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21화 (621/760)

621화

“일단 노출도가 너무 커요. 특히 상의가요.”

2010년, 여자 아이돌 무대 의상에 대한 규제가 만들어졌다.

섹시 컨셉이 큰 반향을 불러왔던 시대였다. 프로듀서들은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더 얻고자 의상을 더욱 파격적으로 주문했다.

그게 발단이었다.

당시에도 갓 데뷔한 걸그룹 중엔 미성년자가 다수였다. 미성년자에게 섹슈얼리티가 부각된 복장을 입히니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기획사들의 경쟁은 열기를 더해가기만 했다.

프로듀서들은 아이돌 제작에 들인 돈 때문에라도 자극적인 컨셉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가장 쉽게 이목을 모으는 방법이었으니까.

이윽고 치마가 너무 짧아 팬티까지 노출되고, 가슴골을 당연한 듯이 보였으며, 그걸 은근히 부추기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미성년자들이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춤사위를 펼치고 선정적인 가사를 입에 담는 지경까지 이르러서, 세상이 칼을 빼 들었다.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이 질타를 날리고, 방송국은 부랴부랴 규제를 마련했다.

“가슴골이 지나치게 부각되지 말 것. 배꼽이 드러나지 않을 것. 치마 안에는 속바지를 입을 것.”

공중파 방송국이 마련한 음악 방송 의상 규제의 탄생이었다.

성필은 그 규제를 들어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의 규제는 많이 약한 편이죠. 사타구니 바로 아래까지를 노출해도 괜찮으니까요. 디스코 팬츠처럼요. 그러니까 저 구멍…… 구멍이 뚫린…….”

“타, 타공패턴이요.”

이유이는 배헌용이 이름 붙인 디자인 패턴의 명칭을 댔다.

“하의에 타공패턴이 있는 건 아마 괜찮을 거예요. 문제는 상의에요.”

“그.”

장하양이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그럼 안에 밴드나 크롭을 입으면 될까요……?”

“아마 안 될 거 같아. 타공패턴이 문제야. 물론 전체 면적은 나시 티보다 많아. 그런데 내가 받는 느낌상으로…….”

저건 아예 팔과 어깨를 드러내는 민소매 상의보다 훨씬 섹슈얼리티가 부각된다.

디자이너들은 인간의 몸이 가장 아름답다는 명제에 반대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인간이 신체의 70% 이상을 천으로 가리고 다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 인간의 신체가 가장 아름답다면 진즉 투명 재질의 옷이 널리 쓰였을 것이라고 한다.

매력은 온전히 드러내기보다 일부를 가림으로써 더욱 빛을 발한다.

그 완벽한 예시가 이유이와 장하양이 가져온 디자인이었다.

“저게 방송에 나오려면 타공 크기와 숫자를 줄여야 할 텐데, 그러면…….”

성필은 답을 알지 않냐는 듯 뒷말을 끌었다.

이유이는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공의 크기와 숫자를 줄이면 옷의 매력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그럴 바에야 그냥 턱시도를 입는 편이 낫다.

성필은 공격적이지 않은 말투로 설명을 이었다.

“메인 컨셉 의상이란 건 곧 시그니처 의상이란 뜻이잖아요. 앨범 활동 첫 주에 모든 음악 방송에 같은 스타일로 나가고, 뮤직비디오에서도 강조될 스타일이란 건데…….”

각 방송국의 세부 규정에 따라 여러 벌의 옷을 다른 방식으로 리폼하면 비용도 커진다.

게다가 명색이 시그니처 의상인데 어느 방송엔 등장조차 못 한다면 아쉽지 않겠는가.

“적어도 방송국 PD님들이 방통위에서 경고 안 먹을 정도로는 바꿔주셨으면 좋겠어요. 유이 씨는 지금까지 잘해오셨잖아요.”

“……이사님.”

줄곧 벌 받는 학생처럼 소극적이었던 이유이. 그녀는 용기를 내어 성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사님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어떠신가요?”

“과한 느낌이 없잖아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1차 회의는 반려로 마무리됐다.

이유이, 장하양, 배헌용은 회의실을 나섰다.

나가는 중 배헌용은 아주 희미한 울분을 느꼈다. 그건 싸우지도 못하고 패배한 병사의 마음가짐과 비슷했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배헌용이 따지듯 물었다.

“선배, 최소한 설득하려는 노력이라도 해봐야죠.”

프레젠테이션 이후, 이유이가 성필에게 한 말이라곤 ‘개인적인 감상은 어떠신가요?’가 전부였다.

배헌용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성필이 부정하자마자 바로 꼬리를 말다니.

“설득…… 해야지……. 이사님 피드백 반영해서 2차 기획을…… 맞다. 헌용아 스타일리스트팀이랑 미팅 좀 잡아줘. 다시 논의…….”

“전에 하신 말씀은 뭐였어요?”

놀랍게도 배헌용은 이유이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클라이언트는 패션의 전문가가 아니니까, 전문가인 스타일리스트가 설득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최소한의 설왕설래도 없이 이렇게 물러나는 게 맞아요?”

이유이가 힘없이 웃기만 하자 배헌용은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박 이사님은 패션의 전문가가 아니시잖아요. 저희랑 보는 눈이 다르다고요.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되신다고 하셨잖아요. 입생로랑을 뛰어넘을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도요. 입생로랑이었으면 이렇게 쉽게 포기하진 않았을 거예요.”

이유이는 여전히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입생로랑은 판탈롱 조례(여성의 바지 착용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된 조례)도 어기고 여성을 위한 슈트팬츠, ‘르 스모킹’ 컬렉션을 선보였잖아요. 박 이사님 한 사람에게도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는 선배님이, 어떻게 입생로랑을 넘겠어요?”

“…….”

이유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배헌용을 올려다보았다.

배헌용은 흠칫했다. 또 갈굼당할 것이다. 학습된 공포가 그를 휘감았으나,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죽더라도 입바른 소리를 하고 죽는 것이니.

“넌 몰라.”

이유이가 씁쓸히 말했다.

“난 박 이사님을 3년 넘게 곁에서 봐 왔어.”

그 말을 남기고 이유이는 앞으로 나아갔다.

“넌 모른다구…….”

배헌용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박 이사님이 말씀하신 규정은.”

배헌용과 함께 이유이가 떠나가는 것을 보고 있던 장하양이 입을 열었다.

“일종의 배려예요.”

“예?”

“방송국 규제 때문이라고 하셨지만, 물론 그게 일정 부분 영향을 준 거기도 하겠지만, 박 이사님이 의상을 직접적으로 거부하신 거나 마찬가지예요.”

방송가에 가장 훤한 성필이 규제를 들먹인 건 그 자체로 엄청난 설득력을 지닌다.

‘규제 때문에 이 옷은 방송에 못 나가’라고 하면 마땅히 돌려줄 말이 없는 것이다.

즉, 성필은 이유이와 장하양의 입을 막곤 ‘안 돼’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직관적으로 ‘이건 안 된다’는 생각이 드신 거겠죠. 그 직관이 절대적인 거예요.”

여태껏 성필이 ‘된다’고 했던 건 모두 성공했다.

아이돌의 시상식 소감을 듣다 보면 ‘좋은 곡을 골라준 A&R팀 여러분’이나 ‘좋은 옷을 준비해주신 헤메스 스태프분들’ 같은 말이 나온다.

아이돌이라는 탑을 쌓기 위해 노력한 모두에게 공을 돌리는 말이다.

모두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있었기에 자신들이 상을 받을 수 있었다는, 매우 배려심 깊은 소감이다.

그리고 소감에 꼭 들어가는 감사가 또 있다.

‘프로듀서님 감사합니다.’

아이돌의 프로듀서가 A&R팀이 고른 곡을 허가하고, 헤메스 스태프들이 골라온 스타일을 허가하고, 뮤직비디오 감독의 스토리보드를 허가하고, 이외 모든 계획을 반려하고 수정하고 받아들인다.

아이돌이 최종적으로 선보이는 앨범이란 작품은, 실상 프로듀서의 선택이 모인 결과물이다.

“모든 선택이 성공으로 이어진 프로듀서가 박 이사님이에요.”

그제야 배헌용은 이유이가 풀이 죽었던 걸 납득했다.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장군에게 감히 ‘제 계획이 옳습니다’라고 참언할 참모는 극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배헌용은 장하양의 설명을 듣고 납득했다. 그러나 이 말을 하지 않곤 배길 수 없었다.

이 업계의 신입이기에, 그리고 아직은 엔터계의 고난함을 모르는 그이기에 할 수 있는 말.

“역으로 말하면, 박 이사님이 ‘안 된다’고 하셨던 건 아직 세상에 선보여진 적 없단 거잖아요.”

성필이 ‘안 된다’고 했기에 사장당한 아이디어들이 있다.

성필이 ‘된다’고 했던 게 모두 성공했다고, ‘안 된다’고 했던 게 실패했을 거란 뜻은 아니다.

이유이가 지닌 성필에 대한 신념은 논리적인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장하양은 낮게 웃었다.

“맞아요. 천재 한 명이 언제나 옳을 순 없단 건 역사가 증명하죠.”

스웨덴 제국의 마지막 불꽃인 칼 12세는 소년왕이라고 불릴 만큼 매우 어렸다.

그 어린 나이에 덴마크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제국, 러시아 제국의 군세들을 격파하고 다녔다.

늙은 참모들이 ‘불가능합니다!’라 하더라도 소년다운 패기를 지니고 불가능한 승리를 얻어냈다.

그는 군사의 천재였다.

그러나 그 천재성은 결국 깨졌다.

늙은 참모들이 여느 때와 같이 ‘불가능합니다’라고 했으나, 칼 12세는 ‘되는데?’라고 답하며 작전을 강행했다.

그게 그의 끝이었다.

군사의 천재는 스웨덴의 마지막 불꽃으로 남아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건 극히 소수의 예시에 불과해요. 박 이사님 같은 천재는 대부분의 경우 성공해요. 저희가 박 이사님의 실패를 점칠 순 없어요. 로또 번호를 한 번에 맞출 수 없는 것처럼요.”

“……하양 씨는 어떡하실 거예요? 유이 선배님처럼 포기하실 건가요?”

배헌용은 묻고 있었다. 장하양에게 전인미답의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냐고.

성필이 단호하게 기각한 ‘안 된다’라는 아이디어를 붙잡겠느냐고, 물었다.

그건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성필을 향한 소녀연맹 최초의 반항이 될 것이었다.

여태껏 성필의 의견에 반대한 멤버들은 많았지만, 다들 결국엔 타협하거나 성필에게 숙이고 들어갔다.

타협도 아니고, 숙이지도 않는다면, 장하양은 이유이와 만든 디자인을 관철할 거란 뜻이 된다.

“…….”

장하양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배헌용은 이해한단 듯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모르겠어요.”

장하양이 꺼낸 답은 ‘포기한다’가 아니었다.

아직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 * *

회의실.

“가로 엔터 1/4분기 정기 주주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주주총회 참석자는 홍규헌을 비롯하여 성필, 그리고 과거 홍규헌에게 지분을 선물받았던 한구인, 손혜빈, 민경섭, 정지음이었다.

민경섭이 손을 들었다.

홍규헌이 마이크를 검지로 톡톡 치더니 격식을 갖춰 말했다.

“예, 민경섭 주주님.”

“이거 그냥 임원 회의랑 뭐가 달라요?”

“민경섭 주주님, 눈치 챙기세요. 분위기 깨지 말고.”

“네.”

민경섭 주주님은 손을 내리고 바른 자세를 잡았다.

“예, 첫 번째 안건은 올해 배당금 관련입니다.”

주주들이 두근두근 가슴을 졸이며 홍규헌의 말을 기다렸다.

“가로 엔터의 이음 엔터 지분 투자, 웨이퍼센트 영입, 차기 그룹 출범, 위의 이유로 인한 유동성 자금 부족으로 이번 분기 배당금은 없습니다.”

“…….”

“…….”

“…….”

“…….”

“…….”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홍규헌이 손을 들었다.

의결권을 지닌 지분 보유자 중 의결권 지분 50% 이상(홍규헌)이 찬성했기에.

“본 안은 통과됐습니다.”

홍규헌이 판사봉을 땅땅땅 두드렸다.

“권아인 경리.”

“네, 언니.”

“뭐요?”

“네, 넵, 사장님!”

“방금 거 기록해요.”

권아인은 회계로 단련된 솜씨로 본 안의 가결 사실을 정갈하게 기록했다.

“자, 이건 끝났고.”

“…….”

“…….”

“…….”

“…….”

“…….”

“뭐요.”

“…….”

“…….”

“…….”

“…….”

“…….”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안건은 사장 홍규헌의 임금 조정입니다.”

“……!”

뮤직 프로듀서이자 주주인 정지음은 홍규헌의 간악한 행태에 이를 악물었다.

배당금을 지불하지 않고 대표의 임금만 올리다니. 뉴스 기사에서나 보던 악덕 경영자가 눈앞에 있다.

정지음은 코뮤니스트 리카(대기업 주식 다종 보유)를 불러 폭력 유혈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졌다.

“가로 엔터의 지출이 대폭 증가한 데 비해 매출은 소녀연맹에게만 의존하는 불안정한 경영 형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사장 홍규헌은 책임 경영을 실천하고자, 자금이 정상화될 때까지 임금을 최저임금으로 조정합니다.”

“……!”

정지음은 머릿속에서 폭력 유혈 혁명을 외치는 코뮤니스트 리카(최근엔 금을 소량 구매하여 은행에 보관 중)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사, 사장님.”

성필이 당황하여 급히 그녀를 말리려 했다.

“최저임금으로는 사장님이 사시는 곳 관리비도 안 나오잖아요. 그리고 사장님이 일하시는 양과 질은 절대 최저임금 수준이 아니에요.”

홍규헌은 대답하지 않고 손만 들었다.

“본 안은 통과됐습니다.”

홍규헌이 판사봉을 땅땅땅 두드렸다.

임원들은 이 급작스러운 안건 통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눈치를 보면서 서로의 기색을 살폈다.

먼저 손을 든 건 정지음이었다.

“저어, 저는 저작권 수입이 많고…… 다 소녀연맹 덕분이고, 그러니까 회사 덕분이고……. 임금 조정하셔도…… 괜찮습니다…….”

재산은 홍규헌, 손혜빈에게 밀리지만 임원진 중 수입이 가장 큰 정지음이다. 그가 회사를 위해 희생하겠노라고 선언했다.

비록 수백만 원이지만, 정지음에겐 큰 결정이었다. 수백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많았으니까.

원래 사람이란 손에 쥐고 있는 걸 쉽게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건 빈자와 부자를 가리지 않는다.

‘사장님, 제 의지를 봐주세요. 저는 정말 회사를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걸. 제 희생을 기억해주…….’

“정지음 주주님이 제출해주신 안건이 통과됐습니다.”

어느새 홍규헌이 손을 번쩍 들곤 판사봉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지음이 경악하여 입을 뻐끔댔다. 공치사 하나도 없이 바로 안건을 통과시켜?!

“권아인 경리, 빨리 기록해요.”

“넵!”

정지음은 그 빠른 일 처리에 2차로 경악했다.

“노동자 대표 이사님!”

정지음이 성필을 불렀다.

성필은 처음 1년 임기의 노동자 대표 이사로 선임된 이후 3년째 연임 중이었다.

“이 사태를 계속 두고만 보실 겁니까! 이런 날치기 안건 통과를 눈 뜨고 지켜보실 거냐고요!”

“와타시와, 요와이(나는, 약하다)…….”

“손나(그런)!”

노동자 대표 이사는 의결권의 1/6을 갖지만, 그 의결권과 임원들의 지분을 다 합쳐도 홍규헌을 넘어서지 못한다.

즉, 견제할 수 없다.

“정지음 주주님처럼 또 안건을 제출하실 주주님 계십니까?”

손혜빈이 손을 들었다.

“저도 임금 조정해도 돼요. 제 주식 배당금보다 월급이 적기도 해서, 딱히 돈 안 받아도 돼요.”

주식 배당금만으로 월급 생활자로 살려면 최소 15억 정도가 필요하다는 모양이다.

그런데 손혜빈은 주식 배당금보다 현재 월급이 적다고 했으니, 그녀가 보유한 주식은 고작 15억 수준이 아닐 것이다.

그걸 한참 상회할 게 분명하다.

“본 안은 통과됐습니다.”

홍규헌이 또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어서 성필이었다.

“저도 앨범 수익으로 얻는 게 있으니까, 임금 내리셔도 돼요.”

임원들이 차례로 최저임금에 동의했다. 그에 벌벌 떠는 건 월급생활자인 한구인과 민경섭이었다.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다. 그래서 여유가 있는 임원들은 임금을 최저 수준으로 조정했다.

그야말로 책임 경영의 표본이다.

그런데 이 훈훈한 분위기는 한구인과 민경섭에게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회사를 위해 희생하고 싶지만, 희생하면 앞날이 깜깜해진다.

“민 이사.”

“……끄흐으윽.”

민경섭은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미세하게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 습니, 다…….”

“아니, 무슨 소리야. 민 이사는 괜찮아.”

“그럴, 수는, 다들 노력하는데…….”

“민 이사는 새신랑이잖아. 안 그래도 결혼 선물로 냉장고밖에 선물 못 해준 게 마음에 걸렸는데, 월급까지 내리면 어떡해. 내가 민 이사 안사람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

“사, 사장니임…….”

민경섭은 마음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한 이사는…….”

한구인의 안색이 아까와 달리 밝아졌다.

“내 충실한 수족이니까 최저임금 받자.”

한구인의 얼굴이 고통과 괴로움으로 물들었다.

“그 집은 그냥 내놔. 관리비도 엄청나잖아. 이 기회에 근검절약하고 미래를 준비해.”

“제, 제, 부모님이 선물로 주신 겁니다…….”

“……전세 아니었어?”

오랜 세월 알아 왔으나 처음 듣는 정보였다.

홍규헌은 한구인이 유달리 집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간인 줄 알았다. 그래서 영혼까지 끌어모아 혼자 살기엔 과분한 그 집에 산다고 생각해왔다.

설마 부모님이 선물로 주신 걸 줄은 몰랐다.

“제게 이 회사가 집이고 가족이긴 하지만…….”

한구인이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부모님의 선물을 팔 순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주주들이 홍규헌을 노려보았다.

정지음은 노동자 대표 이사인 성필로부터 ‘투쟁’이 쓰인 머리띠를 은밀하게 넘겨받았다.

민심이 흉흉해졌다.

“아, 농담이었어 농담. 한 이사가 그렇게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내가 뭐가 돼.”

“우소츠키(거짓말쟁이)!”

정지음이 분연히 일어났다.

“형!”

“어.”

노동자 대표 이사 성필도 함께 일어났다.

“경영 이사회 개회를 요구합니다. 제출 안건은 직장 내 갑질입니다.”

“……진심이야? 어떤 안건이 나와도 내가 기각할 수 있는데?”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요. 맞서 싸웠단 사실이 중요할 뿐. 그리고 이 결과는 가로 엔터 홈페이지 주주총회 결과에 올라갈 테니, 절대 숨길 수 없을 겁니다. 저희의 의지를 세계만방…….”

[가로 엔터 1/4분기 주주총회 결과록]

[노동자 대표 이사 제도 폐지]

* * *

주주총회에 이은 경영 이사회도 무사히 끝났다.

가로 엔터의 향후 경영적 방침이 확립되었으며, 현재 가로 엔터의 제1목표가 재확인됐다.

상장(上場)이다.

긴 회의가 끝나자 다들 탈력감에 사로잡혔다. 누구도 먼저 회의실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의자에 늘어졌다.

“정 피디가 그런 말 할 줄 몰랐어.”

홍규헌이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진짜 괜찮아?”

홍규헌은 최저임금을 받고, 향후 법적으로 최저임금이 상향 조정되어도 임금을 동결하기로 했다.

이건 사기 진작 차원에서 행한 일종의 쇼였다.

가로 엔터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 성장은 안정성을 담보로 하지 않았다. 이어진 성공이 없다면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이다.

홍규헌은 임원 전원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주지시키고, 동시에 사장인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전달할 속셈이었을 뿐이다.

“괜찮죠.”

그런데 설마 임원들이 줄줄 임금 인하를 선언할 줄은 몰랐다.

홍규헌은 그저 임원들이 감동하여 의지를 되새기는 정도만 예상했을 뿐이다.

임금이 100원 줄어드는 것도 기를 쓰고 반대하는 이들이 세상의 대부분이다.

이보다 한술 더 뜨자면, 회사 사정이 악화되는데도 배당금 파티와 임원 임금 인상, 상여금 지급을 결정하는 이사회도 존재한다.

“가로 엔터는 언젠가 최고의 회사가 될 거잖아요.”

정지음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회사가 더 빨리 크도록 도와주는 게 더 이득이죠. 사람은 거국적으로 봐야 해요.”

“이야, 지음이 모쏠 탈출하니까 사람이 달라졌네. 막 자신감 뿜뿜 아우라가 나온다 야.”

“아 혜빈 누나 왜 그 얘길 꺼내요…….”

정지음은 자신의 모쏠 이력이 창피한 듯 얼굴을 붉혔다. 손혜빈은 그런 정지음을 귀엽단 듯 보며 실실 웃었다.

그에 한구인이 정색했다.

“손 이사님, 방금 하신 말씀은 성희롱에 해당합니다.”

“네?”

“성희롱에 해당합니다.”

“아, 네…….”

“지음 씨의 성관계 이력을 연상시키고 유추를 가능하게 하기에, 지음 씨가 수치심을…….”

“설명 안 해줘도 돼요!”

정지음이 부끄러움을 못 이기고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만약 한구인이 바로 옆에 있었으면 그의 입을 틀어막았을 기세였다.

“손 이사님, 앞으로 주의해주십시오.”

“한 이사님 말씀이 더 수치스럽거든요?!”

정지음은 크게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홍규헌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이번엔 손혜빈을 보았다.

“손 이사는 박력 있고 멋졌어. 역시 한 해에 수백 억을 벌어본 스타는 다르네.”

“다 제 돈도 아니었는데요 뭐.”

“그 시절이면 뭐어, 회사랑 7대 3 정도로 나눴나? 제작비 분할까지 치면 그보다 더 적으려나?”

“글쎄요, 눈으로 세기에는 0이 너무 많았어서…….”

“더 멋지네.”

차를 옷처럼 갈아치우는 걸 보면 돈이 많긴 한 모양이다.

홍규헌은 다음으로 성필에게 말했다.

“박 이사는 괜찮아?”

“괜찮죠. 사장님을 위해서잖아요.”

“성필이 쟤 자연스럽게 플러팅하는 거 봐라.”

“충심이라고 표현해줘.”

“정말 괜찮은 거야?”

홍규헌은 못내 걱정스러운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결혼 자금은 충분해?”

“사장님이 플러팅을 받아줬다!”

“부하를 아끼는 마음이라고 표현해줘.”

“근데 성필이 너 진짜 결혼 자금 모아야 하는 거 아니야? 너 지금 사회인으로서 거의 전성기인데, 지금 막 당겨서 모아야지.”

“으휴, 시어머니들 때문에 못 살겠네.”

성필이 과장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제 결혼 제가 알아서 잘합니다. 경섭이도 봐요, 잘했잖아요. 맞다, 경섭아 제수씨 해산(解産)이 언제쯤이셔?”

“음, 하양이 앨범 나올 때쯤일 거 같아요.”

“여기 결혼한 사람이 있으면 조언도 해줬을 텐데.”

“안 그래도 요즘 김덕팔 부장님이랑 얘기 많이 나눠요. 도움이 돼요.”

“오, 구체적으로?”

“많이 힘들 테니까 잘해주래요.”

갑자기 민경섭의 분위기가 우중충해졌다.

“일이 바빠서 집에 오래 못 있긴 하지만…….”

임원들이 홍규헌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 안사람이 임신 중이더라도 회사를 쉬게 할 순 없잖아……. 대신 육아휴가 보장해주고…….”

직원과 친해지면 이런 곤혹이 뒤따르곤 한다.

서로 너무 친하고 잘 알기에, 공사 구분에 심력이 더 많이 소모되는 것이다.

“에이, 다들 왜 그래요. 장난으로라도 사장님한테 그러지 마세요.”

민경섭이 너스레를 떨었다.

“형 때문에 괜한 말 꺼냈잖아요. 집안일은 회사 현관을 안 넘고, 회사 일은 집 현관을 넘지 말랬는데.”

“그것도 김 부장님이 해주신 말씀이야?”

“네. 암튼, 저는 집안일도 회사 일도 둘 다 잡을 겁니다.”

슬슬 회의로 빠졌던 기력이 회복됐다.

홍규헌이 손뼉을 짝 쳤다.

“그럼 회의는 이걸로 끝내고, 오랜만에 마치고 다 같이 회식이나 할까?”

“오, 좋죠.”

정지음은 오랜만의 술자리가 기대되는 듯했다.

“경섭이 형도 올 수 있어요?”

“아내한테 전화해보고.”

“허락받아야 해요?”

“받아야지. 안 그래도 혼자서 힘들 텐데. 말도 안 하고 늦게 들어가면 외로울 거 아니야.”

“아…….”

정지음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마누라한테 잡혀 사는 남편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왜 저렇게 살지?’란 생각만 해본 것이다. 댓글 반응도 대부분 그러했었다.

집에 있는 아내가 외롭고 힘들 테니, 밖에서 노는 걸 허락받는단 생각은 그의 사고방식 영역 밖이었다.

‘맞네. 아내는 그러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잖아.’

……그런데 왜 결혼하면 아내가 없는 시간이 좋아진다는 걸까?

어쩌면 인터넷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가?

결혼은 정말 행복한 건데, 그 행복을 자기들만 누리고 싶어서 거짓말을 유포하는 게…….

“지음아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뇨.”

정지음은 얼마 전에 보았던 인터스텔라 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주인공이 과거의 자신을 향해 ‘가지 마!’라고 외치는 장면을 결혼하려는 남자의 상황에 맞춘 것이었다.

동시에 정지음은 사랑스러운 여자친구를 떠올렸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이수연. 그런 그녀와 한집에서 사는 생활이 고통스러울 리 없을 텐데…….

연애 경험 1회인 정지음이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도중, 손혜빈이 미안하단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사장님 죄송해요. 오늘 선약이 있어요.”

“사장을 버리고 택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야?”

“네, 성필이요.”

“사, 사내 연애야……?”

손혜빈은 당황한 홍규헌을 보면서 크게 웃었다.

“성필이‘도’ 가는 거예요.”

“아, 지인들끼리 모여?”

“지인이라고 할까, 저만의 지인이긴 한데요.”

“여소?”

“흐흫, 사장님 자꾸 머리가 연애 쪽으로만 돌아가시네요. 그런 거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되게 비즈니스적인 자리예요.”

“비즈니스? 누구길래?”

“제 전 직장 상사요.”

손혜빈의 전 직장.

“SMS 엔터?”

손혜빈은 SMS 엔터의 디자인팀에서 근무했었다. 그 경력을 살려 가로 엔터에선 비주얼팀 팀장으로 일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네. SMS 엔터, 대표님.”

SMS 엔터 대표이자 총괄 프로듀서.

강성욱.

성필과 손혜빈은 오늘 그를 만나러 간다.

“가서…… 목적이 있어?”

홍규헌은 긴장한 기색을 억누르며 물었다.

대답은 성필이 대신했다.

“지금까지 소녀연맹은 정면 돌파 형식으로만 인지도를 모았었잖아요. 그런데 이젠 수단 방법 가릴 상황이 아닌 거 같아요.”

곧 소녀연맹이 마주하게 될 필터.

남은 시간은 4년 미만.

최고의 아이돌로 다가갈 길은 아직 멀어만 보인다. 이대로 차근차근 앨범으로만 승부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다른 방법도 쓸 수 있으면 쓴다.

“어떤 방식이든 컬래버레이션을 하면 좋을 거 같아서요.”

성필의 목적은 소녀연맹과 SMS 엔터의 최신예 걸그룹인 ‘아카이브’와의 만남이다.

미래 4세대 그룹 중 최초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할, 꿈의 영역을 넘어설 걸그룹과 만난다.

* * *

“춤을 배운다고?”

술자리에서 만난 강성욱은 소문 그대로였다.

낙천적이고 즉흥적이며 유쾌한 성격.

“호오, 춤을?”

강성욱은 갑자기 재킷을 벗어젖혔다.

몸에 딱 달라붙는 면티 아래로 단련된 근육이 꿈틀거렸다.

“한번 춰보겠어요? 같이.”

성필은 전 댄스 가수 출신, 그리고 현세대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한 명에게 댄스 배틀 제안을 받았다.

당황한 성필은 당연히 사양…….

“예, 좋습니다!”

평소의 성필이라면 당연히 사양했겠지만, 강성욱의 권유에 불콰하게 취한 성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코트와 터틀넥을 벗자 강성욱이 눈을 빛냈다.

“으음!”

강성욱의 만족스러운 신음과 동시에 옆자리의 손혜빈이 이마를 탁 쳤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단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아빠 힘내애애애애!”

취해선 온 힘을 다해 응원하는 신아름과.

“으하핳! 대표님이 이긴다에 100만 원!”

마찬가지로 취한 ‘아카이브’의 리더 유경민을 관객으로 삼아.

“가요, 박 이사.”

“오십시오, 강 대표님.”

성필과 강성욱의 댄스 배틀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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