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70화 (670/760)

670화

미국 뉴욕.

DJ 케빈의 작업 스튜디오.

그의 비즈니스 매니저인 올리비아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케비인……!”

올리비아가 넓은 스튜디오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케빈의 헤드폰을 벗겨냈다.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크게 당황하여 의자를 돌렸다. 올리비아인 걸 알자 그가 안도하곤 기지개를 켰다.

“으아아……! 왔어요?”

“‘왔어요’?! 소식 다 들었어요! 요즘도 옛날에 일하던 클럽에서 퍼포머로 일한다면서요!”

“에이, 취미로요.”

“너무 자주 대중에게 노출되면 케빈의 공연에 희소가치가 없어진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또, 새 앨범은 언제 내놓을 거예요!”

“냈잖아요.”

“믹스 앨범이잖아요!”

다른 곡들을 가져와 클럽 댄스 음악으로 만든, 이른바 리믹스 곡들을 모아둔 앨범이다.

“그게 왜요? 성적은 제대로 냈잖아요.”

빌보드 댄스·일렉트로닉 차트 5위까지 올랐다.

올리비아는 화병이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리믹스는 돈이 안 된다구요! 오리지널 앨범으로 반응 좋았잖아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별 지랄을 다 떠는 뮤지션들을 케어하다 보니 감정 조절하는 능력만 늘었다.

물론, 성과도 없이 지랄 떠는 뮤지션들 따윈 상대하지도 않는다. 직접 찾아오는 일은 더더욱 없다.

케빈은 성과가 있고, 이보다 더 성장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빌보드 차트에도 UK차트에도 들어놓고선, 새 앨범을 미뤄두고 클럽 퍼포머로 활동한다는 게 말이 돼요?! 한창 축제 시즌인데 공연 돌 생각도 안 하고 스튜디오에 박혀서!”

“‘롤라팔루자’엔 나가잖아요.”

“소녀연맹이 나와서 가는 거잖아요!”

“같이 갈래요?”

“으으으으으!”

올리비아가 한숨을 턱 내뱉었다.

“언제쯤 작업에 들어가요?”

“저번 오리지널 앨범의 성공은 운이었어요.”

“네?”

“하이퍼팝이 유행하기에 적당히 문법을 베껴서 넣은 곡들이라고요.”

“그게 케빈의 오리지널리티 아니었나요?”

“저는 오리지널리티가 없어요. 유행할 거 같은 건 죄다 섞는 게 제 오리지널리티예요. 그런 의미에서, 믹스 앨범이 제 체질에 맞겠죠. 알아요? 제 앨범에 들어간 곡을 주요 트랙으로 넣는 DJ들이 얼마나 많…….”

“안 궁금해요!”

“클럽보다 라이브 하우스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면 재즈 클럽? 그것도 아니면 오케스트라 콘서트홀? 고풍스럽기도 하지.”

올리비아는 케빈을 죽여버리고 싶어졌다.

자신이랑 한 번 만나려고 줄 선 뮤지션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쩌다가 이런 애송이에게 매달리고 있지?

‘왜 매달리긴.’

싹수가 보이니까.

“컬래버레이션 하고 싶네요.”

올리비아의 귀가 트였다. 그녀가 은근히 케빈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누구요? 내가 잡아줄까요? 톱급만 아니면 제가 어떻게든 다리를 놔줄 수 있어요.”

“소녀연맹이랑요.”

“미친 새끼…….”

WTP라고 말했으면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얼마 전에 빌보드 200 차트 top10을 기록했던 ‘카오스’인가 하는 애들이었으면, 그래, 이해해볼 수도 있었으리라.

‘AMC, 그리고 스피너 뮤직이랑 계약했다지.’

빌보드 메인 차트인 톱100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월드 세일즈 송 차트에선 강세이긴 하니까.

댄스 음악은 모든 음악 장르 중 가장 쉽게 국경을 초월한다. 이해하기 위한 아주 사소한 기초지식도 필요 없다. 듣는 순간 가슴이 뛰는 음악이다.

원한다면 카오스든 뭐든 컬래버레이션 해줄 수 있다. 그런데, 동양인 페티시인 케빈 취향의 소녀연맹인가 하는 그룹은 정말…….

“이 사람들 미국에서 인지도가 없잖아요. 거의, 없잖아요.”

“소녀연맹은 빌보드 200 차트에…….”

“알아요 알아요! 옛날이잖아요 그것도! 좀 핫한 애들이랑 엮여야 하지 않겠어요?”

“음…….”

케빈은 한국 도서·문구·음반 판매 사이트에 접속해서 소녀연맹 앨범을 10장 구매했다.

“50불 이상 구매하면 미국에선 배송비가 무료거든요. 합리적이죠?”

“이거 전략이죠? 일부러 저를 무시해서 관심을 끌려는 시답잖은 로맨틱 작전이죠?”

“참고로 이걸로 30장 누적 구매예요.”

“미친 거예요?! 같은 음반을 30장이나 산다고요?!”

“같은 음반이 아니에요. 사는 곳에 따라 특전이 다르고, 음반의 종류가 3종이고, 특전도 랜덤인 데다가 구성품도 랜덤 요소가 있어요.”

“도박이잖아?! 그, 그걸 모으려고 대체 얼마를 쓴 거예요!”

“모으려고…… 산 게 맞긴 한데…….”

“안 아까워요?”

“내가 얼마 벌었는지 잊었어요? 제 수익을 아주 많이 떼가는 올리비아라면 알 텐데요. 저한텐 보통 사람이 밥 한 끼 먹는 수준이에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허세 한 번 부려봤어요. 그치만 올리비아가 말했잖아요. 핫한 애들이랑 엮여야 한다고.”

“……케빈이 앨범을 많이 사서 얘들을 뭐 빌보드 200에 앉히기라도 하려고요? 몇 장을 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빌보드 200 1위가 되려면, 미국 전역에서 수십만 장을 팔아야 해요.”

“20만 장이면 될까요? 그건 좀 빡센데. 올리비아도 하나 사죠?”

진짜, 목구멍이 턱턱 막힌다.

“그건 생각해봤어요? 소녀연맹 매니지먼트.”

“난 내가 눈으로 직접 본 뮤지션만 맡아요. 아니.”

올리비아가 희미한 조소를 머금었다.

“아티스트를 맡죠. 저런 ‘인형’을 맡고 싶었다면, 레이블로 들어가서 프로듀서가 됐겠죠.”

“그 말 취소해애애애애애!”

케빈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를 표출했다. 올리비아는 그 격렬한 분노를 정면에서 맞자, 너무나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미안해요!’를 외쳤다.

“소녀연맹은 ‘산업 아기(인더스트리 베이비)’가 아니에요!”

“네, 네!”

“그리고 직접 본 뮤지션만 맡는다면 함께 롤라팔루자로 가요!”

“네! 네?”

“와, 혼자 가기 쓸쓸했는데 잘됐어요.”

케빈은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올리비아는 또 허 한숨을 쉬었다.

‘이거 로맨틱 전략 맞다니까?’

* * *

30살 회사원 유용태.

팀에 24살 신입이 들어왔다.

‘진짜 애기다.’

유용태의 팀은 남자뿐이었다.

안 그래도 어린 사람은 대하기 어려운데 여자이기까지 하니, 점심 식사 자리에 와서도 다들 평소보다 텐션이 떨어졌다.

차장 아래로 어제의 축구나 야구 결과를 이야기하다가도,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는 신입을 보면 입을 꾹 다물곤 했다.

“어…….”

과장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유용태를 쳐다보았다.

“어, 용태 아이돌 좋아하지? 하림 씨는 아이돌 좋아해요?”

유용태가 마시던 물을 뿜을 뻔했다.

아무리 할 이야기가 없다지만 유용태 자신의 취미까지 언급할 줄은 몰랐다.

신입 하림이 그제야 목소리를 냈다.

“네, 저 PTR―17 좋아해요.”

선배들의 시선이 전부 유용태에게로 모였다.

자신들은 PTR―17이 뭔지 모르겠다만, 너는 알 듯하니 뭐라도 말해보란 것처럼 보였다.

“유 대리님은요?”

“저는 소녀연맹이요.”

“아, 저 소녀연맹도 좋아해요.”

“역시 대화가 통하네.”

고작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인데 차장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반면 유용태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30살 먹고, 주변에서 인정하는 ‘아이돌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 혼란스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 저는 근데 아이돌을 막 깊게 파진 않고요. 한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선상에서…… 그런 게 재밌더라고요. 무대를 작품 같은 느낌으로 소비해요.”

“야 뻥 치지 마.”

과장이 끼어들었다.

그는 유용태를 팔아 웃길 셈인지, 벌써부터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얘 저한테 소녀연맹 앨범 강매했어요.”

“강매요?”

“막 앨범 나왔다고 막 들어보라고, 사라고, 얼마나 성화였는지 아세요?”

“그거 3년도 더 전이잖아요…….”

“하여튼 그랬잖아. 맞아 아니야?”

“맞죠…….”

하림이 유용태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인민이세요?”

인민이냐는 말에 또 사람들이 의문을 표했다.

하림이 설명했다.

“소녀연맹 팬덤 이름이 ‘인민’이거든요.”

“허, 왜?”

“소녀연맹을 줄이면 소련이잖아요.”

그 한마디에 유용태를 제외한 전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팬덤 이름이 인민인 게 어지간히 웃긴 듯했다.

“인민! 말 되네! 소련의 팬이니까 인민! 그거 법적으로 괜찮은 거야?”

“원랜 이름이 ‘피플’이거든요. 근데 팬들이 바꿔서 부르는데…….”

그렇게 유용태를 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유용태는 물만 홀짝였다.

자신의 존엄을 희생하여 분위기가 풀어졌으니, 영 수지가 안 맞는 장사는 아니었다.

“대리님 좋으시겠어요. 곧 소녀연맹 컴백하잖아요. 막 앨범 10개씩 주문하시고 그러세요?”

하림의 머릿속에 그려진 유용태는 아이돌을 굉장히 좋아하는 아저씨인 모양이다.

그런데 유용태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벌써요? 언제 컴백하는데요?”

“네? 3일인가 이틀 뒤…….”

“야, 넌 인민이라면서 그것도 몰라?”

과장이 유용태를 인민이라고 부르자 또 웃음이 터졌다. 반면 유용태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놀림거리가 돼서는 아니었다.

‘왜 내가 몰랐지?’

식사를 마치고, 유용태는 오랜만에 소녀연맹 관련 소식을 수집했다.

근래 워낙 삶에 치이다 보니 강제로 휴덕기를 가져야만 했다. 언젠가 소녀연맹이 컴백하여 덕질혼을 불사를 줄 알았는데, 곧 컴백한다는 소식조차 모를 줄이야.

사무실 자리에 앉아 폰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맞네. 채현이가 톡방에 공방 갈 거냐고 물어봤잖아.’

꽤 오래전이라고 생각했건만, 며칠 전이었다.

‘안 고독한 소련방’은 다들 현실에 치이느라 글 리젠 속도가 급격히 느려졌다.

김사무엘과 백수현은 연습생이다.

이선주는 카페 사장이다.

김채현은 아무것도 모르고 시골로 팔려 가 강제노동하고 있다던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얘 대학생 아니었나?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건가.

몸빼 바지를 입은 김채현의 사진이 최근에 올라왔었다. 김마리아가 ‘언니 예뻐요’라고 답장한 게 보였다.

‘이상한데.’

유용태는 현생에 치이면서도 소녀연맹의 컴백 타이밍만큼은 파악해왔다.

그 파악의 도구는 음반 판매 플랫폼에서 보내주는 홍보 문자였다. 소녀연맹은 매 컴백마다 그러한 프로모션 문자를 보내었었다.

유용태는 그 문자를 받으면 ‘컴백하네. 앨범 사야지’라며 통장 잔고를 확인한다.

‘왜 이번에 안 왔지?’

유용태는 음반 판매 플랫폼에 접속했다.

‘곧 컴백일 텐데, 프로모션 배너나 팝업이 하나도 안 뜨잖아.’

뭐지.

검색하면 음반 예약 주문이 떡하니 뜨는데, 홍보는 안 된다.

유용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앨범 3종을 구매했다.

이 플랫폼을 애용하는 건, 다른 플랫폼과 달리 특전으로 포스터를 자주 넣어주기 때문이다. 이 사이트에 애정도 생겼는데, 홍보가 아예 없다니.

‘가로 엔터가 돈을 덜 쓴 건가?’

유용태는 앨범 사양을 보다가, 다시 ‘안 고독한 소련방’으로 들어갔다.

김채현이 올린 공방 참여자 모집글을 보곤, 또 이상함을 눈치챘다.

‘어?’

소녀연맹은 지금까지 목요일과 금요일에 컴백해왔다. 그 시기에 컴백하면 공중파 3사 음방을 차례로 나간 후, 다음 주에 케이블 음방 3개를 돈다.

그런데 이번엔 컴백하는 요일이 금요일이었다.

금요일의 공중파 음방.

이러면 이후로 공중파 음방을 쭉 나가는 게 아니라, 중간에 케이블이 섞인다.

‘공중파 음방을 먼저 차례로 나가는 건, 공중파 음방이 세계 백수십 개국에 동시 방영되기 때문이잖아.’

당연히 해외 팬이 아이돌의 무대를 찾아볼 땐 공중파 음방을 가장 먼저 본다.

또한 가장 주요하게 무대 퍼포먼스를 즐기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튜브를 보면 케이블과 공중파 영상의 조회 수 차이가 꽤 크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김채현은 금요일 공방 신청자를 모집했는데, 지원자가 없자 우는 단무지 이모티콘을 올리곤 며칠간 잠적했다.

‘왜…… 지?’

이러면 초동 집계에서 불리할 텐데.

특히 해외 지표를 주요 마케팅 수단으로 쓰는 소녀연맹에겐, 이건 악수(惡手)에 가깝다.

각 나라의 주간 앨범 차트들은 뮤지션 각자의 초동을 집계하여 순위를 매기는 게 아니다.

정해진 요일부터 다음 주까지의 기간에 집계된 판매량을 초동으로 잡는다. 대표적으로 빌보드 차트도 그러하다.

‘저번에 오토마타가 14위였잖아. 이번엔 더 높은 곳을 노릴 법해. 정말 TOP 10에 진입할 수도 있을 거야, 케이어스처럼.’

그런데 어째서 음방을 이렇게…….

유용태는 트잇터에 접속해 소녀연맹의 스케줄러를 확인했다. 스케줄러를 본 유용태의 심장이 철렁였다.

‘공중파는 하나에 케이블 음방은 두 개만 나가……?’

음방을 세 개만 나간다고?

“이 뭔…….”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유용태는 육성으로 욕설을 지껄일 뻔했다.

진짜 이대로 컴백하는 건가?

이렇게나 중구난방에다가 미흡하기 그지없는 매니지먼트라니. 이대로면…….

‘소련이들 성적이 역대 최저일 수도 있겠어.’

안 그래도 ‘오토마타’의 국내 음원 성적으로 퇴물이란 소리(KS 엔터 팬덤에게 주로 들음)를 듣고 있는데.

이따위 매니지먼트로는 컴백해봤자 그 오명을 씻을 수 없을 것이다.

유용태는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 소녀연맹 아이튜브 공식 채널에 접속했다.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착실하게 올라온 컨셉 포토나 컴백 트레일러가 반겨줄 뿐이었다.

가장 최신 영상은 이것이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 EP10(End)]

뭔가 단서가 있기를 바라며, 유용태는 그걸 클릭했.

“자, 이제 다들 일 시작해볼까?”

차장이 말하자 다들 자리에 잡고 업무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끝났다.

유용태는 폰을 내려두었다.

* * *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 EP10.

마지막 에피소드는 인터뷰 형식이었다. 첫 번째인 백설하와 두 번째인 조아라도 그러했었다.

수개월 간의 소회(所懷)를 밝히는 자리였다.

백설하와 조아라는 감정이 격했었다.

허나 검은 정장 차림의 장하양은 담담한 모습이었다.

슬래이트가 탁 내려오고, 장하양이 입을 열었다.

[인생이 행복해지는 데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몸이에요. 몸이 건강해야 해요.]

장하양이 재킷을 슬쩍 들어 복근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만큼 건강할 필요는 없구요. 왜 이렇게 생각하냐면, 옛날의 저는 몸이 되게 약했어요. 가로 엔터에 들어오고 나서 이사님이 말씀하시는 게, 운동을 시킬 거래요. 그래서 저는.]

운동?

춤추는 거 자체가 운동이 될 텐데, 굳이 따로 할 필요가 있나?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어우, 아니었죠. 처음으로 퍼포먼스를 해보는데 미치겠는 거예요. 다른 멤버들은 쉽게 지치지도 않는데, 저는 1절 가기도 전에 탈진하기 직전이고. 운동, 해야 하는구나. 그때 뼈저리게 느껴서 열심히 했어요.]

[건강해지니까 또 깨달은 게 있어요. 정신이 선명해지는 거예요. 왜 그런지도 감이 왔어요. 옛날의 저는 되게…… 우울했어요. 지금 떠올리면 몸이 안 좋아서였던 것 같아요.]

[걸어가야 하는데 금방 지치고. 연기 연습해야 하는데 금방 지치고. 뭘 하든 쳐지고 힘들었어요. 당연히 해야 하는 걸 못 하니까 우울했던 거였어요. 근데 건강해지니까,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몸이 첫 번째.]

장하양이 검지와 중지를 폈다.

[두 번째는 정신이에요. 자세하게는, 나 자신과의 관계예요. 특히 과거의 자신과의 관계요.]

[저를 예시로 들어볼게요. 저는…… 현재가 가장 빛나요. 다르게 말하면, 과거의 저는 지금보다 빛바랜 거구요. 당연히 저는 사람들이 지금의 저를 봐주었으면 해요.]

아름답기 그지없는 현재의 자신만을 보아주길 바란다.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성공과 인망, 명성을 손에 쥐고 찬란하게 빛나는 자신만을 보길 원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잖아요. 자꾸 떠올라요. 옛날에 제가 무대나 예능에 섰던 걸로 욕먹었을 때가요. 지금도 기억나는 건 ‘꽃병풍’이란 말이에요. 얼굴만 예쁘지 쓸 데도 없어서 세워두기만 하는 병풍이요.]

그 비난은 장하양을 상처입히는 주요한 레퍼토리였다.

[노래도 못해, 춤도 못 춰, 예능감도 없어, 얘는 진짜 얼굴 하나만으로 아이돌 됐다. 나대지 말고 그냥 구석에 짜져 있어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과거의 저를 보면 부끄럽고 창피하거든요. 그러니까 안 보고 싶어요. 근데.]

그럴수록 고통은 진해져만 간다.

상처를 억지로 벌리고 후벼판다.

[근데, 과거의 저도 저잖아요. 결코 없앨 수 없는 저의 흔적이고, 제가 살아왔던 시간이잖아요. 과거의 제가 현재의 저를 보면 뭐라고 할까요?]

아, 내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아니에요. 과거의 저를 불러내서 얘기를 하다 보면, 아마 저를 원망할 거예요.]

나도 너야.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해?

내가 부끄러운 거야?

이러려고 노력한 게 아닌데.

나를 인정해줘.

[과거의 저는 인정욕이 강해요. 적어도 과거의 저는, 미래의 제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거라곤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하지 못한다고, 지금 와선 부끄러워서 흑역사 취급하고 있죠.]

장하양이 양손을 모으고 꾹꾹 매만졌다.

[어떻게 마음이 편하겠어요? 과거의 저와 마주 보지 않으면, 저는 영원히 평온할 수 없어요. 행복할 수 없어요. 꿈에서 과거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삶을 영원토록 살게 될 거예요.]

[마주 봐야 해요. 물론 힘든 일이죠. 그럼에도, 해야 해요. 그리고 했어요.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의 주제가,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멤버들한테 가사를 써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신기한 게 뭔 줄 아세요? 다들 본인의 과거를 꺼내어서 투영해요. 자신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꺼내서 세상에 보여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때 또 알았죠.]

아, 멤버들은 이미 과거의 자신과 화해를 끝냈구나. 그걸 넘어서, 과거의 자신도 온전히 품에 끌어안은 사람들이구나.

[멤버들은 똑똑해요. 팬분들은, 설령 과거의 저희들이 미숙하고 부족했을지라도, 과거의 저희들을 결코 부정하지 않아요. 과거의 저희는, 그때에만 품을 수 있는 빛을 품고 있었으니까요. 저를 제외한 멤버들은 진작 그걸 알고 있던 거예요. 네, 똑똑하니까요. 팬분들은 정말 고마우신 분들이죠. 저희도 몰랐던 저희의 장점을 찾아서 봐주시니까요.]

[저도 해야만 했어요. 과거의 저를 차례대로, 고통스럽지만 끝까지 지켜봐야 했어요. 그리고 그 작업을 마쳤을 때, 마침내 인정할 수 있게 됐어요.]

과거의 나도 나다. 미숙하고 부족했을지언정, 절대 무시 받아야 할 무언가는 아니다.

[박 이사님이 아름이한테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현재의 네가 미래의 이상적인 너에게로 달려가는 것처럼, 미래의 너도 현재의 너에게로 달려오고 있다. 언젠가 만날 것이다.]

[이 이야기였던 거 같아요.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품고,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없애는 순간이요. 그제야 저는 저를 괴롭혔던 흑역사에서 벗어났어요. 이젠 자랑스러운 역사가 됐으니까요.]

[여러분들도 그러신 적 있을 거예요. 과거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고 창피해서, 이불을 걷어차거나 소리를 지르신 적이요. 무시하기보다,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때의 넌 최선을 다했던 거라고, 보듬어주세요.]

[너무 제 이야기만 했을까요? 그런데 걱정 마세요. ‘송 포 피플’ 뮤직비디오가 저희들의 과거를 파노라마처럼 보여드리는 구성이라. 뮤비를 보시고 또 이 인터뷰를 보시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세 번째.

장하양이 세 손가락을 폈다.

[타인과의 관계예요. 관계는 호혜적인 거죠. 물론 받지 않아도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도 있고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흔히 팬의 사랑이 외사랑이라고 하잖아요? 팬은 주기만 할 뿐, 받지 못한다. 우스갯소리로 아이돌은 네가 존재하는 것도 모른다, 그러곤 해요. 아이돌은 비즈니스로 팬들을 위하는 척할 뿐, 실은 ATM으로 생각한다.]

[아닌데.]

[진짜 그럴까요? 여러분이면, 막 여러분을 따라다니는 팬클럽이 있는데 ‘에이 저 돈통들’ 이러면서 무시하겠어요?]

[보통 사람은 그만큼 거대한 사랑을 받아볼 기회는 좀처럼 없으니, 제멋대로 단정하는 거예요. 대중문화가 생겨난 지 100년밖에 안 됐기도 했고요. 고작 100년 사이에 새로 생겨난 사랑의 형태예요. 초월자에 대한 사랑으로 독신을 유지하는 수도사 체계가 자리 잡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어요. 자유연애가 인정받는 데도 수백 년이 걸렸으니까, 이런 사랑의 형태가 아무렇지 않은 걸로 받아들이기까지 그만한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르죠.]

[인민이들을 사랑해요.]

[사랑했다는 한마디로 ‘호혜적’이라고 표현할 생각은 없어요. 뮤지션이 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음악이에요.]

[계속해서 저희를 사랑할 마음이 들게, 저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요. 앨범 ‘송 포 피플’은 그 결정(結晶)이에요. 들어주세요.]

장하양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떠나려는 채비를 했다. 그러곤 카메라를 흘끗 바라보았다.

[너무 담백하게 끝냈나요? 그럼, 제가 여러분께 사랑을 표현하는 걸 보고 싶으시면 옛날 영상을 찾아보세요.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 시작하기 직전에 제가 뷔라이브로 했던 방송이요.]

장하양이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인민이들이 질릴 정도로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마지막 에피소드는 담백하게 이쯤에서 마무리할게요.]

[말만으론 부족하잖아요.]

[보여드릴 때예요.]

[여러분이 저에게 주신 자그마한 사랑들이 모이면.]

[얼마나 크게 변할 수 있는지.]

소녀연맹 컴백 D―1.

* * *

“시작했다.”

성필의 한마디에 사무실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다 함께 스크린에 뜬 소녀연맹의 컴백 스테이지를 기다렸다. 어두운 조명이 밝아오며 멤버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늘부터, 시작…….”

국내 프로모션이 거의 다 막히다시피 하여, 팔다리가 잘린 상태로 전장에 섰다.

그래, 시작됐다.

소녀연맹 역사상 가장 불리한 싸움의 막이 올랐다.

소녀연맹, 컴백.

* * *

김채현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이튜브에 접속하여 소녀연맹을 검색했다.

[Girl’s League(소녀연맹) ‘Song for PEOPLE’ Official MV]

딸깍.

클릭하자 뮤직비디오가 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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