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화
“형, 스트링(현악기) 받았어요.”
이번 소녀연맹 컴백 타이틀곡은 거의 윤곽이 완성됐다. 이제 리카의 가사만 붙는다면 금방 가이드 버전까지 나올 것이다.
정지음은 성필을 불러 스트링이 붙은 버전을 들려주었다.
이번 컴백 타이틀곡은 정지음을 포함하여 작곡가 세 명이 참여하여 만든 것이다. 스트링, 즉 현악기 작곡은 다른 사람이 맡았다.
보컬이 없는 inst 버전.
성필과 정지음은 약 4분에 이르는 곡을 조용히 감상했다.
곡이 끝나자 성필이 감상을 말했다.
“어, 곡이 더 쫀쫀해진 느낌이네. 예전보다 괜찮아.”
“그죠…….”
정지음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뭐 걸리는 점이라도 있어?”
“……형. 4분은 너무 길지 않아요? 요즘 곡들 다 3분에서 끊잖아요. 진짜 길어도 3분 중반?”
숏폼 SNS인 클락의 대중화와 성공.
스타그래프의 숏폼인 릴스.
아이튜브의 숏츠.
사람들은 점점 짧은 시간의 콘텐츠를 즐기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그러한 변화는 음악에까지 이어졌다.
가장 유행에 민감했던 미국에선 몇 년 전부터 곡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1분 초반대의 곡이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었다.
아이돌 곡도 그 유행에 반응한 지 오래다.
그 결과, 요즘 나오는 곡의 길이는 약 3분대에 수렴하게 됐다.
“우리 애들 이야기를 다 담은 거잖아. 지음아, 내가 뭐라고 했지?”
“담백하게, 순수하게…….”
성필의 뮤직 프로듀싱 방항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정지음은 그가 제시한 방향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동조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불안할 뿐이다.
곡의 길이가 짧은 게 플러스 요소라면, 이번 타이틀곡 플러스 요소를 하나 없애고 시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과연 곡의 담백함, 그로 인해 부각되는 가사의 진솔함이, 마이너스 이상의 플러스를 불러올 수 있을까.
“너무 조바심 내지 마. 다른 사람들의 유행보다 이 곡의 강점에 더 집중해.”
정지음은 성필의 말을 듣곤 조금은 안심했다.
이렇게 성필에게 믿음을 구할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프로듀서란 건 할 만한 게 아니라고.
잘되면 좋겠지만, 안 된다면 결국 최종책임자인 프로듀서가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니까.
‘아니, 이 경우엔 하양이가 오명을 뒤집어쓰겠지.’
대외적으로 장하양은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의 수장이었으니까.
만약 이번 컴백이 실패한다면, 사람들은 장하양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이다.
실패의 범위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성공의 범위는 어느 정도 통일된 기준이 있다. 이전 앨범보다만 성공하면 되는 것이다.
‘하양이의 프로듀싱이 오토마타를 뛰어넘을까?’
모르겠다.
모르는 일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하는 게, 정지음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거 스트링은 세션 쓸 거야?”
성필이 물었다.
진짜 기타리스트를 데려와서 사운드를 녹음하겠냐는 뜻이다.
무조건 진짜 악기로 녹음하는 게 가상 악기보다 나은 건 아니다. 곡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한번 해보고요.”
“해보고?”
잠시 후, 일렉 기타를 든 백설하가 불려왔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응, 설하야 안녕. 점심은?”
“먹었어요. 이사님은요?”
“나도.”
“…….”
정지음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
깨가 쏟아진다…… 라고 표현하면 적절하지 않겠지만. 아무튼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다리가 하나 놓인 것만 같다.
둘이 얼굴에 걸린 미소부터가 풀어헤쳐진 옷가지처럼 흐물거리지 않는가.
정지음은 쓰읍 고개를 갸웃하며 키보드 스페이스바에 손을 가져갔다.
“설하야, 여기 나오는 기타 직접 연주 좀 해줘.”
“드디어 완성된 거예요?”
“아니. ‘최최최최최최 찐 최종본’이야.”
“……?”
“아마 ‘최최최최최최최최최 찐찐찐찐 찐짜 최종본’까지 있을 거 같아.”
“아, 네…….”
정지음이 곡을 재생했다.
그 순간 백설하의 눈이 돌변했다. 그녀는 기타 사운드를 캐치하자마자 발을 구르면서 박자를 파악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귀에 익자 기타 현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모두 밴드 악기를 다룰 줄 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미세하고 작은 사운드조차 잡아낼 수 있게 됐다.
마치 아무런 생각 없이 클래식을 듣던 사람이, 악기를 배우고 나선 악기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귀가 섬세한 건 뮤지션으로서 큰 장점이다.
“리듬 기타네요. 메인 악기 멜로디는 나중에 넣으시는 거예요?”
“아니, 메인 멜로디는 없어. 너희 보컬이 곧 멜로디야.”
“아, 하긴…….”
멤버마다 가사의 음절이나 길이가 전부 다르니, 통일된 멜로디가 존재할 수가 없다. 멜로디로 통일하자면 가사 수정이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그럼 시작할게요.”
“더 안 들어도 돼?”
“네. 간단한 리프잖아요. 버스(Verse)랑 프리코러스, 두 개로 나뉘고 하이라이트는 프리코러스랑 같은 리프 맞죠?”
“응.”
백설하가 연주를 시작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간단한 리프였다. 몇 번 손가락을 움직여 감을 잡더니, 곡과 완전히 같은 구조를 구현할 수 있었다.
백설하는 버스에서 쓰이는 첫 번째 리듬과 프리코러스와 하이라이트의 두 번째 리듬을 계속해서 번갈아 연주했다.
“음.”
정지음이 신음을 흘리자 백설하가 연주를 멈추었다. 그가 말했다.
“쫀쫀한 느낌이 없네. 설하 실력은 이 정도구나.”
“실망하시려면 처음부터 블루스 록 기타리스트를 데려오시지 그러셨어요?!”
애초에 취미처럼 기타를 배우는 사람인데, 대체 어떤 수준까지 기대했던 걸까.
백설하가 축 늘어지자 성필이 위로했다.
“지음이가 눈이 높아서 그렇지, 잘했어 설하야. 내 귀에는 엄청 좋던데? 옛날에 콘서트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게 보여.”
“……정말요?”
백설하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헤헤 웃었다.
그걸 보며 정지음은 또 쓰읍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약간 달라진 거 같아. 아니면 원래 이랬는데 내가 눈치를 못 챘던 건가…….’
인생 최초의 연애 경험이 보는 눈을 틔워준 건가? 어쩌면 성필과 백설하는 아주 옛날부터 이런 분위기였던 거 아닐까?
모를 일이다.
“형, 그럼 세션맨 불러도 돼요?”
“그래 그거 얼마 한다고. 써.”
리얼 세션 기타가 진짜 곡에 쓰일지 안 쓰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곡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면, 기타리스트든 바이올리니스트든 오르가니스트든 마음대로 불러도 괜찮다.
“……아.”
“왜요 형?”
“우리 회사에 설하보다 기타 더 잘 치는 사람 있잖아?”
“누구요?”
잠시 후.
“안녀하세요.”
유우토가 작업실로 찾아왔다. 방금까지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는지 전신이 땀범벅이었다.
유우토는 작업실에 백설하가 있는 걸 보곤 당황했다. 그러곤 땀 냄새가 신경 쓰이는 듯 괜히 한 걸음 슬쩍 물러났다.
백설하는 그걸 보자 조아라가 떠올랐다.
‘알지 저 기분.’
연습생 시절 조아라도 연습하고 나선 리카나 신아름을 붙잡고 땀 냄새가 나냐고 물어보곤 했었다.
거기에다 연습할 땐 남자 직원과 마주치는 걸 은근히 피하기도 했었다. 민감할 시기니까.
이렇듯 조아라는 옛날엔 꽤 신경을 썼었는데, 요즘은 그런 기미가 딱히 없다. ‘내 일이 원래 이런 건데 뭐가 부끄럽냐’며 말이다.
“유우토, 기타 좀 연주해줄래?”
“네, 알게써요.”
백설하가 자신의 기타를 유우토에게 넘겼다. 그는 당황하며 기타를 받았다.
“이, 이거 선배님 기타…….”
유우토는 아이튜브에서 백설하의 곡 커버 영상을 많이 보았었다. 가끔은 백설하가 직접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었다.
유우토는 ‘카오틱 에너지(가명)’의 메인보컬로서, 소녀연맹의 메인보컬인 백설하를 롤모델로 삼았다.
게다가 그는 학생 시절 밴드부이기도 했으니, 누군가의 기타를 받는단 게 굉장히 무거운 의미로 다가왔다.
심지어 존경하는 선배님의 기타라면 더더욱.
“써도 괜찮아.”
“아, 가, 감사하미다…….”
유우토가 백설하의 기타를 신줏단지처럼 받았다. 그리고 아까 백설하가 했던 것처럼 곡을 듣고 연주했다.
유우토의 연주를 듣고, 백설하는 정지음이 말했던 ‘쫀쫀하다’는 느낌이 무언인지 바로 감이 왔다.
확실히, 기타를 백설하보다 2배 이상의 세월 동안 만져왔으니 스킬이 남다르다.
연주를 마친 유우토는 부끄러움을 숨기며 미소 지어 보였다.
“곡이 조아요. 선배님들 타이틀인…….”
“우와 뭐야!”
정지음이 감탄을 터뜨렸다.
이어서 성필이 입을 틀어막았다.
“이건 녹음해서 가로 엔터의 가보로 남겨야 해…….”
“형, 레코딩 스튜디오 예약 잡아요! 지금 당장―!”
“그래야겠다.”
성필이 폰을 꺼냈다.
그걸 본 유우토는 얼이 빠졌다. 그러곤 경악하며 되물었다.
“에엑 이거 소죠렌메(소녀연맹) 선배님들 곡이자나요! 제 세셔늘……!”
“네가 연주를 잘해서 그런 거야. 잘됐다. 네 연주가 선배의 곡에 남는 거잖아.”
유우토는 2차로 얼이 빠졌다.
겨울 들판에 혼자 선 사람처럼 넋 놓던 유우토가 말했다.
“……에?”
이시카와 유우토, ‘카오틱 에너지(가명)’보다 빠르게 데뷔(기타 세션).
* * *
KS 엔터 1층엔 카페가 있다.
KS 엔터 소속 아이돌들의 굿즈와, 아이돌의 이름이 붙은 메뉴를 판매한다.
아이돌 팬들에겐 일종의 성지이며, 한국 여행 상품 중 단골 방문 장소로 포함되기도 한다.
1층 카페는 저녁이 지나면 일반인이 이용할 수 없다. 이후로는 직원들을 위한 공간이 된다.
그곳의 구석 자리.
리카는 븨이에스의 박수련과 마주 보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저녁이라서 늦었다.
지금 숙소라서 만나기 힘들다.
이런 변명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내가 갈까?’
가기 힘들다고 하니 박수련이 한 말이다.
리카는 감히 대선배인 박수련에게 ‘선배님이 오세요’라고 말할 순 없었다. 애초에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던 것이다.
막무가내인 사람이다.
하지만 리카는 카페에 들어올 때부터 얼굴 가득 미소를 채워 넣었다.
“수련 선배님 안녕하세요!”
“응.”
박수련은 앉으란 듯 맞은편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엔 박수련이 미리 주문해서 가져다 둔 커피가 있었다. 컵홀더에 븨이에스의 화보 이미지가 인쇄돼 있었다.
“옛날부터 꼭 뵙고 싶었어요! 먼저 보자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븨이에스.
성필이 표현하길, 멤버 전원이 백설하인 그룹이라고 했었다. 아니, 쌓아온 경험까지 합치면 백설하 이상일 것이다.
“저 선배님 강제 라이브 인증 영상 많이 봤어요! 대단해요!”
“아, 그거.”
가요대제전 생방송 중의 일이었다.
무대를 하던 븨이에스의 박수련은 얼토당토않은 사고에 휘말렸다. 벨트에 부착해둔 ‘인이어 모니터’가 갑자기 후두둑 흘러내린 것이다.
하필 인이어가 박수련이 다음 스텝을 밟을 위치에 있었다. 그녀의 힐이 인이어 모니터를 박살 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그걸 밟고 휘청였다.
그 결과 인이어 모니터에 연결되어 있던 마이크까지 걸려 풀어헤쳐졌다. 뺨에 테이프를 붙여 연결한 것 따위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박수련은 노련하게 바닥에 흩뿌려진 인이어 장비들을 바깥으로 차버리고 무대를 계속했다.
그리고, 박수련의 모든 보컬이 사라졌다.
그건 븨이에스가 완전한 MR로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단 뜻이었다. 보통은 아이돌에게 숨 돌릴 여유를 주고자, 전부는 아니어도 중간중간 보컬을 삽입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박수련의 목소리가 실종된 지 1분.
스태프가 헐레벌떡 뛰어와 박수련에게 핸드 마이크를 쥐여주었었다.
광명이 찾아왔다.
박수련은 노래하지 못한 1분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시원하게 보컬을 터뜨렸다.
“다들 AR이라고 생각했었잖아요!”
가요대제전.
중요한 무대라서 그런지, 븨이에스도 AR을 과하게 넣었구나. 그래, 노래보다 춤을 보자.
그렇게 생각했던 퍼포먼스였다.
그런데 MR이었던 것이다.
보컬 퍼포먼스가 AR 같다는 건 아이돌에게 흔히 붙는 칭찬이지만, 븨이에스는 정말 그러했다.
기계가 아닌가 싶었다.
“저도 아이돌이니까 뭐랄까, 동경했어요! 대단했어요!”
“쯧.”
박수련이 혀를 찼다.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듯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리카는 당황했다.
방금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눈치채지 못한 역린을 건드렸나?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빠, 빡?”
“스타일리스트 그 등신 같은 게, 벨트에 인이어 붙이는 것도 제대로 못 하고. 죽이고 싶은 거 겨우 참느라 힘들었어.”
‘죽이고 싶었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박수련은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자신의 복장을 점검한 스타일리스트를 불렀다. 그리고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대면서 스타일리스트를 힐책했다.
무대란 건 한 번 올라가면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모든 무대는 완벽해야 한다.
그 무대가, 자신의 실수도 아닌 타인의 실수로 망가진 것이다.
그 스타일리스트는 며칠 후 일을 그만두었다.
“에, 그치만, 그 일로 유명해졌지 않나요……?”
븨이에스 박수련의 강제 MR 인증 영상은 조회 수가 수천만이다. 븨이에스 팬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영상 1위에 해마다 꼽히기도 했다.
“그래서?”
“에?”
“그래서, 뭐? 무대가 망가진 게 없었던 일이라도 돼? 마이너스는 플러스로 상쇄할 수 없는 거야. 각각 다른 일이라고.”
“아, 하이(네)…….”
리카는 기가 죽었다.
박수련이란 인간 자체가 풍기는 아우라부터, 그녀가 지닌 화려한 경력 모두가 그녀를 빛나게 했다.
3세대의 톱 중 하나와 마주하고 있다.
소녀연맹의 7년 활동이 끝났을 때, 소녀연맹은 븨이에스와 같은 위상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븨이에스는 소녀연맹의 목표 지점 중 하나였다. 그런 인간과 마주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서유선 선배님은 안 이랬었는데…….’
너무 과거의 인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박수련이 유독 대하기 어려운 인간이기 때문일까.
“RRBKZ엔 왜 안 들어오겠다고 한 거니?”
다짜고짜 본론이 튀어나왔다.
“……시간이 없어서요.”
“이름만 올려놔도 괜찮아. 그리고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몇 번 오다 보면 익숙해져서 재밌을지. 이 존경하는 선배님과의 생활이 기대되지 않니?”
음.
“한국에 친구는 있어?”
“있어요! 소녀연맹 멤버들이랑 박 이사님이요!”
박수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리고?”
“에리쨩이랑…… 에…….”
“안타깝네.”
“에?”
“사람은 만나는 사람의 수만큼 성장해. 자기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보는 눈이 넓어져. 그런데 너는 그럴 기회 자체가 없구나.”
내 인간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라.
리카는 그리 말하고 싶었다.
박수련의 말엔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어쨌든 일반론일 뿐이다. 예외는 있는 법이다.
리카는 선입견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것이 불쾌했다.
“RRBKZ는 정기적인 모임 같은 건 없어. 안 오고 싶으면 안 오면 그만이야. 이름만이라도 올려놔.”
박수련의 목적이 그게 전부이기도 했다. 그녀는 성필과의 연결점을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어쩌다 만났슴다’에서 명백한 사인을 보냈음에도, 번호까지 주었는데도,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성필에게 앙심을 품었다.
자신이 관심을 표했는데!
그런데, 그렇다면 박수련이 먼저 다가가면 되지 않나?
‘아니.’
박수련이 만났던 모든 남자들은 스스로 다가왔었다. 그들 스스로 박수련의 종이 되길 간청해왔다.
박수련이 할 건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사인을 보내는 것.
‘너는 내 곁으로 와도 돼’라는 아주 자그마한 사인으로 남자를 미치게 한다.
한 번으로 안 되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럼 두 번, 세 번 계속하면 된다.
상대는 박수련이 싫어서 대시하지 않는 게 결코 아닐 테니까.
‘용기가 없는 거야.’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을 보고 겁먹는 병사들처럼 말이다. 도저히 벽이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지레짐작 겁먹고 포기하는 것이다.
그럼 박수련은 문을 슬쩍슬쩍 열었다 닿았다 한다. 즉, 사인을 보낸다. 상대가 용기를 낼 때까지.
유혹이란 그런 거다.
‘그러니까 내가 할 건.’
성필과 연결점을 만들고, 그 연결점을 통해 계속 사인을 보내는 것이다.
박수련은 유혹의 달인이다. 연애의 기술이란 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것이니까.
그렇더라도 이번엔 조금, 아주 조금, 살짝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어쩌다 만났슴다’에서도 대놓고 ‘맞선 행동’을 했었다. 녹화가 끝나곤 먼저 친근하게 다가갔다. 개인 번호도 주었다. 헤어질 땐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눈웃음을 지었다. ‘연락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연락이 없어?’
박수련은 세상의 모든 남자를 함락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게임이었고, 모든 게임에서 승리해야만 한다.
아니, 승리할 게 당연하다.
상대가 자신을 거부하리란 생각은, 박수련의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은 코드였다.
“…….”
리카는 제안을 수락할까 고민하는 건지, 거절의 말을 준비하는 건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침묵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다.
결국 참을성 없는 박수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실패할까 봐 무서워?”
“……네?”
“유빈이 계획 말야. 너도 작곡을 하지?”
“아시나요?”
“소녀연맹 앨범은 옛날부터 들었어. 데뷔곡부터 내 취향이라서.”
무미건조한 말투와 달리, 박수련의 말은 리카가 듣기에 꽤 따스했다.
“앨범 수록곡이라든가, 일본에서 발표했던 ‘러브 미러’ 같은 거 들어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
얘는 작곡이란 걸 단순히 인기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진지함이 느껴진다.
“너도 크든 작든 유빈이랑 비슷한 부류 같거든. 그래서 무서워하는 거야? 실패한 계획에 발을 들인 게 흠집으로 나을까 봐.”
“그런 건…….”
“에리카 믹스테입은 헐레벌떡 달려가서 도와줬잖아. 에리카는 성공할 거 같았어? 성필이가, 대단한 프로듀서님이 도와주니까? 그래서 크레디트에 이름 한 줄 올릴 수 있겠다 싶어서, 바로 달려가서 참여한 거 아니야?”
“……아니에요. 제가 에리쨩을 도와준 건, 케이어스가 소녀연맹에게 도움을 많이 줬기 때문이었어요. 은혜 갚기였다고요.”
“아, 그래. 성필이가 없어도 그 은혜 갚기를 했을 거야?”
맥락은 다르지만 박수련은 정곡을 짚었다.
성필이 믹스테입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에리카가 리카에게 성필이 믹스테입을 도와주는 이유를 듣지 못했다면.
리카는 에리카의 믹스테입 같은 건 모르고, 신경도 안 쓰고, 알더라도 돕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론적이지만 성필이 없었다면 에리카를 돕진 않았겠지. 아마, 에리카가 케이어스가 소녀연맹을 도와줬던 사례를 줄줄이 읊었더라도 말이다.
그때의 리카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에리카를 두려워했었으니.
“맞네. 이기는 싸움만 붙겠다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RRBKZ엔 그럴듯한 프로듀서도 없으니, 어차피 실패하겠다고 꼬리 빼고 도망가는 거잖아.”
“아녜요…….”
“이해해. 아무리 유빈이랑 같은 회사 식구가 되었다지만, 이런 일은 별개지. 아웃풋이 없는 일에 힘을 쏟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 그래, 비전 없는 크루에 들어와봤자 무슨 이득이 있다고.”
“아니…….”
“유빈이랑 하민이한텐 그렇게 말해둘게.”
“아니라고요!”
참다못한 리카가 폭발했다.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박수련의 행태를 더는 못 봐주겠다.
박수련이란 인간이 자신과 맞지 않는단 게 명확해졌다. 100시간 동안 같은 방에서 살아도 절대 친해지지 못할 것 같다.
이런 사람이 꼭 있다.
붙으려고 해도 결합부가 너무나 이질적이라 맞지 않는 인간.
박수련이란 인간에게서 풍기는 불쾌함과 동시에, 리카가 가진 열등감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첫째로!”
리카는 자기도 모르게 성필의 말버릇을 썼다.
“선배님 속이 너무 훤히 보여요!”
“어른이 쓸 법한 말을 쓰네.”
박수련이 다리를 꼬았다.
“애들은 보이는 대로만 보니까 ‘속 보인다’는 말을 안 써. 네가 쓰기엔 과분한데, 그래, 뭐가 보이길래?”
“박 이사님이랑 어떻게 해보려고 저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요!”
“어른이구나.”
박수련이 인정한단 듯 고개를 주억였다.
“아니지만 말야.”
돌연 박수련이 부정했다.
“이런 말씀은 실례겠지만, 수련 선배님은 가벼워요! 가벼운 마음을 지닌 사람한테 박 이사님을 팔 순 없어요!”
“넌 로맨티스트구나. 경험이 없어 보여.”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어른이 아니구나.”
박수련은 그럴 줄 알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아니? 남자는 아주 단순해서, 단순하고 사소한 걸로 행복해질 수 있어. 여자야. 그게 나 같은 사람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러니까 나는 남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능력이 있기에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돈이 있는 사람이 돈을 쓰고 싶은 것처럼. 물론 나로 인해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남자에게만. 이 감정이 이해가 가니?”
“전혀요! 수련 선배님의 가벼운 생각과 엉덩이 따위 알고 싶지도 않아요! 아니, 더 직접적으로, 그런 사고방식은 세상에 존재해선 안 돼요!”
“내가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서 한 말이야. 그 인물은 주인공의 주요한 조력자 중 한 명이고,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치지. 그래서, 넌 무라카미 하루키의 사고방식이 존재해선 안 된단 거지? 네가 한 말 트잇터에 올려도 돼?”
“…….”
리카는 어딘가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커트!”
그리고 다시 박수련을 보았다.
“박 이사님의 사랑은 순간의 설렘이 아니에요! 설렘만으로 접근하는 사람을 박 이사님께 접근시키고 싶지 않아요!”
“네가 무슨 권…….”
“권리의 문제가 아니에요! 하고 싶으냐 하고 싶지 않으냐의 문제예요! 어쩌다 이야기가 이런 흐름이 됐죠?!”
“모르겠는데, 네가 재밌는 애란 건 알겠어.”
박수련이 낮게 웃었다.
“그럼 원래 이야기로 돌아오면, 넌 결국 그런 거네. 유빈이의 계획은 어차피 실패할 테니, 에리카 때와는 달리 참여하지 않겠다. 그런 걸로 이해하면 되겠니?”
리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박수련은 세상을 자신의 렌즈에 맞추려는 것 같았다. 세상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자신만의 규격을 들이미는 것이다.
이런 정신 상태이기에 톱의 자리에 오랫동안 있을 수 있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정상적인 정신으로 대중의 반응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미칠 테니까.
리카도 커뮤니티나 SNS에서 ‘소녀연맹은 거품’이란 반응을 볼 때마다 미칠 것만 같곤 하다. 심지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면 더 미칠 것 같다.
갑자기, 리카는 본인이 이미 어느 정도는 미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쳤으니까 대선배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지.
“반대예요!”
“반대?”
“에리쨩이 있어서 안 해요!”
“음.”
박수련이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그리고 더 말해보란 듯 턱 끝을 까딱였다.
“저희 회사 후배님한테 들었어요!”
‘카오틱 에너지(가명)’의 막내, 임한결.
그는 KS 엔터 연습생 오디션을 보았다고 한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형과 함께 말이다.
최종까지 가서, 심사위원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여기서 3옥타브 미까지 올리면 바로 합격시켜주겠다.’
남자에게 ‘3옥타브 미’를 요구했다.
임한결은 목을 쥐어짰으나, 간신히 2옥타브 후반까지밖에 닿지 못했다. 심지어 후반에 이르자마자 목소리가 무너졌었다.
KS 엔터는 이런 기획사다.
“에리쨩은 그런 곳에서 처음부터 두각을 드러냈어요! 케이어스로 데뷔하고 나서도, 계속, 계속, 계속……!”
자신은 별세계의 존재란 것처럼, 언제나 하늘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면 어느샌가 또 저 멀리 가 있곤 한다.
“소녀연맹과 함께라면, 네, 얼마든지! 얼마든지 에리쨩과 싸울 수 있어요! 근데 저 혼자면, 대체 어떡하라는 거예요! 유빈 선배의 계획은 뭐예요! 노아 씨랑 저랑 에리쨩이 모이면 당연히 스포트라이트는 에리쨩 거잖아요! 저 보고 들러리를 서란 것밖에 더 되냐구요! 아이언맨을 데려왔는데 호크아이가 왜 필요해요! 그러니까 저는 RRBKZ에 들어가지 않아요!”
리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말씀은 부분적으로 옳아요! 저는 성공할 곳에만 가고 싶어요! 소녀연맹에 집중할 거예요! 케이어스를 꺾을 수 있게! 최고의 아이돌이 될 수 있는 곳에서요!”
“…….”
박수련은 무표정으로 리카를 응시했다.
리카도 지지 않고 그녀와 마주 보았다.
이내 박수련이 턱을 괴었던 손을 들었다. 리카는 움찔했다. 그런데 그 손은 위로 향해, 곧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일찍 왔네.”
“에?”
리카는 뒤로 돌아보았다.
에리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