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35화 (635/760)

635화

믹스테입 하자.

에리카는 일단 그 요청을 깡그리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아지트의 풍경을 살폈다.

눈앞에 선 리카.

그리고 구석에서 오들오들 떠는…….

‘아, 누구였더라? 웨이퍼센트…….’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

어, 그래.

분홍 머리 걔.

또 분홍 머리 걔 근처에 서 있는…….

“……수련 선배.”

에리카가 이마를 짚었다.

“이사님이라는 게 하민 선배셨어요?”

“왜? 이사 맞잖아.”

“이사님이라고 하면 정호환 이사님이라고 생각하죠 보통은…….”

“왜 거짓말했다는 것처럼 말하니?”

“정보의 누락도 거짓말이랑 같잖아요. 소설에서도 정보를 위장하거나 누락시키는 걸 ‘트릭’이라고 불러요. 서술 트릭요. 속이는 거라구요.”

“그건 속이는 게 아니라 일종의 유희야. 그러면 히가시노 게이고는 세기의 거짓말쟁이니? 아니면 ‘백야행’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이해 못 할 만큼 머리가 나쁜 타입? 잘 들어.”

“박수련 너 멈춰. 나 그거 나중에 읽을…….”

하민이 제지했지만.

“두 사람은 전혀 서로를 모르는 것처럼 묘사되고 접점도 없는 듯 보이지만, 실은 연인이야.”

박수련이 잠시 뜸을 들였다.

“내 해석으로, 둘이 연인이란 거야. 아무튼, 둘이 사랑을 주고받는 묘사가 있어야만 연인이니? 연애편지라도 주고받아야 해?”

“아…….”

하민은 안심했다. 책 소개 줄거리를 보면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니까.

“넌 거짓말의 뜻을 모르니? 잘못된 정보가 거짓말이야.”

에리카는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박수련은 ‘무조건 자기 말이 맞는’ 사람이다. 논리적으로 박수련은 거짓말이 한 게 아니기도 하다.

그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려면 윤리가 필요한데, 박수련은 윤리를 거부하고 있으니 할 말 다 했다.

어차피 전부 에리카를 이 자리에 끌고 오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으니, 됐다 이젠.

에리카는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리카, 믹스테입이라니?”

“그건 제가 설명할게요.”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가 리카의 근처로 다가왔다.

그는 RRBKZ라는 프로듀싱 크루의 존재와 창립의의, 그리고 이후의 프로젝트까지 순차적으로 설명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사무라이 걸즈예요.”

“……?”

에리카는 아주 옛날에 잊어버린 기억을 끄집어냈다. 약 1초 후 떠올랐다.

옛날에 글로브의 대기실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노아라는 일본인이 ‘사무라이 걸즈’인지 뭔지를 하자고 했었다.

아, 헛소리가 아니라 의외로 체계적인 계획이었구나.

“그런데 노아 씨는요? 오늘은 안 오셨나요?”

“노아 씨는 향후 접촉할 생각이에요.”

“……?”

뭐지?

에리카는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면 노아가 꺼냈던 ‘사무라이 걸즈’라는 단어는 뭐지? 같은 믹스테입 프로젝트에다가, 같은 뮤지션을 섭외하고, 컨셉도 비슷한 거 같은데.

‘노아 씨가 어디서 이 계획을 들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여긴 비밀 조직이라고 하지 않던가.

게다가 노아는 석세스 엔터 소속이다. KS 엔터의 대선배인 하민이나 박수련과 말을 섞을 일이 있을까?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 정도면 말을 섞어봤을 법하긴 하다. 그런데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는 노아와 이야기한 적도 없는 기색이다.

‘……싱크로니시티(synchronicity, 共時性)?’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즉 완전히 독립된 사건임에도 의미를 지니는 우연을 뜻한다.

공시성에 신 존재 개념이 개입하면 예정조화(豫定調和) 이론이 된다.

즉,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와 노아의 아이디어 일치는 신의 안배이거나 완벽한 우연의 일치다.

에리카는 불가지론자라 우연의 일치 쪽으로 무게추를 두었다.

“어…… 일단.”

에리카가 입을 열자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가 귀를 쫑긋했다.

‘에리카 씨만 들어오면 계획이 거의 완성 돼!’

사실 에리카가 가장 큰 난관이었다.

동시에 가장 기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에리카는 믹스테입 ‘서울 시티 보이’를 발표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는 ‘서울 시티 보이’를 매우 고평가한다. 만약 회사 차원의 프로모션이 있었다면 차트를 뜨겁게 달구었을 것이다.

“현실성이 없어요.”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는 수분이 제거된 미라처럼 쪼그라들었다.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또, 저는 딱히 창작 모임에 속하고픈 마음은 없어서…….”

케이어스는 차례로 솔로 데뷔 계획이 있다.

최초는 진소유였고, 그 후로 멤버들이 솔로 데뷔할 것이다. 그러니 에리카는 거기에만 신경을 쏟아도 모자라다.

믹스테입에 쓸 기력은 없다.

“죄송합니다.”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가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하민이 겨우 받아 넘어지는 것을 면했다.

“수련 선배, 이제 용무는 끝인가요?”

에리카는 적의를 담아 박수련을 보았다.

이만큼 휘둘리고 나니 선배를 향한 존경심을 표하고 싶지도 않았다.

“끝이야.”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네 앞에 선 애는 안 끝난 거 같아.”

안 끝났다고?

에리카는 박수련에게서 리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 끝나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

리카는 볼 안에 할 말을 가득 쌓아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에리쨩.”

에리카가 온기 서린 미소를 머금었다.

연습생 때처럼 순수한 미소.

리카와 마주 볼 때면 지어지던 것이었다.

“리카쨩, 왜?”

“나는 있잖아, 에리쨩처럼 되고 싶었어.”

“고마워.”

“에리쨩은 모든 게 완벽했어. 사랑받으려면 에리쨩처럼 되야 한다고 생각했어.”

“거듭, 고마워.”

“그런데 난 에리쨩처럼 될 수 없어.”

연습생 시절의 리카는 에리카에 비하면 외모가 바랬었다. 에리카의 옆에 서기만 해도 괜히 어깨가 처졌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리카는 에리카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이 줄어들었다.

특히 거울 근처에서는.

“에리쨩이랑은 거울 옆에 서고 싶지 않았어. 내가 너무 못나 보여서. 내가 에리쨩의 반만 닮았어도, 그렇지 않았을 텐데.”

“소유가 해준 말인데, 평생을 거울 앞에서 살 순 없는 거야. 거울은 외면만을 비추지만, 타인은 외면과 더불어 여러 가지를 비추거든. 리카, 내가 보기에 너는 충분히 빛나.”

“충분히, 지?”

침묵이 답을 대신했다.

“충분할, 뿐이지?”

에리카는 리카의 체면을 세워주려 어떤 말이든 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리카의 눈은 너무나 진지한 빛을 담고 있었다.

타인의 눈은 거울과 달리 여러 가지를 비춘다. 에리카는 리카의 눈에 비치는 자신이 거짓말쟁이이길 바라지 않았다.

“나는 에리쨩처럼 빛나고 싶었어. 눈이 부실 정도로, 사람들이 나를 보기만 해도 눈을 피하게 하고 싶었어.”

“리카쨩, 빈말처럼 들리겠지만, 지금의 너는 나 못지않게 아름다워.”

“외면만이 아니야. 그 다정한 성격도, 귀가 황홀해지는 노래 실력도, 눈이 뜨이는 춤도, 모든 걸 닮고 싶었어. 난 에리쨩이 되고 싶었던 거야. 에리쨩은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최고의 아이돌이야.”

에리카는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했다.

다른 이들도 오글거려서 낯이 뜨거워져 있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에리카를 제외한 이들은 한없이 진지하게 리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에리쨩과 마주 보고 싶지 않았어. 에리쨩은 아이언맨이고, 나는 호크아이니까. 그래도 멤버들과 함께라면 괜찮아. 소녀연맹의 리카는 케이어스의 에리카 못지않게 빛날 수 있어. 소녀연맹의 리카라면, 그냥 리카와는 달리 최고가 될 수 있어.”

나는 없어 널 구할 초능력도.

바로 날아갈 Mk.1 슈트도.

“내 아이돌의 길은 에리쨩의 뒤를 쫓는 거였어. 참, 정말로…….”

그래 난 쩌리인 걸.

“부끄러운 길이었어.”

그래도 꽤 멋진 쩌리라구.

“더는 에리쨩처럼 되고 싶지 않아.”

위기의 순간 날아갈 순 없어도.

“난 에리쨩을 꺾을 거야.”

달려가, 꽤 가까운 거리라구.

“소녀연맹의 뒤에 숨지 않을 거야.”

보잘것없는 나지만.

“이시카와 리카(石川梨花)로서, 사쿠라바 에리카(桜庭絵梨華)와 같은 높이에서 마주 보고 싶어.”

실수투성이 이런 나지만.

“박 이사님이 말씀하셨어. 말씀해주셨어. 벚꽃 핀 정원(桜庭)보다, 돌과 강(石川)이 자연 그대로인 들판이 더 좋으시다고.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 배꽃은 벚꽃보다 아름답진 않지만.”

그래도 Hero야 난!

“반드시 열매를 맺어.”

리카가 허리를 살짝 숙이곤 손을 내밀었다.

“에리카, 내가 마주 볼 수 있는 기회를 줄래?”

모두 숨이 멎은 것만 같은 정적이었다.

에리카는 리카를 내려다보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허공에 박혔다.

어떤 마음이 그녀의 가슴 안에 피어났을까.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에리카가 다들 들으란 것처럼 말했다.

“다들 기억하실 거예요. 3세대를 장식했던 보이그룹의 삼파전이요. SON(Son of Nation), 부테스, 그리고 WTP. 후발주자에다가 빠르게 해체한 SON은 예외로 두고…….”

에리카는 들었던 고개를 다시 내렸다.

머리 숙인 리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WTP는 10년대 초반에도, 중반에도, 4년 가까이 부테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어요. 겨우 인지도를 얻은 건 4년 차 초중반. 그때까지도 부테스와 비교하는 게 미안할 수준의 초동 판매량과 음원 순위였고요. 그런데, 그게 5년 차에 가까워지고, 6년 차엔 비교할 수 없는 수준까지 추월했었어요. 네, 기적이죠.”

에리카가 리카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강제로 펴게 했다.

둘의 눈이 맞았다.

에리카가 위, 리카가 아래.

“역사상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단 한 번으로 기록될 기적. 리카, 네 계획은 여러모로 틀렸어. 첫째, 소녀연맹은 케이어스를 따라잡을 수 없으리란 거. 둘째, 넌 나와 같은 높이에 설 수 없어. 내가 앞, 네가 뒤. 아킬레우스가 고작 100m 앞의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처럼.”

리카의 경험으로, 이건 에리카가 두 번째로 가면을 벗은 순간이었다.

첫 번째는 성필과 함께 그녀를 찾아 나섰던 바닷가에서였다.

이번이 두 번째.

첫 번째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민얼굴이 드러났다. 패배를 용납하지 않고, 숨 쉬듯이 승리를 추구하는 자의 얼굴이다.

“솔직히 이기겠다느니, 꺾겠다느니, 앞지르겠다니, 기분이 나빠. 여길 봐.”

에리카가 다키스트의 하민을 가리켰다.

“KS 엔터의 역사가.”

그리고 븨이에스의 박수련을 가리켰다.

“곧 케이팝의 역사야. 내 선배들이 역사고, 나 또한 그렇게 될 거야.”

“아니.”

리카가 어깨를 짚은 에리카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아. 그리고 WTP도 부테스를 따라잡았고, 추월했고, 아득히 멀어졌어.”

“너를 WTP와 비교하는 거니?”

오만하게?

“역사상 단 한 번 존재했던 기적과 너를 비교한다고?”

그래!

“에리카를 이기는 방법이 기적을 만드는 거라면, 기적을 만들 거야.”

리카는 그 이름을 입에 담으려 했다.

혀로 발음하기도 민망해지는 이름.

감히 자신과 비교하는 게 죄송스럽기까지 한 이름.

그러나 이 순간 꼭 뱉어야만 하는 이름.

“나는.”

리카는 말했다.

“WTP가 될 거야.”

그건 바람 같았다.

에리카의 웃음은 불현듯 찾아왔다.

저항할 새 없이 피부에 닿는 바람처럼.

“리카, 너는 연습생 때와 달라진 게 없구나? 정말…….”

이윽고 에리카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워. 그거 알아? 나는 네가 케이어스 데뷔조로 뽑힐 줄 알았어. 메인이 아니라 사이드 멤버로. 어디까지나 케이어스의 서브 포지션으로서 나를 돋보이게 할 멤버인 줄 알았지. 아, 그런데, 히어로의 사이드킥조차 되지 못했구나. 불쌍한 리카. 현실을 직시해. 너는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듀서.”

정호환 이사가.

“공식적으로 ‘최고가 될 수 없다’라고 판단한 재목이야. 대한민국 최고의 심사위원이 엑스를 줬다고.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런데도, 소녀연맹 없이 나와 마주 보고 싶은 거야?”

“나는 심사위원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게 아니야.”

리카는 심사위원 같은 소수의 권위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아타시(나), 아이돌이니까.”

아이돌이기에.

“무대 앞에서 우릴 보는 관객부터, 저 지구 반대편에서 폰으로 우리의 무대를 보는 사람까지. 나를 보는 최초의 한 사람부터 최후의 한 사람까지가, 내 기준이야. 답해줄게, 맞아. 소녀연맹 없이 에리쨩과 같은 자리에 서고 싶어.”

“…….”

에리카는 끝끝내 리카의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를 보았다.

“제 섭외는 사람이 모두 모였을 때 다시 해주세요. 최소한 윤곽이라도 있어야 결정을 할 테니까요.”

“……네?”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는 삐쩍 마른 미라에서 수분을 머금은 선인장으로 변했다.

“그 말은 그러니까, 노아 씨를 섭외하고……?”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계획에 이름부터 덥석 올리고 싶지 않아요. 가보겠습니다.”

에리카는 하민에게 허리를 숙였다.

이어 박수련에게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웨이퍼센트 분홍 머리 걔에게도 고개를 까딱했다.

마지막으로 리카.

“리카, 도발이 설득의 방법으로 먹히는 건 백화점 정도야. 나니까 화내지 않고 받아준 거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이러면 안 돼.”

그 말을 남기고, 에리카는 아지트를 떠났다.

폭풍이 떠나간 것만 같았다.

“와하아아아 씨.”

하민이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터뜨렸다. 그가 호쾌하게 웃었다.

“유선이 보는 줄 알았네!”

유빈이 동의했다.

“맞아요. 서유선 선배님, 옛날에 방송국에서 마주쳤을 땐 좀 무서웠어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KS 엔터 아이돌 그룹 리더들은 대대로 성격이 안 좋은 거예요?”

“맞아 맞아. 내가 봤을 때 회사 전통이야.”

“……?”

븨이에스 리더 박수련이 무슨 이야기냐며 둘을 보았다. 그녀는 한 소리 하려다가.

“흐, 맞아. 대대로 성격이 더럽지.”

하민처럼 웃었다.

“안 그러고선 못 버텨. 세상의 기대란 기대는 전부 받고 사는데, 어떻게 맨정신으로 착하게만 있겠어. 회사가 일부러 나사 빠진 인간을 리더로 고르는 거지.”

“자기객관화 뭐임?”

그때 리카가 소파에 걸어두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잠…….”

유빈이 만류했지만 리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지트를 나섰다.

“최고가 되려면 일분일초가 급해요! 회사로 가야 해요!”

쿵.

육중한 문이 닫혔다.

유빈은 리카를 향해 뻗은 손을 허망하게 내렸다.

“우리 같은 회사잖아요 후배님…….”

같이 택시 타고 가면 되잖아…….

“누나가 택시비 줄까?”

“……네, 헤헤. 주시면 고맙죠.”

“요즘도 컵라면만 먹는 거 아니지? 좀 더 보낸다.”

“고마워요오 누나아.”

“되지도 않게 애교부리지 마. 죽이고 싶어지니까.”

“……헤, 헤헤.”

RRBKZ.

신입 멤버 리카 영입!

에리카는 보류.

* * *

택시가 가로 엔터와 접한 도로에 멈추었다.

리카는 계산을 마치고 호다닥 택시를 빠져나왔다. 건물 근처로 가니, 입구 옆에서 유우토가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꽤 오래 했는지 땀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눈이 거의 맛이 갔다.

“유우쨩!”

“……으어아아.”

리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우토가 허물어졌다. 칼로리를 소모하겠단 일념만으로 버티고 버티다, 외부 자극이 주어지자 힘이 빠진 것이다.

리카는 빠르게 달려가 조각상 ‘피에타’처럼 유우토를 받아들었다.

“유우쨩 괜찮아?!”

“누, 누나…….”

“그래 유우쨩 뭐든 말해!”

“나, 몇 분, 했어? 저기, 스톱워치, 있는데.”

“…….”

확인해보니 36분이었다.

“유우쨩 대단해! 이 페이스로 36분을 한 거야?! 이 정도면 야식을 먹어도 되겠어!”

“그럴 거면, 왜, 운동을, 했겠어?”

둘은 입구 계단에 앉았다.

그때 유우토는 퍼뜩 생각났단 듯 벗어두었던 외투에서 꿀물을 꺼냈다.

리카가 저녁마다 주는 것이다. 오늘 준 건 아직 안 마셨다. 유우토는 칼로리를 확인하곤, 아주 살짝 입술만 적셨다.

당이 혀에 퍼지자 기력이 솟아나는 듯하다.

“유우쨩, 미안해.”

“뭐가?”

“나는 유우쨩한테 부끄러운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어. 유우쨩이 목표로 하는 영웅의 등에 어울리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나도 다른 사람의 등을 보고 있었어. 미안, 아이언맨이 아니라서…….”

“아이언맨……? 아.”

유우토는 리카의 가사를 떠올리곤 웃었다.

“나 아이언맨 안 좋아해.”

“에엑?! 아이언맨 멋지잖아! 그럼 캡틴 아메리카가 좋아? 음음, 그럼 이해가 되지.”

“난 호크아이가 좋아.”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왜?”

“그야 호크아이는…… 호크아이는……. 아무도 ‘호크아이 도와줘요!’라곤 안 하잖아!”

“그럼 더 멋진 거 아니야?”

“에?”

유우토는 꿀물을 또 한 모금 마셨다.

“아무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사람들을 구하러 다니는 거니까. 훨씬 멋진 영웅이잖아.”

“…….”

리카는 헤 웃고는 유우토를 끌어안았다.

“유우쨩 언제 이렇게 남자다워졌어! 8년 만에 뽀뽀할까!”

“그건 하면 가만 안 둬. 진짜 말로 안 끝나.”

“에, 에, 으, 으응…….”

정말 어른이 되어버렸구나…….

누나는 조금 슬퍼졌어요…….

“음? 근데 유우쨩, 안았는데도 안 도망가네? 옛날에는 땀 흘렸을 때 안으면 하지 말랬잖아! 앗, 그만큼 누나 친밀도가 올랐단 뜻이야?”

“아라 선배한테 들었어. 흘린 땀은 노력의 증거니까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고.”

“아라쨩 멋져!”

“그치? 말투는 조금 이상하지만…….”

정보: 조아라는 아직도 유우토한테 양아치 말투를 쓰고 있다.

“멋진 선배님이야.”

유우토는 시계를 보더니 또 줄넘기를 집어 들었다.

“10분만 더 해야겠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가 또 쓰러지면 어떡하게!”

“아니, 그게, 간식 먹다가 민경섭 이사님한테 걸려서…….”

“그럼 20분 더 해!”

“그런(손나)! 단백질 바는 봐줘도 되잖아!”

리카는 경쾌한 줄넘기 소리를 뒤로 하고 회사로 들어갔다.

“리카.”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1층 휴게 공간 소파에 성필이 앉아 있었다.

“앗, 아타시(저)를 기다리셨나요! 왠지 일하고 돌아와서 마중받는 거 같아 기분이 좋네요! 앞으로도 매일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수고했어.”

“엄청난 서비스가 왔다?! 오늘 누구 생일인가요!”

“음, 굳이 생일을 따지면 븨이에스 수련 씨 생일이지.”

“다른 그룹 멤버 생일을 외우나요?!”

“스타그래프랑 트잇터에 공식 채널 팔로우해두니까 팝업이 뜨잖아.”

“그런가요, 갑자기 흥이 식었어요…….”

음?

그럼 박수련은 생일인데도 RRBKZ 일 때문에 모인 건가? 생일 이벤트를 팽개치고, 에리카를 데리고 아지트까지 온 거고?

……그냥 할 일이 없던 거겠지. 아니면 RRBKZ 멤버들이랑 놀려는 걸 수도 있겠고.

“음…….”

“왜 그래?”

리카는 허공을 보았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수련 선배 이야기는 커트!”

리카가 현관으로 스윽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당당히 가슴을 편 후 성필을 보았다.

“앗, 이사님 아타시(저)를 기다리신 건가요! 도어락 소리가 들리면 현관까지 달려오는 강아지 같아서 귀엽네요!”

“그런 설정이구나.”

“아아아, 일하고 왔더니 힘드네요!”

성필은 하 웃음을 터뜨리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보다 밝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도 수고했어.”

리카도 같이 웃었다.

“넵, 다녀왔습니다!”

하나의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금 최고를 향한 계단으로.

* * *

“아름이.”

1/5.

“설하 언니.”

2/5.

“아라.”

3/5.

“리카.”

4/5.

“나.”

5/5.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

“끝났다.”

장하양이 노트북의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방금까지 소녀연맹 다음 타이틀곡 가이드 버전이 재생되고 있었다.

모두의 가사를 한데 담은, 드디어 윤곽이 확실해진 노래이다.

각 멤버마다 멜로디를 거의 수십 번씩 바꾸느라, 이 가이드를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래봤자 레코딩하러 가면 또 바뀌겠지만, 그래도.

“끄흐으읏.”

장하양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의 커튼을 걷었다.

뉴스에선 초봄이 예정보다 일찍 찾아왔다고 한다. 과연, 햇볕이 어제보다 찬란하다.

창문을 열었다.

‘춥잖아!’

창문을 닫았다.

장하양은 바람을 내버려 두고 햇볕만을 만끽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독점하는 건 썩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콧노래를 불렀다.

이번 타이틀곡의 멜로디를.

춤추듯이 노트북으로 걸어가 스페이스를 눌렀다. 곡이 재생됐다.

텅 빈 사무실이 경쾌한 리듬으로 가득 찼다. 그 리듬으로 귀를 적신 장하양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 노래로.’

하늘에 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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