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화
고깃집의 안쪽 방 좌석.
옆자리와는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고, 홀과는 미닫이문으로 막혀 있다.
사각 테이블엔 상석에 성필, 맞은편에 장하양, 그리고 또 이유이와 배헌용이 마주 보고 앉았다.
주문한 후 성필은 아 신음했다.
“양반다리 불편한 사람 있어요?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가끔 유연성이 안 좋거나 골격이 뒤틀려 양반다리를 못 하는 사람이 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저, 저도 괜찮아요.”
배헌용과 이유이가 차례로 답했다.
성필은 장하양에게 따로 물어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소고기가 도착했다.
배헌용이 재빠르게 집게를 들려고 하자 성필이 막았다.
“제가 할게요.”
“아닙니다. 저 고기 잘 굽습니다. 제 자존심입니다. 친구들이랑 모이면 항상 제가 굽습니다.”
“저 곧 갈 거예요.”
“아, 어? 네?”
“그러니까 제가 굽게 해줘요.”
배헌용은 얼떨떨하게 집게를 넘겼다.
성필이 고기를 불판에 올리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글거리는 소리가 대화를 대신했다.
이유이는 퇴근 시각이 올 때까지 물도 못 마셨었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서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배헌용은 퇴근 시각까지 구직 사이트를 뒤지면서 새롭게 둥지를 틀 기업을 알아보았다. 동시에 엄마에겐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장하양은.
“히끅.”
딸꾹질을 몇십 분이나 이어가고 있다.
차를 타고 오면서도 딸꾹질이 멈추지 않았었다. 물을 1L는 마셨을 것이다.
“저는.”
성필이 불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기나긴 침묵에 막을 내렸다.
“옷에 있어서 보수적인 면이 있어요. 제가 본격적으로 아이돌에 관심을 가졌던 시기는 2세대예요. 아이돌 세대론은 아세요? 헌용 씨는?”
“아, 아이돌 세대론……?”
성필이 아이돌 세대론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배헌용은 빠르게 이해했다. 성필이 각 세대의 톱티어를 예시로 들었기에 이해가 쉬웠다.
배헌용도 유명한 아이돌에 따라 세대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아왔기도 했으니.
“그때는 걸그룹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청순과 섹시로 나누었어요. 그런데 섹시 컨셉이란 게 점점 과격하게 변해갔거든요. 경영학적인 용어로 신 하위범주화였던가, 한 이사님한테 들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한 이사님은 그게 당연한 거래요. 시장 주도적인 기업을 꺾으려면, 그 기업과 공유하는 특징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면서.”
“섹시를 강화하는 거면, 더 헐벗거나 그렇게 변하는 거요?”
“네. 당시 프로듀서들의 선택지는 그 두 개가 거의 전부였으니까요. 요즘처럼 다채롭지 않았어요. 그때 그걸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나라에서도 규제할 정도니까 말 다 했죠.”
섹슈얼리티가 부각되는 퍼포먼스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고민 없이 선정성만을 무기로 삼은 프로듀싱은 도저히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2세대의 왕좌는 결국 청순을 무기로 삼았던 그룹이 차지했어요. 그리고 그땐 남자들도 걸그룹 좋아한다고 말을 못 했어요. 팬이라고 자처하는 남자들은 매우 적었고요. 안 그랬겠어요? 밖에서 ‘걸그룹 좋아한다’라고 말하면, 사람들 머리에 떠오르는 건 매일 뉴스란을 장식하는 선정적인 걸그룹 사진뿐인데.”
비욘세 같기라도 하면 말을 안 하지.
아니, 그건 과한 욕심이다.
당시 케이팝 시장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기획사들은 지금과 비교하면 그냥 구멍가게였다.
자본이 부족하고, 연습생의 질이 낮으며 연습생이 되려는 이들도 적었고, 무엇보다 프로듀서들의 시야가 국내에 갇혀 있었다.
그나마 표본이라면 일본의 아이돌 산업인데, 큰 도움은 안 되었다.
“거기서 저는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렸어요. 저러면 안 된다. 저건 실패다. 이런 생각에 머리에 박혀 있으니까, 옷에 관해선 보수적이었어요.”
고기가 다 익었다.
성필은 고기를 세 명의 접시 위에 옮겨주었다.
누구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성필은 다음 고기를 불판 위에 올렸다.
“눈치를 봤죠. 요즘엔 다리를 훤히 드러내는 것도 뭐라고 안 하죠? 저는 그런 바지 처음 봤을 때 ‘망하려고 작정했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사람들 반응이 괜찮으니까 ‘괜찮은가?’라면서 슬쩍 의견을 바꿨고요. 그래요, 저는. 옷에 관해선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걸 시도하겠다’란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어요.”
성필이 실실 웃었다.
“머리가 굳었으니까요.”
“…….”
“타공패턴 옷을 봤을 때도 그랬어요. 이게 뭐야? 솔직히 말하자면 몸을 너무 훤히 드러냈다고 해야 하나. 선정적으로 느껴졌어요. 근데 동시에, 아름다운 거예요.”
장하양과 이유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양이 얼굴 때문인가? 하양이 몸 때문인가? 뭐야 그럼. 옷이 어쩌고 할 게 아니잖아. 이러면 내가 2세대 때 프로듀서들이랑 뭐가 달라. 그렇게 저는 저를 못 믿었어요. 저는 35살 아저씨잖아요. 그러니까 선정적인 동시에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건 아이돌이란 예술에게 가지는 느낌이 아닌가 보다…….”
아마 이 ‘아름답다’란 감정은 장하양을 보고 느끼는 사적인 기분일 뿐이겠구나.
“저랑 같은 시대를 살았던 PD님들도 그렇게 판단하실 거 같았어요. 그래서 처음에 거절했던 겁니다.”
장하양과 이유이가 다시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성필의 이 장광설은 거절을 위한 포석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양아.”
“……네.”
“소유 씨한테 내가 정호환 이사님과 나눴던 대화를 들었다고 했지? 이것도 들었어? 반려는 신중해야 한다는 거.”
“아…… 아니요.”
“내가 정호환 이사님께 드렸던 말이야. 멤버의 의견을 받는 덴 갈등이 있다. 그래서 반려는 신중해야 한다. 부정은 창의성을 소극적으로 만드니까.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기보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려고만 한다, 고…….”
성필은 갈등의 해답을 제시했었다.
“대화, 이야기, 공감대, 함께 구상하는 과정. 그런데 이번엔 그게 없었네. 바로 거절했던 건 내 잘못이었어. 그도 그럴 게, 유이 씨는 지금까지 내 마음에 딱 드는 것만 가져왔었단 말이야.”
“……저요? 저, 저요?”
이유이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네. 일심동체가 아닌가 할 정도로요.”
“제가요?!”
“아, 네. 유이 씨가요. 그래서 저는 제 안목이 유이 씨와 비슷한 선상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대단한 디자이너와 보는 눈이 비슷하구나. 그래서 자신감 있던 부분도 있었죠.”
고기가 또 다 구워졌다.
성필이 모두의 접시에 고기를 덜었다.
역시나 누구도 수저를 집지 않았다.
“하양아, 네가 아까 준비했던 차림은 네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습이라고 했었지?”
“네에…….”
“만약 규제가 적용되는 공중파 음악 방송에서 반려받으면, 안 나가도 된다고 했고.”
“……죄송해요. 옛날에 방송 하나 나가려고 이사님이 노력하셨던 거 기억해요. 그런데 올챙이 시절 기억 못 하고 감히 망발을…….”
“우리가 벌써 그렇게 컸구나.”
“죄송…… 네?”
“더는 방송국 바닥을 무릎으로 걸레질하면서 구걸 안 해도 되는 몸집. 과감하게 ‘그럼 저희도 안 나가요’라고 말할 수 있는 그룹이, 되어버렸구나.”
성필이 벗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이유이와 배헌용이 화들짝 놀라 함께 섰다.
“허락할게. 수틀리면 케이블 음방만 나가지 뭐.”
너무나 쉽게 나온 허가에 이유이가 입을 틀어막았다.
성필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맘껏 드세요. 술도 고기도. 이번 회의 수고했어요.”
성필이 방을 나섰다.
셋은 멍하니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유이가 감격에 찬 울음소리를 토해냈.
“저도 갈게요.”
장하양은 외투를 집어 들고 재빨리 방을 나섰다.
장하양과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하려던 이유이의 팔이 허공에 둥둥 떴다.
그걸 보던 배헌용이 은근슬쩍 물었다.
“제가 해드릴까요?”
“…….”
이유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배헌용을 안고 기쁨에 방방 뛰었다.
“그래 너로 참을게!”
“어이가 없네.”
* * *
성필은 뒤에서 들리는 뜀박질 소리에 돌아보았다. 장하양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성필의 앞에서 급정지한 후, 달려오며 품었던 말을 쏟아내듯 크게 외쳤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장하양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슬슬 봄이라고 불릴 계절이 올 것이다.
성필도 재킷을 걸치지 않고 와이셔츠 차림 그대로 밤바람을 맞으며 왔었다.
“회식은?”
“의상팀 회식이라서 자리를 비켜드렸어요.”
“음, 하긴.”
“프로듀서팀도 회식한 적 없어요.”
“응?”
“총괄 프로듀서.”
장하양은 성필을 가리킨 후 자신을 가리켰다.
“앨범 메인 프로듀서.”
“……그래.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네.”
둘이 찾은 곳은 한강공원이었다.
성필과 장하양이 처음으로 둘이서 술을 마신 곳이었다.
이번엔 돗자리를 빌리지 않았다. 술과 음식도 사지 않았다.
둘은 서로의 목소리를 술과 안주 삼아 걸었다.
“소유 언니 뮤비에 출연하려구요.”
“정말? 소유 씨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보이나요?”
“엄청.”
“지금이 분수령 같아요.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얼굴 한 번 더 비춰야 해요. 케이콘에서 아카이브와 무대 바꾸기 하는 것도 그래서 아닌가요?”
“맞지. 근데 싫다면 굳이 할 필욘 없어.”
“그렇게 말씀하셔도 돼요?”
“하면 안 돼?”
“사랑하는 케이어스의 소유 언니를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잖아요.”
“사랑하는 케이어스의 소유 씨를 보는 것보다, 하양이가 하기 싫은 게 더 중요하니까.”
“……아하하.”
둘은 가만히 멈춰 서서 한강을 바라보았다.
“이사님이랑 이러고 싶었어요. 콘서트 VCR 촬영할 때 언니가 얼마나 자랑했는지 아세요?”
“뭐를 자랑해?”
“이사님이랑 센강 변을 4시간 동안 이야기만 하면서 걸었대요. 그게 너무 좋았다고 하셨어요.”
“좋았지. 꼭 영화 같았어. 미드나잇 인 파리.”
“지금은요?”
“미드나잇 인 서울.”
“아하하, 분위기가 확 떨어지네요.”
“우리야 서울에 사니까.”
강에 비친 달이 일렁였다.
성필은 빠질 것처럼 달을 바라보았다.
“하양아, 그때 하려던 말 뭐였어?”
“그때요?”
“우리 일본 일로 화해하고 했던 말. 네가 말했잖아. 너라는 사람을 이루는 근본적인 기저, 너를 너답게 만드는 거, 너다운 건 어떤 건지, 생각해봤다면서.”
“아, 그때 경섭 오빠가 들어오셨었죠.”
장하양이 어렴풋한 미소를 띠었다.
“저의 절반은 저고, 나머지 절반은 이사님이세요. 저는 이사님 덕분에 저를 사랑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저는 이사님의 허락으로만 저를 사랑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젠 알아요. 저는 제가 사랑할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고.”
허름한 방 안에서 부모님의 싸움 때문에 귀를 틀어막고.
그저 좋다는 이유만으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연기에 매진했고.
매진할수록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확신만이 강해지며.
이윽고 죽음만이 유일한 도피처라고 생각했던 삶.
“주제인 ‘팬송’은 그 결심이에요. 저희를 팬분들께 선물로 드린다는 건 굉장한 자존감이 필요한 일 아닐까요?”
“그러네.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어야 자신을 선물로 주겠단 말을 할까.”
아이돌의 팬송이란 그렇기에 아름답다.
팬의 사랑을 믿기에, 그들에 대한 사랑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노래할 수 있으니.
하지만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게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를 믿어야 비로소 자신이 선물이 될 수 있다.
“이젠 믿어요. 모든 사람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거요. 비록 저는 가장 사랑받을 이유인, 자식으로 태어나는 기쁨조차 누리진 못했지만요. 그래도 믿어요. 믿게 됐어요. 천륜으로도 얻어낼 수 없는 사랑을, 겨우 손에 쥐었잖아요.”
소녀, 연맹, 투쟁, 승리.
그리고 해방.
그녀에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음은 천형(天刑)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천륜을 끊어낸 반역이었다.
피를 지워버렸다.
“그래서 내가 절반이야?”
“네. 이사님이 카페에서 저에게 주셨던 제안은 제 출생신고였어요. 소녀연맹으로 데뷔한 건 취학이었고,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졸업이겠네요.”
“내가 하양이를 낳았네. 정호환 이사님도 민주 씨를 음악으로 낳은 자식이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어. 그럼 나도 정호환 이사님 못지않은 업적을 이뤄낸 거네.”
“못지않은, 보다 더 나은 표현이 있을 거예요.”
“그치. 난 최고의 프로듀서가 될 거고.”
“저는 최고의 아이돌이 될 거니까요.”
장하양은 바닥에서 작은 돌을 들어 강을 향해 던졌다. 강에 비친 달은 자그마한 파문으론 일그러지지 않았다.
당연히 하늘 위에 뜬 달도 아무런 변화 없이 찬란히 빛났다.
“이사님, 저번에 취한 아름이를 데려오셨을 때 저의 존재를 자식으로 비유하셨잖아요. 이번에도 그렇고요.”
“부적절하다고 했었지?”
“여…….”
“그 호칭을 꺼내면 정말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번에 또 하면 네 번째야.”
“그럼 어떡해요?”
장하양이 진짜 어떡하냐는 듯 항의했다.
“이사님, 자식 사랑은 외사랑이에요. 부모만이 진심이죠.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깨닫는 건 죽어서라고들 하니까요. 그런데 이사님과 저의 관계는 외사랑일 수가 없어요. 피가 안 섞였잖아요.”
“가족이라면서?!”
“피가 안 섞인 가족은 부부뿐이에요. 가족인 저희의 비유는 이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외사랑일 수 없는 거예요. 저는 이사님의 사랑만 퍼먹으며 자라는 아이가 아니니까요. 전에 제가 살인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아닐걸요.”
“맞아, 솔직히 나도 자신이 없어.”
“네?!”
장하양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성필을 흘겼다. 그리고 또 돌을 주워 강을 향해 던졌다.
“효도는 태어나고 1년 안에 다 한다고 하셨죠. 하지만 부부는 그렇지 않아요. 1년, 그 이후로도 서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엔 끊어질 뿐이에요. 어차피 남남이잖아요. 그러지 않으려면 노력해야죠. 이사님은 물론이고, 저도요.”
장하양은 또 돌을 주워 강에 비친 달을 향하여 던졌다.
“제가 가족이란 테두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최고를 노리는 거예요. 최고의 아이돌이요.”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울림이네.”
“그래서, 저 오늘 어땠나요?”
장하양은 또 돌을 집었다.
네 번째였다.
“아티스트 같았어요?”
성필은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온 웃음을 이어갔다. 그 웃음이 계속됐다.
장하양이 당황할 정도가 되어서, 성필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말했다.
“아티스트 같은 게 아니라, 아티스트야.”
장하양은 뻣뻣한 손길로 머리칼을 정돈했다.
“그럼 이제 개인적인 걸 여쭤볼게요. 오늘 회의 때, 제 차림은 어떠셨어요?”
“너무 답정너인데.”
“아름다웠나요?”
성필도 바닥에서 돌을 주웠다.
그리고 말했다.
“아, 나는 또다시 사랑에 빠져버렸어.”
장하양은 성필처럼 웃음을 터뜨리곤, 손에 쥔 네 번째 돌을 하늘을 향해 던졌다.
성필과 함께.
달을 향하여.
찬란한 별빛마저 죽여버리는 가장 거대한 빛에게로.
* * *
“멤버들 가사요? 저만 못 봤어요?!”
취한 배헌용이 역정을 부렸다.
이유이는 몇 잔인지 모를 소주를 들이켜며 폰을 뒤적였다. 그리고 장하양에게서 받은 조아라의 가사를 보여주었다.
배헌용은 취기 서린 눈으로 가사를 훑었다.
“아, 다행이다.”
“뭐가?”
“아니 윗줄까지는 개 센 척하길래 ‘으웩’ 했는데, 밑에 반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요.”
“뭐가 센 척이야! 아라는 강해! 실제로 강해! 내 워너비란 말야!”
“흐음…….”
“흐음 뭐!”
배헌용은 이유이에게 폰을 돌려주었다. 폰을 받은 이유이는 된장찌개를 퍼먹더니 프하 한숨을 내쉬었다.
“있잖아, 헌용아. 나도 꿈이 있다?”
“워너비 아라 씨처럼 되는 거요?”
“난 박 이사님이 되고 싶어.”
“어…… 성 정체성 관련된 건가요?”
“아니. 박 이사님처럼 되고 싶어. 불패의 프로듀서. 그러니까 나는, 불패의 디자이너지. 비비안 웨스트우드으…….”
“토하려면 빨리 화장실로 가요.”
“아니, 욱, 삼켰어.”
“아 씨 더러워서 돌아버리겠네!”
배헌용은 팔에 오른 소름을 슬슬 쓸어냈다.
“근데, 근데에, 나는 도저히 박 이사님 같은 분위기가 안 나와. 외강내유…….”
“외유내강이에요. 술 때문에 지능이 심각하게 저하된 걸 보니 빨리 택시를 불러야겠네요.”
“박 이사님은 있잖아, 되게 강하셔. 살면서 박 이사님 같은 사람이랑 만난 적이 없어. 진짜 별세계 사람 같아.”
“외유내강?”
“아, 모르겠어. 강해. 내가 보는 이미지가 있는데 도저히 설명을 못 하겠다. 그래서, 박 이사님처럼 되고 싶었는데…… 그거 때문에 너한테 많이 모질었어. 미안해.”
배헌용은 눈을 크게 떴다.
“네?”
“그 강한 이미지를…… 자연적으로 뿜고 싶은데에…… 모르겠어. 방법이…….”
“그냥 선배님 성격이 더러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게 꾸며낸 거라고요? 이미지 세탁하는 거예요?”
“암튼, 그랬다 나는…….”
이유이는 배헌용과 자신의 잔에 차례로 술을 따랐다.
“딱 아라 가사 같아. 본심은 아랫줄처럼 무섭고 그런데, 겉으로는 윗줄처럼 허세를 부리는 거야.”
“아니 진짜 왜 이래요 무섭게.”
“앞으론 잘해줄게. 어차피 난 박 이사님처럼 해도 안 돼. 근데 넌 박 이사님이 막 뿜어내는 아우라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해? 남자 눈엔 뭐가 보일 거 아니…….”
이유이는 멈칫하곤 또 한숨을 뱉었다.
“아니다. 박 이사님은 부하 직원 데리고 이딴 소리 안 해. 한탄하지도 않고. 그만하자. 갈까?”
“계속해요, 재밌어요.”
“이 씨, 너 나 놀려? 그냥 내가 태생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건가아…….”
“정말이에요. 하고 싶은 말 다 하세요.”
“녹음이라도 하게? 회사 게시판에 올려서 창피 주려고? 나쁜 놈!”
“이야기하고 싶으시잖아요.”
“……응?”
배헌용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의 얼굴에 순박한 웃음이 번졌다.
“저는 감상문에 재능이 있거든요. 듣는 걸 좋아해요. 선배님의 아랫줄 가사, 듣고 싶어요.”
“……진짜?”
“네.”
이유이는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지금까지 참고 있던 롤모델 성필 토크를 마음껏 해댔다.
의상팀 회식은 달이 정점에 걸리도록 이어졌다.
이유이의 가사는 위에서 아래로, 가면에서 본심으로 천천히 바뀌어 갔다.
성필처럼, 스스로를 사랑하고 믿기 시작했기에 진정한 자신이 되어갔다. 그건 솜씨 좋은 재단사가 천을 잘라내듯이 부드럽고도 확연한 변화였다.
이유이가 품은 궁금증의 해답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기를, 매사에 진심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