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3화
남태섭은 KS 엔터 정문으로 들어갔다.
데스크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방문증을 주었다. 그것을 목에 매고 직원에게 안내받아 위로 올라갔다.
응접실.
남태섭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꺼내었다.
노트북의 각을 잘 잡아 테이블 위에 두고, 품에서 녹음기도 꺼내어 옆에 함께 놓았다.
차를 몇 모금 마시고 있자니 문이 열렸다.
남태섭은 익숙하지 않은 정장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어유, 앉으세요.”
상대는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공간에 향기와 빛이 차올랐다.
남태섭은 그와 악수했다.
그는 양손으로 남태섭의 손을 감싸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남태섭이 괜찮다고 하자 고개를 올리곤, 아까보다 훨씬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남태섭의 맞은편에 앉았다.
“먼저,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영원 씨.”
현역으로 활동 중인 다키스트의 멤버 둘 중 하나, 영원이 답했다.
“어유, 제가 영광이죠. KS 엔터에 많고 많은 훌륭한 아티스트 중에 저를 골라주셨잖아요. 이런 말은 뭐한데, 하민이 말고 저를 골라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놀릴 거리가 생겨서요.”
“허허, 그러면 제가 하민 씨에게 죄송한데…….”
“아, 아앗, 농담이에요! 하민이한테 따로 말 안 할게요!”
영원은 소년처럼 순박했다.
30대 초반인데도 데뷔했던 10대 후반의 외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을 꼽자면 미소 지을 때 눈가에 잡히는 주름이다.
여자는 목으로, 남자는 눈으로 나이가 드러난다고 한다.
영원의 눈엔 세월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게 흠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중후한 멋을 더해주었다.
“설마 제가 그 다키스트의 멤버와 1대1 인터뷰를 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하하, 뭘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영광…….”
그리 말한 영원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또 순박하게 웃었다.
“저어, 정말 죄송한데 제가 정말 세상일에 문외한이거든요. 오기 전에 교수님에 대해 찾아보긴 했는데에, 사실 교수님에 대해 잘 몰랐어요.”
“그럴 수밖에요. 교수가 뭐 된다고 이름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아, 아앗, 아니에요 아녜요! 교수, 훌륭하잖아요! 저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셨고, 또 박사 학위도 있으시고! 제가 알았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아니에요. 대한민국에 박사는 발에 차여도 다키스트의 영원 씨는 한 명뿐이잖습니까.”
“아유,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래서어, 영광이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교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그래도 인터뷰를 받아들인 건 이사님께서…… 아, 이렇게 말씀하시면 모르시나.”
“정호환 이사를 말씀하시는 거죠.”
“네? 네! 맞아요. 이사님께서 이 스케줄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바로 받았어요. 이사님이 직접 말씀하실 정도면 아유, 교수님이 엄청 유명하신가 봐요. 저도 정 이사님처럼 똑똑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인터뷰를 하더라도 제가 아는 게 많이 없어서요. 이 인터뷰가 되게 중요한 책에 들어간다고 아는데, 어, 아무튼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넵!”
그리 답한 영원이 남태섭의 눈치를 보았다.
“저어, 시작하기 전에 교수님께 한 가지만 여쭤도 괜찮을까요?”
“예.”
“정 이사님과 어떤 사이세요……? 아니, 교수님 이름이 나오니까 이사님이 좀, 뭐라고 할까. 처음 보는 얼굴…… 표정을 지으셔서. 그냥 궁금해서요! 곤란하시면 말해주지 않으셔도…….”
“옛 친구입니다.”
“아…….”
“시작할까요?”
“넵!”
또 영원이 남태섭의 눈치를 보았다.
“저어, 제가 인터뷰 첫 번째는 아니죠?”
“바로 전에 소녀연맹의 하양 씨가 인터뷰하셨습니다.”
“음!”
영원이 만족했다.
“하양 씨면 양보해드릴 수 있겠네요.”
“오, 어떤 의미인가요?”
“저보다 유명하시고 대단하신 분이니까요. 저랑 동시대의 아이돌을 먼저 인터뷰했으면 좀 시무룩했을지도 몰라요 하하!”
남태섭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가 노트북으로 손을 가져갔다.
첫 번째 질문이 나오려던 때, 또 영원이 남태섭의 눈치를 보았다.
“저어, 정 이사님 옛 친구시면 고등학교…….”
“이거, 옛날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해주시려구요? 감사합니다! 아, 진짜 진짜 궁금했거든요.”
남태섭의 눈이 흐려졌다.
그의 눈에 과거가 비쳤다.
* * *
카페.
케이크, 아이스크림, 커피.
유리창에 굴림체로 큼지막하게 쓰인 글씨.
남자의 눈은 의미 없이 그 글자를 읽었다. 1초도 안 되어 다 읽자, 그의 눈은 유리창 너머로 향했다.
길가엔 여느 때처럼 사람이 북적인다.
눈앞의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간 어느 여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뭐라고 소리친다. 아마 애인과 싸우는 건 아닐는지.
유리창 너머 저 멀리 맞춰져 있던 초점이 가까이로 이동했다. 시야 외곽에 무언가 느릿하게 움직인다.
눈동자를 돌리자, 여자였다.
커피잔을 들고 천천히 걷던 여자는 그의 눈빛을 받더니 얼굴을 붉히며 걸음을 재촉했다.
남자는 아무 일 없었단 듯 시선을 다시금 정면으로 돌렸다. 이번엔 초점을 흐릴 수 없었다. 바로 앞에 앉은 친구의 화난 얼굴 때문이었다.
“진심이냐?”
친구는 몇 년 새 유행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다.
‘유지태와 친구들’의 영향으로 힙합 패션은 보편적인 스타일이 됐다. 헐렁하고 품이 큰 바지와 상의다. 은빛 귀걸이와 입술의 피어싱은 그의 불량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에 비해 남자의 옷은 정갈했다.
와이셔츠와 슬렉스, 번쩍이는 구두.
“진심이냐고.”
친구, 남태섭이 나지막이 물었다.
남자, 정호환은 각얼음이 잔뜩 든 커피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응.”
“네 재능을 걸그룹 따위를 만드는 데 쓰겠다고?”
“응.”
“…….”
남태섭은 정호환을 노려보았다.
정호환은 능숙하게 시선을 피했다. 그게 남태섭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네가.”
남태섭은 주변의 시선 때문에 겨우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있었다.
“대학원 공부도 관두고 음악을 하겠다고 할 땐, 솔직히 존경스러웠다. 모든 걸 가진 네가, 부르주아로 살아온 네가 그 모든 걸 내팽개치고 음악을 택했으니까. 진심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진심이야.”
“내가 같이 음악 하자고 했었지. 넌 거절했고.”
“그랬지.”
“근데 그 음악이라는 게, 걸그룹? 헐벗고 나와서 춤추고, 노래 같지도 않은 노래를 부르는 그거?”
“맞아.”
“돈 낭비, 시간 낭비, 재능 낭비다.”
“그럴지도.”
“너랑 내가 나눴던 얘기들은 뭐냐? 다 거짓말이었어? 그냥 멋 부리느라 입에 담은 스노비즘이냐?”
“거짓말 아니고, 전부 진심이었어.”
“그럼 왜!”
남태섭이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주변의 이목이 모였다.
“……그럼, 왜.”
“이게 내가 내린 답이야.”
남태섭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리의 혈관에 피가 쏠려 가려울 지경이다.
“호환아, 이 세계는 기울었어.”
이미 질리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일방적으로 들은 게 아니라, 정호환도 동의하며 개탄했던 이야기였다.
“미디어와 통신 기술의 발전은 폭발적이다. 문화의 구심력은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일 거야. 이젠 주변부 문화 같은 건 미개국에서밖에 없어. 근대화하지 못한 미개국에서만,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곳에서나 존재할 거다.”
“알고 있어.”
“아메리카의 문화가 전 세계의 표준이 되고, 아니다. 이미 표준이지. 표준이고, 절대적인 가치이자, 유일한 문화로 세계에 군림할 거라고.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고 있지?”
정호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숫가에 핀 버드나무처럼 우아하고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남태섭의 이마에 혈관이 돋았다.
“전 세계가 미국의 문화 식민지가 된다고. 그 세련됨으로 비롯된 우월함을, 우리는 감히 견뎌낼 수 없어. 예외는 있겠지. 일본 제이팝과, 유서 깊은 유럽의 문화는 살아남겠지.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어정쩡하고 문화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는 식민지가 되어버려. 문화의 구심력에 빨려들면 그걸로 끝이야.”
“그렇겠지.”
“우리 후손들은 우리말로 된 음악은 발라드 정도만 듣게 될 거다. 잘난 미국 음악도, 우리나라 정서의 발라드만은 대체할 수 없을 테니까. 텔레노벨라처럼. 그런데, 그게 끝이야. 발라드 정도가 식민지가 된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야. 답은…….”
“팝(POP)에 뒤지지 않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거.”
“내 해답은 힙합이다. 미국에서 재즈가 발흥했고, 다음은 록이었고, 그리고 현재엔 힙합이야. 이 신생 문화의 흐름에 우리나라도 올라타야 해. 유럽이 재즈를, 일본이 록을 꽃 피워 문화의 구심력에 저항하는 것처럼. 호환아, 우리가 대중을 계몽시켜야 해.”
남태섭의 눈에서 분노가 옅어져 갔다. 그의 눈은 절박함을 담고 있었다.
“네 재능이 필요해. 이거 봐.”
남태섭이 자신의 옷을 붙잡고 펄럭였다.
“‘유지태와 친구들’ 덕에 힙합 문화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어. 다시 없을 기회야, 다시 오지 않을 시대야. 그러니까 지금이 분기점이야.”
대한민국이 문화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분기점이다.
여기서 팝에 대항할 인프라를 확립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음악계는 영원히 팝에게 종속될 것이다.
“유럽은 재즈를 수입하여 구심력에 대항했었어. 일본은 록을 수입하여 구심력에 맞서고 있어. 우리나라의 해답은 힙합이야. 걸그룹 뭐시깽이가 아니라.”
“……동의해.”
남태섭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정호환의 동의는 다른 방향으로 서 있었다.
“지금이 다시 없을 기회이자, 다시 오진 않을 시대이며, 그렇기에 분기점이다. 전부 동의해. 하지만 내 답은 너와 달라. 나는 미래의 밴드를 만들 거야.”
“……미래의 밴드?”
“악기가 아니라 춤을 선택한 밴드. 나는 ‘컨템포러리 밴드’라고 불러. 성별로 표현하면 걸그룹과 보이밴드겠지.”
“그게, 네 답이라고?”
“맞아.”
“멍청한 놈…….”
남태섭의 눈동자에 다시금 분노가 이글거렸다.
“네가 그리는 미래의 밴드는 이미 일본에 있어. 치마 입고 춤추면서, 소아성애자들한테 앨범을 팔아대는 제이팝 아이돌들이야. 그딴 식으로 불린 판매량과, 그딴 식으로 오른 순위표에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야.”
“그럼 뭔데!”
“난 비즈니스가 아니라 예술을 할 거야.”
남태섭은 침묵했다.
그 침묵 끝에 참지 못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예술? 그딴 거에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부끄럽지도 않나?”
“미안해.”
“알겠다.”
남태섭이 거칠게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머리에 피도 안 말라 골 빈 빠순이들이나 신처럼 숭배하는 그 보이밴드. 소아성애자들이나 앨범을 사재끼는 걸그룹. 아니. 아이돌을 만들면서 시간을 버려라.”
“그렇게…….”
“뭐?”
“그렇게 말하지 마.”
정호환이 고개를 들어 남태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호환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도 부끄러운 것이다.
“내가, 내가…….”
정호환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부끄러워서 심장이 벌렁거리지만.
이게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이다.
“내가, 좋아하는, 거야…….”
“…….”
“내가, 인생을 바치고 싶은, 거라구……. 이, 이게…….”
정호환의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고 흔들렸다.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이야…….”
남태섭은 더 듣지 않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더는 연락하지 마라.”
지폐를 몇 장 뽑아 테이블에 쾅 내려두곤 카페를 벗어났다.
정호환은 그 자리에 몇 분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는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곤, 계산한 후 카페를 나왔다.
수십 분 동안 터덜터덜 걷기만 했다.
걷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허름한 빌딩의 3층. 간판을 달 돈도 없어서 유리창에 테이프로 써둔 글자가 보였다.
[KS 엔터테인먼트]
정호환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건물 안은 환기가 안 되어 밖보다 훨씬 더웠다.
3층. 양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장인 문규완이 중국집 배달부와 말다툼을 하는 중이었다.
“가까운데 그냥 가져다줘!”
“아니, 죄송하다니까요. 다음에 서비스 드릴 테니까 오늘은 좀 봐줘요.”
“이노무 어린노무 새끼야. 짜장면을 시켰는데 단무지가 없는 게 말이 되냐! 오도방구도 있으니까 걍 후딱후딱 다녀오면 되잖아!”
“아 밖에 쪄 죽는다고요…….”
“임마 내가 네 사장한테 전화 거는 거 볼래?!”
“아재요…… 하아, 진짜. 알겠슴다아.”
배달부는 투덜대며 정호환을 스쳐 지나갔다.
문규완은 셔츠 목깃을 손으로 잡고 펄럭였다.
“어어, 호환이 왔냐? 짜장면 먹어라.”
“……내 게 있어요?”
“홍범이 그 새끼, 이 시간에 온다고 해놓고 안 왔다.”
“무슨 일 있대요?”
“연락이 없는 거 보니 경찰한테 잡히기라도 했겠지.”
문규완이 킬킬 웃으면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짜장면 포장을 벗겼다.
그때 양철문이 쿵 열리면서 초췌한 안색의 남홍범이 나타났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소파로 터덜터덜 걸어와 앉았다.
문규완이 혀를 찼다.
“에이, 왜 하필 이때 오냐? 호환이랑 정겹게 먹으려고 했건만.”
“내가 아니라 호환이가 말없이 온 건데 형님은 말을 왜 그렇게 합니까?”
“쯧, 전화해서 하나 더 시킨다.”
“그러지 마시오. 어차피 입맛도 없다 아니요.”
“와? 걍 무라.”
“형, 사투리.”
“아. 홍범이 이 새끼만 있으면 기껏 익힌 서울말이 없어진다 아이가.”
“걍 사투리 쓰요. 뭐 하러 서울 놈들 흉내를 내고 그럽니까.”
“마, 비즈니스는 요런 게 중요하다 아이가. 아차, 이 새끼가 나한테 최면을 거네? 암튼 전화 건데이? 아, 이 새끼가 진짜?”
“됐쓰요.”
“어차피 거기 배달하는 아가 단무지 가지러 갔다. 오는 김에 자장면 하나 더 받으면 되지.”
“밥맛 없으니 둘이서 맛나게 드소.”
“그럼 뭐…….”
문규완과 정호환이 각자 자장면을 들었다.
“근데 왜 늦게 왔어? 경찰한테 잡히기라도 했냐? 킬킬.”
“예.”
“…….”
“며칠 동안 여고 앞을 서성거리는데, 그럼 안 잡히겠습니까?”
“……뭐라든?”
“다음에 또 잡히면 두말없이 유치장 간답니다. 그래도 회사 명함 덕분에 살았지 뭡니까. 아니, 이런 걸 믿는 경찰도 어처구니가 없지. KS 엔터가 뭡니까?”
“좋구만 왜 그래.”
“’Korea―us’가 형님은 좋습니까? 줄이면 K랑 u를 따서 ‘KU’ 엔터지, 왜 하필 KS입니까?”
“처음이랑 끝이 운이 좋거든.”
“걍 확 마 다 떼고 케이어스라고 부르지요 왜?”
“이 새끼는 멋을 몰라. 안 그러냐 호환아? 먹물 먹은 네가 좀 말해봐라.”
“모르겠어요.”
“호환이 이놈은 숫기가 없어서 결혼은 할는지.”
“암튼, 그 여고에 진짜 있긴 합니까?”
“아 있지 있지. 내가 돌아다니면서 학생들한테 다 들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예뻐서 막 멀리서도 보러 온다 카드라.”
“근데 왜 내 눈엔 안 보입니까?”
“니가 운이 없는갑지. 아차, 최면 그만 걸어어어어어어!”
“나 말고 호환이를 보내요. 임마 얼굴이면 여자아들이 술술 말해줄 거 같은데.”
“그럼 호환이가 매니저하고 네가 작곡할래? 저기, 이번에도 곡 찾으러 일본에 갈 건데 네가 갈 거야?”
“그렇게 말하면 또 내가 할 말이…….”
문규완과 남홍범의 대화가 뚝 멎었다.
“호, 호환아 왜 우냐?”
정호환이 끅끅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떨구었다. 남홍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야 호환아, 니 뭔 일 있나? 와 이라노 아가 기지배처럼 울기나 하고. 안 그치나?”
“호, 홍범이 네가 캐스팅을 실패하고 다녀서 그렇잖아! 호환이가 얼마나 상심이 크면 울겠냐아아!”
“지 때문이라고예?!”
문규완과 남홍범이 필사적으로 정호환을 위로했다.
자장면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 * *
“이사님.”
정호환이 눈을 떴다.
눈앞엔 케이어스의 에리카가 보였다.
“……내가, 언제.”
“저희 응원하러 오셨잖아요.”
“아, 미안하구나. 이 나이에 장거리 비행은 힘들어서. 엉덩이 붙이자마자 눈이 감겼어. 이제 나가니?”
에리카는 대답 대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호환은 그제야 눈가의 물기를 알아채곤 손등으로 급히 닦았다.
“꿈…… 꾸셨어요?”
“……그래.”
“슬픈 꿈이었나요?”
“그런 거 같구나.”
“저희 무대 보면 될 거예요. 그럼 슬픈 꿈 같은 건 금방 사라져요.”
“그렇겠지. 너희가 우리의 꿈이니까.”
정호환은 미소로 답해주었다.
케이어스 멤버들이 대기실을 나섰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정호환도 몸을 일으켰다. 경호원이 그를 부축하려 하자 정호환이 제지했다.
“아직 그 정도 나이는 아니네.”
“죄송합니다.”
정호환은 대기실을 나서 천천히 걸었다.
걷고 또 걸어, 계단을 몇 층이나 올라가, 스타디움 최상층까지 도달했다.
최상층 복도엔 개미 한 마리 없었다. 다들 객석에 조용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것이다.
정호환은 객석과 이어지는 입구로 향했다.
순간 시야가 백색으로 물들었다. 눈의 적응이 끝나자 모든 게 선명해졌다.
무대 위에 선 이들은 노안으로 명확히 볼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위에 있는 스크린으론 볼 수 있다.
케이어스다.
케이어스의 신곡이 울려 퍼지고, 그에 못지않은 환성과 감탄이 모든 공간을 휩쓸었다.
무대 위의 빛은 눈이 멀 정도고.
객석의 환호는 귀가 아플 정도였다.
정호환은 벽에 기대어 그 광경과 소리를 감상했다. 꿈인가, 혹은 기적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태섭아, 보고 있냐.’
KCON In USA.
‘우리나라의 말이 팝의 본고장 미국에서 울려 퍼지는 걸, 수만 명이 그에 환호하는 걸, 너는 지금 보고 있느냐.’
보고 있다면, 이제는 네가 나를 인정해줄까.
[케이어스 정규 3집 ‘HELIOS’
초동 판매량 1,030,5**장]
걸그룹 밀리언셀러 시대, 개막.
* * *
‘밀리언셀러를 최초로 달성한 건 케이어스인가.’
성필은 턱을 쓸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카이브보다 시기상으로 빠르지만, 아카이브가 밀리언셀러를 돌파했던 기록보다는 낮다.’
그리 생각하던 성필은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전생과 비교할 순 없겠지.’
앞으로는 성필이 경험하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시대이니까. 그조차 모르는 전인미답의 영역이 펼쳐질 것이고, 이제는 그 초입에 들어섰다.
“하양아, 어떻게 생각해?”
매니저의 부채질을 받으며 쉬고 있던 장하양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요?”
“케이어스 초동 판매량 말야. 말했잖아.”
“아, 죄송해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무슨 생각?”
“이사님께 ‘르 스모킹’을 입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요.”
“‘르 스모킹’은 여성용 턱시도 컬렉션이잖아. 나한테 입히면 그냥 턱시도야.”
“제가 입은 거 같은 턱시도요.”
타공 패턴이 새겨져 구멍이 뻥뻥 뚫린 턱시도다.
“뭐, 프로듀서는 아이돌의 기분을 알아야 한다는 거야?”
“아뇨, 그냥 재밌을 거 같아서요.”
“재미로 프로듀서한테 이런 옷을 입힌다고?”
“아하하, 농담 아니에요.”
“패턴이 늘었네?!”
“음, 케이어스의 초동 판매량은, 놀랍다고밖에 할 수 없겠네요. 100만 장은 상징적인 수치잖아요. 걸그룹 밀리언셀러 시대가 정말 와버렸어요. ‘IWY’로 88만 장을 팔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요.”
“그러게. 예정된 미래란 느낌이 강했지.”
장하양을 둘러싼 매니저와 스태프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소녀연맹에겐 우울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하지만 장하양의 얼굴엔 우울함이 전혀 없었다.
“그래, 드디어.”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정체했어.”
케이어스의 성장이 느려졌다.
그래, 100만 장은 상징적인 수치다.
하지만 전작의 88만 장에서 고작 12만이 늘어난 수치다. 이전의 성장세에 비하면, 확연히 둔화했다.
‘테이스트 더 넥타르’의 60만 장에서 ‘IWY’의 88만 장으로 이어졌을 때도, 이런 기미가 보였었다. 하지만 이번엔 결정적이다.
“케이어스가 한계점에 도달했네요.”
수정 메이크업이 끝나자 장하양이 일어났다.
성필이 말했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아닐 거야.”
장하양이 피식 웃었다.
“확신하세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약간 불안하거든요.”
“하양아.”
“네.”
“천재와 싸울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먼저 가게 두면 돼. 나는 나만의 일을 차근차근 조금씩 쌓아가면 되고. 그러면 언젠가 때가 와. 천재가 신이 만든 한계에 부딪히는 때가 꼭 와.”
“지금이 그때인가요?”
1,000,000장.
역사상 모든 케이팝 그룹을 합해도, 10개도 안 되는 그룹만이 돌파한 성적이다.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도 매년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수치이다.
그걸 케이어스가 돌파했다.
겨우겨우, 재능을 손에 쥐고 꾸역꾸역, 어떻게든 골인 테이프를 돌파한 것이다.
“그래. 그때가 오면 발밑을 얼마나 견고하게 쌓아뒀는가가 중요해져. 재능으로 구름을 붙잡고 하늘까지 닿은 이들은 발판의 엉성함을 뼈저리게 느낄 거야.”
“저희가 쌓은 발판은…….”
“너희의 이야기 그 자체지.”
데뷔 전부터 팬들과 소통하고, 본인들의 가장 내밀한 부분마저 밝히며, 기쁨과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냈던 소녀연맹이다.
착실히 쌓아온 4년의 기록이 그녀들의 힘이다.
그 정점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이다.
SNS와 아이튜브를 통한 단순한 소통을 넘어서서, 성공까지의 과정을 공유하는 것.
“하양아, 드디어 하늘에 설 때가 왔어.”
케이콘으로 증명된 소녀연맹의 힘을 보여줄 때다. 이건 걸음마에 불과하겠지만, 구름 위에서의 걸음마가 될 것이다.
“스탠바이하겠습니다!”
JJH 조정훈 감독의 외침에 장하양이 뮤직비디오 세트로 향했다.
뮤직비디오의 화룡점정.
오랜 시간과 자본을 걸쳐 만들어낸 세트. 그 위에서 펼치는, 끝까지 남겨둔 마지막 씬이다.
브로드웨이 거대 극장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스테이지. 크기에 비해 단출하다. 스테이지 위엔 소녀연맹 멤버들이 서 있다.
거기서, 성필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위로.
위로.
또 위로.
스테이지 가장 위엔 압도적인 크기의 네온 간판이 있었다. 화려한 빛을 발하는 그 네온은 ‘PEOPLE’이었다.
성필이 픽 웃었다.
“인민이들을 위한 성의 표시라기엔, 너무 큰가.”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
송 포 피플(Song For PEOPLE).
컴백까지 한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