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29화 (629/760)

629화

이시카와 유우토.

어릴 때부터 곱상한 얼굴 때문에 또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은 활달한 남자들보다 교실에서 머무는 시간이 긴 여자아이들과 더 잘 어울리게 했다.

유우토의 외모와 성격이 합쳐져, 유우토는 그를 못마땅히 보는 남자아이들의 좋은 놀이 표적이 됐다.

그날도 그러했다.

하교하는 길, 놀이터 근처를 지나다가 같은 반 아이들에게 걸렸다. 유우토는 겁이 나 도망가려고 했으나, 상대가 잡아끌어서 억지로 놀이터로 들어왔다.

“먹어라!”

그들은 나무 밑에서 주운 송충이들을 유우토에게 뿌렸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에 유우토는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도망가려던 유우토를 아이들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리고 나뭇잎 같은 것을 끼얹으면서 비웃음을 날렸다.

유우토는 혼비백산했다. 거의 정신이 나가 집까지 허겁지겁 도망쳤다.

현관 앞에 선 유우토는 도저히 어쩌지 못할 억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내일 학교로 가면 아이들이 자신을 ‘송충이 인간’ 같은 별명으로 부를 것이었다.

“유우쨩!”

얼마나 울었을까, 리카도 학교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아껴 먹었을 게 분명한(학교 앞 문구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까지 오려면 굉장히 천천히 먹어야 한다) 아이스바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유우토에게 달려갔다.

“왜 우는 거야! 누가 우리 유우쨩을 괴롭힌 거야!”

“누나아…….”

유우토는 오는 길에 머리 위에 송충이가 떨어졌노라고 거짓말했다.

당연히 리카는 믿지 않았다.

“누구야 빨리 말해!”

이윽고 리카는 유우토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그를 다그치기까지 했다.

유우토는 번쩍 들린 누나의 주먹을 보곤 겁을 먹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실직고했다.

십수 분 후, 유우토는 누나와 함께 놀이터로 왔다.

유우토를 괴롭힌 아이들은 아직도 있었다. 그중 대장 격인 아이는 리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켁, 마귀할…….”

리카는 그가 말을 끝마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멱살을 붙잡고 얼굴에 주먹질을 해댔다. 아이는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못생긴 데다가 힘만 세서!”

그 아이는 자신이 쓸 수 있는 최대의 욕을 사용했다. 또래 여자아이들은 ‘힘이 세다’거나 ‘못생겼다’란 말을 하면 울곤 했으니까.

그런데 리카는 그런 말로 꺾이지 않았다.

“응 개약하죠? 아직 2차성징 안 왔죠? 여자한테도 지죠? 한 손으로 잡아도 도망 못 가죠? 곧 얼굴이 명절 떡보다 더 일그러질 예정이죠?”

그 남자아이는 얼굴을 여러 대 얻어맞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근처에 있는 이들은 ‘악마다!’를 외치며 도망간 지 오래였다.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면상을 전력을 다하여 가격하는 인간을 만나면, 누구든 도망갈 것이다.

리카는 아이의 얼굴이 명절 떡만큼 일그러져서야 해방해주었다. 아이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며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넌 유우쨩이 2차 각성(성징) 안 한 걸 다행으로 알아! 4년 뒤였으면 내가 아니라 유우쨩이 널 박살 냈을 거다아아아아!”

한껏 고함을 내지른 리카는 씩씩거리더니, 아까의 분노를 온데간데없이 사그라뜨렸다.

그녀는 유우토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유우쨩, 이제 가자! 또 학교에서 괴롭힘당하면 말해! 다음엔 얼굴이 아니라 다리를 분질러줄게!”

“누나아아…….”

둘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유우토에게 있어서 누나는 영웅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지켜주고 소중히 대해주며, 나이가 많은 만큼 성숙한…….

“앗! 유우쨩 이거 봐! 성인잡지가 버려져 있어! 이 집 삼촌이 버렸나 봐!”

“누, 누나아 더러우니까 놔두고 가자아…….”

“잠깐만 놔봐. 가져갈 게 있어.”

……성숙한.

유우토에게 있어선 우상인 누나다.

그녀가 한국으로 떠나가고 나선 많이 울었다.

‘유우쨩,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유우쨩이 부르면 바로 달려갈게!’

당연히 그녀를 부른 적은 없었다.

부르기엔 너무나 민폐인 거리였다.

거기다가 자신이 누나를 걱정하는 만큼, 누나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전화로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떠난 지 약 4년.

소녀연맹의 뮤직비디오로 접한 리카는 옛날보다 훨씬 빛나고 있었다. 진정한 우상이 되어 만인을 매혹했다.

더는 옛날처럼 자신을 도우러 오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리카는 유우토의 영웅이었다.

가로 엔터의 데뷔조가 된 지금도.

“선배님?”

저녁 이후 휴식 시간.

유우토가 연습실을 나가려 하자 김사무엘이 ‘선배님?’이라고 물었다.

‘리카 선배님 뵈러 가?’

의 줄임말이다.

유우토가 머쓱하게 웃자 김사무엘은 ‘음’이라는 한마디만 하곤 폰에 집중했다. 김사무엘은 동생과 문자를 할 때만은 차가운 표정이 사라진다.

“유우쨩!”

회사 현관 앞에서 만나자마자 리카가 펄쩍 뛰어 포옹했다. 유우토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밀쳐냈다.

“누나, 나 이제 어린애 아니니까…….”

“에에, 유우쨩은 내 눈엔 언제나 아이라구!”

리카는 미리 준비해온 따뜻한 꿀물을 꺼냈다.

유우토는 칼로리를 걱정하여 받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누나가 신경 써서 가져온 것이니, 짧게 고민한 후 받았다.

오늘은 몇 분 더 오래 연습하면 될 것이다.

늦겨울의 해는 짧다. 저녁이 겨우 끝난 시간임에도 한밤중처럼 어둡다.

둘은 회사를 빙글빙글 돌면서 산책했다.

“그래서 있잖아 박 이사님이 뭐라고 하신 줄 알아? ‘난 네가 필요해. 네가 없으면 안 돼. 부탁이야. 떨어지지 말아줘.’라고 하셨다? 엄청나지! 나(아타시)를 엄청 소중하게 여겨주시는 분이니까 유우쨩도 예의를 지켜야 해! 예의의 표시로 ‘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을 거 같아!”

리카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떠들었다.

아까 리카가 자신의 눈에 유우토는 언제까지나 아이라고 했던가.

그건 유우토도 마찬가지였다.

“에, 그리고 이건 유우쨩한테만 보여주는 건데……. 내가 쓴 가사야!”

“내가 읽어도 돼?”

“유우쨩이니까 보여주는 거야!”

“음, 어디 볼까.”

히어로 랜딩! 영웅 두둥등장!

날 기다린 걸 알아 슝!

Distant―Yet―Mysterious

범접할 순…….

“어, 괜찮, 네.”

“진짜?! 에헤헤, 그치?”

“그, 곡을 몰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가사가 많이 진취적인 거 같아…….”

“유우쨩이 칭찬해줬다!”

리카는 가사가 적힌 쪽지를 들고 가사에서처럼 슝슝 뛰었다. 슈퍼맨 자세를 취한 그녀가 유우토를 향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정말, 옛날이랑 하나도 안 달라…….

“아 맞다 유우쨩! 네 집에 있던 그림은? 그 그림은 어떡했어! 설마 버린 건 아니지? 버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거야!”

“아, 우, 우리 숙소에 잘 뒀어…….”

……정말, 옛날과 하나도 안 달라졌다.

옛날처럼, 약간씩 당황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래도 동경하게 되는 누나다.

* * *

“유우 후배님?”

눈앞의 남자는 웨이퍼센트의 유빈이라고 한다.

그가 유우토에게 반으로 접힌 검은 쪽지를 내밀었다. 그 쪽지는 특수한 재질의 실로 묶여 있는데, 한 번 개봉하면 실이 끊어져 개봉 사실이 밝혀진다.

“이거 리카 후배님한테 전달해주실래요?”

유우토는 얼떨떨하게 그 쪽지를 받았다.

앞뒤를 살폈으나, 당연히 안쪽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내용일지 예상은 갔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던 누나가…….

‘이거, 그거지?’

누군가의 대시를 받고 있다.

난감해하던 유우토는 슬쩍 유빈을 보았다. 그는 척 보아도 기대하는 기색이었다.

마음 같아선 ‘왜 직접 안 전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래, 같은 남자로서 사랑하는 마음을 이해한다.

사실 거절하는 게 무섭다.

연상이고, 선배고, 같은 회사 사람이니.

“네, 에에, 노력해 보께요…….”

* * *

가로 엔터 프로듀서 회의.

참석자,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

‘카오틱 에너지(가명)’ 담당 메인 프로듀서 손혜빈.

이상.

“성필아, 대중적인 보이그룹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팬사인회는 과감하게 5회로 한정하고 정정당당히 무대와 노래로 승부를 보자.”

“그러면 망한다고!”

“그렇지.”

보이그룹은 걸그룹보다 초기 투자 비용이 높다. 이는 팬덤을 구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멀티―팬덤(잡덕)이 대세인 외국의 경우엔 보이그룹이 강세를 보인다.

하지만 케이팝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국 팬들은 보이그룹에 정을 붙이고 덕질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몰입’시키는 데까지 오랜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쩌다 남돌판이 이렇게 됐지? 3세대의 위상은 다 어디 갔어?”

위상…….

여러 의미가 있지만, 손혜빈이 말하는 위상이란 대중성을 뜻했다.

3세대엔 화제의 중심을 차지했던 게 보이그룹이란 존재다. 그런데 4세대에 이르러선 대중과 괴리되다시피 했다.

‘전생엔 산업의 발전에 따른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했었지.’

모든 대중음악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세간을 강타했던 장르는 어느새 세분화되고, 일정 방향을 통해 집중적으로 발전하고, 결국엔 고인물로 변한다.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장르가 세분화됐단 건 타깃을 특정하여 맞춤 상품을 개발하기 쉬워진단 뜻이니까. 그로써 상업성이 증가하여 산업의 크기가 불어난다.

보이그룹 4세대 또한 이러한 대중음악의 흐름을 따라갔다고 생각했지만.

‘걸그룹 4세대는 전혀 달랐잖아.’

3세대 때의 낮은 상업성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성장했지만, 보이그룹처럼 대중적인 인지도가 저하되진 않았다.

“노래가 실험적인가.”

“그게 근본적인 거 같긴 한데…….”

보이그룹의 팬덤은 매우 강하다. 파이 빼앗기를 하는 게 훨씬 어렵단 뜻이다.

그렇다면 남들 다 하는 그저 그런 걸로 주목을 끌기보다, 남들과 다른 것을 추구해야 한다.

보이그룹은 그렇게 진화해버렸다.

세계적인 트렌드와 최첨단의 기술을 받아들여 ‘이건 진짜 너무 남다른데?’ 싶은 수준까지 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첨단 트렌드란 어느 지역 어느 시대이건 갑론을박의 대상이다.

물론 보이그룹의 팬덤은 아티스트를 지지하기에 소비하지만, 대중들은 아니었다. 그게 몇 년간 반복되다 보니 대중들은 그냥 남자 아이돌 곡이라면 안 듣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시간이 지나 디깅(광산에 들어가 광물을 캐는 것처럼 음악을 찾아내는 것)하는 사람들이 들어보면 ‘이 시대에 이런 걸?’이라며 놀랄지도 모르겠다.

“보이그룹은 타깃이 진짜 확실해야 해. 어중간하게 ‘좋은 노래’라고 냈다간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고. 누나가 바라는 이상이 ‘대중적인 보이그룹’이란 건 알지만, 지금은 시장의 방향을 따르는 게 좋아 보여. 강하고 딥한…….”

즉, 해외 시장에서 강세를 보일 수 있는.

“컨셉으로, 국내에선 조금씩 팬을 끌어모으고 승부는 해외에서 보는 거지.”

“……성필아.”

“응.”

“팬사인회는 5회로 제한하고 정정당당하게 무대와 노래로 승부 보…….”

“그럼 망한다고 누나가 말했잖아.”

“정정당당하게 노래로 승부, 라…….”

손혜빈이 무언가에 꽂힌 표정으로 변했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요즘 보이그룹 중에 이지리스닝 계열의 그룹이 없다면, 우리가 만들면 되는 거 아닐까? 사람들이 많이 들을 수 있게…… 3세대의 성세를 우리가 재현하는 거야!”

“아니, 안 될 거 같은데.”

보이그룹 중에 이지리스닝 계열이 없는 게 아니다. 그런 곡을 만들어도 대중이 안 들어준다.

차트에 잠시 진입해도 ‘보이그룹? 윽!’이라면서 본능적인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누나, 목표를 조금만 더 작게 잡자.”

“작게, 어떻게?”

“굳이 사람들이 다 알 필요 있어? 그냥 여자애들 고막남친 정도로 만족하자. 새학기에 만나면 ‘카오틱 에너지 좋아해?’가 아니라 ‘카오틱 에너지 누구 좋아해?’라고 물을 정도?”

“얼마나 대단한 그룹이면 그런 질문이 나오냐. 네 목표도 비현실적이야.”

총괄 프로듀서와 메인 프로듀서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손혜빈은 음반 차트를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서 대중성을 확보해보자는 입장이다. 그런 기적을 다시금 재현시키자는 것.

성필은 대세에 따라 글로벌화된 시장에 맞춰진 컨셉을 쓰자는 입장이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훨씬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게 가능하니 말이다.

“음…….”

손혜빈은 턱을 괴곤 성필을 흘끔댔다.

“가만 보면, 우리 취향이 별로 안 맞는 거 같지 않아? 소녀연맹 데뷔곡 때도 갈렸었잖아.”

“그렇지.”

“그럼 이 경우엔 메인 프로듀서가 우위일까, 총괄 프로듀서가 우위일까?”

“당연히 총괄 프로듀서지.”

“아이잉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님 제가 밥 한 번 쏠게요 허락해줘잉.”

그렇게 프로듀서 회의는 뚜렷한 결과를 남기지 못하고 파국을 맞았다.

두 프로듀서의 갈등에서 볼 수 있듯, A&R팀 또한 카오틱 에너지를 두고 두 팀으로 갈려 있었다.

한쪽은 손혜빈의 비전을 따라 곡과 컨셉을 설계하고, 다른 쪽은 성필의 비전을 따르는 것이다.

결과물이 나오면 일단 두 사람이 서로의 것을 비교해본다.

그러고도 합의가 안 나오면, 소녀연맹의 데뷔곡 선정 때처럼 모든 이사를 불러 모아 홍규헌에게 결정권을 넘겨야겠지.

“음?”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손혜빈의 애교를 지워내려고 애쓰던 중, 성필은 어디에선가 이질적인 음향을 감지해냈다.

이질적이다.

그리 느낀 것은, 이 음향은 성필이 인지하는 현실과 달랐기 때문이다.

성필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회의실을 나와 복도를 쭉 나서서, 1층과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왼쪽을 돌면 나오는 복도의 구석.

유우토와 리카가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리카가 화났다.

“아앗!”

화나서 유우토에게 무어라 하고 있던 리카가 성필을 발견했다.

성필은 그녀가 다가오자 놀랐다. 리카가 따로 유우토를 불러 혼내는 줄 알았기에, 모른 척하고 돌아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리카가 성필에게로 직진해왔다.

‘뭐지? 나보고 혼내달라고 하려는 건가?’

리카는 성필의 앞에 턱 멈추더니 검은색 쪽지를 내밀었다.

“이사님! 이게 뭔지 아시나요!”

“뭔데?”

“웨이퍼센트 유빈 선배님이 유우쨩을 시켜서 저한테 전달한 거예요!”

“유빈이가?”

그 이름만으로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벌써 유빈은 리카에게 여러 번 까인 전적이 있었다. 직접적인 건 아니었다.

단지 리카에게 전화번호가 적혔을 것으로 추측되는 쪽지를 여러 번 건넸었다.

전부 리카가 주워서 유빈 본인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철벽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가.’

아니, 어쩌면 유빈에게 가로 엔터로의 이적은 또 다른 기회였을 수도 있다.

아예 리카와 한솥밥을 먹게 됐으니.

비유하자면 짝사랑하는 여학우와 같은 반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이사님이 따끔하게 한마디해 주세요!”

“내가?”

“이런 사내 풍기 문란은 좌시할 수 없어요!”

성필은 끙 신음을 흘렸다.

‘사내 연애가 안 된다는 규정은 없어. 설령 아이돌이더라도 그래.’

소녀연맹은 연애 금지가 끝났다.

웨이퍼센트는 데뷔 6년 차이니 연애 금지 같은 조약을 걸 리가 없다.

즉, 규정상 리카와 유빈 사이의 관계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이다. 문제라고 한다면 규칙이나 법이 아닌 윤리 쪽이겠지.

‘아니, 윤리란 걸 들이밀 수가 있나?’

말을 지어내자면 100만 가지도 지어낼 수 있겠다지만…….

‘그런데 이 일은 내가 아니라 매니지먼트 총괄인 경섭이가 어떻게 해야 할 거 같은데.’

매니지먼트 총괄인 민경섭과 웨이퍼센트 담당인 매니지먼트 2팀장 유하음이 결판을 내야 할 문제이다.

‘보자, 경섭이는 나랑 사고방식이 비슷해. 과연 경섭이한테 이 안건이 올라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X발X끼가 감히 리카한테 찝쩍거리…….

‘……경섭이가 이럴 거 같진 않은데.’

야, 유빈. 너 아이돌 프로듀서 되고 싶다면서? 그래서 아이돌한테 들이대냐? 이러려고 프로듀서 되고 싶단 거였어? 내가 제대로 묻는…….

‘왜 이렇게 공격적인 생각만 떠오르지?’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상식적으로, 이건 딱히 민경섭이나 유하음 선에서 논의되어야 할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이후로는 그 둘에게 정보가 가야 하겠지만, 일차적으로는 사적인 일이다.

리카와 유빈 사이의 일인 것이다.

“박 이사님이 유빈 선배님 앞에 가서 ‘내 리카 건드리지 마라’라고 한마디 해주세요!”

“아니.”

“에?”

“외부의 개입으로 해결되면 유빈이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는 알지?”

“그건 두 사람의 마음이 쌍방일 때만 효과가 있는 거 아닌가요!”

“유빈이한테 직설적으로, 리카 네가 말해야 해결이 될 문제야.”

그게 용기를 낸 유빈에게 리카가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이자 예의이다.

“지금까진 쪽지를 돌려주기만 했지? 유빈이한테 말해줘.”

“……박 이사님이 해주시면 안 되나요?”

역시 리카도 직설적으로 마음을 거절하는 건 꺼림칙한 모양이다.

“‘우리 리카 건드리지 마라’라고 말씀해주시면 되지 않나요! 그게 가장 확실할 거 같아요!”

“확실하기야 하겠지. 하지만, 리카 상상해봐. 네가 마음을 전한 상대가 타인을 통해서 거절해온다면 어떨 거 같아?”

리카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해했단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어요…….”

그러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는 아타시(저)와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호되게 거절할게요!”

“그 정도로는 안 해도 되는데.”

“아뇨, 일말의 여지도 없이 거절할 거예요!”

리카는 결심한 즉시 3층으로 호다닥 올라갔다.

웨이퍼센트는 새로운 그룹 연습실을 구하기 전까지는 가로 엔터 사옥에서 지낸다.

성필과 유우토도 리카의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올랐을 땐 리카가 웨이퍼센트 연습실 문을 기세 좋게 연 직후였다.

“유빈 선배님!”

리카가 외쳤다.

“죄송하지만 선배님의 마음은 받을 수 없어요! 몇 번을 반복해도 똑같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사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부탁이지만 나중엔 어떤 방법을 쓸지 몰라요!”

그걸 보는 성필은 경악했다.

이럴 수가.

‘내, 내가 유빈이었으면 트라우마로 반년은 고생할 거야…….’

저 안에는 웨이퍼센트 멤버 전원이 있을 것이다. 즉, 멤버 전원의 앞에서 유빈은 차였다.

얼마나 창피할까.

“미친 새끼야!”

연습실 안쪽에서 우레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살짝 거리를 두고 지켜보려던 성필과 유우토가 동시에 연습실로 다가갔다.

리카의 어깨너머로 본 광경은.

“뭔 생각으로 후배님한테 그딴 짓을 해! 너 여기서 쫓겨나고 싶어?!”

웨이퍼센트의 리더인 강현이 유빈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강현의 키가 월등히 커서, 유빈은 발끝으로 서야만 했다.

“아, 아니에, 켁, 아녜요 형!”

“아니긴 뭐가! 네가 얼마나 집요했으면 후배님이 여기까지 와서 저러시는데! 너!”

강현이 유빈의 멱살을 잡곤 리카의 앞까지 끌고 왔다. 유빈은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강현에게 잡혀 리카의 앞까지 왔다.

강현이 그제야 유빈의 멱살을 놓았다.

유빈은 기침하면서 애처로운 눈길로 리카를 올려다보았다.

리카는 그런 유빈을 보며 흠칫했다. 설마 이런 꼴을 당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다.

강현으로선 당연한 일이자 쇼맨십이었다.

그는 가로 엔터로 온 게 셋방살이로 옮긴 것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집주인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잘 보이긴커녕, 동생이 변변찮은 직업도 없으면서 집주인의 딸내미에게 들이댄 것이다.

강현은 대경실색하여 어떻게든 집주인에게 사죄하려 한다. 그 결과는 유빈의 멱살을 잡고 리카의 앞으로 끌고 온다는, 매우 강렬한 쇼맨십이었다.

“아…….”

리카의 앞으로 끌려온 유빈.

그의 시선은 리카의 뒤에 선 유우토와 성필에게로도 향했다.

유빈의 눈꼬리가 처량하게 꺾였다.

“아, 아, 그게, 후배님, 그게…….”

리카는 그 모습을 보고서 마음이 약해지려다가,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어 그에게 주었다.

“죄송해요 선배님.”

“아니, 아니…….”

“아니긴 뭐……!”

강현이 유빈의 목덜미를 잡고 숙이게 하려던 때, 유빈이 강현의 손을 쳐냈다.

강현은 물론 보고 있던 모두가 놀랐다.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했잖아요 형!”

“……뭐? 그럼 저건 뭔데?”

유빈이 눈을 질끈 감았다.

“형, 잠시만요. 따로 얘기 좀 할게요.”

유빈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연습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복도에서 리카와 마주 보고 섰다.

유빈은 성필과 유우토 쪽도 보았다.

그러자 리카가 기세를 키웠다.

“멤버들에게 거절당하는 걸 보여주는 게 부끄러운 건 이해해요! 하지만…….”

“아니에요, 후배님.”

“여기까지 와서 변명하는 건가요!”

“정말 아닌데…….”

유빈은 다시금 성필과 유우토를 번갈아 보았다. 둘에게 자리를 비켜줬으면 한다는 의사를 강렬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리카가 성필과 유우토의 손을 잡았기에, 그들이 자리를 뜰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다.

“유빈 선배님, 당당해지세요!”

“……그거 열어보실래요?”

리카는 언짢은 기색으로 쪽지를 풀었다.

쪽지를 감싸고 있던 실이 끊어졌다.

안에 적힌 건.

[RRBKZ(Rhythm&Rhyme Breaking KIDZ)]

그 요상한 이름 아래엔 건물 주소와 0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

리카가 이게 뭐냐는 듯 유빈을 응시했다.

유빈은 시선을 내리깔고 답했다.

“비밀, 조직…….”

“……예?”

“비밀, 프로듀싱, 크루, 요…….”

“……프로듀싱 크루?”

“작곡할 수 있는, 아이돌들이 모여서, 작업하는, 크루…….”

유빈이 울먹였다.

“비밀조직 초대장…… 이에요…….”

분위기가 싸해졌다.

일단 ‘비밀조직’이란 단어의 어감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실제 생활에서 비밀조직에 초대받는 일이란 게 벌어지기 매우 어려우니.

“거짓말 아닌가요!”

리카가 부정을 시작했다.

“대학교 동아리처럼 가면 술만 마시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곳 아닌가요! 저를 거기로 끌고 가서 관계 진전을 노리려던 거잖아요!”

타당한 의심이었다.

비록 접근 방법이 경계심을 사기 매우 좋아서, 진짜 그럴 목적이었다면 접근법으로서는 꽝이다.

유빈은 리카의 부정을 듣곤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리고 울먹임 가득한 목소리로 ‘아니에요’라며 부정을 시작했다.

그때 성필의 뇌리에 어떤 순간이 스쳤다.

븨이에스의 박수련이 진행하는 ‘어쩌다 만났슴다’ 때였다.

방송 대기 시간 중 그녀와 음악 활동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었다. 그녀는 취미로 마음 맞는 사람들이랑 곡을 만들곤 한다고 했었다.

‘RRBKZ라고, 처음엔 저랑 또 한 명 이렇게 둘뿐이었어요. 근데 사람이 늘다가 저희 세대 7년 차 채우기 시작하니까 다들 살길 찾아서 떠났고. 이젠 저 포함 3명 남았을걸요.’

박수련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름을 입에 담았던 것을 보니, 딱히 비밀조직이란 느낌은 안 들었다.

아마 그 조직을 비밀로 여기는 건, 지금 눈앞에서 흐느끼는 유빈이 유일한 듯했다.

“아무튼 저는 선배님의 꾐에 넘어갈 생각은 없어요! 자꾸 이러시면 저도 공적인 통로를 쓸 수밖에 없…….”

“리카.”

성필이 리카의 어깨를 짚었다.

이젠 그만하란 신호였다.

“이사님?”

“그만하자.”

성필은 애처롭게 흐느끼는 유빈을 응시했다.

“유빈이는 진심이다.”

“에?”

“저 눈물이 증거야.”

“이사니임……!”

비밀조직의 로망이 깨어져서 울던 소년은 구세주를 발견하곤 감격했다.

만약 유빈이 언급한 RRBKZ가 박수련이 말한 그 크루(Crew)라면.

‘거기엔 그 사람이 있어.’

처음 탄생했을 땐 KS 엔터 내부의 조직이었으나, 3세대 중반에 성세를 맞이하여 여러 크루원을 두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건 세 명.

아마 그 인원은 븨이에스의 박수련, 웨이퍼센트의 유빈, 그리고.

‘다키스트의 하민.’

현재도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다키스트 멤버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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