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616화 (616/760)

616화

리카가 술자리를 제안해왔다.

성필은 누군가 술을 먹자고 하면 두 가지 의도가 있다고 판단한다.

첫째, 놀자.

둘째, 할 이야기가 있다.

취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하고 싶어 하는 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세상엔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사람이 넘쳐난다. 괜히 데일 카네기가 인간관계의 핵심을 ‘듣는 것’이라고 한 게 아니다.

그리고 술이란 평소엔 체면 차리느라 못했던 자기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주는 음료다.

‘리카가 하려는 이야기가 뭘까.’

성필은 사무실 자리에 앉아 계속 그것만 생각했다. 단순한 고민이라면 사람 없는 곳에서 따로 이야기하는 걸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술의 힘까지 빌려야 한다면…….’

과연 어떤 주제가 술판 위로 올라올까.

성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리카와 따로 술을 마셨던 적은 두 번.’

대학 축제를 가고 싶어 했던 리카와 새벽을 지새우며 마셨던 게 첫 번째.

그리고 콘서트 VCR 촬영 당시 숙소에서 술잔을 나누었던 게 두 번째.

그 두 번 모두 딱히 상기할 만한 거리는 없었다.

첫 번째엔 둘 다 고주망태가 되어 민경섭의 도움을 받았었고, 두 번째엔 서로 적당한 분위기에서 끊었으니까.

‘리카가 술기운을 빌려서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과연 뭘까?’

성필은 나름대로 리카의 의도를 상상해보았다.

매우 진지한 얼굴로 입을 닫고 있으니, 사무실의 모두가 그에게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할 분위기가 되었다.

“헌용아.”

이유이가 직속 후배인 배헌용의 뒤에 섰다.

배헌용은 그녀를 뒤에 두고 컴퓨터 안에 든 관련 자료를 익히는 중이었다.

“여기 이 폴더에 레퍼런스가 다 들어 있거든? 들어가서 직접 보면 알겠지만, 처음 보면 분류가 자기 맘대로인 거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넵.”

“근데 저마다 기준이 있거든. 그건 파악하면서 익히고, 모호한 부분은 내가 알려줄게.”

“넵 선배님.”

배헌용은 이유이와 함께 비주얼팀 중 의상을 담당하는 직원으로 뽑혔다.

둘의 일은 스타일링에 관한 모든 것이다.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 양재사들과 협업하여 그룹의 의상을 만들고 받아내는 것 말이다.

“크게 패션 자료, 방송 자료, 뮤지션 자료로 나뉘어 있어.”

패션 자료는 패션쇼, 패션 잡지, 화보, 트렌드, 원부자재 시장 자료 등이 있다.

방송 자료는 방송 프로그램과 방송 무대를 분석한 것이다.

뮤지션 자료는 특정 뮤지션들을 분석한 자료다. 뮤지션의 체형과 퍼스널 컬러, 헤어, 메이크업, 뮤지션과 비슷한 장르의 스타일링 분석 자료 등이 있다.

배헌용은 자료의 양에 감탄했다.

“이걸 선배님이 일일이 모으신 거예요?”

“아, 이게 처음엔 손 이사님이 전에 있던 회사에서 가져온 게 대부분이었거든? 그걸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차곡차곡 또 쌓아간 거지.”

“우리요?”

“나도 있고, 다른 팀원들도 일하다 보면 이런 자료를 필연적으로 모으게 되거든. 비주얼팀이 그렇지. 그런데 사실 이 자료 대부분은…….”

이유이가 성필 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배헌용의 눈도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갔다.

“이사님이 모아서 나한테 보내주셨어.”

“박 이사님이 직접요? 이사가 이런 일도 하는 거예요?”

“이사님은 남는 시간에 시장 트렌드 조사를 엄청 철저하게 하시거든. 지금도 봐.”

모니터에 케이어스의 화보를 띄워둔 채 매우 진지한 얼굴로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모니터에 뜬 마우스가 움직여 케이어스 에리카의 화보를 저장했다. 그 과정이 거의 기계처럼 이루어졌다.

배헌용이 또 감탄했다.

“저 정도 열정과 관심이 있어야 이사를 하나 보네요. 이사님 본인 일도 아닌데…….”

배헌용은 뮤지션 관련 폴더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장된 자료의 양에 또 감탄했고, 또한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케이어스 자료 용량이 전체의 절반이네요? 박 이사님 취향이 케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몰라?”

“아…….”

“케이어스는 우리 소련이들 라이벌이야. 철저하게 분석해야지. 생각해봐. 소련이들이랑 케이어스랑 같은 시상식 무대에 섰는데 스타일이 겹치기라도 해봐. 그리고 우리 스타일링이 더 떨어지면? 그게 무슨 망신이야. 조아라 마이너 갤러리 같은 곳에 ‘중소 수준ㅋㅋㅋㅋ 케이어스한테 개떡발리네ㅋㅋㅋㅋㅋ’란 글이 우후죽순 올라올걸?”

“조아라 마이너 갤러리……?”

“암튼, 이건 아주 중요한 자료야. 알겠지?”

“네, 넵.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이유이에게 업무 관련 강의를 받고 난 후, 배헌용은 혼자 자료를 파악하며 가끔 성필 쪽을 흘겼다.

그는 미동도 없이 기계처럼 마우스를 움직였다. 화보를 찾아 감상하고, 저장하고, 또 다른 화보를 찾아 움직이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직장에서까지 케이어스 덕질을 하는 걸로 보일 정도다.

‘확실히 프로듀서는 다르네. 모든 분야에 일가견이 있어야 하니, 저런 사소한 작업도 놓치지 않는구나.’

그리고 스타일링에 저토록 관심 있는 사람, 성필 앞에서 스타일링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할 날이 온다니.

배헌용은 긴장하여 자료 파악에 더 힘을 기울였다.

뒤에서 쏟아지는 신입의 존경 서린 눈길도 모르고, 성필은 기계처럼 케이어스 화보를 저장했다. 머릿속은 리카와의 대작 생각뿐이었다.

* * *

저녁.

성필과 리카가 찾은 곳은 일본식 선술집이었다. 근처에 주차할 만한 곳이 없어, 살짝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걸어가야 했다.

성필은 리카와 나란히 길거리를 걷자 주변이 새롭게 보였다.

‘아무도 리카를 못 알아보네.’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썼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신기한 기분이었다.

성필은 얼마 전 읽었던 음악 잡지에 게재된 팝스타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인터뷰어는 마스크를 쓴 팝스타와 번화가를 걸으며 인터뷰했었다. 그때 느꼈던 소감을 기사에도 써두었다.

[만약 그가 마스크를 벗어 던진다면 길거리는 교황이 하늘에서 강림한 것처럼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기 위해 수천 명이 난투극을 벌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마스크 덕분에 완벽히 눈에 띄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팝스타 중 한 명이 자연스럽게 번화가를 가로지르는 걸 보는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교황이 강림한 것처럼, 이라…….

성필은 옆에서 걷는 리카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혹여라도 들킬지 경계하는 듯, 밖으로 나와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성필의 시선을 알아채곤 그를 보았다. 그리고 성필이 딱히 말이 없자, 매력적인 눈웃음을 짓곤 다시 앞을 보았다.

그 인터뷰어의 말이 맞다.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 없을 아이돌이 번화가를 가로지르는 걸 보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그 아이돌의 바로 옆에서 걷고 있다면 더욱 즐겁다.

“두 명이요.”

가게에 들어서자 종업원이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홀 테이블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룸뿐이었다.

리카는 성필의 뒤를 따라가며 이곳저곳을 보았다.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건 역시나 벽면을 가득 채운 연예인들의 사인이었다.

둘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리카는 자리를 잡은 즉시 마스크를 벗고 평소처럼 활기차게 변했다.

“사인이 엄청 많았어요!”

“배우분들이 많이 오셔.”

“고연주 배우님이랑 유지성 배우님 사인도 있었어요! 혹시 이곳 사장님이 배우 매니지먼트사 사장의 형제인가요!”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유명해. 자리가 전부 룸식에다가 종업원들이 귀찮게 안 하거든.”

거기에 더해, 종업원들이 ‘나 누구 봤어’라며 괜히 밖으로 말을 꺼내지도 않는다.

즉, 입이 무겁다.

가게는 계산할 때 사인 한 장을 요구할 뿐이다. 그러면 그 사인은 액자에 담겨 벽에 걸리고, 옛날에 누가 왔다는 흔적만을 남긴다.

“이사님한테 맡긴 게 정답이었네요!”

“원랜 응접실에서 마시려고 했었는데, 오랜만이니까.”

“오랜만이라서?”

리카가 헤실헤실 웃었다.

“아타시(저)랑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나요!”

“응접실에서 배달 음식 먹는 편이 나았어?”

“이쪽이 백배 나아요!”

음식과 술이 나왔다.

술은 일본식 소주인 비잔클리어를 주문했다.

“이사님이라면 중국집에 데려갈 줄 알았어요!”

리카가 성필의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왜?”

“이사님은 중국술 좋아하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근데 사실 크게 가리진 않아. ‘이거면 좋겠다’ 수준이지, ‘이게 아니면 안 돼’는 아니니까.”

성필은 리카의 잔을 채워주었다.

“저는 이사님이 좋은 게 좋아요! 다음에는 중국집에 가요!”

“그래, 기회가 있으면.”

둘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캬하!”

리카는 과장된 감탄사를 냈으나 성필은 티슈로 가볍게 입술을 두드릴 뿐이었다.

그리고 바로 리카의 잔을 채워주었다.

“술은 오랜만이에요!”

“애들이랑 잘 안 마셔?”

“술 좋아하는 건 아라쨩뿐이에요! 가끔 아름이가 어울려줘요! 아, 이사님 혹시 춤 배우시나요!”

탕을 그릇에 덜려던 성필이 순간 움찔했다.

“뭐?”

“이사님 등이 요즘 묘하게 꼿꼿하세요! 춤 배우셔서 그런 건가 해서요!”

“…….”

성필은 꼿꼿하게 폈던 등을 보통 사람처럼 살짝 구부렸다.

“다…… 알아?”

“정답이었네요! 눈치 빠른 아타시(저)밖에 모를 거예요! 아마도요!”

“아마도? 요즘 내가 그렇게 눈에 띄었어?”

“이사님만 모를걸요?”

“진짜야?”

사람 자세가 바뀐 게 그렇게 눈에 띈다고?

성필은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의 바뀐 부분을 캐치하지 못해 혼난다는 클리셰가 있다.

그 정도로 사람의 바뀐 부분을 바로 알아보는 건 꽤 큰 관심이 필요하다.

“네가 나를 너무 자세하게 관찰하는 건 아니고?”

“자의식과잉이에요!”

“할 말이 없네.”

“어떤 춤을 배우시나요!”

“방송 안무. 그러니까, 어반 댄스.”

“드디어 트로트 아이돌로 데뷔하시는 건가요! 전국의 40대를 홀리는 거네요!”

“그분들도 젊은 사람을 더 좋아하겠지. 내가 무슨 경쟁력이 있겠어.”

젊음을 선호하는 건 남녀, 세계, 만국 공통이다.

“리카.”

대화하는 동안 술병이 반이 비었다.

비잔클리어의 용량은 720ml이며 도수는 25%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절반을 비우는 건 꽤 빠른 축에 속한다. 그만큼 리카가 술을 절실히 원한단 뜻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성필은 그녀가 본론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줄여주기로 했다.

그 나름 리카가 자신을 이 자리에 불러낸 이유를 고민하고, 결론을 내려 들려주려는 것이다.

“네가 오늘 나랑 술 마시자고 한 거 있잖아.”

리카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떨어뜨리더니 낮게 웃었다.

“역시 이사님이네요! 제 고민을 이렇게 빨리 간파하시다니…….”

“웨이퍼센트 유빈이 때문이지?”

“에에에엑?!”

리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단 듯 깜짝 놀랐다.

“아니야? 너 유빈이한테 여러 번 대시 받았다면서. 그런데 이제 한솥밥 먹게 됐으니까 거리감을 어떻게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고민 아니야?”

“전혀 아니에요!”

리카는 찬 소주로 뱃속의 열을 식혔다.

“이사님이 하실만한 오해네요!”

“뭐, 그치. 둘의 사정을 아니까.”

“제 말은 그게 아니에요!”

리카는 목청을 가다듬더니 성필의 성대모사를 했다.

“리카, 가지 마. 일본에 있지 마. 한국으로 가자.”

“그만.”

“난 네가 필요해. 네가 없으면 안 돼. 부탁이야, 떨어지지 말아 줘.”

“그만하라고 했다.”

“제발, 내 옆에, 내 옆에 있어줘…….”

“그마아아아아안!”

성필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리카를 붙잡으려 하자 그녀가 빠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성대모사를 이었다.

제가 소중하세요?

“소중해…….”

고작 몇 주도 못 떨어질 정도로요?

“어…….”

그렇게 저와 함께 있고 싶으신 거예요?

“응…….”

“죽어어어(시네에에)!”

성필이 테이블을 돌아가 리카를 붙잡았다. 그런데 리카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게 성필을 당황하게 했다.

보통 이러면 ‘죄송해요 항복할게요!’라며 버둥거리는데?

리카가 씩 웃으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쩌실 건데요? 그만 안 두면?”

“…….”

성필이 붙잡은 그녀의 어깨춤을 놓았다.

리카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 허세뿐이네요, 이사님도……. 아무도 가로 엔터의 기둥인 아타시(저), 이시카와 리카의 발톱조차 건드릴 수 없어요!”

“네 말이 옳다.”

성필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옛날이었으면 간지럽히기라도 했을 텐데.”

“그립네요! 아무것도 가진 거 없던 옛날의 저는 이사님께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었으니까요!”

성필이 말한 ‘옛날’은 소녀연맹이 인기를 얻기 전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의 옛날, 리카가 어렸을 때를 의미했다.

성필의 눈에 리카가 어린아이로만 보이던 시절 말이다. 그땐 리카의 물리적인 장난에 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리카는 어엿한 숙녀가 됐으니 말이다.

“이사님은 쌤한테 고백한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서, 이 얘기만 나오면 부끄러워하시네요!”

“부끄러울 만한 일이니까. 많은 사람들한테 폐를 끼쳤던 거고. 또, 너한테도 폐였어.”

“……마지막 결정은 제가 한 거였어요! 이사님은 죄책감을 안 느끼셔도 돼요! 그리고 부끄러울 게 뭐가 있나요! 진심으로 저를 소중히 여기셔서 한 말이잖아요!”

“진심이니까.”

성필이 잔을 비웠다.

“진심이니까 부끄러운 거야.”

“…….”

리카는 빈 잔을 매만지며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성필이 묘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웃음을 지어냈다.

“생각해봐. 내가 그때 너한테 한 말은 설하한테 한 거랑 차원이 달라. 어떤 어른이 맨정신으로 ‘난 네가 필요해. 네가 없으면 안 돼. 부탁이야, 떨어지지 말아 줘.’ 같은 말을 하겠어. 부끄럽지.”

“진심이니까요?”

“……응.”

리카는 성필의 빈 잔을 또 채워주었다. 그녀가 씩 웃었다.

“역시.”

“역시?”

“저를 너무 너무 소중하게 여기는 이사님이시니까 유빈 선배를 신경 쓰는 거 아닌가요! 소중한 리카는 아무한테도 못 넘겨줘, 손나 칸지(그런 느낌)? 이사님이니까 하실만한 오해네요!”

“신경이 쓰이긴 하지.”

“이토록 저에게 진심인 이사님께만 여쭤볼 수 있는 게 있어요!”

“드디어 본론이야?”

“하이(네)!”

그녀는 정자세를 잡고 성필을 똑바로 보았다.

“유…….”

그녀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뻐끔거리고 달싹이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그녀가 눈을 질끈 감곤 외쳤다.

“유우쨩은 데뷔조에 뽑히나요!”

“……뭐?”

“유우쨩이 데뷔조에 뽑히는지 궁금해요! 너무너무 궁금하고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겠어요! 저한테만 살짝 귀띔해주세요!”

성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술의 힘까지 빌리며 물어보고 싶은 게, 남동생이 데뷔조에 드느냐?

“이, 이제 정말 데뷔조 선발이 지척이에요! 며칠 안이잖아요! 물도 못 마셔요! 불안해요! 미리 알고 싶어요! 어차피 결정은 내려진 거 아닌가요!”

“어, 그치.”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말씀해주세요!”

“안 돼.”

“손나(그런)! 저 이사님한테 어려운 부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앞으로도 없을지도 몰라요! 이게 마지막, 마지막 부탁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오네가이시마스(부탁드립니다)!”

급기야 리카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팍 숙였다.

“부정적인 답이 돌아와도 절대 원망 안 해요! 소녀연맹 활동에 아무런 영향도 안 갈 거예요! 그냥 알고 싶을 뿐이에요! 이대로는 못 살아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알려주세요! 뭐든 할게요!”

“안 돼.”

리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첫 번째 방법인 무릎 꿇고 부탁하기가 안 통하니 설득을 시도하려는 듯하다.

“이사님은 동생을 사랑하는 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건가요! 동생을 걱정하는 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빨리 알아서 위로해주거나 축하할 준비를 하고 싶어요!”

“안 돼.”

“지, 직접적으로 안 되면 비유라도 해주세요! 유우쨩한테 비행기표를 사줄까요? 사지 말까요?”

“그렇게도 안 돼!”

“이사님은 아타시(제)가 아이를 가져서 산부인과에 가서도 선생님한테 아들인지 딸인지 안 물어볼 건가요?!”

“왜 내가 너랑 산부인과를 갔단 게 전제냐. 그리고 난 안 물어볼 거야.”

“손나(그런)!”

성필은 한숨을 쉬고 리카를 진정시켰다.

“리카, 들어봐. 물론 데뷔조는 이미 결정이 났어. 사장님이랑 이사들은 전부 알고 있어. 근데, 이 결정은 신인개발팀이라도 몰라. 임원들끼리만 알고 있는 정보야. 당일까지. 차기 그룹이랑 관련 있는 팀원들도 모르는데, 아예 관련이 없는 너한테 말해준단 게 말이 돼?”

리카가 시무룩해졌다.

“그치만, 불안해서…….”

“이해해.”

“비유해주실 건가요?! 파란색 옷을 살까요 분홍색 옷을, 이에(아니), 비행기표를 사야 하나요!”

“안 해줘.”

“우으…….”

리카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수험생 부모님의 마음가짐이 아닐까.

자녀가 대학에 붙었는지 안 붙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부모님은 아마 결과를 알려고 할 것이다.

자식의 마음이 타들어 가는 만큼 부모님도 불안할 테니까. 미리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 불안을 해소할 수 있겠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

성필은 잠시 술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리카가 당황했다.

“이사님?”

“오늘 술자리는 파하자.”

“에? 아, 안 할게요! 이 얘기는……!”

“내가 취하면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아니면 무의식적으로라도 관련된 정보를 입 밖으로 낼 수도 있고. 오늘은 헤어지는 게 맞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재밌는 얘기만 해요! 아, 아! 아라쨩이 저번에……!”

“옷 입고 나와. 밖에서 기다릴게.”

성필은 매정하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리카는 한동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우울하게 고개를 떨어뜨리곤 벗어둔 코트를 입기 시작했다.

유우토의 정보를 얻지 못한 아쉬움은 진즉 사라졌다. 이젠 성필을 실망시켰을지도 모른단 게 마음 아팠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긴 한 거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물어보지 말걸…….

리카는 급히 물건을 챙겨 성필을 따라나섰다.

그는 가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님?”

리카는 성필의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가 섰다.

“리카.”

“죄송합니다!”

성필이 불렀을 뿐인데도 리카는 사과부터 입에 담았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앞으론 이런 일 없겠습니다!”

“디저트 먹을까?”

“하이(네)?”

“한라봉 에이드.”

성필은 아까 아무 일도 없었단 것처럼, 평소대로 친근히 리카를 대했다.

그의 미소에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리카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 듯하더니, 우울함으로 처졌던 눈가가 순식간에 호선을 그렸다.

그녀가 활기차게 답했다.

“하이(네)!”

* * *

연습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가로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 성필이 입장하자 열댓 명의 연습생들은 저마다 굳은 자세로 섰다. 그들의 눈은 성필의 걸음 하나하나를 민감하게 쫓았다.

최후의 최후까지 남은 A반의 연습생들.

그들 앞에 성필이 섰다.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이다.”

성필이 자기소개를 했다.

필요는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를 알았으니까.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데뷔조를 발표할 텐데, 여기서 떨어졌다고 너희의 노력이 가치 없어지는 건 아니다. 너희의 인생이 망한 게 아니라, 아이돌이란 협소한 길에서 잠시 멈춰선 것뿐이니까. 또한, 여기서 떨어졌다고 데뷔의 희망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만약 바란다면,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다른 회사의 빈자리를 알아봐 줄 거다.”

대답은 없었다.

여전히 사막같이 고요하고 목이 타는 듯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성필은 연습생들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누구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의 눈은 허공을 맴돌았다.

“데뷔조.”

연습생 중 누군가가 입을 막았다. 긴장감이 과해서 발생한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데뷔조로 선택된 연습생에겐 내일 문자가 발송된다.”

팽팽했던 분위기가 탁 풀렸다.

이 자리에서 발표되진 않는 거구나.

“그 문자엔 주소와 시각이 적혀있다. 문자가 전송된 다음 날, 그 주소로 시간에 맞춰서 와라. 그 주소란 데뷔조가 앞으로 살게 될 숙소다. 그러니 그곳에서 쓸 물건들을 가져와라. 그리고 데뷔조에 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문자가 전송된다. 데뷔조로 뽑히지 못했다는 간단한 문자다. 앞부분만 봐도 둘 중 어느 쪽인지 구별은 될 거다.”

문자의 서두를 읽는 순간, 최소한의 희망조차 가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착각으로 생긴 희망 때문에 절망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문자는 내일 아침 6시에 전송된다. 오늘은 돌아가서 푹 쉬어라. 그럼, 해산.”

그게 끝이었다.

성필은 연습실을 나섰다.

연습생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이내 하나둘씩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내일, 몇 년의 노력이 보답받는가 아닌가가 결정된다.

* * *

고3 김채현.

이젠 대학생!

“어휴, 저거 꼴 봐라 저거 저거.”

아침, 김채현이 현관으로 향하자 아버지가 핀잔을 주었다.

“대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건지 놀러 가는 건지 구분이 안 되네.”

“오늘은 수업 아니야. 새터라고 했잖아.”

김채현은 오늘 한껏 꾸몄다.

6년 내내 교복만 입고 다니다가 드디어 사복을 입을 자유를 얻었다. 그 설움을 보상하듯 할 수 있는 한 꾸민 것이다.

“치마 길이는 또또, 어휴 남사스러워.”

“아빠 왜 그래 진짜.”

“2박 3일이라고? 가서 술만 퍼먹겠네 어휴. 너 조심해라 진짜.”

“치마가 왜……. 요즘엔 다 이렇게 입어…….”

“거기 애들 처음 만나는 거 아니야? 선배들이 참 좋게도 보겠다.”

“아이고 당신!”

어머니가 아버지의 등을 마구마구 때렸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번듯이 합격한 애한테 왜 그래! 예쁘게 입으면 좋은 거지 뭐!”

“아, 아니 난 그냥 걱정돼서! 당신도 대학 다녔으니 알 거 아냐! 우리 채현이 저 예쁜 거 저렇게 입고 가봐! 거기 남자애들 그냥 눈이 시뻘겋게 변해가지고……!”

“당신처럼?”

“아 나는 여보가 너무 예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거고…….”

김채현은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머니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주었다.

“우리 딸 오늘 너무 예뻐. 가서 친구들 많이 사귀고, 선배들이랑 친해지고, 알겠지? 아빠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

“딸?”

잠시 후.

김채현은 트렁크 가방을 들고 허겁지겁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그래 치마는 에바야!’

결국 김채현은 바지로 갈아입었다.

치마는 신경 써서 꾸민 티가 너무 났다.

시간에 겨우 맞춰 정문에 도착한 김채현은 잠시 멈춰 섰다. 정문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도 오늘부터 여기 학생이라 이거지…….’

이렇게 노력이 보답받는구나.

김채현은 지도 어플로 학과 건물을 찾으며 걸어갔다. 건물 앞 주차장에 버스가 있을 거라고 한다. 선배들이 있을 테니 길을 헤매진 않을 거라고.

김채현은 학과 건물 앞에 세워진 세 대의 관광버스로 다가갔다.

버스 앞엔 간이 테이블에 앉은 선배가 있었다. 그리고 과잠을 입은 다른 선배들 몇이 모여 떠드는 중이었다.

“저, 저기요…….”

김채현이 다가가니 시선이 갑자기 꽂혀들었다.

“공연예술학과 김채현…… 인데요…….”

“아, 네가 채현이구나?”

테이블에 앉은 선배가 목걸이형 이름표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리고 인명록의 김채현에 체크 표시를 했다.

그걸 보자 김채현은 또 기뻤다.

‘꿈이 아니구나.’

정말 입학했구나!

오티 때 실감하긴 했지만, 정말 입학한 게 맞구나! 세상이 자신을 속이는 게 아니었구나!

“2호차 빈자리에 가서 앉아.”

“네, 넵, 감사합니다.”

“귀여워.”

약간 멀리서 보고 있던 선배가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선배, 나도 새내기 때 저랬어?”

“아니.”

“죽을래?”

“아니.”

김채현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자신처럼 어색한 표정의, 아마도, 동기들이 있었다.

김채현은 눈이 마주치는 이들과 어색하게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빈자리에 앉자마자 탈력감이 몰아쳤다.

“…….”

옆자리엔 누가 앉게 될까. 아니다, 용기 내서 다른 사람 옆자리에 앉을 걸 그랬나.

오티 때 본 애들이 있었는데, 아, 조금 더 아는 척하는 편이 나았나?

못 섞이면 어떡하지.

김채현은 불안감에 폰을 만졌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새벽공기와 어스름한 빛이 섞인 풍경은 묘한 감성을 자극했다.

김채현은 창밖의 사진을 찍었다. 남들이 보면 ‘이게 뭐야’ 싶겠지만, 김채현에겐 두근거림과 설렘을 품은 풍경 사진이었다.

김채현은 사진을 친구들과의 톡방에 올리려 했다.

[안 고독한 소련방]

김사무엘, 김마리아, 백수현, 유용태, 이선주, 그리고 김채현이 속한 소녀연맹 덕질방이다.

학교의 사진을 올려 이 감상을 공유하려던 김채현의 손이 멈췄다.

‘잠깐만. 얘네들 데뷔조 발표가 언제랬지?’

괜히 불안한 애들한테 자랑하는 꼴 아닌가.

김채현은 톡을 위로 올려 관련 대화를 찾았다.

[유용태 오빠(아저씨로 진화 중): 그러면 니들 데뷔조 발표는 언제야?]

백수현이 대답한 게 있었다.

‘어제잖아?’

데뷔조 발표는 어제였다.

그럼 결과가 나왔단 건데, 왜 애들이 아무도 말을 안 하지?

설마…….

“아.”

이전 톡을 찾아보다가, 김채현은 실수로 사진을 올려버렸다.

그녀는 당황하며 사진을 지우려 했다. 그때 톡을 확인하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숫자가 하나 줄어들었다. 그녀가 멈칫했다.

숫자가 하나 줄어들었는데, 답은 오지 않았다.

김채현은 천천히 사진을 삭제했다.

‘올리지 말걸…….’

대답이 없는 걸 보면, 아마…….

* * *

김사무엘이 일어났다.

눈을 뜨자 어둠이 반겨주었다.

김사무엘은 누운 채 슬금슬금 아래로 몸을 민 후에야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머리맡에는 책상 겸 선반이 있다. 일어나자마자 잠기운에 상체를 들었다가 이마를 박았던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신장에 맞지 않는 작은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불을 켰다.

침대와 선반, 옷장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아주 작은 방. 좁아서 바닥에 앉을 수조차 없다.

김사무엘은 선반 위에 둔 김 한 봉지를 들고 문을 열었다. 복도가 나왔다.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복도를 따라 걷자 술 냄새와 화장품 냄새, 그리고 옅은 토 냄새가 동시에 휘몰아쳤다.

아침부터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다.

여러 개의 문을 지나쳐 주방에 도착한 그는 김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주인이 둔 맛없는 김치를 덜고, 밥솥에서 밥을 덜었다.

“…….”

김사무엘은 밥 한 공기와 김치 한 접시, 그리고 좋은 일이 있는 날에만 먹기로 한 김 한 봉지를 앞에 두었다.

그가 버릇대로 손을 모아 기도했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를 시작했다.

평소엔 김치와 밥뿐이지만, 오늘은 김도 있어서 식사가 즐겁다.

좋은 일이 있는 날에만 먹기로 한 김.

오늘은 좋은 날이다.

그의 생일이니까.

생일이라서, 보육원의 동생을 보러 가기로 했다.

“……하아.”

김사무엘은 한숨을 쉬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짚었다.

이곳은 고시원.

보증금은 없고, 월세는 20만 원이다.

그는 천천히 눈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식사를 이어갔다.

폰이 울렸다.

김사무엘은 폰을 보았다.

친구인 김채현이 사진을 올렸다. 대학교의 정경이었다.

오늘이 새터라고 했던가.

“…….”

김사무엘은 자신과 평생 연이 없을 장소를 사진으로 보며,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답장은 보내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동생을 보러 가니까.

식사를 마친 그는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빈손으로 고시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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