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9화
솔로 뮤지션 우효민의 첫 번째 곡 ‘러브 레스큐’.
왠지 모르겠지만, 돌고래를 타고 다니는 사랑의 응급 구조 요원 우효민은 지루한 일상에 빠진 사람들을 구한다.
흔해빠진 일상에서 기적을 찾는 이야기.
‘콜 미 설튼리’는 그 이야기의 연상선이다.
[날 부르기 꺼려지니?
No No 언제든지 보내줘 message!]
일상에 지칠 때는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달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보낸다.
[비밀로 키운 너의 꿈을
되찾을 마지막 대역전을
노리고 있어!]
뮤직비디오 속 우효민은 ‘러브 레스큐’ 때와는 달리 돌고래를 타지 않는다.
하늘을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교실 창문을 부수고 난입하지도 않는다.
철저하게 무관심한 인파 속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외친다.
[네 품에 움츠러든
어릴 적 너의
마음을 울렸던 단어를
꺼내러 찾아왔어!]
철저한 무관심과 짙은 무채색 속에서, 그녀만이 활기차고 밝다.
과하게 번쩍거리는 빛과 어울리지 않는 디지털 그래픽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그렇게 전단지를 뿌리던 그녀는, 누군가와 부딪쳐 품에 안고 있던 것을 우수수 쏟아버린다.
무릎을 꿇자 밝은 음악이 멈춘다.
앵글이 점점 그녀와 가까워진다.
누군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묻는다.
[그만할까?]
그만할까.
그 목소리는 김명운의 것이었다.
갑자기 그 말을 녹음할 때가 퍼뜩 떠올랐다. 떠올림과 동시에, 김명운의 머릿속에 ‘그만할까’란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1위를 차지하여 눈물을 터뜨리는 우효민을 보고, 그때가 떠올랐다.
김명운은 떨리는 손으로 폰을 꺼내었다. 그리고 성필에게 문자를 넣었다. 이미 보고 있겠지만, 이 사실을 전해주기 위해서.
* * *
“소유야!”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매니저가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진소유는 매니저와 스태프들의 부름을 무시했다. 그리고 메이크업 테이블 위에 올려둔 폰을 들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게 있다.
* * *
퇴근 시각이 약간 지났다.
휴게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성필은 익숙한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자 ‘소유’라는 이름이 보였다. 그는 그 이름을 엄지로 꾹 눌렀다.
[소유: 안녕하세요 유스 여러분. 오랜만에 ‘세이’로 인사드립니다. 응원하러 와주신 분들, 방송을 보며 응원해주신 분들, 마음으로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덕분에 솔로 데뷔 첫 음방 1위를 달성했습니다. 저는…….]
성필은 진소유에게서 온 ‘세이’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팔에서 절로 힘이 빠져, 들고 있던 폰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이미 음악 방송은 끝나고 광고가 송출되는 중이었다. 휴게실에서 결과를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성필, 유하음, 민경섭, 신아름.
“2주 차…….”
초동 판매량이 집계된 후 선 첫 음악 방송.
즉, 음반 점수가 포함된 승부에서.
“……첫 번째 음방은 아쉽게 졌네.”
유하음은 미래가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아쉽게 졌다.
그래, 아쉬웠다.
2위였으니까.
“아직 음방 5개나 남았잖아. 그중 한두 개는 효민이가 딸 수 있겠지?”
유하음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응답은 없었다.
우효민의 매니지먼트 스케줄을 설계했던 민경섭도. 음방 무대에 수없이 올라보았던 아이돌 신아름도.
이 업계에 잔뼈가 굵은 성필도.
유하음의 희망적인 예측에 맞장구칠 수 없었다. 그러면 더욱 비참해질 뿐이니까.
“설마 효민이는…….”
유하음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이 음방이 나오는 방송국 예능에…….”
“어. 가장 많이 출연했어.”
즉, 우효민이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오늘이었다. 오늘 이 음악 방송에서, 극대화된 방송 출연 점수와 함께 진소유와 붙어야 했다.
그런데 져버렸다.
앞으로 음악 방송이 다섯 개가 남았다고? 오늘 졌으면, 이후의 다섯 개는 안 봐도 뻔하다.
방송 출연 점수가 가장 높은 음방에서 져버렸는데, 방송 출연 점수가 이보다 낮은 음방에선 어떻겠는가.
음반, 음원, 투표에서 모두 밀렸다.
그러니, 우효민에게 남은 기회는 없다.
“저는 연습하러 가볼게요.”
신아름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녀의 뒤를 따르듯 민경섭도 말없이 사라졌다.
민경섭은 과거 우효민이 속했던 그룹 ‘포유’의 팬이었다. 비록 포유의 멤버였던 유경민을 최애로 두고 덕질을 했으나, 포유에도 범상찮은 애정이 있었다.
그런데 포유의 리더가 첫 전장에서 무참하게 꺾였으니 기분이 안 좋을 만도 하다.
심지어, 그 포유의 리더인 우효민은 이제 가로 엔터의 식구였다.
유하음은 지독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당황했다. 이건 그가 파악해왔던 평소 가로 엔터의 모습이 아니었다.
“분위기 장난 아니다……. 꼭 화난 거 같아.”
“보기엔 저래도, 크게 상심하진 않았을 거야.”
성필의 답에 유하음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소녀연맹의 역사는 케이어스와의 대립이었다고 봐도 무방해.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는 끊임없이 계란으로 바위를 쳐왔어.”
때로는 짜릿한 역전승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패배였었다.
그때마다 가로 엔터는 느꼈다. 대형 기획사가 쌓아온 이미지의 힘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들의 자본과 프로듀싱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국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는 이들은 이름난 대기업으로 취직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음악을 가장 잘하는 이들은 어디로 갈까.
KS 엔터다.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가로 엔터는 수십 년간 노하우를 응축해온 아이돌 문화의 정수와 싸움을 거듭해왔다.
그렇기에 안다.
“KS 엔터를 꺾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건 곧 경천동지(驚天動地)다.
가로 엔터에게뿐만 아니라 아이돌 팬들과 대중에게도 그러하다.
소녀연맹의 힘은 소녀연맹 본인들뿐이지만, 케이어스는 아니다. 케이어스의 뒤에 버티고 있는 KS 엔터가 힘을 보태준다.
“케이어스는 데뷔한 순간부터, KS 엔터의 이미지와 힘을 그대로 물려받았어.”
유하음은 그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
회의 때마다 성필이 피를 토하며 역설했던 ‘브랜드 가치’다.
성필이 우효민, 웨이퍼센트, 카오틱 에너지의 성공으로 어떻게든 손에 쥐고자 하는 것 말이다.
‘그게 없으면 가로 엔터는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지 못해.’
케이어스는 혼자가 아니다.
그녀의 뒤엔 PTR―17이, 븨이에스와 부테스가, 그리고 다키스트와 수많은 뮤지션들이 있다.
그들이 증명해온 KS 엔터의 가치가 케이어스의 힘이고 아군이다.
그렇기에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와만 싸워온 게 아니다. 그 부족한 힘으로 KS 엔터 전체와 싸워온 것이다.
‘성필이가 효민·웨이퍼센트·카오틱 에너지로 가로 엔터를 성장시키려는 건 회사만을 위한 게 아니란 건가.’
그건 곧 소녀연맹의 힘이 된다.
나머지 세 아티스트로 쌓은 가로 엔터의 가치를 소녀연맹에게 투사한다.
넓게는 가로 엔터의 성공을 위해.
좁게는 소녀연맹의 최종승리를 위해.
하지만 그전까지는 소녀연맹 홀로 지금까지처럼 싸워야 한다. 버티고, 견디고, 한없이 작은 힘으로 KS 엔터와 부딪친다.
그리고, 우효민도.
“게다가 케이어스는 KS 엔터의 가치를 받은 데 더해서, 스스로가 가치를 창출해냈어. 현재의 케이팝 씬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업적을 이뤄냈지. 효민이는 그중 한 명과 싸워서…….”
비등한 성적을 얻어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우효민과 김명운은 그리 생각하지 않겠지.
성필이 1위를 노리라고 했던 건 단순한 정신론이 아니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이겨서 승자의 영광을 누린다, 그런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효민의 음방 1위는 이음 엔터의 성장이고, 곧 가로 엔터의 성장으로 직결된다.
커다란 자본을 부어 이음 엔터에 투자한 가로 엔터는, 최대한 빠르게 이음 엔터가 성장하길 바란다.
그런데 거기에 제동이 걸렸다.
“3주 차에 1위를 하는 건…….”
유하음은 스스로 말하고도 웃음이 나왔다.
“불가능하겠지.”
“그래, 이번 주인 2주 차에 요행이든 뭐든 좋으니 1위를 얻어내지 못하면 다음 기회는 없어.”
“사실상 여기서 끝인 거구나.”
3주 차의 싸움은 조건이 훨씬 가혹하다.
진소유가 2주만 활동한 건 이유가 있다. 3주 차 때는 1위할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3주 차엔 음반 점수를 기대하기 힘들다. 앨범을 살 사람은 초동 판매량으로 집계되는 발매 1주 차에 전부 샀을 테니까.
게다가 음원도 순위권 하락을 시작하여, 3주 차엔 TOP10에서 일찌감치 물러갔을 것이다.
팬 투표 화력도 줄어든다.
그렇다면 방송에 출연할 이유도 없다.
진소유가 3주 차까지 활동했다면, 1위 할 가망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건 우효민도 마찬가지다.
음반 점수 없이.
방송 점수 없이.
투표 화력이 줄어든 상태에서.
“하락한 음원 순위론 어떻게 할 수 없을 테니까.”
우효민보다 1~2주 느리게 컴백한 이들이 단물을 먹겠지.
음반 점수와 방송 점수 없이 1위를 차지하는 건, 음원으로 상한가를 치는 인기 뮤지션에게도 힘든 일이다.
국민 모두가 아는 가수의 곡이 순위에 올라와도, 음방에선 패배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 아이돌은 황송한 듯 패배한 가수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겼지만, 상대 인기 가수는 음반·방송 점수가 없다시피 했으니.
음원만으로 음방 1위는 그야말로 꿈으로만 꿀 수 있는 꿈이다. 달에 한 번 정도 나온다 치면, 일 년에 10명밖에 그러한 사례가 없는 것이다.
아니, 일 년에 10명도 많다.
“효민이가 3주 차에 1위를 하려면, 월간 차트 1위라도 걸지 않곤 불가능하겠지.”
월간 차트 1위.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곡.
즉, 1년에 12명의 뮤지션만이 거머쥐는 영광.
죽을 때까지 월간 차트 1위에 이름을 걸어본 뮤지션이 드물다.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월간 차트 1위는 차원이 다른 업적이다.
가수의 목표이자 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리라.
월간 차트 1위는 대부분은 인기 가수다. 혹은 영화나 드라마의 OST이거나. 걸그룹이 월간 차트 1위를 하는 경우는 1년에 한두 번이 평균이다.
그것도 전부 유명 걸그룹이다.
“기적일 거야, 음방 1위를 하면.”
“……너 이음 엔터랑 얼굴 봐? 내일 아님 나중에?”
“봐야지. 당장 오늘.”
“네 꼴이 볼만하겠네. 무슨 얼굴로 있어야 하냐.”
“말했잖아.”
“뭘?”
“소녀연맹은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었어. 나도 마찬가지고.”
“어떡하는데?”
“다음을 기약해야지.”
마지막 대역전을 노리고 있어.
‘콜 미 설튼리’의 가사다.
소녀연맹 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싸워왔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 다음이 안되면 다다음에.
최후에 승자로 서기 위한 지구전이다.
이번 일은, 이음 엔터도 그 싸움에 들어선 것에 불과하다. 그럴 텐데…….
“역시 처음이니까, 분하긴 해. 이번엔 정말…… 자신이 있었는데…….”
유하음은 성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친구가 슬퍼하는 걸 똑바로 보고 싶지 않았다.
“이기기 위한 최선의 수였는데. 그러게, 네 말이 맞다. 어떤 얼굴로 효민이랑 대표님을 볼까…….”
가로 엔터가 축적해온 힘을 발휘할, 매니지먼트의 승부에서도 져버렸다.
그게 끝도 아니다.
이번 우효민의 스케줄은 성필과 민경섭이 무리해서 잡은 것이다. 아직 성과도 나오지 않은 우효민을 이 방송 저 방송에 무리해서 밀어 넣었다.
1위 한 번 하지 못할 가수를 말이다.
역풍이 올 것이다.
이음 엔터의 얼굴을 보는 것도 문제지만.
“사장님한테는 뭐라고 사죄해야 할지…….”
성필은 이음 엔터를 가족이라고 했었다.
한 식구가 되었노라고.
그 가족을 믿고 벌인 필사의 도박이 실패했다. 책임은 성필이 져야 하며, 피해는 가로 엔터가 받았다.
“사장님 지금 뵈러 가?”
“……그래야지.”
홍규헌도 사장실에서 음악 방송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재떨이에 담배가 수북이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총괄 프로듀서란 것도 힘드네. 높은 자리니까 마냥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좋을 땐 정말 좋아.”
성필은 휴게실에서 나와 사장실로 향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홍규헌은 한구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다행히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결과를 듣고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면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일 테니까.
“어, 박 이사 왜?”
“사장님.”
성필은 홍규헌의 앞까지 와 허리를 숙였다.
“효민이가 음방 1위를 할 가망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무리하여 효민이의 스케줄을 잡아 가로 엔터의 신뢰에 타격을 가한 것. 이음 엔터에 투자한 자본을 효민이의 이번 프로듀싱에 과도하게 쓰도록 한 것. 죄송합니다.”
“그걸 왜 박 이사가 죄송해하는데.”
“제가 총괄 프로듀서로서 책임을…….”
“승인한 건 나잖아.”
“그렇지만…… 효민이 매니지먼트 계획을 세운 것도 저고, 효민이 프로듀싱에 이음 엔터 차기 그룹에 쓸 자금을 당겨와서 쓰자고 한 것도 저인데…….”
“그걸 승인한 게 나야.”
성필의 얼굴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혼날 걸 각오하고 교무실로 와 죄를 고백한 학생이, 예상치 못하게 선생의 따스한 위로를 받았을 때 같았다.
“한 이사, 그 얘기는 됐어. 오늘 수고했어. 이만 가봐.”
“알겠습니다.”
한구인이 나가자 홍규헌은 성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박 이사, 우효민을 영입한 목적이 뭐였더라.”
“…….”
“박 이사를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로 만들기 위해서, 는 아니지. 그것도 목적 중 하나이지만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야. 박 이사가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가 되는 건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지. 우효민과 웨이퍼센트를 영입한 건, 박 이사 말마따나 가로 엔터의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서 아니야?”
그렇다.
성필은 ‘믿고 듣는 가로 엔터’라는 가치를 창조하려 한다. 그걸 위한 우효민과 웨이퍼센트다.
“우효민 팬들도 알았겠지. 가로 엔터가 진심이라는 걸. 우효민의 곡을 듣고 뮤직비디오를 보면 모를 수가 없어.”
급격한 퀄리티 상승.
“기록은 영원해. 그리고 작품도 마찬가지야. 다른 점은, 작품의 평가는 시간을 거치며 변한다는 거지. 기록은 고정되어 있지만, 작품의 평가는 시시각각 변해. 우효민의 ‘콜 미 설튼리’가 그럴 거야.”
가로 엔터가 만들어낸 기념비가 될 것이다.
“우리의 진심을 미래에 전할 마일스톤이야. 그 시작이며, 선전포고이기도 해.”
“선전포고……?”
“앞으로 가로 엔터의 힘은 이런 식으로 사용될 거라는, 사람들을 향한 선전포고.”
더 뛰어난 작품을 창조해내는 회사.
“박 이사가 최고의 프로듀서가 되는 건 가로 엔터가 최고가 되는 일의 부수적 결과야. 이번 일도 마찬가지야. 1위는 좋은 작품의 부수적 결과이지, 결코 절대적인 목표가 아니야.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로, 우효민의 ‘콜 미 설튼리’는 좋은 작품이야. 가로 엔터의 이미지와 의지를 대표할 만해.”
안다.
성필도 안다.
하지만 경영자인 홍규헌이 이 일을 간과할 순 없다. 그리 생각했다.
우효민이 음방 1위를 따내고 못 따내고는, 그녀의 한해 수입과 직결된 문제이다. 이음 엔터의 매출이 천지차이로 변할 것이다.
그럼에도 홍규헌은 평온했다.
그녀의 눈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고 있다.
“순간의 승패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아. 우리가 하는 건 경기가 아니라 예술이야. 1위를 많이 한 쪽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더 많이 만든 쪽이 최후를 장식해.”
성필의 목울대가 떨려왔다.
감동으로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그리고 고작 이런 일로 박 이사를 비난하기엔, 박 이사가 이룬 일이 너무 많네. 게다가 이번 결과가 썩 나쁜 것도 아니고.”
“저는…… 틀림없이…….”
“뭐어, 박 이사가 굳이 내 매도를 받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게.”
“사장님이 저와 한 ‘영원히 함께야’ 선언을 철회하실 줄 알았어요…….”
“……혼나는 것보다 그게 더 싫어? 진짜 생각도 못 했네. 아니, 기분이 좀 나쁘다. 아니, 아니, 기분이 많이…… 소름 끼쳐…….”
“매도당하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요.”
“나한테 매도당할 시간 있으면 이음 엔터에나 가봐. 인간관계 관리는 프로듀서의 일 중 하나잖아. 가서 우리 애들 달랬던 것처럼 기 안 꺾이게 해.”
* * *
이음 엔터 대표 집무실 겸 아티스트 휴게실.
그곳으로 들어간 성필은 놀라운 광경을 목적했다. 김명운과 우효민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작(對酌)하는 중이었다.
안주는 각자 컵라면 하나씩. 그리고 소주 세 병이 올라와 있었다.
“어, 성필이 왔어?”
퇴근 시각이 지나서인지 김명운은 성필을 편하게 대했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우효민도 활기차게 성필을 맞이했다.
“마침 딱 다 준비가 됐거든요. 드세요!”
우효민이 성필에게 컵라면을 주었다. 성필은 그녀의 곁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면이 딱 익어 있었다.
소주컵에 소주가 돌고, 셋은 건배하곤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캬하!”
우효민이 익숙하게 머리 위로 잔을 털었다. 그리고 또 익숙하게 컵라면을 후루룩 삼키듯이 먹었다.
성필은 살짝 질려서 그녀를 보았다.
“지금 활동기인데…… 대표님 효민이 괜찮아요?”
“아 괜찮지 그럼. 내일 체중계 올라가면 뭐…… 한 500g 늘어 있을까?”
사람을 그램(g) 단위로 표현하니 살짝 거북했다. 성필이 그램을 말할 때는 고기를 살 때나 식품 단백질 함량을 볼 때 정도였으니.
“괜찮아요 괜찮아.”
우효민도 김명운처럼 전혀 신경 안 쓰는 듯했다.
“술이랑 인스턴트는 살이 쉽게 찌는 대신 쉽게 빠지거든요. 아, 저 예전에 폭식했거든요? 진짜 거짓말 안 하고 1kg 늘었다니까요? 하루 만에요!”
하루 만에 살이 1kg이나 늘 리 없다. 저 1kg은 우효민의 뱃속에 들어간 음식이……(생략).
성필은 사회성을 발휘하여 크게 웃고는 컵라면을 찔끔찔끔 먹었다.
운동을 대강대강 한 지도 꽤 시간이 지났지만, 나트륨 가득한 음식은 아직까지 입에 잘 안 맞는다.
“저…….”
술이 몇 잔씩 돌고 성필이 운을 뗐다.
그러자 김명운과 우효민이 흠칫했다. 둘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팍 숙였다.
“죄송합니다앗!”
“미안하다 성필아! 아, 아니, 박성필 총괄 프로듀서님!”
“둘 다 왜 이러세요?!”
성필이 황급히 둘의 고개를 들게 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둘 다 애절하게 말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최고의 프로듀서이신 박성필 이사님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1위를 따내지 못했습니다!”
“대표님은 반말하세요!”
“가로 엔터가 혼을 불살라 잡아준 방송에 모두 나가고도 1위를 따내지 못했습니다!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좋을까요! 뭐든 말씀만 하십쇼!”
“죄가 아니야!”
“가로 엔터가 투자해주신 차기 그룹 트레이닝 비용을 화려하게 태우고도 실패했습니다! 목을 쳐 주십시오!”
“반말하라니까요?! 그리고 그건 제가……!”
“발을 핥으면 될까요?”
“넌 사회생활을 어디서 배운 거야?!”
약 5분간, 성필은 이음 엔터 대표와 유일한 아티스트의 사과를 받아넘겨야만 했다.
둘은 뒤늦게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들었다. 성필이 문책하러 온 줄로만 알았는데, 아닌가?
“후우.”
성필이 한숨을 쉬었다.
한숨 뒤엔 미소가 나왔다.
“우울해하진 않으셔서 다행이에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저희 애들도 데뷔하고 케이어스한테 죽도록 깨졌거든요. 음방 1위는 고사하고 시상식에서 그 흔한 상도 하나 못 받아서요. 그래, 효민이가 흔들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잖아. 다음에도 힘내자.”
그 말에 우효민은 수줍게 웃으며 김명운을 보았다.
“사실, 처음 무대에서 내려올 땐 우울했어요.”
“아, 그랬어?”
“그렇잖아요. 2주 차 첫 번째 음방이 제가 이길 확률이 가장 높았어요. 근데 여기서 졌으니까 앞으로는 다 끝이다 싶었죠. 대표님을 어떻게 봐야 하나 하고 우울했는데, 대표님도 우울해서 아하핳!”
“대표님도?”
“그, 그렇죠…….”
“아니 반말하시라니까요!”
“그치……. 왜냐하면, 이건 프로듀싱의 패배니까.”
성필은 매니지먼트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 도박 수를 던졌다. 그런데 그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선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프로듀싱에서 호각이거나 우위일 것.
“내가 준비한 컨셉과 기획이 KS 엔터에 미치지 못했다. 효민이가 1위를 따내지 못한 건 그런 의미잖아…….”
김명운은 솔직히 자만했노라고 고백했다.
“히트했던 뮤지션도 다음 곡에선 죽 쑬 수 있어. 그건 SMS 엔터에서 거의 20년 동안 근무했던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런데, 나는 효민이의 성공이 상승세만 그릴 줄로만 알았어.”
김명운은 성필을 똑바로 보았다.
“너도, 소녀연맹이 그랬으니까.”
“그 말씀은…….”
“난 나도 모르게 너를 내 라이벌 같은 걸로 여겼는지도 몰라. 포유가 학폭 이슈로 침몰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고, SMS 엔터에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은 상태에서 시작했다면…….”
포유는 분명 소녀연맹을 넘어섰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 분명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자신만만했어. SMS 엔터는 우릴 버렸지만, 가로 엔터가 도와줬지. 자본이 충분해. 이 상태에선 효민이를 반드시 성공시킬 수 있다고, 자만했지…….”
하지만 새삼스레 깨달을 뿐이었다.
상승세만 그리는 뮤지션이란 건, 매우 희귀한 족속이란 것을. 그리고 상승세를 만들어내는 프로듀서도 그만큼 희귀하다.
“감히 프로듀서의 전설이랑 나를 비교한 것부터…… 그래, 우울해질 이유로 충분했지.”
“전설이라뇨…….”
“전설 맞잖아. 겸손하긴.”
“아직 제 전설은 시작도 안 했어요.”
“겸손이 아니라 교만하구나.”
김명운이 큭큭 웃었다.
“하긴, 네가 자기 자랑을 하면 교만이 아니라 당연한 거지. 데뷔 때 1만이었던 그룹을 초동 46만까지 끌어올렸으니…….”
“저 혼자 한 게 아니에요.”
“응?”
“아이돌은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천재적인 매니저 한 명.
천재적인 프로듀서 한 명.
천재적인 비주얼 디렉터 한 명.
그런 천재 한 명만으로 어떻게든 성공을 이끌어갈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자신이 못하는 걸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다른 사람이 못하는 걸 제가 하고. 수많은 사람의 능력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여, 마침내 만들어지는 거예요. 한 사람으론 만들어낼 수 없는 거니까, 다른 사람이 필요해요. 사실 세상사가 다 그렇죠.”
천재의 작품이란 예술에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물론 아이돌은 예술이지만, 동시에 산업이다.
산업은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책임도 혼자 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효민이랑 대표님이 저에게 사과할 필요도 없었죠. 모두의 노력이 모여서 만들어낸 결과니까요. 다 같이 아쉬워하고, 또 나아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그렇지. 그러게.”
김명운이 또 웃었다.
“이번에 네가 효민이 뮤비에 돈을 더 쓰자고 했잖아.”
“엄청 쏟아부었죠.”
“간섭도 많이 했지.”
“기분 나쁘셨어요?”
“살짝?”
“총괄 프로듀서잖아요. 제가 참여해서 실패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절대 아니지. 효민이도 찬성했고. 그렇게, 네 말대로 돈을 더 쓰고 규모가 커지니까 말야. 새삼 놀랐어. 뮤비 하나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참여할 수 있는지…….”
감독. 배우. 기획사. 제작사. 어시스턴트 디렉터. 메인 프로듀서. 프로덕션 매니저. 촬영감독. 조명감독. 아트. 로케이션 믹서. 의상 디자이너. 헤어 메이크업 디자이너. 사무 관리 책임자. 어시스턴트 프로듀서. 로케이션 매니저. 촬영 보조. 디지털 이미지 테크니션. 그립팀. 조명 보조. 붐 오퍼레이터. 예술 보조. 헤어 메이크업 보조. 특수영상 시각효과 감독. 디지털 작업 감독. 사운드 감독. 음악 감독. 2D 시각효과 감독. 사운드 디자이너. 출연 배우 기획사. 성우. 3D 시각효과 감독. 기획.
그리고 이음 엔터 프로듀서.
가로 엔터 비주얼 프로듀서.
가로 엔터 총괄 프로듀서.
뮤지션, 우효민.
“뮤직비디오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만 50명 이상. 엄청난 규모야. 솔직히, 대형 기획사에서나 들일 법한 인력과 자본이었어. 이만한 투자엔 감사한 마음밖에 없어. 성필이 네 덕에, 분수에 맞지도 않는 호사를 누렸지.
우효민이 소주를 삼키며 맞장구쳤다.
“정말요. 대표님도 그렇지만 저도 엄청 놀랐어요. 뮤직비디오가 이런 규모로 찍을 수 있는 건 줄 처음 알았어요.”
“성필이 말이 맞아.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거야.”
“드디어 정답을 찾으셨네요.”
김명운이 끅끅 웃었다.
“그래도…….”
그가 술잔을 꺾었다.
“공허함은, 쉽사리 채워지지가 않네.”
“효민아, 대표님 아직도 우울해하시는 거 같은데?”
“이상하다. 아까 저 위로해줄 땐 눈에서 불꽃이 막 일렁이던데.”
“뭐라고 위로하셨는데?”
“야 야 말하지 마.”
“대표님한테 직접 들으세요.”
낮은 웃음 끝에 정적이 찾아왔다.
김명운이 입을 열었다.
“다음을…… 노려야겠지.”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마음 같아선 기적을 구하고 싶어. 종교가 없는 게 아쉽다.”
“혹시 모르잖아요.”
우효민이 김명운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요, 기적이.”
“그랬으면 좋겠다.”
“대표님, 저 데뷔할 때 슬로건 기억 안 나세요?”
“기억나지…….”
일상에서 기적을 찾는 이야기.
“저는 음악이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요. 제가 어렸을 때 그랬으니까요. 음악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일상의 소음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기적이에요. 작년의 제 노래는 기적이었죠.”
케이어스를 꺾었으니.
“두 번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어요.”
“긍정적이네.”
“대표님한테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긍정적이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럼 마지막까지 찾아볼까?”
일상에서 기적을.
“네.”
우효민이 미소 지으며 결연히 답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무대에 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