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52화 (652/760)

652화

연습실엔 소녀연맹과 성필밖에 없었다. 평소엔 이런저런 장난을 치면서 웃음이 넘치는 조합이다. 그런데 지금은 비장함이 흘렀다.

그 비장함 속에서 성필이 손뼉을 쳤다.

“이틀 후 뮤직비디오 촬영이야. 오늘이 마지막 점검이니까 확실하게 하고 가자. 이 퍼포먼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 첫째는 즐기는 미소. 둘째는 자유로운 바이브야. 알겠지?”

“하이(네)!”

“오, 리카 벌써부터 즐기는 얼굴인데?”

“최고로 즐길게요!”

“이 곡의 주인인 하양이는…….”

비장한 얼굴이다.

“내가 하늘에 서겠다.”

비장한 대사까지 읊었다.

성필은 왠지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비장함에 맞춰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좋아, 그럼.”

성필이 폰을 들었다. 곡을 재생하자, 폰과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사운드가 튀어나왔다.

경쾌하고 담백한 사운드가 터져 나오자, 뒤로 돌아 있던 소녀연맹 멤버들이 어깨로 리듬을 탔다. 파도 타는 듯한 어깨 바운스의 끝에서, 다섯이 동시에 정면을 돌아보았다.

“내가 말해도 멈추지 말고 해!”

성필이 갑자기 외쳤다.

다섯은 당황했지만 정해진 표정을 지켰다. 뒤로 돌아보며, 저마다 끼가 넘치는 포즈와 표정을 지었다.

리카는 이리로 오라는 듯 양손을 까딱였다.

백설하는 유혹하듯 한쪽 어깨를 늘어뜨렸다.

조아라는 보란 듯 정면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장하양은 골반을 빼고 고개만 뒤로 돌려 뇌쇄적인 분위기를 뿜었다.

신아름은 배시시 웃으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뒤로 돌아본 후, 1절이 시작되자마자 네 명이 옆으로 흩어졌다.

중앙엔 신아름이 남았다.

꽃잎이 모두 떨어진 꽃같이 홀로 남아 노래한다.

“다들 말해 내 날개가 커졌다고

맞아 난 날고 있어 알고 있어.“

신아름이 노래하는 도중 한 사람씩 차례대로 끼어든다. 칼 같은 군무처럼 난입하는 게 아니었다.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자유로운 몸짓이다.

”You brought me to sky so fast

I fly so fast that I can’t see you.“

다섯이 차례를 맞추어 서자, 드디어 군무가 펼쳐졌다. 다섯은 발바닥을 바닥과 비비면서 천천히 앞으로 이동했다.

기차가 줄지어가는 듯하지만, 기차처럼 빠르진 않은 느린 행진이었다. 멤버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너와 같은 높이로 너와 눈 맞추러

하늘이 아니라 너에게로.“

급작스레 찾아온 격한 안무.

멤버들이 팔과 다리를 쭉쭉 펴면서 과격한 움직임을 보인다. 어린아이가 신나서 뛰는 것처럼 펄쩍펄쩍, 그리고 그게 끝나자마자 네 명의 멤버가 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핑그르르 돌면서 중앙에 조아라가 자리했다.

“야 아라야!”

성필이 웃으면서 그녀를 불렀다.

조아라가 움찔했다.

“사람 잡아먹겠다! 그거 좀 뛰었다고 이 악물어? 숨찬 거 다 보인다 야!”

아!

조아라는 순식간에 얼굴을 풀었다. 흘러내리는 듯한 미소와 함께, 그녀가 허세를 담아 노래했다.

”우리 대회엔 포도알이 없어

지껄이며 몰려드네 취객이

재료는 없어 물지 거품만.“

조아라의 전반부 가사.

그에 따라 멤버들도 짐짓 강한 척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물론 계속 중앙에 조아라를 두고서.

‘이게 이 곡의 특징.’

각 파트마다 멤버들이 주인공이 된다.

중앙에서 노래하며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다. 그동안 다른 멤버들은 어디까지나 주변부다.

마치 래퍼들의 싸이퍼처럼, 자신의 차례가 되면 중앙으로 나오는 모양새였다.

예시를 찾자면, 소녀연맹 데뷔곡인 ‘아니’의 리볼버 파트를 곡 전체로 확대한 것이었다.

‘일반적인 아이돌 곡과 달라.’

하모니와 파트 배분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멤버들은 분절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성필로서도 이건 도전이었다.

이렇게 할지 말지, 뺄지 말지, 넣을지 말지, 혼자 손톱을 씹으며 고민하다가 A&R팀에게 닦달받기도 했었다.

결정 못 하겠으면 룰렛이라도 돌리라고. 안무가분들 손가락만 빨면서 기다리는 중이시라고.

하지만 결국엔 스스로 결정했다.

넣기로 말이다.

‘이 방법은 멤버 전체의 개성이 드러난다.’

다르게 말하면, 개성이 비교된다.

확연히 더 눈에 띄는 멤버가 생길 수 있다. 그건 곧 퍼포먼스가 주는 임팩트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까딱 잘못하면 퍼포먼스가 좋은 부분과 안 좋은 부분으로 나뉠 수도 있단 뜻이다.

하모니가 없으니, 멤버들의 개성이 서로를 잡아먹으려 한다.

그래서 도전이었다.

그리고 그 도전은.

‘성공이다.’

역시, 할 수 있었다.

미숙했던 과거의 소녀연맹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설하는 보컬만 두드러지고, 조아라는 춤만 두드러지고, 다른 이들은 썩 눈에 띄는 퍼포먼스가 없고, 이런 식으로 불균형적인 임팩트 발산이 이어졌겠지.

하지만 소녀연맹은 총 다섯 번의 곡을 거치며 자신들만의 매력을 가다듬었다.

멤버들의 개성은 서로를 잡아먹지 않는다.

잡아먹지 못한다.

삼키기엔 서로가 너무 크게 빛나니까.

‘힘들게 투쟁해왔던 3년이 없었다면 빛을 발하지 못했을 퍼포먼스…….’

성필은 현재의 그녀들에게서 과거를 겹쳐보았다.

‘아니’의 하이라이트인 리볼버 파트.

멤버들이 리볼버 실린더처럼 포지션을 회전하며, 중앙에 섰을 때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도록 하는 퍼포먼스.

그때의 멤버들은 멋졌고, 그랬기에 데뷔를 허가했지만, 압도적으로…….

‘지금이 훨씬 대단해.’

조아라의 전반부 가사가 끝나자 곡이 1절 하이라이트에 들어섰다.

자유롭게 끼를 발산했던 건 놀이라고 외치듯이, 가벼워 보이지만 엄격한 군무가 펼쳐졌다.

팔과 다리의 아이솔레이션을 짧게, 극도로 활용한 파도 같은 몸짓이다. 그러면서 크게 뻗는 다리와 팔은 보는 사람에게 시원한 쾌감을 선사한다.

쉽고 가벼워 보이지만, 추는 사람에겐 큰 체력 소모를 요구한다.

이 체력 소모를 커버하는 건, 멤버들의 파트 퍼포먼스가 상대적으로 느슨해지는 안무 구조다.

[항상 그려왔던 드림이야이야―!]

마치 놀러 왔다는 듯이 무대를 자유롭게 누빈다. 하이라이트 안무는 나란히 줄을 맞춰 추지만, 그 움직임은 축제의 군무처럼 느슨하다.

[멈추지 않는 드림이야이야―!]

하이라이트 안무가 끝나자마자 조아라가 다시 폼 잡고 섰다.

조아라가 중앙에 가만히 서서 폼 잡는 동안, 멤버들은 박자에 맞춰 칼 같은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조아라를 중심으로 회전하며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수줍어해! 아까 가오 잡았던 거 떠올리면서 부끄러워해!”

조아라는 진짜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 허세 좀 부려 봤어

진심 좀 말해 볼게 두려웠어.”

“아하하하핳!”

성필이 진심으로 웃자 조아라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네가 날 우러러봐

마주 않고 돌고 싶어

but 나는 너의 영웅이니까

네가 나를 부르니까.”

멤버들이 놀리듯이 조아라와 꼭 붙어 어깨를 으쓱인다. 그녀들의 시선도 장난기를 가득 담고 조아라를 향해 있다.

조아라는 양옆의 신아름과 리카의 어깨에 손을 올리…….

“으하핳!”

……올렸는데, 리카의 키가 더 커서 조아라가 우스운 모양새가 됐다.

그대로, 조아라는 노래를 이어간다.

수줍음과 용기가 돋보이는 표정으로.

“그게 나도 좋으니까

이번엔 위가 아닌 아래에서

너와 같은 곳에 서볼게.”

조아라가 빙글 돌며 포메이션의 외곽으로 빠졌다. 빠지며 그녀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아저씨 진짜 죽었…….”

그 말을 끝낼 새는 없었다.

끝에 서 있던 백설하가 끝으로 다가오는 조아라와 어깨동무했다. 백설하는 조아라의 어깨를 팔로 크게 감싸곤 종종걸음으로 무대를 질주했다.

둘의 뒤에 선 세 멤버들은 과장되게 놀란 제스처를 취하며 멈췄다.

“그날을 상상하곤 해

도전을 포기한 삶으로.”

백설하의 흥겹던 걸음이 느려졌다.

이윽고 봄날의 산책처럼 느긋해졌다.

백설하는 손에 앉은 나비를 떠나보내듯 조아라를 놓아주었다.

“나는 아이돌이었지

노래를 불렀었지

내 꿈의 주인은

낮이 아닌 밤이었겠지.”

뒤에선 멤버들이 고개를 저었다.

“관객 하나 없는 들판에

홀로 소리치는 나를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영원히 기다리는 삶을.”

포메이션 끝에 서 있던 백설하가 천천히 중앙으로 나왔다. 백설하가 뒤에 선 멤버들을 한 명씩 지나칠 때마다, 멤버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젠 노래해 내 목소리가

너에게 닿을 걸.”

한 호흡의 틈.

“알아―.”

그리고 터져 나오는 감미로운 미성의 퍼레이드.

백설하의 노래는 폭발하듯이 하이라이트 파트까지 이어졌다.

[오(Oh) 너 오 너, 마이 드림이야이야!]

“행복하게!”

[항상 꿔왔던 꿈이야!]

멤버들이 회전하며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등을 보이며 벽을 만들었다.

네 명의 벽이 무대 가장 안쪽을 가렸다.

“히어로 랜딩!”

리카가 벽을 부수고 나타나 바닥에 주먹을 대며 안착했다.

고개 숙인 리카가 천천히 얼굴을 보였다.

그리고 외쳤다.

“영웅 두둥등장!

날 기다린 걸 알아 슝!

Distant―Yet―Mysterious…….

……하고 싶어!”

영웅 리카는 다른 멤버들의 안무에 비해 확연히 혹독하다. 그녀만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만 같다.

좌충우돌.

그 표현이 들어맞았다.

“나는 없어 널 구할 초능력도

바로 날아갈 Mk.1 슈트도.”

리카와 나머지 넷의 시간이 천천히 맞물려간다.

“그래 난 쩌리인 걸

그래도 꽤 멋진 쩌리라구!”

엇갈리던 시간이 하나가 되어, 리카와 멤버들의 안무가 일치하기 시작했다.

홀로 분투하며 달려 나갔던 영웅은 이젠 다른 이들과 걸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 날아갈 순 없어도

달려가 꽤 가까운 거리라구.”

리카는 신아름과 등을 맞대었다. 둘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보곤 어깨를 으쓱인다.

그러곤 리카만 정면을 본다. 그녀 특유의 의기양양하고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보잘것없는 나지만

실수투성이 이런 나지만

그래도 Hero야 난!”

퍼포먼스가 멈추었다.

끝, 이 아니다.

곡은 이어지고 있다.

어느새 가장 외곽에 서 있던 장하양은 느릿한 걸음으로 중앙을 향했다.

아주 느렸다.

한 소절 부르는 동안 절반도 오지 못했다. 그녀는 천천히 걸으면 노래를 부른다.

그녀의 노래는 진솔한 고백과 사람들을 향한 응원으로 가득했다. 그렇기에 노래가 아닌 시(詩)에 가까웠다.

자신의 마음을 시로 읊조린다.

다른 멤버들은 뒤를 향해 서선 등만 보인다. 등돌린 이들의 사이를 장하양이 가로지른다.

이윽고 중앙에 선 장하양이 엄지로 뒤를 가리킨다. 그녀가 가리킨 뒤엔 소녀연맹이 있다.

그와 동시에 멤버들이 앞을 향해 돌고, 나란히 어깨를 맞댄 채 씩 웃는다.

시가 끝나고.

장하양은 소매에 숨기고 있던 보라색 튤립을 꺼내어 입술에 가져다 대곤, 정면을 향해 던졌다.

[항상 꿔왔던, 꿈이야.]

리듬 기타의 사운드가 줄어들어 가며, 곡이 끝을 맞이했다.

짝짝짝.

박수는 성필로부터 나왔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도 개의치 않고 박수만을 보냈다.

그는 항상 이 퍼포먼스의 마지막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땐 당연히 울었고, 이후로 열 번 정도 더 울었다.

그나마 익숙해져서 눈물이 맺히는 정도로 끝난 것이다.

“최고다 얘들아…….”

장하양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리카와 신아름도 장하양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성필이 이렇게 울 때마다 다들 기분이 좋았다. 처음엔 멤버들도 모두 울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계속되자 조금 떨떠름한 이들이 생겨났다.

조아라와 백설하였다.

조아라가 속삭였다.

“쌤, 아저씨 우리 퍼포먼스 점검할 때는…….”

“으응…… 저렇겐 안 우셨는데…….”

성필의 눈물의 근원은 아이돌 감수성이다. 오랫동안 쌓아온 그의 심미안이 일반인 이상의 감동을 가슴으로 가져다준다.

당연히 성필은 백설하의 프로듀싱 때도, 조아라의 프로듀싱 때도 울었다.

백설하의 프로듀싱은 대중성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한두 달 안에 1억 스트리밍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첫 ‘우리들의 프로듀싱’이라 성필에겐 감회가 남달라, 데뷔 무대 때는 탈수 직전까지 울었더랬다.

조아라의 프로듀싱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한 작품성과 예술성에, 성필은 데뷔 무대를 보곤 말문이 막혔었다.

이렇게나 성장했구나.

입에 주먹을 넣고 오열할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그건 데뷔 무대나 특별한 성과를 거두었을 때 정도였다.

그런데 성필은 장하양이 프로듀싱한 이번 퍼포먼스를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우리가 부족했던 걸까…….”

“얘들아, 내가 왜 이렇게 자주 우는지 궁금해?”

“아저씨 우리 얘기 들었어요?”

“네가 들으란 듯이 말하는데 어떻게 못 들어.”

“그래서 왜 이 곡만 들으면 우는데요. 아니다, 알겠어. 내가 옛날부터 심증이 있었어. 아저씨가 하양 언니 편애한다니까? 하양 언니도 느끼죠?”

장하양이 수줍게 웃으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 성필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언니가 그렇게 반응하면 안 되죠?! 뭔 친구들한테 첫 연애 들킨 사람처럼 반응해요?!”

“히.”

“히?!”

“주목.”

“주목하게 생겼어요?”

“아라쨩 조용 좀 해!”

리카가 일갈을 날리자 조아라는 얼이 빠졌다. 아니, 아예 바짝 쫄았다. 리카가 이런 적은 거의 처음이었다.

조아라는 자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선을 넘었나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모르겠다.

“아타시(나)는 박 이사님이 왜 매일 사탕 뺏긴 어린애처럼 질질 짜는지 알고 싶단 말야!”

“어른한테 질질 짠다고 하면 안 되지 리카.”

“저희는 실버타운 메이트잖아요! 친구예요!”

“난 가로 엔터 이사야. 극존칭 안 써?”

“그 컨셉 계속하는 거였나요?!”

“내가 총괄 감독을 맡긴 했지만, 그래서 자화자찬이 되어버리지만, 그래도 이 곡의 전체적인 짜임새는 정말…….”

“무시했다?!”

“감동적이야.”

감동적이다.

멤버들은 그 표현에 동의했다.

최초 컨셉 기획을 보고, 곡을 듣고, 가사마저 붙었을 때, 멤버 모두 눈시울을 붉혔었으니까.

평소에도 ‘나 이사님(나일강 이사님)’이란 별명으로 터진 눈물샘을 과시하는 성필이다.

그런데 요즘 성필은 조금 심하다.

“비밀 애인인 하양 언니가 맡은 곡이라 감회가 새로우신 거네요…….”

성필은 가로 엔터 전서구인 리카에게 떡밥을 던져주지 않았다.

“내가 매번 감동을 먹는 이유는, 내가 너희들의 1호 팬이기 때문이야.”

“……!”

1호 팬.

그렇다.

성필은 모든 멤버들의 첫 번째 팬이었다.

“에, 아니지 않나요? 아라쨩 1호 팬은 한 이사님인데요?”

“그럼 1.5호 팬으로 해줘.”

“의외로 질투가 있으시네요! 아라쨩 생각은 어때?”

“한의사님이랑 아저씨가 결투를 펼쳐서 살아남은 쪽이 1호 팬 해.”

“한쪽이 제거되잖아! 남자들이 아라쨩을 쟁취하려고 피 흘리는 걸 보고 싶은 거야? 너무해!”

“그게 좋은 건데?”

“악녀……!”

“그리고.”

성필은 둘의 대화에도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소녀연맹의 첫 번째 팬이기도 해.”

장하양이 프로듀싱한 소녀연맹의 이번 곡.

“송 포 피플(Song for PEOPLE).”

이 노래는 인민이(PEOPLE)들을 위한 팬송이다.

그러니 팬에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팬을 위해 만든 노래니까, 그 마음을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리…….”

“나일강이 또 범람했다!”

성필은 울음을 간신히 삼키곤 이야기를 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들으면 그냥 ‘틴팝’이나 ‘버블검 팝’이겠지만, 인민이들한텐 전혀 달라. 한 명 한 명을 향한 세레나데잖아. 나는 정말, 너희들이 쓴 가사를, 음미할, 때마다…….”

“2차 범람이다!”

멤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성필을 위로해주었다. 누구 할 것 없이, 그녀들의 얼굴엔 만족감이 서려 있었다.

“지난 3년 5개월이 눈앞을 지나가면서, 어흑…….”

“아니 진짜 너무 자주 우는 거 아니야?”

“남자는 나이가 들면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서 감성적으로 변한대!”

리카의 설명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나이긴 하지.

“아니야 나 남성 호르몬 안 줄어들었어……. 수치는 정상일걸…….”

성필이 반박했다. 그 역시 자존심이 있다.

“수치가 얼만데요?”

장하양이 묻자 조아라가 빈정댔다.

“아저씨가 걍 한 말이겠죠. 호르몬 수치 같은 게 어딨어요.”

“회사 사람들 건강검진하잖아. 우리도 그렇고. 그때 재보는 거 아니야?”

“……아저씨 진짜예요?”

“그걸 내가 왜 너희한테 말해줘야 해?”

“진짜인가 보네. 얼만데요? 안 말해주면 한의사님 서랍 뒤져서 찾아볼 거예요.”

“써 있을 리 없잖아.”

“그럼 아저씨 호르몬 수치 높단 건 허세로 볼 수 있겠네요.”

“끄흑……!”

놀림에 견디다 못한 성필이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말릴 새도 없었다.

“…….”

조아라가 황망히 있자 멤버들이 눈치를 주었다.

“……알았어요, 사과할게요.”

잠시 후 성필이 아무 일 없었단 듯 다시 들어왔다.

“얘들아 그럼…….”

“아저씨 미안해요. 아저씨 놀리는 게 아무리 재밌어도 남성성을 훼손해선 안 됐는데. 자존심 긁어서 미안해요.”

“미안한 거 맞아? 그리고 딱히 상관없어.”

“아, 그래요?”

“그 호르몬 수치인지 뭔지,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러우니까 한 이사님한테 들어.”

성필이 리카처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새 나가서 확인하고 왔어요? 진짜 상처받았나봐.”

나일강이 또 범람하기 전에 조아라가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 신아름이 꼬집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뭘 더 했다간 주먹으로 얻어맞을 수도 있다.

“암튼, 내가 판단하기로 퍼포먼스는 완성에 이르렀어.”

“뭐 별로 어렵지도 않았으니까요. 걍 중간중간 힘들 뿐이고.”

“네 자랑은 듣고 싶지 않아.”

조아라가 시무룩했다.

성필을 너무 놀린 모양이다.

“자랑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니까.”

“……보통 이런 대화는 하양 언니랑 아저씨가 하는 건데. 기분이 묘하네.”

“드디어 이틀 뒤가 뮤직비디오 촬영이야. 다들 잘할 수 있지?”

멤버들은 아까까지의 장난기를 모두 지웠다.

남은 건 결연함이었다.

“네!”

일심동체가 되어 외쳤다.

이번 프로듀싱엔 흔들림이 없었다.

백설하, 조아라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메인 프로듀서인 장하양은 자신의 신념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거목을 받치는 뿌리처럼, 그 굳건함은 멤버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게다가 총괄 프로듀서인 성필이 모든 면에서 눈물 흘릴 만큼 감동했다.

이는 명백한 성공의 증표이다.

“하양아, 점검 끝내기 전에 마지막을 장식해줘.”

장하양은 고개를 끄덕이곤 중앙에 섰다.

“내가.”

그녀의 눈에 다시금 비장함이 깃들었다.

“하늘에 서겠다.”

소녀연맹, 컴백까지 약 두 달.

* * *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난 바로 다음 날.

신아름은 음방 생방송 시간에 맞추어 방송국에 도착했다. 아카이브의 유경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신아름의 곁엔 민경섭이 함께였다.

신아름을 혼자 보낼 순 없었기에, 라는 이유는 아니었다. 민경섭 본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말이다.

‘대스타 아름이를 혼자 방송국으로 보낼 순 없지.’

신아름이 ‘경민이 보고 싶어서 같이 가려는 거잖아요’라고 하자.

‘나도 가면 안 될까……?’

민경섭이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그 드문 모습을 보고 멤버들은 살짝 당황했다.

‘경섭 오빠 SMS 엔터 간첩 아니야?’

‘포유 때부터 유독 경민 씨를 좋아하긴 했지.’

‘그럼 경섭 오빠 캌첩(아카이브 간첩)이야?’

‘침 뱉는 거 같은 어감이네.’

어차피 매니저 한 명과 같이 가야 했으니, 신아름은 기꺼이 민경섭에게 동행을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온 방송국.

신아름은 생방송 무대를 직접 보았다. 아카이브의 신곡인 ‘칠링(Chilling)’은, 소녀연맹이 케이콘에서 선보여야 할 과제이기도 했다.

‘오늘 온 건 경민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직접 ‘칠링’을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영상으로 퍼포먼스 비디오를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건 차이가 확연히 난다.

특히 신아름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퍼포먼스를 직접 본 신아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동작들은 겉보기엔 멋지고 화려한데, 하나하나 뜯어보면 관절에 무리를 주도록 짜인 안무가 몇 개 있다.

‘케이어스 데뷔곡 같아.’

‘오토마타’에서 영감을 받았다더니, 차라리 케이어스의 데뷔곡인 ‘카오스’에 가깝다. 오토마타는 혹독할지언정 신체에 과부하를 입히진 않는다.

그건 그렇고, 확실히 꽤 칼을 갈았다. 중간중간 섞인 고난도 안무는 오토마타를 의식한 게 분명하다.

신아름은 한 안무에서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한 번의 상승 도약 이후, 허리를 뒤로 꺾은 채 착지한다. 저러면 착지 충격이 척추를 압박하여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저건 진짜 ‘건강을 깎아서’ 추는 춤이다.

한 번 허리를 다쳐 입원한 적이 있던 신아름으로선,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저걸 6주 동안 계속 추는 거야?’

아니, 거기에 더해 무대에 서기까지 수천 번을 추었을 것이다.

연습 때는 손속을 두긴 했겠지만, 허리에 누적된 피로와 충격은 꽤 크겠지.

‘정말…… 혼을 태우는구나.’

신아름은 옆을 힐끔 보았다.

춤을 춘 적이 없는 민경섭은 아카이브의 춤을 보고 마냥 넋이 나가 있었다.

그래, 저건 놀라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퍼포먼스니까 이해한다.

생방송이 끝나고 대기실로 찾아가려고 하자, 민경섭이 말했다.

“친구 만나러 가는 거잖아. 난 밖에서 기다릴게.”

“경민이 안 보셔도 돼요?”

“무대를 직접 보고 싶었던 거야. 보니까 알겠다.”

“뭘요?”

“너희한테 시키면 안 되겠어.”

“……네?”

“그런 춤이잖아. 직접 보니까 확신이 들어.”

케이콘에서 벌어지는 아카이브와 소녀연맹의 무대 바꾸기.

아카이브는 ‘오토마타’를.

소녀연맹은 ‘칠링’을 춘다.

민경섭은 영상으로 ‘칠링’을 보았겠지만, 마지막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 소녀연맹이 저 퍼포먼스를 할 수 있을지. 해도 되는지.

“완벽히 익힐 시간도 없겠고.”

“……뭐.”

신아름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건 나중에 정하는 거고요. 그럼 제가 사인이라도 받아드릴게요.”

“그럴 필욘…….”

“그 정도는 괜찮아요.”

신아름은 아카이브의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 문패를 확인하고 노크하려 할 때, 한발 빠르게 문이 열렸다.

유경민이었다.

“아름아, 왔구나.”

유경민이 대기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응.”

“무대 봤어?”

“어. 1위 축하해.”

유경민은 겸손 떨지 않고 웃었다.

“고마워.”

“기분이 어때?”

“음…….”

웃다가, 유경민은 갑자기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신아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해한다.

아직 1위가 감격스러울 시기다. 게다가 ‘포유’ 시절엔 음방 1위란 꿈속의 꿈이었으니, 현재의 성과가 더욱 꿈 같겠지.

“야, 좋은 날에 왜 울어.”

신아름이 유경민의 어깨를 짚으며 위로했다.

“아…….”

유경민이 얼굴에서 손을 천천히 떼어냈다.

신아름은 당황했다.

“네가 전에 한 말이 백번 옳아.”

유경민은 울고 있지 않았다.

다시금 드러난 그녀의 얼굴은 처음처럼 웃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웃음은 기쁨에서 비롯된 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무대 위의 아이돌이 가면처럼 걸고 있는, 습관화된 미소였다.

“내가 전에 한 말?”

“응. 46만 장을 팔든 뭘 하든 그저 그렇다고 했잖아. 실제로 그러네.”

“어……?”

“아무런 감흥이 없어.”

전에 두 사람이 놀러 갔을 때, 유경민이 ‘46만 장이나 팔면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정상에 서서 본 풍경은 어떠냐고.

신아름은 아무렇지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겠는가. 46만 장은 기적적인 수치다. 그 성적은 현재 걸그룹 초동 TOP5 안에 든다.

신아름은 부정했었지만, 유경민이 소녀연맹을 정상이라고 표현한 건 옳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 있을까. 그냥 부끄러워서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어차피, 여기서 또 천정부지로 올라갈 거잖아.”

데뷔 1년도 채우지 않은 신인 그룹 아카이브.

미니 1집 ‘칠링’.

초동 판매량 514,4**장.

“소녀연맹이 두 번째 앨범 판매량이 2만 장이었지? 세 번째 앨범은 12만 장이고. 그럼 우린 300만 장 정도 팔까?”

그리 말한 유경민이 ‘크흐흨’ 웃었다.

“농담이야.”

신아름이 당황한 이유가 있다.

유경민은 진심으로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50만 장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말마따나, 어차피 계속 천정부지로 오를 테니까.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다.

마치 ‘아라베스크’를 준비하던 소녀연맹처럼, 최소한 이전 앨범보다는 성공하리란 걸 확신한다.

더 성공할 걸 알기에, 감흥이 없는 것이다.

여전히 감정 없는 눈빛으로, 유경민은 농담을 이어갔다.

“300만 장이나 팔면 WTP 선배님들이랑 동급이 되어버리잖아. 아, 그래도 걸그룹 밀리언셀러는 가장 먼저 뚫고 싶긴 해.”

밀리언셀러.

걸그룹의 꿈.

유경민은 그걸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에 담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신아름은 헛웃음 짓지도 않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돌 관련 커뮤니티나 SNS에서 흔히 보이는 단어.

‘4세대.’

신아름은 새로운 시대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나도 마스크 쓰고 다녀야겠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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