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화
윤상열의 작업실.
“와, 뽕 찬다.”
엘릭이 맥주를 벌컥이더니 캬하 시원한 숨을 내뱉었다.
윤상열은 팔짱을 낀 채 스크린에 나타난 케이콘 방송에만 집중했다. 그의 앞에도 맥주가 놓여 있지만, 캔도 따지 않고 방치되는 중이었다.
“역대급 규모에 역대급 무대네요.”
“……어떻게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습니까?”
“네?”
“경쟁자의 무대 아닙니까.”
소녀연맹은 무대를 마치곤 관객들을 향해 팬서비스를 잔뜩 하는 중이었다.
엘릭은 그 소녀연맹을 보곤 아연히 말했다.
“경쟁자……?”
엘릭은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아, 피디님은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뭐 좋은 게 좋은 거라서.”
윤상열은 그의 속 편한 대답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또, 제가 글로브의 프로듀서도 아니고요.”
하지만 그 한마디에 화가 바로 가라앉았다.
여자친구에게 찝쩍이던 남사친이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걸 본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근데 피디님도 좋아하시잖아요.”
“소녀연맹을?”
“오토마타요.”
소녀연맹을 좋아하는 거라고 말했다면 엘릭을 개처럼 물어뜯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토마타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 윤상열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숨 쉬는 것도 멈추고 보시던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윤상열은 엘릭의 입을 막을 요량으로 맥주캔을 땄다.
뭔가를 마시는 동안은 그가 말을 걸지 않을 테니.
최대한 천천히 술을 마시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보통 아이돌엔 프로듀서의 자아가 엿보인다.’
가사에선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나 서사 전개 방식을 잡아낼 수 있다.
곡으론 소리의 질감이나 사운드 장치로.
비주얼론 카메라 무빙이나 의상의 스타일로.
혹은 아이돌의 프로모션과 대외 활동으로도.
그 사소한 공통점이 모여 프로듀서의 실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예전부터 프로듀서의 자아가 전혀 드러나지 않아.’
일부러 숨기는 느낌이다.
공통점을 찾을 수 없도록 제거하여, 집요하게도 프로듀서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어떤 면으로는 완벽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오직 아이돌에게만 집중하도록 만드는 전략.’
팬들은 아이돌의 활동에서 프로듀서의 입김을 읽으면 마음이 팍 식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러한 프로듀서의 자아가 회사의 스타일로 확립되어 호응받는 경우도 있다.
회사의 강점.
곧 프로듀서의 스타일이다.
‘왜지? 일부러 흔적을 지운다는 건데, 어째서?’
아니.
롱 포.
아라베스크.
애플 크러쉬.
오토마타.
전부 전혀 다른 감촉이다.
‘우연으로라도 자주 쓰이는 스타일이 하나쯤 보일 법해.’
그런데 완전무결하게 곡마다 전혀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면, 총괄 디렉팅 과정에서 흔적을 없애버렸단 이야기다.
곡에서.
안무에서.
뮤직비디오에서.
의상에서.
프로모션에서.
‘케이어스에선 세상을 오시(傲視)하는 거만함이 보인다. 파격적인 걸 연속적으로 선보이는 데 거리낌이 없어. 성공에 대한 완벽한 자기 확신, 거대한 에고가 드러나.’
글로브에서 엿보이는 에고는 변화무쌍이다.
윤상열은 세계 음악 시장의 동향을 집요할 정도로 파악하려 한다.
아직은 주류가 아닌 마이너 코드를 적절하게 메이저로 끌어와 선보인다.
케이어스처럼 파격적이지만, 윤상열은 훨씬 체계적이다.
체계적일 수밖에 없는 게, 석세스 엔터의 브랜드 가치는 KS 엔터처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체계적이고 선형적이며 조심스러운 혁신.
그럼에도 확신이 있단 점에서 정호환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박성필, 너는 뭐지?’
시대를 앞섰다가도 한참 전으로 돌아가고.
방송 안무에 집중하는 듯하다가도 다이내믹한 안무를 선보이기도 한다.
이건 변화무쌍이 아니라 그냥 줏대가 없다.
그 줏대가 없는 선택이 전부 성공한다.
이 정도면 본능이 성공을 좇는다고 봐야겠지.
‘그럴 리 없어.’
꼴리는 대로 한 디렉팅이 전부 성공한단 건 말이 안 된다.
‘너에겐 내가 보지 못하는 미래가 보이는 거냐?’
어느 거대하고도 먼 지향점이 보여서.
현재에서 판단하면 두서없는 나열에 불과하지만.
미래에서 보면 그 지향점까지 직선으로 이르는.
그러한 길이.
‘보이는 거냐?’
“근데 소녀연맹이 진짜 대단하긴 해요. 저 오토마타도 그렇고, 애플 크러쉬도 그렇고. 메인 프로듀싱을 멤버가 담당했다잖아요.”
“그걸 믿습니까?”
“우리들의 프로듀싱 안 보셨어요?”
“봤습니다. 그냥 홍보 전단지랑 다를 바 없어요. 과장돼 있단 겁니다.”
“저도 전부 믿기 힘들긴 한데…….”
안 믿는 게 정상이지.
제정신 박힌 프로듀서라면,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 회사까지 뛰쳐나간 인간이라면.
‘뒤에 그림자처럼 숨어 있는 역할에 만족할 리 없어.’
어느 소설가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책을 발표할까.
어느 화가가 타인의 이름으로 그림을 내놓을까.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본명 대신 쓸 필명을 짓는 수준이 아니다.
‘프로듀서의 존재를 말살하는 거지.’
윤상열은 성필이 떠나간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의 눈엔 집념이 가득했다.
거의 10년간 함께한 형까지 버리고 갈 정도로 자아가 강한 인간이다.
그런데 자기보다 10살은 어린애들에게 방향타를 맡긴다고? 자기는 옆에 서서 조언이나 하고?
총괄역이라지만, 정말 그림자 안에 있는 데 만족한다고?
“아이돌의 아티스트십이란 건 번쩍이는 옷입니다. 인간의 본질적 가치가 아니고, 그렇기에 거짓입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마케팅 성공 사례지, 프로듀싱 성공 사례가 아니에요.”
“음, 그렇더래도, 대단하잖아요. 자체 제작 아이돌도 흔한 말이 됐지만, 본격적으로 ‘세상 사람들 다 알아라’ 수준으로 기사 때리고 광고하는 건 처음이니까요. 믿는 게 있어서 그렇게 했겠죠?”
“애초에 아이돌한테 결정권을 줄 생각이 없으니 자신만만하게 광고한 겁니다. 어차피 최후엔 박성필이 결정하겠죠.”
“총괄 프로듀서시니까 당연히…….”
“‘전부’ 자기 멋대로 결정한단 뜻입니다.”
“그른가…….”
아티스트십?
지나가던 개가 웃지. 예술로 자신을 표현하는 건 소수에게만 허용된 특권이다.
프로듀서는 예술가이고, 아이돌은 악기다.
악기가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움직이더라도 그건 땅에 떨어져 쾅 소리나 내는 수준이겠지.
“글로브 무대도 좋았어요. 함성이 특히요. 애들 무대 끝났을 텐데 전화 한 통 하세요.”
“……됐습니다.”
“애들이 기다릴 텐데요? 프로듀서님 언제 전화 오시지? 목소리 듣고 싶다. 칭찬해주시겠지? 이러면서요.”
윤상열이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엘릭과 대화하다 보면 머리가 망가질 것 같다.
“걔들은 저 싫어합니다.”
“김 대표님도 그런 거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
“그러니까 좋아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세요? 프로듀서랑 아이돌 사이인데, 친해지면 좋잖아요.”
“구성 씨, 잘 들어요. 아이돌과 프로듀서는 비즈니스 관계입니다. 친해져봤자 좋을 게 없어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때 그르치게 된단 겁니다. 애들이 힘들어하는데 스케줄은 돌려야 해. 친해지면, 그럴 수 있습니까? 친해지니까 더 문제죠. 인간은 잘해주다가 한 번 못하면 금방 악의를 품는 짐승…….”
“피디님은 못 해주다가 한 번 잘해주는 거니까 더 좋은 거 아녜요?”
윤상열은 1초의 초단기 명상으로 주먹 쥐는 걸 간신히 막았다.
“너무 부끄럼타신다, 하하핰!”
5초 단기 명상으로 간신히 욕지거리를 삼켰다.
부끄럼.
엘릭이 그리 표현했던 건 사실일 수도 있다.
글로브의 퍼포먼스 이후 오토마타가 나왔을 때, 윤상열은 자그맣지만 아쉬움을 느꼈었다.
비록 글로브는 아직 싸구려 야마하 피아노이지만, 그 피아노가 내뱉는 소리가 쇼팽 같은 작곡가의 곡이었더라면.
오토마타 같은 것이었다면, 피아노도 더 행복하진 않았을까 하고.
“오토마타 다음은 뭘까요. 기대되네요.”
윤상열은 화를 삭이며 다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소녀연맹의 퇴장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선 아쉬움이 느껴진다.
케이콘은 해외에서 가장 관심도가 높은 행사다.
여기서 이만한 반응을 끌어냈다면, 해외 팬덤에게 눈도장은 확실히 찍었을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겠다.
트잇터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울 것이다.
필연적으로 세계의 케이팝 팬덤은 소녀연맹에게 기대하겠지.
‘다음 앨범에서 소녀연맹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이전의 관심을 훨씬 상회할 거다.’
판매량이 높겠지.
그게 꼭 장점은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 위치에선 한 번 미끄러지면 돌이키기 힘들 거다.’
이만한 기대를 받고도 앨범이 시원치 않다면, 기대했던 것만큼의 싸늘한 반응만이 돌아올 테니.
소녀연맹은 정상을 향한 계단의 상층부에 들어섰다.
하층부보다 훨씬 불안정할 거다.
이젠 발판이 무너지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겠지.
‘여기서부터는 나에게도 운의 영역이니.’
정호환에게도, 성필에게도.
‘하지만 오토마타가 한때의 반짝임이 아니고, 네가 진실로 기적을 그려내는 손을 가지고 있다면.’
이번에도 증명해보아라.
* * *
백설하는 대기실로 돌아와서도 손을 덜덜 떨었다.
아까의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수만 명이 소녀연맹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광경은 이제까지 겪었던 그 어느 쾌감보다 컸다.
“우린 언제 스타디움 단콘 열까?”
조아라가 말했다.
그녀는 몇 분 만에 생수통을 두 개나 비웠다.
목이 말라서 마시는 건 아니었다. 열기가 가시지 않아서였다.
“국내에서 해도 5만 명이 모이진 않을 거 같아.”
신아름이 답했다.
소녀연맹의 최신 초동 판매량은 46만 장.
앨범은 15,000원 정도다.
콘서트는 150,000원 정도다.
15,000원이야 가벼운 마음으로 쓰겠지만, 150,000원은 0의 자릿수가 다르다.
한국에서 몇 명이나 소녀연맹을 직접 보길 바랄까.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는 꼭 설 수 있어.”
리카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마저도 방금의 흥분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
5만이 지켜보는 무대엔 그만한 마력이 있었다.
“반드시.”
“리카, 스타디움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단 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케이팝 한정 일류 뮤지션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톱급 뮤지션이 된다는 뜻이다.
스타디움 콘서트를 열 수 있는 인간은 지구상에서도 극히 희소하다.
그야말로 뮤지션으로서 일류의 재능을 타고 태어났으며, 감히 타인과 비교할 수 없는 노력을 해왔단 증명이다.
게다가 재능과 노력만으로도 되는 게 아니다.
시대와 운 또한 중요하다.
그 뮤지션이 선호하는 장르가 때마침 시대에 부합한다.
운에 운을 거듭하여 히트작을 연달아 배출한다.
그러고 나서야 스타디움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아라쨩, 설마 자신 없어? 그릇이 작네!”
“한 번으로 부족하단 거거든? 이렇게 기분 좋은데 한 번으로 끝내면 오히려 기분이 나쁠 거 같아.”
“아라쨩 엣찌(음란)!”
“그러면?”
신아름이 묻자 조아라가 당당히 답했다.
“다키스트 선배님들 급은 돼야지.”
돔 콘서트 3일 연속 매진.
한해에 콘서트로 100만 관객 동원.
심지어 오직 일본에서의 기록이다.
“아니다, 다키스트를 넘어야지. 해외 전체로 따져서 한해에 200만 명은 모아야겠어.”
“빌딩도 짓겠어!”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다들 안 그랬어?”
신아름과 리카가 웃었다.
“난 오늘 확신했어. 우리에겐.”
조아라가 선언했다.
“재능과 자격이 있어.”
성필이 말해주었던 게 있다.
케이팝 2세대에 기적이 벌어졌다고.
케이팝 2세대는 프로듀서조차, 대한민국의 어느 전문가들도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성공을 구가했다.
그 결과 기적이 펼쳐졌다.
가수 지망생, 댄서 지망생, 그냥 얼굴이 예쁜 사람, 마냥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은 사람, 음악하던 사람, 연주가가 되고 싶던 사람.
아이돌을 동경하여 연습생이 된 이들이 폭증했다.
연습생 100만 명 시대는 그때 붙은 이름이다.
대한민국 문화계의 유망주들이 모두 아이돌이 되기를 바랐던 시대. 심지어 그 시대의 아이들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출산율이 높았을 시기에 태어났던 이들이다.
다신 없을 인재의 범람.
케이팝은 블랙홀이 되어 온갖 재능을 흡수했다.
그로부터 3세대가 탄생했다.
재능끼리 부딪치고 깎이길 반복하여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진정한 천재들.
소녀연맹의 시대는 과거의 연장이다.
“우리는, 그래.”
온갖 보석 가운데서 확연히 빛난다.
“자격이 있어.”
모든 시대의 총아들이 집합한 자리에서, 소녀연맹은 증명해내었다.
물론 소녀연맹은 재능 가운데 가장 뛰어나진 않다.
하지만, 소녀연맹에겐 하나의 기적이 더 겹쳐 있다.
“우리의 프로듀서, 아저씨가.”
가장 우월하다.
“최고의 프로듀서야.”
“너 오토마타로 호응받아서 그런 거지? 네가 맡은 곡 네 입으로 자랑하기 껄끄러워서 팀장님 끌어오는 거잖아.”
“응 신아름 넌 그렇게 생각해. 아저씨한테 칭찬해줘서 울게 만들어야지.”
“내가 먼저 전화할 거거든?”
신아름과 조아라가 동시에 성필에게 전화했다.
조아라가 이겼다.
그녀는 꽉 주먹을 쥐곤 영상 통화 화면을 보았다.
[얘들아아아 진짜 멋졌어어…….]
“아저씨 벌써 우는데?!”
멤버들이 왁자지껄 웃었다.
누가 믿겠어.
이렇게 눈물샘이 헤픈 사람이 최고의 프로듀서라고.
* * *
성필은 핸드폰 안의 소녀연맹 멤버들을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녀들은 우는 성필을 보곤 놀리는 데 진심을 다했다.
[박 이사님 웃으면서 울고 있어! 조금 기분 나쁠지두!]
[리, 리카 이사님께 실례잖아…….]
[오, 아저씨 퇴폐미 좀 있는데요? 바로 저장.]
[야 조아라 너 그거 도촬이야!]
[아타시(나)도 볼래!]
[눈에서 마스카라 흘러내리는 효과만 있으면 리얼 아저씨 사진 중에 레전드인데. 내가 봤을 때 바프 사진 뛰어넘는다.]
[어, 어? 박 이사님 화장하셨어? 왜? 안 하셨는데……?]
[아니 쌤, 지금 했단 게 아니라 하면 좋겠다고요.]
[오……?]
[야 신아름, 너도 보고 싶지? 아저씨한테 부탁해봐. 네가 부탁하면 해줄 거 같은데.]
[음, 그럼 이왕이니까 팀장님, 마스카라 해줘요.]
성필은 감동에 겨워 울면서 또 웃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구인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믿겠습니까.”
이렇게 장난기 많은 아이들이 최고의 아이돌이라고.
성필이 물기와 경쾌함이 섞인 웃음을 뱉었다.
“그러게요.”
[한의사님도 있다!]
[한 이사님도 마스카라 해주세요! 그리고 울어주세요!]
[어? 사장님이랑 혜빈 언니도 계셔.]
[와, 미쳤다. 이사진 퇴폐미 파티 가자!]
“…….”
소녀연맹은 아까보다 훨씬 높은 하이톤으로 웃었다.
정말, 누가 믿을까.
이 소녀들이 방금까지 5만 명을 휘어잡았던 그 아이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