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다키스트가 해체했다.
그날 성필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실낙원(失樂園)의 고통을 나눌 이들이 있었다. 커뮤니티를 통해 친해진 덕질 메이트들이었다.
성필과 A, B는 카페 구석에 둘러앉아 음울하게 고개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A가 자조하듯 읊조렸다. 다키스트의 해체가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앨범을 더 많이 샀으면 재계약했을까?
콘서트를 더 많이 참석했다면 재계약했을까?
아니, 그건 합당한 이유가 아니었다.
해체한 이유는 돈 때문이 아닌 게 명백하다.
“진짜 7년만 하고 땡하면 어떡하냐고요…….”
B가 울먹임을 토해냈다.
다키스트는 성공한 그룹이다. 당연히 재계약까지 하고 추가로 활동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해체했다.
해체해버렸다.
성필은 그들처럼 슬픔을 삼키다가 결연히 고개를 들었다.
A와 B는 연예계 관계자인 성필이 어떤 단서라도 던져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성필이 말했다.
“이미 기사로 나왔잖아요. 활동으로 인한 건강 악화…….”
건강 악화란 신체, 정신 양쪽을 일컫는 것이리라. 성필은 그들이 충분히 이해 갔다.
연예인은 사람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
성필도 석세스 엔터의 보이그룹인 엡실론이 신체, 정신 양면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을 지켜봐 왔다.
문제는 고통을 지니고서도 계속 활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을 상품 취급하는 말이라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돌에겐 유통 기한이 있다.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끊임없이 더듬어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고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평생을 살아갈 재화가 모였기를 기대하면서.
7년의 시간이 끝난 후, 장기가 춤과 노래뿐인 그들에게 펼쳐진 길은 험난하다.
그걸 알기에 회사가 몰아붙이고, 멤버 본인들도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7년 활동의 성료(盛了)를…….”
성필은 목이 메었다.
“축하해줍시다…….”
“이렇게 슬픈데, 어떻게 축하를 해줘요…….”
“축하가 힘들다면, 저는 고맙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어요.”
둘은 무슨 말이냐며 성필을 보았다.
솔직히 A와 B는 다키스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사랑하는 팬들을 내버려 두고 도망간 것처럼 생각됐으니까.
그만큼 다키스트의 해체는 갑작스럽게 다가왔다. 재계약 시즌까지 아무 말이 없기에, ‘장막’은 당연히 다키스트가 재계약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막바지까지 와서 들린 소식은 해체였다.
억장이 무너진다.
이런데, 고맙다니.
“힘들 텐데도 7년까지 버텨준 거잖아요. 팬들을 위해 힘냈어요. 공백기 없이 7년 차에 앨범도 두 개나 내줬고요. 고맙죠.”
“고맙다뇨, 당연한 거잖아요.”
“당연하지만, 그 당연한 게 대단한 거잖아요.”
팬들은 아이돌이 7년 계약 기한을 채우리라고 자연스럽게 기대한다.
만약 아이돌의 활동 기한이 명시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팬이 되길 저어할 것이다.
언제 해체할지도 모르는 이들의 팬이 되는 건 사양이니까. 자신의 애정이 어느 순간 갈 곳을 잃고 공중분해되는 경험을 누가 하고 싶겠는가.
아이돌의 7년이란 16화 완결이 예정된 드라마이자 ‘완결’이 적힌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다.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미니 시리즈 드라마가 16화까지 나오는 게 당연하고, 소설에 완결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완결에 아름다운 마침표가 찍히는 건 고난한 일이다.
“다키스트는 우리 ‘장막’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어줬어요.”
최후의 앨범, 정규 5집.
최후의 콘서트, 월드 투어.
최후의 팬미팅까지…….
“저는 다키스트가 계속 활동하길 바랐지만, 그래도 감사해요. 힘든데도 끝까지 달려준 것에 감사할래요…….”
A와 B는 성필의 말을 듣고 다시금 슬픔을 곱씹었다.
셋은 마지막 다키스트 토크를 나누었다.
유선이는 꼭 퇴장할 때 팬들에게 손을 한 번씩 더 흔들어준다. 사람들의 애정을 많이 받고 자랐는지, 그 애정을 돌려주는 방법을 잘 안다.
하민이는 무대에 올라선 주변이 안 보이는지 항상 정면만을 본다. 그런데도 팬들을 신경 써선 방향 없는 하트를 보내준다. 기특하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셋은 헤어졌다.
다키스트란 공통점이 사라지자 셋의 연락은 점차 줄어들었다. 이윽고 만나는 일도 사라졌다.
성필도 ‘장막’이란 이름을 벗고 본업에 집중하게 됐다.
버릇처럼 여러 아이돌의 앨범을 샀다. 3세대의 톱이라고 인정받은 ‘븨이에스’와 ‘레이어드’, ‘인티머시’ 등을 얕게 덕질했다.
3세대를 달구었던 ‘WTP’와 ‘부테스’, ‘SON’의 삼파전을 즐기며 콘서트 블루레이를 사 모았다.
그럼에도 성필은 가슴 한구석에 뻥 뚫린 공허를 메우지 못했다.
성필은 생각했다.
‘다키스트와 같은 아이돌은 영원히 내 인생에 나타나지 않겠지. 영원히 그때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을 거야.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벅참, 그 설렘을 영원히 잃어버렸어. 다시는 이런 감상을 품을 수 없겠지.’
아, 나는 또 사랑에 빠져버렸어(몇 년 후 케이어스를 보고 느낌).
그렇게 지나가던 시간 속.
어느 날 과거의 덕질 메이트인 A에게 연락이 왔다. 이게 진짜냐고 말이다.
A가 보낸 톡에는 KS 엔터의 공식 스타그래프 계정 링크가 걸려 있었다. 성필은 그 링크를 통하여 들어갔다.
올라온 지 몇 분도 안 된 게시글이었다.
사진이 있었다.
“아…….”
다키스트의 ‘하민’이 솔로로 컴백한다.
컨셉 포토 속의 하민은 과거 성필이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포토 밑엔 하민이 그날 저녁 최초로 ‘뷔라이브’로 소통 방송을 진행한다고 했다.
처음 뷔라이브로 맞이한 하민은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장막’이들.]
성필은 가슴 벅참을 느꼈다.
[다키스트의 하민입니다.]
그는 아직도 스스로를 다키스트라고 소개했다.
다키스트는 장막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감상이 알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성필은 구조받는 것만 같았다.
위기의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슈퍼 히어로가 나타났다.
* * *
RRBKZ의 비밀 아지트 앞에 도착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특징이 없는 평범한 오피스텔이다.
성필과 조수석의 리카, 뒷좌석의 유빈이 차례로 차에서 내렸다.
리카가 성필의 곁에 바짝 붙곤 속삭였다.
“이사님, 대학교 동아리 OT처럼 술 마시면서 친목을 다지는 분위기로 변질되면 당장 도망쳐야 해요! 아니, 냉장고에서 술이 발견되자마자 도망갈 거예요!”
“너 걱정이 너무 편향적인 거 아니야?”
성필은 뒤를 흘끔 보았다.
유빈은 아까부터 우울했다. 비밀조직의 아지트에 부외자인 성필을 데려온 것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리카는 자신을 비밀조직의 OT에 초대하려면 반드시 성필과 동행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어째서인지 유빈은 리카를 비밀조직의 멤버로 굉장히 원하는 듯해서, 결국 수락했다.
어쩌면 리카를 영입하려는 의지는 유빈뿐만 아니라, 하민과 박수련의 공통된 의견일지도 모르겠다.
“편향적인 게 아니에요! 아타시(저)는 저의 힘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봐요!”
리카가 조아라처럼 자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누구라도 저의 매력에서 자유로울 순 없어요! 설령 박 이사님이더라도요! 어떻게든 저와 말 한 번 붙이고 싶어서 안달 난 남자들이 한 트럭일 거라구요!”
“맞아.”
“인정받긴 했는데 왠지 석연치 않네요…….”
리카는 성필과의 밀담을 끝냈다. 그리고 뒤로 돌아 다시금 유빈에게 말했다.
“선배님! 정말 조직원이 있는 건가요! 선배님의 작업실에 저를 불러서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이 정말 아닌 건가요!”
그러고선 리카는 성필을 힐끔 보았다.
“박 이사님이 두 눈을 부릅뜨고 계시니까 사실대로 말씀하세요!”
“제 접근법이 오해를 사기 좋았던 건 인정하지만, 정말 아니에요 후배님…….”
솔직히 유빈은 ‘후배님 자의식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닌가요?’라고 묻고 싶었다.
몇 번이나 아니라고 하는데도 저러니, 유빈은 아예 혀를 깨물고 결백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리카가 자신을 이용해 성필에게서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끌어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필이 유빈에게 리카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리게 하고 싶어 하거나, 성필이 유빈을 싫어하게 만들고 싶거나.
‘내가 그렇게 질척거렸나? 박 이사님을 이용해 떨어뜨리고 싶을 정도로?’
그때 성필이 리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리카, 그쯤 해. 유빈이가 아니라고 하잖아. 자꾸 그러는 것도 실례야.”
성필은 과거 유빈과의 면담을 떠올렸다.
유빈은 팬들이 자신을 두고 다른 그룹에게 한눈파는 것을 바람이라고 표현했었다.
그는 자신의 세일즈 포인트를 아주 잘 알았다. 팬들이 그에게 지니는 사랑의 감정을 알고, 받아들이며, 그렇기에 배신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웨이퍼센트 중 유이(有二)하게 연애 경험이 없는 멤버이다.
팬들이 다른 그룹에게 한눈파는 건 배신이고 바람이니, 자신도 팬들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한다.
‘쪽지의 내용을 알기 전엔 의심했지만, 진짜로 아지트까지 있으니.’
성필은 유빈의 순정을 믿었다.
반면 리카는 아직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유한 태도의 성필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입술을 비쭉이기까지 했다.
성필은 그걸 보곤, 아까 리카가 했던 것처럼 속삭였다.
“만약 유빈이가 그럴 낌새를 보이면, 이번엔 안 미룰게.”
“에?”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리카는 유빈에게 거절 의사를 표명하는 것으로 역할을 마쳤다. 만약 그러고도 유빈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음은 회사가 일을 처리할 차례다.
성필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물론 유빈이 리카의 걱정처럼 질척대진 않으리라고 확신하지만.
“약속이에요!”
리카는 성필의 확언을 듣곤 기분이 풀린 듯, 비쭉이던 입술을 집어넣고 해맑게 웃었다.
셋은 오피스텔 2층으로 올라갔다.
오피스가 두 개로 분리되어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 모두 무색무취했다. 적어도 사람을 상대로 장사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유빈은 오른쪽 문으로 향했다.
육중한 방음문을 열고 들어가자 검은 배경의 공간이 반겨주었다. 마치 정지음의 작업실처럼 벽 전체가 방음 소재가 박혀 있었다.
빛이 있던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자 순간 시야가 적응하지 못했다.
‘여기에 있는 건가.’
다키스트의 하민이…….
‘호들갑 떨지 마라 박성필!’
이곳엔 공적인 용무로 온 것이다.
그러니 팬심을 보이면 안 된다.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케이어스가 데뷔했을 때, 방송국 복도에서 에리카에게 싸인받는 것을 리카에게 발각됐었다.
그때 리카가 굉장히 우울해했었다.
“형, 저 왔어요.”
유빈이 말했다.
그제야 성필의 시야가 어둠에 적응했다.
문을 등진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는 헤드폰을 쓴 채 커다란 텔레비전으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귀여운 2등신 캐릭터가 무를 심는 중이었다.
“형!”
유빈의 외침에 그는 움찔하더니 헤드폰을 벗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보았다.
“어, 유빈이 왔냐?”
하민이다.
다키스트의 하민이 있다.
성필은 입술을 꽈득 물었다.
그리고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마음의 노래를 불렀다.
진정해야 한다.
‘지구에서 비춰오는 빛
60억 개 중 하나의 빛
궁금해 다가가 볼까
망원경의 렌즈로 비춰오는
네 눈빛에 난 설레
더 빛나 볼까
망원경이 없어도
네가 날 볼 수 있게
더 다가가 볼까
달에게 지지 않게
이 설레는 밤하늘에
네 눈을 맡겨줄래?
난 너의 별이야
날 빛나게 하는 한 사람
나를 태우는 단 한 사람
You―’ - 다키스트의 ‘유어 스타’.
하민은 유빈의 뒤에 있는 두 사람을 살폈다.
다키스트인 자신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쪽, 유빈이가 말했던 리카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와 씨.”
하민이 순간 입을 막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프로듀싱의 신이다.”
그리 말하는 하민은 입을 막았던 게 무색하게 아까의 놀라움이 가득했다.
리카가 의문을 표했다.
“프로듀싱의 신?”
“아.”
하민은 소파를 훌쩍 뛰어넘어 세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다키스트의 하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카 씨, 그리고 박성필 이사님.”
“이사님을 아시나요!”
“알죠. 프로듀싱의 신이요.”
하민은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성필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회사 사람들끼리 모이면 가끔 박성필 이사님 이야기가 나와요. 어쩌다 보니 농담 삼아…… 아니, 농담이 아니지.”
성필의 업적은 진짜이니까.
“막 띄우는? 그런 의미로 프로듀싱의 신이라고 부르고 그러거든요.”
“KS 엔터에서 박 이사님 이야기가 많이 나오나요……?”
리카가 옅은 경계심을 가지고 물었다.
하민은 고민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그냥 직원들은 모르겠고, 좀 높은 사람들끼리는? 제가 KS 엔터 직원이기도 하거든요. 아티스트 관리 쪽으로요.”
‘알아요 알아요 알아요 알아요.’
성필은 근엄함을 유지하느라 속으로 답했다.
하민은 KS 엔터가 상장한 후 지분의 1%를 받았다. 그리고 그걸 지속적으로 처분하여 현재 보유량은 0.3%였다.
하민은 KS 엔터의 비등기이사로서 희미하게나마 회사의 일에 관여하고 있다.
성필이 어떻게 아냐면, 그는 KS 엔터의 IR을 분기마다 찾아본다. 그곳엔 주요 주주와 임원의 지분 보유 변동량이 표시된다.
“와, 근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되네요. 영광입니다!”
하민이 손을 내밀었다.
성필은 근엄하게 그와 악수했다.
하민은 그와 악수하면서 생각했다.
‘프로듀싱의 신이란 말은 반쯤 장난이긴 하지만, 와. 역시 대단한 프로듀서는 아우라부터 다르네. 정호환 이사님 같아.’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그러했다.
연예인 따위야 발에 치일 정도로 보았단 듯, 하민을 보았으면서도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굳게 다문 입매에서는 그가 쌓아온 업적과 동시에, 장인의 경지에 이른 예술가가 지닐 법한 고집이 느껴졌다.
‘팬사인회가 아닌데도 악수했다 팬사인회가 아닌데도 악수했다 팬사인회가 아닌데도 악수했다.’
겉과 달리 성필의 마음은 폭풍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런데 박성필 이사님은 여기 어쩐 용무로…….”
“아타시(저)를 걱정하셔서 같이 오셨어요!”
“걱정?”
리카가 유빈과의 사건을 설명했다.
하민이 탄식했다.
“유빈이 너 아직도 그래?”
“비밀조직이잖아요…….”
“언제 적 얘기야. 여기 이제 다 망해가는 가게 같은 거라고. 나랑 수련이 없어지면 네가 이어받아야 해. 그런 식으로 잘도 크루원을 모으겠다.”
“그치만…….”
“누가 있는지도 안 알려주고,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여기 올 사람이 어딨어? 그런 수상한 쪽지만 주면 당연히 의심하지.”
“…….”
하민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유빈을 탓할 때와는 딴판인 태도로 성필과 리카를 맞았다.
“잘 오셨어요. 비밀조직도 뭣도 아니니까 박 이사님은 염려 마시고 편하게 있으세요. 아니다, 박 이사님이 오시면 저희야 더 영광이죠.”
“박 이사님이 많이 유명하신가요!”
리카의 질문을 들은 하민은 잠시 얼이 빠졌다.
“유명…… 하시냐고요?”
그 반응에 오히려 리카가 당황했다.
하민이 마치 성필의 유명세가 몰라선 안 될 수준이라고 말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가로 엔터는 아무런 기반이 없던 회사였죠?”
“네.”
“소녀연맹 데뷔 앨범 초동 판매량은?”
“1만이에요!”
“최근 앨범 판매량은?”
“40만이요!”
하민이 보란 듯이 성필을 가리켰다.
그리고 선언하듯 말했다.
“프로듀싱의 신.”
“카미(신)……?”
리카는 성필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만 했다.
KS 엔터가 성필을 고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 채가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즉, 하민의 이 칭찬은 단지 성필을 꾀어내기 위한 입에 발린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럼, 이 말엔 과연 뭐라고 답할까.
“정호환 이사님은 어떤가요!”
“아니, 둘 다 대단하긴 한데. 박 이사님은 말하자면 백의종군한 이순신…….”
하민은 리카가 일본인이란 것을 깨닫곤 급히 비유를 바꾸었다.
“죄송. 맨몸으로 몽골 초원을 통일한 칭기즈칸 같은 분…… 정도?”
하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리카가 자꾸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웃겨서였다.
“이해해요. 저도 정호환 이사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가끔 감이 안 잡히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회사 안에서 보면 계속 얼굴 맞대고 지내는 그냥 사람이잖아요. 리카 씨도 그런 거죠?”
“아니요! 저는 박 이사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만날 때부터 알았어요!”
“……???”
리카는 염려스럽게 성필을 보았다.
성필은 아직도 무표정이었다.
그걸 보며 하민은 ‘허’ 속으로 감탄했다.
‘나 같으면 쑥스러워서 웃기라도 했을 텐데, 박 이사님은 전혀 동요가 없으시네.’
성필은 아는 걸지도 모른다.
자신이 프로듀싱의 신이란 사실을.
당연한 사실을 읊는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걸을 수 있다고 칭찬받는다면 기분이 나쁠지언정 좋을 리 없는 것처럼.
하민은 성필의 자존감과 자신감, 자의식이 굉장히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면, 이만한 상찬(賞讚)을 받고도 무반응일 순 없다.
물론 하민은 그걸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성필 정도의 업적을 쌓았다면, 프로듀싱의 신이라고 자신(自信)하여도 된다.
‘끼얏호우 끼얏호우 끼얏호우!’
성필의 마음은 여전히 태풍 안이었다.
“형, 근데 수련 누나는요? 리카 후배님 모셔 왔는데, 수련 누나도 있어야 하는 거 아녜요?”
유빈이 쟁반 위에 차가 담긴 컵을 가져왔다. 그가 쟁반을 내밀자 리카가 꾸벅 인사하며 받았다.
그런데 성필은 받지 않았다.
리카가 대신 받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수련이? 야, 수련이는 없는 게 도와주는 거야. 걔가 여기 와서 뭘 하냐? 냉장고에 둔 내 케이크 훔쳐먹기? 어휴 씨, 죽여벌…….”
강도 낮은 욕지거리를 입에 담은 하민은 뒤늦게 입을 막았다.
성필이 앞에 있으니 평소처럼 말을 편하게 할 순 없었다. 다행히 성필은 이해한단 듯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성필은 하민의 욕지거리를 듣고 마음속이 태풍과 폭풍을 합친 것처럼 어지러워졌다.
에리카가 흡연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의 1/10 정도 되는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 에리카 때처럼 눈물이 나올 만큼의 충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누나 부르는 게 낫지 않아요? 박 이사님이 오셨…….”
“야 쉿!”
“아.”
둘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성필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하지만 리카는 둘의 대화를 흘려듣지 않았다.
“수련 선배님이 박 이사님이랑 관련이 있나요!”
“아…… 대단한 프로듀서님이 오셨으니까, 크루 전체가 맞이해야 예의가 아니겠느냐. 유빈이 말은 그런 거죠.”
“네, 네, 후배님 그거예요. 저희끼리만 뵈면 면이 안 사니까요. 네…….”
리카는 더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선배인 하민에게 감히 꼬치꼬치 캐물을 순 없었다.
하민과 유빈은 두 사람을 소파로 안내했다.
둘과 마주 본 하민이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리카 씨 와주셔서 감사해요. 유빈이가 많이 수상했을 텐데.”
“그런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괜찮아요!”
“일단 RRBKZ가 어떤 모임인지부터 설명해야겠죠. 쉬운데, 그냥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작업하고 또 놀고 그러는 데예요. 근데 그냥 놀러 오는 건 안 되고,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아! 옛날에 유럽의 지식인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서 커피 마시고 수다 떨면서 서로의 이론을 공유했었죠? 그런 거예요. 함께 수학(修學)하며 실력 상승을 도모한다. 뭐, 그런 취지였는데…….”
하민은 사람 없이 넓기만 한 작업실을 쭉 둘러보았다.
“이젠 텅텅 비기만 했네요.”
“아 형. 그렇게 설명하면 어떡해요.”
“그럼?”
“창립의의도 설명 드려야죠.”
유빈에게선 처음 이곳에 올 때의 우울함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자부심을 가득 담아 말했다.
“지금은 좀 줄어들었지만, 옛날엔 아이돌이 다른 분야에 진출하는 걸 되게 안 좋게 봤잖아요? 작곡, 연기, 뭐 그런 거요. 일종의 선이 있었는데, 다들 거길 넘어서는 걸 무서워했어요. 특히 창작의 영역은 더요. 하고 싶은데 아이돌이니까 하면 안 된다, 그렇게요. 근데 우리 하민이 형은 그 틀을 부수고 싶었던 거예요.”
RRBKZ는 그렇게 탄생했다.
리듬과 라임(Rhythm&Rhyme), 곡과 가사로 세간의 편견을 부수는(Breaking) 아이들(KIDZ).
“하민이 형은 프로듀싱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았어요. 저희 크루가 배출한 사람이 꽤 있는데…….”
유빈은 몇몇 아이돌의 이름을 댔다.
현재는 인디씬에서 활동하는 이도 있었고, 솔로로 활동하거나, 혹은 아예 작곡가로 전향한 사람도 있었다.
언급되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유빈이 예시로 드는 건 RRBKZ의 창립의의에 따라 성공한 선배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요?”
계속 입을 닫고 있던 성필이 물었다.
하민이 씁쓸히 답했다.
“요즘엔 아이돌이 작곡 같은 거 배우고 싶다면 회사에서 지원해주고 그러잖아요? 옛날보다 인프라가 좋아지기도 했고. 더는 이런 아지트를 찾지 않게 된 거죠.”
과거엔 핍박을 피해 같은 뜻을 공유하는 동지들이 모여들었던 아지트.
비록 그들이 이룬 변화는 아니었지만, 세상은 그들이 바란 대로 아이돌에게 좀 더 유해졌다.
목적을 달성한 도구는 존재의의를 잃었다.
RRBKZ는 명맥만을 유지한 채 친목 단체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성필은 감동이 목구멍으로 밀어 올린 흐느낌을 억지로 막았다. 그리고 여전히 근엄한 투로 물었다,
“유빈이 네가 전에 말했던 거 있잖아.”
“어떤 거요?”
“‘하나사키 인 서울’ 믹스테입 곡 만들 때 도와주셨다던 프로듀싱 크루 사람들이…….”
“네, 하민 형이랑 수련 누나. 그리고 그땐 몇 명이 더 있었는데…….”
유빈이 아련한 미소를 띠었다.
“그분들이랑 같이 만들었어요.”
성필은 속으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설마 하민이 물밑에서 이런 활동을 하고 있었다니.
“그럼 선배님은…….”
줄곧 듣고 있던 리카가 질문을 꺼냈다.
유빈이 반색하며 그녀에게 집중했다.
“여기서 뭘 하고 싶으신 건가요? 옛날처럼 동료들을 모아…… 좀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 좀 더 큰 친목 조직을 만들고 싶으신 건가요?”
“아뇨.”
유빈이 즉각 부정했다.
“사실, 이제 와선 우리 크루의 존폐는 큰 문제가 아니에요. 다만 제겐 목표가 있거든요. 미래의 아이돌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 실적이 필요해요.”
“저를 실적의 제물로 쓰겠단 건가요!”
“아, 아뇨, 제물이라기보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작품 하나 만들어보자는 거죠…….”
“믹스테입으로 프로듀싱 실적을 내겠다고?”
성필이 아연히 되물었다.
“차라리 자작곡을 웨이퍼센트의 수록곡에 싣는 편이 낫지 않아? 아니면 네 이름을 빌리고 싶은 그룹이나 뮤지션한테 곡을 줘도 되고.”
이게 일반적으로 명성을 얻는 방법이다.
“아뇨 이사님. 망상이라고 치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온전한 프로듀싱 실적이 필요해요. ‘하나사키 인 서울’ 때처럼요. 그리고 제가 이번에 벌일 일은 그보다 훨씬 큰 스케일이에요. 그러니까 리카 후배님이 꼭 도와주시기 바라요.”
“제가 프로듀싱에 도움을 드릴 게 있나요?”
“네. 아마 박 이사님은 아실 텐데, 저는 ‘패키지 딜’을 만들 거예요.”
리카는 그게 뭐냐는 듯 성필을 쳐다보았다.
성필이 설명했다.
“패키지 딜은 서양권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쓰이는 말이야. 설명하려면 좀 긴데.”
일반적으로 미국을 위시한 서양에는 한국과 같은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독점법(反獨占法) 때문에, 한 회사가 모든 역할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음악계는 이 세 가지로 나뉜다.
“매니지먼트, 이름대로 아티스트를 관리해. 에이전시, 일감을 가져와. 레이블, 음반 작업을 맡아. 이 세 분야가 떨어져 있는 거야.”
한국은 이 세 분야가 모두 붙어 있다.
“이외엔 유통사, 공연 기획사 등이 있어. 그리고 패키지 딜이란 건 보통 에이전시에서 기획해.”
영화를 예로 들자면, 에이전시가 배우와 각본과 감독 등등 모든 필수요소를 섭외하여 하나의 커다란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패키지 딜(Package―deal)이다.
음악으로 따지자면…….
“어느 한 조직이나 사람이 곡과 뮤지션, 뮤직비디오, 홍보 등 모든 방편을 준비하고 각 사람들에게 섭외 요청을 하는 거지.”
“그건…….”
“그래, 한국 기획사가 하는 일과 같아.”
패키지 딜은 궁극의 프로듀싱이다.
책임자는 프로듀서로서 프로젝트를 지휘한다.
“유빈이가 하고 싶은 건 총괄 프로듀싱이야. 유빈아, 너 리카를 뮤지션으로 섭외하고 싶은 거야?”
“네.”
드디어 이야기가 본론에 이르렀다.
“이 계획을 생각해낸 지 거의 3년이 됐어요. 소녀연맹의 리카 후배님, 케이어스의 에리카 씨.”
에리카란 이름이 나오자 리카는 곧바로 물음표를 띄웠다.
유빈이 말하는 패키지 딜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던 건가?
“그리고 글로브의 노아 씨. 현 걸그룹의 첨단을 차지하는 세 그룹. 이 그룹의 일본인들을 모아서, 일본을 강타하는 케이팝 믹스테입을 만들 겁니다.”
“목표는 한국이 아닌 거야?”
“이건 선전포고예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신 적 없으세요? 한국 공중파 음악방송엔 일본어가 못 나와요. 언제쯤 이 이상한 규제가 없어질까요? 덕분에 가사에 일본어도 못 넣어요. 생각해둔 라임이 1,000개도 넘는데요! 그에 비해 일본 방송에선 한국어로 노래하게 해주잖아요. 이건 언젠가 케이팝 업계에 비수로 돌아올 거예요. 일본 사람들이 ‘불공평하지 않아?’라고 생각할 때가 올 거라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건 미래를 위해 케이팝 시장 내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악재예요. 케이팝 소비국 중 1, 2위를 다투는 시장이잖아요. 어떻게든 해야 해요. 네, 저는 폭탄을 터뜨리고 싶어요. 이렇게나 인기 있는데! 방송에! 안 내보내! 줄 거야! 이렇게요!”
유빈은 잔뜩 흥분해서, 황홀함에 잠겨 말했다.
“이게 제가 구상한 계획이에요.”
리카, 에리카, 노아.
이 세 명을 섭외한 궁극의 프로듀싱으로, 언젠가 케이팝 업계에서 악재가 될 규제를 폭격할 것이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사무라이 걸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