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54화 (654/760)

654화

카오틱 에너지(가명)의 데뷔조 백수현.

그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카오틱 에너지의 메인 프로듀서인 손혜빈에 관해서였다.

“수현아아!”

손혜빈은 멤버를 굉장히 친근하게 부른다.

“밥 먹었어?”

“네.”

“많이 못 먹어서 어떡해. 배 많이 고프지?”

“괜찮아요. 데뷔까지 체형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요. 이게 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죠.”

“기특해애!”

손혜빈의 만면에 번진 행복을 보면 백수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그래, 친근하다.

그런데 그 친근함이 뭐랄까, 인간을 대하는 것 같지 않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 고민을 말하니 김사무엘이 평소처럼 ‘뭔 개소리를 하려는 거니?’란 어투로 반문했다.

“인간을 대하는 게 아니면, 뭐, 짐승이란 거야?”

“어! 딱 그거야!”

“……뭐?”

“손 이사님 말투가 강아지한테 하는 거 같아.”

주인이 강아지를 반길 때 목소리 피치를 높여 부르는 것 같다.

인간에게 말하는 것보다 어조를 높여 ‘어이구 우리 강아지 밥 먹었어요?’라며 귀여워하는 느낌이다.

“그게 기분 나쁘다고? 그냥 손 이사님 말투시겠지.”

“기분이 나쁘단 건 아니야.”

“아니면?”

“그냥…… 귀여움받는단 게 그러니까, 뭐냐면…….”

백수현은 오랫동안 적당한 단어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이 상황에 딱 맞는 표현을 찾아냈다.

“귀여움받으니까, 내 남성성이 훼손되는 거 같아. 그니까 ‘멋지다’가 아니라 ‘귀엽다’란 반응이 오는 게 말야.”

“……우리는 아이돌이잖아. 그게 뭐 어때서?”

“내가 그리는 아이돌상은 웨이퍼센트 선배님들 같은 느낌은 아니라서. 아니, 아이돌이고 자시고 귀여움받는단 거 자체가 좀…… 거북…… 하다고 해야 하나?”

백수현은 어릴 적부터 귀여움받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귀여움받는 건 누나인 백설하의 역할이었으니까.

상대적으로 부모의 관심이 덜하다 보니, 백수현은 백설하보다 빨리 철이 들어버렸다.

그리고 애교를 부려 관심받으려기보다, 능력을 증명하여 관심을 얻으려 했다. 그의 방 찬장을 채운 수많은 상장(賞狀)과 ‘클락’ 팔로워 1만 3천이란 기록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어릴 때는 그토록 갈구했던 귀여움받는 상황이지만, 막상 20살이 되어 귀여움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쩔 수 없잖아. 손 이사님 연배에 우리를 보면 귀여울 만도 하지.”

“사무엘 너 진짜 이해를 못 하는구나? 이건 내 자아랑 관련된 거라니까?”

“그래, 진지하게 답해줄게. 네 머릿속에 박힌 남성성은 너무 구시대적이다. 됐냐?”

“구시대?”

“남성성이 여성에게 다가오는 매력이라면, 그게 꼭 마초적이여야 할 필요는 없잖아. 한 이사님 수업 시간 때 뭐 들었어?”

소녀연맹이 한구인에게 받았던 강의는 카오틱 에너지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다.

한구인은 소녀연맹을 가르칠 때보다 확연히 성장하여, 이젠 최신 대중문화까지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얼마 전 강의에서 이렇게 설명했었다.

‘여러분이 체험한 남자 아이돌상이 정립된 건 90년대입니다. 흔히 X세대라고 불리는 90년대의 젊은 남성들이 선망하던 이미지가 현대 아이돌의 시초가 된 겁니다.’

최초의 남성 화장품 브랜드가 등장한 시기.

남성들이 옷과 스타일에 눈뜬 시기.

대한민국의 90년대엔 30년 전 서양에서 펼쳐졌던 풍경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남자의 꾸미기 혁명인 ‘공작새 혁명’이다.

‘꽃미남,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마초적인 것만이 유일한 매력의 판단기준이었던 시대가 지나갔다.

하지만 아이돌과 달리 90년대 남자 젊은이들 사이에선 꽃미남 스타일이 유행하지 못했다.

IMF라는 전대미문의 재앙 속에서, 젊은이들의 개성 발휘는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

해고당하지 않고 기존 회사 풍토에 융합되기 위해선 기성세대의 가치 기준에 절대적으로 부합해야만 했으니까.

결국 공작새 혁명이 대중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건 2010년도가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꽃미남류의 보이그룹은 줄기차게 여성팬들의 사랑을 구가했고 말이다.

“귀여운 것도 내 매력, 인가…….”

“객관적으로 귀여움은 눈 뜨고 찾아봐도 없는 면상이긴 하다만.”

백수현은 시름에 빠졌다.

자신은 귀여운 이미지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볼 수도 있다니…….

어쩌면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던 건 아닐까?

사실 자신은 귀여운 이미지인데 혼자 멋진 이미지로 생각했다던가. 참으로 우울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백수현은 고민을 한순간에 타파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1층 휴게 공간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설하야 안녀엉!”

성필이 백설하에게 인사했다.

손혜빈이 백수현에게 인사할 때처럼 어조가 한껏 올라가서 말이다. 백수현이 표현했듯, 마치 애완견을 부르는 주인처럼.

백수현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프로듀서 눈에 아이돌은 다 귀여워 보이는 거구나! 내가 딱히 귀여운 이미지가 아니라!’

* * *

“설하야 안녀엉!”

성필이 애완견 부르는 것처럼 높은 피치의 목소리로 인사하자, 백설하는 말 그대로 얼이 빠졌다.

‘뭐야 X발.’

그리 생각한 순간 백설하는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팍 쳤다.

“설하야?!”

성필이 백설하에게 급히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백설하에게 뭔가 이상이 생기진 않았나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했다.

백설하는 뺨을 데우는 화끈함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생각일 뿐이라도 성필 앞에서 욕설을 떠올리다니.

백설하는 너무 당황하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했었다. 옛말에 사람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던가. 백설하가 딱 그러했다.

‘이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내 망상에서뿐이었으니까…….’

백설하는 나름 망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지 않기 위해 고육지책을 쓴 것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아, 모기가…… 있었던 거 같아요.”

“벌써? 지구온난화가 심하긴 한가 보다.”

“헤헤, 그러게요. 그으,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왜?”

“아뇨,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요.”

“기분이 좋아?”

성필이 흐흐흥 웃었다.

‘이건 진짜 뭔 일 있다.’

백설하가 심각해졌다.

성필이 저렇게 얼빠진 웃음을 내보내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 그는 무표정이면 차갑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그가 얼빠지게 느껴진다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 만하다.

‘뭐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케이어스였다.

케이어스 신보(新譜)가 나오나?

‘아니야. 내 앞에서 티를 내실 리 없어.’

홍규헌에게 세상에 둘도 없을 칭찬을 받았나?

‘가능성이 있어. 그런데 뭘로? 박 이사님이 뭔가 성과를 내실 게 있나? 효민이 일은…… 박 이사님이 총괄을 맡으시긴 했지만, 주역은 이음 엔터였어. 그걸로 사장님이 이사님을 띄워주실 리는 없고.’

다키스트가 재결합하나?

‘유선 선배는 일본으로 돌아가셨잖아. 여기 계실 때도 아무런 말도 없으셨고.’

다키스트가 향수 투어(鄕愁 Tour, 이전 시대의 가수나 그룹이 그 시대의 청중을 목표로 하는 콘서트 투어. 해체한 그룹과 은퇴한 가수도 이 투어를 위해 재결합·컴백하기도 한다)라도 벌이나?

‘아니야. 그런 거라면 정말 대대적으로 광고가 났을 거야. 그 다키스트인걸.’

백설하의 망상이 최종단계에 이르렀다.

수렴진화했단 뜻이다. 그녀의 망상은 어디서 시작했든 항상 연애로 이어진다.

‘여자친구가 생기셨나……?’

이것도 그럴듯하다.

백설하는 장난치듯 가볍게 물었다.

“여자친구라도 생기셨어요?”

“설하는 내 연애 금지 선언을 정말 가볍게 여기는구나? 아직도 믿지를 않네.”

“아하하, 농담!”

장하양의 말버릇은 어느새 가로 엔터 전체의 진심 은폐 수단으로 변했다. 당연히 장하양을 제외하곤 잘 먹히지 않는다.

“농담 아니잖아.”

“아, 앗…….”

“나에 대한 설하의 신뢰, 잘 알았어.”

“아아…….”

짐짓 삐친 척하던 성필은 씩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좋은 일이라면 항상 있지. 너희가 있단 거.”

“……이거 플러팅 맞죠?”

“세상에 감사하고 있어.”

“이건 진짜 오해할 수가 없는데요?”

“난 항상 너희에게 감사해. 이 마음을 말한 것만으로 플러팅이라니, 너무하잖아.”

“저 오해해도 되는 거죠?”

“내 말 들었니?”

백설하는 휴게 공간에 있던 백수현을 붙잡아 성필의 앞으로 끌고 왔다. 사자가 새끼의 목덜미를 물어 들고 오는 것처럼 보였다.

“수현아, 어떻게 생각해?”

“손 이사님이 우리한테 하는 거랑 똑같은데?”

“수현이가 그렇다는데?”

“그렇다네요…….”

프로듀서는 다 이런 모양이다.

백설하가 손을 놓자마자 백수현은 호다닥 빠져나갔다. 총괄 프로듀서이자 이사인 성필과 대면하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뭐, 좋은 일이 있는 건 맞아.”

드디어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필은 케이어스와 글로브의 성장을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았었다. 전생보다 확연히 뛰어난 두 그룹의 성장을 이렇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가 더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그 시간의 흐름이 소녀연맹을 삼켜버리진 않을지 걱정했었다. 소녀연맹이 필터를 돌파하는 데 실패하진 않을까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이번 글로브의 초동 판매량을 보고, 성필은 자신이 오해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전생의 글로브는 이 시기에 3.5세대의 대표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4세대가 컴백·데뷔할 때마다 3.5세대 대표로 불려 나와 판매량으로 비교당하곤 했었다.

치욕스러웠다.

‘오죽하면 아름이가 방송국에서 마주치는 후배들을 전부 노려봤을까.’

신아름의 두 눈에선 원망과 분노가 용암처럼 타올랐었다. 자신들이 못해서도 아니고, 원래 그런 시대라니.

그게 대체 뭔가.

자연재해를 마주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성필과 윤상열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글로브가 필터를 돌파한 건 그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바뀌었어.’

소녀연맹의 등장은 아예 새 시대를 열어버렸다. 그에 영향을 받은 동시기의 그룹인 케이어스와 글로브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아니, 합류란 말은 수동적으로 느껴진다.

케이어스와 글로브는 시대를 뛰어넘어 진보한 것이다. 그 결과 케이팝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이젠 좋은 일뿐이다.

필터 따윈 없었다.

소녀연맹은 다음 시대를 쫓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선도자다.

보이지 않는 어둠에 바짝 겁먹고 있었는데, 실은 그 어둠이 자신을 지켜주는 장막이란 걸 깨달았다.

기분이 안 좋을 수 없다.

‘물론 신경 쓰이는 건 있어.’

시대가 다가온 게 아니라 아예 새로운 시대라면, 이는 성필에게도 전인미답의 영역이다.

과연 어떤 새로운 경치가 펼쳐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신경이 쓰이지만, 즐겁다.

이 발전이 케이팝 문화에 어떤 꽃을 피워낼지 상상해보면, 정말 즐겁다.

“그럼 그 좋은 일이란 건 저희랑 관련된 게 아닌가요?”

“관련이 있지.”

“뭔데요?”

“너희의 존재 자체야.”

아까와 같은 답변이다.

성필이 말해줄 기미를 안 보이니 백설하가 뚱해졌다.

‘근데, 정말 너희의 존재가 기쁜 걸 어떡해.’

백설하로선 납득하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 * *

기분 좋은 성필은 기분 좋게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라지만 연습실에 모인 것뿐이었다.

참여자는 소녀연맹, 성필, 그리고 민경섭이었다.

그들은 케이콘에서 선보일 아카이브의 퍼포먼스, 칠링에 대해 논의하려고 모였다.

일곱이 원을 그려 둘러앉았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의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가로 엔터의 전서구인 리카가 입을 열었다.

“다들 뉴스 보셨나요! SMS 엔터 대표님이 응급실에 실려 가셨대요!”

“어쩌다가?”

“그건 모르겠어요!”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어제저녁, SMS 엔터 앞에 구급차가 도착했다.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다.

SMS 엔터의 팬들은 아이돌이나 연습생이 과도한 스케줄에 지쳐 쓰러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근거 없는 궁예질이다.

그러나 원래 뜬소문이 잘 퍼지는 법. 온갖 자극적인 살이 붙은 소문은, 결국엔 SMS 엔터가 연습생을 학대한다고까지 확대되었다.

SMS 엔터 앞에 정차한 구급차의 사진이 헛소문과 결합하여, 사고력이 미숙한 인간들이 실제인 것처럼 믿어버리는 상황이 왔다.

당연히 기자의 자질 따윈 기자가 된 순간부터 포기한 기자들이 긴급히 기사를 써서 올렸다.

그러자 SMS 엔터가 사실을 밝혔다.

“대표님이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병원으로 가셨단 거밖에 몰라요!”

“저런…….”

성필은 입 안에 쓴맛이 감돌았다.

50살이 넘어서도 댄스 가수로 현역인 신체 건장한 강성욱마저도 나이엔 이기지 못했구나.

새삼 세월의 무자비함을 느낀다.

어쩌면 젊을 때처럼 무리하게 춤을 연습하다가 몸에 무리가 온 게 아닐까.

“아카이브가 글로브한테 발린 거 때문에 뒷목 잡고 쓰러진 거 아니야?”

조아라가 킥킥 웃었다.

그 즉시 민경섭이 제지했다.

“아라야, 사람이 쓰러졌는데 농담이 나와?”

“죄, 죄송합니다…….”

“항상 역지사지로 생각해봐. 형이 자아 찾기 여행 떠났을 때 케이어스 멤버분들이 이렇게 말하면 어떨 거 같아?”

케이어스한테 매일 털리더니 인생무상함을 느끼고 회사를 떠난 거 아니야? 킥킥.

그 말을 듣자마자 조아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개X끼들…….”

“아니, 진짜로 말했단 게 아니잖아. 네가 그렇다고.”

“아!”

역지사지(易地思之).

모든 종교의 황금률답게 순식간에 조아라의 인성을 뜯어고쳤다.

“암튼…….”

강성욱의 고혈압 사건은 뒤로하고, 민경섭이 본론을 꺼냈다.

“아카이브와 곡 바꾸기 무대를 하기로 했잖아. 내 개인적으로 ‘칠링’은 풀버전으로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보통 아이돌끼리 곡 바꾸기를 하더라도 풀버전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지 않은가.

아이돌은 몇 개월의 피나는 연습을 거쳐 무대에 선다. 그렇다면, 다른 아이돌도 그만한 퀄리티를 내려면 비슷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우린 시간이 없잖아. 컴백까지 두 달도 안 남았어. 괜히 선배로서 가오 잡겠다고 거기에 쏟을 시간이, 솔직히 아까워. 케이콘까진 한 달도 안 남았고, 그 시간을 전부 써도 아카이브처럼 할 순 없어.”

가수가 자기 곡을 세상에서 가장 잘 부르는 것처럼, 아이돌도 자기 곡의 퍼포먼스를 가장 잘한다. 잘해야만 한다.

애초에 원본의 아우라가 있으니 말이다.

“체면치레할 정도로만 연습하자.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만.”

“그러면…….”

신아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풀버전으로 안 하면 얼마나 줄이자는 거예요?”

“1절과 브릿지, 마지막 하이라이트만 하는 건 어때? 이러면 2분 살짝 넘어.”

2분의 퍼포먼스인가.

확실히 적당한 시간이다. 체면치레도 될 것이다.

그 누구도 곡 바꾸기 무대에서 각자가 서로만큼 잘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적당히 분위기를 살리는 정도만 해도 합격이다.

“그치만 아카이브는 풀버전으로 무대에 선단 말예요.”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오토마타’는 작년에 나왔어. 아카이브가 연습할 시간이 더 많았어. 그에 비해 우리가 연습할 시간이래 봐야 고작 한 달. 한 달 중에서도, 컴백 준비를 제외한 시간밖에 못 쏟아. 아카이브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

현실을 본 냉혹한 진단이었다.

“그치만, 그래도, 약속했는데…….”

강성욱과 성필의 대담에서, 서로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으나, 둘 다 전력으로 맞부딪치겠다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다.

물론 이건 신아름의 뇌내 필터를 거친 기억이다.

그녀는 아카이브의 유경민을 응원하러 방송국에 갔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정말 따라잡힐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아예 격의 차이를 보여줘야겠다.

그리 생각했기에, 신아름은 민경섭의 진단에 속이 상했다.

“쓰읍, 난 반대인데?”

성필이 그리 말하자 신아름이 기운을 되찾았다.

“형, 난 형이 그렇게 말해도 유이 씨처럼 안 쫄아요.”

“암튼 난 반대야.”

“노리고 말한 거죠? 은근히 권력에 맛 들인 거 아니에요?”

“그렇게 내 치부를 파헤치지 마라, 민 이사.”

“왜 반대인데요?”

예상이 가긴 한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강성욱과의 약속이다. 또한 소련이들의 명예가 걸렸다. 이런 말이겠지 아마.

“내가 춰보니까 쉽던데?”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아니…… 형이 추는 거랑 애들이 추는 거랑 전혀 다르잖아요. 애초에 형이 제대로 출 수나 있어요?”

당연한 이야기.

성필은 남자다. 아카이브는 여자다.

신체 구조상 남자는 여자의 춤을, 여자는 남자의 춤을 제대로 추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시를 하나로 들자면 골반이다. 걸그룹 춤은 특별히 골반 움직임이 강조된 춤이 아니더라도 쉴새 없이 골반을 움직인다.

골반이 춤의 주축으로 활용된다. 리듬을 표현하고, 힘을 전달하고, 골반이 움직이는 쪽이 춤에 생동감을 더한다.

그에 비해 보이그룹 춤은 골반이 그렇게 크게 사용되지 않는다. 동작마다 크건 작건 사용되긴 하지만, 걸그룹 춤보다는 훨씬 빈도가 적다.

골반을 쓴다기보다 허리를 쓴다고 표현하는 게 훨씬 적절하겠지.

애초에 남자 골반이 그렇게 돌아가지도 않는다. 구조상, 남자가 여자처럼 움직이려면 훨씬 힘이 더 많이 든다.

같은 아이돌도 이성(異姓)의 춤을 소화하기 어려운데, 일반인인 성필이야 안 봐도 뻔하다. 장기자랑 무대에 오른 학생 수준으로 춰보곤 쉽다고 하는 거겠지.

“형 골반 아이솔레이션은 할 줄 알아요?”

“아저씨 골반 잘 돌려요.”

민경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저씨가 나 아오아 나갈 때 ‘배드’ 안무 만들었잖아요. 내가 뭐 보고 춤췄겠어요.”

“아.”

“아저씨 골반 움직이는 거 진짜 예술이에요. 미쳤어요 진짜. 또 보고 싶네. 아저씨, 말 나온 김에 한 번 보여줘요.”

“이건 성희롱이 확실하다. 준비됐어 민?”

“물론이죠 박.”

[징계건의서

시일: 20XX…….]

“뭐래요. 난 춤 말하는 거잖아요. 이게 성희롱이에요? 그럼 아저씨가 우리 춤 디렉팅할 때 말하는 것도 성희롱이겠네요?”

“아, 가불기(가드 불능 기술)네.”

“‘아라야 골반 더 돌려봐. 그래, 그렇게. 바로 그거야’ 이러는 것도 다 성희롱이겠네요?”

“그런 말 안 했잖아?!”

“와, 형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넌 뭘 믿고 있어?!”

“근데 형이 그렇게 골반을 잘 돌려?”

“미쳤다니까요. 골반 아이솔레이션? 기초 다 떼고 응용 심화까지 다 되죠. 내가 봤을 때 사방으로 점 찍어가면서 돌리는 것도 될 듯. 아니, 사방이 뭐야. Z축 활용까지 가능하지.”

“와…… 진짜 데뷔시켜야겠는데?”

박성필 트로트 아이돌 계획, 실행.

“와…… 진짜 징계해야겠는데?”

조아라, 근신.

민경섭, 감봉.

“암튼 내 말은, 아저씨면 아카이브 춤 어느 정도는 제대로 할 수 있을 거예요. 아저씨가 쉬운 수준이면 저희한텐 어린애 손목 비틀기죠.”

“아라쨩 어린애 손목 비틀어봤어?”

조아라가 리카의 손목을 붙잡고 비틀었다.

“끼에에에에에엑!”

“이 정도 난이도?”

“그런가, 그런 건가……. 신뢰성이 있긴 해. ‘칠링 챌린지’하려고 연습했을 테니 형도 꽤 노력했겠지.”

“챌린지 참여 안 했어.”

“근데 왜 연습했어요?”

성필이 시선을 슬쩍 피했다.

“취미야.”

“대한민국 댄스 대중화의 산증인이네요. 그래도 저는 반대예요.”

민경섭은 엄격했다. 성필은 살짝 지쳤다.

“경섭아, 일단 애들 말이라도 들어보고…….”

“형은 그게 문제예요!”

“어?”

“매니저 일에서 손 떼더니 이제 감 잃으셨어요? 해보기 전에 문제를 예상하고 스케줄을 짜며 관리하는 거, 그게 매니지먼트 아니었어요?”

“아…….”

“아카이브의 ‘칠링’을 풀버전으로 연습한다고요? 컴백을 2달 앞둔 상태에서? 심지어 그 이유는 아카이브와의 자존심 경쟁?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그깟 자존심 때문에, 우리 애들한테 안 그래도 없는 시간을 쏟고, 건강을 갈아가면서 ‘칠링’을 연습하라고요? 저는 매니지먼트 관리자로서 절대 허락 못 합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민경섭의 강경한 어조에 겁을 먹는 동시에 감동했다.

이렇게나 자신들을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런데 재작년 말 한 달 동안의 월드 투어는 뭐였지? 그때 진짜 황천길 가는 줄 알았는데.

“경섭아…….”

성필이 깨달음을 얻은 듯 눈망울이 초롱초롱 밝아졌다.

“네 말이 맞아. 마침내 퍼즐이 풀렸어.”

“드디어 정답을 찾으셨네요.”

“저거 뭐 매니저들 사이에 도는 유행어야?”

“시라나이(몰라).”

“내가 자존심에 눈이 멀어서 우리 애들의 건강을 희생시키려고 했네. 고마워, 내 눈을 뜨게 해줘서.”

민경섭이 미소 지으며 검지로 코를 쓱 훑었다.

“옛날의 형으로 돌아와서 기뻐요.”

“저어…….”

백설하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저, 저희끼리 먼저 조금 연습해봤는데요. 풀버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뭐?!”

민경섭이 대경실색했다.

“하양이는! 하양이는 어떡하고! 또 하양이 빼고 다 된다는 뜻이지?!”

“왜 제가 못 할 거라고 단정하시…….”

“또 하양이만 소금 설탕물 마시면서 새벽까지 연습하게 할 생각이야?! 하양이는 이제 20살이 아니란 말야!”

“…….”

“아, 아뇨, 그게…… 진짜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백설하는 크흠 목을 가다듬고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도 걸그룹 짬바가 있잖아요. 한번 카피해보면 완숙까지 얼마나 걸릴지 대강 감이 와요.”

“대강이잖아.”

“짬바가 있다니까요? 춤 노래 5년 동안 밤까지 연습해보셨어요?”

“아, 아니…….”

이것만은 민경섭이 수그려야 했다.

백설하의 말이 맞기도 했고, 그녀가 자존심이 건드려진 사람처럼 발끈해서이기도 했다.

백설하가 조금이라도 날을 세우는 걸 보지 못한 민경섭으로선, 그녀의 태도 변화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해봤는데, 이거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하양이는?”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이에요.”

“응?”

줄곧 입을 닫고 있던 장하양이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쉽던데요?”

아이돌 4년 차.

연습생까지 합치면 5년의 세월.

“쉬운 게 당연하죠. 아카이브는 데뷔한 지 1년도 안 되잖아요.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 안 한 꼬맹이들에게 주어질 퍼포먼스랄 게 사실…….”

“경민이는 23살이야.”

“신인이 소화하는 퍼포먼스랄 게 사실…….”

장하양이 머리칼을 뒤로 슥 쓸어 넘겼다. 머리칼 안에 숨겨졌던 눈이 훤히 드러나며 강렬한 안광을 뿜어냈다.

“저희 소녀연맹에게, 저 장하양에게 어려울 리 없잖아요?”

“맞아요. 우리한테 아카이브 같은 신인들 퍼포먼스는 진짜 어린애 손목 비틀기…….”

“아라야.”

장하양이 서늘한 어투로 조아라를 제지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아, 미안하, 아니,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너무 강한 말은 쓰지 마.”

“네?”

“우리 격(格)에 맞지 않게…….”

장하양의 눈매가 칼날처럼 가늘어졌다.

“약해 보인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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