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이건 아주 오래 전, ‘비비’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의 이야기다.
비비는 자신이 차린 가게 구석에서 남자친구와 함께 담배를 태웠다. 둘은 등을 맞댄 채 서로의 온기와 폐를 메우는 연기만을 느꼈다.
그때 남자친구가 말했다.
“내가 밴드를 하나 맡게 됐는데, 걔들 옷 입는 센스가 형편없어.”
“어떤데?”
“자기가 데이비드 보위인 줄 알거든.”
“알만하네.”
“자기가 봐줄래?”
“의외네. 대단하신 록스타님들은 자기 주관이 매우 뚜렷하셔서 스타일리스트 따위 안 두는 거 아니었어? 무슨 엄마 손 잡고 쇼핑하러 가는 애도 아니고.”
“진짜 못 봐주겠다니까 그러네.”
“그래, 시간 될 때 데려와 봐.”
멍한 상태로 나누었던 약속일 뿐이었다.
남자친구는 정말로 자신이 맡은 밴드 멤버들을 가게로 데려왔다.
비비는 직접 가게 앞으로 가 젊은이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맨 앞에 선 남자의 옷을 보곤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서 와요. 옷이 멋진데요?”
그 비꼼에도 가장 앞에 선 베이시스트는 비비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는 황당하단 표정으로 가게의 간판을 입 벌리고 보았다.
[SEX]
가게 이름이 ‘SEX’였다.
킹스 로드 한복판에 이런 게 있다니.
심지어 간판은 네온 같은 것도 아니고, 비닐인지 고무인지 싸구려 재질에다 색도 천박했다.
“매니저, 이딴 가게에서 우리 옷을 맞추려고?”
베이시스트가 비꼬자 매니저, 비비의 남자친구는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 이딴 후진 데서 옷 살 바에야 리버티(백화점) 쇼윈도우 쳐부수고 양복을 훔쳐 입지! 망할, 믿은 우리가 잘못이지.”
“그래요.”
비비는 미련 없이 그들을 떠나보냈다.
“잘 가요. 어음, 그룹 이름은 그러니까…… 카피 오브 데이비드 보위인가요? 잘 가요, 데이비드 뭐시깽이.”
떠나려던 베이시스트가 멈추었다.
그리고 비비의 앞에 서서 그녀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뭐라고?”
“남의 옷을 베껴 입는 주제에, 사람들이 네까짓 것도 록커라고 부르니?”
“시장에서 싸게 떼서 싸구려 옷이나 파는 년이!”
“시장에서 싸게 떼서 싸구려 옷 파는 년보다 옷 못 입는 록커가 참 당당하네요.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기타도 못 들고 다니겠다.”
“그냥 기타가 아니라 베이스 기타야!”
“X 구리게 옷을 입으셔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야? 들어올래, 아니면 계속 그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서 지기 스타더스트(데이비드 보위의 페르소나 중 하나) 흉내나 낼래?”
비비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남자친구가 불을 붙여주었다.
베이시스트가 이를 갈았다.
“스읍.”
숨을 들이켠 비비가 베이시스트의 얼굴에 연기를 뿜었다.
“빨리 결정해. 장사해야 해.”
“너.”
베이시스트가 검지로 비비의 눈을 찌를 듯 가까이에 가져갔다.
“입만큼 머리도 잘 돌아가야 할 거다.”
비비가 입을 ‘아’ 벌리고 꿈틀거리는 뱀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베이이스트는 이마에 혈관이 돋아선 그녀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가자 얘들아.”
“이 미친놈이 사람을 치고 지랄이야!”
한 밴드와 한 가게 주인의 이야기.
세계을 뒤엎은 록스타 ‘섹스 피스톨즈’.
동시에 세계를 혁명한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첫 만남이었다.
이 둘의 만남은 인류가 역사상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대격변을 창조해냈다.
기성세대의 완벽한 부정.
역사가들이 말하길, 정신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겁탈했던 시대.
인류의 가장 단단한 토양이었던 문화를 바닥에서부터 뒤흔든 대사건.
매스미디어가 지배자의 도구가 아닌, 반역의 도구가 될 수 있단 것을 증명한 역사.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반문화(反文化).
새로운 형태의 카운터컬처(Counter culture)가 탄생했다.
섹스 피스톨즈는 자신들에게 거지 같은 시대를 물려준 어른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했다.
청년 실업률 20% 이상.
침체된 사회.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공기.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수천만 명을 학살했던 조국(祖國)의 망령들.
나치보다 나은 거라곤 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게 전부인 제국의 늙은이들을 죄다 목매달자고 했다.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그들은 가죽 재킷을 걸치고 닭벼슬 머리를 했으며 진한 화장을 얼굴에 치덕치덕 발랐다. 쇠사슬을 주렁주렁 매달고 여기저기를 쳐부수었다.
허름한 곳을 개조하여 라이브 클럽으로 만들곤 밤새 음악을 들으며 춤췄다.
낡고 병들었으며 쓰레기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기존체제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길 염원했다.
인간을 억압하는 체제를 부순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불렀다.
펑크.
펑크는 음악이었고, 패션이었고,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음악이 아니었고, 패션도 아니었고, 삶의 방식도 아니었다.
펑크는 시대 정신이었다.
세기말을 묘사하는 영화엔 펑크 패션을 입은 부랑자들이 나왔다.
반항아들은 펑크록을 들으며 젊음을 불태우고 어른을 증오했다.
섹스 피스톨즈의 음악과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옷이 세계를 지배했다.
아니, 그들은 지배자가 아니라 해방자였다.
1979년.
섹스 피스톨즈가 해체되고 1년 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실각하는 노동당 정권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그녀가 뿜은 연기 아래로 늙은 제국이 패배를 선언했다.
* * *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는 팬송(Fan song).”
이유이는 아까 떨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바닥을 뚫고 나올 듯한 격앙감이 서려 있었다.
“소녀연맹이 팬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그리고 선물이 가장 기쁠 때는, 주는 사람의 온전한 고민과 마음이 담겼을 때예요. 그러니 가장 중요한 건 하양이가 주고 싶은 것. 의상에서는 하양이가 자신을 어떻게 팬들에게 표현하고 싶은가입니다.”
장하양이 소화해왔던 패션들이 스크린에 차례로 떠올랐다.
수많은 옷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팬들의 열띤 반응을 받았던 옷들을 모았다.
근거는 트잇터 리트잇 횟수, 트래픽, 검색 횟수 등이었다. 즉, 사람들이 얼마나 보았는가가 기준이다.
사람들이 많이 보았단 건 곧 팬들이 많이 공유했단 뜻이다. 왜?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으니까.
“‘롱 포’에서 옆트임과 뒷트임이 있는 재킷과 팬츠수트. ‘세컨드 우먼’이라는 태그를 트잇터 글로벌 트렌드까지 올려놨던, 후쿠요 히다카 쇼에서의 ‘검은 바다’. 보그 재팬 촬영에서 입었던 애슬래틱. 모두 신체에 밀착하면서 어른스러운 느낌을 주었던 거예요.”
장하양의 최대 강점은 얼굴과 동시에 신체다.
시원한 비율과 고도로 단련된 육체.
“하양이도 알아요. 자기가 어떤 옷을 입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지요. 그리고 멤버들에게 어떤 옷이 가장 어울리는지요. 이게 그겁니다.”
소녀연맹판 ‘르 스모킹’.
비록 현재 장하양이 입은 건 팬츠슈트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턱시도와 같은 느낌을 준다.
동시에 옷 전체에 박힌 타공패턴은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그녀의 장점인 신체를 산발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건 장점이자 약점. 성필이 거절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노출 면적은 백댄서들의 기본 복장처럼 여겨지는 디스코 팬츠와 크롭티보다 적다. 하지만 옷이 드러내는 방식이 그 이상이다.
“이사님이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알아요. 그런데 그런 거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야하다, 선정적이다, 이런 말이요. 왜냐하면 그건 정답이 아니니까요.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일 뿐이에요.”
장하양과 이유이가 함께 만들어낸 소녀연맹 ‘르 스모킹’은, 장하양이 판단한 최상의 미(美)다.
동시에 저항의 상징이다.
“10년대에 만들어진 방송국 심의 규제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아시잖아요? 성인 여성한테도 말도 안 되고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이상한 규정을 들먹이고 있어요. 검열이 두려워서 미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건, 소녀연맹이 추구한 방향과 전혀 다르잖아요.”
소녀연맹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항상 한계를 깨어왔다.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운드와 곡 장르를 타이틀로 채택했었고.
생소한 방법으로 안무를 구성했으며.
일본에선 케이팝 아이돌에겐 전인미답의 영역이었던 오디션 프로그램에까지 참여했다.
심지어 아이돌에게 프로듀싱 권한을 부여하는 걸 공식적인 콘텐츠이자 도전과제로 삼았다.
“이 도전이 소녀연맹의 원동력이에요.”
사람들이 응원해주는 이유다.
사람들이 인민이 된 이유다.
소녀연맹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자양분 삼아, 다치고 부서지고 꺾여도 다시 일어나 벽을 향해 나아갔다.
“패션계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디자인에는 책임이 있다고요. 영향력을 얻은 만큼, 그 힘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지 생각하고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요. 저희도 그래요. 소녀연맹이 그렇잖아요. 소녀연맹은 더 이상 책임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어요.”
예상하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고 해서, ‘이럴 줄 몰랐습니다’라며 끝낼 수 없다.
잘못은 대부분 모르고 하는 것이다.
기업도, 나라도, ‘이럴 줄 모르고’ 실수를 저지른다. 미리 알았더라면 실수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모른다는 게 면죄부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실수는 수백만, 수천만 명에게 영향을 끼치니까. 비록 미래를 한 치 앞도 모르지만, 그 영향력을 고려하고 신중히 판단해야만 한다.
힘에는 필연적으로 책임이 따른다.
“저흰 스타그래프 팔로워만 천만 명이 넘어요. 아이튜브 구독자도 수백만 명이에요. 뮤직비디오를 올리면 1억에 가까운 사람들이 봐요. 음악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스트리밍해요. 책임이, 있어요.”
다음 말은 장하양이 받았다.
그녀는 이유이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사님은 방송국 의상 규제를 말씀하시며 반대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그 규제를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해요. 그 규제는 2010년에 만들어졌어요. 여자 연예인이 비키니 사진을 올리면 온갖 험한 말을 얻어먹던 시대예요. 미성년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걸그룹에게 족쇄를 씌웠어요. 그걸 고개 숙이면서 따르면, 저희도 동조하는 게 아닌가요?”
속으로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따른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란다. 이 불합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나오기를.
“그 규제는 출연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 있다고 해요. 하지만 저는 보호받을 필요가 없어요. 보호받고 싶지 않은데도 억지로 주변을 둘러싸고 가둬두면, 그건 폭력이에요. 저는 폭력 때문에 이 모습을.”
자신이 믿는,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성필이 바랄 가장 아티스트다운 지금의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만약 이 모습을 포기해야 한다면, 저는 공중파 음악 방송엔 나가지 않아도 돼요.”
성필은 낮은 신음을 흘리면서 턱을 쓸었다.
장하양과 이유이가 멈칫했다. 하지만 둘은 용기를 내어 눈을 부릅떴다.
“이 ‘르 스모킹’은 제가 생각했기에 제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저희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에요. ‘팬송’이라는 주제의 메인 컨셉 의상이에요. 인민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가장 저다운 저예요. 첫 주에 이 의상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장하양은 쐐기를 박듯 다시금 선언했다.
“공중파 음악 방송엔 나가지 않아도 돼요.”
장하양이 다시 이유이의 곁에 섰다.
둘은 일치된 동작으로 깔끔히 허리를 숙였다.
“이상입니다.”
둘은 달리지도, 격한 운동을 하지도 않았다.
성필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한 게 전부이다.
그런데도 숨이 턱 끝까지 찬 것만 같았다.
‘끝…….’
발표가 끝났다.
그러나 이유이를 사로잡은 건 후련함이나 탈력감이 아니었다. 전신을 휘감는 진득한 긴장감이었다.
성필이 단호히 ‘반대한다’라고 선언한 의제를, 있는 힘을 다해 반박했다.
비록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동료이지만 성필과 이유이 사이엔 아득한 격의 차이가 있다.
나이로도, 직위로도, 업적으로도.
일반적인 직장 생활로 치자면, 이유이는 성필이 톡방에 하등 쓸모없는 정신론을 장문으로 읊어도 ‘많이 깨우칩니다 반드시 마음에 새기겠습니다’라고 답장해야 할 정도로 높은 사람이다.
이른바 부장님, 아니.
이사님이다.
그런 사람이 ‘안 된다’라고 한 의제를 온 힘을 다해 반박하고 논파하려고 했다.
만약 가로 엔터가 평범한 회사였으면 이유이의 회사생활은 고달픈 걸 넘어 끔찍해질 것이었다.
‘그리고.’
성필은 이유이의 우상이다.
때론 웃기기도 하고 유약해 보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강인한 의지와 결단력으로 모두를 이끌어왔던 영웅이다.
그의 밑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를 따른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단 자부심이 있었다.
그처럼 되고 싶었다.
되고 싶었어…….
‘나를 인정해주셨으면 했는데, 아, 이젠…….’
행복한 동행이 끝을 맺었다.
성필이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볼지 상상만 해도 두려워진다.
아니,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말을 들을까.
이유이는 성필이 ‘안 돼요’라 한마디만 해도 ‘네’라고 할 것만 같았다. 그의 눈엔 이유이가 보지 못하는 수많은 결점이 있을 테니…….
“다 끝났나요?”
성필이 물었다.
이유이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끄덕이려고 했는데, 고개가 아래로 내려가 다시 올라오지 못했다.
“그럼…….”
“이사님!”
장하양이 발작하듯 외쳤다. 그녀도 성필에게 대항한다는 상황에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앞으로 나아가는데, 다리에 힘이 없는지 거의 발을 질질 끌다시피 했다.
사람이 너무 화나거나 부끄러우면 얼굴로 피가 몰려, 열을 식히려 눈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녀의 눈은 분노인지 창피함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촉촉해졌다.
장하양의 목울대가 울음을 삼키기라도 하는 듯 자꾸만 움찔댔다.
“이사, 님.”
“응, 하양아.”
장하양은 떨림을 진정시키려 침을 꼴깍 삼켰다.
“소유 언니한테 들었어요. 최근 이사님이 정호환 이사님을 뵀을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요. 정호환 이사님이 컨설팅을 요청하셨을 때,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들었어요.”
믿는 거요.
정말 안 될 거 같을 땐 어쩔 수 없지만, 긴가민가할 때도 있잖아요.
그땐 믿으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필요할 거 같아요.
아시다시피 아이돌이 10대와 20대에게 소구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 나이대의 감성을 대변하기 때문이잖아요.
요컨대.
“아이돌의 감을, 믿어보라고…….”
아이돌은 시대가 선사하는 자양분을 흠뻑 빨아들이며 성장한 이들이므로, 그들의 아이디어엔 분명 어떠한 빛이 있다.
복잡한 계산이나 어른의 통찰로도 잡아낼 수 없는 시대의 빛.
성필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까딱이는 것으로 수긍했다.
“저는 지금의 제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이사님, 도, 그렇게 생각하시길, 바라요. 이사님이 이 모습을 처음 보셨을 때 할 말을 잃으셨던 게, 충격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웠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성필이 자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이사님, 저는, 아, 이사님, 저는, 그러니까, 저는…….”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고.
손은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계속되고.
“무서워요……. 이 순간, 이사님의 생각과 반대되는 생각을 한다는 게요. 이사님께 반기를 든다는 게,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는데, 아, 직접 앞에 서 있는 지금은…….”
떨려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장하양은 주먹을 쥐는 것으로 떨림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럼에도 용기를 냈어요. 왜냐하면 이사님이 저를 믿어주셨으니까요. 이사님이 믿어주시는 저의 장점이, 저에게 빛이 있다고 믿어주시는 게, 저를 사랑할 수 있는 최초의 계기였어요.”
장하양은 용기를 낼 수 있다.
이젠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성필이 그걸 바랐다.
더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저는 이사님이 믿어주시는 저로 있고 싶어요. 그렇게 있길 선택했어요. 그러니까, 이사님이 믿는 아름다움이 저에게 있다고 믿고, 이 자리에 섰어요.”
장하양은 회의실 테이블을 짚은 후 미세하게 떨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발표의 진정한 끝을 선언하며 허리를 천천히 굽혔다.
성필은 생각하듯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두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장하양과 이유이는 판결을 기다렸다.
“음.”
갑자기 성필이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의상팀이랑은 회식한 적이 없네요. 오늘 다들 시간 돼요?”
‘X발 X됐다.’
배헌용이 절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