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46화 (646/760)

646화

“아 씨 깜짝야!”

민경섭은 화들짝 놀랐다.

별다른 생각 없이 사장실로 들어오자마자 우효민의 발광을 마주했으니 말이다.

“선주문량이 100,000장이란 말입니까!”

김명운마저 발광하기 직전 상태로 몰렸다.

“선주문량이 100,000장이면 정말 200,000장을 뚫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니, 케이어스의 명성을 고려하면 그보다 훨씬 높아질 수도 있다.

그 의미를 사장실 안의 모두가 알았다.

진소유는 역대 여자 솔로 아티스트 초동 판매량을 경신할지도 모른다. 진소유 이름 석 자가 한 분야의 정점으로 오르는 것이다.

“그런 아티스트를 상대로…….”

김명운은 말을 줄였다.

그가 하려던 말은 ‘이길 수 없다’였을 것이다.

그의 ‘이긴다’는 음악 방송 1위다.

음악 방송 1위는 유명무실하단 평가를 받고 있으나, 기획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선 탐 나는 타이틀이다.

음방 1위의 여부로 행사 페이가 널뛰기하니 말이다. 이엔 공연 기획사 클라이언트들의 무지(無知)가 한몫한다.

축제를 열었다. 사람을 모아야 한다. 뮤지션을 섭외한다. 돈이 꽤 있으니 유명한 사람을 섭외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유명하다는 기준이 무엇일까?

음원 성적이나 판매량 같은 걸 복잡하게 설명해봐야, 문외한인 클라이언트들의 피부엔 확 와닿지 않는다.

그때 음악 방송 1위 타이틀이 쓰인다.

음악 방송 순위는 앨범 판매량, 음원 순위, 방송 출연 횟수, 투표 등을 고려하여 결정된다. 즉, 유명세의 척도로 쓸 수 있다.

가끔 괴상한 결과가 튀어나와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음방 1위는 신뢰성 있는 지표다.

“아름이한테 도움까지 받았는데…….”

우효민의 발광이 잦아들었다.

“아름이 이름을 빌려서 홍보까지 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거네요…….”

“너무 비관적인 거 아니야?”

홍규헌이 우효민을 달래려 했다.

“넌 음방에서 케이어스랑 글로브를 동시에 꺾은 적이 있잖아.”

성필이 귓속말을 하려 홍규헌의 귀 가까이로 입을 가져갔.

“떨어져서 말해.”

“그건 케이어스 컴백 3주 차였어요. 판매량이 더는 늘어나지 않고, 음원 순위도 추락하기 시작한 시점이었죠. 그 시점에 효민이는 일간 차트 TOP10으로 진입했어요. 유리할 수밖에 없죠.”

“이번엔 컴백 시기가 비슷하니 비벼볼 여지도 없단 건가.”

홍규헌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우효민의 성공은 가로 엔터에게 중대한 문제다. 성공의 척도는 음방 1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가 1위 타이틀을 거머쥐느냐 마냐로, 올해 행사 수익이 몇 배나 오를 수도 있다. 역으로 전년보다 몇 배나 낮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홍규헌의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졌다.

“우효민이 이만한 판매량을 올린 건 솔직히 기대 이상이야. 만약 판매량이 100,000에 이르면, 벌써 웨이퍼센트를 뛰어넘은 거잖아.”

6년 차 선배들을 고작 솔로 데뷔 1년 만에 앞지른 게 된다.

웨이퍼센트 멤버들이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실은 음반을 100,000장이나 파는 그룹은 굉장히 인기 있는 것이다.

웨이퍼센트는 옐로 서브마린 엔터가 정산금을 떼어먹었기에 자신들의 인기를 잘못 알고 있었다.

100,000장을 팔면 이렇게 가난하구나, 그럼 몇만 장밖에 못 파는 애들은 어떻게 살까? 불쌍하게도…….

“100,000장은 엄청난 수치야.”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던 웨이퍼센트.

허접 보이그룹인 줄 알았던 나, 알고 보니 굉장한 아이돌이었다?

그런 라이트 노벨 제목 같은 상황이 실제로 웨이퍼센트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처음엔 믿지 않았으나, 옐로 서브마린 엔터가 누락된 정산금을 지급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아, 100,000장 팔면 그래도 나름 성공한 거구나!’

그도 그럴 게, 다키스트의 최대 초동 판매량도 100,000장을 넘은 정도였었다.

만약 웨이퍼센트의 성적이 초라한 거였다면, 아이돌 업계는 10년 전에 진작 망했다.

물론 판매량이 같다지만, 당대 다키스트의 인기와 현재 웨이퍼센트의 인기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아니,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성적만으로도 충분히 엄청나.”

홍규헌의 인자한 위로.

그 자애로움에 우효민과 김명운의 광기도 서서히 사라졌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곤,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밝은 웃…….

“그만 좀 하세요!”

성필이 외쳤다.

바로 옆에 있던 홍규헌은 물론 김명운과 우효민도 깜짝 놀랐다.

성필의 외침엔 울분이 서려 있었다.

“사장님, 효민이의 마음을 모르시겠어요? 세상 어느 누구든 전장에 뛰어들 땐 적장의 목을 벨 생각으로 서요! 축구선수는 발롱도르를, 피겨 스케이터는 올림픽을, 뮤지션은 스타를!”

“아뇨, 저는…….”

“정상을 노리는 사람에게 값싼 위로는 수치일 뿐이에요! 이 정도면 잘했다, 고 말할 수도 있겠죠. 아직 어린아이에겐 그리 다정하게 위로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효민이는 아이가 아니에요. 위로는 족쇄가 돼요. 사장님이 하실 건 격려예요!”

“저는 괜…….”

“내 생각이 짧았어.”

홍규헌이 반성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뇌리로 정상을 향해 나아가던, 나아가는 소녀들이 그려졌다.

가로 엔터의 보물, 소녀연맹.

케이어스를 꺾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던 그녀들에게 ‘이 정도면 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옛날이었다면, 그녀들이 아이였던 때라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젠 아니다.

다들 어른이다.

스스로의 꿈을 쥐고 나아간다.

성필의 말마따나, 꿈의 전장에 결연히 선 이에게 값싼 위로는 족쇄일 뿐이겠지.

“내가 할 말은 이런 게 아니었어.”

성필의 표정이 느슨히 풀렸다.

“드디어 정답을 찾으신 거네요.”

“그래, 박 이사. 드디어 눈이 뜨였다. 우효민!”

“네, 넵!”

“반드시 승리를 가져와라. 그게 내가 이음 엔터에 투자한 돈의 가치다. 고작 50,000장 팔았다며 축포를 터뜨려줄 생각은 없어.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와.”

“…….”

우효민과 김명운이 쭈뼛쭈뼛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민 이사.”

“하앗!”

민경섭이 우렁찬 기합과 함께 홍규헌의 앞에 섰다.

“진소유 선주문량이 어떻니 뭐니, 그런 김 빠지는 이야기만 하려고 날 찾아온 건 아니지?”

“와카리마시타(알겠습니다)!”

“경섭아 너 일본어 모르지?”

“하앗!”

민경섭이 폰에서 스케줄러를 뒤졌다. 그가 정보를 찾는 동안, 성필이 민경섭을 대신하여 설명했다.

“앨범 판매를 시작한 순간부터 프로듀싱의 싸움은 끝났어요. 이제부턴 매니지먼트의 싸움입니다.”

“매니지먼트의……!”

“싸움……!”

우효민과 김명운은 합이 굉장히 잘 맞았다.

“가로 엔터가 효민이를 맡은 순간부터, 효민이는 가로 엔터의 꿈을 같이 꾸게 됐다.”

“네? 무슨 꿈이요?”

“우리와 같은 꿈을 꾼단 건 투자만 하고 내팽개친단 의미가 아니야.”

“무슨 소리 하시는…….”

“소녀연맹이 최고의 걸그룹이 된다면, 효민이는 최고의 솔로 뮤지션이 된다.”

“언제부터 그…….”

“전력을 다해 싸우고 정상을 쟁취해낸다.”

“…….”

성필의 기세는 우효민을 감화시켰다. 그녀는 픽 낮게 웃고는, 성필을 향해 눈빛을 태워 올렸다.

“그런 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결연했던 성필의 표정이 느슨히 풀렸다.

“드디어 정답에 도달했구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김명운은 둘의 대화를 보며 생각했다.

‘드디어 정답을 찾았냐는 저거, 진짜 가스라이팅 같은데.’

성필이 억지로 우효민에게 대답을 유도해내고, 정답이라고 말해줌으로써 의식을 조작하는 것만 같았다.

소녀연맹은 저런 소리를 매일 듣는 건가. 그렇다면 그녀들의 불타는 경쟁심이 이해가 된다.

다르게 말하면, 소녀연맹이 성필의 경쟁심과 꿈에 감화된 거겠지.

“음악 방송엔 방송 출연 점수란 게 있어. 말 그대로 방송에 출연하면 점수를 줘. 방송국은 인기 있는 뮤지션이 방송에 출연하면 이득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점수 같아. 음방 1위를 빌미로 억지로 출연시키려는 거지. 물론 음악 방송도 포함해서.”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말투네요.”

“방송 출연 점수는 비율상 10% 정도지만, 내가 봤을 때 절대 10%가 아니야. 방송국 놈들, 이 아니라, 방송국이 정확한 점수 집계 방식을 공개하지 않아서 베일에 싸여 있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났다 하는데, 내 예상으로는 거의 50%에 달할 때도 있어.”

“50%……!”

“정말 고무줄이야. 가끔은 PD들이 접대받고 억지로 점수 올려주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생략.

“우린 그걸 노린다.”

“접대요?!”

“아니, 방송에 출연한다고. 접대 운운한 건 농담으로 예시를 든 거고. 방송에 출연한 횟수로 집계될 거야. 그렇다면, 방송에 많이 출연할수록 점수가 높겠지?”

“……앗!”

우효민이 성필의 전략을 눈치챘다.

“그래, 넌 일주일 동안 죽기 직전까지 방송에 출연할 거다.”

“……죽기 직전요?”

방송을 그렇게 많이 나갈 수 있나?

활동기에 예능 한두 개만 나가도 꽤 성공한 프로모션인데, 죽기 직전까지 방송에 나간다고?

“경섭아, 준비됐어?”

“네. 효민이가 나갈 방송은…….”

활동 시작 주에 예능 3개.

“아, 확실히 많네요. 음악 방송이랑 병행하려면 골병 나긴 하겠어요.”

“여기서 끝이 아니야. 라디오 방송은 10개를 나간다.”

“10개?!”

김명운이 경악했다.

“시, 시간이 됩니까?”

“저녁, 심야, 새벽, 아침, 점심 가리지 않고 시간이 빌 때마다 다 나갑니다.”

“바, 박 이사님…….”

김명운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박 이사님은 노동자 대표 이사시잖습니까. 이건 효민에게도 가혹한…….”

“효민이는 노동자가 아니라 회사와 계약한, 이른바 자영업자예요.”

“……!”

“일한 만큼 버는 게 인지상정. 그리고 노력한 만큼 성공을 거머쥐는 게 순리죠. 자영업자는 본인의 의사에 따라 가혹함을 따지지 않아요. 돈을 벌고 싶으면 그냥 일하는 겁니다.”

“…….”

김명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가혹하긴 하지만…….’

언제 이런 기회가 찾아오겠는가.

솔직히, 김명운의 이음 엔터만으론 이렇게 많은 방송 출연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하긴 하지만, 충분히 해볼 만하다.

“좋습니다 이사님, 한번 해보…….”

“여기서 끝이 아니에요.”

“네?!”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아이튜브 채널들이 많습니다. 여기에도 나갑니다. 여기까지 방송 출연 점수에 집계되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요.”

“혹시 모른다니…….”

“사실 아이튜브 쪽은 정말 홍보 목적으로 출연하는 겁니다. 요즘엔 텔레비전 방송보다는 아이튜브 영상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니까요. 심지어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채널들은 아이돌 친화적인 것에만 나가요.”

이게 무슨 뜻인지, 김명운은 안다.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철저하게 아이돌 팬만을 타겟팅하여 프로모션할 수 있다.

“경섭아, 아이튜브 쪽은 몇 개야?”

“이쪽은 세 개예요.”

총합 16개 방송 출연.

고작 이 주 남짓한 시간 안에 음악 방송까지 합하여 이 모든 스케줄을 소화해야 한다.

‘가혹해…….’

김명운은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지만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저 스케줄을 수행하면, 우효민은 반 시체가 되어버릴 게 분명하다.

‘가혹하지만…….’

메리트가 있다.

앨범 판매량, 음원 성적, 팬덤 투표.

이 셋으론, 솔직히 진소유를 이길 가망이 없…….

‘잠깐.’

김명운은 놀랐다.

‘왜 내가 소유 씨를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까까지만 해도 홍규헌의 격려를 듣곤 만족하기로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당연히 진소유를 이기겠단 마음을 먹게 됐다.

“음원은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판매량, 팬덤 투표로는 소유 씨를 이길 가망이 없어요. 불확실한 음원 성적에만 기대를 걸 수도 없어요. 사실상 소유 씨 곡이 안 좋아서 망하길 기대하는 거니까요. 그러니 이기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은, 혹사해서 방송에 죽도록 출연하는 것뿐입니다. 김 대표님.”

성필의 부름에, 김명운은 충격을 뒤로하고 그를 똑바로 보았다.

“효민이의 매니지먼트 관리권자로서, 이 계획을 허가해주실 겁니까?”

“…….”

김명운은 옆에 선 우효민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혼란과 공포가 섞여 있었다. 본인도 16개 방송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감이 안 오는 것이겠지.

동시에 우효민은 기대하고 있다.

어쩌면 진소유를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우효민을 채웠다.

그 희망을 보고, 김명운은 짙은 미소를 띠었다.

“따로 말씀드릴 필요도 없겠군요.”

성필이 인자함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대표님만의 해답을 찾으셨네요.”

성필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다 함께 파이팅 합시다!”

홍규헌과 김명운, 우효민이 손을 겹쳤다.

“아자, 아자!”

네 사람의 손이 하늘 위로 향했다.

“우효!”

그걸 보며, 민경섭은 뿌듯해했다.

‘근데 난 진짜 소유 씨 앨범 판매량 보고 놀라서 알려드리려고 온 거였는데.’

* * *

새벽.

진저가 조심스럽게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진저는 완성된 도시락을 보며 히죽 웃었다.

도시락통의 색은 행운을 상징하는 붉은색이다.

손을 씻은 후 물기를 앞치마에 닦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붉은 보자기로 도시락을 꽁꽁 포장했다.

진저는 소파에 앉아 시계와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현관 복도 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쪽으로 향했다.

“소유 언니.”

현관에서 신발을 신던 진소유가 흘끗 고개를 돌렸다.

진저가 수줍게 보자기로 싸맨 도시락을 내밀었다. 진소유는 그걸 한 손으로 받아 이리저리 살폈다.

“이게 뭐야?”

“도시락임미다. 단호박 샐러드랑, 스위트가든 샐러드랑, 볶은 콩이랑 닭가슴랑이랑, 취향에 맞게 뿌려 드시라고 샐러드 소스 종류별로 넣었슴미다. 후식은 비, 밀.”

“자라니까.”

오늘은 진소유의 솔로 컴백일이다.

음악 방송 전 메이크업·스타일링을 위해 새벽 일찍 숙소를 나선다.

기념비적인 날이긴 해도, 진소유는 고작 배웅 때문에 멤버들의 수면 패턴을 깨길 바라진 않았다.

“내일 컨디션 어쩌게?”

“저는 젊으니까 괜찮슴미다.”

“…….”

진소유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핸드백에 꾸역꾸역 도시락을 욱여넣으려 했다. 그런데도 들어가지 않자 그냥 반대 손으로 투박하게 쥐었다.

“사 먹는 게 편한데.”

진저는 마땅한 답을 못 찾고 시무룩했다.

진소유가 그런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곤 천천히 쓰다듬었다.

“고마워.”

진소유는 감사를 끝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그녀의 뒤에서 진저의 응원이 들려왔다.

“최고의 무대로 유스들을 감동시키는 검미다!”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아파트 입구를 나오자 밤이 반겨주었다.

진소유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밤공기를 느꼈다.

‘춥네.’

기묘한 날씨다.

밤엔 영하로 내려가기도 하지만, 낮엔 20도를 웃도는 더위가 반겨준다.

봄을 화려하게 알리던 꽃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며칠만 더 있으면 봄이 왔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여름이 오겠지.

물론 진소유는 사라져가는 봄에 별다른 애상을 품지 않았다. 어차피 계절은 계절일 뿐이다.

“소유야.”

아파트 입구에서 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소유는 그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랐다.

“팀장님?”

1팀장이 직접 진소유를 데리러 왔다.

“팀장님이 왜 오셨어요?”

“데뷔잖아. 중요한 일인데 내가 빠지면 쓰나.”

“…….”

진소유는 차 앞에 서서 또 하늘을 보았다.

“데뷔는 3년도 더 전에 했어요. 이건 케이어스의 연장선상에 불과한데, 다들 의미를 붙여주네요.”

손에 들린 도시락도 그러한 의미였다.

“솔로 데뷔는 케이어스랑은 또 다르잖아.”

“다른가요?”

“네 앨범은 케이어스의 세계가 아니야. 소유 너의 세계이고 음악이잖아. 그러니까 아티스트 소유의 탄생일이지.”

“…….”

진소유는 그녀답지 않게 감상적인 얼굴이었다.

“그럼.”

그녀가 차에 발을 들였다.

“기념이 아니라 축하를 받고 싶어요.”

탄생을 기념하는 게 아니라.

“아티스트 소유의 성공을 축하해주세요.”

“벌써 성공한 거야?”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성공은 확정이에요.”

진소유, 솔로 데뷔.

* * *

[이자성의 하잇 모닝 첫 번째 게스트 효민 씨, 거듭 와주셔서 감사하고요.]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청취자분들께 드리고 싶으신 말씀.]

[청취자분들께 하잇 모닝이 커피처럼 향긋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 아침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효민 씨는 오늘 저녁 6시 ‘콜 미 설튼리’로 컴백하십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음 게스트는 광고 듣고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디오 1부가 끝나자마자 우효민은 헤드폰을 벗곤 힘차게 일어났다. 그리고 스태프와 MC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효민은 인사를 거의 남발하다시피 하며 라디오 녹음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컴백 준비 기간엔 새벽에 자는 게 예사였다. 그래서 저녁 일찍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워버렸다.

샵에 들러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을 받곤 부랴부랴 라디오 녹음을 위해 왔다.

‘이러고 또 음악 방송 대기인 거지.’

에너지 드링크를 사 마셔야겠다.

“효민아!”

라디오 스튜디오를 빠져나오자 익숙하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아!”

신아름과 우효민이 뜨겁게 포옹했다.

“너무 가까이는 붙지 마, 스타일링 망가져.”

“아침에 시간 내서 응원하러 온 사람한테 이러기야?”

우효민은 웃으면서 신아름을 힘껏 껴안았다. 신아름을 놓자, 그녀 뒤에 선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성필과…….

“하양 언니?”

“응, 효민아 안녕.”

신아름이 응원하러 온 건 이해가 간다. 이른 아침에 시간을 내어주다니, 고맙다. 소녀연맹도 컴백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말이다.

그런데 장하양은 왜?

‘아…….’

진소유를 보러 왔구나.

진소유를 보는 김에 겸사겸사 우효민을 찾아온 것이다.

“효민이 응원하러 왔어.”

“저만요?”

우효민이 장난스럽게 받아치자.

“응.”

장하양이 진지하게 답했다.

“소유 언니를 보러 온 줄 알았어?”

“그렇지 않아요……?”

“효민이 응원하러 온 김에 겸사겸사 소유 언니도 볼까 생각하는 중이야.”

장하양은 싱긋 웃으며 우효민의 손에 편의점 봉투를 들려주었다. 안엔 에너지 드링크와 힘이 날 만한 과자가 들어 있었다.

“효민이는 가로 엔터 내에서, 올해 가장 처음 컴백하는 뮤지션이야. 선봉은 중요해.”

“흐, 무슨 전쟁이에요?”

“마음가짐에 따라서는?”

“헤헤, 이렇게 언니랑 아름이가 응원해주러 오니까…….”

우효민은 봉투 안에 담긴 걸 보았다.

음료와 과자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건 마음이었다.

아침 일찍 방송국까지 찾아오는 힘듦과 귀찮음을 감수하고서, 오직 응원하겠단 마음만으로 가져온 선물이다.

“새삼 한솥밥 먹는단 게 느껴지네요.”

“그러게, 몇 년 전만 해도 나 보면 개무시하면서 지나가더니.”

“언제 적 얘기야…….”

“아직도 포유 때처럼 나 미워하는 건 아니지?”

“그때도 딱히 미워했던 건…….”

미워했었나?

그거랑은 달랐다.

어떻게 신아름을 미워할 수 있을까.

우효민이 갈팡질팡하자 신아름이 비아냥댔다.

“언니, 얘 말 제대로 안 나오는 거 봐요. 자기도 거짓말하려니까 찔리는 거야.”

“아니야!”

“에휴, 경민이는 나랑 오랜만에 만나서도 잘 대해줬는데. 한솥밥 먹는 애는 아직도 ‘안 미워한다’고도 못 하네.”

“경민이랑 만났었어?”

우효민이 놀라서 물었다.

“어, 한 달 전쯤에 만났었어. 둘이서만 만난 건 아니니까 속상해하지 말구.”

“그래…….”

우효민의 얼굴에 순간 찝찝함이 지나갔다. 그러나 순간이었다. 다시금 신아름과 장하양에 대한 감사가 떠올랐다.

“둘이서 만난 게 아니면? 나 빼고 포유 애들 전부 모였던 거야?”

“어, 어떻게 알았어?”

“진짜?!”

“농담이지. 회사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에 경민이가 나왔었어. 근데 너 시간 괜찮아? 안 올라가도 돼?”

“아!”

우효민은 허둥지둥 성필을 향해서도 인사했다.

“박 이사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그,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저도…….”

“알아. 빨리 대기실 가 봐.”

“……네! 오늘 무대 완벽하게 할게요! 이사님, 하양 언니, 아름아, 지켜봐 줘!”

우효민이 경쾌한 뜀박질로 저 멀리 사라졌다.

미소와 함께 손을 살랑거리던 신아름의 얼굴이 차차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효민이가 긴장을 많이 했나 봐요.”

“응, 그렇더라.”

장하양이 이해한단 듯 말했다.

“케이어스랑 같은 무대에 서는 거니까.”

심지어 홀로 선다.

소녀연맹처럼 서로 의지할 동료가 없다.

승리도 패배도 온전히 자신의 것.

그만큼 부담감이 심하리라.

우효민이 느끼는 심적 압박은 어쩌면 소녀연맹보다 더 클 수도 있다.

“멘탈이 나가진 말아야 할 텐데.”

“효민이한테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지.”

성필이 말하자 장하양이 날카롭게 치고 들어왔다.

“효민이를 굉장히 신뢰하시네요. 제가 연습생일 때는 못 하겠으면 그만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현재의 효민이가 이사님이랑 한 공간에서 숨 쉰 시간보다, 4년 전의 제가 이사님과 한 공간에서 같이 호흡한 시간이 더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도 저보다 효민이가 더 믿음직스러우세요?”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

“아하하, 어?!”

“이제 하양이 학사 학위 정도는 땄나 보네.”

“하양 언니, 한 공간에서 숨 쉰 시간이 뭐예요……. 찐 변태 같아서 기분 나쁜데요…….”

“농담인데…….”

“아무튼, 난 효민이 멘탈은 걱정 안 해.”

학폭으로 침몰 직전이었던 포유에서도 멘탈을 다잡았던 아이다.

고작 강적과 같은 무대에 선단 이유로 의기소침하겠는가. 그러기엔, 우효민이 헤쳐나온 시련의 수가 너무나 많다.

“옛날의 제 멘탈은 걱정하셨구요?”

“쓰읍, 이건 농담 아닌 거 같은데…….”

“아하하, 네.”

“아! 그래서 재미가 없구나! 그냥 농담도 재미가 없지만요.”

신아름의 깨달음에 장하양이 의기소침해졌다.

“에헤헤, 농담!”

“…….”

* * *

우효민은 부푼 마음으로 대기실로 향했다.

신아름과 장하양, 성필이 응원하러 와주었다. 응원이란 비록 형태가 없지만, 확실하게 힘을 준다.

‘세 사람이 날 응원하러 왔잖아.’

소녀연맹의 신아름과 장하양이.

가로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인 성필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줬어!’

그만큼 기대받고 있단 뜻이다. 동시에 그건 우효민이 그만한 뮤지션이란 뜻이다.

만약 우효민에게 가망이 없었다면 세 사람이 응원하러 올 일도, 가로 엔터가 이음 엔터를 전력으로 지원할 일도 없었으리라.

‘할 수 있어.’

이 싸움, 아직 한 치 앞도 모르지만 왠지 느낌이 좋다.

‘모두와 함께라면, 김명운 대표님과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아. 작년에도 해냈잖아.’

작년보다 성장한 건 케이어스만이 아니다.

우효민도 성장했다.

‘할 수 있어.’

승리를 향한 정열이 우효민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오늘 무대는 이제까지 했던 연습과 비교도 되지 않을 퀄리티가 될 듯하다.

“아!”

급히 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모퉁이에서 나오는 사람과 살짝 부딪쳤다. 다행히 상대편은 쏟을 만한 걸 가지고 있지 않았고, 부딪친 충격도 크지 않았다.

우효민은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

우효민은 고개를 숙이면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의 시야로 보이는 하반신은 여자의 것이다. 그런데, 처음 그 실루엣을 보았을 땐 남자인 줄로 알았다.

키가 180cm이 넘었으니까.

여자의 키가 180cm에 이른다는 건, 남자로 치면 190cm를 넘어서는 거구란 뜻이다. 상식적으로 평생 살면서 한 사람 만나기도 어렵다.

그래서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다.

바지를 입고 있지만 힐을 신었다.

그리고 우효민은 이런 사람을 한 명 알고 있다.

“아.”

고개를 드니, 그 사람이 맞았다.

“소유 언니.”

진소유, 장하양, 라희, 그리고 우효민.

이렇게 네 사람끼리 연말 특별 무대를 꾸린 이후 제대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다. 함께 음방 무대에 섰을 때는 대화도 못 나누었었으니.

“아, 안녕하세요!”

진소유가 시선을 흘끗 내렸다.

우효민은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 주눅 들었다.

‘아냐!’

내가 뭐가 못났다고 주눅이 들어!

우효민은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오랜만이에요! 아, 앨범을 드려야 하는데 지금 가진 게 없네요. 나중에 대기실에 인사드리러 갈 때 앨범…….”

“인사하면서.”

“네?”

“이름을 밝혀야지.”

“……네?”

“누구야 너?”

우효민, 멘탈 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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