아아아아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신아름이 실실 웃으면서 돈(보드게임 지폐)을 쓸어가려던 순간.

“잠, 잠깐!”

리카가 신아름을 제지했다.

그에 조아라가 핀잔을 주었다.

“아니 진짜 지랄하지 마라. 한 판에 6땡이랑 6땡보다 높은 게 동시에 나오는 게 말이 돼? 확률적으로 말이 안 되거든? 리카 너 사기 쳤지?”

“사기얏!”

“사기겠지 그래.”

“아타시(나) 말고 아름이가!”

리카가 패를 공개했다.

그 패는 힘이 없는 망통이었다.

“여기 봐!”

리카가 패 중 하나를 가리켰다.

모란꽃을 배경으로 ‘청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 신아름이 낸 거랑 같은 카드잖아?”

똑같은 카드가 존재한다.

즉, 누군가 카드를 추가로 준비해온 것이다.

조아라와 리카가 신아름을 응시했다. 신아름은 가만히 바닥을 보더니.

“칫.”

바닥을 보고 있던 왼손바닥을 들었다. 그곳에 숨겨져 있던 다른 패가 나타났다.

“바꿔치기?!”

“아, 그게 하필 리카한테 들어가네. 확률이 뭐 이래.”

“이년 이거 사기를 치고도 태연한 거 봐라? 어이 게이샤!”

조아라는 일본어인 ‘게이샤’를 한국어의 ‘주모’ 비슷한 용도로 썼다.

그녀가 게이샤를 부르자 리카가 거수경례했다.

“하잇(넵)!”

“망치 가져와!”

리카가 연습실 구석으로 호다닥 달려가 뿅망치를 가져왔다. 조아라가 뿅망치를 들자 리카가 신아름을 뒤에서 구속했다.

신아름이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매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꼭 확인해서 피를 봐야겠어?”

“이미 확인이 됐는데 뭔 개소리야. 머리 대.”

뿅! 뿅! 뿅! 뿅! 뿅!

조아라가 신아름의 머리를 뿅망치로 난타했다.

응징이 끝나자 신아름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아, 재미없어. 역대급으로 재미없는 컴백이다. 하릴없이 이게 뭐냐.”

“‘시크릿 히틀러’ 할래?”

“야 리카, 그거 보니까 최소가 5~6인이던데? 너 그거 혼자 할 때도 있었잖아. 어떻게 한 거야?”

“육색 모자 기법으로 했어!”

신아름은 성필이 ‘육등분의 성필’이 됐을 때를 떠올렸다. 모자를 바꿔쓸 때마다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변했었다.

성필이 배우가 됐으면 어땠을까, 신아름 홀로 그런 망상을 했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그 육색 모자 기법을 리카가 사용했다니. 심지어 혼자 6인용 보드게임을 하려고…….

“각자 모자 두 개씩만 준비하면 할 수 있어!”

“진짜 불쌍하다.”

“히도이(너무해)…….”

“근데 신아름 넌 패 숨기는 거 어디서 배웠냐? 너 손 뒤집기 전까지 바꾼 줄도 몰랐어.”

“아, 그거? 팀장님.”

“아저씨?”

“팀장님 옛날에 마술 조금 배웠어. 뭐, 여자친구한테 보여줄 거라면서. 카드 섞는 거 옆에서 보다가 좀 배웠어.”

“아저씨한테 마술해달라고 해야지.”

조아라가 일어나자 리카도 일어났다.

신아름이 둘을 붙잡아 말렸다.

“야,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하시겠냐? 팀장님 귀찮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심심하다고.”

“맞아!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어!”

“하아, 그럼 내가 보여줄게.”

신아름이 리카의 귀로 손을 가져갔다.

“자.”

그러자 신아름의 손에서 카드가 나왔다.

리카가 대경실색했다.

“마법이다!”

“오, 이건 진짜 신기한데?”

“얘들아.”

그때 성필이 들어왔다.

조아라와 리카가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저씨 마술 보여줘요.”

“맞아요! 아름이한테만 보여주고 치사해요!”

“너희들 진짜…….”

신아름은 멤버들에게 질색하면서도, 성필이 마술을 해줄까 기대하며 다가갔다.

“그럴까?”

“어, 정말요?”

“얏타(해냈다)!”

“너희 음방 1위 시켜주는 마술 해볼게.”

멤버들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뭐, 내일 음방 있으니까 1위 한다고요?”

“아니, 지금 바로. 너희들 음방 1위 했어.”

세 명의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가 떴다.

신아름이 물었다.

“음방을 안 나갔는데 1위를 어떻게 해요?”

“어, 했어.”

음방에 안 나가고도 1위를 했다.

음원 점수와 음반 점수만으로.

방금.

“짜잔!”

성필이 아이튜브 영상을 보여주었다.

방금 업로드된 따끈따끈한 음악 방송 엔딩 영상이었다.

왼쪽에는 소녀연맹의 ‘송 포 피플’이 걸려 있었다. 멤버들이 출연하지 않았기에 앨범 커버 사진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오른쪽에는 소녀연맹과 같은 시기에 컴백한 아이돌 그룹이 있었다.

소녀연맹, 방송 점수 0점.

다른 그룹, 방송 점수 2,000점.

“이걸 어떻게 이겨요.”

음원이 아무리 높아도 방송 점수까지 합친 점수를 넘기 힘들고, 음반 점수는 아직 집계도 안 됐다.

저 그룹은 음반과 음원, 방송 점수가 있으니 소녀연맹이 1위를 할 리…….

[소녀연맹 ‘송 포 피플’ 축하드립니다!]

“했네?!”

음원 점수로 박살을 내버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음원이 차트 1위에 거의 고정되듯 걸려 있으니까.

멤버들은 홀린 듯 성필을 바라보았다.

성필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짜잔, 매직!”

“더 보여줘요! 우리 앨범 100만 장 파는 마술!”

“미안 아라야, 방금 마나를 다 썼어.”

“이딴 데 쓰지 말고 판매량에 쓰라고요!”

조아라가 까치발을 들곤 성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성필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조아라의 장난에 어울려주었다.

“아라야.”

“마나 돌아왔어요?”

“가깝다. 리카, 아름아!”

리카와 신아름이 조아라를 붙잡고 성필에게서 떨어뜨렸다.

[소녀연맹 6대 음악 방송 수상 기록.

현재 1위, 1회.]

[Girl’s League(소녀연맹) ‘Song for PEOPLE’ Official MV]

발매 120시간(닷새째).

[조회 수 91,000,0**]

9,100만 회.

[Song for PEOPLE

워터 멜론 일간 차트

1일 차: 13위

2일 차: 4위

3일 차: 1위

4일 차: 1위

5일 차: 1위]

[소녀연맹 ‘송 포 피플’ 초동 기록

1일 차 판매량: 532,8**장

2일 차 판매량: 199,1**장

3일 차 판매량: 100,8**장

4일 차 판매량: 57,0**장

5일 차 판매량: 9,5**장

누적 판매량: 900,1**장]

케이어스 ‘헬리오스’의 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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