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3화
리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더 있다간 폭발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붉었다.
“리카, 안…….”
에리카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리카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어찌나 빠른지 스쳐 지나간 에리카의 머리칼이 순간 흩날리기까지 했다.
에리카는 리카가 카페에서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박수련의 맞은편에 앉았다.
“리카가 왜 있어요?”
“몰랐구나. 나랑 친하거든.”
방금 친해졌다.
“얘기하려고 불렀어.”
“주문하고 올게요.”
“그거 마셔.”
리카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핫 아메리카노가 열기를 잃은 채 놓여 있었다.
에리카는 어차피 박수련과 긴 대화를 나누고픈 생각이 없었다. 식은 아메리카노로 입술을 적시자 박수련이 물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 컴백 준비로 바쁘지?”
“그럭저럭요.”
세세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박수련도 같은 회사의 아이돌이니, 컴백 준비가 얼마나 힘든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소유는 더 힘들겠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죠. 솔로랑 그룹 컴백을 병행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소유는 즐기고 있어요. 크게 힘들어 보이지도 않고요.”
“겉으로만 그럴 거야. 물리적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즐기기만 할 순 없겠지.”
에리카는 살포시 입꼬리를 올렸다.
박수련이 저렇게 말하는 건 진소유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소유는 장하양의 뮤비 출연이 확정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친다.
의욕이 얼마나 넘치냐면, 매일의 아침 의례나 마찬가지인 나신(裸身) 감상마저 스킵하고 출근 준비를 한다.
“왜 부르셨어요?”
도란도란 담소나 나누자고 부른 건 아닐 테고.
박수련은 그 질문을 듣곤 희미한 한숨을 뱉었다.
“용무가 있었는데, 이젠 없어.”
“네?”
“이젠 없다고. 바쁘면 올라가도 돼.”
이건 뭐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에리카는 어이가 없었다.
“리카랑 관련된 일이었나요?”
“일정 부분 그랬지.”
“어떤 일요?”
“글쎄.”
리카와의 협상이 틀어진 이상, 박수련은 ‘사무라이 걸즈’에 대해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 사무라이 걸즈 프로젝트가 이어질지는 온전히 유빈의 의지에만 달렸다.
박수련의 제1 목적은 리카를 끌어들여 성필과의 접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2 목적은 유빈의 일을 도와주는 것, 즉 리카를 섭외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선배 노릇 해보는가 했더니.’
리카가 완강히 거절해버렸으니, 사무라이 걸즈고 뭐고 끝이다.
하긴, 유빈이 처음부터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았다. 소녀연맹, 케이어스, 글로브 멤버를 동시에 섭외하는 프로젝트라니.
대기업이 상품 홍보를 위해 임시로 유닛을 꾸려 홍보 노래를 만들 때나 볼 수 있을 풍경이다.
‘애초에 유빈이한텐 시작부터 불가능한 계획이었어.’
* * *
언니 라인의 방을 반으로 가른 벽.
그 벽으로부터 노크 소리가 전해졌다.
백설하는 흠칫했다. 보통 장하양은 벽을 노크하지 않고 방의 입구까지 간다. 그리고 입구 문을 노크하곤 백설하의 방까지 들어오곤 한다.
벽을 직접적으로 두드리는 경우는 없다.
장하양이 백설하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행하는 사려 깊은 배려였다.
“언니, 시간 괜찮으세요?”
“어어, 괜찮아.”
장하양이 벽을 돌아 백설하의 공간으로 들어왔다. 백설하는 누운 몸을 일으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장하양은 심각한 표정으로 백설하의 곁에 앉았다.
“언니, 아까 가사 일로 이야기할 게 있어서 리카 방에 갔었어요.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들렸어요.”
“무슨 일인데?”
“어떤 상황인지 확실하진 않아요. 확실하지 않아서 언니랑 상담하고 싶었어요. 저 혼자 고민해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서…….”
백설하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장하양이 이 정도까지 말하는 걸 보니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제가 들은 건 이래요.”
에, 만나자구요?
지금 말인가요?
아뇨, 싫다는 게 아니라…….
지금은 늦어서, 숙소라서…….
에?!
제가 갈게요!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바로, 네, 지금 바로…….
갈게요…….
“…….”
백설하가 손을 벌벌 떨었다. 그녀의 풍부한 상상력은 단숨에 리카의 처지를 이해하게 해주었다.
리카가 누군가에게 호출받았다.
처음에는 늦은 시간을 이유로 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어떤 말을 듣더니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
마치 약점을 잡혀 협박당하는 것처럼.
“리카가 협박당하고 있는 거야? 누구한테?”
“역시.”
장하양의 눈매는 진실을 꿰뚫는 형사의 것처럼 매서웠다.
그녀는 혹여나 자신이 착각하거나 상황을 편향적으로 해석하진 않나 경계했다.
그런데 백설하마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니,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
“말투로 추측하건대 절대 저희 회사 분은 아니에요. 리카와 친한 사람도 아니에요. 리카가 일본어를 한 번도 쓰지 않았으니까요.”
“혀, 협박이라니……. 그, 그럴 만한 게, 대체, 왜……?”
“저희한테도 말할 수 없는 원인이 있겠죠.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니까, 그 호기심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빠질 가능성은 충분해요.”
“호기심……? 샤워실에서 과감한 포즈로 찍은 사진이 자기도 모르게 유출됐다거나, 그런 거야?”
“샤워실에서 과감한 포즈로 사진 찍으세요?”
“……다들, 안 그래? 바디 프로필, 같은 느낌으로, 샤워실은 조명이, 좋으니까.”
“…….”
장하양은 무엇 때문인지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굳은 얼굴로 백설하를 바라보았다.
“네,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너 동정하는 거지?!”
“존중해요.”
“이해도 아니고 존중한다니?! 내가 이상한 사람이야?! 헬스하는 사람들 탈의실 거울 보고 사진 찍는 거랑 같아!”
“네.”
“단답?!”
“일단 언니 사진첩에 그 사진은 전부 지우세요.”
“지우거든?! 확인한 다음에 지우거든?!”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설하와 장하양은 문을 빼꼼 열었다. 우울한 표정의 리카가 슥 지나갔다.
둘은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언니, 리카 표정 보셨어요?”
“협박당하는 게 틀림없어! 어, 어쩌지? 경찰에 연락해야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마세요.”
“우리가 시간을 끌수록 리카의 지옥은 길어지잖아! 그 X발X끼 잡으면 절대 곱게는 안 보내! 죽여버릴 거야!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할 정도로 고통을 준 다음에 저세상으로 보낼 거야―!”
“진정하세요. 일단 리카한테 이야기를 듣는 게 먼저예요.”
둘은 리카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니 ‘누구신가요’라는, 평소보다 명백히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카, 나랑 설하 언니야. 잠시 들어가도 될까?”
들어오란 허락과 함께 언니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리카는 잠옷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장하양이 백설하에게 눈짓했다.
‘언니, 아시죠?’
‘응, 알고 있어.’
백설하가 부드럽게.
“너 누구 만나고 왔어!”
……부드럽게, 취조하려고 노력했다.
리카는 움찔하더니 시선을 피했다.
“프라이버시예요. 사생활이라구요.”
“사생활?! 너 이 X…….”
장하양이 흥분한 백설하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백설하를 대신하여 앞으로 나섰.
“우린 널 도와주려는 거야! 왜 우리 마음을 몰라! 너 빨리 말하……!”
장하양은 백설하의 입을 막은 후 팔을 뒤로 꺾은 다음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밖에선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와, 분노에 차 절규하는 백설하의 목소리가 동시에 전해져왔다.
리카가 한숨을 쉬었다.
“저흰 이제 사생활에 제약이 없는 거 아닌가요. 이렇게 간섭받을 이유는 없어요.”
리카답지 않게 상당한 저기압이다.
“리카, 먼저 사과할게.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네가 나가기 전에 어떤 사람이랑 통화하는 걸 들었어. 우리가 판단하기에 보통 일이 아닌 거 같아. 네가 걱정돼.”
“…….”
“너만 괜찮다면, 나중이라도 좋으니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리카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귀찮다거나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언니들을 걱정시켰단 게 미안해서, 또 이렇게 걱정해주는 게 고맙기도 해서였다.
“븨이에스 수련 선배님을 뵙고 왔어요.”
“수련 선배님을?”
장하양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아.”
장하양이 무언가 깨달은 듯하다.
“아아.”
장하양이 무언가 이해한 듯했다.
“아…….”
장하양이 무언가 판단한 것 같다.
“하.”
장하양이 무언가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 우리가 걱정하는 것 같은 일은 없는 거지?”
“네.”
리카는 어느새 평소대로 돌아왔다.
“언니들에게 걱정을 끼칠 만한 일은 하지 않아요! 아타시(저)는 강하니까요!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이 있어도 언니들한테 가장 먼저 상담할 거예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카는 장하양을 꼭 안았다.
장하양도 그녀를 마주 안아주었다.
그렇게 오해를 푼 후, 장하양은 리카의 방을 빠져나왔다. 방 밖엔 철퍼덕 주저앉아 오열하는 백설하가 있었다.
난리를 듣고 나온 조아라와 신아름이 뿌에에엥 우는 백설하를 위로하는 중이었다.
“리카가아……! 우리 리카가……!”
“언니, 오해래요.”
백설하의 울음이 뚝 그쳤다.
“……오해?”
“네. 븨이에스 수련 선배님 뵙고 왔대요.”
“……아.”
백설하는 코를 훌쩍하더니, 언제 뿌에에엥 터진 찐빵처럼 울었냐는 듯 실없이 웃었다. 그리고 세면실로 호다닥 도망쳤다.
* * *
[안녕하세요.]
김사무엘의 폰 화면 안의 김마리아가 잔뜩 긴장한 채 인사했다.
카오틱 에너지(가명) 멤버들이 최대한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아, 수현 오빠 안녕하세요…….]
“이야, 마리아가 날 기억하네.”
[같은 톡방에 있으…….]
“하긴 내 얼굴이 한 번 보면 잊기 힘들긴 하지.”
김마리아는 백수현의 장난을 받아주려 헤헤 웃었다. 통화 화면엔 보이지 않는 아래, 김사무엘이 백수현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화면 밖으로 꺼지란 뜻이었다.
백수현은 이를 악물면서 화면 밖으로 꺼졌다. 그리고 통화가 종료되는 순간 김사무엘을 머리를 후려칠 생각으로 주먹을 쥐었다.
다음은 임한결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마리아 누나. 임한결이에요.”
[……누나, 요?]
“저 16살이에요.”
[아…… 아, 안녀, 안녀엉?]
“네, 안녕하세요.”
김마리아가 얼굴을 붉히자 김사무엘의 눈빛이 맹수처럼 날카로워졌다. 임한결은 기겁하면서 화면 밖으로 도망쳤다.
“안녕하세요 콜베르게르입니다. 사무엘 형한테 신세 많이 집니다.”
콜베르게르는 눈치 빠르게 바로 빠졌다.
다음은 유우토였다.
“유우토예요. 안녀하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오빠 잘 부탁드려요.]
“네에.”
[네, 네.]
“네.”
[……네.]
“…….”
[…….]
유우토가 슬쩍 빠졌다.
언짢음이 가득했던 김사무엘의 얼굴이 확 풀렸다. 그리고 이어진 건 언제나와 같이 애정 넘치는 남매간의 대화였다.
“사무엘 저 새끼 마리아 아니었으면 진작 얼굴 곤죽으로 만들었을 텐데.”
백수현이 구시렁댔다.
“쟤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지 않냐? 아니, 자기가 리더라고 무게 더럽게 잡아.”
“그건.”
콜베르게르가 답했다.
“수현이 형이 사무엘 형을 너무 막 대해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뭐? 내가 뭘? 야 넌 폴란드인이라서…….”
“반(半) 폴란드, 반 한국인입니다.”
“그래, 넌 폴란드 문화에 더 익숙해서 잘 모르겠지만 친구끼리 다 이래.”
“폴란드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형은 좀 뒤틀렸어요. 인방이랑 아이튜브, 커뮤니티에 뇌가 찌들어서 유머 감각이 망가졌습니다. 인방에서야 사람을 까대면 비슷한 것들끼리 좋다고 웃어주겠지만 현실 사람은 안 그래요. 건수 하나 잡아서 아득바득 까는 게 재밌는 사람은 없습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인터넷이 아니라 현실에서 단련하는 건 어떻습니까? 저희 팬미팅이랑 라이브에서 형이 입을 열 걸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집니다.”
“…….”
백수현은 우울해져선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누나인 백설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누나. 나야. 아니,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어? 아니야, 나 잘하고 있어…….”
유우토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헤헤 웃었다. 그리고 문득 시간을 보니, 언제나처럼 리카를 만나야 할 때가 됐다.
유우토가 나가려 하자 김사무엘이 ‘선배님?’이라고 물었다. 유우토는 고개를 끄덕이곤 밖으로 나섰다.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퇴근하는 직원들과 계속 마주쳤다.
“안녀하세요. 수고하셔씁니다. 안녀하세요. 안녀히 가세요.”
얼마나 지났을까.
예정된 시간이 되어도 누나가 오지 않았다.
유우토는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폰을 들었다. 그때 2층에서 힘없이 내려오는 리카가 보였다.
리카는 유우토의 앞에 와서도 힘없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유우쨩, 오늘도 수고했어.”
“응…….”
유우토는 리카가 주는 꿀물을 받았다. 둘은 밖으로 나가 회사를 빙빙 돌면서 산책했다.
평소의 리카는 자기 혼자 오늘 있던 일을 떠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말을 하더라도 맥없이 끊기는 일이 많았다.
유우토는 당황했다.
누나와 함께 있는데도 사운드가 비는 게 생소했다. 생소하기에 두려웠다. 그래서 유우토는 정말 오랜만에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리카의 상태가 이상하여 당황하지 않았다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를.
“누나, 나 소녀연맹 선배님들 곡에 기타 세션으로 참가하게 됐어.”
“응, 들었어. 유우쨩 대단해. 기타를 오랫동안 연습한 빛을 보네. 후배님들도 자랑스러워하겠다.”
“자랑스러워.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하고. 사실, 아이돌한테 기타란 건 중요한 요소는 아니잖아? ‘세븐데이’처럼 록을 주 종목으로 삼지 않는 한에야. 기타로 인정받으니까 기분이 좋더라. 아, 그리고 이번 곡 좋은 거 같아. 누나 가사만 봤을 땐 이게 괜찮을까 싶었는데, 곡이랑 같이 있으면 괜찮겠다 싶어.”
“……그랬어?”
리카는 볼을 긁적이더니 됐단 듯 손사래를 쳤다.
“내 가사 얘기는 해서 뭐해. 그렇네, 오늘은 유우쨩의 날이네.”
“그런데.”
유우토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누나인 리카는 그 낌새를 예리하게 잡아냈다.
“무섭기도 해.”
“무서워?”
“응. 내 연주가 선배님들의 곡에 들어가는 거잖아. 음반이란 형태로 후세에 남아.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연주를 기록하는 일…… 심지어 존경하는 선배님들의 곡에…….”
무섭지 않을 리 없다.
“고작 나 따위가 뭐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 아니야!”
리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우쨩이 얼마나 대단한데! 대학도 4년인데 유우쨩은 기타만 6년 넘게 쳐왔어! 기타 대학을 졸업하고 기타 대학원까지 졸업한 거야! 유우쨩의 실력이 어때서!”
“그래도…….”
유우토는 점퍼 주머니에 넣은 꿀물병을 꼭 쥐었다.
“그래도 무서운 거야. 내가 소녀연맹에게 누를 끼칠 수도 있으니까.”
“무슨 소리야 유우쨩! 서, 설마 거절할 거야? 무서워서?!”
“아니, 할 거야. 난 누나의 동생이잖아.”
“에?”
유우토는 걷기를 멈추었다.
리카도 그를 따라 멈춰 섰다.
“누나가 마당에서 16시간 동안 드러누워서 울었던 거 기억해?”
한류 배우가 되겠다면서 벌였던 짓거리다.
아버지가 허락해줄 리 없었다. 아직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딸을 타국에 홀로 보내고픈 부모님이 있을 리 없으니.
“난 누나가 미쳤다고 생각했었어.”
“그랬었어?!”
“응. 그런데, 비록 처음 목표로 했던 한류 배우는 아니지만 아이돌이 됐잖아. 아이돌이 돼서 성공했어. 지금의 누나를 보면 난 용기를 얻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손에 쥔 꿈만을 믿고서 기꺼이 외국으로 향할 수 있는 용기.
리카는 허허벌판에서 성을 일구어냈다.
“아니, 옛날의 누나를 알기에 용기를 얻는 거겠지.”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을 거머쥐었다.
꿈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의 표본이 될 만하다. 하지만 그건 결과만 보는 것이다.
보잘것없는 자신과 번듯하게 성공한 타인.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을 비교할 때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타인의 결과만을 본다.
빛나는 그 한순간만을 본다.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삼켰을 굴욕과 고난, 노력은 보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전까지 걸어왔던 어두운 길은, 성공의 빛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다.
“지금의 누나를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아마 단 한 순간의 용기일 거야.”
한국으로 가겠다고 결심한 한순간의 용기.
그 순간의 선택이 지금의 리카를 만들었다.
“누나는 꿈만 가지고 한국 땅을 밟았어. 누나가 그만한 용기를 냈잖아. 누나의 동생인 내가 기타 연주 따위로 겁을 먹어서야 되겠어?”
리카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찬바람 때문에 눈물이 유난히 뜨거웠다.
“누나가 없었다면 난 이 일을 거절했을 거야. 아니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애초에 아이돌이 되려는 생각조차 안 했겠지. 무서우니까. 그런데 정말 다행히 난 자랑스러운 누나가 있었어.”
뒤를 쫓고 싶은 누나가 있었다.
“내 영웅.”
유우토는 리카의 뒤를 따른다.
리카가 있기에 언제나 용기를 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도망가지 않는다.
도망가면 얻는 건 있다. 안락함과 편안히 죽기까지 남은 시간을 얻는다.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영원토록 모르고, 도망자로 낙인찍힌 삶을 살아야 하리라.
유우토는 안락함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아이돌인 누나가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어. 난 원래 겁쟁이지만, 누나가 있어서 아주 잠깐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 누나.”
내 영웅이 되어줘서.
내가 갈 길을 미리 걸어줘서.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마침내 리카가 눈물을 터뜨렸.
‘안 돼.’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았다.
유우토는 리카가 있었기에 아주 잠깐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었다.
리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보고 따라오는 동생이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래, 난 유우쨩의 영웅이야.’
영웅은 울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빛나는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리카는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물기가 가신 리카의 눈동자에 빛이 차올랐다.
안락함을 택하지 않은 자가 내는 빛이었다.
“유우쨩, 오늘 산책은 이쯤 하자.”
“에?”
성필이 말하곤 했다.
아이돌에게 4년 차는 승부의 기로라고.
봄과 초여름, 3년까지 성패를 판단하고.
늦여름과 초가을, 4년 차에 승부를 가리고.
늦가을과 겨울, 이윽고 그 이상으로 뻗어나간다.
소녀연맹 4년 차, 여기가 쇼넨바(正念場, 가장 중요한 장면)다.
수단, 방법.
내키냐 내키지 않느냐.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아무것도 가리지 않는다.
기요미즈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각오로 무엇이든 한다. 도망가는 습관을 들이면 평생 패배자로 살아갈 뿐이다.
“가야만 하는 곳이 있어.”
배꽃(梨花, 리카)은 벚꽃(桜, 사쿠라)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반드시 열매를 맺어.
봄엔 졌지만 가을에는 이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