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화
엡실론의 리더 임정문. 그리고 멤버 롱.
둘은 정수기 앞에서 물을 받으며 담소를 주고받았다.
“롱, 회사 오는 거 그거 같지 않냐. 겨울 방학 직전 등교하는 거.”
“지랄 개 감상충처럼 씨불이지 말고 나랑 사업할 거 대답이나 해.”
“넌 아가리 터는 법 안 고치면 사업해도 망해.”
“누가 물어봄?”
“너 말버릇 안 고치면 어차피 망할 건데 내가 왜 같이하냐고.”
“형님, 고견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임정문은 비아냥으로 돌려주려다가, 복도 저 멀리서 다가오는 후배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 롱도 마치 짠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글로브의 정진이었다.
“정진아 안녕.”
임정문이 반갑게 인사했다.
정진은 그를 흘끗 보더니.
“네, 안녕하세요.”
차갑게 한마디하고 지나쳤다.
둘은 사라지는 정진을 물끄러미 보았다.
임정문이 텀블러 뚜껑을 닫으며 혀를 찼다.
“어떻게 연습생 때부터 활동 4년 차까지 저게 안 고쳐지냐. 사실 우릴 벌레로 생각하는 거 아닐까?”
“뒤통수 때리고 올까?”
“미쳤냐.”
“꼴 받긴 해. 쟤 데뷔한 거 우리가 벌어다 준 돈으로 한 건데. 속상하다 속상해.”
“그러게나 말이다. 쟤 싸가지 없는 것보다 네가 낫다.”
“그럼 저와 함께 사업을 해주시는 겁니까?”
“아니.”
“넌 그냥 죽…….”
그들을 뒤로하고, 정진은 연습실로 들어왔다. 그 즉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또 누구랑 마주쳤어?”
다리를 찢으며 몸을 풀던 위세라가 물었다. 정진의 이상한 태도가 익숙한 듯했다.
어차피 놀리려는 거다.
정진은 대답하지 않고 구석에 가서 앉았다.
위세라는 안 그래도 심심했다. 좋은 건수를 잡았다. 그녀는 슬금슬금 정진의 앞까지 기어갔다.
“선배님? 아님 후배님?”
“신경 꺼.”
“너 그 버릇 언제 고칠래?”
“무슨 버릇.”
“잘생긴 사람한테만 차가워지잖아.”
“내가 언제. 프레임 씌우지 마.”
“프레임은 뭔.”
“아 제발 지랄 좀 하지 마.”
정진이 툴툴거리는 것을 보며 위세라가 깔깔 웃었다. 위세라의 말이 사실이라 정진은 부끄럽고 화가 났다.
정진은 괜히 잘생긴 사람만 보면 차가워진다. 그건 열등감 때문이었다.
외모 때문에 생긴 열등감.
동료 아이돌들과 비교하면 평범하고, 칭찬받을 땐 ‘예쁘다’보다 ‘귀엽다’는 말만 듣는다.
못 먹을 감을 보면 뿔이 난다고 하던가.
정진은 외모적 열등감을, 외모가 뛰어난 이들에게 가시를 세움으로써 해결했다.
종종 이런 사람이 있다. 자신과 연이 없을 이성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사람이 말이다.
중증이 되면 이성에 연연하지 않는 자신이 쿨하고 멋지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 진짜 멋진 사람은 이성에 관심이 없는 거지’라면서.
“근데 너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
“그만해라아…….”
위세라는 큭큭 웃으면서 정진을 달랬다.
정진의 웃긴 점.
못 먹을 감을 보면 뿔이 나지만, ‘쟤 정도면……’이라는 마음이 들면 부끄러움을 탄단 것이다.
외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이성으로 인식하지 않으려고 하고 가시까지 세우면서, 자신과 급이 맞다 싶으면 금방 이성으로 인식해버린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연애 감각이다.
“얘들아, 이제 시작할까?”
라희가 박수를 치며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그녀들은 짧은 휴식 시간에 아쉬움을 남기고 포지션을 잡았다.
연습 시작.
거울에 비친 자신들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퍼포먼스의 완성도를 향상시킨다.
그런데 멤버들의 시선이 점점 한곳으로 모였다. 지유였다. 그녀는 명백하게 의욕이 없어 보였다.
라희는 그런 지유에게 무어라 말하려다가, 벌집을 쑤시는 거라 판단하곤 그만두었다.
라희는 최근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위기관리 능력이 크게 높지 않단 걸 깨달았다.
‘박 이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연습은 그렇게 어정쩡한 분위기로 마무리됐다.
“퇴근이다!”
정진은 신이 나서 밴에 올랐다.
밴 안은 멤버 전원이 탑승하여 북적거렸다. 그 북적거림 안에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게 정진의 낙 중 하나였다.
‘어제 못다 본 영화 마저 다 봐야지.’
숙소 앞에서 밴이 멈춰 섰다.
멤버들이 차례로 내리고 숙소 안으로 향했다.
숙소 현관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누군가 정진이 손목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진아.”
양소민이었다.
그녀는 다른 멤버들이 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지 확인했다. 딱히 두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멤버는 없었다.
양소민은 정진을 끌고 입구에서 살짝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다.
“왜?”
정진은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내비쳤다.
옛날부터 그랬지만, 양소민은 최근 들어 훨씬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런 상태가 1년쯤 되었을까.
처음엔 걱정했던 멤버들도 이젠 양소민을 신경 쓰지 않게 됐다. 딱히 문제가 있다기보다, 양소민도 나이를 먹으면서 성격이 변한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어……?”
“이미 사람 다 끌고 와 놓고 뭐래는 거야.”
“아, 미안…….”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니고.”
정진은 멋쩍어선 신발 굽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양소민은 말수는 줄었지만, 걸핏하면 사과하는 버릇은 아직도 그대로인 모양이다.
“넌 지유가 한 말 어떻게 생각해?”
“……뭐, 저번에 윤상열 그 새끼한테 한 말?”
제2차 지유의 난.
지유는 윤상열에게 대놓고 ‘정신 나간 놈’이라고 말했었다. 아니다, 정신병이 있다고 했었나. 아무튼 심한 말을 퍼부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음. 나는…… 좀 달라.”
“그, 그치? 그렇지?”
“그 새끼는 정신 나간 놈은 아니고, 그냥 개새끼야.”
“아…….”
“성질 더럽다고 정신이 병든 거면 세상 사람 절반은 환자잖아. 그 새끼는 걍 쓰레기? 정도.”
“아, 저, 저…….”
양소민은 정진이 이렇게 답할 줄은 몰랐다. 애초에 그걸 물어본 게 아니었으니.
“그, 그거 말구…….”
“아니면 뭐?”
“지유가…… 그랬잖아. 최고의 아이돌은 망상, 이라고…….”
그걸 진심으로 바라는 건 윤상열이 유일하다고.
최근 윤상열은 바뀌었다. 양소민이 추측하기로, 변화의 기점은 윤상열과 엘릭의 경쟁이었다.
글로브 멤버들이 차기 앨범 프로듀서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었다. 그때부터 윤상열은 부드러워졌다.
부드러워졌다고 해봤자 인격모독과 욕설을 하지 않고, 무시와 비웃음을 날리지 않게 됐다 뿐이지만.
아무튼 큰 변화이긴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변했는데, 추상적인 목표를 내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최고의 아이돌, 음…….”
정진은 팔짱을 낀 채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최고의 아이돌, 이라…….
과거의 윤상열은 직접적으로 글로브의 실력 부족을 탓했었다. 그리고 이렇든 저렇든 자기 눈에 만족스러운 퍼포먼스를 만들라고 했었다.
그런데 요즘엔 ‘최고에 이르러야 한다’거나 ‘최고의 아이돌이 되려면……’ 같은 말을 한다.
“망상 같아? 진이 네가 듣기에도? 그러니까, 현실적이지 않은…….”
“모르겠어.”
“아…….”
“난 말야, 아이돌로 3년을 살면서 참 여러 가지 깨닫고 그랬거든. 그중 하나가,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그룹의 성공엔 크게 기여할 수 없단 거야.”
연예계에서의 성공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한다.
운이 3이고, 나머지 7은 기획사의 기획력.
아이돌의 능력은 그 7 안에 들겠지만, 과연 얼마나 높은 비율을 차지할지 모르겠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최고의 아이돌이란 건 멤버 개개인의 능력이 가장 뛰어난 상태를 뜻하는 게 아니지 않을까? 최고를 이루는 요소가 많을 텐데…… 그 새끼가 우리한테 요구하는 건 보컬, 댄스, 표현력? 뭐, 그 정도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윤상열 그 새끼가 말하는 최고의 아이돌은…….”
망상이다.
그리 말하려던 정진의 입이 움직이길 멈추었다. 양소민이 분한 듯 아랫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나는…… 최고가 되고 싶어.”
정진은 왜 양소민이 분해하는지 눈치챘다.
아이돌 개인이 최고를 노린다면, 할 수 있는 건 연습 정도밖에 없다. 그 외엔 기획사가 잡아주는 스케줄을 잘 소화하는 것 정도일까.
그런데 능력이 최고가 되기 위해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라면, 아이돌 개인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겠는가.
양소민이 연습에 바치는 노력은 무엇을 위한 게 될까.
“아니, 연습이 쓸모없단 얘기는 아니고.”
정진이 황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양소민은 의미 모를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연습해. 옛날보다 훨씬 많이. 내 능력이, 최고가 되는 데 단 1%의 기여밖에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1%를 완전히 채우기 위해 연습하는 거야.”
그러니 쓸모없는 건 아니다.
양소민은 이미 그걸 알고 있다.
모래성에 모래 한 알 더하는 게 노력의 값어치일지라도, 양소민은 부단히 해나간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하고, 또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니까.
“……그래.”
정진은 그리 답해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진이는 어때?”
“어?”
“최고가 되고 싶어?”
정진은 부끄러움을 숨기려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진지충처럼 보이지 않으려 일부러 가볍게 답했다.
“되고 싶지……. 근데 방법을 모르겠어. 평가 기준이 공개되지 않는 서술형 시험을 치르는 거 같아서, 모르겠어.”
“그냥 시험이 아니잖아.”
“응?”
“팀 시험이야. 그리고 우리 팀엔 1등을 딱히 바라지 않는 애가 있는 거야.”
“……아.”
지유를 말하는 것이다.
양소민은 할 말을 쥐어 짜내려는 것처럼 양손을 포개곤 꾹꾹 주물렀다.
“이럴 때는 어떡할지 모르겠어…….”
비즈니스팀에 균열이 일어났을 땐 어떡해야 할까. 팀원 개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성공의 척도가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 20대 중반에 이르도록 배우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어른들도 명확한 답을 모르는 것일 테지.
“라희도 지유한텐 뭐라고 안 하구…….”
“야, 라희가 지금 지유한테 뭐라고 하면 진짜 난리 날걸?”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는 라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실천하고 있다.
“2,000년 전이었으면 라희랑 지유 둘 다 도끼 들고 생사결 펼쳤어. 그리고 지금쯤 한 명은 머리가 쪼개져 있겠지. 좀 치열한데, 아마 라희가 이겼을 거 같아.”
양소민이 작게 웃었다. 그러나 농담으로 풀어졌던 얼굴은 금세 또 시무룩해졌다.
“매니저님들도 방법을 모르시는 거 같아…….”
“음, 옛날에 박 팀장님이 해주셨던 얘긴데. 그룹 내에서 파벌이 걸리면 답이 없대. 그니까, 뭐랬더라, 선생이 학생들 교우관계에 간섭하는 거? 그런 거라더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란 뜻이다.
외부인이 이러쿵저러쿵한들, 당사자들 사이의 감정은 그들만의 것이니까.
“그, 그러셨어?”
양소민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정진은 의아하게 여겼다.
“그으, 그게, 실은…….”
양소민이 내막을 말해주었다.
정진은 이번에야말로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팀장님이랑 약속을 잡았다고? 만나기로?”
“으, 응……. 상담할 어른이 박 이사님밖에 생각이 안 나서…….”
“…….”
“왜 그래……?”
“아니, 이사님이라고 하니까, 팀장님이 엄청 성공한 사람처럼 들려서. 이사? 이사. 아니, 박 팀장님이?”
정진은 20대 때의 성필을 떠올렸다.
‘정진아 안녕.’
‘오, 정진이 키 컸어? 어? 안 컸다고? 어쩌라고. 누가 물어봄?’
‘아, 아니 아니! 널 싫어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배운 건데, 요즘 네 나이대 애들이 쓰는 말투라고 해서…….’
정진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미친, 팀장님이 이사라고? 와, 세상이 진짜 어떻게 되려나 보네.”
“너도 같이 가줬으면 해서…….”
“어? 나도? 그거 때문에 불러낸 거야?”
“응…….”
“왜?”
“정진이 너는…… 되게 침착하잖아.”
“내가?”
“옛날부터 그랬잖아. 윤 피디님 앞에서든, 박 이사님 앞에서든. 거리감을 두는 게 뭔가, 내 눈에는 어른처럼 보였어…….”
“…….”
그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아니, 그렇게 보이는구나.
어른처럼 보인다, 라…….
정진은 이성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본인의 업무에만 몰두하는 커리어 우먼이 연상됐다. 그 시크함과 쿨함이 매력이 되어 사람이 꼬인다.
그야말로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정진의 콧대가 높아졌다.
“아, 하긴. 넌 진지한 자리에 안 어울리지.”
“맞아, 박 이사님 보면 맨정신으로 못 있을 거 같아. 아까 최고가 되고 싶냐고 물은 것도…….”
“너랑 생각이 비슷한지 물어보려는 거였어?”
양소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이 지유와 비슷한 마음가짐이었다면, 이런 부탁 자체를 할 수 없었을 테니.
양소민이 성필을 만나려는 건, 이 난국을 타개할 해결책을 얻기 위함이다.
매니지먼트의 신(윤상열과 싸우고 석세스 엔터에서 탈주함)인 성필이라면 답을 알지 않을까. 무엇보다, 지유는 성필을 곧잘 따르곤 했었으니까.
성필은 멤버들도 모르는 지유의 약점이나 속사정을 알 수도 있을 듯하다.
실낱같은 희망이지만, 양소민은 그 희망이라도 잡지 않곤 못 배기겠다.
‘이사님께 직접 말씀드렸었으니까.’
김태훈이 양소민을 불러냈던 자리에서, 그녀는 성필과 만났다. 대화 끝에 양소민은 그의 앞에서 선언했었다.
아이돌이 싫다.
그래서 도망가고 싶지 않다.
싫어하는 것에게 이기고 싶다.
양소민은 눈치나 보면서 시간이 흐르는 걸 관망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상황의 중심에 선단 게 거북하기 그지없지만, 그래서 싫지만, 도망가지 않고 싶다.
“같이 가줄래?”
“그래, 뭐.”
정진이 씩 웃었다.
“너 혼자면 불안해서 못 보내지.”
양소민의 얼굴이 환해졌다. 혼자 성필을 본다면 맨정신을 유지할 수 없겠지만, 어른스러운 정진이 함께라면 안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