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1화
“……뭔가요 그 구린 네이밍은!”
리카는 ‘사무라이 걸즈’라는 이름을 듣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성필이 제시했던 그룹 이름인 ‘소녀연맹’을 처음 들었을 때 같았다.
무슨 아키하바라 지하 아이돌로 활동하고 있을 법한 그룹명 아닌가.
“그, 그룹 이름이 아니라 프로젝트 이름이라니까요!”
“인종차별적이에요! 한국 보이그룹 멤버들을 모아서 ‘선비 보이즈’라고 하는 거랑 비슷하다구요!”
유빈이 역으로 충격을 받았다.
‘사무라이 걸즈’라고 했을 땐 몰랐는데, ‘선비 보이즈’로 뒤바꾸니 정말 구린 이름이 되어버렸다.
“그룹 이름은 나중에 또 좋은 걸로 바꿀 거예요…….”
유빈은 리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성필을 바라보았다.
하민이 표현하길 프로듀싱의 신.
그는 과연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러면.”
성필이 입을 열었다.
“남은 두 사람은 어떻게 영입할 생각이야? 에리카 씨는 하민 씨가 데려오시고, 노아는 리카처럼?”
“아니요.”
대답한 건 하민이었다.
“제가 에리카한테 제안할 순 없어요. 저는 이름뿐이지만 KS 엔터의 이사예요. 제가 에리카한테 제안하면, 그건 제안이 아니라 거의 명령이나 강요처럼 들릴 거예요.”
아이돌계의 대선배.
거기에다가 KS 엔터에선 시조와 같은 위상을 지닌 게 바로 하민이다.
확실히, 에리카는 하민의 제안을 압박으로 느낄 게 분명했다.
“못미덥지만, 에리카를 영입하는 것도 유빈이한테 맡겨야 할 거예요. 노아 씨도 마찬가지고요.”
“…….”
성필은 대답해준 하민에게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음’ 소리만 흘렸다.
하민은 아까부터 묘하게 성필이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방금에서야 확실해졌다.
‘뭐지?’
곧 그의 사고는 자신이 KS 엔터 소속이란 데까지 이르렀다.
가로 엔터에게 있어서 KS 엔터는 라이벌일 것이다. 회사로 비교하여 라이벌이 아닌, 소녀연맹과 케이어스를 비교하자면 라이벌이다.
어쩌면 그 경쟁심이 KS 엔터 전체를 향할 수도 있다. 그리고 경쟁심이 악감정으로 바뀌는 건 흔한 일이다.
‘내가 들은 거랑은 좀 다른데…….’
성필은 케이어스 멤버들과 어느 정도 연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정호환과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정호환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니 친분을 유지한다고 쳐도.
케이어스에겐 살가우면서 하민 자신에겐 이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이는 건…….
‘여미새(여자에 미친 새끼)인가……?’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꼴불견인 부류가 있긴 하다. 남자와 여자를 대하는 온도 차가 확연히 다른 인간들 말이다.
물론 성필이 여미새란 건 과한 억측이다. 하지만 하민은 이런 추측이라도 하지 않고선, 성필의 차가움을 해석할 수 없었다.
‘프로듀싱의 신은 뭐라고 대답할까? 프로듀싱의 신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프로듀싱의 신은 어떤 말투지?’
성필은 단지 긴장한 것뿐이었다.
하민이 자신을 프로듀싱의 신이라고 불러주었다. 그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저히 프로듀싱의 신이 어떻게 말할지 알 수가 없어,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리카 후배님.”
대화가 가라앉자, 유빈이 진중한 투로 리카를 불렀다.
“RRBKZ에 정식으로 초대할게요. 저희와 함께 씬을 바꿔보시지 않을래요?”
리카는 바로 답하지 않고 성필을 보았다. 그의 의견을 묻는 모양새였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이건 소녀연맹으로서의 공적인 업무 같은 게 아니야. 그냥 리카 개인적으로 모임에 초대받은 거잖아. 사실, 내가 여기 따라와서도 안 됐을 거 같네.”
그 말에 리카는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빈을 향해 미소를 띠었다.
유빈은 그 미소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그의 얼굴도 리카를 따라 미소가 번졌다.
“죄송합니다, 안 할래요!”
* * *
성필과 리카가 돌아간 RRBKZ의 작업실.
유빈은 소파에 축 늘어져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 옆에 앉은 하민은 아까처럼 게임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 분이 지났다.
하민이 헤드폰을 벗곤 말했다.
“너 회사 안 가도 돼? 곧 컴백이라면서. 연습해야지.”
“……어.”
유빈은 큰 충격을 받았다.
케이팝 씬을 변혁하겠단 목적을 가지고 몇 년을 기획해온 프로젝트다.
드디어 첫 발자국을 내디딜 때가 왔다.
그런데 한 걸음 걸으려는 순간, 발판이 무너졌다. 리카가 섭외를 거부한 것이다.
“중국인을 모아야 할까……. 한한령조차 깨부술 정도로 유명한 아이돌을 만드는 거야…….”
“그게 더 비현실적이야.”
“스콜피온즈는…….”
“냉전 붕괴와 맞물린 분위기를 탄 거지, 스콜피온즈는. 문화는 강한 힘이지만, 머리에 총칼을 들이밀고 있으면 방법이 없잖아.”
“형 의외로 진지하게 받아주네.”
“정신 차리고 일어나.”
하민이 유빈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고 일으켜주었다. 유빈은 그 손길에서 위로를 느꼈다.
“형, 만약 이 프로젝트가 가동되면 있잖아. 박 이사님을 고문(顧問)으로 초청하는 건 어떨까? 패키지 딜은 우리끼리 뭐 어떡할 게 아닌 거 같아서.”
“그렇긴 한데, 두고 봐야지.”
“뭘?”
“박 이사님을.”
유빈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뭘 두고 봐?”
“박 이사님의 실력.”
“프로듀싱의 신이라며?”
“소녀연맹 한정이지.”
하민이 게임을 종료했다.
이것도 오랫동안 하니 질렸다.
“원히트원더란 단어는 뮤지션 한정이 아니야. 프로듀서도 그래.”
2세대의 시작을 열었던 다키스트는 수많은 라이벌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
라이벌 아이돌뿐 아니라 프로듀서들도.
프로듀서들이 자신을 믿고 과감하게 푸쉬한 아이돌이 너무나 맥없이 무너지곤 했다.
“박성필 이사님이 KS 엔터를 라이벌로 생각하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비슷하게 보거든. 라이벌이라기보다…… 도전자가 더 맞겠네.”
“박 이사님이 KS 엔터를? 라이벌로?”
“나한테 하는 거 보면 모르겠어? 자그마한 틈도 안 보이잖아. 아마 소녀연맹한테도 그런 정신상태를 강요했겠지.”
정호환도 다키스트 멤버들에게 자주 썼던 방법이다.
다른 그룹들의 무대와 다키스트의 무대를 직접적으로 비교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면전에서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인격모독을 당하는 듯했었다.
너희가 이렇게 하고서도 잘되길 바라냐고.
감히 성공하겠단 말을 하냐고.
너희보다 잘하는 아이돌이 저렇게 많은데, 너희들이 어떻게 감히?
“본인이 멤버들한테 그런 정신상태를 강요했을 텐데, 어떻게 나한테 살갑게 대하겠어.”
“그런가……?”
“우리가 박성필 이사님을 프로듀싱의 신이라고 불렀던 건.”
그를 인정하는 동시에 유머 소재로 삼았던 것이다. 지금은 승승장구하는 그라도, 결국은 KS 엔터를 쫓아오지 못하고 스러졌던 이들과 같은 꼴이 되리라고 말이다.
만약 성필이 현재의 프로젝트를 모두 성공시킨다면, 아니. 차기 그룹을 성공시킨다면, 아니, 그것도 아니다.
‘세상을 향해 광고하듯 떠벌렸던 웨이퍼센트의 영입.’
웨이퍼센트만이라도 성공시킨다면, 그래.
프로듀싱의 신이라고 불러주마.
“그런 의미야.”
“……KS 엔터는, 우리가 가로 엔터에서도 실패할 거라고 생각해?”
“전 기획사에 있는 것보다야 백배 낫겠지. 그런데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을 거야. 가로 엔터는 보이그룹을 프로듀싱한 노하우가 없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너희는 부스트 같은 거야.”
“부스트……?”
“소녀연맹의 차기 그룹을 위해 쌓는 경험치.”
유빈이 아연실색했다.
“아이돌의 성패는 데뷔 후 3년까지 정해진다고 해. 솔직히 웨이퍼센트에겐 더 이상 성장 포텐셜이 없어. 물론 3년을 지나서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둔 소수의 예시가 있긴 해. 근데 본인이 그 소수에 포함될 거라고 믿는 건 천재거나 멍청이밖에 없어.”
그리고 세상엔 천재보다 멍청이가 더 많다.
‘나는 달라’라는 헛소리를 믿는 저능아들이 세상의 태반이다. 그러나 ‘나는 달라’란 말은 세상의 태반에게 허락된 문장이 아니다.
한국 문화계는 소수의 천재가 대중의 멱살을 잡고 캐리한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문화계를 이끈다. 하민은 그런 정호환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형, 너무, 왜 그런 말을…….”
“이용당하지 말라고.”
하민이 유빈의 어깨를 짚었다.
“마음 놓고 있지 마. 가로 엔터가 너희에게 전심전력 투자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온전한 프로듀싱 역량을 투입할 가능성도 거의 없고. 기다리기만 해선 안 돼. 만약 네가 아이돌로서 새로운 전성기에 들고 싶다면, 가로 엔터만 믿고 가만히 있지 말란 말이야. 성공은 누구를 믿고 얻어낼 수 있는 게 아니야.”
어깨를 짚은 하민의 손아귀 힘이 점점 강해졌다. 마치 유빈을 잠에서 깨우려는 것만 같았다.
“너를 믿어야 해. 성공은 네가 이뤄내야 하는 거야. 그래, 박성필 이사님은 대단하지. 그런데, 박성필 이사님은 신이 아니야.”
프로듀싱의 신.
소녀연맹 한정.
KS 엔터 사람들이 장난삼아 붙인 그 별명은, 계속해서 유머 소재로만 남을 것이다.
“너무 그분을 믿지 마. 그냥 새로운 발판이 생겼다고 생각해. 결국 발판에 올라서는 건 너니까, 열심히 해.”
하민이 유빈의 어깨를 놓았다.
“자, 이제 연습하러 가. 겨우 얻은 기회를, 고작 다른 그룹 경험치로 소모되는 걸로 끝내고 싶진 않잖아.”
“…….”
유빈이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 작업실 문이 쾅 열렸다.
박수련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안쪽으로 들어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민이 사둔 케이크를 꺼내어 오물오물 먹었다.
“……저 XX년이!”
하민이 게거품을 물고 박수련에게 돌진했다.
그때 박수련이 달려오는 하민에게로 손바닥을 보였다. 달려오는 개를 제지하는 모양새였다.
하민은 박수련의 머리를 쪼개기 위해 들어 올렸던 게임기를 우뚝 멈추었다.
“여자 샴푸, 트리트먼트, 린스 향.”
박수련의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니치 향수(조향사가 직접 배합하여 소량 생산하는 프리미엄 향수)…….”
그녀는 향이 더 깊이 배어 있는 곳, 소파로 향했다.
“조 말론 런던 우드 세이지 앤 씨 솔트 코롱.”
“진짜 넌 남자 냄새 맡는 달인이다. 이 정도면 공항경비견으로도 취직할 수 있는 거 아니냐?”
“누구야?”
하민이 대답하지 않자 박수련은 유빈에게로 눈을 돌렸다.
유빈은 우물쭈물했다. 왠지 성필의 정체를 밝히는 게 사람을 팔아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 박수련의 언행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그녀는 분명 성필에게 ‘연락해’라고 말했었는데 연락이 없다면서 히스테리를 부렸었다.
심지어 살랑살랑 손까지 흔들며 눈웃음까지 지어줬었다면서.
‘박성필 그 새끼 고자 아니야?!’
유빈은 박수련의 자신감이 참 부럽기도 하면서, 참, 뭐라고 할까, 추하게 느껴졌다.
유빈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너보다 잘생긴 사람 널리고 널렸다’고 말했었다.
그 때문에 유빈은 가족의 부정과 타인의 긍정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살았었다.
훗날 어머니에게 들으니, ‘네가 너무 제 잘난 맛에 살까 봐 걱정돼서 한 말이다’라고 했었다.
박수련을 보니 어머니의 혜안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저런 모습이구나.
“누구냐니까?”
박수련은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듯했다.
유빈은 왠지 모를 죄책감과 함께 실토했다.
“박성필 이사님요…….”
* * *
“이사님, 아타시(저) 때문에 참으신 건가요!”
차가 출발하자마자 리카가 그리 물었다.
“참았다니, 뭘?”
“하민 선배님을 보시고도 팬심을 안 드러내셨잖아요!”
리카는 성필의 다키스트 사랑을 익히 안다.
신아름에게 들은 건데, 일본 활동으로 ‘뉴아사’를 준비할 당시의 이야기다.
웨벡스에는 다키스트의 일본 투어 콘서트 영상 무편집본이 있었다. 성필이 그걸 보며 울고 있었던 걸 신아름이 보았다고 한다.
그것 때문에 신아름은 미친 듯이 ‘뉴아사’의 ‘더 킹’ 무대에 매달렸었다.
성필에게 소녀연맹이 다키스트보다 낫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하민 선배님이 많이 무안하셨을 거 같아요!”
“그랬겠지…….”
성필 본인이 생각해도 반응이 너무 차가웠었다. 아니, 떠올려보면 하민과 단 한마디도 섞은 기억이 없었다.
“다음에 뵈면 사과를…… 아니다. 다음에 뵐 일이 없겠네.”
성필이 RRBKZ의 아지트를 다시 찾을 일은 앞으로 결코 없을 테니 말이다.
리카는 RRBKZ 가입을 거부했었다.
“아쉬우신가요……?”
리카는 성필의 눈치를 보았다.
장하양이 진소유의 뮤비에 출연하고, 올해의 케이콘에서 소녀연맹과 아카이브가 무대 바꾸기를 하는 등.
소녀연맹은 인지도 향상을 위해 여러 일을 진행하고 있다. 성필이 올해를 소녀연맹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 걸즈는 소녀연맹에게 도움이 됐을 수도 있었다.
“딱히.”
“진심을 들려주세요! 친구 계약서를 잊으신 게 아니면요!”
친구 계약 1조는 ‘거짓은 없다’이다.
“정말이야. 유빈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유빈이의 계획은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
“에리쨩이랑 글로브 노아 씨를 섭외할 가능성이 없어서?”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돈이 문제지.”
출연자가 초호화면 뭐 하는가.
돈이 없어서 결과물을 낼 수 없는데.
케이팝의 총아(寵兒)는 뮤직비디오다. 아무리 창의적이더라도, 돈이 없으면 그 창의성을 십분 표현할 수 없다.
“유빈이가 3,000만 원을 악착같이 모았다고 했었지. 그런데 그 돈은 정말, 정말 빨리 사라질 거야. 프로듀싱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곡, 가사, 디렉팅 같은 건 자급자족한다고 하더라도 말야.”
곡, 가사, 춤, 옷, 뮤직비디오.
자, 다 됐다 시작이다!
케이팝은 이렇게 간단한 과정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니, 어떤 사업이든 그러할 것이다.
아주 작은 소품을 하나 개발하는 것만 해도, 문외한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길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 소품이 소비자의 손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고생과 자본이 투입됐을까.
“만약 너나 에리카 씨, 노아가 다 모이더라도 유빈이가 만들 결과물은 보잘것없을 가능성이 커.”
유빈이 옛날에 만든 ‘하나사키 인 서울’은 고작 수백만 원으로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만듦새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지도가 기적적이었다.
“가장 중요한 홍보 수단이 전무해. 그걸 어떻게 홍보할 거야? 소녀연맹 채널? 케이어스 채널? 글로브 채널? 석세스 엔터나 가로 엔터의 공식 SNS? 그럴 순 없지. 이 계획으로 유빈이가 얻을 건 경험뿐이야.”
유통사나 회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메인스트림에서 성공할 수 없는 거구나.
클락이나 아이튜브에서 입소문을 나서 성공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게 물으면, 성필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건 수천만 원으로 로또 한 장 사는 거랑 똑같다.’
방송국이나 유통사의 힘을 빌리고서도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1,000만을 돌파하지 못하는 그룹이 흔하다.
미디어와 기업의 힘을 빌리고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데, 입소문?
제정신이 아니다.
애초에 좋은 곡은 가장 먼저 기업의 눈에 띈다. 기업의 눈에 띄었기에 홍보와 푸시를 받고 대중에게 선보여지며, 그 결과로 성공하는 것이다.
좋지 않은 곡은 그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도태된다.
“유빈이는 생각을 역으로 했어.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먼저가 아니야. 힘을 빌릴 사람을 먼저 찾았어야 했어. 기획사, 유통사, 하다못해 돈 많은 사람이라도 꼬셔서.”
“이사님은 유빈 선배님의 계획에 투자하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기업의 도움을 받는다는 전제하에. 첫째, KS 엔터가 에리카 씨의 활동을 허락할 거란 생각이 안 들어. 특히 너랑 엮이면.”
“저요?”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와의 라이벌리를 구축함으로써 지대한 홍보 효과를 얻어왔어. KS 엔터가 이걸 모를 리 없어. 경계할 거야. 더는 소녀연맹에게 필요 이상의 힘을 실어주려고 하지 않겠지.”
“둘째는요?”
“석세스 엔터가 노아를 내주지 않을 거야.”
“KS 엔터와 같은 이유로요?”
“음, 그거랑은 좀 다른데. 믹스테입이든 기업의 도움을 받든, 석세스 엔터는 노아가 밖으로 겉도는 걸 허용하진 않을 거 같아.”
윤상열이 허락할 리 없다. 그가 자존심을 버리고 프로모션 전략을 재정립한다면 몰라도.
‘윤상열이 그렇게 쉽게 의지를 굽힐까.’
라희가 전에 성필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었다.
윤상열에게 목줄을 채우겠노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글로브 멤버들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한 조치였다. 여전히 글로브 프로듀싱 권한은 윤상열에게 있다.
그리고 윤상열은 글로브 멤버들이 다른 회사의 영향을 받길 원치 않을 것이다.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라이벌리가 유난히 주목받아서 그렇지, 글로브도 톱3에 들잖아.’
4세대가 본격화되고선 바뀌겠지만 말이다.
윤상열이 본격적으로 케이어스, 소녀연맹과의 경쟁을 프로모션 전략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판이 뒤집힐 것이다.
하지만 그건 윤상열의 자존심에 치명타다.
라이벌리란 건 말이 라이벌 간의 경쟁이지, 사실상 글로브에게 언더독 효과를 부여하려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이고, 결국 중요한 건 리카 네 의견이었지.”
“에?”
“안 그래? 패키지 딜이니 뭐니 해도, 결론은 아이돌끼리 합심해서 믹스테입을 만들자는 거잖아. 그건 리카 네 흥미가 중요하지, 회사의 계획 같은 게 중요하진 않아.”
결론적으로 리카는 거부했었다.
흥미가 없단 뜻이다.
“맞다, ‘플로리 걸’은 어떻게 됐어?”
옛날에 에리카의 믹스테입 계획을 도울 때 리카가 말해주었던 것이다.
리카는 자신의 창조성을 실험하기 위해 ‘플로리 걸’이라는 페르소나를 창조했었다.
아이튜브와 트잇터, 사운드 포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카와이 베이스 작곡가라고 했던가.
“순풍만범이에요!”
“어…… 잘되고 있단 뜻이지?”
“하이(네)! 이젠 미국 코믹콘에 초대받는 일만 남았네요!”
“코믹콘이면 그거지? 일본의 코믹마켓 같은 곳.”
“비슷해요!”
“거기에 카와이 베이스 DJ를 초청해줘?”
“사례가 있어요! 나중에 아타시(제)가 미국으로 슝 떠나버려도 이상하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이왕이면 소녀연맹이 가는 게 먼저였으면 좋겠네. 아, 올해 가지?”
소녀연맹은 미국의 음악 페스티벌인 ‘롤라팔루자’에 초대받았으니 말이다. 롤라팔루자 참가는 장하양의 프로듀싱이 끝난 후가 될 듯하다.
“앗, 승부네요! 소녀연맹이 먼저인지 플로리 걸이 먼저인지!”
“안 져.”
“아타시(저)랑 이사님의 승부가 됐다?!”
차가 가로 엔터에 도착했다.
내리면서 성필은 재킷을 벗었다.
슬슬 낮 해가 따뜻했다.
둘은 나란히 사옥으로 걸었다.
“가사는 어떻게 됐어? 이제 리카만 제출하면 끝이지?”
“음, 아직이에요!”
“조금이라도 썼으면 보여줄래?”
“안 돼요! 완성되고 보여드릴 거예요!”
“유우토는 봤다던데.”
“유우쨩 배신자!”
성필은 이해한다.
멤버들은 가사가 완벽해지기 전까지 성필에게 보여주는 것을 꺼리곤 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과, 프로듀서인 성필에게 보여주는 건 큰 차이가 있겠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충분히 고민하고 보여줘. 레코딩 시작할 때까지도 가사는 수정할 수 있어. 고민을 하더라도, 지나친 부담감은 갖지 마.”
“와카리마시타(알겠습니다)!”
리카는 한구인이 본다면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할 만한 경례 자세를 취했다.
성필도 씩 미소 지으면서 경례를 돌려주었다.
* * *
숙소.
리카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웬만해선 무엇을 하지 않곤 못 견디는 성격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멍하니 있고 싶었다.
“…….”
리카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바디 필로우를 다리 사이에 끼우곤 끌어안았다.
비록 솜이 든 쿠션이지만, 마치 사람을 안고 있는 것 같아서 진정이 된다.
‘믹스테입…….’
솔직히, 리카는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소녀연맹 내에서 작곡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리카뿐이다.
물론 간단하게라면 기타를 다루고 악보를 읽을 수 있는 백설하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작곡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는 건 리카가 유일하다.
그녀는 작곡에 관해서도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정지음이 있긴 하지만, 그는 대등한 동료가 아닌 스승에 가까웠다.
리카는 동료를 바라왔다.
‘RRBKZ에 들어가면 동료가 생기겠지.’
유빈, 하민, 박수련.
프로듀싱에 뜻을 둔 아이돌들이다.
자신의 프로듀싱 능력을 증명하고자 ‘플로리 걸’이란 페르소나를 만들었던 리카다.
함께 실력을 갈고닦을 동료들이 있다면 그녀의 창작욕을 해소하는 게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렇지만…….’
거부했다.
리카가 RRBKZ 가입을 거부했던 건.
유빈의 패키지 딜에 참여하길 거부했던 건.
‘에리카.’
에리카와 대등한 위치에 선다는 게…….
“…….”
소녀연맹이라면 케이어스와 싸울 수 있다.
가로 엔터의 모두와 함께라면 KS 엔터라는 거대한 탑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다.
하지만 자신 혼자라면?
“…….”
리카는 바디 필로우를 끌어안은 채 반대로 돌아누웠다. 그러고서 에리카와 연관된 과거를 하나둘씩 차례로 상기했다.
성필이 에리카에게 사인받은 것을 목격했을 때.
‘박 이사님은 KS 엔터 데뷔조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나였기에 데려왔다고 하셨어. 설령 떨어진 사람이 에리카라도 데려오지 않으셨을 거라고.’
‘아라베스크’ 때 병문안 온 성필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또 말씀해주셨어. 에리카보다 내가 더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다고.’
그렇지만…….
이어서, 리카는 에리카의 믹스테입 작업을 도와주었을 때가 떠올랐다.
에리카는 혼란해하고, 방황하고, 고민하고, 그럼에도 결국엔 작품을 완성시켰다.
에리카가 영웅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제야 리카는 성필이 에리카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성필은 에리카보다 리카가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했음에도, 에리카를 사랑하는 이유를.
‘에리카는 히어로니까.’
모든 능력과 더불어, 고난에 꺾이지 않고 시련을 부수며 나아가는 용기를 지녔다.
곁에서 지켜본 에리카의 모습은 너무나도 눈부셨다.
그래, 리카가 유빈의 제안을 거절했던 건…….
* * *
KS 엔터에 데뷔조로 들어온 리카.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긴장하고 있던 중, 먼저 말을 걸어준 아이가 있었다.
“안녕.”
또래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한 아이.
처음 그녀를 보고 느낀 건, 눈이 매우 또렷하고 크단 것이었다. 그 커다란 눈 안에는 소녀다운 수줍음과 청년다운 패기, 사람을 매혹하는 요사스러움과 친근함이 공존했다.
눈을 중심으로 리카의 시야가 넓어졌다.
만화 캐릭터처럼, 정말 칼로 깎은 것처럼 아름다운 턱선이다.
숙련된 성형외과 의사라도 저런 턱을 만들려면 환자를 과다출혈로 죽게 만들겠다,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돌이란 건 이런 사람이어야 목표로 할 수 있는 걸까.
“난 사쿠라바 에리카. 너는?”
그녀는 아름답고, 친절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랑스럽다. 사랑받으려고 태어난 사람인 것만 같다.
“대단해 에리쨩!”
“헤헤, 그래? 리카가 칭찬해주니까 기뻐.”
그리고 대단하다.
그녀의 외모는 그녀의 능력에 딸린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사쿠라바 에리카, A.”
당연하단 듯 받는 A.
같은 댄스 퍼포먼스를 보이고도 숨을 헐떡이는 리카에 비해, 에리카는 가슴이 작게 오르락내리락할 뿐이었다.
“A.”
노래는 노회한 가수처럼 감정이 깊으면서도 막 데뷔한 가수처럼 개성이 뚜렷하다.
음정의 낙차가 명확하여 롤러코스터 같다.
때론 쭉 뻗어가는 대나무처럼 올곧다.
“A.”
노래와 댄스를 함께 해야하는 종합 퍼포먼스에선 더욱 대단했다.
거친 동작에도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꺾일 뿐, 절대로 허물어지는 법이 없었다.
표정은 평범한 아이들처럼 미소로만 도배되지 않는다. 초마다 계산한 것처럼, 곡의 주제에 따라 천변만화한다.
리카는 에리카의 퍼포먼스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아름답다.
그리고 눈길은 항상 손끝에 머문다. 에리카의 몸 중 가장 늦게 동작을 정지하는 건 손끝이었다. 눈 쌓인 가지 위에 홀연히 날아든 까치 같아서, 고아하다.
“나는 꼭 데뷔조가 될 거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에리카가 데뷔조로 뽑히지 않는다면, 선발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을 게 분명했다.
에리카는 사랑받기 위해,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다.
태초의 예술은 악가무(樂歌舞)가 하나였다고 한다. 에리카는 태초의 예술을 부활시키려고 태어난, 그렇기에 아이돌로 환생한 예술가 같았다.
‘앞으로는 노래와 무용 두 가지 재능을 함께 지니는 위대한 예술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늘 예언을 하고 있었어요.’
근대 무용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이 한 말이다.
그녀는 2,000년간 인류 역사에서 지워진 악가무일체의 예술이 부활하길 바랐다. 그렇기에 그녀의 예언은 예언이 아닌 바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예언은 이루어졌다.
아마도 마이클 잭슨으로 인해서.
그리고 그 예언을 실현시킨 마이클 잭슨으로부터 댄스 가수가 탄생했다. 그 가지가 뻗어가길 반복하여, 마침내 현재에 다다랐다.
가지의 첨단에 열매가 열렸다.
사쿠라바 에리카.
* * *
그래, 리카가 유빈의 제안을 거절했던 건.
‘두려워서.’
소녀연맹의 리카와 케이어스의 에리카.
이렇게 마주 보는 게 아니라.
그저 리카와 에리카로 마주 보는 게.
‘무서워서.’
리카는 거절했었다.
오늘 회사로 돌아오는 길, 성필에게 실망했냐고 물었던가. 그랬더니 성필은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유빈의 계획이 실패할 이유를 설명해주었었다.
리카는 그게 에리카와 싸우지 않아도 될 면죄부를 받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놓였었다.
‘믹스테입 프로젝트…….’
그래, 그런 곳에 낭비할 시간은 없다.
지금은 소녀연맹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다. 소녀연맹에게만 집중해도 모자라다.
가동될지 안 될지도 모를 프로젝트에 심력을 쏟는 건 사양하고 싶다.
그래, 그런 거야.
이 일은 끝난 걸로 하자.
전화가 울렸다.
리카는 힘없이 폰을 들었다.
모르는 번호다.
라이브를 하다가 번호가 유출됐나? 저장 안 된 번호로 전화 올 일이 없을 텐데.
리카는 경계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시카와 리카?]
“……누구신데요?”
[븨이에스 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