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24화 (624/760)

624화

소녀연맹의 새 숙소엔 하루가 멀게 소포 박스들이 쌓여갔다.

드디어 독방을 얻어낸 동생 라인이 억눌려 있던 소비 욕구를 마음껏 표출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진 다른 이들과 같이 방을 썼기에 소품 하나 구매하는 것도 고민과 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건 필요 없었다.

그냥 주문해서 방에 두기만 하면 끝이다!

“또 왔네.”

조아라가 현관문을 빼꼼 열고 밖을 보자, 소포 박스가 두 개 쌓여 있었다.

그녀는 큰 박스 하나와 작은 박스 하나를 현관 안으로 들였다. 의외로 큰 박스가 가볍고 작은 박스가 살짝 무게감이 있었다.

‘큰 박스는 보자…….’

[성명: 신숙자]

신아름의 것이었다.

그녀들은 배송 주소의 수취인 이름을 가명으로 두었다. 혹여나 본명으로 했다가 숙소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갈 것을 우려해서였다.

‘작은 박스는…….’

[성명: 박이화]

리카의 것이었다.

조아라는 박스 안에 무엇이 들었나 궁금하여 살살 흔들어보았다.

안에 완충재가 있는지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손바닥만 한 물체가 굴러다니는 듯 뭉툭한 소리가 났다.

‘단단한 재질인가?’

유리일 수도 있으니 그만 만지…….

“아앗!”

조아라가 소포를 든 것을 본 리카는 호다닥 달려와서 그것을 빼앗았다.

“남의 물건은 마음대로 만지면 안 돼! 아라쨩이라도 용서 못 해!”

“뭐 시켰어?”

리카가 검지를 좌우로 저었다.

“프라이버시!”

“그래 뭐…….”

리카는 소포를 머리 위에 이곤 신나는 걸음으로 사라졌다.

리카의 방 문이 쿵 닫히고, 이내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까지 났다. 아마 새로운 보드게임이겠지.

신아름은 아직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성필, 손혜빈과 대단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고 했으니.

조아라는 원래 거실로 나온 목적대로 언니 라인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하니 들어오란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조아라는 흠칫하며 멈춰 섰다.

“뭐, 뭐예요 이거?”

조아라가 맞이한 건 시선을 모두 막는 벽이었다. 길이 좌우 양쪽으로 나 있었다.

“이쪽이야.”

왼쪽에서 장하양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아라는 좁은 입구를 비집고 들어갔다. 벽을 빠져나오자 책상에 앉은 장하양이 보였다.

“아라, 왜?”

조아라는 장하양에게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녀의 눈은 방을 정확하게 둘로 가른 간이 벽으로 향했다.

“쌤, 벽 필요 없다더니 결국 주문했네요.”

백설하와 장하양은 간이 벽을 이용해 하나의 방을 두 개의 방으로 만들었다.

나름대로 각자의 공간에 침대나 책상, 옷장 등 들어가야 할 건 모두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야 하양이가 사자고 했어!”

간이 벽과 천장의 사이에 난 좁은 틈새에서 백설하의 외침이 들려왔다.

장하양은 싱긋 미소 지으며 조아라에게 속삭였다.

“언니가 많이 힘들어 보여서.”

“다 들리거든!”

“아하하.”

“이 정도면 뭐, 그냥 같이 사는 거네요.”

“그래도 서로 뭐 하는지 안 보이잖아. 혹시 몰라, 저 벽 뒤에서 언니가…….”

“아니야!”

조아라는 실실 웃으면서 장하양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장하양은 의자를 빙글 돌려 조아라와 마주 보았다.

“가사 썼어?”

“네. 조금 고쳤어요.”

장하양은 가사지를 받아 찬찬히 읽었다.

[우리 대회엔 포도알이 없어

지껄이며 몰려드네 취객이

재료는 없어 물지 거품만

내가 걔래 개래 아 미안

对不起 Sorry すまん

구름과의 데이트 flight airline

하늘 위라 안 들려서 alright

얘기하려면 쫓아와 봐 성지에

내가 밟은 땅 세계를 순례]

조아라의 가사는 랩이어서 빠르다.

다른 멤버들보다 가사가 길다.

여기까지는 예전에 읽은 것과 같다.

장하양은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웃음 소리)

미안 허세 좀 부려봤어

진심을 말해볼게 두려웠어

네가 날 우러러 봐

마주 않고 돌고 싶어

but 나는 너의 영웅이니까

네가 나를 부르니까

그게 나도 좋으니까

이번엔 위가 아닌 아래에서

너와 같은 곳에 서볼게]

“어때요?”

조아라는 쑥스러운 듯 허벅지 사이에 끼운 손바닥을 슬슬 비볐다.

“리카가 한 말을 빌리면 갭모에? 그런 거라던데.”

“갭모에?”

“반전 매력이요.”

“아.”

“내 개인 곡에선 뭐라고 해야 하나, 개인적인 감상? 감회? 그런 걸 말한 적이 없는 거 같아서, 팬송이니까…….”

“너무 길어.”

“네? 아, 길긴 하죠…….”

조아라가 시무룩해졌다.

작사를 처음 하는 사람이 쉽게 하는 실수다. 마치 논리정연한 글을 쓰는 것처럼 감정의 기승전결을 표현하려다 보니 길어진다.

고작 몇 마디로 내 감정이 전달될까.

그런 불안감 때문에 자꾸만 글을 늘인다.

노래와 춤, 이 두 개가 주는 힘을 안다면 짧은 글로도 얼마든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노래와 춤, 긴 글이 주는 논리정연함을 빼고도 심상을 전달하는 게 시(詩)다. 시가 천재의 영역이란 건 이러한 글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저번보다 더 길어진, 네, 길어졌네요. 줄여서 올까요?”

장하양은 긍정하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라 가사에 맞춰서 송폼(Song form)을 고치면, 지음 오빠가 제시한 최대 시간인 3분 20초를 넘게 되겠지만.”

장하양이 조아라를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가사 전체에서 느껴지는 힘이 좋아. 응, 아라가 무대에서 어떤 모습일지 떠올라. 꼭 보고 싶어.”

조아라의 표정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쑥스러움을 품었다. 그 쑥스러움으로 말미암아 소박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아라는, 두려웠어?”

“네?”

“무대에 서는 게.”

“음, 옛날엔 안 그랬는데 요즘은 그래요. 언니는 안 그래요? 우리, 진짜 말도 안 되게 성공했어요. 이건 뭐 중소기업의 기적, 그런 말로도 표현이 안 되잖아요. 소녀연맹…….”

항상 케이어스를 라이벌로 여겨와서 그렇지, 소녀연맹의 성과는 전대미문이라 불릴 수준이다.

소녀연맹의 처지를 비유하자면, 웨이퍼센트가 데뷔할 때 ‘WTP를 이긴다’는 목표를 잡고 시작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옛날엔 기대받는 게 좋았어요. 아저씨가 내가 바라는 만큼 기대해주지 않는 게…… 자꾸만 한계를 짓는 게 아니꼽기도 했고요.”

“‘아라베스크’ 때처럼?”

“네, 뭐, 그쵸…….”

20살, 한참이나 어릴 때의 기억이 소환되자 조아라는 창피해졌다.

그때 성필의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눈물까지 글썽였었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혀를 깨물고 싶다.

“근데 지금은 기대받는 게 무서워요. 기대란 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하겠단 뜻이잖아요. 우린 성공을 거듭했지만, 이 성공이 언제 정체를 맞을지 몰…….”

조아라는 장하양이 이번 프로젝트의 프로듀서란 걸 떠올리곤 급히 말을 멈추었다.

“아, 언니가 성공 못 한단 게 아니고…….”

“의외네.”

“의외?”

“아라는 항상 당당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어. 내 눈에 아라는 초인이었거든.”

“초인요……?”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자신을 믿고, 실패의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물론 젊은 사람 특유의 자만은 있었으나, 조아라의 높은 자기애는 보기만 해도 동경하게 된다.

장하양은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

“반항 전문가 아라한테 상담해도 될까?”

“반항 전문가는 뭐예요. 아저씨한테?”

“응.”

“뭐, 내가 그쪽 전문가이긴 하죠. 뭔데요?”

“아라는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성공적으로 마쳤잖아. 그런데, 도중에 박 이사님이 네 아이디어를 반대한 적은 없었어? 그럴 땐 어떡했어?”

“반대한 적은…… 있었죠. 저도 뭐 이러저러한 논리를 들어가면서 반박했었는데, 결국은 논파 당하고……. 또, 나중에 보면 아저씨가 대부분 맞더라고요.”

그렇겠지.

장하양은 씁쓸해졌다.

“근데 모르는 일이잖아요.”

“응?”

“‘오토마타’를 내고도 막상 후회되는 게 많았어요. 이건 이렇게 해볼걸. 반대해도 밀고 나가볼걸, 그렇게요. 앨범을 낸 이상 어쩔 수 없지만, 모르잖아요. 다른 세계의 조아라는 폐기된 아이디어로 성공했을지. 언니도 그런 게 있는 거죠? 목에 걸린 가시처럼 도저히 못 넘길 아이디어.”

“그렇지만…….”

“그치만, 뭐요?”

“나는…….”

장하양은 무릎 위에 둔 손을 꼭 쥐었다.

“이사님이 실망한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 이사님이 거부한 제안을 다시 들고 가 봐. 물론, 이사님은 싫은 내색 하나 안 하고 조목조목 다시 이유를 설명해주시겠지. 그런데 속으론 실망하실 거야.”

네 프로듀서로서의 안목은 그 정도구나.

빛나는 아티스트십을 기대했는데, 이 정도.

“사업가들도 아이템이 안 좋으면 그걸 개조하지 않고 그냥 지워버린다잖아. 유이 언니한테 들은 건데, 디자이너들도 그런대. 아예 머리를 비우고 새 아이템에 집중하는 거. 아라 말이 맞아. 그 아이디어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안 넘어가지만, 그건 내 아집이 아닐까…….”

그러니, 성필의 거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착한 아이로서, 충직한 협력 프로듀서로서 다음 아이템을 찾는 게 낫지 않을까.

“아집이면…… ‘아라베스크’ 때 나처럼요?”

조아라가 흑역사인 ‘아라베스크’를 들이밀자 역으로 장하양이 당황했다.

“음, 언니. 나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2 하기 전에 책 되게 많이 읽었거든요. 성공한 사업가나 그런 사람들 이야기요. 그중엔 프로듀서도 있었어요. 언니, 아저씨를 실망시키는 게 싫다고 했죠? 그러니까, 아저씨한테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단 거 아녜요.”

“어? 어, 음…….”

“전제가 틀렸어요. 아저씨한테 반대한다고 나쁜 애가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조아라는 힘없이 무릎 위에 올라간 장하양의 손을 잡았다.

“착해서 칭찬받는 건 학생뿐이에요. 우리가 학생이에요? 어른이 돼서 듣는 ‘착하다’는 칭찬은, 그냥 안 거슬리게 하고 비위나 잘 맞춘단 뜻이에요.”

* * *

술자리는 취기를 더해갔다.

강성욱은 술 때문에 필터가 전부 사라졌다. 그가 짙은 한숨과 불쾌함을 담아 말했다.

“난 ‘나잇값을 하라’는 말이 제일 싫어요. 역으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잖아요? 대체 어떤 장단에 맞추란 건지 모르겠어요. 안 그래요 박 이사?”

“옳은 말씀이십니다. 저도 20대 후반부터 친구들이 자꾸 뭐라 해서, 친구들 앞에선 아이돌 이야기 잘 안 해요.”

“으음, 그렇죠. 그렇게 되죠. 그런데 그러면 안 돼요.”

“그럼 더 적극적으로 할까요?”

“좋네요!”

강성욱이 웃으면서 성필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는 은근한 분노까지 띠며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었다.

“‘나잇값을 하라’는 건 가스라이팅이에요. 그냥 자기 마음에 안 드니까 고치란 뜻이라고요. 왜 그러는지 알아요?”

“왜요?”

“자기들은 그렇게 못 하니까. 개성이란 건 필연적으로 타인과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강성욱은 자신의 찰랑이는 금발을 쓸었다.

“20대, 잃을 게 없는 나이야 마음껏 개성을 드러내죠. 사상, 패션, 취향 등등. 그리고 빛나는 개성을 타인과 부딪치며 성장해가요. 하지만 사회의 부품이 되고 나선 개성을 간직하기 어려워져요. 타인과의 마찰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최대한 둥글고 개성 없는 인간으로 변해가는 거예요. 그게 아니꼬운 거죠.”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인가요?”

“그렇죠. 개성을 드러낼 용기도, 능력도, 지위도 쌓지 못했으니 타인을 끌어내려서라도 자존감을 채우려는 얄팍한…….”

강성욱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가지지 못한 자들, 이루지 못한 자들이 눈물과 한탄으로 만들어낸 무기가 바로 ‘나잇값을 해라’인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가진 최고의 훈장이 ‘넌 사회생활을 잘해’, ‘넌 착해’ 이런 무미건조한, 있으나 마나 한 칭찬이에요. 왕은.”

강성욱이 다리를 꼬곤 와인을 음미했다.

“모두의 위에 서기에, 누구와도 시야를 공유하지 않아요. 그래서 눈치를 볼 필요가 없죠. 아예 시선의 높이가 맞지 않으니까요. ‘나잇값 해라’라는 볼멘소리 따위에 신경 쓰지 마요.”

성필은 강성욱이 지닌 자존감의 무게를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긴, 이만한 그릇이 없고서야 어떻게 댄스 가수로서 현역이겠는가. 온갖 방송에 얼굴을 비출 수 있겠는가.

아이돌의 자신감은 업적과 빛나는 젊음으로부터 나온다. 젊음이 퇴색된 후부터는 유유자적 살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젊음을 잃어버린 채 다른 재능들과 비교당하는 게 싫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성욱의 자신감과 자존감은 범인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박 이사는 아이돌 멤버를 뽑을 때 주요한 기준이 뭐였나요? 저는 리더로는 ‘말 안 듣게 생긴 것 같은’ 애를 골랐어요.”

“아, 그래서 누나가…….”

둘의 프로듀싱 토크에 정신이 아득해진 손혜빈은 술만 들이켠 결과, 현재는 팔짱을 끼곤 눈을 감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 듣고 있다.”

“으하핳! 그렇죠! 혜빈이가 딱 그랬어요! 그리고 경민이도.”

강성욱은 잠든 유경민을 사랑스럽단 듯 보았다.

“저희 연습생들은 달마다 팀을 짜서 팀 미션을 치러요. 중간중간 트레이너들에게 피드백을 받고요. 경민이네 팀이 창작 안무를 짜서 왔는데 트레이너가 빠꾸를 놓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경민이가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우리 모두가 좋다고 했다.

바꾸려면 내 뒤에 선 모두를 설득해라.

“깡이 대단하네요.”

“그렇죠. 연습생 입장에서 회사 직원은 그야말로 신인데! 그리고 트레이너가 경민이를 제외한 모두를 전부 설득했어요.”

“어?”

“그러니까 경민이가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나는 설득 안 된다.

난 이 안무가 좋다.

“결국 혼자서 팀 평가를 치렀어요 으하하핳!”

“연습생이 회사에 비협조적인 걸 오히려 높게 평가하신 건가요?”

“아, 그렇죠, 그랬죠. 그거 알아요 이사님? 착한 사람이 칭찬받는 건, 그 사람이 아랫사람일 때뿐이에요. 밑에 있는 사람이 착해서 좋아하는 건 상사나 선생님이니까요. 그리고 아이돌은 아랫사람이 아니에요. 경민이는 엄연히 SMS 엔터와 계약한 동등한 동업자예요. 신과 다름없는 우리에게도 반역할 수 있는 용기, 그게 제가 찾는 ‘아이돌리즘’이에요.”

강성욱이 손바닥 끝을 성필 쪽으로 향했다.

“이사님의 아이돌리즘은 무엇인가요?”

* * *

대리기사는 손혜빈과 성필, 신아름을 태우고 소녀연맹의 숙소로 향했다.

조수석의 손혜빈은 죽은 사람처럼 팔짱을 끼곤 고른 숨소리만 냈다.

성필은 숙소 앞에 도착하기 전, 미리 멤버 중 한 명을 불러냈다.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성필이 말했다.

“누나, 데려다주고 올게.”

“나 다 듣고 있다.”

성필은 먼저 차에서 나가 신아름 쪽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등을 내밀었다.

“업혀.”

“…….”

성필은 신아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괜찮으세요? 환자 발생! 환자 발생!”

“…….”

대답이 없었다.

“나 다 듣고 있다.”

엄한 손혜빈만 반응했다.

성필은 어쩔 수 없이 신아름을 앞을 향하여 안았다.

한국어로 ’1인 수평 나르기‘, 영어로는 ’신부 나르기’, 일본어로는 ‘공주님 안기’로 신아름을 차 안에서 빼내었다.

일단 숙소가 위치한 아파트 동의 입구로 걸어갔다.

“으응…….”

밖으로 나오니 추운지, 신아름은 성필의 가슴 쪽으로 머리가 오도록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무게 중심이 성필을 향하여 실리자 그는 한숨 돌렸다.

신아름의 무게는 성필이 이두 운동을 할 때 드는 바벨보다 적지만, 바벨은 사람이 잡기 쉽도록 설계된 것이다.

인간 신아름을 드는 건 성필로서도 꽤 힘이 드는 작업이다.

“이사님.”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고 패딩 차림의 장하양이 빠르게 달려왔다. 그녀는 성필과 신아름의 모습을 번갈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내밀었다.

“업혀주세요.”

“아름아, 일어나. 집에 가야지.”

대답이 없었다.

성필은 발을 땅에 닿게 하면 일어나겠지 싶어서 그녀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발을 땅에 두고 그녀의 상체를 붙잡아 일어나도록 했다.

신아름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에리카, 죽어…….”

“…….”

“…….”

성필과 장하양은 못 들은 척했다.

“하양아, 업는 건 그만둬.”

사람을 업는 건 매우 매우 매우 힘들다.

아무리 운동으로 단련된 장하양이더라도 신아름을 업고 버티는 건 무리가 아닐까.

“괜찮아요. 아름이 정도는 두 명 업고도 스쿼트 할 수 있어요.”

“바벨을 매고 걸은 적은 없잖아. 앉았다 일어나는 거랑 걷는 건 아예 달라. 자, 아름아 가자. 저기 언니 손 잡아.”

“죽어라, 에리카…….”

“…….”

성필은 신아름의 손을 장하양과 잡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신아름의 다리 힘이 풀렸다.

급히 두 사람이 신아름을 부축했다.

“아…… 역시 혼자선 안 되겠네. 하양아 잠시만.”

성필은 대리기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하곤 돌아왔다.

성필과 장하양이 신아름을 양쪽에서 부축하여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밤중의 침묵이 공기를 메웠다.

“술 많이 드셨어요?”

“그냥 적당하게 마셨어. 아, 왠지 미안하네. 하양이는 일하는데 술 마시는 거 같아서.”

“노신 게 아니잖아요.”

강성욱과 벌였던 댄스 배틀이 떠오른다.

성필은 그것을 머릿속 한 편으로 밀어 넣었다.

“이사님.”

“응?”

“저는 착한 아이인가요?”

“일단 하양이는 아이가 아니지. 착한 걸로 따지면, 응, 천사지.”

장하양이 어렴풋이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나쁜 아이가 돼도, 쭉 저를 가족이라고 생각해주실 건가요?”

“갑자기 무거운 질문하지 마. 나 지금 취했으니까.”

“취하면 이런 얘기는 못 하나요?”

“무슨 흑역사가 생길지 모르니까. 나중에 이걸로 또 놀릴 거잖아.”

“안 놀려요.”

성필은 ‘나쁘면, 얼마나?’란 질문을 취기의 저편으로 날려버렸다.

“나쁘고 착하고는 가족의 조건이 아니야. 착해도 가족이고 나빠도 가족인 거야. 일 년에 얼굴 한번 보기 어려워도, 소원해져도, 설령 더는 볼 수 없게 되어도, 그래도 가족이야. 소중한…….”

취기로 몽롱한 정신에도, 성필은 방금 말이 꽤 창피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령 하양이가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관계를 끝내진 않아. 소냐가 될게.”

하지만 한번 풀린 입은 멈추지 않았다.

“소냐…….”

장하양은 그 이름을 입 안에서 몇 번이고 굴렸다.

‘죄와 벌’의 등장인물인 소냐는 살인을 저지른 라스콜니코프를 따라 시베리아로 간다.

그의 속죄를 믿고, 그가 형기를 마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한다.

“제가 그 정도로 이사님께 해드린 건 없어요.”

“하양아, 이 말 알아? 자식은 태어난 후 1년 동안 효도를 마친다고. 사람은 태어나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의 기쁨이었던 순간이 있어. 그저 살고, 웃고, 먹고, 일어나서, 걷고, 그저 삶이 모두의 기쁨인 순간. 하양이의 효도는 나와 만나고 1년 동안 모두 해줬어. 그게 네가 나에게 준 행복의 양이야. 나와 만나 1년을 보낸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

장하양은 말없이 신발 끝을 바닥에 꾹꾹 비볐다.

“그 비유는 적절하지 않아요.”

“그런가?”

성필이 취하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쁘지만, 적절하지 않았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장하양은 홀로 신아름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둘은 엘리베이터 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왜냐하면, 제가 이사님께 갚아야 할 행복의 양은 아직도 높이를 알 수 없을 만큼이나 쌓여 있으니까요.”

그리고 장하양은 그 행복을 갚는 법을 안다.

최고의 아이돌.

그 빛나는 이름만이 유일한 보답이 될 것이다.

“앞으로 보여드릴게요.”

저의 아이돌리즘.

* * *

이유이의 작업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골머리를 썩이며 레퍼런스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하양을 보지도 않고 그녀의 요청에 답했다.

“시간 낭비야, 하양아.”

“하지만…….”

“하지만 같은 건 없어. 이사님께 의상을 보여주고 설득한다고? 지금까지 너희의 모든 의상은 일러스트레이션 형태로 기획됐고, 그걸 컨펌받아서 처리했어. 시간에 쫓겨 만든 의상 따위 오히려 마이너스일 뿐이야.”

이유이의 어투는 단호했다. 그 단호함엔 성필에 대한 신뢰감이 깔려 있었다.

성필의 판단을 신의 계명처럼 받드는 이의 모습이었다.

“옷을 직접 만들 시간은 없어. 낭비야. 그러니까 하양아, 이 얘기는 그만하자.”

그렇게 장하양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이유이는, 곧 잘못을 깨달았는지 일어나 그녀와 마주 보았다.

“1분 1초가 급해. 메인 의상 기획이 최소한 이번 달 이내엔 나와야 해. 그래야 뮤직비디오로 넘어가지. 그리고 너희 연습까지. 시간이 빠듯해. 미안해.”

“……아니에요.”

장하양은 이유이의 작업실을 나왔다. 그녀는 밤새 손본 의상 지시서를 물끄러미 보더니, 보낼 길 없는 한숨을 뱉었다.

“제가 아는 양재사분이 계세요.”

같이 작업실에 있던 배헌용이었다.

그는 어느새 작업실에서 나와 있었다.

“네?”

“양재사분이요. 그거 보여주실래요?”

배헌용은 지시서를 들고 짧게 살폈다.

“음, 재질이랑 디테일, 정확한 자재만 표기하면 어떻게든 될 거 같네요.”

“아시는 양재사분이면, 믿을 만한가요? 만약 시도한다면 이 일은 실패해선 안 돼요. 최대한 빠르게, 정확히, 완벽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 글쎄요?”

“……글쎄요?”

“저도 유이 선배한테 받은 주소라서…….”

가로 엔터는 여러 양재사, 재봉사,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와 협업하고 있다.

배헌용이 아는 양재사란, 가로 엔터가 원래 협업을 이어오던 사람일 뿐이었다.

“그, 그래도 믿을 만할 거예요. 유이 선배가 신뢰도 A+로 평가하신 분이거든요.”

“안내해주세요.”

“아니, 이거 디테일이랑 자재를 구해서 첨부해야 해요. 일단 동대문 시장…….”

“이거 기성품이에요.”

“……이게?”

“여기 있는 거 전부 기성품이에요. 그러니까 옷만 챙겨서 믿을 만한 양재사분에게 가면 돼요. 필요한 건 타공패턴을 뚫는 것뿐이니까요.”

* * *

그는 30년 동안 양재사 일을 해왔다.

90년대부터 아이돌의 의상을 손보았고, 최근에 와서도 여러 아이돌이 그의 손을 거친 옷을 입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나 아이돌 손님이 찾아왔다.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종이백에 넣어온 옷을 작업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두었다.

“어디 볼까요…….”

양재사는 도수가 높은 단안경을 쓰곤 옷을 살폈다.

‘특이한 옷이군. 캣슈트(Cat suit)라고 하던가.’

재질은 유광(流光).

캣슈트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상의와 하의가 일체형으로 붙어 있다.

원 숄더, 즉 어깨는 왼쪽이 아예 없고 오른쪽만 있다. 왼쪽 어깨가 훤히 노출되는 타입.

또한 가슴 중앙의 금색 링 장식이 가슴 쪽 천을 당기는 디자인이라, 중앙부는 비키니 수영복처럼 보인다.

왼쪽 어깨 노출에 맞춰 언밸런스함을 강조하려는 건지, 왼쪽 갈비뼈 부분도 천이 없어 훤히 노출됐다.

‘디자인이 상당히…….’

오랜 세월 옷을 보아왔던 양재사는 단언했다.

‘유려해. 세련됐어.’

물론 이런 옷을 평상시에 입을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파티 때 입거나, 아이돌의 무대 의상으로 쓰일 법하겠지.

재질은 저지(Jersey) 중 트레이닝복에 자주 쓰이는 타입이다. 거기에 몸에 딱 달라붙는 디자인이라, 아이돌 의상으로도 상당히 과감한 감이 있다.

‘요즘 아이돌도 이런 의상을 입던가? 옛날에 섹시 컨셉이 많았을 땐 꽤 많이 만져봤지만.’

목부터 발목까지 일체형인 캣슈트.

다음은 블레이저다.

오픈 크롭 재킷.

크롭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반 블레이저 재킷과 달리 길이가 짧다. 갈비뼈에서 끝나는, 배가 훤히 보이는 길이다.

‘이건…… 개버딘(Gaberdine) 소재인가?’

양재사가 재킷을 검지와 엄지로 쓰다듬었다.

그가 흠칫 놀랐다.

‘이거, 상당한 고급사(高級絲)다.’

개버딘은 흔히 명품 브랜드 ‘버버리(burberry)’의 버버리 코트의 재질로 알려져 있다.

버버리에서 사용하는 개버딘은 조직이 매우 치밀하여 촉감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마치 귀금속처럼 은은한 광택마저 뿜어낸다.

이게 그러하다.

양재사는 허겁지겁 캣슈트를 만져보았다. 이윽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옷의 시그니처를 확인했다.

[SAINT LAURENT]

생로랑.

“입생로랑?!”

양재사가 경악했다.

그는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이, 이것들, 얼마입니까?”

“수트는 500만 원 정도요. 재킷은 400만 원이요.”

“그, 그런데, 이, 이걸……?”

“네, 구멍을 뚫어주세요.”

하나도 아니고, 옷 전체에.

* * *

장하양은 우울하게 가로 엔터 1층의 휴게 공간 소파에 앉았다. 그녀의 품엔 양재사에게서 거절당한 옷가지들이 안겨 있었다.

양재사는 도합 1,000만 원의 옷에 구멍을 뚫을 순 없다고 했다. 만약 실패라도 했다간 어떤 욕을 얻어먹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장하양이 괜찮다고 했으나, 그는 사람 마음 모르는 거라고 절대 안 된다고 거절했다.

“하아…….”

타공패턴은 그냥 구멍만 규칙적으로 뚫으면 되는 게 아니다. 평면으로 뚫린 구멍의 위치만이 아니라, 직접 입었을 때의 비주얼도 고려해야 한다.

타공패턴을 만들려면 상당한 공간지각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찾아가는 양재사마다 기겁하면서 거절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용기 내서 백화점도 갔는데…….’

성필의 선물을 살 때나 혼자 가본 곳이다. 매장으로 들어가는 것만 해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었다.

“하양 씨.”

안쓰럽게 장하양을 보고 있던 배헌용이 그녀를 불렀다. 장하양은 그가 위로해주려는 줄 알고 아하하 웃었다.

“괜찮아요. 아직 다른 분들이 많으니까요. 또 돌아다니다 보면…….”

“하양 씨만 괜찮으시면, 제가 해볼까요?”

“……하실 수 있으세요?”

배헌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메고 다니던 크로스백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가방을 꺼내었다.

배헌용의 현장가방(Stand by bag)이었다.

스타일리스트들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항상 지니고 다니는 가방이다.

“필요한 물품은 있어요.”

배헌용이 가방 안의 물품들을 꺼냈다.

스팀다리미, 옷핀, 핀봉, 실, 바늘, 테이프, 손톱깎이, 쪽 가위, 가위, 집게, 보푸라기 제거기, 티슈, 얼룩제거제, 정전기 방지제 등등.

배헌용이 능숙한 솜씨로 가위를 잡았다.

“헌용 님 스타일리스트…… 이시지 않아요? 옷을 재봉해본 경험은…….”

“있습니다.”

배헌용.

대학교 패션디자인 학사.

대학원 디자인학과 의류직물학과 석사.

미국 뉴욕 F.I.T 패션 아트 디자인 과정 수료.

할리우드 캘리포니아 아카데미 패션 과정 수료.

“옷은 질리도록 만졌어요.”

“……그런 분이 가로 엔터에는 왜?”

“취직하기 싫었는데, 엄마가 아무 데든 좋으니 빨리 취직하라고 성화를 부리셔서…….”

‘이번 학교만 졸업하면 정말 끝이라고 했잖아! 대체 학위를 몇 개나 따려고 하는 거야! 엄마도 사람이야 사람! 이번엔 널 믿었단 말야!’

“……예, 엄마가 취직하라고 하셔서요.”

그의 화려한 경력은 ‘일하기 싫다, 사회인이 되기 싫다’는 마음의 발현일 뿐이었다.

그는 대학교 생활이 좋았다.

그냥 배우고 사람을 만나러 다니는 게 좋았다.

특히 외국 학교 생활은 다들 배헌용의 나이를 20대로 오해했기에 더욱 좋았다.

되찾을 수 없을 줄 알았던 20대 초반의 대학 생활을, 그는 나이가 들어서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걸 그만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라고 말하면 좀 그렇겠지만, 예, 집에서 가까운 곳에 취직한 겁니다.”

배헌용, 30대.

정확한 나이는 비밀. 그리고 그게 가로 엔터에 취직하는 조건이었다.

한참 어린 이유이에게 스타일리스트 업계의 위계질서와 갈굼을 실시간으로 체험하는 중이기도 하다.

“되게 동안이셨네요.”

“얼굴이야 돈만 있으면……. 암튼, 하양 씨가 허락해주시면 제가 집도하겠습니다. 어쩔까요?”

‘어쩔까요’란 질문엔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드러났다.

장하양은 짧은 고민 후 흔쾌히 수락했다.

“원래 유이 언니한테 맡기고 싶었어요.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해보겠습니다.”

배헌용이 미소 지으면서 가위를 움직였다.

“‘파리 의상 조합 학교’ 출신한테 맡기는 것보다야, 제 쪽이 훨씬 믿음직스럽죠.”

이유이한테 쌓인 게 많나 보다.

그리고 배헌용의 손길 아래에서, 1,000만 원짜리 의상이 순식간에 잘리고 봉합되길 반복했다.

‘파리 의상 조합 학교’ 출신, 입생로랑의 옷이 부서지고 재창조된다.

안녕하세요 하나호입니다.

작중 등장 아이돌 그룹인 ‘넛지’의 이름을 ‘아카이브’로, 그리고 ‘넛지’의 팬덤인 ‘소프트’를 ‘프루트’로 변경 진행하였습니다.

해당 변경에 따라 이전 원고인 438화, 545화, 558화, 561화, 562화, 621화, 622화, 623화의 단어를 수정하고 558화에서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관련하여 558화에 추가한 그룹 이름 설명을 첨부합니다.

[아카이브(Aka1Iyves)라는 이름은 ‘As known as The first(1) Is yevs(알다시피 첫 번째는 이브다)’의 축약어다.

아카이브는 이브, 창세의 첫 번째 여성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그리하여 아카이브의 팬덤 ‘프루트’는 이브와 연관된 선악과에서 이름을 따왔다.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of evil’에서 ‘그 과일(The fruit)’을 뜻한다. 이브에게 선악의 지혜를 깨우치게 한 신의 열매에게서.

물론 이걸 전부 외우는 건 아카이브의 팬들 뿐이다.]

현실에 발을 걸친 주제인 아이돌을 다룸에 있어서 독자분들이 현실과 글을 연관 짓는 건 자연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돌 산업이 엄연히 현실에 실존하는 산업이자 업계이기에, 작가인 저 역시 정보를 실제 업계에서 수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분들이 현대판타지 소설을 읽을 때 현실과 엇나간 설정은 글의 몰입감을 저하시키는 주된 요인 중 하나가 되며. 현실과 비교하며 모티프를 추측하고 비교해보는 것 또한 본 글의 재미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일부 독자분들은 눈치채셨겠지만 ‘넛지’라는 이름과 ‘넛지’의 소속사는 모티프와 이름의 연관성을 굉장히 유추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모티프를 추측하고 연관 짓는 게 이름으로 행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이란 과도한 특정성을 지니기에 이름이 비슷하다는 점만으로도 소설 인물을 실존 인물에 직접적으로, 너무나 쉽게 대입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실존 인물의 이미지가 덧씌워진다면, 그것도 특정성을 전제하는 이름으로 인물과 그룹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면, 해당 캐릭터 자체가 아니라 실존 인물과 관련지어 이해하게 될 수도 있으며, 이는 연관 지어지는 실존 그룹에게 제가 글로써 누와 폐를 끼치는 일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서 의문점을 가지신 독자분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실의 그룹을 모티프로 이름을 딴 작중 등장 그룹이 이 소설에 이미 존재하니까요. 예를 들어 ‘WTP(WaTerProofers)’는 여러분들이 익히 아시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케이팝 보이그룹인 ‘BTS’에서 따왔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유우토가 소녀연맹의 앨범을 사러 갔던 장면에 잠시 이름이 언급되는, 록을 주력으로 하는 케이팝 그룹인 ‘세븐데이’는 실존 그룹인 ‘데이식스’에서 이름의 모티프를 땄습니다. 하지만 실존 그룹에서 이름을 차용한 작중 그룹은 소설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고, 않을 예정입니다. WTP란 이름은 독자분들이 그 위상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도록 일종의 지향점이자 시장의 천장을 부수는 장치로만 기능할 겁니다.

TMI를 덧붙이자면 ‘넛지’는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 그룹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등장 그룹이 아닙니다. 438화에서 새롭게 데뷔한 그룹 이름을 하나 떠올려야 했는데, 바로 옆의 책장을 보니 꽂혀 있던 책이 ‘넛지(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였습니다. 넛지는 ‘부드러운 개입’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을 Smooth하게 끌어들이겠단 뜻을 담아(개인적으로 마이클 잭슨의 Smooth Criminal을 연상했었습니다) 그룹 이름으로 적절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개입’이 그룹의 이름이니, 팬덤 이름은 부드럽게 이끌려들어온 ‘소프트’로 정했던 것입니다.

SMS 엔터 또한 첫 언급 시엔 손혜빈의 과거 소속사였으며, 미국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는 설명만이 등장합니다. 이는 명칭 연관성 없이 실존하는 기획사의 행보를 차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SMS 엔터가 ‘넛지’라는 그룹과 결합되면서 생각지도 못하게 연관성이 상당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실존 그룹에게서 모티프를 따오지 않았음에도 이름으로 실존 그룹과 연관성이 커져 오해를 불러일으키키 매우 쉽기에 명칭을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걸그룹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서 이런 연관성을 작가인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고 이번 수정으로 독자분들께 혼란을 드려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추가로, 위의 설명과 관련은 없지만 한 독자분이 438화에 적어주신 ‘넛지’의 멸칭인 ‘넛건적’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었습니다. 항상 독자분들의 댓글에 힘을 얻습니다.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를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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