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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47화 (647/760)

647화

누구냐고?

‘내가 누구냐고, 한 거야?’

농담이겠지?

당연히 농담이겠지.

우효민은 진소유의 재미없는 농담에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웬만해선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크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에이, 농담이 너무 심하시잖아요. 저 상처받는다구요.”

진소유의 표정이 바뀌었다.

실패한 농담을 던진 자 특유의 어색한 표정으로? 농담을 무마하려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아니었다.

살짝 찡그린 눈썹으로 곤혹이 전해져왔다.

“나랑 만난 적 있어?”

우효민의 멘탈이 산산이 조각났다.

‘진짜 나를 모르잖아.’

과장을 보태서, 우효민은 최근 진소유 생각 외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면서도, 깨어서도, 연습하면서도, 김명운과 컵라면을 먹으면서도 진소유만을 떠올렸다.

진소유를 생각하고.

진소유를 떠올리고.

진소유를 그려왔다.

진소유만이 우효민의 모든 것이었다.

‘한 번 정도라도…….’

진소유가 우효민을 떠올릴 줄 알았다.

같은 시기에 음악 방송에 출연하니, 하기 싫어도 의식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소유는 우효민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안중에 없었다기보다, 아예 존재 자체를 망각했다.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사람처럼.

“연말 특별 무대…….”

우효민이 그리 말하자 진소유가 ‘아’ 소리를 냈다.

“아, 너구나.”

너.

다른 호칭은 나오지 않았다.

진소유의 눈썹에 걸린 곤혹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소유는 우효민의 존재만 기억해냈을 뿐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소유의 고운 입술이 열렸다. 그녀의 입술은 어느 발음을 만들려고 했다. 이응 발음이었다.

그것만으로 다음에 나올 말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름은?’이겠지.

“기억 안 나세요?”

억지로 웃으려 올라갔던 우효민의 입꼬리가 난폭한 빛을 띠었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할 울분이 목소리에 배었다.

“작년에 같은 음방에 섰었어요. 활동기가 겹쳐서요.”

“그랬니?”

“그때 제가 1위 했었잖아요.”

“언제였지?”

“케이어스 ‘넥타르’ 때요.”

진소유의 표정에 또 변화가 찾아왔다.

과연, 1위를 빼앗겼단 사실은 진소유에게도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우효민은 이렇게까지 적대적으로 표현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고 싶었다.

우효민 자신이 진소유를 의식했던 것만큼, 아니. 최소한 이 순간부터라도 자신을 인지하길 바랐다.

마침내 진소유의 표정이 명백히 달라졌다.

미소였다.

“자랑스럽나 보네.”

우효민은 다시 얼이 나갔다.

“음방 1위란 게.”

얼이 나가서, 도저히 그녀를 향한 반응을 결정지을 수 없었다.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진소유는 우효민의 머리를 가볍게 몇 번 쓰다듬곤 그녀를 지나쳐 사라졌다.

우효민은 진소유를 돌아볼 기운조차 없었다.

‘자랑스럽냐고?’

당연히 자랑스럽다.

음악 방송 1위는 그 시기 데뷔·컴백했던 이들 중 으뜸이란 증표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승리였다면 몰라도, 우효민은 정정당당하게 1위를 거머쥐었다. 그럴 만한 성적이었다.

‘자랑스럽나 보네.’

진소유의 그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다면, 진소유는 음악 방송 1위가 자랑스럽지 않다는 건가?

‘아니야.’

1위 따위 질리도록 해봤기에,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단 뜻이다.

도발이 아니다.

진소유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이다.

‘격이 다르잖아…….’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

우효민의 결승선은 진소유의 출발선이다. 진소유에겐 경기장에 선 순간부터 당연하게 밟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진소유는 끝까지 우효민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우효민의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추억. 케이어스를 꺾고 1위를 거머쥐었던 순간은, 진소유에겐 기억할 가치도 없던 시간이었다.

‘그럼…….’

그릇을 깨주마.

같은 선으로 끌어당겨, 아니다.

‘내가 같은 선으로 올라가 줄게.’

왜 소녀연맹이 케이어스를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는지 알겠다. 저런 인간들에겐 지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하다.

‘큰 회사에 들어간 게 최고 스펙인 인간에게…….’

지지 않겠다.

* * *

진소유 사전 녹화 현장.

성필, 신아름, 장하양은 스튜디오 구석에 서서 무대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외에도 케이어스 최초의 솔로 데뷔를 보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이 많았다. 아이돌부터 매니저와 기획사 관계자들까지 다양했다.

“팀장님, 꼭 케이어스 데뷔할 때 같네요. 그죠?”

“그러게. 그때도 이렇게 북적거렸었는데.”

“팀장님도 울고요.”

“맞아.”

“왜 부정 안 해요.”

신아름이 성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부정하든 창피해하든 애교부리든 어차피 날 타박할 거잖아. 3년 넘게 당하면 무덤덤해질 만도 하지.”

“애교부리면 봐드리려고 했어요.”

“저도요.”

신아름과 장하양이 재촉했다.

당연히 성필은 꿈쩍하지 않았다.

“봐준다고요!”

신아름의 옆구리 찌르기가 더 거세졌다.

그럼에도 성필은 꿈쩍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 선 우효민에게 말을 걸었다.

“효민 씨는 이런 분위기 처음이시죠? 케이어스 데뷔할 때가 딱 이랬거든요.”

진소유의 사전 녹화는 우효민의 사전 녹화 다음 차례였다. 그래서 우효민도 진소유의 무대를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었다.

“포유도 케이어스랑 같은 시기에 데뷔했는데요…….”

“으하하, 농담!”

“이사님, 제 말버릇을 위기탈출용으로 쓰지 마세요.”

“하양이도 그러잖아. 농담이라고 하는 거 대부분 진심이지?”

“아하하, 어?!”

성필, 장하양 학사 학위 취득 완료!

곧 석사 학위 취득 예정.

“그럼…… 제가 사실은 박 이사님과 연을 맺기 위해 가로 엔터에 들어온 거란 것도 이미 눈치채고 계셨던 거예요?”

“와, 진짜 재미없다.”

“아하하, 농.”

“죽어!”

신아름이 장하양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패는 시늉을 했다.

“맞아, 진작 하양이의 마음은 눈치채고 있었지.”

“팀장님도 죽어요!”

신아름이 성필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패는 시늉을 하려다 그냥 진짜로 쳤다.

“아파…….”

“하양 언니 습관적 플러팅하는 거 진짜 고쳐야 해요. 딱 그거야.”

“그거?”

성필이 옆구리를 쓸며 묻자, 신아름은 교사라도 된 양 검지를 치켜들었다.

“며칠 전에 쌤이랑 아이튜브에서 영상 하나 봤거든요. 남사친 많은 여자 여우 특징이라구요. 막 남자들한테 오해할 만한 발언 막 하고 스킨십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러는 애들이 있대요. 자기 얼굴이 되니까 먹힌단 걸 알고 그러는 거죠. 그걸 또 즐긴대요.”

“야, 하양이가 언니인데 말이 너무 심하다.”

“언니가 의식적으로 그런다는 게 아니라요, 이게 습관이 된다니까요. 하양 언니가 워낙 유머 감각이 없으시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을 웃기려고 막 충격적인 발언을 한단 말예요. 그게 가끔 먹혀서, 이젠 습관이 됐어요. 팀장님 친구들 중에서 그런 사람 있지 않아요? 막 성적인 단어 말하면서 웃고 그러는 친구요.”

성필은 유하음을 떠올렸다.

유하음은 성필과 있을 때, 정말 갑자기 아무런 맥락 없이 성적인 단어를 꺼내곤 한다.

예를 들어 성필의 맞은 편에 앉을 때 갑자기 ‘섹스’라고 말하는 식이다. 정말 어린애 같은 건데, 갑자기 그러니까 성필도 피식 웃곤 했다.

“있긴…… 해.”

신아름의 ‘장하양 유머론’은 꽤 설득력 있다. 충격적인 발언으로 다른 사람을 웃겨온 이들은, 그게 유머 감각이 된단 이야기인가.

확실히, 마이너 코드로 사람들을 웃기는 아이튜버가 메이저 코미디 프로그램에 설 순 없겠지.

이른바 인간의 경험에 따라 유머의 경계가 생긴단 이론이다.

즉, 장하양의 유머 감각은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 쪽으로 발전해버렸다.

“그럴듯하네.”

“언니가 이렇게 변한 지분의 80%는 팀장님이 가지고 있어요. 팀장님이 자꾸 받아주니까 언니가 흑화했잖아요.”

성필의 장하양의 낌새를 살폈다.

우울함이 눈썹을 짓눌러서 곧 눈 아래까지 떨어질 것만 같다.

“에이, 근데 나는 하양이 재밌어.”

장하양의 눈썹이 생기를 되찾았다.

“저 얼굴에 플러팅 당하니까 팀장님이야 재밌겠죠.”

장하양의 눈썹이 또 축 처졌다.

“하양이가 저런 이상한 농담만 하진 않아. 백에 일은 명중해.”

장하양의 눈썹이 애매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다가, 곧 조심스럽게 생기를 되찾으려고 했다.

“그건 언니 말에 웃은 게 아니라 언니 얼굴로 웃은 거예요.”

오늘따라 신아름이 우직하고 공격적이고 단호하다. 마치 한 치도 양보하지 못하겠단 의지를 품은 것만 같았다.

그냥 좀 인정해주면 안 되나.

이러다간 한 줌 남은 장하양의 유머 용기가 소실될 지경이다. 저러다 남들 앞에서 농담 하나 던지지 못하는 성격이 되면 어쩌려고.

“하양아, 질 수 없잖아.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줘.”

“아, 네. 수컷 말이 말을 못 하는 이유는?”

“고전적인 유머법이네. 음, 뭘까. 글쎄. 모르겠다. 뭐야?”

“암말도 못 해서.”

“으하하하핳!”

성필이 자지러지자 장하양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름아 들었어? 암말도 못 해서래!”

“아, 아하하…….”

장하양은 오랜만에 농담이 성공해서 그런지 수줍어했다.

“팀장님 눈이 안 웃고 있는데요.”

“암튼 하양이한테 너무 그러지 마.”

거짓 웃음이 들키자 성필이 바로 근엄해졌다.

장하양도 바로 풀 죽었다.

“정말 친하시네요.”

우효민은 세 사람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래? 효민이 너도 김 대표님이랑 지내는 거 보면 만만치 않던데.”

“제가요? 평범한 거 같은데.”

“시작을 함께한 사람들은 친해지기 쉬운 거 같더라. 서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볼 꼴 못 볼 꼴 다 봤으니까. 서로 벽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적은 편이지.”

“특히 팀장님이랑 난 곧 서로 안 지 10년이 되거든. 친하지 그럼.”

“10년은 아직 멀었지.”

“그냥 그렇다고 해줘요.”

신아름은 성필과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하다 장하양에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곧 십 년이라구요. 특히, 저랑 친해요.”

“어쩌라고.”

“너무 싸늘한 거 아녜요?!”

“네가 아까부터 하양이 돌려 깠잖아. 나라도 그러겠다.”

“아, 시작해요.”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관객석에서 새된 비명이 들려왔다. 객석을 차지한 이들 대부분이 여자이고, 또 그 절반 정도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성필이 점심을 먹으려 밖으로 나갔을 때 무리 지은 학생들을 보았었다. 삼각김밥과 몇백 원짜리 과일 음료를 야무지게 먹으면서 진소유 이야기를 하고 있더랬다.

“쟤들은 수업 시간 아닌가. 어떻게 왔지.”

신아름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어떤 핑계로 저들이 학교를 나온 걸까. 혹시 핑계도 대지 않고 도망친 거라면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교복이 통일되지 않은 걸 보면, 몇 무리씩 다른 학교에서 모인 모양이다.

“와.”

사전 녹화를 위해 모인 팬들의 함성에 성필의 감탄이 섞여 들어갔다.

성필은 뒤늦게 실수임을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누구도 성필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성필도 입을 막은 손을 떼어냈다.

대신 진소유에게 집중했다.

“완전…….”

신아름이 홀려서 말했다.

“로판 재질이네…….”

진소유의 의상은 로맨스 판타지에 나올 법한 귀공자를 의상시켰다.

로맨스 판타지는 체제나 전쟁 같은 걸 보면 중세 같은데 의상이나 문화는 근대다. 각 시대의 좋은 점만 떼오다 보니 배경의 시대상이 불분명하다.

진소유의 복장은 중세풍이라기보단 근대적이었다. 그리고 근대‘적’일 뿐이어서, 의상은 현대의 감성이 깊게 배어 있었다.

즉, 옷은 현대의 것이지만 분위기는 판타지스럽다.

“저런 옷은 뭐라고 해요?”

진소유는 재킷을 입었다.

그런데 재킷 단추가 가슴 위에서 끝난다. 크롭보다 더 짧다. 재킷의 양 끝단이 진소유의 가슴을 타고 옆으로 갈라진 형태다.

“‘볼레로’라고 불러.”

장하양이 대신 답했다.

“길이가 아니라 형태로 ‘볼레로’야.”

“앞트임 재킷이네요.”

“앞트임…… 앞이 트여 있으니까…… 그렇지.”

앞이 트여 있어서, 진소유의 가슴 부분이 개방되어 있다. 그녀는 재킷 아래로는 몸에 달라붙는 스판 재질 슈트를 입었다.

스판이라지만 값싼 티가 나지 않았다.

은은한 광택에, 검은 재질 위로는 유려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스판이 아니라 비단 같다.

진짜 비단 아니야?

“저거 가슴 안 흔들릴까요?”

“안에 고정해둘 걸 입었겠지. 아니면 저 상의 자체가 압박력을 가지고 있거나.”

“…….”

진지하게 대화하는 신아름과 장하양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성필은 옆에서 듣고 있기가 살짝 창피했다.

“아…… 옷이 압박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엄청 달라붙어요. 봐요, 옷 위로 복근이 드러나 있어요.”

“그러게.”

“소유 씨도 언니처럼 운동 열심히 하나 봐요?”

“저건 운동한 복근이 아니라 말라서 나온 거야. 생존 근육. 운동을 하긴 했겠지만, 강도가 높진 않아 보여.”

“이열, 전문가다 전문가.”

“아하하.”

“근육 전문가.”

“…….”

진소유의 볼레로 재킷엔 화려한 솔과 브러시, 문장 장식이 여럿 달려 있었다.

자칫 과하게 느껴질 수 있는 스타일링이지만, 진소유의 미모 탓에 옷의 화려함마저 빛이 바랜다. 진소유가 옷의 과함을 중화시키고 있었다.

스타일리스트도 옷을 입혀보고 놀랐을 듯하다.

그리고 하의는 상의보다 수수했다. 검은 스키니 스판 팬츠였으니.

일부러 수수하도록 꾸민 게 분명하다. 하의까지 상의처럼 꾸몄다면, 진소유라도 소화하기 힘들었겠지.

그렇기에 이 밸런스는 완벽했다.

진소유는 그야말로 판타지 속 귀공자였다. 환상 속에서 방금 튀어나왔다.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또 나한테 어떤 프레임을 씌우려고.”

“프로듀서잖아요. 궁금해서 여쭈는 거예요.”

“솔직히 굉장해. 남녀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를 가지고 있어. 의상은 남성성을 기반으로 했으면서도 여성성을 드러내. 앤드로지너스 스타일은 남자 의상이 주류처럼 느껴져서 그쪽이 주목받는데, 여성 앤드로지너스 스타일로도 완성도가 꽤 있어. 아이돌리시함의 극치야. 여자 팬들이 많은 게 이해가 가. 동성(同姓)마저 자극할 수 있는 섹슈얼함이라니. 미(美)의 현현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겠어.”

“그냥 KS 엔터로 가요!”

성필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오는 주먹.

하지만 성필은 신아름의 주먹을 낚아챘다.

“……!”

“하지만, 하양이가 준비한 ‘르 스모킹’보다는 못해.”

“……어떤 점에서 못한데요?”

“우리 이제 무대에 집중하자.”

“그냥 예의상 한 말이죠?”

“하양이 의상 칭찬은 너희 연습할 때 질리도록 했잖아!”

“아뇨.”

장하양이 부정했다.

성필은 여기서 또 ‘하양이의 옷이 아름다운 이유 95개’를 발표해야 하나 싶어서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장하양이 부정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가슴 앞트임…… 상상도 못 했어요. 왜 저희 멤버들한테 각종 재킷을 입히면서 ‘볼레로’를 떠올리지 못했을까요?”

장하양은 새로운 영감을 붙잡은 듯하다.

“설하 언니한테 입히면…….”

“기껏 팀장님이 잡아 온 공중파 음방 하나도 출연 취소되겠죠.”

“그치?”

그렇게 소녀연맹의 공중파 음방 출연이 지켜졌다. 백설하의 가슴 앞트임 의상이 통과된 세계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때, 마침내 무대를 제외한 모든 곳의 조명이 빛을 감추었다.

신나게 떠들던 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진소유에게 집중했다. 아니, 네 사람이다.

우효민은 세 사람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진소유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단 듯, 눈이 핏발을 세울 만큼 커졌다.

‘백댄서가 10명 이상.’

다들 흑일색(黑一色) 옷과 함께 반가면(半假面)을 착용했다. 백댄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진소유에게 더 집중된다.

진소유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녀가 장갑을 차고 있단 걸 알아차렸다. 흰색 면장갑. 면인가? 싸구려가 아니다. 은은한 광택 사이사이로 유려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져 있다.

저 작은 장갑 하나만 해도 수십만 원을 웃돌 것만 같았다.

“아!”

다들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토했다.

마술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진소유가 쥐었던 손을 한 번 까딱하자, 갑자기 그녀의 손에 지휘봉이 들렸다.

어디서 꺼낸 건지 생각할 틈도 없이 음악이 흘러나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묵직한 음향의 질감에 다들 몸을 떨었다.

“가상 악기가 아니야.”

오케스트라 사운드.

메인 멜로디 악기는 바이올린.

그리고 성필의 말마따나, 진소유의 ‘하나였어’를 이루는 모든 사운드는 실제 악기였다.

‘얼마나 쓴 거야?’

KS 엔터가 오케스트라를 섭외하여, 수십 명이 녹음할 수 있는 레코딩 스튜디오를 대절하여 녹음했다.

완벽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며칠이나 걸려서.

오케스트라를 섭외하고 세션을 녹음하는 데만 1억이 넘게 들었다. 1회 공연 연주에 1,500만 원. 그걸 수십 시간 반복했으니 당연했다.

음악이란 정점까지 가면, 단 0.1%의 품질 향상을 위해 수천만 원을 투자하는 세계로 변한다.

‘하나였어’의 사운드에는 KS 엔터의 미학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물론, 진소유가 고집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완벽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호환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승인해준 오케스트라 레코딩이, 곡의 시작부터 빛을 발했다.

[믿지 않아도 좋아]

마침내 진소유가 노래를 시작했다.

외모만큼 아름다운 미성(美聲)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엔 불안함이 깃들었다. 불안하단 걸 아는 이유는 떨려서였다. 떨림이 노래를 타고 전해진다.

첫 사전 녹화라 긴장해서?

아니었다.

보컬적 기술이다.

진소유는 불안하게 노래한다.

[태양이 뜰 내일을.]

노래로 말을 건다.

[반달의 숨은 반쪽을.]

진소유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다.

[믿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무대 위의 조명이 전부 꺼졌다.

무대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럼에도 사고가 아니란 걸 모두가 안 이유는, 무대 위에 보이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손이다. 그리고 지휘봉이다.

어둠 속에서 진소유가 낀 장갑과 그녀가 손에 든 지휘봉만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또 다른 것들이 떠돈다.

백댄서들이 쓴 반가면과 그들의 장갑이.

유령의 연회 속에서 지휘봉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 지휘봉을 따라 가면들이 유령처럼 어둠을 떠돈다.

[이것만은 믿어줘.]

시계처럼 원을 그리는 지휘봉.

그 방향을 따르는 가면이 한 곳을 향해 멈췄다. 봉의 끝과 가면의 눈이 정면을 바라본다.

진소유가 말을 거는 상대를 향하여.

애절하고 불안한 말투로.

네가 믿지 않을 거란 걸 안다는 체념을 담아.

그럼에도 믿어주길 바라는 희망을 지니고.

[우리는 원래.]

다시 찾아온 빛과 함께.

[하나였어.]

진소유는 사랑을 전한다.

믿어주지 않을 상대를 향하여, 수없는 전생을 거쳐 맺어온 인연과 미래영겁 이어질 사랑을.

* * *

진소유 솔로 앨범 ‘하나였어(We were one)’.

초동 판매량 217,1**장.

역대 여자 솔로 음반 초동 판매량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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