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23화 (623/760)

623화

그는 신아름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정말 처음 듣는 칭찬법이네요! 으음, 굉장히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와줘서 고마워요 아름 씨. 그럼 앉을까요?”

그 말과 동시에 직원이 문 앞에 도착했다.

다섯은 자리를 잡았다.

강성욱은 레스토랑의 시그니처 메뉴를 주문하곤 주류 목록을 살폈다. 그리고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다섯 종류의 와인을 골랐다.

“이거 다섯 개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직원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곧 숙련된 태도로 방을 나섰다.

“뭐 시켰어요?”

“혜빈이 취향 하나, 내 취향 하나, 이사님 취향일 거 같은 거 하나.”

강성욱이 성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필은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숙녀분들을 위한 거 하나씩.”

“아 대표님!”

손혜빈이 옆자리에 앉은 강성욱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차를 홀짝이던 유경민은 거의 차를 뿜을 뻔했다.

“요즘 숙녀분, 아가씨, 이런 단어 쓰면 안 된다니까요!”

“아…… 그런 거야?”

강성욱이 사실이냐고 묻듯 성필을 보았다.

“어……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연세가 있으신 분들에겐 입에 익은 호칭인 거잖아요. 저도 아시는 교수님이 한 분 있으신데, 옛날엔 저를 ‘박 군’이라고 부르셨어요.”

“군?”

“일본식 호칭이요. 이름 뒤에 ‘군’, ‘양’ 붙이는 거요.”

“흐흨.”

뜬금없이 유경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냐는 듯 이목이 모이자 그녀는 웃음을 지웠다.

“무례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괜찮아, 말해보렴. 어른들만 있어서 완전 Young하고 MZ한 농담을 하기 꺼려지니?”

강성욱의 독려에 유경민은 눈치를 살폈다.

모두의 분위기가 호의적이자 그녀는 또 낮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성필쿤…….”

‘성필쿤(君)’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리카가 조아라를 ‘아라쨩’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아주 박장대소하지 않을까.

“하하!”

강성욱이 또 헤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번엔 좀 억지로 하는 느낌이 났다.

본인이 유경민을 독려했으니, 그 책임을 지려고 웃는 듯하다.

“아아, 그래요. 숙녀나 아가씨는 일본식 호칭 같은 거……. 연세가 있는 분들이 쓰는…….”

갑자기 강성욱의 눈망울이 우수에 젖었다.

성필은 그가 왜 저런지 몰라 당황하고 있자, 손혜빈이 그에게 속삭였다.

“나이니 연세니 그런 단어 꺼내지 마.”

“아.”

“대표님은 언제까지나 완전 Young하고 MZ이고 싶으신 분이야.”

잠시 우수에 젖었던 강성욱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시금, 오늘 다들 모여주셔서 고마워요. 혜빈이만 만나는 것도 즐거운데, 이사님과 아름 씨까지 모여주시니 정말 좋네요. 우리 혜빈이 잘 부탁드립니다. 얘가 참 많이 말괄량이 같죠?”

신아름은 인지부조화가 왔다.

손혜빈은 신아름 입장에서 엄청난 언니이고, 엄청난 선배이다.

그런데 그 엄청난 언니와 선배를 마치 소녀처럼 부르고 있으니, 도저히 상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면이 없잖아 있죠.”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많이 나아진 거예요.”

“그쵸. 옛날 그대로였으면 어떻게 지냈을지.”

“음? 옛날에도 혜빈이를 만난 적이 있나요?”

“네. 누나가 SMS 엔터로 가기 전까지 매니저로 있었습니다.”

“아아, 그래요? 이거 참, 그때 이사님도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성필은 굳이 ‘SMS 엔터에 가고 싶었으나 받아주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표님네 회사가 안 받아줬는데 얘가 어떻게 가요.”

“아? 정말인가요?”

“누난 진짜…….”

성필이 눈치를 주자 손혜빈은 어깨만 으쓱였다.

“저런, 그때 저희 회사 인사 담당자들이 정말 보는 눈이 없었네요.”

“아닙니다. 그때 저야 뭐, 아무것도 가진 거 없는 청년이었으니까요. 자랑할 거라곤 군필, 운전면허, 혜빈 누나 로드 경력이 전부였고요.”

“지금이라도?”

강성욱이 은근히 물었다.

신아름은 머리칼이 쭈뼛 섰다.

“제안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옮기기에는 가로 엔터에 둔 게 너무 많네요.”

신아름의 머리칼이 가라앉았다.

강성욱이 수긍했다.

“5년의 마음이란 무겁죠.”

전채요리와 함께 주문한 와인 다섯 병이 도착했다. 와인을 가져온 직원조차 어떻게 술을 분배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보통 손님들은 한 병을 시킨다. 애초에 여러 병을 시킬 만한 가격이 아니니까. 한 병이 주문되면 웨이터가 숙련된 솜씨로 병을 개봉하고 잔에 술을 채운다.

그런데 술만 다섯 병이니, 무엇을 먼저 따고 어떻게 배분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저희가 알아서 마실게요. 나가보셔도 괜찮아요.”

직원이 나가자 강성욱이 은근한 투로 말했다.

“한 병만 시키면 눈치가 보이거든요. 저는 여기 분위기가 좋아요. 후식을 먹고도 느긋하게 앉아서 혜빈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눈치 신경 안 쓰고 있으려고 다섯 병 시켰어요. 자자.”

강성욱은 직원이 두고 나간 코르크 따개를 들어 모든 코르크를 땄다. 그리고 각 병을 잡아 모두의 잔에 부어주었다.

일반적으로 잔을 채우는 양보다 2배는 많았다.

잔을 비우면 취기가 올라올 수준으로 많았다.

“그럼 우리 막내 혜빈…… 이가 아니네.”

강성욱은 머쓱하게 웃더니 잔을 유경민 쪽으로 기울였다.

“경민이가 해볼래? 완전 Young하고 MZ한 걸로.”

“이 멤버 리멤버 포에버.”

“……응?”

“이 멤버, 리멤버.”

유경민이 흐린 눈으로 선창하자.

뒤이어서 다른 이들이 얼떨떨하게.

“포, 포에버!”

를 외쳤다.

강성욱은 ‘포에버’를 외치면서도 마뜩잖아했다. ‘이거 유행 꽤 오래전에 지나지 않았어?’라고 작게 물었으나, 누구도 딱히 답하지 않았다.

“읍!”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신아름이 눈을 빛냈다.

“이거 엄청 맛있어요! 조아라가 사 오는 싸구려랑은 차원이 달라요!”

성필이 이해한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들어요 아름 씨. 이사님은 어때요? 먹을 만한가요?”

“먹을 만한 게 아니라 평생 이것만 마시고 싶을 정도로 맛있네요. 와인은 잘 안 먹는데, 이거라면 와인만 마실 수도 있겠어요.”

강성욱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술은 맛있었다. 그리고 강성욱은 자꾸만 건배를 요구했다.

대화, 술, 건배.

“성필아, 천천히 마셔. 너 그러다가 훅 가. 이거 도수 쎈 레드와인이라서…….”

“이사님, 짠!”

“대표님 짠!”

“…….”

강성욱은 술고래다. 술고래인 것만도 무서운데, 그가 만드는 즐거운 분위기는 주변 사람들도 흔쾌히 술을 목구멍 안으로 넘기도록 한다.

신아름은 평소 술이 맛없다며 잘 먹지 않았다. 그런데 맛있는 술을 접하니 ‘나 사실은 알쓰(알코올 쓰레기)가 아닐지도?’라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유경민은 무슨 속셈인지 신아름이 잔을 들 때마다 자신도 잔을 들었다. 즉, 둘이 먹는 술의 양은 같았다.

손혜빈은 자신을 제외한 이들 모두 알코올의 바다에 빠지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그랬지. 강 대표님이랑 술을 마시면 원래 이런 분위기였지.

어른이 되고 거절하는 법을 알게 되어 서서히 잊어가던 공포가 되살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호오, 춤을?”

성필이 춤을 배운단 이야기까지 넘어왔다.

강성욱이 재킷을 벗었다. 몸에 딱 붙는 면티 아래로 그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한번 춰보겠어요? 같이.”

“예, 좋습니다!”

성필도 코트와 터틀넥을 거의 동시에 벗어젖혔다. 강성욱과는 다른 느낌으로 발달한 신체가 드러났다.

“으음!”

“아빠 힘내애애애애!”

취해서 정신이 나가버린 신아름은 와인병을 껴안은 채 외쳤다.

“으하핳! 대표님이 이긴다에 100만 원!”

유경민은 은행 어플을 켜곤 폰을 응원봉처럼 휘둘렀다.

“가요, 박 이사.”

“오십시오, 강 대표님.”

“곡은?”

“소녀연맹의 ‘아라베스크’.”

“음!”

“가능하십니까?”

“프리스타일이길 바랐지만, 춤을 배운지 한 달도 안 된 이사님에게 기대하긴 어렵겠죠. 어드밴티지를 드릴게요.”

“성필아 춤은 무슨 춤이야.”

손혜빈이 성필의 광기를 말리려 했다.

“내일 이불킥하지 말고 그만 앉아.”

“아니, 누나. 난 해야만 해. 강성욱 대표님 같은 댄서와 춤을 섞어볼 기회가 살면서 얼마나 있을까? 단언컨대, 없어. 지금 이 순간이야. 내가 춤을 배운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순간 때문이야. 수십 년간 춤을 익히고, 아이돌을 프로듀싱해온, 살아 있는 전설인 강성욱 대표님과 스텝을 섞기 위해.”

‘X발 접대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손혜빈은 절로 감탄했다.

그렇게 성필의 접대 댄스 배틀이 시작됐다.

* * *

당연하지만 성필이 패배했다.

댄서로서 쌓아온 세월 자체가 다르다.

매우 놀라운 사실이겠지만, 성필은 사실 승리를 자신했었다.

왜냐하면 ‘아라베스크’는 옛날에 꽤 오래 연습했었고, 최근에도 몇 번이나 다시 실력을 갈고닦았기 때문이다.

‘외우는 게 끝이 아니야.’

성필은 숨을 헐떡이며 무릎을 꿇었다. 술 때문에 숨이 거칠었다.

‘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이미 진즉에 알고 있던 사실이다.

아이돌이 춤을 외우고 그걸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이상의 경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건 보아서 아는 거였지, 직접 해봐서 아는 게 아니었다.

‘외우는 것 이상…….’

개성과 능력, 재능이 발현되는 지점이 있다.

이를테면, 완벽한 재현이 100점이라면 개성이 더해지는 건 100점 이상의 경지인 것이다.

강성욱이 그러했다.

도저히 성필과 같은 춤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일어나요, 이사님.”

강성욱이 쓰러진 성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성필은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성필을 응원하는 데 모든 힘을 쓴 신아름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유경민은 신아름이 남긴 술이 든 잔을 들어 입 안에 밀어 넣듯이 하고는, 신아름을 따라 머리를 박았다.

“대표님 잘 추시네요. 아, 제가 할 말이 아니겠죠. 전직 댄스 가수셨던 분한테…….”

“칭찬은 누구한테 듣던 좋은 법이죠. 특히 춤을 아는 사람에게라면요.”

둘은 다시 서로를 보고 앉았다.

손혜빈은 한숨을 쉬었다.

“둘 다 만족했어요?”

“으음.”

“응.”

“대표님은 언제쯤 어른이 되실래요?”

“어른이니 뭐니, 그런 말은 지겨워. 알잖니?”

“알죠…… 몇 번을 들었으니…….”

“그리고 난 대결이 좋아. 기회가 왔으니 한 거야. 여긴 내가 대여한 곳이나 마찬가지인 공간이잖니?”

손혜빈은 충분하다며 손을 저었다. 그리고 성필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성필은 강성욱을 똑바로 보는 것으로 손혜빈에게 대답했다.

“대표님.”

“본론인가요?”

“아…….”

강성욱은 술기운이 섞인 채 헤프게 웃었다.

“저는 SMS 엔터의 대표예요. 저와 딱 10초만 대화하려고 늘어선 줄이 올림픽 대로를 다 메울걸요? 그런데, 저와 사적인 공간에서 수 시간 동안 마주할 기회가 있다. 그곳에 오신 분이 아무런 용무도 없을 린 없겠죠.”

그의 말투에선 오랜 권좌에 앉은 사람 특유의 권태감이 배어 있었다.

다가오는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이익을 붙잡고 있을 테니, 순수하게 사람과 사람으로 마주할 기회를 얼마나 바랐을까.

그런 의미에서 더는 이익 관계로 묶이지 않은 손혜빈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읽어낸 성필은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아, 오해하지는 마요. 이사님과의 자리는 정말 즐거웠으니까요. 설령 저에게 부탁할 심산으로 접근했다고 해도, 즐거웠으니 괜찮아요. 춤도 같이 췄잖아요? 6개월 뒤쯤에 다시 봤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또.”

강성욱은 잠든 유경민을 애정이 깃든 눈빛으로 응시했다.

“경민이가 아름 씨를 만나고 싶어 했는데, 먼저 연락하진 못했거든요. 어찌 보면 저도 이사님께 부탁한 거나 마찬가지죠. 자, 그럼 이제 말씀해주실래요?”

성필은 자세를 다잡았다.

“아카이브는 아직 데뷔 1년 차도 안 된 걸로 압니다.”

“맞아요.”

“특별 무대 같은 곳에 서야 할 텐데요.”

음악 방송이나 페스티벌에서의 스페셜 무대는 보통 연차가 낮은 그룹이 나간다.

소녀연맹의 장하양도 케이어스의 진소유, 포유의 우효민, 글로브의 라희와 특별 무대를 꾸린 적이 있었다.

험하게 말하면 연차 높은 그룹이 짬 때리는 거고, 좋게 표현하면 연차 낮은 그룹에게 인지도를 쌓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으음, 그렇죠.”

“소녀연맹과 컬래버레이션해 보는 건 어떨까요?”

성필은 미래에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돌파하는 걸그룹인 아카이브와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소녀연맹이 아카이브와 어떠한 기록이라도 함께 남긴다면, 그건 후일 홍보 효과로 돌아올 테니. 컬래버레이션이 꼭 합동 앨범이나 피처링을 뜻하는 건 아니다.

‘SMS 엔터 입장에서도 회사의 힘을 투사할 필요 없이, 마음 놓고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

성필이 그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는 선에서 부탁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특별 무대다.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와 같은 이벤트를 노린다. 어차피 해야 할 것이니, 아카이브도 소녀연맹처럼 유명한 그룹과 무대를 꾸리는 편이 나으리라.

“아아, 너무 좋죠.”

강성욱이 긍정적으로 나왔다.

성필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케이콘’에선 어떨까요?”

손혜빈이 깜짝 놀랐다.

그건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케이콘 말씀이십니까?”

케이콘(KCON).

2012년부터 열린 대회(Convention)로, 케이팝과 대중문화 상품을 외국 현지에 소개하는 목적을 가진다.

흔히 말하는 K―상품을 홍보하기 위한 국제적인 대회이지만, 주인공은 역시 케이팝이다.

케이콘에서는 여러 케이팝 아이돌이 한 공연장에서 콘서트를 펼친다. 콘서트 외에도 미니 팬미팅, 쇼케이스, 기자회견 등의 이벤트도 있다.

1년에 여러 곳, 여러 번 열린다. 미국, 일본, 멕시코, 프랑스, 아랍에미리트, 호주, 태국, 대만, 사우디아라비아 등등.

처음엔 아이돌 그룹 십수 개가 등장하여 관객을 겨우 1만 명 끌어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거대한 행사로 발전했다.

케이팝 아이돌을 쉽게 만날 수 없는 외국 팬 입장에선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와 같은 행사다. 그렇기에 외국에서의 주목도가 매우 크다.

“스페셜 무대의 종류는 많죠. 선배의 히트곡을 하는 것도 좋지만, 저는 그룹끼리 곡을 바꿔서 하는 게 가장 좋더라고요.”

“아카이브랑 소녀연맹이 곡을 바꿔서 퍼포먼스를 하자는 말씀…….”

“맞습니다.”

성필은 당장이라도 ‘네’를 외치고 싶었다. 그럴 수 없던 건 ‘네’라는 대답이 너무 경박해 보일까 봐 걱정해서였다.

“단, 조건이 있어요.”

성취감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성필은 긴장했다.

엔터계에선 살아남는 게 이기는 거란 말이 있다.

꾸역꾸역, 자신이 구차하게 보일지라도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다 보면, 그게 곧 승리의 증명이 된다고.

모두 나가떨어질 때 홀로 서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승리가 아니겠는가.

‘강성욱 대표님은 그런 싸움을 거의 30년간 해오셨어.’

그와 함께 시작했던 기획사들은 KS 엔터와 YSL 엔터를 제외하곤 전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역사가 강성욱이란 인간의 힘을 증명한다.

프로듀서로서의 감 외에도, 경영자로서의 감 또한 일류일 것이다.

그런 강성욱이 제시할 조건이다.

긴장되지 않을 리 없다.

“소녀연맹은 아카이브의 어떤 곡이든 해도 좋지만, 아카이브는 꼭 오토마타를 하고 싶어요.”

“…….”

“어떤가요?”

“……아, 예.”

성필은 그의 말속에 어떤 가시가 숨어 있는지 신중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 음, 어, 그, 아카이브는 현재 곡이 하나뿐이지 않나요?”

“맞아요.”

그럼 그냥 아카이브의 데뷔곡이랑 오토마타를 바꿔서 하자는 뜻이잖아.

“이사님.”

강성욱이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저는 ‘오토마타’를 보고 매우 큰 감명을 받았어요. 아, 늦었지만 축하드릴게요. 빌보드 200에 진입하셨죠.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SMS 엔터의 ‘레이어드’도 빌보드 200에 진입한 기록이 있었다. 작년 앨범인데, 아마 90위권이었을 것이다.

‘잠깐, 대표님 앞에서 미국 얘기 꺼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강성욱이 직접 빌보드란 이름을 꺼냈다.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성필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사님 아까 들으셨겠지만, 저는 대결이 좋아요. 애들 앨범 초동 판매량만 기다려요. 다른 그룹이랑 비교하고요. 다른 그룹이랑 성적 비교하고 분석하는 팀을 따로 둘 정도예요.”

“예……?”

“저는 대결을 좋아해요.”

그는 신아름과 유경민을 번갈아 보았다.

“케이콘 전에 아카이브는 컴백할 거예요. 그러니까 이사님이 선택할 수 있는 곡은 두 개겠죠. 제가 거는 건 조건이지만, 이사님께 유리한 조건이에요. 왜냐하면 차선책이 준비되는 거니까요.”

성필은 점점 감이 잡혔다.

“저는 오토마타에 매우 큰 감명을 받아서, 오토마타 같은 영감을 붙잡으려고 노력했어요. 완전하진 않지만, 그게 다음 컴백곡 퍼포먼스에 반영될 거예요. 만약 그 컴백곡을 보고 힘들겠다고 생각이 되시면, 아카이브의 데뷔곡을 선택해주세요.”

손혜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질렸단 기색이었다.

성필은 자신이 강성욱의 어투를 공격적으로 해석하는 건지, 편향적으로 받아들이는 건지 고민한 후, 그에게로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눈동자가 더 자세히 보인다.

눈동자 안에서 불꽃이 일렁인다.

“대표님의 아카이브는 오토마타를.”

소녀연맹의 퍼포먼스 중 최고 난이도의 곡을.

“선택하시고, 저희는 아카이브의 컴백곡이 어렵다고 판단이 되면…….”

“데뷔곡으로 바꾸셔도 괜찮습니다.”

강성욱의 입가가 기대감을 머금었다. 장난의 결과가 드러나길 기다리는 아이처럼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저는 대결을 좋아해요.”

강성욱이 못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결 자체가 아니라, 이기는걸요. 그것도 구체적인 수치로 이기는 걸 좋아해요. 비록 케이콘의 곡 바꾸기 무대는 구체적인 수치는 없겠지만, 승패는 저희의 눈이 알 거예요.”

프로듀서의 눈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더 원본에 가까운지, 혹은 원본을 뛰어넘었는지.

“어떤가요?”

“음.”

성필은 검지로 눈썹을 긁적였다. 술 때문에 혈압이 올라 미세혈관이 모인 부분이 가려웠다.

“이제 소녀연맹은 4년 차죠. 스페셜 무대에 설 연차는 올해로 끝이고요.”

성필이 하 웃었다.

“감사합니다, 소녀연맹의 마지막 스페셜 무대에 화려한 선물을 안겨주셔서.”

“으음!”

강성욱이 만족한 신음을 흘렸다.

“대표님께 춤으로는 졌지만, 프로듀싱으로는 안 집니다.”

“……와.”

강성욱은 만족을 넘어 감탄했다.

감히 자신을 향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옛날에 정호환이나 이준호와 방송국에서 만나면 기 싸움 형식으로 주고받았던 이야기였다.

이 위치에 서서까지 들으리라곤 정말…….

“혜빈아.”

강성욱이 손혜빈을 불렀다.

“재밌는 회사에 다니는구나.”

“그쵸 뭐……. 기분 상하진 마요. 미리 말했잖아요.”

“응, 미리 들었지.”

눈앞에 앉은 남자.

박성필.

“꿈이 최고의 프로듀서라고.”

그래서 건넨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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