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0화
사람이 모두 모이자 서버(Server)가 자리로 와 와인 페어링에 관해 설명했다.
양소민은 식전주에 십수만 원이란 가격이 튀어나오자 순간 얼굴이 굳었다.
‘가격을 알아보고 오긴 했겠지.’
그래도 고작 술 몇 잔에 십수만 원을 써야 한다면 표정이 굳을 만하다.
“저는 괜찮습니다. 차를 가져와서.”
어차피 병째로 주문하는 것이니, 성필이 마시든 안 마시든 가격 차이는 없다. 그런데 또 순간 양소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가격 차이가 없단 걸 모르는 건가?’
양소민은 돈에 민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성필은 그녀의 부름을 받으며 몇 개의 가정을 떠올렸다. 그중 하나는 양소민이 석세스 엔터에서 나오려 한다는 가정이었다.
‘지유도 그랬었지.’
글로브 전원 회사를 뛰쳐나오자고 말이다.
그때 라희는 당황했고, 성필은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었다. 그 뒤로 지유와 라희는 글로브 멤버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아직도 활동하는 걸 보면 멤버 대부분이 반대했단 거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부분일 뿐, 몇몇은 글로브로 활동하는 게 탐탁잖을 수도 있다.
‘소민이가 가능성이 가장 높지.’
양소민은 석세스 엔터를 상대로 계약 무효를 주장하려 한다. 그래서 이 업계에 잔뼈가 굵은 성필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한다.
성필이 내린 가정이 바로 이것이다.
‘글로브 정도면 손에 돈깨나 쥐었을 텐데.’
십수만 원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어쩌면 정산이 만족스럽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성필이 기억하는 김태훈 대표는 돈 문제에 관해선 투명했었다.
글로브의 정산이 제대로 안 이루어졌다곤 생각하기 어려우나, 성필이 기억하는 결국 전생의 일이다.
‘내가 석세스 엔터에서 나오고, 가로 엔터에 들어온 걸로 많은 미래가 바뀌었어.’
소녀연맹이란 그룹의 탄생.
케이어스의 색깔 변화.
이 두 가지가 가장 대표적이다. 그리고 성필이 파악해온 여러 사례와, 그조차 파악할 수 없는 수많은 사례가 있을 것이다.
글로브의 정산 문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리 생각하면 또 가슴이 아파 온다. 성필이 바꾼 미래로 이득을 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피해를 본 사람도 있을 테니.
“식전에 혀를 즐겁게 하실 수 있는 안주류 총 10종으로 먼저 준비했습니다.”
어뮤즈 부쉬.
서버는 10개의 안주가 각각 무엇인지 풍부한 언어로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공손한 인사와 함께 떠나갔다.
안주라고 불렸으나, 보기엔 과자 같았다. 색감이 알록달록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채소나 생선 종류도 있다.
이 안주들을 다 먹을 즈음 새로운 요리가 나올 것이다.
“고마워 소민아, 잘 먹을게.”
“네, 네, 맛있게 드세요…….”
양소민이 잔을 들고 내밀었다.
그걸 본 성필이 급히 물잔을 잡았다. 그리고 또 그걸 본 정진이 잔을 잡았다.
쨍.
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식사가 시작됐다.
“이런 걸 보면 요리가 왜 예술인지 알 거 같아. 공예품 같아.”
“…….”
양소민은 안주를 물끄러미 보았다.
“소민아 왜?”
“아, 아뇨. 너무 예뻐서 먹기 아까워요…….”
정진은 너무 예뻐서 먹기 아까운 안주를 한입에 모두 해치우고 있다. 먹성이 좋은 줄은 몰랐는데, 꽤 잘 먹는다.
양소민은 붉은 원반같이 생긴 것을 포크로 쿡 집어 먹었다. 몇 번 씹지 않아 입 안에서 사라지고,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꼭 저희 같아요…….”
“음식이?”
“네. 무대 한 번 서려고 몇 개월을, 하루에 열 몇 시간을 죽도록 노력하잖아요. 고작 3분을 위해서요. 그런데도 춤이랑 노래 같은 건 남지도 않아요.”
“영상이 남잖아.”
접시를 싹 비운 정진이 말했다.
“그건…… 남는 게 아니잖아.”
“남는 게 아니야?”
“사진으로 찍은 그림 같은 거잖아. 아니, 그림은 실제로 존재하는 상태로 남아 있지. 우리 영상은 음식을 사진으로 찍은 거야. 사진만 남아. 음식의 맛도, 향도, 식감도, 전부 세상에서 사라져버려…….”
양소민은 지금이 새벽 2시인 것처럼 독창적인 감성을 마음껏 뿜어냈다.
“남는 게 있지.”
성필이 말했다.
“마음이 남아. 그날 너희의 무대를 본 관객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보석을 가슴 안에 품은 거야. 그 마음을 뭐랑 비교할 수 있겠어.”
“하지만 마음은…….”
“소민이는 학창 시절 사랑했던 사람 없어?”
“…….”
“그 사람은 지금 만나지도 못하지. 이야기할 수도 없어. 어쩌면 그 시절에도 대화 한마디 못 해봤을 수도 있고. 하지만, 그날 품었던 마음이 남아 있어. 애틋함과, 정열과, 안타까움, 행복, 마음들이 보석처럼 남는 거야.”
성필의 새벽 2시 감성 답변에, 양소민은 또 물끄러미 접시를 보았다. 그리고 포크로 다른 안주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전보다 씹는 시간이 길었다.
“추억이 남는 거네요…….”
“그렇지.”
식전 빵.
그리고 전채 메뉴가 나왔다.
서버는 이전처럼 깔끔하고 입맛을 돋우는 설명을 마치곤 물러났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날이 다 오네. 소민이한테 밥을 얻어먹고. 난 해준 것도 없는데.”
“해, 해주신 거 많아요. 체스판이나 책…….”
“그걸 기억해주고, 고마워. 도움은 됐어?”
“네, 많이요.”
유명한 체스 플레이어가 쓴 영어 원서 책이다.
양소민은 사전을 옆에 두고 1년을 넘어서야 겨우 다 완독했었다. 아이튜브에서 무료 문법 강의도 찾아보면서 말이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영어에 소홀했던 터라, 거의 제로에서 해석해야만 했으니.
하지만 그 덕분에 웬만한 영어책은 단어를 검색하면서 읽을 수 있게 됐다.
몇백 페이지 원서를 1년 넘게 해석한 건, 학생이 수능 지문 수천 개를 완전히 해석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보게 했다.
워낙 난이도가 높아서, 수능 지문을 레벨별로 해석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긴 했다. 다시 하라면 못 할 짓이다.
“사실 중간에 포기하고 싶기도 했어요.”
“그러게. 다 읽은 게 진짜 신기하다.”
“모, 못 읽을 줄 아시고 주셨던 거예요……?”
“장식으로라도 멋지니까. 또 소민이 너한테 유명 체스플레이어의 책은 상징성도 있잖아.”
양소민이 뚱하게 성필을 흘겼다. 그의 장난에 혼자 열심히 반응한 거 같아서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근데 역시 소민이는 대단하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양소민은 분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영어 원서를 전부 읽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물론 그녀의 성격상 티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성필이 칭찬해주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유현이 덕에 포기 안 했어요.”
글로브의 멤버 최유현을 말하는 것이다.
“유현이가 그랬어요. 한국어는 세계에서 1%도 안 되는 인구가 쓴다고요. 그런데 영어는 공용어라서 세계의 99%가 쓴대요. 이 책을 다 읽을 쯤이면, 나머지 99%의 생각을 글로 읽을 수 있대서……. 99%의 생각이 궁금하지 않냐고…….”
“나도 마음이 울리는 말이네. 우리 회사 리카도 영어를…….”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양소민도 굳이 되묻지 않았다.
성필은 계속 대화에서 소외되었던 정진을 보았다. 그녀도 성필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성필이 미소를 지었다.
정진은 그걸 보다가, 다시 접시 위에 올라온 음식들에 집중했다.
낯 가리는 건 처음뿐이었던 듯하다. 다시 옛날로 돌아왔다. 아닌가, 옛날보다 더 심한가. 아예 무시하는 거 같은데.
“그런데 꽤 비싼 곳으로 왔네.”
“이사님을 뵙는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갑자기 정진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약간 흥분한 사람처럼 말도 빨랐다.
“얘가 팀장, 이사님보다 돈 많을걸요? 막 아무거나 얻어먹어도 돼요. 아무거나 시키, 켜, 키세요.”
양소민이 핼쑥해져선 정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례한 농담이었다. 그걸 힐난하려는 듯했다.
정진도 당황했다.
학과에서 겉돌다가 우연히 술자리에 초대받은 사람이, 무리해서 농담을 던졌다가 분위기가 싸해진 것 같은 상황이다.
정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만 달싹이던 때, 성필이 풋 웃었다.
“여기 단일 메뉴잖아. 나 보고 2인분을 먹으라고? 그렇게 많이는 못 먹어.”
“아, 아, 그른가…….”
정진이 하하하 웃으면서 빈 접시를 포크로 쿡쿡 찔렀다.
‘소민이가 나보다 돈이 많다고?’
이해할 만하다.
당장 리카도 성필보다 돈이 많다. 아니, 리카만이 아니라 소녀연맹 멤버 전원이 성필보다 돈이 많다.
‘오토마타’ 앨범을 판 것만으로 소녀연맹 멤버들은 제작비 제외하고 몇억을 벌었다. 거기에 광고, 공연, 콘서트까지 합치면 억이 우습겠지.
글로브는 소녀연맹보다 판매량이 낮으나, ‘상대적’으로 수익이 낮은 것이다.
멤버들은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이 상상도 못 할 정도의 부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그럼 정산은 문제가 없나?’
첫 번째 메인 메뉴가 나왔다.
아까부터 양소민이 정진을 힐끔힐끔 본다. 정진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지만, 별다른 제스처는 보이지 않는다.
‘정진이한테 고민이 있나?’
고민이 있지만, 하기 힘든 종류인가?
‘그래서 정진이가 아니라 소민이가 나한테 연락을 한 건가?’
모를 일이다.
성필은 손바닥보다 작은 튀김 요리를 몇 갈래로 잘라 조금씩 먹었다.
“하아.”
양소민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정진이 계속 시그널을 무시해서인 듯하다.
결국 양소민이 결심을 굳힌 것처럼 성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사님.”
올 게 왔다.
“응.”
“고민이, 있어요.”
그녀는 잠시 우물쭈물했다.
“아, 근데, 팀 내의 인간관계? 고민이라서, 그게, 이것도 비밀 유지…… 그런 거에 포함되나요?”
“발설했을 때 글로브의 이미지에 타격이 온다면,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되지. 직관적으로, 글로브의 수익이 줄어들 만한 이야기.”
가장 대표적으로는 범죄 사실 등이 있다.
물론 고발의 의무가 먼저이긴 하지만, 복잡한 문제다.
기획사는 누구보다도 아티스트의 이미지를 지키고 싶어 한다. 애초에 그게 계약상의 의무다.
아무리 아티스트가 개차반 같은 짓거리를 저질러도, 그의 명예와 존엄을 보호해야 한다.
물론 아티스트도 명예와 존엄,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소속 그룹과 기획사에 피해를 줘선 안 된다.
쌍방의 계약이니 말이다.
“…….”
양소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끙끙대며 고민하다가, 묘안이 떠올랐는지 눈을 번쩍 떴다.
“이건 그러니까, 교우관계예요! 저는 이사님한테 교우관계 상담을 받고 싶어요! 친구간의 관계요!”
“내가 상담 대상으로 적합하다고 여긴다면, 얼마든지.”
“진아, 그으, 그치? 교우관계 상담 맞지?”
정진은 아까 농담을 실패한 게 마음에 걸리는지, 우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소민은 머릿속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정리했다. 그리고 최대한 논리적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두 번째 전채 요리가 나올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됐다.
“요약하면…….”
성필은 접시엔 손도 안 대고 양소민의 이야기에 집중했었다.
“지유 때문에 팀워크가 안 맞는다?”
“…….”
양소민은 성필의 요약이 너무 직설적이라고 느꼈다. 마치 지유가 글로브를 망치는 것처럼 표현하는 듯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얼마 안 가 지유가 글로브를 개판 낼 거 같긴 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가? 엘릭 씨랑 윤상열 사이에서 윤상열이 승리했을 때부터?”
“아뇨. 투표로 결정된 거니까 지유도 승복했었어요. 문제는 이후에 벌어진 일 때문이에요.”
“어떤 거?”
“지유의 파트가 다른 멤버에 비해 적었어요.”
“그건…….”
양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유는 그걸 보복이라고 생각해요.”
감히 자신에게 반기를 든 멤버에게 내리는 벌이자, 보복.
“……처음부터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어? 파트 배분이 발표된 때부터 지유가 윤상열한테 반기를 든 부분까지.”
“네. 제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 * *
“10초야 10초!”
지유는 파트 배분을 확인하자마자 역정을 냈다. 함께 부르는 파트와 보컬이 없는 파트를 제외하고, 지유에게 할당된 부분은.
“10초밖에 안 된다고!”
가장 파트가 많은 위세라의 25초보다 2배 이상 적다. 아니, 그래, 위세라는 메인 보컬이니 파트가 많다고 치자.
“바로 위에 노아랑 50%, 5초나 차이 나!”
노아는 15초다.
그리고 노아 위는 대부분 1초나 2초 차이였다. 다들 포지션에 맞게 비슷비슷한 것이다.
“야 노아, 이게 말이 돼?”
“…….”
노아는 지유가 어떤 의미로 묻는지 알고 있다.
노아는 아직도 한국어가 서툴다. 레코딩 때는 전력을 다해 발음을 교정하지만, 아직도 뭉개지는 발음이 있긴 하다.
둘 사이의 보컬은 개성의 차이지, 실력의 차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런데 노아에게 무려 50% 많은 파트가 배분된 것이다.
“말이…….”
노아는 지유의 분노에 바들바들 떠는 수밖에 없었다.
“마, 말 안 된다…….”
“그치? 보복이잖아. 이거 누가 봐도 보복이잖아! 윤상열 그 새끼가, 맞지?”
지유의 분노는 라희에게로 향했다.
라희의 파트는 20초다.
“라희야, 이거 이상하잖아? 그렇지? 리더가 우리 프로듀서님한테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명백한 비꼼이다.
과거 윤상열 문제로 감정이 격해졌을 때, 지유는 라희와 윤상열을 관계를 과장하여 비꼬았다.
둘이 같이 랑데부를 하라느니, 아방튀르를 떠나라느니.
당연히 라희는 치욕감에 얼굴을 붉혔으나, 상황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참았었다.
“리더는 그룹과 회사 사이의 가교잖아. 네가 아끼고 감싸는 피디님이라도, 이번엔 말씀드려야 하지 않아?”
지유가 보란 듯이 파트 배분이 표시된 종이를 라희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최유현이 보다 못해 둘 사이로 가려고 할 때.
“응, 알겠어.”
라희는 웃으면서 지유가 내민 종이를 받았다.
“말씀드릴게. 이번 미팅 때 말씀드릴게.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니까.”
“……어, 그래라, 꼭.”
몇 시간 후, 프로듀서인 윤상열과 글로브 간에 레코딩 관련 미팅이 시작됐다.
멤버들은 윤상열을 작업실로 모였다.
이것도 윤상열의 변화 중 하나였다. 웬만하면 작업실에 멤버들을 들이지 않았던 그가, 이젠 걸핏하면 작업실로 오라고 한다.
“그래.”
윤상열은 멤버들과 차례로 눈을 맞추며, 인공피부를 붙인 사람처럼 어색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오느라 고생했다.”
임시 동맹 노아는 이마를 탁 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자연스럽게 대하라고 했더니, 누가 봐도 ‘X 같은데 참는다’란 티를 내고 있었다.
“곡명은 다들 미리 봤듯이 ‘Chemical Impact’다. 원래 화학반응이라는 뜻의 ‘Chemical Reaction’으로 하려고 했는데, 임팩트가 없어서 바꿨다.”
……농담한 건가?
케미컬 리액션에 임팩트가 없어서 케미컬 임팩트로 바꿨다고……?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이 곡에 얽힌 이야기를 하자면.”
안 궁금한데.
“원작자는 영국인이다. 영국인‘들’이지. 영미권은 팀을 이뤄서 작곡하는 시스템이 보편적이다. 작곡가 팀에 이름을 붙여 한 사람처럼 활동하지. 그런데 내가 이 곡을 찾은 건, 그 팀이 해체한 이후였어. 사용 허락을 맡으려고 내가 직접 영국으로 갔지. 팀원들과 접촉하는 데 며칠, 설득하는 데 또 며칠. 그리고 라이센스에 관해 논의하느라 또 며칠. 수정 허락을 맡는 것도, 성질이 더러운 놈이 있어서 꽤 힘들었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말은, 이 곡은 바다 건너온 귀한 몸이란 거지.”
“…….”
“듣자마자 독창적인 느낌이 있었지? 걱정하진 마라. 내가 기적의 작·편곡 능력으로 음악성과 대중성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
이런 이야기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미 아이스 브레이킹이 아니라 본론이었다.
“이 곡의 강점은 짜임새다. 예술 작품이야. 가사를 보면 알겠지만, 청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가 어려워. 이 곡은 오직 너희만의 이야기다. 그래서 불리한 점을 하나 안고 가야 하지. 너희가 청자를, 너희의 이야기로 감동시켜야 하는 거다. 그.”
윤상열의 본론이 본론2가 되기 전, 라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윤상열은 순간 불쾌한 티를 냈으나, 시야에 들어온 노아를 보곤 화를 가라앉혔다. 그는 임시 동맹 노아의 매뉴얼을 착실히 따랐다.
“라희.”
“여쭐 게 있어요.”
“뭐지?”
“파트 배분에 관해서예요. 지유의 파트가 눈에 띄게 적어요.”
“지유는 메인 댄서야.”
“보컬 실력의 부족함을 이유로 들기엔, 다른 서브 보컬 라인들의 파트는…….”
지유의 예상과는 달리, 윤상열의 충실한 수족(지유의 주관) 라희는 착실히 지유를 변호했다.
“지유보다 50% 이상 높아요.”
윤상열은 몇 개월간 이발하지 않았다.
이젠 단발이라고 불러도 충분할 정도의 머리칼을, 그는 짜증을 담아 여러 번 쓸어 넘겼다. 헤어 제품에 신경을 쓰는지 남자치고 머릿결이 상당히 좋았다.
“안무가의 퍼포먼스도, 보여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라희는 윤상열의 언어를 즉시 해석했다.
‘보여줄 건 다 보여줬는데 왜 납득을 못 하지?’
라는 뜻이다.
혹은.
‘이것도 이해를 못 할 만큼 머리가 안 좋다니, 참,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군. 너희들을 이끄는 내 처지가 불쌍할 정도다.’
일까.
아마 지유의 난이 없던 세계선에선 저대로 말했을 게 분명하다.
“브릿지 이후의 하이라이트가 끝난 시점, 지유가 중심에 선 댄스 퍼포먼스가 있다.”
“그건.”
참지 못한 지유가 입을 열었다.
라희는 낭패한 기색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유는 참지 않았다.
“1절 하이라이트에도, 2절 하이라이트에도 있잖아요? 1절 중앙엔 라희가, 2절 중앙엔 정진이가 서요. 말하기도 입 아픈데, 둘은 저보다 파트가 거의 2배는 많아요. 마지막 하이라이트에 선다는 이유로, 저한테 파트를 적게 줬다? 그걸로 제가 납득하겠어요?”
“보여줄 건 다 보여줬는데…….”
라희가 긴장했다.
윤상열이 라희의 1차 번역본으로 응수해왔다.
“왜 이해를 못 할까…….”
그때 윤상열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지유의 뒤에 선 노아였다.
노아는 호들갑을 떨었다. 어떻게든 제스처를 크게 하여 윤상열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심호흡하란 듯 팔을 가슴 아래에서 위로 자꾸만 움직였다.
“…….”
윤상열은 2초간 눈을 감고 명상했다.
그리고 눈을 떴다.
“브릿지 이후 하이라이트란 건 곡의 백미다. 특히 이 곡에선 짜임새의 절정이지. 하지만 하이라이트란 보컬이 지속되는 구간만을 의미하지 않아. 음악이든 비즈니스든 남녀관계든 끝나고 난 후가 중요해. 끝나고 난 후, 절정의 고비를 넘어선 순간, 여운. 가장 중요한 부분이란 이야기다. 그걸 너한테 맡긴 거야.”
“궤변, 하.”
지유가 기어코 비웃음을 흘렸다.
“궤변이라고 생각 안 하세요? 브릿지가 끝나는 2분 40초. 그리고 하이라이트가 끝나고 메인 멜로디로 들어서는 3분 이후. 저는 거기서 6초간 춤을 춰요. 6초. 가사 한마디 없이 6초, 그냥 춤만. 심지어 독무도 아니고, 단지 중앙일 뿐. 1절이랑 2절 때 라희랑 정진이가 한 것보다 훨씬 못한 환경에서요. 거기에 서는 게, 10초밖에 안 되는 파트를 감내할 가치가 있다고요?”
“그래.”
“하, 하하, 하아.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릴까요? 그냥 보컬 끝난 시점에 무대 채울 사람이 필요한데, 제가 메인 댄서라서 조금 오래 박아 넣는 거잖아요. 제가 춤을 끝낸 3분 8초가 지나고도, 곡은 20초가 더 이어져요. 당연히 저는 그 20초간 중앙에 있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멤버가 중앙에 서고요.”
“……이것도.”
윤상열이 말에 한숨을 담았다.
라희는 아까보다 훨씬 긴장했다. 윤상열이 라희의 2차 번역본으로 응수할 기세였다.
“이것도 이해를…….”
“이해? 제가 바보인 줄 알아요? 제가 이 곡을 이해 못 했다고요? 솔직한 심정이 아니라, 솔직한 생각을 말씀드릴게요. 그냥 저 엿 먹이시는 거죠? 전에 대단하신 피디님께 반발하고 도망갔다고.”
“…….”
윤상열은 지유 대신 다른 멤버들을 보았다.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답하거나 사인을 주는 멤버는 없었다.
“……그래.”
윤상열은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미팅은 3시간 후다. 머리 좀 식히고 다시 모이지.”
“지금 불리하니까…….”
“3시간 후, 라고 했다. 나가.”
“…….”
글로브 멤버들은 작업실을 나섰다.
지유는 끝까지 윤상열을 노려보다가, 자기 분에 못 이기곤 빠르게 뛰쳐나갔다.
“지유야!”
라희가 불렀으나, 지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