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19화 (619/760)

619화

소녀연맹, 새 숙소로 입주하다!

“이것 보세요!”

리카가 거실을 가리켰다.

“넓어요! 엄청 큰 텔레비전도 함께! 심지어 시스템 에어컨이야! 천장에서 바람이 나와!”

리카가 주방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그녀가 주방을 가리켰다.

“넓어요! 오븐이랑 에어프라이어도 있어!”

리카가 방1로 도도도 달려가 가리켰다.

“넓어!”

그리고 방2로, 방3으로, 방4로 가서 똑같이 말했다.

“너어어어얿어요!”

마지막은 세탁실.

“여긴 좁아!”

세탁실은 베란다와 연결되어 있었다.

베란다로 들어가 건조 공간을 지나 안쪽으로 진입해야 구석의 세탁기에 도달할 수 있다.

리카는 낑낑대며 좁은 통로를 빠져나와 마지막 종착지인 화장실과 샤워실로 향했다.

리카가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더 이상 화장실과 샤워실이 일체형이 아니에요!”

그다음 화장실 옆 샤워실 문을 열었다.

“욕조가 왔다아아아아아!”

“아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신아름의 핀잔을 들은 리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신아름은 경악하여 리카를 품에 안고는 머리를 쓸어주었다.

“아, 아니, 미안. 장난으로 한 말이야. 울지 마. 응?”

“아름이 때문에 우는 게 아니야…….”

“응?”

“아타시(내)가 너무 대견스러워! 대스타가 돼서 회사가 집도 사주다니!”

“여기 월세래.”

“손나(그런)!”

만약 이 집을 현금으로 살 돈이면 소녀연맹의 정규 앨범이 서너 개는 더 나올 것이다.

홍규헌이 부동산 장사를 하려는 속셈이 아닌 이상에야 회사 자본으로 이렇게 큰 아파트를 살 리는 없다.

아무튼 멤버들은 들떴다.

이제껏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오는 돈으로 자신들의 성공을 가늠해왔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되니 그냥 ‘0이 늘어가는구나’ 이상의 감상은 없었다.

“우리 성공하긴 했구나.”

숙소가 바뀐 건 돈 이상으로 크게 체감됐다.

기쁨은 잠시였다.

멤버들에겐 큰 역경이 남아 있었으니까.

“방은 네 개.”

멤버들을 거실 중앙으로 모은 백설하가 진지한 투로 말했다.

“세 명은 독방을 쓸 수 있어. 하지만 두 명은 같이 방을 써야 해.”

독방(獨房).

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심적으로 가장 예민한 사춘기와 20대 초반 청년기를(백설하는 중반까지) 단체 생활로 보낸 소녀연맹이다.

그녀들은 독립의 로망을 품고 있었다.

독립이 안 된다면 독방이라도 쓰고 싶다.

타인과 생활 공간을 공유하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니까. 무엇보다 프라이버시가 없단 점에서 스트레스가 압도적으로 커진다.

“아타시(저)는…….”

리카가 결연하게 외쳤다.

“독방을 쓰고 싶어요! 써야만 해요! 프라이버시 없는 삶은 더는 싫어요!”

“네가 할 말이냐.”

조아라의 태클에도 리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아라의 침대에 파고들고, 숙소에서 조아라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은 것을 잊어버린 듯했다.

자신이 행했던 모든 프라이버시 침해를 잊고, 리카는 독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저는 섬세한 20대 초반이에요!”

“23살은 20대 중반이야.”

백설하가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에 리카가 매우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아타시(저)는 일본인이니까 21살이에요!”

“너 세계시민…….”

“애국심은 없지만 애향심은 있어! 그게 세계시민의 자세야! 그 애향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21살이야!”

리카가 또다시 매우 논리적이고 편향적으로 반박했다.

“한의사님이 배운 인간이 더 바보 같은 말을 많이 한다던데 진짜네. 자기가 하는 바보짓을 논리적으로 합리화해.”

리카는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랑 다르게 한국인인 아라쨩이랑 아름이는 20대 중반이에요! 센서티브하고 센티멘털한 시기는 지났어요! 언니랑 쌤은 말할 필요도 없크헤, 으헤엑, 죄송, 고멘,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백설하에게 죽음을 면치 못할뻔한 리카가 가까스로 풀려났다.

“당위성을 설명하다보면 한도 끝도 없어.”

신아름이 중재를 시도했다.

“여기서 독방 안 쓰고 싶은 사람 어딨고, 독방 안 써야 할 사람이 어딨어? 다 쓰고 싶지.”

“나.”

장하양이 손을 들었다. 그녀가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난 둘이서 써도 괜찮아.”

동생 라인이 천사를 보듯 장하양을 우러러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곧바로 백설하에게로 향했다.

언니로서 양보할 수 없겠느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백설하는 당황했다. 그녀는 장하양에게로 휙 고개를 돌렸다. 장하양은 미소만 지었다.

‘……하양이랑 지내는 건, 솔직히 말해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오히려 장하양이 방에 없으면 쓸쓸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이 어린아이들이 혼자만의 방을 얼마나 가지고 싶을까.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피력했듯이, 소녀들에겐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 소설가가 적은 이유가 여자아이에겐 독방이 주어지지 않으며, 독립하는 경우가 남자보다 적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소설을 남에게 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고, 당연히 가족과 주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을 테니, 자기만의 방이 없으면 소설을 쓰는 것조차 시작하지 못한단 것이다.

세 동생들에게도 소녀가 지닌 소설가의 꿈같이, 남에게 말하긴 살짝 부끄러운 취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오래 산 자신 대신 동생들에게 자유로운 기회를 보장해주…….

“나도 필요해!”

백설하가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도 소녀였다. 남에게 말하긴 살짝 부끄러운 취미 정도는 있다.

“독방을 쓰고 싶어! 나도 사람이야 사람! 리더도 사람이란 말야! 프라이버시가 필요해! 하양아.”

백설하가 장하양의 손을 맞잡았다.

“너도 그렇잖아. 필요하다고 말해! 욕심을 드러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아하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사랑하는 멤버들과라면 누구와도 같은 방을 써도 불편하지 않아요. 오히려 함께 지낼 수 있으니 기쁘죠.”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돼?!”

“우우우, 욕심쟁이.”

“리더 자리에서 하야하라!”

“나잇값을 하으헥! 크헥, 고멘,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백설하에게 당해 바닥에 널브러진 리카를 내버려 두고 토론이 이어졌다.

누가 장하양과 함께 방을 써야 할까.

“언니, 기분 상하지 말고 들어요.”

신아름이 장하양의 손을 폭 부드럽게 잡았다.

“제가 언니랑 방 쓰기 싫어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에요. 독방을 쓰고 싶어서예요.”

“아하하, 아름이 마음 알지.”

“만약 저랑 같은 방을 쓰게 되면 저를 저주할 정도로 괴롭힐 거예요.”

“싫어하는 거 맞잖아?!”

“치킨 피자처럼 냄새나는 음식 막 시켜서 방에서 먹고 옷은 조아라처럼 바닥에 내팽개쳐두고 수건은 바구니에 안 넣고 침대 위에 둘 거예요. 제 침대가 아니라 언니 침대요. 언니 물건 쓰고 제자리에 안 둘 거예요. 아니, 물건이라 아니라 옷도 입을 거예요. 속옷까지 공유할 생각해요. 이래도 버텨요? 또 새벽 2시까지 이 악물고 코 골 거예요. 이런데, 저랑 같은 방 쓰고 싶으세요? 싫죠? 저랑 절대 방 같이 쓰기 싫다고 말해요.”

“……나는 그래도, 아름이면 괜찮아.”

“와, 신아름 인성 개쓰레기다.”

“아름이한테 실망했어…….”

“욕심부리는 게 뭐가 나빠! 맞죠 쌤?!”

신아름을 비난할 준비를 하고 있던 백설하는 화들짝 놀랐다. ‘욕심을 드러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는 방금 백설하가 한 말이니까.

백설하는 어버버하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이건 대화로 안 끝나. 게임으로 정하자. 리카, 보드게임 중에 할 만한 거 있어?”

“보드게임 말고 더 좋은 게 있어요!”

“뭔데?”

“‘이코노미스트’ 영문 잡지 빨리 해석하기!”

신아름과 조아라가 리카를 바닥에 눕히고 발길질했다.

“영어 좀 한다고 나대지 마!”

“너한테 유리한 종목으로 하려는 속셈 모를 줄 알고?!”

“아타시(나)는 무죄야아아아아아아!”

리카가 백설하에게로 손을 뻗었다.

“쌤 도와주세요!”

“손속을 두지 마!”

“손나(그런)!”

다들 독방을 쓰고 싶어서 미쳐버렸다.

장하양은 이 광기를 말려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녀들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오늘 이기지 못하면, 향후 4년 동안 쭉 독방 생활과는 작별 인사를 해야 하니까.

오늘의 승리가 4년의 삶을 결정한다.

한 번쯤 이기적일 만도 하다.

“보드게임도 안 공평해요.”

장하양의 말에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속놀이인 멍석말이가 끝났다.

졸지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한 리카는 끅끅 신음하면서 린치 현장을 기다시피 하여 빠져나갔다.

“룰에 익숙한 리카가 먹고 들어갈 테니까요.”

“할리갈리처럼 간단한 것도 있잖아?”

“아주 자그마한 경험 차이겠지만, 납득하실 수 있으세요?”

못한다.

만약 백설하는 할리갈리에서 패배했을 시 ‘리카한테 유리하잖아!’라며 물고 늘어질 속셈이었다.

이기면 ‘모두에게 공평했잖아!’라며 승리를 굳힐 셈이었고 말이다.

“그럼, 가위바위보?”

“아뇨, 그건 아름이한테 압도적으로 유리해요.”

가위바위보의 메커니즘은 이러하다.

주먹을 쥐었다가, 앞으로 뻗는 과정에서 손 모양을 바꾼다. 즉, 중간과정을 포착할 수 있는 동체시력이 있다면 압도적으로 승률이 높다.

어느 프로게이머에게 한 팬이 악수를 청한 적이 있었다. 팬은 장난으로 손바닥을 내민 프로게이머를 향해 가위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보다 빨리 프로게이머가 주먹을 쥐었다.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으로 가위바위보에서 이기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니다.

특히 신아름에게는.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해요…….”

신아름이 어처구니없단 듯 말했다.

“우소츠키(거짓말쟁이)! 아름이 1년 9개월 전에 아타시(저)랑 가위바위보 해서 연속 10연 딱밤 때렸었어요!”

“쿳소(제기랄)!”

필승법이 발각된 신아름이 욕지거리를 뱉었다.

다섯은 4년간 한솥밥을 먹다 보니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게 됐다.

“뽑기?”

조아라가 그나마 나은 해결책을 냈다.

“하양 언니가 만들면 공정하지 않아요?”

“아니야! 뽑기는 공정하지 않아!”

백설하가 외쳤다.

다들 무슨 말이냔 듯 그녀를 보았다.

“제비 네 개를 차례로 뽑는 거잖아? 그럼 제일 처음 사람이 당첨을 뽑았을 때, 뒷사람들은 차례로 꽝을 뽑을 확률이 증가해. 역으로 계산해도 뒤의 확률이 바뀌어. 안 공평해.”

“…….”

장하양이 진심이냐는 듯 백설하를 보았다.

“언니, 농담이시죠?”

“어? 왜?”

“조건부 확률…… 학교에서…… 안 배우셨어요……?”

“……조건부 확률?”

“모든 조건에서의 확률을 더하면, 차례로 뽑든 동시에 뽑든 모든 확률이 동일해요.”

“아, 그, 아이튜브에서 옛날에 본 건데, 몬티홀 문제? 그건 그러니까…….”

“그건 선택한 제비 중 하나를 공개하는 가정이 붙잖아요. 무작위 단체 뽑기랑 아예 달라요.”

“아, 그래?”

침묵이 감돌았다.

침묵을 참지 못한 백설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귀여우니까 봐준다.

“쌤이 도박하자고 하면 무조건 해야겠다.”

신아름의 말에 백설하가 우울해졌다.

“그럼 뽑기……?”

“잠깐만요.”

신아름이 제지했다.

“완전 운이 아니라, 약간은 실력이 들어가는 걸로 하…… 왜 주먹 들어요?!”

“가위바위보 하자고 하려던 거 아니었어?”

“아니에요! 이거 어때요? 팀장님한테 문자 보내서 가장 늦게 답 오는 사람이 하양 언니랑 같은 방 쓰기.”

“실력이 필요해?”

“네, 상상력이 필요하죠.”

리카와 조아라는 재밌겠단 반응이었다.

백설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신아름은 씩 미소 지었다.

‘상식적으로, 팀장님이 나한테 제일 늦게 답장을 줄 리 없잖아?’

신아름은 자신 있었다. 그리고 성필과 오랜 세월 보아온 멤버들도 신아름 정도로 자신 있었다.

다들 성필과의 유대감을 믿었다.

그렇기에 다들 자신이 유리하다고 계산했다.

“그러면 그걸로 하자.”

다들 폰을 꺼내어 성필에게 톡을 보낼 준비를 했다. 제한 시간은 3분이었다.

조아라는 뭘 보낼까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리카의 폰 화면을 슬쩍 보았다.

[박 이사님, 저 생명을 잉태했…….]

“미쳤냐!”

“아아아악 내 신형 애플포오오오오오온!”

약 3분의 우여곡절을 거쳐, 네 사람은 성필에게 동시에 톡을 보냈다. 그리고 동시에 폰을 둘러앉은 자리의 중앙에 두었다.

두근거리면서 기다리는 것도 잠시.

까톡!

“왔다!”

까톡! 까톡! 까톡!

네 개의 폰이 동시에 울렸다.

까톡!

“어?”

장하양의 것도 함께.

멤버들은 허겁지겁 폰을 집어 들었다.

다섯 명에게 동시에 톡을 보내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게 당황 반 걱정 반 기대 반, 150%의 두근거림으로 톡을 확인하자.

[공지방]

[박성필: 첨부 사진]

[리카: 이사님 사랑해요 지금 만나요 보고 싶어요 이사님을 볼 수 없는 매 순간이 죽어가는 것만 같아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조아라: 나 KS 엔터로 이적해요. 아저씨보다 정호환 이사님이 더 좋아요. 이유는 아저씨가 더 잘 알겠죠.]

[신아름: 엄마가 팀장님 보쟤요. 지금 데리러 올 수 있어요?]

[백설하: 이사님 살려주]

[박성필: 사장님 애들이 저 놀려요. 혼내주세요]

[홍규헌: 니들 죽을래?]

[박성필: (응원하는 사자 이모티콘)]

[홍규헌: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고백하는 건 중학교 때 졸업해야지. 벌칙 대상인 박 이사가 상처받잖아.]

[박성필: (오열하는 복숭아 이모티콘)]

“……이건 누가 이겼다고 해야 하지?”

“누가 이긴 것도 아니지.”

“한 이사님으로 바꿀까?”

“그래.”

가장 먼저 답장을 받은 건 리카였다.

‘솔직히 건강즙 더럽게 맛없지 않음? ㅋㅋ 제발 그만 좀 만들었으면~’

‘우리 싫어하는 거 뻔히 보이는데 왜 자꾸 만드는 거임 눈새가ㅋㅋㅋㅋㅋㅋ’

‘(화내는 오리 이모티콘)’

그리고 한구인의 ‘1’이 사라지자마자, 즉 그가 톡을 확인하자마자 10초의 시간을 잰 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잘못보냈슴다.’

‘(애교 부리는 복숭아 이모티콘).’

가장 늦게 답장 온 건 백설하의 ‘이사님 살려주’였다.

참고로 리카의 톡에 대한 한구인의 답장은.

[한구인: ㅇ….]

였다.

그렇게 장하양과 백설하, 영혼으로 연결된 언니 라인은 또 같이 방을 쓰게 됐다.

장하양이 백설하의 손을 꼭 쥐었다.

“언니만 괜찮으시면 간이 벽 주문해서 방 사이에 둘까요? 따로 방을 쓰는 것만은 못하겠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아, 아니야아 하양아아……. 나는, 난, 하양이랑 같은 방 쓰게 돼서, 죠, 조하아…….”

누가 봐도 아니었다.

방 배정이 끝난 후.

“에에, 한 이사님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에엑?! 우, 우시는 건가요! 아니에요!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라구요! 잘못 보낸, 게 아니라, 여기엔 깊은 사정이……!”

승리자 리카는 한구인의 오해를 푸느라 1시간 넘게 통화해야만 했다.

* * *

밤 10시.

성필은 사무실 자리에 앉아 역대 대중음악 시상식 무대를 쭉 보고 있었다.

아이돌의 시상식 무대는 퍼포먼스와 연기를 섞은 형식이 많았다. 즉, 퍼포먼스 시작이나 중간에 서사를 집어넣는다.

모든 케이팝 팬이 주목하는 자리이니, 회사의 기획력과 자본력을 팬덤 전체에 과시할 수 있는 것이다.

서사와 결합된 시상식 퍼포먼스는 일반적으로 단독 콘서트에서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건 곧 콘서트를 제외하고, 시상식 무대야말로 아이돌의 모든 힘을 집약한 최상의 상태란 뜻이다.

‘당연히 의상엔 음악 방송 첫 무대와 같은 수준으로 공을 들여.’

성필이 보려는 건 아이돌의 의상이기도 하지만, 퍼포먼스를 서사와 결합하는 방법이었다.

시상식 무대는 장하양이 뮤직비디오에서 표현하고픈 ‘뮤지컬’의 축소판이었으니까.

대규모 백댄서를 동원한 매스게임.

와이어 액션.

그리고 성필이 가장 주목하는 건 증강현실을 무대에서 활용하는 것이었다.

WTP가 단독 콘서트에서 증강현실을 접목한 후, 증강현실 기술은 온라인 콘서트에 이어 시상식 무대에까지 이용되었다.

케이팝 아이돌의 무대 이전 증강현실을 실제 무대에서 활용한 사례는 일본이다.

‘근데 그건 무대 위에 실제로 보이니까 증강현실이라고 하기엔 뭐하지.’

증강현실은 그래픽을 입히는 것이라, 실제 무대가 아닌 스크린에서만 펼쳐진다.

일본은 홀로그램으로 존재하지 않는 뮤지션을 무대에 불러냈었다.

바로 ‘엑스재팬’이다. 그들은 명을 달리한 멤버인 ‘히데’의 홀로그램을 무대로 올려 공연을 펼쳤었다.

그보다 대중적으로 가까운 사례는 보컬로이드라는 캐릭터를 홀로그램으로 띄워 콘서트를 연 것이다. 사실 이쪽이 홀로그램 퍼포먼스라고 하면 더 유명할 것이다.

실존하는 뮤지션은 연출적인 요소가 아니라면 굳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진짜 본인이 무대로 올라오면 되잖은가.

‘근데 증강현실은…….’

돈이 많이 든다.

돈과 인력을 있는 대로 쓰고도 정작 무대 위에서 실패할 수도 있다.

조정훈 감독에게 듣기로, 구현하는 게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란 모양이다.

증강현실을 구현시키는 위치에 포인트를 붙이는데, 그걸 무대 위의 댄서나 아이돌이 밟아서 찢어지거나 사라지기도 한다고.

실제 무대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아 증강현실을 쓰기 어렵단 모양이다. 아예 무대 높은 곳에 무언가를 띄워 사람과 안 닿게 한다면 몰라도 말이다.

단순히 화면에 CG를 입히는 것과 차원이 다른 기술이다.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가상 존재에 실시간으로 입체감을 부여하는 것이니까.

“으음…….”

성필은 오랫동안 영상만 보다 보니 눈이 빠질 것 같았다.

영감의 조각이라도 붙잡고자 몇 달 동안 이 일을 반복하고 있지만, 드라마틱한 진전은 없다.

모두의 도움을 받아 어둠 속을 한 걸음씩 내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형 아직도 있네.”

정지음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성필은 기지개를 켠 상태로 답했다.

“너도 아직 안 갔끄으으으…….”

“진짜 아저씨 같다.”

“야, 네가 아저씨라고 하니까 안 어울린다.”

“뭐 아저씨란 말은 아라만 써야 해요? 하긴, 이젠 애칭이지.”

“애칭은 무슨. 나 놀리려고 하는 말인데. 왜 왔어. 볼일 있어? 야식?”

“아뇨, 이거 봤나 해서.”

정지음은 성필에게 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몇 시간 전에 뜬 연예 기사였다.

신인 걸그룹의 초동 판매량을 게시한 것이다.

“믿겨요? 데뷔 초동인데 160,000장을 팔았대요.”

“어, 나도 봤어.”

“형 아무렇지도 않아요? 난 이거 보고 진짜…….”

정지음은 입을 오물거리면서 적당한 단어를 찾았다.

“억울했는데.”

“억울하긴 뭐가.”

“아니, 데뷔로 초동이 160,000장이라니까요. 우리 애들은 이 정도까지 오는 데만 2년 넘게 걸렸잖아요. 사재기일까요?”

사재기라…….

정지음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현재의 160,000장이란 기록은 역대 걸그룹 데뷔 초동 순위 1위니까.

그냥 1위도 아니다.

압도적인 1위다.

케이어스마저 데뷔 초동은 10만 장이었다. 그런데 그걸 50% 이상으로 따돌린 것이다.

심지어 기사에 언급된 그룹은 대형 기획사 소속도 아니었다. 거대 유통사를 끼고 있긴 하지만, 그 산하 기획사일 뿐인 것이다.

그런 기획사의 걸그룹이 초동 160,000장이라고 하니, 정지음 입장에선 억울하고 당혹스러울 만도 하다.

“앞으로 기록은 계속 깨질 거야.”

“아니, 그렇기야 하겠는데요.”

“올해 안에 몇 번은 깨질걸.”

“……네?”

올해 안으로 모두가 깨닫게 될 것이다.

케이팝 시장이 전문가와 대중들의 예상을 깨고, 전혀 상상치 못한 수준으로 팽창했단 것을.

언어의 장벽이 쳐진 일국(一國)의 지역문화가 향유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시장이 출현한다.

케이어스와 소녀연맹, 글로브는 맛보기였다.

새로운 세대가 다가온다는, 언덕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어렴풋한 나팔 소리였을 뿐이다.

“우리도 안 따라잡히게 열심히 하자.”

‘기적의 해’가 시작된다.

소녀연맹은 곧 필터와 마주할 것이다.

그게 성필이 몇 달 동안 밤새 영감의 조각이나마 붙잡으려던 이유였다.

“따라잡혀선 안 돼.”

소녀연맹은 성장하고 성장하고 또 성장해야만 한다. 그녀들에겐 추월만이 있어야 한다.

한풀 꺾이면 다신 일어나지 못한다.

후세의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불릴 성공을 연이어 만들어가야만 한다.

시장 전체의 흐름과 싸워 이겨야 한다.

그게 최고로 가는 조건이다.

‘그리고.’

아직 케이어스가 전생의 위용을 회복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만에 하나 케이어스가 성필의 회귀로 고꾸라진다면, 성필의 갖은 노력에도 미래를 되돌리는 데 실패했다면.

전생의 케이어스가 지녔던 빛을 소녀연맹이 다시 가져와야 한다.

천장을 깨부수는 게임체인저의 역할을, 소녀연맹이 맡는다.

그리고 성필이 항상 믿었던 대로, 그 빛은 멤버들에게 있다. 멤버들의 빛나는 아티스트십에 존재한다.

자기 자신이 생각했기에 자기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

* * *

성필과 장하양은 총괄 프로듀서와 메인 프로듀서로서, 비주얼적인 측면에 대해 멤버들의 의견을 물었다.

“알아서 해요.”

그리고 조아라에게 돌아온 대답이 이거였다.

“아저씨가 생각하기에 이상적인 모습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걸로 해요.”

왠지 모르겠으나, 조아라가 살짝 비협조적이었다.

장하양은 당황할 뿐이었지만, 성필은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보고 눈치챘다.

‘……얘 삐쳤나?’

왜?

‘내가 뭐…… 했나? 아니면 하양이가?’

성필은 장하양의 기색을 살폈으나, 그녀에게선 딱히 조아라에 대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필은 전생의 모든 기억을 되짚어 조아라의 습관과 태도를 점검했다. 그녀가 삐쳤단 건 성필의 직관에 불과할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관찰해보면…….

부루퉁하게 내려간 입꼬리.

새침하게 돌린 눈.

방어적으로 낀 팔짱.

꼰 채 까딱이는 다리.

‘나한테 기분 상한 게 확실해!’

성필은 전생의 습관이 자기도 모르게 나왔다.

안절부절못했단 뜻이다.

그때 성필은 얼마 전에 받았던 장난 문자를 기억해냈다.

[조아라: 나 KS 엔터로 이적해요. 아저씨보다 정호환 이사님이 더 좋아요. 이유는 아저씨가 더 잘 알겠죠.]

장난 문자.

장난 문자이지만, 혹여나 그곳엔 일말의 진심이 섞이진 않았을까?

“…….”

이어서 사악하게 웃는 정호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조아라를 곁에 두곤 차갑게 말했다.

‘아라 씨는 박 이사님의 곁보다 제 곁에서 더욱 빛날 겁니다. 아무렴, 저는 최고의 프로듀서니까요.’

“아라야.”

성필이 벌떡 일어나 조아라에게 말했다.

“잠시 따로 얘기할까?”

“왜요.”

조아라는 무심한 듯 성필을 흘겼다.

협조적이지 않은 답을 하려던 조아라는, 성필의 얼굴을 보자 그럴 수 없었다.

“할 말이 있어서.”

주인이 무시하자 끙끙대며 주변을 맴도는 강아지처럼, 성필의 얼굴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네, 뭐.”

조아라는 어린애처럼 기분 상했던 것도 잊고 일어나 성필을 따랐다.

쿵, 문이 닫혔다.

회의실에 홀로 남겨진 장하양은.

“……응? 응?”

자신이 이야기하는 도중 졸았나 싶었다.

“으응……?”

무슨 흐름이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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