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3화
걸그룹 초동 판매량 순위.
[1위, 케이어스 ‘IWY’ 88만 장.
2위, INTIMACY ‘F(riendly) intimacy’ 60만 장.
3위, 케이어스 ‘Taste the Nectar’ 60만 장.
4위, 소녀연맹 ‘Automata’ 46만 장.]
이게 종전의 순위였지만, 변화가 생겼다.
[1위, 케이어스 ‘IWY’ 88만 장.
2위, INTIMACY ‘F(riendly) intimacy’ 60만 장.
3위, 케이어스 ‘Taste the Nectar’ 60만 장.
4위, Aka1Iyves ‘Chilling’ 51만 장.
5위, 소녀연맹 ‘Automata’ 46만 장.]
아카이브가 판매량 톱5에 발을 들이밀었다.
이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케이어스는 데뷔 3년 차에 88만 장을.
소녀연맹도 데뷔 3년 차에 46만 장을.
3세대의 선배 그룹인 ‘인티머시’는 케이어스와 소녀연맹이 아직은 신예로 불린 시절에 60만 장을 달성했다.
그리고 아카이브.
“데뷔 1년도 안 돼서…….”
걸그룹 초동 판매량 4위.
KS 엔터의 프로듀싱팀은 아카이브의 선전을 보며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는 단숨에 이 기시감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건지 눈치챘다.
“케이어스가 데뷔했을 때 같아…….”
케이어스는 데뷔하자마자 초동 판매량 100,000장 이상을 달성하며 쟁쟁한 선배들의 목을 전부 따버렸었다.
3세대의 정수라고 평가받던 삼대 걸그룹인 레이어드, 그리고 같은 회사의 선배 걸그룹인 븨이에스마저도 단숨에 넘어섰었다.
인티머시만이 겨우 1위를 지키며 체면치레를 했었다.
KS 엔터 전원이 환호했었다. 이건 새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말이다.
그게 반복되고 있다.
‘아냐, 반복이 아니야…….’
이건 반복이란 말로 어찌 표현할 게 아니다. 걸그룹 10만 장은 2세대 때도 달성된 적이 있던 기록이다.
케이어스의 등장은 혁명적이었다기보다, 과거의 영광을 다시금 재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카이브는 격이 다르다.
‘진짜 새 시대는 지금부터야.’
이 기록은 케이어스와 소녀연맹이 맛보기였다고 말하는 듯하다.
아카이브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뒤로 나오는 이들부터 뭔가 다를 거라고. 선을 그어놓곤 시대를 구분했다.
50만 장이다 50만 장.
세계적으로 봐도 대단한 기록이다. 아카이브가 미국의 아티스트였다면 ‘빌보드 200’ 1위에 단숨에 올랐을 것이다.
앨범 시장이 아직 몰락하지 않은 일본에서도 50만 장은 오리콘 차트 1위를 손쉽게 차지할 기록이다.
음악 시장 규모 1위·2위인 국가에서도 대단한 기록.
그런데 갓 데뷔한 거나 다름없는 걸그룹이 50만 장…….
SMS 엔터의 프로듀싱 능력이 압도적인 걸까?
아니다.
50만 장은 한국처럼 작은 음악 시장에서 사실상 나올 수 없는 기록이다. 케이팝이 글로벌화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래서 아카이브의 이 기록이 특별하다.
“두각을 나타내지 않아도.”
잠자코 기록을 보고 있던 정호환이 입을 뗐다.
“관심을 모으게 됐네요.”
“누구의…….”
말한 즉시, 강동현은 자신이 멍청한 질문을 던졌음을 깨달았다.
정호환이 답했다.
“세계지요.”
해외의 케이팝 팬덤이 관심을 보이는 건, 한국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그룹들뿐이었다.
그런 이들의 판매량이 급격히 상승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소녀연맹이다. 소녀연맹이 이룩해온 투쟁의 기록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세계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카이브는 데뷔 1년도 안 되어 50만 장을, 글로벌 팬의 도움이 없곤 달성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기록을 깼다.
이게 시사하는 바는 명백하다.
“데뷔와 동시에 세계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단 게 증명됐어요.”
글로벌 팬이 유명한 몇몇 그룹이 아니라, 케이팝 씬 자체에 주목하고 있단 뜻이다.
아카이브의 이번 기록은 그 증명이며, 그렇기에 시대를 새롭게 정의할 만하다.
호사가들이 침을 튀기며 입에 올려왔던 ‘4세대’란 이름이 아카이브에게 새겨질 것이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뭐, 곡만 충분하면 바로 콘서트를 열어도 되겠네요…….”
앨범 판매량이 중요한 이유는 콘서트 때문이다. 앨범 판매량은 팬덤의 크기, 콘서트를 열었을 때 기꺼이 올 사람들의 숫자를 계산하는 기준 중 하나다.
세계 음악 시장 수익의 파이는 공연이 70%를 차지한다. 음악 시장의 젖과 꿀이 콘서트에 있다.
아카이브는 순식간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의 티켓을 손에 넣었다.
“이사님, 새 그룹을 더 빨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KS 엔터의 차기 보이그룹 데뷔 계획은 두루뭉술했다. 즉, 명확한 비전이나 기획이 없단 뜻이다.
PTR―17이 형용하기 힘든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들로 사업을 전개하는 데만 해도 진땀을 뺄 지경이다. PTR―17의 수익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예 그들만을 맡는 사업 본부가 따로 있을 정도이니.
하지만 걸그룹은 애초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이그룹 시장보다 걸그룹 시장이 시류에 더 민감하다. 그 시류를 붙잡아야 하고.
“지금이 때인 거 같습니다.”
“케이어스가 ‘때’를 비껴갔다는 겁니까?”
“케이어스는 계속 성공하겠지만…….”
감히 추측하건대, 아카이브로 대표되는 4세대 걸그룹의 성장성을 따라잡을 순 없을 듯하다.
이대로면 따라잡히는 것도 금방이다.
KS 엔터는 무리해서라도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고,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이 판단했다.
“시작의 대열에 최대한 빨리 합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KS 엔터는 선도자의 지위를 유지해야 해요. 이르지만, 데뷔조 선정에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정호환의 시선은 모니터에 붙박여 있었다.
[4위, Aka1Iyves ‘Chilling’ 51만 장.]
그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세월을 드러냈다.
이 숫자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읽어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아카이브가 새로운 기준인가?’
새 시대를 밝힌 등불이자 마일스톤인가?
정호환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5위, 소녀연맹 ‘Automata’ 46만 장.]
그리고 그보다 더 아래로.
* * *
유경민은 기분이 좋았다.
좋은 것을 넘어 날아갈 듯했다.
‘이제 나도 마스크 쓰고 다녀야겠다, 그치?’
그리 말했던 순간 신아름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한껏 혼란스러운 표정.
정말이지…….
‘통쾌해.’
시대에 뒤떨어졌단 걸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그건 과거의 유경민 자신을 보는 듯하여, 그때 자신이 느꼈던 절망을 신아름에게 돌려준 듯하여, 정말이지 통쾌했었다.
오늘까지, 유경민은 남들에게 말 못 할 질투심과 열등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신아름을 향한 질투와 열등감이었다.
‘우리좌, 자랑스러운 리더…….’
‘프로젝트 포유’에서 열등생들의 멱살을 붙잡고 이끌었던 신아름은 등불이었다.
유경민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봐 왔기에, 그녀가 내뿜는 강렬한 불꽃을 누구보다 선명히 느꼈다.
그리고 그 불꽃을 시기했다.
‘내가 더 빛나니까.’
그런데 스포트라이트는 신아름만을 비추었다.
유경민은 자신의 우수성과 우월성을 믿었다. 그 힘이 자신을 정상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한 치도 의심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프로젝트 포유’가 끝났을 때, 유경민은 신아름보다 순위가 낮았었다.
유경민의 고통이 시작된 게 그때부터였다.
‘학폭 이슈로 그룹이 망하고, 포유가 끝나고 손에 쥔 건 푼돈뿐. SMS 엔터에 들어가서도 연습생으로 불안함 속에 살았어.’
매일 뼈를 깎는 연습을 이어가고, 데뷔조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상에서 불안에 떨었다.
유경민이 암흑 속에 있는 동안 신아름은 빛을 더해갔다.
마침내 유경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빛은 타다만 장작이라고. 오만했었노라고.
자기혐오의 나날 끝에, 유경민은 아카이브로 데뷔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받아야 마땅할 빛을 되찾았다.
‘내가 부족한 줄 알았는데…….’
순간의 착각이었다.
‘프로젝트 포유’에선 안목없는 제작진의 희생양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았던 거다.
그래서 신아름에게 뒤처졌다.
‘포유’로 활동할 땐 이음 엔터라는 거지 같은 기획사와 김명운이란 거지 같은 프로듀서 때문에 망했다.
그래서 신아름에게 뒤처졌다.
모든 실패는 유경민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SMS 엔터로 오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나는 내가 설 무대에 서지 못했던 거야.’
마땅히 자신이 서야 할 가장 빛나는 장소에 설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앞서가는 신아름을 보며 스스로를 혐오했던 세월도 이젠 안녕이다.
오히려, 앞서가 줘서 고맙다.
돌아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었다.
기다리는 게 정답이었다.
시대가 말하고 있다.
‘소녀연맹은 구시대의 유물이 될 거야.’
케이어스도 마찬가지다.
‘설레발 떠는 사람들은 옛날부터 4세대가 시작됐니 어쩌니 말이 많은데, 전혀 잘못 짚었던 거야. 내가.’
아카이브가.
‘4세대를 열었어.’
소녀연맹, 글로브, 케이어스가 톱3인 건 3세대의 유물로 불릴 것이다. 3세대 끝자락이 보인 마지막 불꽃이라고.
‘븨이에스’와 ‘레이어드’ 같이, 3세대의 시작을 선포했던 위대한 걸그룹들을 판매량으로 꺾었을 땐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겠지.
훗날 자신들이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안녕하세요.”
유경민은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방송국 복도를 거닐었다.
그녀가 인사할 때마다 스태프와 기획사 직원들, 아이돌까지 경외가 담긴 눈빛을 보낸다.
시대의 총아(寵兒)와 첨단(尖端)을 보는 눈이다.
그 눈엔 선망이 서렸다.
이 순간, 이곳에서, 아카이브의 유경민을 모르는 사람 따위는 없다.
조금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앞으로 ‘국뽕연맹’ 따위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유명해질 것이다.
“안녕하세요, 경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4세대의 시작을 알린 위대한 아이돌로서, 한국 대중음악사(大衆音樂史)에 이름을 새길 것이다.
‘케이콘에서 다시 만나면 아름이는 또 어떤 얼굴일까.’
자신보다 더 늦게 데뷔했음에도 훨씬 크게 성공한 후배님의 퍼포먼스로 환호받는 기분은 어떨까.
나중의 즐거움이다.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현재의 성과에 흠뻑 빠지고 싶다.
오늘도 당연한 듯 1위를 거머쥐러 가자.
신아름에게 했던 말마따나, 감흥은 없겠지만.
당연한 일이니.
* * *
SMS 엔터 대표 강성욱이 광란 상태에 빠졌다.
“된다고 했지! 내가 된다고 했죠! 된다고 했잖아아아아아아!”
회의를 하려고 모였건만, 회의실은 강성욱처럼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스크린에 아카이브의 초동 판매량이 뜨자 거의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온갖 서류가 하늘을 날며 눈처럼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아, 아아…….”
아카이브의 메인 프로듀서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신이시여…….”
“신?”
강성욱이 회의 탁상 위에 올라가 말했다.
“날 찾았나?”
“강 대표님이 신이고 왕이십니다! 누가 감히 의심하겠습니까!”
“정호환 꺼져라! 이준호 꺼져라!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는 나다아아악!”
진짜 미친 것 같다.
“내가 4세대를 열었어어어!”
2세대엔 KS 엔터한테 깨지고.
3세대엔 YSL 엔터한테 깨지고.
하지만, 마침내, 결국.
“이겼다! 3세대 끝!”
지긋지긋한 쓰리톱 구도도 끝이다.
강성욱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낯빛은 보는 사람이 다 기분 좋을 정도로 개운했다.
“마케팅.”
“예!”
“보도자료에 ‘4세대’란 단어 꼭 넣도록 해요. 바이럴에도요. 아예 쐐기를 박읍시다.”
“옙!”
컴백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진 조금 조심스러웠다. 죽어라 광고하고 났더니, 성적이 부진하면 놀림거리가 되기 딱 좋으니 말이다.
‘4세대? 지랄하네 소녀연맹한테도 찌발리는 게ㅋㅋㅋㅋㅋ’ 같은 말을 들어 먹으면 강성욱은 고혈압으로 쓰러질 것이었다.
“비즈니스.”
“예!”
“우리 주가(株價)는요?”
“장 마감까지 5%나 올랐습니다!”
“성과급 파티다아아아아!”
회의실에 모인 팀장들이 아까보다 더 발광했다.
주가 상승도, 성과급도 모두 좋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게 있었다.
아카이브가 4세대를 열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문화업에 종사하는 자로서, 문화의 조류와 흐름을 바꾸었단 건 다른 무엇보다도 커다란 자부심이다.
SMS 엔터는 대중음악사에 남는다.
재즈에서의 ‘블루 노트’나 흑인 음악에서의 ‘모타운’처럼, 격변기의 쐐기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질 것이다.
* * *
“아, 덕분에 진짜 살았어요.”
엘릭이 연신 감사를 전했다.
맞은편에 앉은 윤상열은 녹차를 홀짝이며 고개를 까딱였다.
“상열 씨 없었으면 어땠을지, 어휴.”
“……디렉팅 경험은 없습니까?”
“예, 저야 작곡가로 쭉 일했으니까요. 프로듀싱 총괄이란 게 이렇게 골머리 아픈 일인 줄 몰랐어요. 하아, 사실 지금도 머리가 지끈거려서 미치겠어요. 그냥 시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멍청이인가?
그 ‘시키는 일’이 힘든 거다.
지시하고, 확인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
말로만 할 수 있다. 그런데 말로만 할 수 있다고 개나 소나 할 수 있단 뜻은 아니다.
‘옛말에 범인은 해 봐야 알고, 천재는 해보지 않아도 안다고 했었지.’
엘릭, 너는 범인(凡人)이다.
자기가 윤상열의 눈에 제멋대로 재단되는 줄도 모르고, 엘릭은 사람좋게 웃었다.
“앞으로도 많이 배울게요.”
“예 뭐, 많이 배우세요.”
윤상열의 차가운 어투에 엘릭은 씩 미소 짓기만 했다.
프로듀싱 1부 부장 윤상열과 2부 부장 엘릭은 마주칠 일이 그다지 없다.
없을 것이었다.
엘릭이 윤상열을 자주 찾지 않았다면 말이다. 일에 익숙한 부하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엘릭에게 총괄직의 책임은 꽤 버거웠다.
게다가 부하 중엔 총괄을 맡아본 이가 없었다. 모든 결과를 종합하고 판단한단 건 누구에게나 맡길 일이 아니었으니 당연하다.
상담 상대가 윤상열밖에 없었으니, 엘릭은 윤상열과 자주 만나야만 했다.
“근데 확실히 난사람이 있긴 한가 봐요. 박 이사님 아시죠? 가로 엔터에 있으신 분.”
“……알죠.”
“박 이사님은 쭉 매니지먼트에만 있으시다가 프로듀서가 되셨잖아요. 그런데도 소녀연맹이 착 튀어나온 걸 보면, 재능이 있나 봐요.”
“…….”
“아님 매니지먼트가 원래 이쪽 일과 연관이 있을까요? 하기야, 매니지먼트가 인간관계를 조율하는 일이니까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윤상열은 대답하지 않고 찻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대화를 끝내려는 듯 헛기침했다.
“더 여쭤보실 건…….”
“아 그거 보셨어요?”
윤상열이 짜증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는 한담 따위 나눌 생각이 없건만, 엘릭은 그럴 생각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테이블 위엔 엘릭이 추천한 ‘유리구두’인지 ‘유리가면’인지 하는 만화책이 올라와 있었다.
딱 봐도 순정만화인데, 결코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엘릭이 억지로 윤상열의 품에 안겨주었었다. 정말 재밌다고 말이다.
엘릭은 이런 인간이다.
“아카이브 초동이요. 난리도 아니던데요. 4세대가 시작됐다느니 뭐니 하면서요. 대단하긴 해요, 그쵸?”
“어불성설입니다.”
“예?”
“말이 안 된다고요.”
“아니, 저도 어불성설 뜻은 알아요. 뭐, 호들갑이란 뜻인가요?”
“말이 안 된다고요.”
“……네?”
문자 그대로 말이 안 된다고, 윤상열이 말했다.
“아직 이 시대는 끝나지 않았어요.”
케이어스의, 소녀연맹의.
그리고 글로브의.
“우리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새 시대의 시작은 곧 이전 시대의 완성이다.
더는 변형될 수 없을 형태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완결지었단 뜻이다.
역사로 남을 진정한 시대의 끝.
그게 아직 도달하지도 않았건만, 제 좋을 대로 떠드는 꼴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비록 마케팅과 프로모션을 위해 자기 좋을 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것이긴 해도, 그래도 못 봐주겠다.
“아이돌 세대론이란 것도 3세대가 무르익었을 때 나왔던 겁니다. 아이돌 산업이 뿌리박고 20년이 더 넘어서야 간신히 역사라고 불릴 만한 게 생겼어요. 그 상황에서 세대를 나눈 건데, 지능 박살 난 저능아들이 꺄꺄 소리 지르면서 4세대니 지랄이니…….”
보기만 해도 머리끝까지 피가 솟아오른다.
국평오(국민 평균 등급은 5등급)라고 한다. IQ100 이하의 수준 미달들이 인구의 50%인데, 그런 인간들이 마음껏 지껄이도록 두니 세계가 이 모양 이 꼴이다.
평균 2등급(상위 11%)까지만 발언권을 주는 법이 하루라도 빨리 제정되어야 한다.
“화가 많이 나셨네요…….”
“……예, 평소부터 마음에 안 들던 거라.”
윤상열은 저지능자들을 보면 화가 나거나 아무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다.
‘못 배워 처먹은 고졸 새끼’인 성필을 볼 땐 화가 났었고, 저능아 노아를 보면 아무 생각이 없었었다.
그런데 최근엔 생각을 바꿔 먹었다.
성필은 같은 프로듀서로 인정했다. 물론 동급은 아니다. 윤상열 자신이 더 우월하다. 아니, 훨씬 더 우월하다.
그리고 노아는 얼마 전 고지능자로 판명됐다. 천재 윤상열의 비전을 꿰뚫어 보았으니 고지능자가 확실하다.
“우리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
엘릭은 그 말을 곱씹다가 ‘아!’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진작 새 시대였던 걸지도 모르죠.”
“……진작 새 시대에?”
“소녀연맹과 케이어스는 등장부터 이질적이었어요. 둘 다 시대를 비껴간 느낌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으셨어요? 아니다, 넘어섰단 표현이 더 적절하겠네요.”
제 생각에 불과하지만.
“세대는 판매량 같은 걸 기준으로 나누는 게 아닌 거 같아요. 세대를 규정짓는 혁신이 있었잖아요. 그게 둘한테서 보였어요.”
물론.
“글로브도요.”
“……그 말씀은.”
윤상열이 하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아카이브를 시대의 부산물처럼 말하는 게 되는데요.”
SMS 엔터가 전방위적으로 광고하는 것과 달리 아카이브는, 글로브·케이어스·소녀연맹 세 그룹이 일궈낸 풍부한 시대의 자양분을 머금고 꽃을 피운 것에 불과해진다.
엘릭도 윤상열처럼 웃었다. 윤상열처럼, 유쾌한 웃음이었다.
“저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해요.”
아카이브는 창조자가 아니라 수혜자일 뿐이라고.
* * *
‘이게 어떻게…….’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유경민은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오늘은 당연한 1위를 거머쥐러 온 거였는데, 그랬을 텐데…….
유경민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떨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동안 시간·공간 감각 없이 걷기만 했다.
복도를 걷다가, 그림자가 드리웠다.
힘없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경민입니다…….”
그때였다.
유경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오늘 그녀에게 패배를 안겨준 그룹.
안중에도 없었지만, 불현듯 찾아와 1위를 거머쥔 그룹.
“글로브…….”
그 멤버인 지유가 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님…….”
지유는 자신의 앞길을 막은 후배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입에 추를 매단 것처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경민 님?”
지유가 화장으로도 가려지기 힘든 피로와 함께 유경민을 불렀다.
아까까지 무대 위에서 보였던 빛이 거짓말인 것처럼 축 처지는 목소리로. 그렇기에 무관심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인사할 땐 그룹 이름부터 말하셔야죠.”
유경민의 머리가 텅 비었다.
혼란과 분노와 울분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리가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그룹 이름은 뭐예요?”
그 말이, 유경민에겐 이렇게 들렸다.
‘누구야, 너?’
유경민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한 번도 적으로 인식해본 적 없는 아이돌에게.
음원이든 앨범이든 변변찮기만 한 아이돌에게.
시대를 잘 맞춰 소녀연맹이나 케이어스와 비교될 뿐인 그런 아이돌에게.
그랬던, 아이돌에게.
누구냐는 말을 들었다.
이건 조롱인가? 모욕인가?
“지유야!”
뒤에 있던 라희가 다가와 지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곤 유경민을 향해 곤혹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죄송해요. 얘가 요즘 진짜 틀어박혀서 연습만 했거든요. 거의 세상이랑 단절돼서요. 문찐(문화 찐따)이에요 문찐. 지유야, 이분 뵀잖아 오늘 무대에서. 아카이브. SMS 엔터.”
“아…… 아카이브.”
지유는 느슨한 미소를 띠었다. 최대한 사회성을 발휘해서 웃음 지으려 하지만, 기력이 없어서 제대로 웃지도 못했다.
유경민은 텅빈 눈으로 그런 지유를 보다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그녀의 머리는 백지였다. 비워진 게 아니라, 갈기갈기 찢겼다. 세상을 밝힐 등불이라고 여겼던 자신이, 타다만 장작처럼 느껴졌다.
“아카이브의, 경민, 입니다…….”
[글로브
정규 2집 ‘Chemical Impact’.
초동 판매량 629,5**장]
자체 커리어하이.
그리고.
[1위, 케이어스 ‘IWY’ 88만 장.
2위, 글로브 ‘Chemical Impact’ 62만 장
3위, INTIMACY ‘F(riendly) intimacy’ 60만 장.
4위, 케이어스 ‘Taste the Nectar’ 60만 장
5위, Aka1Iyves ‘Chilling’ 51만 장.]
걸그룹 역대 초동 판매량 2위.
이전 앨범 초동 판매량의 3배 이상.
* * *
성필과 소녀연맹은 아카이브의 ‘칠링’ 생방송 무대를 확인하기 위해 연습실에 모였다.
스크린 주위에 오순도순 모여 아카이브의 무대를 보았다. 진지한 분위기였다.
데뷔 1년도 안 되어 소녀연맹을 앞지른 그룹이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다들 너무나 잘 알았기에,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불안했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글로브가 1위야!”
오늘에서야 집계된 초동 판매량의 힘으로 글로브는 아카이브를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가볍게 꺾어버렸다.
아카이브의 성적을 봤을 때와는 분위기가 아예 달랐다. 다들 들떴다.
‘들뜰 수밖에 없지.’
아카이브는 소녀연맹과 다른 시대의 그룹으로 ‘보였다’. 아카이브는 소녀연맹과 다른 흐름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글로브는 소녀연맹과 같은 시대였으며 같은 흐름 속에 있다.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와 함께 성장해왔다. 마치 공을 주고받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글로브도 마찬가지였다.
글로브의 성과는 소녀연맹·케이어스·글로브 세대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녀들의 승리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우리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성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제 막 시작했는데, 벌써 끝날 순 없지.’
성필은 소녀연맹이 데뷔했을 때부터 줄곧 불안했다. 그가 회귀함으로써 미래가 점점 바뀌어나갔으니까.
케이어스와 글로브의 성장세는 전생과 확연히 달랐다. 확연히, 전생보다 빠르게 팽창했다.
전생과는 발표한 곡도, 타이밍도, 사실상 모든 게 다르다시피 했으니 당연했다.
두 그룹의 성장과 성과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시대에 존재해선 안 될 기록’이었다.
그걸 보고 두려워하기도 했었다.
특히 글로브의 이전 컴백곡을 보곤, 답지 않게 고뇌에 빠졌었다.
‘글로브가 시대와 미래가 앞당겨졌단 표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미래가 소녀연맹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며 겁먹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드디어 확신이 생겼다.
‘미래가 당겨진 게 아니야.’
전생과 다른 이유.
전생과의 차이점.
명확하지 않은가.
‘소녀연맹.’
소녀연맹의 존재가 케이어스와 글로브의 성장을 가속시켰다.
케이팝 시장의 팽창을 더 빠르게 가져왔다.
소녀연맹이란 변수가 이 상황을 불러왔다.
‘소녀연맹은 3.5세대 같은 게 아니야.’
그 말은 즉.
‘소녀연맹이 4세대를 열었다.’
성필이 눈치채기도 전에, 소녀연맹은 등장부터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축포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가 당겨진 게 아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래를 연 것이다.
‘3세대와 4세대를 나누는 필터 같은 건, 처음부터 소녀연맹의 앞엔 없었던 거야.’
이미 새 시대를 연 그룹 앞에 어떤 방해물이 있겠는가.
성필이 대한민국 문화의 흐름을 미래로부터 끌어와 현재에 박아 넣었다.
전생에서 성필의 우상이었던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 정호환에게 영향을 주고.
비록 원수였다지만 프로듀서로서 선망했던 윤상열에게 영향을 주고.
놀랍게도 그 영향은 전부 긍정적인 것뿐이어서.
그렇게, 성필은 미래를 바꾸었다.
‘우리의 시대는 겨우 3년 전에 시작했고, 아직 끝나지 않았어.’
소녀연맹·케이어스·글로브의 7년 계약이 끝나는 4년 뒤까지, 그녀들은 완성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화려한 시대.
박수갈채가 쏟아질 시대의 완성.
그곳에 다른 이들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완결짓는 건 셋 중 하나다.
그리고 그 하나는.
‘소녀연맹이 될 거다.’
서막을 열었으니, 종막도 소녀연맹의 것이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렇게 모든 게 명확해진 순간.
성필의 눈은 과거로 향했다.
회귀한 그 순간으로.
한구인을 만나고, 가로 엔터에 들어가고, 리카를 시작으로 다른 멤버들을 영입하고, 소녀연맹이 탄생했다.
회귀로부터 5년.
5년간의 삶과.
성필이 해왔던 모든 결정과.
카페에서 한구인과 마주 앉아 입 밖으로 꺼냈던, 전생과 달리했던 최초의 선택이.
그 한마디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미래를 바꾸었다.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을 영원히 바꾸어놓았다. 더욱 빠르고, 강렬하고, 화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