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45화 (645/760)

645화

우효민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해달라.

그 부탁에 신아름은 당황했다.

성필은 이유를 쉽게 짐작했다. 그도 김명운에게 부탁받았을 때 바로 알아차렸던 것이니까.

‘뮤직비디오는 하나의 작품이야.’

작품은 작가의 것이다.

그런데 그 작품 안에 갑자기 다른 시리즈의 캐릭터와 스토리가 나오면 어떻게 될까?

작가와 작품의 색깔이 바랜다.

아티스트에게 뮤직비디오는 아티스트만의 색깔과 생각, 음악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아티스트의 등장은 고깝게 보이곤 한다.

‘카메오로의 등장은 특히 그렇지.’

단순히 화제성을 위해 작품에 이질적인 물감을 뿌린 꼴이 되어버리니까.

피처링도 아니고, 컬래버레이션도 아니고, 이목 좀 끌기 위한 얕은 수작에 불과하다.

“효민이가 괜찮대요?”

심지어 우효민은 솔로 아티스트다. 그녀의 이름이 브랜드이기에 그녀만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다른 아티스트인 신아름의 뮤직비디오 출연은 오점으로 남을 수 있다.

애초에, 어떤 작가가 작품에 다른 작가의 문장과 문체가 섞이는 걸 바라겠는가.

신아름이 ‘효민이가 괜찮대요?’라고 물은 건 우효민의 자존심이 상하진 않을까 걱정해서다.

성필도 그리 걱정했었지만, 우효민의 답변은 참으로 경쾌했었다.

“괜찮대.”

“뮤직비디오 촬영은 끝난 거 아니에요?”

“막 편집 끝나서 심의받기 전이래. 세트 하나도 운 좋게 철거하지 않고 남아 있다니까, 그 파트에 출연하면 될 거야.”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하양이도 소유 씨 뮤비에 출연하잖아.”

“그건 엄밀하게는 연기자로 출연한 거잖아요.”

옳은 말이다.

장하양은 진소유의 ‘하나였어’ 뮤직비디오에 배우로 출연했다. 장하양은 뮤직비디오에서 진소유의 상대역을 맡았다.

상대역이란 단어부터 낌새가 느껴지는데, 바로 애정의 대상이다.

퀴어 코드가 케이팝 뮤직비디오와 곡에서 쓰이는 건 드물지 않다.

논란이 될 만한 소지를 완벽히 제거하는 케이팝의 문법은, 물론 존재만을 나타낼 뿐 기획사와 아이돌의 의지를 표현하진 않는다.

이걸 보고 성소수자를 향한 상술, ‘퀴어베이팅’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소유 씨 뮤비도 그런 방식이긴 했지.’

여자 장하양이 여자 진소유의 상대역.

그러나 진소유의 상대역은 남자도 있다.

생과 생, 수많은 전생과 영겁의 삶을 거쳐도 연인인 관계. 그게 ‘하나였어’의 주제다.

그런데 진소유의 상대가 환생해서까지 항상 여자란 건 확률적으로 말이 안 된다, 라고 진소유가 직접 말했다.

‘이미 전생과 환생이 나오는 시점에서 확률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장하양을 끌어내기 위해 진소유가 준비한 미끼가 아닐까. 성필은 장난스럽게 그리 추측한다.

“하양 언니가 소유 씨 뮤비에 나오는 건 괜찮아요. 근데 제가 효민이 뮤비에 나가는 건 그냥…… 프로모션용이잖아요. 효민이가 그걸 ‘그렇구나’ 받아들여요? 거기 김 대표님이 협박한 거 아니에요?”

“의외로 아티스트의 자의식을 높이 평가하네?”

“그거야…….”

성필이 프로듀싱한 소녀연맹 혁명 3부작.

‘아니’, ‘롱 포’, ‘아라베스크’.

그리고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1과 시즌2.

그 기간을 거치며, 신아름은 성필과 백설하, 조아라의 아티스트십을 가까이서 느껴왔다.

한 사람의 신념이 어떤 구조를 가지고 이루어지며, 신념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아왔다.

최근의 장하양을 보고서도 느꼈다.

남에겐 사소하고 부당하며 멍청하게 보일지라도, 예술가에겐 포기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

특히, 작품에 자신이 바라지 않는 요소가 덧칠해지는 건 누구나 꺼릴 일이다.

“그거야, 본 게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 오히려 효민 씨가 먼저 요청해주신 거니까. 널 콕 집어서.”

“저를요?”

“그간 같이 지내온 정이 있으니까.”

“하긴…….”

“아름이 네가 아니면 안 됐던 거야.”

“다른 멤버들한테 부탁하긴 꺼려졌던 게 아니라요? 친한 사람한테 돈 빌리기 쉬운 것처럼 저한테 다가온 거 아녜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보자.”

“음…… 출연료는요? 받고 해요?”

“네가 받고 싶으면 받을게.”

“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매니지먼트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는, 아티스트를 대신하여 클라이언트와 돈 관련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아티스트는 이미지 때문이든 경험 때문이든, 직접적으로 돈 얘기를 꺼내기 꺼려하니 말이다.

그래서 신아름은 일은 하더라도, 그 일이 어느 정도의 이익을 가져오는지는 모르고 해왔다. 어차피 회사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이건 뭐라고 할까……. 아, 가수들끼리 피처링해주는 거 알아? 돈을 주고 섭외하는 경우도 있지만, 친분이 있어서 공짜로 참여하기도 하잖아.”

혹은 음반사끼리의 정치적인 이유나 친분 때문에 불려가는 경우도 있다.

한 음반사 내에선 한솥밥을 먹는 식구이니 상부상조로 피처링을 해주기도 하고 말이다.

“이번 일은 요컨대 아름이가 동료 아티스트한테 요청받은 거잖아. 돈은 아름이의 의지에 달렸다고 봐야겠지.”

이음 엔터는 가로 엔터의 산하 해적단…… 아니, 외부 계열사라고 할 수도 있기에 공짜로 출연할 수도 있으리라.

“프로답게 돈을 받겠다는 것도 옳아. 효민이를 도와주는 게 친분으로 충분히 가능하겠다면 무료로 출연할 수도 있을 거고.”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신아름은 성필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도 자신이 한 번 움직이는 것에 재원이 얼마나 드는지 안다. 의상, 메이크업, 인건비, 유류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신아름의 시간.

회사가 공짜로 신아름의 하루를 지급해주긴 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다.

“아름이는 효민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고 싶어?”

“도와주고 싶냐는 거예요?”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되지. 도와주고 싶냐, 아니면 프로로서 업무에 임하고 싶으냐, 라고 해야겠지.”

친구로서 돕겠느냐.

프로로서 출연하겠느냐.

“아름이 마음이 중요해.”

“……저는.”

신아름은 우효민의 부탁을 들었을 때부터 마음을 정해두었다.

“돕고 싶어요. 근데, 기름값 정도는 건질래요. 메이크업, 헤어 같은 건 그쪽에서 해줘야겠죠. 그리고 남은 돈으로 효민이랑 밥 먹을게요.”

“알겠어.”

성필이 눈에 띄게 밝아지자 신아름이 그를 흘겼다.

“첨부터 제가 받아들일 줄 아셨죠?”

“어. 내가 예상했던 거랑은 다르지만.”

“뭐라고 예상했는데요?”

“‘공짜만큼 비싼 게 없어요, 빚을 지우고 나중에 뽑아먹을게요’ 비슷한 말…….”

“날 뭘로 보는 거예요?!”

신아름, 우효민의 뮤직비디오 출연 결정!

카메오로 총합 몇 초 출연할 예정.

* * *

진소유 솔로 싱글 ‘하나였어’.

최종 퍼포먼스 컨펌.

“잘했다.”

완료.

정호환의 한마디에 춤을 추던 진소유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정호환의 뒤에서 손톱을 뜯어먹던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도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정호환도 더는 버틸 수 없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정말…….”

정호환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콧대를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험난한 시간이었어…….”

정호환이 깊은 한숨과 함께 과거를 떠올렸다.

케이어스의 솔로 데뷔 프로젝트.

이름하여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계획.

이 프로젝트를 거치면서, 케이어스의 멤버들은 그룹으론 보여줄 수 없던 개개인의 매력을 발산한다.

매력만이 아니다.

케이어스로 쌓아왔던 캐릭터를 넘어서는, 인간으로서의 퍼스널리티를 확립한다. 개인의 매력을 부각하고, 그룹으로 모였을 때의 시너지를 극대화한다.

“그룹 멤버의 솔로 데뷔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지…….”

KS 엔터의 아이돌 그룹들은 팀의 인기가 궤도에 들어섰을 때, 멤버 몇이 솔로 앨범을 내기도 해왔다.

그 기준은 ‘팔릴 것인가’였다. 솔로로 데뷔해서 회사에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가가 솔로 데뷔의 기준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필요한 건 멤버 개인의 의지다. 그룹 활동 공백기엔 놀기만 하지 않는다. 다음 앨범 작업으로 바쁘다.

그 와중에 솔로 활동 준비까지 하는 건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다.

그럼에도 그룹 멤버들은 솔로 활동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유는 돈이다.

솔로 활동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멤버들과 나누지 않는다. 물론 제작비도 멤버들과 나누지 않기에 이익이 크진 않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낫다.

예를 들자면 본업이 아닌 부업이다. 성공한 아이돌도 이왕이면 돈을 더 벌고 싶으니 말이다.

아무튼, KS 엔터 내에서 아이돌 개인이 솔로로 활동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아니지만.

“이번엔 정말 힘들었다, 나도, 스태프들도…….”

‘아티스트십 계획’이란 이름이 붙은 만큼, 프로젝트의 구심점은 진소유였다.

그리고 진소유는 KS 엔터 내부의 모든 팀들과 최소 한 번씩은 다 싸웠다.

싸울 수밖에 없었다.

정호환이 감독한 앨범이라면 스태프들은 논쟁에서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 그런데 감독자가 진소유다? 그럼 스태프들도 한 꺼풀 더 과감해질 수 있다.

요컨대, 진소유는 커리어와 경험이 부족하다.

“고생 많았다, 소유야.”

정호환이 보기에 이런 상황은 최악이다.

KS 엔터의 노련한 스태프들에게 진소유가 감히 맞설 수 있겠는가?

스태프들의 말에 따르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

감독자가 타인의 말을 듣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앨범은 작품이 아니라 잡탕이 되어버린다.

진소유는 스태프들에게 지더라도 목표와 신념을 지켜야만 했다. 그럼으로써 앨범의 컨셉이 망가지지 않도록 하고, 스태프들이 목표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 KS 엔터의 스태프들을 향해 고개를 뻣뻣이 들고 ‘아니’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단 것이다.

믿음은 프로듀서의 자질 중 하나이고, 진소유에겐 그 자질이 있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 정말로…….”

정호환은 감동에 겨워 박수까지 쳤다.

진소유는 반응 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기만 했다. 보조 댄서들이 걱정되어 그녀에게 다가가니, 미약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소유 자는데요?”

“하하, 그럴 만하지.”

총괄 프로듀서의 컨펌이 떨어지자마자 긴장이 탁 풀렸을 것이다.

솔로 활동과 그룹 활동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니,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을 테지.

지금까지의 괴로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몸에 쌓인 피로를 건들고, 기절해버린 것이다.

“깨우지 말게. 자는 동안만이라도 행복…….”

“하양아아…….”

진소유가 행복한 목소리로 잠꼬대했다.

정말 꿈속에서 행복을 찾은 모양이다.

보조 댄서들이 진소유를 부축하여 연습실 구석으로 옮겼다.

일을 마친 정호환은 수석 프로듀서 강동현과 같이 연습실을 떠났다. 그 옆엔 케이어스를 맡은 1팀장도 함께였다.

1팀장이 진소유의 스케줄을 간단하게 읊었다.

“소유의 음방 활동은 2주로 했습니다.”

“3주 정도는 했으면 좋으련만. 2주로는 소유가 아쉽지 않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워낙 뒤에 기다리는 일들이 커서…….”

“음.”

진소유와 케이어스의 데뷔·컴백 타이밍은 두 달이 채 안 된다.

연초에 솔로 데뷔 계획과 케이어스 컴백 계획을 조율하려고 하긴 했다. 하지만 솔로 데뷔 계획 자체가 너무 갑작스럽게 정해진 것이라, 일정을 맞추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케이어스의 컴백을 미룰 수도 없다.

아이돌에게 시간은 금이다.

“제 기억이 맞다면, 케이어스의 컴백과 케이콘, 그리고 월드 투어까지 있지요.”

“예.”

단독 콘서트 투어는 한국과 일본, 대만을 경유하여 치르긴 했었다.

하지만 월드 투어 콘서트는 첫 번째다. 월드 투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당연히 아시아에 더해 서양권도 포함된다.

4년 차에 들어서서 월드 투어 콘서트를 시작한 이유는…….

“드디어 그럴듯한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확보했으니까요.”

케이어스의 싱글 넘버와 모든 앨범을 포함하여.

카오스, 가이아, 타임, 넥타르, IWY를 거쳐, 마침내 케이어스는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완성했다.

콘서트는 아이돌이 구축한 세계이다.

그 세계는 완벽해야 한다.

콘서트 시간을 늘리려고 콘서트에 어울리지도 않는 곡을 집어넣는 건 KS 엔터의 완벽주의에 위배된다.

그리고 케이어스의 다음 컴백 앨범이 나오는 순간, 케이어스의 세계가 완성된다.

월드 투어를 돌아도 부끄럽지 않을 세계가.

“저희와 컴백 기간이 겹치는 그룹은 있습니까?”

정호환의 물음에 1팀장은 스케줄러를 떠올렸다.

“완벽히 겹치는 그룹은 없습니다. 주목할 만한 그룹이라면, 케이어스보다 이삼 주 일찍 컴백할 SMS 엔터의 ‘아카이브’ 정도겠습니다.”

“아카이브…….”

“정확한 날짜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삼 주라고 말씀드리긴 했지만, 그보다 빠를 수도 있습니다.”

아카이브.

SMS 엔터가 내놓은 최신예 걸그룹이다.

사람들은 아카이브가 4세대의 문을 열었다고 평하기도 한다. 물론 정호환은 그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세대는 시간으로만 정해지는 게 아니야.’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물론 현 케이팝씬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건 시장 팽창이다.

매년마다 신기록이 경신되고 있다.

당장 올해 초만 해도 초동 판매량 160,000장으로 데뷔한 걸그룹이 있었다.

세상에, 160,000장이 데뷔 초동 판매량이라니.

‘븨이에스는 최근 겨우 100,000장을 넘었건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세대를 구분 지을 수 없다.

사람들이야 워낙 딱지와 낙인 붙이는 걸 좋아하니, 지레짐작 ‘새 시대가 왔다’고 떠벌리는 것뿐이다.

보이그룹의 4세대도 현재처럼 판매량의 팽창으로 규정짓곤 하니 말이다. 보이그룹에게 4세대가 찾아왔단 건 케이팝씬 내에서 나름 합의된 사항이다.

‘난 동의하지 않지만.’

혁신…….

1세대와 2세대, 2세대와 3세대를 나누었던 극명한 혁신이 현재로선 부족하다.

만약 시간만으로 세대를 나누었다면, 00년대 초반 겨우 연명했던 아이돌들이 2세대란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현재는 1.5세대라고 평가받는 그룹들이 말이다.

“강 피디는.”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는 불리자마자 축 늘어졌던 자세를 바로잡았다.

“걸그룹의 4세대가 어떤 모습일 거라고 생각합니까?”

“모르겠습니다.”

강동현이 즉답했다.

“애초에 세대란 건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보는 것 아닙니까. 역사가가 과거만을 평가할 수 있는 것처럼, 현재로선 ‘새 시대가 왔다’고 과감하게 말할 순 없을 겁니다.”

변화가 아무리 극명하더라도 현시점에선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소설가 피츠제럴드는 아프리카에 거처를 마련하고 글을 썼다. 그는 어느 날 친구에게 ‘미국의 경기가 많이 안 좋나 봐’란 말을 들었다.

피츠제럴드는 대수롭지 않게 ‘그래? 힘든 시기네’라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고 한다.

미국으로 돌아가 보지 않겠냐는 친구의 말에도, 딱히 갈 필요는 없겠다고 말했다는 모양이다.

역사에 남은 자본주의의 실패 사례 중 하나, 대공황이다. 당시 사람들은 대공황을 불황 정도로 여겼다.

“시대를 비추는 현인(賢人)도 현재를 평가할 순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3세대를 규정지었던 그룹들이 등장하고 나서, 아이돌의 한 시대가 마무리 지어지려는 시점이다.

이 시점에 데뷔한 대형 기획사의 걸그룹은 큰 의미를 지닌다.

정말 새 시대를 열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시대는 어떤 모습인가.

정호환은 재즈와 록의 흥망성쇠를 떠올렸다. 대중문화의 발흥이자 대중문화의 성숙기를.

적어도 재즈와 록의 세대는 시간으로 구분 지어지지 않았다. 스타 플레이어의 등장과 새로운 혁신으로 신세대란 이름을 얻었었다.

“다만, 다름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표는 1팀장의 말대로 판매량입니다. 케이어스부터가 이해 불가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만, 지표대로라면 후속 데뷔한 그룹일수록…….”

“성장세가 가파르고, 성장의 스케일이 크다.”

“……예.”

올해 아카이브는 어떤 경악스러운 성과를 보여주게 될까.

시장 팽창의 수혜를 남김없이 흡수했을 SMS 엔터의 걸그룹은,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을까.

‘분수령이다.’

정호환이 판단했다.

‘올해가 분수령이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있다.

그 벽을 넘을 수 있는가.

판단할 수 있는 건 올해이며,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기회는.

‘올해뿐이다.’

그렇기에 분수령이다.

2세대를 창조해냈던 프로듀서의 감이 말하고 있다.

“근데.”

1팀장이 말했다.

“저는 그것보다 소유 판매량이 더 궁금해요. 애들 솔로로 데뷔할 때 항상 그렇던데, 동현이랑 이사님은 안 궁금하세요?”

정호환의 다리가 풀렸다.

강동현과 1팀장이 황급히 그를 부축했다.

“기껏 무시하고 있던 건데…….”

“그, 그러셨어요?”

“당연히 궁금하지요…….”

케이어스의 최근 초동 판매량은 88만 장이었다. 멤버가 네 명이니 사등분하면, 진소유의 초동 판매량은 22만 장일까?

아니다.

“솔로 앨범 판매량은 그룹마다 천차만별이지요. 천차만별인데…….”

경우가 다양하다.

거의 그룹 초동 판매량의 절반이 되는 경우부터, 등분한 판매량보다 적거나, 등분한 판매량보다 훨씬 적거나.

당연히 판매량은 멤버의 개인 팬덤에 영향받는다. 또한 그룹의 충성도도 관련이 있다.

“천차만별이라 더 무섭습니다. 소유가 의기소침해지진 않을까 걱정이 돼서…….”

케이어스가 멤버별로 솔로 앨범을 발표한다면, 당연히 판매량으로 줄 세우기가 가능해진다.

직접적으로 멤버별 그룹 기여도를 평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첫 타자가 진소유다. 어쩌면 판매량을 올리는 데 가장 불리한 순서일 수도 있다.

거기에다가.

“소유는 케이어스 자타 공인 불통왕이라…….”

SNS에 사진?

거의 안 올림.

아이돌 커뮤니티 플랫폼에 게시글?

거의 안 올림.

개인 라이브 방송?

거의 안 함.

‘세이(아이돌과 팬이 일대다(一對多)로 유료 소통하는 서비스)’?

거의 안 보냄.

특히 ‘세이’ 평판이 극악하다. 한 달에 4,500원이나 냈는데 메시지 서너 개 오는 게 말이 되냐고 말이다.

진소유의 팬들조차 오열하는 지경이다.

하지만 개중엔 진소유의 이미지에 맞는다며, 겉과 속이 일치하는 아이돌이라면서 좋아하는 팬들도 있다. 진소유는 스마트폰에 관심이 없기로 유명하니까.

소통을 안 해? 오히려 좋아. 시크해, 도도해, 멋져, 완벽해, 이렇게 뇌의 필터를 거쳐서 해석하는 것이다.

정호환이 옛날에 성필과 술 마실 때 들은 바로, 성필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그때 정호환은 ‘콩깍지가 얼마나 씐 걸까’라 생각했고, 내심 미안했었다. 고객이 억지로 상품의 장점을 만들어 말해주고 있으니, 제작자이자 판매자는 송구하기 이를 데 없었더랬다.

투철한 팬서비스 정신은 아이돌의 중요한 덕목이다.

“팬덤 충성도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정호환은 진소유가 매우 걱정됐다.

* * *

“드디어 컴백이 일주일도 안 남았어요.”

우효민이 팔짱을 끼곤 당당히 섰다. 그녀의 등 뒤로 망토가 나부끼는 듯하다.

“선주문량도…… 이제 더는 늘어나진 않겠죠. 예약으로 살 사람은 다 샀을 거예요. 그러니, 이 시점에서 성패를 판단할 수 있단 거죠. 자, 대표님, 화끈하게 말씀해주세요.”

“그걸 왜 여기서……?”

홍규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퇴근하려고 짐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김명운과 우효민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러곤 같이 선주문량을 확인하자고 한다.

그에 김명운이 우효민처럼 폼 잡고 말했다.

“저희는 가로 엔터의 산하 해적단이니까요.”

“산하 해적단?”

홍규헌의 옆에 있던 성필이 그녀에게 귓속말로 산하 해적단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었다.

해적 만화가 있는데, 거기서 큰 해적 아래에 모이는 부하들 같은 거라고 했다.

“그냥 말해도 되는데 왜 굳이 귓속말을 해.”

“후.”

“지금 바람 불었어?!”

홍규헌이 타박하자 성필은 마냥 좋다고 웃었다.

우효민은 그걸 보자 가슴이 뛰었다.

‘사내 연애다!’

우효민은 모든 남녀관계가 연애로 연결되는 청춘이었다.

홍규헌은 한숨을 쉬었다.

“뭐어, 그래. 산하 해적단…….”

“사장님과 저희 이음 엔터는 맹세의 술잔을 나눴지 않습니까.”

“아, 맹세의 술잔…….”

직원들끼리 술자리를 한 번 가지긴 했었다.

“그래, 뭐어…….”

홍규헌도 김명운과 우효민처럼 비장하게 자세를 다잡았다.

“김명운 대표님.”

“예!”

“가로 엔터의 안목과 투자가 틀리지 않았단 걸, 지금 이 자리에서 증명하세요.”

“하앗!”

김명운이 폰을 꺼내어 유통사에게서 받은 정보를 보았다. 최종적으로 우효민의 미니 2집 ‘콜 미 설튼리(Call Me Certainly, CMC)’의 선주문량은…….

“50,611장입니다!”

“끼얏호우!”

우효민이 공중제비를 도는 시늉을 했다.

“서, 선주문량이 전 앨범 초동 판매량 수준이에요! 선주문량이 이 정도면 판매량은……!”

솔로 뮤지션에게는 꿈의 수치인 100,000장을 노려볼 수도 있겠다. 물론 초동 판매량이 아니라 총판매량으로 노려볼 수 있겠단 것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긴 하지만,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초동 판매량은 선주문량에서 50% 정도 가산(加算)하면 얼추 맞는다.

“으허어허헝…….”

우효민은 긴장이 풀리자마자 눈물을 쏟아냈다. 김명운이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그녀의 눈물로 김명운의 카디건이 젖어 들었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홍 사장님도 감사해요 저희 보잘것없는 대표님한테 투자해주셔서어…….”

“……?”

“아니야.”

홍규헌도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우효민, 네게선 가능성이 보였어. 보잘것없는 대표란 것도 옛이야기지.”

“……?”

“축하한다 우효민. 우리 산하 해적단이란 게 자랑스러워.”

“으허흐허허헝…….”

눈시울이 붉어진 성필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홍규헌도 우효민과 보잘것없는 김명운을 치하해주려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김명운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우효민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주었다.

“이제 저도 행사에서 4,000만 원, 5,000만 원씩 부르면서 돈 싹쓸이할 거예요……!”

“그래, 올해 여름도 효민이 네 거야. 사랑의 응급 구조 요원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의 봄여름과 행사장을 휩쓸 거야. 온갖 축제마다 ‘콜 미 설튼리’가 울려 퍼지겠지. 그리고 이음 엔터도 단독 건물을 올릴 수 있을 만큼 성장해서…….”

“사장님 이거 보셨어요?”

민경섭이 사장실 문을 경쾌하게 열며 들어왔다. 그는 양손에 폰을 쥐곤 화면을 흥미롭단 듯 바라보고 있었다.

“소유 ‘하나였어’ 앨범 선주문량이 일주일도 안 돼서 100,000장 돌파했대요. 확실하진 않아도 초동은 200,000장까지 갈 수도 있겠는데요?”

“음방 박수 셔틀이 될 거야아아아아아아악!”

우효민이 발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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