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화
에리카는 멍하니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손으로 턱을 받친 자세로 대체 몇십 분이나 있었을까.
모니터 안엔 케이어스의 타이틀곡 ‘파에톤(The sun)’의 뮤직비디오가 계속 재생됐다.
바닷가 근처에 자란 포플러 나무 숲. 나뭇잎을 뚫고 비처럼 직선으로 들어오는 태양 빛.
맨발로 선 에리카가 앵글에 잡힌다.
[신기한 거 새로운 거
아마 내가 좋아하는 거]
뮤직비디오는 산만했다.
에리카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가 어느새 저 멀리서 숲을 찍고, 때론 장면이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바뀌었다.
수영장.
카메라는 진저의 상반신을 담는다. 그녀는 걷지도 않는데 한쪽으로 천천히 밀려난다.
컨베이어에 탄 것처럼 밀려가던 진저가 수영장에 첨벙 떨어지고 불꽃이 솟아오른다.
[두려움은 Down Down
해보지 않은 일 좋아해?]
김민주가 불꽃에서 전선을 건져낸다.
그걸 이리저리 접합해보던 순간 스파크가 튀었다. 스파크가 하늘로 날아 불꽃놀이가 되어 펑 터졌다.
내려오는 건 불이 아니라 물이다.
[조심하지 말고 한 번에 후
날아가는 바람 다가오는 불꽃]
그늘 속 진소유의 얼굴이 보인다.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름에 뿌린 물감처럼 어지러운 색으로 그녀의 얼굴이 번져간다.
케이어스의 댄스 퍼포먼스는 격정적으로 변해갈 때, 아쉽게도 곧바로 이해 불가능한 장면으로 뒤바뀐다.
너무나 빠르고 혼란스럽고 난잡해서 계속 보게 된다. 눈을 뗄 수 없다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해 있는 거겠지.
게다가 귀를 긁는 이 날카로운 금속성.
금속 나팔관 안을 아주 작은 바람의 알갱이들이 지나가며 내는 것 같은 소리.
이 불쾌한 사운드가 메인 멜로디를 이룬다.
레게를 기반으로 했단 건 알겠지만, 도저히 음악의 국적을 파악할 수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KS 엔터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초국적(超國的)인 미학이 있다.
“멋지지?”
에리카가 정신을 차렸다.
이곳은 정호환의 작업실이다. 말을 거는 이는 정호환이어야 했겠지만, 여자의 목소리였다.
“윤 이사님.”
윤희연 이사다.
그녀는 에리카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높이에서 모니터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정수(精髓)야.”
“KS 엔터의 정수요?”
“응.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 10년이 넘었는데, 드디어 이런 걸 만들어보네.”
총괄 비주얼 디렉터.
그게 윤희연 이사의 직함이다.
정호환이 KS 엔터의 귀와 입이라면, 그녀는 KS 엔터의 눈이다.
“10년이야 10년. 내가 보는 풍경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까지의 10년. 온전히 비주얼 파트 디렉팅 권한을 얻기까지 10년…….”
평사원이었던 20대의 윤희연.
이제 그녀의 눈은 KS 엔터가 입을 색을 결정한다. 그녀의 눈이 KS 엔터가 바라보는 예술의 모습이다.
“멋지지?”
“네. 시네마스코프로 만드신 게 좋아요. 비주얼 필름 같아서요.”
“또?”
“음…… 하강의 이미지요.”
물에 빠졌는데 불이 솟아오른다거나.
하늘로 튀어 올라간 스파크가 불꽃놀이가 되어 추락한다던가.
진소유의 얼굴이 유화처럼 번져 바다로 흘러내리거나.
에리카가 점점 해변으로 다가가는 거나.
전부 하강을 나타낸다.
“파에톤을 표현하신 거죠?”
타이틀곡의 제목인 ‘파에톤’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태양 마차를 몰다가, 그만 죽어버린다.
“그런데도 죽음의 의미는 아니구요.”
“거기까진 말해준 적 없는 거 같은데.”
뮤직비디오 속의 멤버들은 하강한다.
그러나 빛을 향한 하강이다.
치명적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어떠한 힘을 표현하려고 한 듯이 느껴진다.
“영상을 읽는 능력이 좋네.”
“제 세대는 글자 대신 영상을 보면서 자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맞아 맞아. 일본에도 바보상자란 표현이 있던가?”
윤희연은 에리카의 어깨에서 턱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집어서 검지로 음미하듯 쓸었다.
“겨우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올랐네.”
에리카는 그 말에서 자부심과 동시에 불쾌함을 느꼈다.
그건 국가대표 선수들이 느끼는 마음과 비슷했다. 자신이 국가를 위한 존재인 것만 같은. 즉 국위선양의 도구가 된 것처럼 느껴질 때의 마음.
에리카는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언제까지 최고일까요.”
“에리카. ‘인티머시’가 60만 장을 팔았었잖아. 바로 아래 판매량과 거의 2배 차이였어. 그 60만 장의 기록을 너희가 깰 때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지 아니?”
“2년이요.”
“그래, 적어도 2년 정도는 너희의 적수가 없을 거야. 너흰 6년 차 아이돌이 됐을 때, 그제야 후배들이 조금씩 쫓아오겠지. 그때까지 너희는 정점의 상징으로 영원히 군림할 거야. 대상받을 때 할 말은 정해뒀니?”
“아직이요.”
윤희연이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에리카, 너 되게 확신이 강한 타입이잖아. 시작하기 전부터 ‘이겼다’라고 생각하지 않아?”
“보통은요. 어릴 때만큼 오만하진 않아요.”
“겸손을 배웠어?”
“아마도요.”
“소녀연맹을 생각해?”
그리 묻자 에리카는 미소로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윤희연의 얼굴이 굳었다.
“만에 하나라도 소녀연맹에게 판매량이 추월당한단 생각은 하지 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KS 엔터를 모욕하는 거야.”
“그럴 생각은…….”
“수백 명의 인재와 막대한 자본, 역사를 장식한 선배들과 30년의 세월이 너희의 뒤에 있어. 그런데 너희가 소녀연맹에게 지면, 이렇게 말하는 거랑 같지 않겠니?”
KS 엔터는 병신이다.
“남 이사님이랑 정 이사님은 귀엽게 봐주시는 거 같지만, 난 라이벌이란 표현이 마음에 안 들어.”
에리카는 윤희연의 눈에서 억울함과 분노를 읽었다. 연습생 시절, 그녀의 분노는 현재보다 더욱 짙었었다.
선배 보이그룹인 부테스의 5년 차.
그들은 WTP에게 추월당했었다. 그 뒤로 영원히 따라잡지 못했다.
WTP의 발목이나마 붙잡았던 건, 부테스의 후배 보이그룹인 ‘PTR―17’이었다. 세대를 건너서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때의 트라우마는 아직도 윤희연을 비롯한 이사들에게, 아니. KS 엔터 전체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KS 엔터가 판매량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건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이겠지.’
“죄송합니다.”
에리카가 담백하게 사과했다.
윤희연이 곧바로 표정을 풀었다.
“정호환 이사님이 늦으시네.”
정호환은 다큐멘터리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OTT 플랫폼인 N플릭스 독점 다큐멘터리인데, 케이팝이 주제라고 한다.
정확히는 케이팝의 새로운 시대가 주제였다. 그걸 위해 매우 특별한 시도를 했는데, 바로 케이팝 프로듀서들을 취재하는 것이다.
“아무튼, 자랑스럽게 여겨줘. 특히 뮤직비디오를!”
윤희연이 평소처럼 쾌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일주일도 안 돼서 뷰가 6,000만이 넘었어! 이건 엄청 엄청 엄청 굉장히 대단한 거야!”
“네, 알고 있어요.”
그때 작업실 문이 열리고 정호환이 들어왔다. 그는 윤희연을 보곤 멈칫했다.
“아, 정 이사님 오셨다. 인터뷰 어떠셨어요?”
“오랜만에 영어를 쓰려니 혀가 굳더군요. 윤 이사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인터뷰 듣고 싶어서요. 이야, 저도 그런 거 있으면 꼭 하고 싶었어요. 총괄 프로듀서가 아닌 게 한이네요.”
에리카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 이전에도 저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수석 프로듀서 윤상열.
소문이지만, 정호환에게 당장 자리를 버리고 내려오라고 했다던가.
“허허,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보다야 윤 이사님이 훨씬 말씀이 유려하셨을 텐데요.”
정호환이 부드럽게 받아쳤다.
“인터뷰 얘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조금 뒤로 미뤄도 되겠습니까? 에리카에게 작곡 수업을 해주어야 해서요.”
“아직도 하세요? 벌써 4년째예요.”
“가르쳐도 가르쳐도 끝나지가 않는군요.”
윤희연이 꿍한 얼굴로 작업실을 떠났다.
“괜찮으세요?”
에리카가 물었다. ‘저런 말씀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으세요?’란 뜻이었다.
정호환은 무표정으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실제로 윤 이사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아도 KS 엔터는 잘나갈 거란다. 나보다 젊기도 하니, KS 엔터를 잘 이끌어주겠지.”
“아…….”
“하지만 나와는 방향성이 달라. 윤 이사는…… 마침 윤 피디와 성도 같구만. 허허.”
꽤 기막힌 우연이다.
“윤 이사는 케이팝의 현 세태에 크게 개탄하고 있어.”
“개탄이요?”
“케이팝엔 가타부타 말이 많이 붙었지. 겉치레와 치장도 늘었고. 윤 이사는 그걸 전부 치워버리고, 1세대 인더스트리로의 회귀를 희망해.”
완벽한 분업.
아이돌은 아무런 수식어 없이 프로페셔널한 퍼포머일 뿐이다.
“아니, 회귀 이상인가.”
윤희연은 프로듀서가 예술가로서 전면에 드러나기를 희망한다.
전문적인 퍼포머인 아이돌이 강조되는 것처럼, 모든 파트가 저마다의 전문가로 대우받는 세상.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이돌은 숭배받는 우상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으리라.
KS 엔터 시절의 윤상열도 그러했었다.
지금도 그러겠지.
윤상열이 윤희연에게 영향을 준 걸까, 아니면 둘 다 우연히 마음이 맞았던 걸까.
‘윤 피디는 나갔었지.’
아니, 정호환이 쫓아낸 거나 다름없다.
하지만 윤희연에겐 그럴 수 없다.
정호환은 윤상열 같은 귀는 있었지만, 윤희연 같은 눈은 없었기에.
윤희연의 눈은 독보적이다.
“나도…….”
정호환이 늙음으로 인해 흐려진 눈가를 짚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옛날엔 그랬지. 너희를 막 데뷔시켰을 때만 해도 그랬고. 윤 이사가 너희의 솔로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일 거야.”
“저희가 아티스트로서 전면에 나서는 걸 바라지 않으셔서요?”
“윤 이사는 윤상열 피디와 죽이 잘 맞곤 했으니.”
“만약 정 이사님이 은퇴하시면, 윤 이사님이 총괄직을 맡으시는 걸까요?”
정호환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모르겠단다. 하지만 윤 이사가 그렇게 말하곤 해.”
“어떤…….”
“소녀연맹에게 한 번이라도 진다면 그 자리를 내놓으라고.”
에리카의 표정이 전에 없던 수준으로 심각해졌다. 조각처럼 굳은 얼굴엔 윤희연에 대한 적개심이 도사렸다.
“맞는 말이지. 30년이야. KS 엔터를 일구기까지 30년.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인프라를 가지고 영업익 30억은 넘을까 의심되는 기획사에게 지면, 그게 무슨 추태겠니.”
“안 돼요.”
“응?”
“정호환 이사님이 저희의 프로듀서셨기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에리카는 과거를 기억한다. 그녀가 철없이 믹스테입을 하겠다고 회사를 뛰쳐나갔을 때, KS 엔터에선 대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호환의 총괄 프로듀서 직 해임이다. A&R팀이 단체로 항의하여 무마되었다고 하던가.
말이 안 된다.
넥타르는 60만 장을 팔며 전 세대의 정점이던 ‘인티머시’의 코앞까지 쫓아갔었다.
그런데, 케이어스의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며 내쫓으려 하다니.
주요 근거는 ‘넥타르’의 음악적 성과와, 이후 계획되어 있던 프로듀싱 기획들이었다.
주동자는 구유한 이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든 근거는 예술을 모르고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윤희연이 관련되진 않았을까, 에리카는 그리 생각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정호환은 감동한 기색이었다.
“고맙구나.”
“당연한 말이에요. 당연한 거에 감사받을 필요는 없어요.”
정호환은 미소를 보였다.
사실, 윤희연이 소녀연맹에게 따라잡히면 총괄직을 내놓으라고 하진 않았다.
그것보다 더 심했다.
케이어스를 데리고 소녀연맹에게 판매량의 70% 아니. 80%라도 따라잡힌다면, 그게 무슨 추태냐고 했었다.
시가 총액 조 단위 기업의 프로듀싱 파트 수장으로 있으면서, 영업익 50억은 될까 말까 한 인간들에게 따라잡히는 게 말이 되냐고.
‘세상을 전쟁터로 보는 사람이야.’
그렇기에 철저하고 완벽하지만 말이다.
남홍범을 비롯한 임원과 부장급 인원 몇은 윤희연을 그 자리에서 비난했었다. 어떻게 정호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정호환은 딱히 상처받거나 하지 않았다.
‘힘이 없거든.’
윤희연 이사에겐 힘이 없다.
‘책임지지 않는 인간의 말엔 쌀 한 톨만큼의 힘도 없다.’
시대와 맞서지 않고 회사의 방벽 안에 숨어 있는 인간이 뭐라도 된다고 상처받겠는가.
차라리 성필이 ‘늙다리’라고 한마디 하는 게 더 상처받겠다.
아니, 그건 진짜 상처받을 것 같다.
울지도 모르겠다.
* * *
KS 엔터 회장 집무실.
매니지먼트 총괄 남홍범과 회장 문규완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자장면을 먹었다.
“이거 한 그릇이 15,000원인데.”
남홍범이 자장면을 절반이나 남기고 그릇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어째 옛날만큼 맛있지가 않네요. 옛날에 먹었던 1,500원짜리가 훨씬 맛있어요.”
“네가 늙어서 그래.”
“회장님은요?”
“나도.”
문규완이 그릇을 테이블에 탁 두자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뮤지션들 컴백을 앞당긴 이유가 뭐야?”
문규완이 물었다.
KS 엔터 본사 소속 아티스트만 해도 100명에 가까운 숫자다. KS 엔터 매니지먼트 계획은 그 100명의 로테이션으로 이뤄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남홍범은 몇몇 아티스트들의 컴백을 조금씩 앞당겼다.
그게 다음 달에 몰려 있다.
“아셨어요?”
“알지.”
“그거 때문에 밥 먹자고 했구나. 난 또 형이 나를 너무 그리워해서 부른 줄 알았네요.”
하나씩 보면 자그마한 스케줄 조정이다.
아주 조금씩 컴백이 당겨질 뿐.
그런데 그게 전부 합쳐져 모습을 드러내자, 특정 달에 컴백이 몰린 모양새가 됐다.
눈치 못 챌 수가 없다.
“전부 호환이 손길이 잘 안 닿는 애들만 그래. 뭐 하고 있는 거냐?”
“우리 부테스 애들이 WTP한테 추월당했을 때 기억해요? 난 지금도 그거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어요.”
“뭐? 옛날이랑 말이 다르잖아. 네가 부테스 애들 끌어안고 괜찮다고 직접 말했으면서. 또 나한테는 그룹 하나 추월당했다고 아무것도 안 바뀐다면서.”
“바뀌었잖아요.”
WTP의 소속사는 3대 기획사 전체를 합친 것보다 커져 버렸다.
“우리가 30년 동안 한 게 뭐가 됩니까?”
“그래서, 소녀연맹 들어갈 타이밍에 우리 딴 애들 우수수 집어넣은 거야?”
“형.”
남홍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아가 치민다고요. 소녀연맹이랑 케이어스가 라이벌이란 소리 들을 때마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아요. 우리 애들이 뭐가 모자라서 그런 구멍가게 애들이랑 비교돼야 합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과즙미 뿜뿜 케이어스의 비타민 민주가 신아름 도와준다고 할 때 하지 말라고 할 걸 그랬어요.”
“양아치 새끼. 방송국이 참 좋아라 하겠다.”
“어차피 지금도 끝물인 게 텔레비전입니다. 몇 년 뒷면 형체도 없이 사라질 놈들이에요. 그딴 놈들 이용하는 게 뭐 그리 잘못입니까? 오히려 지금 조금이라도 끗발 있을 때 이용해 먹어야지.”
남홍범이 ‘개새끼들, 속 시원하다’ 욕설을 중얼거렸다.
옛날에 어느 피디한테 뺨을 맞았던 게 떠올라서였다. 트라우마는 쇠사슬 같아서, 다른 기억도 떠올랐다.
KS 엔터의 첫 번째 걸그룹. 그 아이들을 데려갔더니 성희롱한 피디도 있었다.
‘시대와 함께 죄다 죽어버리라지……’ 남홍범이 혀를 찼다.
문규완도 같이 혀를 찼다.
“네가 옛날 방송국 놈들이랑 다를 게 뭐야?”
“다르죠.”
“뭐가?”
“나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요.”
“뭐?”
“제가 소녀연맹이 컴백하는 게 언제일 줄 알고 우리 애들을 거기에 밀어 넣습니까? 물론, 우연히 타이밍이 겹친 방송은 소녀연맹을 밀어내고 저희 애들을 넣은 게 맞아요.”
“아무것도 안 했다면서?”
“근데 그건 영업력 싸움에서 가로 엔터가 진 거뿐이잖습니까. 내가 각 재고 소녀연맹을 죽이려고 한 게 아니라요.”
“뭔데 그럼. 소녀연맹 방송 스케줄 줄줄이 취소되는 건 뭐야?”
“우리만 소녀연맹 보고 부아가 치밀겠습니까?”
대형 기획사 전체가 WTP의 예를 기억한다.
역사상 단 한 번 발생했던 역전 현상.
수십 년간 일구어놓았던 기득권이 순식간에 쓰레기로 변하던 재앙의 시간.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동시에 불합리함도 느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케이팝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다 똑같아요. 사람이 작은 심술을 부려서 개미의 앞길을 막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심술 난 사람이 세 명인 거고요.”
그냥 개미의 앞길을 막을 뿐이었다.
개미는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만큼 작은 심술이었다.
그런데 셋이 동시에 그 일을 하면, 개미는 감옥에 갇혀버린 게 된다.
“아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겠죠. 그거 압니까? WTP 소속사가 가로 엔터 인수하려고 했던 거. 야자수 뮤직 같은 대형 유통사도 다 가로 엔터랑 한 번씩 접촉했다덥니다. 근데 고개 뻣뻣이 하고 버티니, 안 아니꼽겠어요?”
셋이 길을 막자 개미는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그게 네 명, 다섯 명, 여섯 명이 되면.
개미는 그대로 숨이 막혀 죽는다.
“이제 작은 기획사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댑니다. 우산이 필요해요. 대형 유통사 아래로 들어가거나, 다른 기획사의 레이블로 편입되거나. 그래야 겨우 숨구멍이나마 트는데, 가로 엔터는 뭘 했습니까?”
기획사를 인수하고, 다른 그룹을 들였다.
이젠 새 보이그룹까지 출범시키겠지.
그건 무언의 선전포고였다.
나는 너희들을 뛰어넘을 거라고, 거인들을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걔들이 말하잖습니까. 가로 엔터는 최고의 기획사가 될 거라고. 그럼, 어쩔까요. 열심히 하렴, 그렇게 격려하겠어요?”
“사람들 심보가 왜 이렇게 고약한지 모르겠어.”
“형이 할 말입니까? 또 아랫사람만 나쁜 놈 만들지.”
동시기 경쟁사를 향해 쓸 수 있는 무기는 전부 썼던 인간이다.
“어떡해 그럼.”
문규완이 시무룩한 티를 냈다. 그는 불기 시작한 자장면을 젓가락으로 뒤적였다.
“못 이기면 호환이가 울고불고 난리 치잖아.”
“바로 그겁니다.”
사람들 심보가 고약한 게 아니다.
저마다 져선 안 될 이유가 있는 것이다.
* * *
민경섭은 영광을 누렸다. 사장 홍규헌과 사장실에서 맞담배를 피우는 영광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재떨이엔 민경섭과 홍규헌이 만든 담배가 쌓여 있었다.
오늘만큼은 한구인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세상이 우리 애들을 억까한다고?”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