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62화 (662/760)

662화

“저, 경민 씨.”

“잠시만요. 더 기다릴게요.”

소녀연맹의 대기실 앞을 지키던 경호원은 작은 한숨을 뱉었다.

유경민은 10분 넘게 대기실 앞에 서 있었다.

소녀연맹을 만나러 왔다면서 들어갈 생각이 없다.

그렇게 5분이 더 지났다.

“소녀연맹분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잠시만 더…….”

“경민 씨?”

유경민이 움찔했다.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리니 장하양이 있었다. 그녀의 손에 폰이 들린 걸로 보아, 누군가와 전화하고 온 듯했다.

“아, 아, 아아…….”

유경민은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갑자기 마음을 가라앉혔는지 차분해졌다.

장하양이 화사한 미소를 보였다.

“아름이 보러 오셨어요?”

“……아름이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제가 대신 전해드릴까요?”

“들어주세요.”

“음? 네.”

“죄송합니다. 선배님의 무대에서 추태를 보였습니다. 곡 바꾸기 무대는 서로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건데, 제 고집을 밀고 가다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선배님들이 커버해주신 ‘칠링’에 비해, 저희의 무대는 지리멸렬했습니다. 저희 멤버들은 관계가 없습니다. 저 혼자 한 일입니다. 사죄드립니다.”

유경민이 허리를 숙였다.

반쯤 숙였을 때, 장하양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체를 일으켰다.

“저희를 향한 존경은 전해졌어요.”

“……아니요, 그건, 존경은, 사실, 아니었습니다. 소녀연맹을 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실패, 했지만요.”

“후배님이 선배인 저희를 따라잡고 싶은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선배의 역할 아닐까요.”

유경민이 움찔했다.

이렇게 따스한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저희도 수많은 선배님들의 등을 보고 나아가고 있어요. 판매량 순위 같은 건 무의미해요. 선배님들의 멋진 무대와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의 저희가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기쁘네요.”

“기뻐요……?”

장하양은 유경민의 어깨를 짚은 손을 그대로 목으로 옮겨갔다.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어깨를 맞대는 정도의 가벼운 포옹.

“저희를 목표로 해줘서 고마워요.”

유경민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둘은 천천히 포옹을 풀었다.

장하양이 유경민의 목에 손을 댔을 때, 유경민은 떨림을 느꼈다.

어째서?

“선배님도…… 긴장이 되시나요?”

“아아, 아직도 떨고 있네요. 음, 어느 무대에 서건, 긴장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저에게는요. 경민 씨는 안 그러시나요?”

“……원래는 긴장을 안 하는 편이에요. 포유를 끝냈을 때부터 그랬어요. 그런데 오늘은 긴장을 해서.”

“경민 씨, 제 최초의 무대가 어디였는 줄 아세요?”

“데뷔 무대……?”

“가로 엔터 연습실 바닥이었어요.”

“네?”

“거기서 사장님 앞에서 꼴사나운 춤을 보여드렸어요. 그땐 아이돌이 아니었지만, 긴장하긴 했죠. 그때의 떨림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어요. 연습생 때 처음으로 버스킹을 하러 길거리로 나갔을 때도. 경민 씨가 말씀하셨던 데뷔 무대에서도요. 항상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지만, 그래도 저를 믿어주신 분을 믿고 무대에 섰어요. 그러면 보답하듯 몸이 움직이더라구요. 오늘처럼, 경민 씨는 긴장을 하는 편이 좋아 보여요.”

긴장을 하는 편이 좋다고?

뮤지션으로서 능숙해져서 긴장이 없는 편이 낫지 않은가?

유경민은 긴장처럼 비정상적인 상태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자신은 완벽하리란 예지에 가까운 확신을 얻기 위해서.

그런 상태여야 좋은 무대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으며, 강성욱 대표도 그리 말했었다.

“예시를 들어드릴까요? 저는 케이콘 무대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어요.”

저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을까.

저분들에겐 오늘 이 콘서트가 아이돌을 보는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어.

한국은 멀어.

콘서트를 보려면 돈이 많이 들어.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설렘을 품고 왔을 거야.

누군가에겐 마지막일 수도 있을 추억.

사랑하는 아이돌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 경험.

“저희가 하는 건, 사람들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어주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언제나 긴장하고, 때론 겁을 먹어요. 겁을 먹고 싶어요. 그 정도의 각오가 있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저의 아이돌리즘이에요.”

유경민은 넋이 나갔다.

“첫 버스킹에 나갔을 때 중학생 팬 두 분이 저희에게 줄 쿠키를 가져왔어요. 그때 깨달은 거 같아요. 팬들이 저희를 보는 시선에 담긴 무게를요.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닌 거예요. 그때 떨던 저와, 오늘 무대에서의 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항상 저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무대에 설 거예요.”

장하양이 그녀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렸다.

“경민 씨는 저와 다른 마음가짐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와 다르더라도, 그 무게가 저보다 가볍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경민 씨만의 아이돌리즘을 찾길 바랄게요.”

장하양은 연습실 문고리를 붙잡고 열었다.

“언젠가 또 같은 무대에서 만나요.”

장하양이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유경민의 눈이 빛났다.

그녀의 눈에는 존경이 새겨졌다.

앞을 향해 나아가는 선배를 향한 존경과.

“멋지다…….”

동경이다.

항상 다른 이들의 등만 쫓아가던 소녀연맹이었다.

이젠 소녀연맹의 등을 보고 쫓아오는 이가 생겼다.

소녀연맹도 누군가의 목표가 되었다.

3년.

소녀연맹이 아이돌의 우상이 되기까지 달려온 시간이었다.

* * *

독일에서의 케이콘이 끝났다.

밤.

유경민은 호텔 차창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아카이브의 동생들은 어제처럼 즐겁지 못했다. 누가 더 우울한지 대결이라도 하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어, 언니.”

막내 아유가 유경민을 불렀다.

“저, 저희, 대표님한테 혼나겠죠……?”

“내가 시켰다고 해.”

“네?!”

“내가 멋대로 한 일에 너희들이 휘말린 거잖아.”

유경민이 조소를 머금었다.

“내가 얼마나 불쌍했으면 너희들이 그랬겠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경민은 차창 밖의 야경만을 보았다. 그때였다. 어깨를 감싸는 부드러운 팔. 그로부터 온기가 전해졌다.

“언니 미안해요……. 저, 저 때문에…….”

“맞아요. 저희들이 더 잘했으면…….”

“언니가 파트를 더 안 가져갔을 거고, 균형이 맞았을 거고, 그래서, 더 잘했을 텐데…….”

“우리가 부족해서 언니가…….”

누군가 훌쩍였다.

유경민은 자신의 어깨를 두른 아유의 팔을 떨쳐냈다. 차창에 비친 아유의 눈망울엔 물기가 서려 있었다.

유경민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유가 화들짝 놀라 다시금 어깨를 움츠렸다.

유경민이 그녀의 이마를 콩 때렸다.

“너 뭐 돼?”

“네, 네?”

“어딜 고등학교도 졸업 안 한 핏덩이가 나랑 급을 맞추려고 해? 피부에 묻은 양수는 말랐어?”

“어어……?”

“연습이나 꾸준히 잘해. 내 나이 돼서도 내 수준이 안 되면, 그때야말로 화낼 거야.”

“…….”

아유의 얼굴이 천천히 밝아졌다. 그녀는 유경민의 옆에 털썩 앉아 그녀와 팔짱을 꼈다.

“언니, 나도 술 마셔봐도 돼요?”

“안 돼.”

“아 왜요옹! 수학여행 땐 다 마신다던데에!”

“대한민국 법은 속인주의라서 외국에서 저지른 범법도 처벌받아.”

“아이잉.”

막내의 애교에 유경민의 입가가 녹아내렸다. 그녀는 다시 차창을 보았다.

저 수많은 빛 중 오늘 아카이브의 무대를 보았던 사람도 섞여 있겠지. 저 빛 중 하나를, 어제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면 좋겠다.

아니, 분명 더 행복해진 빛이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파리의 야경은 무미건조했던 어제와 달리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 * *

SMS 엔터 대표 집무실.

성필에겐 아카이브가 이길 거라고 호언장담을 해놓았다.

라이브 AR을 했으면 체면치레는 했겠지. 그런데 설마 아예 무대를 실패해선 조롱거리가 되어버리다니.

아까부터 강성욱은 심기가 불편했다.

테이블 위에 둔 핸드폰이 종말을 알리는 뿔 나팔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저 폰이 울리면 강성욱은 또 고혈압으로 쓰러질지도 몰랐다.

‘승부가 났으니 박 이사한테 연락이 오겠지.’

이것 또한 자주 겪었던 일이다.

소심한 이준호와는 그런 일이 없었으나, 문규완과는 각자 아이돌의 성과가 나올 때마다 서로에게 전화하여 조롱하곤 했으니.

성필이야 강성욱을 조롱하진 않겠지만, 그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날 것이다.

승자만의 기쁨이다.

패자인 강성욱은 축하해줄 수밖에 없다.

상대가 문규완이었으면 ‘어쩔티비’라며 끊어버리면 그만이겠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속에 불이 차서 내장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야.’

강성욱은 열불이 나선 ‘레이어드’가 받았던 대상 트로피를 헝겊으로 박박 닦았다.

닦다가, 아주 옛날을 떠올렸다.

00년대 중반.

방송국에서 정호환, 이준호와 마주쳤을 때였다.

각자 담당 아이돌과 함께 다니기도 했던 젊은 시절이다.

‘그땐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함께 아이돌의 미래를 논하며 술잔을 나누기도 했었다.

어쩌다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변해버렸는지.

상패를 닦는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왜 원수가 됐긴. 그 인간들이 먼저 내 신경을 긁었으니까 그렇지!’

그때였다.

내선 전화로 비서가 유경민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강성욱은 ‘레이어드’의 트로피를 뒤쪽의 팬트리 안에 넣었다. 그리고 유경민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대표님.”

유경민이 강성욱 앞에 섰다.

강성욱은 유경민을 불러놓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책상 너머로 유경민을 응시하기만 했다.

정적이 유경민의 피부를 바늘처럼 따갑게 찌를 즈음, 강성욱이 말했다.

“아주 큰 일을 저질렀어. 이 일이 힘든 게 사람 관리 때문이란 걸, 아주 오랜만에 떠올렸어요.”

강성욱이 존댓말과 평어를 섞어 썼다. 서른 살은 어릴 유경민을 향해서 말이다.

감정 조절이 힘들 때 나오는 강성욱의 버릇이다. 이윽고 감정 조절이 거의 불가능한 시점까지 오면 완전한 존댓말로 변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좋지 않았다면,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거예요.”

그래, 지금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을 거라구요.”

[선배를 향한 리스펙트, 아카이브의 혼신을 다한 ‘오토마타’ 무대]

“소속 아이돌의 돌발행동은 당연히 고려해야 할 리스크 중 하나이고,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때와 장소를 가렸어야죠.”

“죄송합니다.”

“그게 죄송한 사람의 얼굴과 말투인가요?”

“죄송한 마음은 있지만 후회는 없기 때문입니다.”

“경민이 얼굴에 비친 감정이 그거였군요. 후련함. 반응을 봤으면 알겠지만, 좋은 말만 있진 않아요. 프루트들에게 고마워하세요.”

아이돌이 가기로 결정한 길을 응원하는 팬들이 없었다면, 이번 유경민의 행동은 용서받지 못했을 테니까.

프루트들이 지겹게도 들이밀었던 셀링 포인트인 실력.

그런데 실력이 소녀연맹에게 직접적으로 밀리자, 악질들은 이때다 싶어서 아카이브를 조롱했다.

프루트들은 정신없이 처맞기만 하다가, 이내 하나의 카드를 빼 들었다.

‘토, 톱의 자리에 앉으신 소녀연맹 선배님들보다는 부족한 게 당연하잖아?! 신인 그룹한테 잣대가 너무 엄격해!’

아카이브의 실력은 어나더 레벨이다. 동시기의 아이돌과 비교해서는 말이다.

그렇게 프루트들은 영업 전략을 수정했다.

전체적으로 아카이브의 무대는 호평이었다.

선배를 향한 존경이 느껴졌다.

비록 ‘케글아‘라는 표현이 돌판의 웃음벨처럼 변하긴 했으나, 자업자득이니 받아들여야겠지.

“평소 같았으면 위로했겠지만, 위로할 마음도 들지 않네요. 그래서.”

강성욱이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즐거웠어?”

유경민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신중히 골랐다. 아니, 고르는 게 아니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곧 그녀가 두서없이 말했다.

“화나고, 슬프고, 우울하고…….”

“으음, 또?”

“후련하고, 또, 네, 즐거웠습니다.”

강성욱이 픽 웃었다.

“연습생 때랑 달라진 게 없네. 그게 너를 리더로 뽑은 이유이기도 하지만. 기억나? 트레이너가 안무를 고치라고 했더니…….”

“안 고치겠다고 뻐겼죠.”

“고치게 하려면 팀원 전부를 설득하라고. 그리고 설득했더니?”

“저는 설득 안 됐다고 했죠.”

“혼자 팀 평가를 치렀었지. 그래도, 이번엔 어떻게 팀원들을 설득했나 봐?”

“제 억지에 울며 겨자 먹기로 어울려준 거예요.”

“표정 보니까 그런 거 같더라. 거의 울 거 같던데.”

“실제로 무대에서 내려가곤 울었어요. 저도요.”

“저런.”

강성욱은 탁상시계를 보았다.

슬슬 끝내야 할 때다.

“벌은 받아야겠지? 거짓말하도록 해.”

“어떤…….”

“케이콘 후기 영상에서, 전체 라이브는 소녀연맹 선배님들을 향한 애정과 존경의 표시였다고 말해. 네가 품었던 경쟁심은 깡그리 지우고 말해. 실패할 줄 알았지만, 선배님을 향한 동경이 너무나 커다래서 실패할 줄 알고도 시도했다, 감히. 그렇게 말해.”

“…….”

“벌이니까, 제대로 해야 해.”

“……알겠습니다.”

강성욱이 나가란 뜻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하지만 유경민은 손을 모으곤 우물쭈물 망설였다.

“더 할 말 있어요?”

“지금은 안 돼요.”

“음?”

“지금은 소녀연맹보다 못해요. 저희는 야마하고, 소녀연맹은 스테인웨이예요.”

“으하핳! 제 신경을 긁는 건가요?”

“3년을 주세요. 그 안에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될게요. 약속드릴게요.”

“그때쯤이면 소녀연맹이 은퇴곡을 발표하겠네요.”

“등을 바라보기만 했던 선배님들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고 대단한 업적이겠죠. 비록 단 한 순간일지라도요.”

“으음.”

강성욱은 관심 없단 듯 또 고개를 까딱했다.

이번에야말로 유경민은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강성욱은 의자를 빙글 돌렸다. 고풍스러운 목재 팬트리 안에는 SMS 엔터 소속 아이돌들이 거둬낸 성과들이 트로피의 형태로 채워져 있었다.

강성욱은 아까 닦았던 레이어드의 대상 트로피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쪽으로 손을 뻗다가, 바로 옆에 있는 것을 짚었다.

아카이브의 음방 1위 트로피였다.

강성욱은 그것을 꺼내어 헝겊으로 세심하게 닦았다.

“가끔은…….”

시대를 남에게 맡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아주 잠시 동안만이다.

‘소녀연맹, 우리 애들이 따라잡기 전에 누구에게도 꺾이면 안 돼요.’

소녀연맹의 자리를 빼앗는 건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그때까지만이다. 아주 잠시만, 정상에 올라 있는 기쁨을 즐기도록.

아카이브는 탑을 쌓는다.

쌓고 쌓아 소녀연맹에게 도달할 것이다.

SMS 엔터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경민아, 이번의 패배는 너에게 쓰라리겠지. 포유로 실패를 겪어왔던 너에겐, SMS 엔터라는 뒷배를 두고 처음 펼진 총력전에서의 실패가 더욱 아플 거야.’

강성욱도 여러 번 겪어왔던 고통이다.

천재인 KS 엔터의 정호환, YJS 엔터의 이준호와 싸워오며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었다.

그렇게 패배를 거듭하다 보니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수십 년의 경험 끝에야 손에 쥔 깨달음이다.

‘천재와 싸울 땐 죽기 살기로 붙어서 가면 안 돼. 그냥 먼저 보내주는 거야.’

범재는 천천히 자신만의 발판을 쌓아가면 된다. 포기하지 않고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 닿을 거다.

반드시 닿는다.

강성욱이 그러했던 것처럼.

물론 그때까진 많이도 괴롭겠지만.

‘견디고 이겨내길.’

겨울의 수선화가 여름의 해바라기를 질투해선 안 되는 법.

꽃은 시기를 봐서 피어난다.

아카이브의 계절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온다.

강성욱은 기분 좋게 트로피를 닦았다.

훗날엔 스스로 닦을 수 없을 만큼 많아질 테니, 지금 이 시간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박 이사님, 당신은 트로피를 닦은 데 애를 좀 먹겠네요. 여간 많은 게 아니겠지만, 그것 또한 즐거움이니.’

여름을 누리도록 하세요.

KCON in Paris, 끝.

“…….”

하지만, 좋게 좋게 여기려고 해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니, 이건 화가 아니다.

패배감으로부터 비롯된 불안함이다.

강성욱은 테이블 위의 폰을 바라보았다.

트로피와 헝겊을 내려놓고 폰을 들었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어.’

강성욱은 양손으로 폰을 붙잡곤 기도하듯 이마에 가져다 댔다.

대체 언제 연락이 올까.

언제 연락해서 조롱하고 놀릴 생각일까.

옛날의 문규완이었으면 어제 유경민이 삑사리를 냈을 때 바로 전화해서 비웃었을 텐데.

종말의 뿔 나팔은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은 무게를 더해갔다.

강성욱의 심장은 그 무게에 짓눌리기 직전이다.

“……아닌가.”

그는 상의 목깃을 잡고 펄럭이며 열을 식혔다. 그리고 장시간의 고민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팔을 스스로 불었다.

강성욱은 손톱을 씹으며 초조하게 연락되길 기다렸다.

차라리 안 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데 발신음이 세 번도 안 되어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아, 아, 박 이사님?”

강성욱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속이 쓰리고 답답하지만, 그래도 옛날처럼 하고 싶진 않다.

“그.”

나도 이젠 어른이니까, 시원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자.

20년간 싸웠으면 됐다.

다음 시대를 맡을 프로듀서와도 원수가 되고 싶진 않으니, 과거는 털어내 버리자.

언제나 Young하고 MZ하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Cool하게.

“추…….”

지난 20년간 쿨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바뀌어보자.

강성욱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심술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따스한 진심이 우러났다.

“축하드려요.”

자신과 동시대의 동료들이 일궈낸 토양에서 멋지게 꽃을 피운 후배님을 향한 리스펙트였다.

KCON in Paris, 진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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