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화
흐르는 시간 속 박제된 잔상.
그 선두에 유경민이 서 있다.
다섯 번의 잔상을 모두 마친 그녀가 정상에 선 등반가처럼 똑바로 섰다.
소리가 사라졌다.
경기장을 달구었던 뜨거운 함성도.
심장을 두드리던 어지러운 음향도.
무음(無音).
진공이 발생한다.
소리를 잃은 관객들의 눈은 게걸스럽게 시각적 자극을 찾는다. 균등한 밀도가 사라진 지금 모든 이목이 한곳으로 모인다.
강제로 만들어낸 아우라.
박제된 시간 속 유경민만이 춤을 춘다.
절대무용(絶代舞踊).
자동인형(Automata)은 움직임으로써 생을 증명한다.
1초.
‘고문이다.’
2초.
‘음악이 없는 세계에서 춤만으로 존재하는 건.’
3초.
‘고문이야.’
조아라, 너는 어떻게 이 고문을 버텨낸 건가. 수십 번의 무대 속에서, 어떻게 한 번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던 건가.
음악 없이 춤으로만 평가받는 세계는 유경민에게도 생소했고, 그렇기에 두려웠다.
3초의 절대무용으로 전신의 힘이 모두 빠져나갔다. 하지만.
―!
침묵 끝에 나온 함성은 유경민이 다시 지면을 박차도록 도왔다.
가뭄의 끝을 선언하는 단비와 같아서, 유경민의 심장이 기쁨으로 차올랐다.
‘……아니야.’
이건 아카이브에게 환호하는 게 아니다.
* * *
3초의 정적.
소리가 사라진 세계엔 오직 움직임뿐이다.
조아라가 절대무용을 마쳤다.
고작 3초뿐인 움직임이라 숨이 벅차진 않았다.
그녀는 양손을 모으고 성필을 흘끗 보았다.
성필은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말했다.
“방금 건 안 돼.”
“……네.”
성필은 절대무용 파트를 위해 수십 명의 안무가에게 의뢰를 넣어 수백 개의 춤을 받았다.
하지만 그중 무대에 선보일 만한 건 한 줌뿐이었다.
그 한 줌에서도, 조아라에게 어울리는 춤은 또 한 줌에 불과했다.
“……아저씨.”
“응.”
“여기 무음 파트는 그냥 뺄까요?”
“왜?”
성필은 굳이 왜냐고 물었다.
조아라는 기가 죽었다.
“춤은…… 음악이랑 함께 존재하는 거잖아요. 동전의 양면 같은 거라서, 한쪽만 분리할 수 없는 거 같아요.”
“‘마리 뷔그만’은 분리해냈어.”
성필은 조아라에게서 어느 대답을 유도해내려 했다.
조아라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몇 번 심호흡을 하곤, 자신의 진심을, 성필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난 아직 춤만으론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어요.”
Only movement.
오직 움직임.
유럽 현대 무용계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세기의 안무가, 마리 뷔그만이 제시한 춤의 방법론이다.
그 춤은 절대무용이라고 불렸다.
음악을 없앰으로써 시간을 지운다.
무대 위엔 공간의 질감, 즉 춤만이 있다.
무용수는 음악 없는 세계에서 자신의 몸만으로 시간을 표현해내야 한다.
“춤만 있는 게 아니야.”
“노래가 없잖아요.”
“무음도 음악이야. 이 무음은 의도된 거고, 오토마타의 이야기 속에 있어.”
“그치만 음악이 없단 건 안 바뀌어요.”
“음악은 있어. 네가 절대무용에 들어서기 전, 2분 40초에 이르는 모든 음악을 네가 받아 이어가는 거야. 네가 가교(假橋)이고 이음새야. 3분의 음악을 다음 미래로 전해주는 역할이잖아.”
“나는…….”
“할 수 있어.”
성필이 확언했다.
“조금씩 내 마음으로 닿고 있어. 네가 실패라고 여겼던 모든 연습이 쌓여서, 내 마음에 가까워져 와. 그러니까 언젠가 닿을 수 있어.”
“……언제요?”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어. 혹은 먼 미래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확실한 건, 컴백 전까진 반드시 출 수 있어.”
오직 움직임만으로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게 당연해.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겠단 건 오만하기까지 한 생각이야. 그런데, 아라 넌 오만할 자격이 있어. 네가 바란다면, 네가 마음에 들 때까지 영원히 지켜봐 줄 수도 있어.”
“아저씨 바쁘잖아요.”
“우리 아라가 이 선을 넘는 순간을 보는 것보다 바쁜 일은 없어.”
조아라는 무력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많은 선을 넘어왔어. 이번에도 그럴 거야.”
무력감을 느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한계를 넘어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수 있다.
“네.”
조아라가 다시 춤을 추었다.
깨지지 않는 믿음으로, 또다시 한계를 넘는다.
* * *
아카이브에게 환호하는 게 아니다.
이 거대한 함성은.
소녀연맹의 오토마타, 그중에서도 절대무용 파트에 환호한 것이다.
조아라가 오토마타 활동기 6주 동안 만들어온 절대무용의 아우라가, 아카이브의 몸을 빌려 다시 펼쳐졌을 뿐이다.
어떤 고뇌도 없이 기계처럼 따라 추었을 뿐.
그러니 복제에 불과했다.
아우라가 없다.
있더라도, 그건 조아라의 것을 빌렸을 뿐이다.
‘이보다 더 나아야 해.’
유경민이 가로로 팔을 크게 뻗자 땀방울이 비산한다. 그게 신호였다. 아카이브 멤버들이 일렬로 섰다.
오토마타 라스트 하이라이트, 피날레 1페이즈.
“워우 워우 워 워 워!”
함성, 외침, 추임새, 아무튼 소리.
그럼에도 노래다. 흑인 영가(靈歌)를 연상시키는 미묘한 그루브가 존재한다.
울부짖음에 가까운 그 노래는 음정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몇 달이나 연습하지 않았다면 시도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 음정보다 2·3도 높은 음으로 노래하는 것.
그 음정은 완벽히 배음(倍音)에 부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불협화음이 된다.
하지만.
워우 워우 워 워 워―!
유경민은 자신이 내지른 목소리가 AR과 조화를 이루어 화음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오른쪽에 착용한 인이어로는 본인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하지만 인이어를 벗은 왼쪽 귀의 자극이 너무 컸다.
‘내 목소리를 못 듣겠어.’
달팽이관이 망가진 기분이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너무나 많고 큰 소리가 뒤섞여 침묵과 다를 바 없었다.
수만 명의 관객들이 오토마타를 부른다.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정면에서 덮쳐오는 관객들의 일치된 함성은 스피커의 음향마저 전부 무위로 만든다.
어쩌면, 방금 노래는 굉장히 꼴사납지 않았을까?
‘아니.’
믿는다.
믿는 수밖에 없다.
과거의 자신이 쌓아왔던 노력과 땀을 믿어라.
솔페주(시창視唱, 독보讀譜, 청음淸音력을 기르는 훈련)를 귀찮게 여겨왔지만, 건성으로 한 적은 없다.
그리고 여기서.
‘도약.’
추임새가 끝난 시점에서 위로 뛴다.
자세는 달릴 때처럼 팔과 다리가 교차된 자세.
수십 센티미터의 도약 이후 땅으로 내려온 순간, 중력이 전신을 짓눌렀다.
방금의 충격으로 폐 안에 있던 예비 흡기량이 모두 사라졌다.
곧바로 들이켠다.
거칠어도 상관없다.
산소가 필요하다.
워 워 워 워우 워―!
땅을 세 번 제자리에서 박찬 후 다리와 팔을 가로로 엇갈리게 휘두른다. 복잡한 스텝과 동시에 팔을 위아래로.
컴플렉스트로(complextro)의 복잡한 음악적 기교가 정신을 흩어놓는다. 온갖 기묘한 사운드적 장치가 주선율 파악을 힘들게 한다.
자칫하다간 노래와 춤이 분리될 것만 같다.
‘버텨라.’
소녀연맹은 버텨냈던 거니.
아니, 넘어섰던 것이니.
‘나도 해야 해.’
피날레 2페이즈.
공중 도약 포지션 체인지.
유경민은 주변을 살필 정신 따윈 남지 않았다. 훈련받은 대로 무릎을 구부린 후 뒤쪽 사선으로 도약한다.
아카이브 멤버들은 체스판의 말처럼 이동한다. 체스 선수가 말의 머리를 잡아 들어 포지션을 바꾸는 것처럼.
총 네 번의 점프.
멤버들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무질서하게 보이던 도약들 끝에 멤버들이 무대 한참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역삼각형 포메이션으로 선 그녀들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그리고 달린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달리기가 끝나고 땅에 두 다리가 닿았을 때, 멤버들은 삼각형 포메이션으로 서 있었다.
역시나 가장 앞에 선 건 유경민이었다.
‘이때 중앙에 있던 건.’
신아름이다.
그녀를 떠올리자마자 유경민은 이를 악물었다.
달려서 이곳까지 도달했다. 관성이 남아 있다. 그 관성으로 발을 앞으로 뻗는다. 카메라를 박살 낼 것만 같은 속도의 직선 발차기다.
그녀의 신발 바닥이 정확히 정면과 수직을 이루었다.
발은 깔끔하게 흔들림 없이 멈추, 지 않았다.
멈춘 순간 관성이 유경민의 전신을 덮쳤다. 근육이 수축하여 어떻게든 충격을 상쇄했다.
진력(盡力)한 상태에서의 급속 정지는 마치 차에 치인 듯했다. 등으로 받아낸 충격에 어금니를 부서질 정도로 세게 물었다.
시발.
‘씨발!’
여기선 흔들려선 안 됐다.
그런데, 이런 동작을 하는데 어떻게 안 흔들릴까.
불합리하기까지 한 안무다.
불합리하지만, 그래도, 해내는 인간이 있어.
‘넌 천재니까, 이런 것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지.’
유경민은 분노를 연료 삼아 지친 몸을 이끌었다.
* * *
역삼각형 포메이션.
멤버들이 앞으로 세 걸음 달려간다.
역삼각형의 꼭지인 신아름은 가장 뒤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빠르고 크게 발을 내디뎌야 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멈춘다.
차가 들이박는 것 같은 관성이 찾아온다.
그 관성을 받아 직선 발차기.
발바닥을 정면과 수직으로 두게 다리를 내뻗는다.
척, 멈추고.
흔들렸다.
“씨이브…….”
신아름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성필이 보고 있지 않았다면 ‘씨발’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대체 몇 번인가. 몇 번이나 실패하고 있는 건가.
동작은 완벽했을 것이다.
그런데 육체가 동작을 버텨내질 못한다.
신아름이 고개를 숙이자 안무가 멈춘다.
성필은 곡을 정지했다.
“아름아, 다시 갈까?”
“…….”
신아름은 불합리함을 느꼈다.
애초에 불가능한 동작이 아닌가 싶다.
노래를 아예 부르지 않아 호흡이 안정된 상태였더라면, 춤뿐이라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래도 부르기에 목도 심장도 미칠 듯이 뜨겁다.
격렬한 춤이다.
마치 노래를 고려하지 않고 안무를 만든 안무가의 원본 퍼포먼스 같다.
그랬으면 좋았겠지.
노래를 고려하여 안무를 축소했겠지.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 안무는 서유선이 원본을 만들었다. 그는 ‘오토마타’를 완창하며 이 안무를 전부 소화해냈다.
“으, 흑…….”
성필은 이 파트를 신아름에게 맡겼다.
신아름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성필이 신아름 자신의 재능을 믿어주었다.
그 재능이 신아름의 무기였고 자랑이다.
그런데 그 재능으로 성필의 신뢰에 답해주지 못한다.
그게 슬프기 그지없었다.
자기혐오가 몰려온다.
“아름아.”
성필이 신아름에게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신아름이 울먹이며 말했다.
“서, 서유선 선배는…… 여유롭게 했는데…… 근데, 저는 이게……. 팀장님이 맡겨주셨는데…….”
“아니 연습 얼마나 했다고 그래. 계속하다 보면 돼.”
신아름은 기어코 울었다.
성필은 다키스트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서유선이 최애다.
그래서일까, 신아름은 서유선이 괜히 마음에 안 들었다.
그는 과거의 정점이었지만, 현재는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의 자신과 비교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랬는데, 착각이었다.
“최고가 돼야 하잖아요……. 그, 근데 저느은…….”
성필은 폰을 꺼내어 아이튜브에 접속했다.
“아름아, 이거 봐.”
성필이 보여준 건 다키스트의 ‘더 킹’ 무대였다.
신아름이 절망했다.
“나한테 이걸 왜 보여줘요! 인성질이에요?!”
“아니, 이거 봐.”
성필이 한 부분에서 멈추었다.
일렬 포메이션의 가장 끝. 서유선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카메라 앵글 가장 외곽인 데다 화질도 낮아, 신경 쓰지 않고선 쉽사리 놓칠 장면이었다.
“유선 씨 보이지?”
햄버거를 한입에 삼키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숨이 벅차서 최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거야. 가슴 엄청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보여?”
“이, 이러면 목이 건조해져서…….”
“그래, 노래를 제대로 못 하지. 그럼에도, 저렇게라도 숨을 쉬어야만 하는 거야.”
“왜…….”
“그만큼 힘드니까. 힘들어 죽을 거 같으니까.”
서유선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 땀이 눈에 들어갔는지 서유선이 별안간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허겁지겁 일어나 다시 춤을 추었다.
한 박자 늦었다.
“유선 씨가 그러시더라. 이 춤이 진짜 어려워서, 정말 죽기 살기로 연습했다고. 몇 달을 하고도 제대로 안 돼서 매일을 눈물로 보내셨대.”
“…….”
“아름아, 네가 유선 씨에게서 보는 건 결과뿐이야. 그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본 거에 불과해. 당연하지. 아이돌이니까.”
피, 땀, 눈물은 무대 뒤에 버려두고.
웃으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게 아이돌이다.
“그리고 또 유선 씨가 그러셨어. 뉴아사 때 봤던 소녀연맹의 무대가, 자기들보다 훨씬 낫다고.”
“빈말…….”
“뭐, 그럴 수도 있겠고.”
“네?!”
“내 생각에 불과하지만, 그 말씀을 하신 유선 씨의 마음은 진짜야. 정말 놀라웠대. 데뷔 2년 차가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하셨다면서. 자기보다 훨씬 낫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런데, 진짜 그래?”
“…….”
“뉴아사에 서려고 잠을 줄여가면서 미친 듯이 연습했었잖아. 심지어 안무를 축소하기도 했고. 유선 씨도 너처럼, 너의 가장 빛나는 모습만 보았던 거야.”
성필은 신아름의 어깨를 마사지하듯 주물러주었다.
격려였다.
“현재의 너는 신경 쓰지 마. 무대 위에 오른 미래의 너만 생각해. 미래의 너는 하품하면서 오토마타를 출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현재의 네가 미래로 달려가는 것처럼, 미래의 아름이도 현재로 달려오고 있어.”
언젠가 하나가 되어 빛날 것이다.
“울어도 괜찮아. 그렇지만 의심은 하지 마.”
피, 땀, 눈물이 착실하여 쌓여 미래로 데려다줄 것이다.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나은 미래로.
* * *
유경민은 춤에 실패했단 혼란을 지웠다.
몸에 가해진 충격을 견뎌냈다.
견뎌내고, 뻗은 다리를 수평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다리와 함께 유경민이 회전하여 등을 돌리자 앞으로 두 멤버가 나왔다.
‘시간 벌이.’
다음 중앙은 백설하가 맡아야 한다.
그러나 아카이브에선 또 유경민이 나선다.
물론 백설하는 현재 유경민이 쉬는 타이밍에도 안무와 백업 보컬을 소화한다.
유경민은 그렇게까진 할 수 없어서, 이 파트만은 다른 멤버들에게 넘겨주었다.
아카이브 멤버들은 이미 체력을 모두 다 소진한 상태일 것이다. 그럼에도 리더를 빛내게 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할 수 있을까, 이 상태로…….’
노래에 집중하느라 체력을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소모했다. 아니, 춤도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박력을 보이기 위해 더 힘을 주어 추었다. 전신의 근육이 열이 오른다. 피로가 쌓였단 증거이다.
‘이대로는 못 할…….’
“IDOL isn’t just a doll!”
유경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그 목소리는 막내 아유의 목소리다.
그게 이상하진 않다.
이상한 건, 방금 그 목소리가 라이브 AR이 아니란 것이었다.
아유가 노래를 불렀다.
“My roll is more than an IDOL!”
다른 멤버들도 짠 듯이 노래를 부르며 유니즌을 만들어냈다.
비록 유경민처럼 음정을 높여 화음을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원곡과 같은 음정에다 흔들리지도 않았다.
응원이다.
멤버들은 그녀들의 능력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이며 응원해주었다. 춤만으로도 숨이 턱 끝까지 닿는 주제에, 이런 큰 무대에서 응원 같은 걸…….
그때였다.
유경민의 머릿속에 한 영상이 떠오른다.
소녀연맹의 일본 데뷔 방송, 뉴아사에서의 다키스트 ‘더 킹’ 편곡 무대.
자신들의 처지와 그때 소녀연맹의 모습이 겹친다.
‘이 악조건마저도.’
소녀연맹은 넘어서 왔던 거다.
아카이브보다 훨씬 일찍이, 넘어섰던 거다.
소녀연맹 전원이 힘을 합치고, 슬픔을 삼키며, 피를 토하면서도 결국엔 지나왔던 골인 테이프.
위대한 선배가 그어둔 한계점.
그게 지금의 아카이브 앞에 펼쳐져 있다.
* * *
아이돌 활동 중 가장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백설하는 바로 답할 수 있다.
‘뉴아사.’
가후 세이코와 겨루었던 일본에서의 경쟁 프로그램.
다키스트의 ‘더 킹’을 커버하게 된 소녀연맹은 한계에 부딪혔다.
결국 타협한 퍼포먼스를 쓰기로 했다.
‘더 킹’과 같은 건 극후반부뿐이었다.
그런데 그 극후반부마저 ‘더 킹’과 완전히 같지 못했다.
마지막 날까지, 백설하는 정해진 퍼포먼스를 완성할 수 없었으니.
그렇지만 백설하는 당일 신아름에게 사인을 보냈다.
퍼포먼스를 완성했으니, 그대로 가달라고.
‘나는 이미 최고의 아이돌이다.’
그런 오만한 마음가짐으로 무대에 나섰었다.
그리고 결국엔, 할 수 없었다.
신아름이 백설하의 이상을 캐치하지 못하고 커버하지 않았다면, 백설하는 퍼포먼스에 실패했을 것이다.
멋진 음 이탈을 저질렀겠지.
꼴사나운 목소리로 바락바락 외쳐댔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떨린다.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우울함을 발판 삼아, 백설하는 더욱더 노력해왔다.
“와.”
퍼포먼스를 점검한 성필이 감탄했다.
군무에 서브 보컬을 소화한 직후 메인 포지션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고음 가사를 줄줄이 이어가고, 마지막엔 3옥타브 ‘레’의 애드리브를 끊임없이 6초간 내지른다.
그 극악한 난이도의 퍼포먼스를, 백설하가 단기간에 완벽하게 해내게 됐다.
“설하는 춤만 조금 손보면 되겠다.”
“헤헤…….”
“옛날보다 훨씬 잘하는 거 아니야? 설하는 원래부터 완성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더 나아질 게 있었네. 대단하다.”
백설하는 쑥스러워서 몸을 배배 꼬았다.
“동생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리더가 되려고 열심히 연습했으니까요. 헤헤…….”
더는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에 노력을 쌓아왔다.
백설하는 옆의 신아름을 보았다.
아름아, 나는 그날 너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어.
그리고 더는 너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어.
이 언니가 자랑스럽지?
‘노려보고 있다?!’
* * *
소녀연맹이 진작 넘어섰던 골인 테이프.
그녀들을 이기려면 아카이브도, 아니.
유경민 자신도 지금 이 테이프를 끊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천재들에겐 한 번 뒤처지면 끝도 없이 밀려날 뿐이다.
쌓아온 노력의 보답을, 여기서 받겠다.
“부르려면 불러라.”
유경민이 굽혔던 무릎을 폈다.
그녀가 일어나자 시야가 높아지고, 동시에 앞자리를 차지했던 멤버들이 옆으로 물러났다.
물러나며, 두 멤버들이 살짝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들의 눈동자에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부탁할게요.’
시야가 트였다.
“오토마타.”
유경민이 노래했다.
“내 이름.”
성대가 긴장하여 수축한다.
갑상피열근과 윤상갑상근이 동시에 조여들며 성대 안의 기압이 상승했다. 밖과의 기압 차는 한 가지 현상을 발생시킨다.
좁은 곳에서 바람이 더 세게 부는 것처럼, 소리가 훨씬 더 빠르게 방출된다.
성대원음(聲帶原音).
꿀벌의 날갯짓에 불과한 음량. 그 아주 작은 음량이 좁은 성대를 빠르게 지나치며, 부딪치고, 공명하여, 증폭한다.
호기 근육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의 성문하압 상승은 목에 심대한 피해를 끼친다. 강한 기압이 성대 피부를 긁어내고 건조하게 만든다.
안 그래도 강해진 성대의 내전.
무리한 사용으로 상승한 폐쇄율.
그 모든 게 그녀의 목을 긁고 부순다.
만약 백설하가 옆에서 보았다면 기겁하면서 그만두라고 했을 방법이다.
유경민도 이게 잘못된 방법이란 걸 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것 외에 방법이 없다.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私道)로라도 넘어야 한다.’
본래라면 유연하게 움직였을 성대가 굳는다.
유경민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았다.
이 상태가 딱 알맞다. 비브라토 따위는 포기한 곧은 음성으로 공기를 꿰뚫겠다.
“The most beautiful Doll.”
3페이즈.
진정한 피날레.
왼발로 몸을 지탱하고.
오른발을 사선으로 뻗어 땅을 내려친다.
상체를 뒤튼다.
팔을 사선으로 올린다.
호기 근육이 죄다 뒤틀렸지만, 성대를 혹사시켜 억지로 성도(聲道)를 연다.
“실이 없이 춤추는.”
백설하, 너는 평온하게도 이 부분을 불렀다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천재가 아닌 나는 처절하고 질박하게 따라 하는 게 고작이다. 그렇지만 나는 너에게 닿는다.
네가 다키스트에 닿았던 것처럼.
우리도 소녀연맹에게 닿을 수 있다.
이 무대는 그 증명.
“오토마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동인형.
3옥타브 ‘라’ 보컬 애드리브.
공기를 끝도 없이 뚫어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대를 넘어서, 필드를 지나, 수백 미터 앞의 경기장 끝까지 닿았다.
영원히 이어질 듯한 소리의 선(線).
선이 이어지고.
선이 부러졌다.
4초에 이은 애드리브 끝에 꼴사납게 음이 벗어났다. 성대를 혹사하여 거칠어진 목은 벗어나는 음을 붙잡을 수 없었다.
유경민은 당황하지 않고 춤을 추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한 방울 흩날리지만.
자동인형은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마친다.
이윽고 자동인형을 움직이던 엔진이 멈추고, 오토마타에도 끝이 찾아왔다. 피날레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안타까운 끝이었다.
전 세계 수십만 명이 보는, 그리고 훗날 수백만 명 혹은 수천만 명이 볼 무대의 끝에서 음 이탈을 저질렀다.
실 끊어진 인형처럼 유경민이 고개를 숙였다.
원래 안무였지만, 그녀의 안무에선 짙은 패배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폭우가 내렸다.
거대한 박수·환호가 그치지 않는 비가 되어 유경민의 전신을 두들겼다.
유경민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기뻐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기뻐하는 것을 넘어 고양되어 있다.
‘무대 위가 아니면 익힐 수 없는 감각이 있어. 군인이 훈련을 아무리 힘들게 받아봐야, 전쟁터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게 있잖아.’
글로브의 지유가 했던 말이 시간을 넘어 유경민의 뇌리를 때렸다.
유경민이 떨리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닿았을까, 내 마음은.’
유경민이 환호성을 붙잡았다.
‘닿았다.’
닿았지만.
‘닿았을 뿐.’
넘지 못했다.
골인 테이프는 아직도 그녀의 앞에 있다.
* * *
오토마타 퍼포먼스 최종 점검이 끝났다.
성필은 침묵을 지키며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헐떡임을 최대한 숨기며 엔딩 포즈를 취했다.
성필이 씩 입꼬리를 올리자 그제야 멤버들이 우수수 무너져내렸다.
“이건…….”
성필은 웃었다.
허탈한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아니, 경탄이었다.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보고선 짓는 너털웃음이다.
“컴백을 한 달 당겨도 되겠는데? 이렇게 빨리 완성할 줄 몰랐어. 대단해, 얘들아.”
“당연한 거 아닌가요!”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 리카가 하늘을 향하여 검지를 치켜들었다.
“저희들은 최고의 아이돌이니까요! 이 정도 퍼포먼스는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흐억, 헤엑, 크헤엑, 케헥.”
“하양이는 혼절하기 직전인데?”
“이것도 퍼포먼스예요!”
그래.
최고의 아이돌이, 이라…….
성필의 뇌리에 소녀연맹의 데뷔부터 애플 크러쉬까지의 여정이 순차적으로 펼쳐졌다.
그 끝에 지금 이 순간이 있다.
최고의 기량을 갖춘 아이돌들이 있다.
“이게 너희들의 3년이구나.”
“으아아아아아악!”
갑자기 조아라가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그게 수십 초간 이어졌다.
조아라는 목소리가 다 갈라져서야 외치는 걸 그만두었다. 그러곤 그녀가 함박웃음과 함께 말했다.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내가아아악!”
“아라쨩 캇코이(멋져)!”
“크헤엑, 흐억, 허억, 흐어어억!”
“하양이 언니 괜찮은 거야?”
리카도 조아라를 따라 함성을 내질렀다.
“쇼죠렌메가 키타아아아(소녀연맹이 왔다아아아)!”
* * *
[라 리그 데 퓌 에 라아아아(소녀연맹이 왔다아아아)!]
객석 2층의 여러 입구 중 하나.
복도와 연결된 입구엔 화장실을 가는 이들이나, 잠시 공연에서 빠져나와 한담을 즐기는 이들이 소수 있었다.
유경민은 관객석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기대어 소녀연맹의 무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물론 이곳에서 멤버들은 면봉보다 작은 크기로 보일 뿐이다.
유경민이 보는 건 큼지막한 스크린에 떠오른 소녀연맹이었다.
그녀들은 아카이브의 칠링을 끝낸 후 오토마타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격이 다르네.’
아카이브가 이 악물고 했던 퍼포먼스를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소화하고 있다.
직접 보니 확실히 격이 다르다.
경험도, 아우라도, 그리고 이 환호성도.
“계시(啓示)로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유경민은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입구 근처에 쪼그려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 중년? 50대에서 60대 사이의 남자였다.
유경민은 그를 보다가 다시 무대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계시란 단어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계시라뇨?”
유경민이 묻자 남자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유경민을 보자 한층 더 놀랐다.
“경민…….”
“계시가 무슨 뜻이에요?”
남자는 당황하더니, 다시 무대로 눈을 돌렸다.
무시하는 건가. 놀라서 말이 안 나오는 건가.
유경민이 대답 듣기를 포기하려던 차.
“저는,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이돌들의 해외 무대를 많이 보았습니다. 아십니까? 옛날 아이돌이 해외 무대에 서는 건 대부분이 합동 무대였습니다. 한국에선 유명하지만, 외국에선 존재조차 모르는 아이돌들의 합동 무대요. 티켓값도 염가였죠. 그렇게 인기 있는 아이돌을 모아 봤자 미국에선 고작 10,000명이 올까 말까 했습니다.”
2세대쯤의 이야기인가.
유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벤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많아졌습니다. 저는 흔한 국뽕 마케팅이라고 생각했어요. 해외에서 공연을 했다. 그 한마디로도 한국 사람들은 뭐랄까, 순박하게 좋아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게 먹혔거든요. 그런데, 점점 더 관객이 느는 겁니다.”
케이콘처럼 거대한 무대가 아니더라도, 케이팝 아이돌들이 초청받기 시작했다.
때론 미국 페스티벌 변두리의 작은 무대 하나이기도 했다. 고작 백 명 이백 명 모일까 싶은 정도의 무대.
그게 점점 더 커지고 많아져 갔다.
“저는 요 몇 년 동안 매일 기분이 좋습니다. 제가 젊었을 땐 상상할 수 없었던 소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거든요. 우리나라 가수가 빌보드에 들었다느니, 일본 홍백가합전에 나갔다느니. 정말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에요. 그리고, 이런 광경을 제 눈으로 볼 줄도 전혀 몰랐습니다. 기쁘기가 한량이 없지요. 그래도 그 기쁨이란 게 점점 더 무뎌집니다. 나중엔 당연하단 생각도 들었죠. 해외 무대에 섰다, 인기가 많다, 그래서 뭐? 당연하잖아. 이젠 별 감흥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무뎌진 저조차도, 이 순간만은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예, 계시처럼요.”
남자를 바라보던 유경민의 시선은 그를 따라 앞으로 향했다.
저 멀리 무대 위에 선 소녀연맹에게로.
“저 소녀들은 제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풍경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그런 예감이 듭니다.”
유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의 표시였다.
“저희가 진 거겠죠.”
유경민은 그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로부터 등을 돌린 순간.
“벌써부터 패배를 논하기엔 막 시작한 참 아닙니까?”
남자가 그리 말했다.
“소녀연맹은 4년 차 선배님들이잖습니까. 아카이브에겐 아직 6년이나 더 남아 있어요.”
“…….”
유경민은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패배를 논하진 않더라도, 결과엔 승복해야겠지.’
또 소녀연맹을 만나러 가야겠다.
이 감상을 곱씹을 수 있게 조용하면 좋으련만.
복도는 조용하지 않았다.
파르크 데 프랭스의 철골이 징징 울릴 정도의 환호성이 사방을 채우고 있었으니.
100년의 역사가 소녀연맹에게 박수를 보낸다.
* * *
아카이브의 데뷔는 화려했다.
대형 기획사 출신답게 데뷔부터 많은 팬이 따라붙었다.
아카이브 팬덤인 ‘프루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겼던 건 아카이브의 실력이었다.
라이브인 게 확실한 어마어마한 성량의 하이라이트 보컬 애드리브.
보기에도 어렵고 화려한 안무.
누군가는 그녀들의 춤이 지나치게 과장됐으며, 어린애답지 않게 귀염성 없이 기술만 좋다고 비웃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녀들의 실력은 진짜였다.
SMS 엔터 대표인 강성욱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비수이자, 케이팝 씬의 기준을 뒤바꿀 게임 체인저였다.
프루트들은 그런 아카이브를 응원했다.
“성필이 너 지금 폰이나 볼 때야? 사장님이 호흡곤란 때문에 힘들어하시잖아!”
“흐억, 허억, 흐으억.”
데뷔 초동은 100,000장.
케이어스의 데뷔 초동과 같았다.
그렇지만 프루트들은 그 성적을 자랑으로 삼지 못했다. 데뷔치곤 많지만, 선배들에 비하면 부족하니까.
우리 애들은 실력이 정말 좋아요.
그게 프루트들이 아카이브를 영업하고 다니는 주요한 셀링 포인트였다. 실제로 다른 팬덤들도 아카이브의 실력을 인정했고, 그게 화제가 되어 숏폼을 점령하기도 했다.
“손 이사님 저게, 저게, 정말로 저희 소녀연맹분들입니까? 저토록 빛나는 게 정말, 정말로…….”
“한 이사님도 호흡곤란이야아아악!”
순박했던 프루트들이 공격적으로 변한 계기가 있었다.
아카이브의 두 번째 앨범 ‘칠링’의 대성공이다.
초동 판매량 500,000장. 순식간에 걸그룹 역대 초동 판매량 4위에 이름을 걸었다.
프루트들은 실력이란 셀링 포인트와 함께 성적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케소글? 이젠 케아소다.
늙다리들을 몰아낼 때가 왔다.
우리 아카이브가 4세대를 열었다.
자신들이 응원하는 아이돌이 시장의 판도를 뒤바꾸었단 건 엄청난 자부심이었다.
“노래를, 아아, 노래를, 코쟁이들이 한국어로 ‘오토마타’를 따라부르고 있어어…….”
“사장님, 그건 인종차별적 발언입니다. 아, 하지만, 아, 감동적입니다…….”
케소아.
케이어스 소녀연맹 아카이브.
그건 글로브의 ‘케미컬 임팩트’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케소아는 케글아가 되었다.
케이어스 글로브 아카이브.
글로브에게 순식간에 역전당했지만, 프루트들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1년도 안 되어 초동 500,000장이다.
앞으로 얼마든지 성장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카이브는 괴물 신인이란 명칭이 붙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판매량은 탄탄한 팬덤을 구축한 선배들에게 밀릴 수 있지만, 실력은 최상위다.
특히 중소기업에서 눈에 보이는 아무나 데려와 꾸역꾸역 모은 소녀연맹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카이브는 보석이며 소녀연맹은 그냥 조금 예쁜 돌에 불과하다.
“박 이사, 폰만 보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 우리만 감동한 거 아니잖아. 프로듀서로서 한마디 해보라구.”
아카이브의 곡 바꾸기 무대는 순식간에 트잇터 트렌드를 점령했다.
비록 한국에서 ‘오토마타’의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케이팝 팬들은 오토마타를 모를 수 없었다.
극악한 난이도는 케이팝 팬 사이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오토마타는 국내와 달리 해외 반응이 매우 좋았었다.
그렇게, 아카이브의 오토마타는 한국을 넘어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대단한 무대였다.
그 처절함.
절박함.
능숙함.
비록 마지막 유경민의 음 이탈이 아쉬웠으나,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녀의 퍼포먼스를 보는 모두가 눈치챘다.
유경민이 음정을 높여 노래 불렀단 것을 말이다.
소녀연맹보다 훨씬 험난한 상황에서 그만한 무대를 보였다. 그러니, 프루트들은 또 기고만장해졌다.
아카이브는 소녀연맹 이상이다.
“네.”
성필이 답했다.
겨우 폰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퍼포먼스를 모두 마친 소녀연맹 멤버들이 땀에 흠뻑 젖어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1부의 끝을 알리는 꽃가루가 화려하게 흩날렸다.
카메라가 리카를 잡았다.
벚꽃처럼 보이는 분홍 꽃가루가 땀 때문에 그녀의 뺨에 달라붙었다.
그녀는 꽃가루를 잡아 앞을 향해 후 불었다.
그녀의 눈엔 나른함이 엿보였다.
절박하고 치열했던 유경민, 아카이브와는 천지 차이였다.
“저도 우리 애들이.”
백설하는 덜덜 떨리는 손을 귀로 가져갔다.
그녀는 간신히 인이어를 빼더니, 함성을 듣곤 함박웃음과 함께 눈물을 글썽였다.
신아름은 프로답게 엣지(Edge)한 포즈를 지으며 관객석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조아라는 거대한 함성이 부담스럽고 또 부끄러운지, 괜히 신아름과 팔짱을 끼며 여기저기 손을 흔들었다.
장하양은 무미건조하게 앞을 보더니 검지를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관객석의 가장 끝까지 키스를 보내었다.
그녀가 검지를 앞으로 뻗자 관객의 바다가 일직선으로 요동쳤다.
성필은 나지막이 웃었다.
“우리 애들이, 자랑스러워요.”
아카이브의 ‘오토마타’ 무대로 달구어졌던 트잇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침묵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소녀연맹의 무대가 끝나자, 아카이브의 무대가 끝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기세로 타올랐다.
프루트들이 전부 사라진 듯, 아카이브 태그가 달린 글이 확연히 줄었다.
그들은 보았다.
아카이브에 비해 확연히 능숙한 소녀연맹의 오토마타를.
심지어, 원곡자인 아카이브를 뛰어넘는 소녀연맹의 ‘칠링’ 퍼포먼스를.
판매량 어쩌고 변명할 수도 없는, 완벽한 실력의 상하관계를 프루트들에게 각인시켰다.
‘저는 대결을 좋아해요.’
강성욱이 그리 말했었다.
‘대결 자체가 아니라, 이기는걸요. 그것도 구체적인 수치로 이기는 걸 좋아해요. 비록 케이콘의 곡 바꾸기 무대는 구체적인 수치는 없겠지만, 성패는 저희의 눈이 알 거예요.’
프로듀서의 눈이라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누가 더 원본에 가까운지, 혹은 원본을 뛰어넘었는지.
‘그럴 필요도 없네요, 대표님.’
프로듀서의 눈 따위는 불필요했다.
사람들은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느꼈다.
아카이브는 원본에 가까웠다.
소녀연맹은 원본을 뛰어넘었다.
‘감사합니다, 강 대표님.’
성필은 다시금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날의 술자리에서, 성필은 이미 그에게 감사를 전한 바 있었다.
‘이제 소녀연맹은 4년 차죠. 스페셜 무대에 설 연차는 올해로 끝이고요. 감사합니다, 소녀연맹의 마지막 스페셜 무대에 화려한 선물을 안겨주셔서.’
그렇게 말했었던가.
감사하다, 정말로.
이견의 여지 없는 승리를 안겨주어서.
소녀연맹은.
눈이 있는 자는 보게 했다.
귀가 있는 자는 듣게 했다.
입이 있는 자는 환호케 했다.
심장이 있는 자는 느끼게 했다.
그리고 이제, 머리가 있는 자는 알게 할 것이다.
소녀연맹의 3년이 만든 결과.
소녀연맹은.
‘최고의 아이돌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모두가 소녀연맹의 발아래다.
소녀연맹이 쌓은 3년의 탑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