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4화
“어떤 말을 들으셨는지 저는 모르지만.”
서로 마주 앉고 난 후, 먼저 본론으로 들어간 건 역시나 강현이었다.
강현은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말투에 절로 변명기가 섞였다.
“저희 멤버들은 사생활 문제 같은 것도 없고요, 다들 성실하고, 아이돌 활동에도 착실하게 임하고 있어요.”
웨이퍼센트를 변호한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 말을 덧붙였다.
“재계약도 걱정하실 필요 없고요.”
강현은 공적인 비즈니스 자리에 선 경험이 없었다.
물론 이 순간도 비즈니스라기엔 뭐하다.
어쨌거나 표면적으로는 강현이 성필과 아이돌 대 프로듀서로서 면담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강현은 어째서 성필이 급작스럽게 웨이퍼센트와의 면담을 끊었으며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의 마음을 돌려 합병을 이끌어 내야 한다.
명백한 비즈니스 협상장이다.
“예, 예에, 그렇, 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만 싸울 줄 아는 이 아이는 남을 설득하고 대화를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법 따위는 몰랐다.
성필은 답이 없었다. 그가 만든 침묵이 강현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강현은 괜히 자꾸만 어깨가 처졌다. 현세대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한 명과 마주하는 건 맨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돌로 살아온 그는 프로듀싱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회사의 삽질을 오랫동안 보아왔기에, 연속으로 기적 같은 성공을 만들어내는 프로듀서의 대단함을 알았다.
실패한 적 없는 프로듀서.
거장을 만나면 주눅 드는 배우처럼, 강현은 한없이 작아졌다.
“강현 씨.”
침묵이 강현을 짓누르기 직전에, 마침내 성필이 목소리를 내었다.
“진심을 들려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어요.”
거기서 강현은 직감했다.
성필은 강현의 마음을 안다. 그가 재계약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서?
고민해봤자 답이 안 나올 문제였다. 그리고 급조한 변명 같은 건 씨알도 안 먹힐 듯하다.
“재계약을 원치 않으시죠?”
이 질문은 성필에게도 도박이었다.
만약 강현에게 아이돌 외에 명확한 비전과 계획이 있다면, 이 질문은 그의 의지를 담금질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리라.
게다가 강현이 이기적인 인물이라면 멤버들 따위 얼마든지 버릴 수도 있다.
어쩌면 강현은 신대영의 횡포에 동생들이 부채질하여 억지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유를 들려주실래요?”
하지만, 그렇기에 강현이 진심을 밝히지 않으면 그 어떤 제대로 된 대화도 할 수 없다.
다시 아이돌을 도전하길 원치 않았던 백설하가 ‘나이’라는 이유를 숨겼을 때처럼 말이다.
성필은 그녀가 나이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았을 때부터 비로소 진실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아니.”
성필은 질문의 강도를 낮추었다.
“만약 재계약하지 않으시면,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실까요?”
“……공무원.”
강현이 작게 말했다.
“준비, 하려고요……. 주변에 공무원 된 친구들도, 몇 있고, 그래서 물어보고, 결정했습니다…….”
“그런가요.”
성필은 판단하지 않았다. ‘그런가요’라며 무미건조하게 응답했다.
강현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곳에서부터 천천히 새어 나오는 감정을 갈무리하여 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흰색 천이 물을 머금듯 천천히 이야기했다.
“‘아이돌 세대론’이라고…… 아시죠?”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 세대론’이란 커다란 분기를 기점으로 아이돌의 세대를 나누는 것이다. 학문적인 합의가 아닌 대중의 합의로 형성되었단 게 특징이다.
아이돌의 시작, 1세대.
아이돌의 부흥, 2세대.
아이돌의 글로벌화, 3세대.
그리고 이 시점에서 걸그룹은 아직 목도하지 못한 4세대.
“저희, 웨이퍼센트는 3세대 초중반쯤에 데뷔했었어요.”
보이그룹의 3세대는 보통 걸그룹보다 2~3년 빠르게 잡는다.
걸그룹이 3세대에 도달해서야 확보할 수 있던 공고한 팬덤을, 보이그룹은 이미 2세대에 얻어냈다.
그리하여 팬덤이라는 안정적인 기반을 지니고, 걸그룹보다 진일보한 시도가 가능했다.
“막 다들 신났었어요. 하루가 멀다하고 국뽕인지 진짜인지 모를 소식들이 계속 들어와서…….”
2세대의 정점이었던 다키스트와 동료 탑티어 보이그룹이 이룩해낸 10만 초동 판매량 돌파.
돌파를 넘어 30만, 40만, 50만 등 비현실적인 판매량이 계속 경신됐다.
그룹 하나가 1년 매출 1,000억 이상이라는 꿈의 경계마저 넘어섰다. 특출난 하나의 예시가 아니라, 동시에 여러 그룹이 그 경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음원 차트는 거의 다 보이그룹의 곡으로 도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WTP가 세계적인 ‘앨범 시대의 몰락’ 속에서 초동 100만 장을 달성했다.
일본 내수 시장의 가수들, 아니면 미국의 팝스타들만이 이룩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업적이었다.
케이팝은 축제를 맞았다.
“그런데, 거기에 저희 자리는 없었어요.”
웨이퍼센트는 축제의 행렬에서 밀려나 뒤떨어져 버렸다.
같은 데뷔한 이들은 수십만 장씩 앨범을 팔고, 빌보드 200에 이름을 올리고, 심지어 후배들마저 웨이퍼센트를 손쉽게 앞질렀다.
웨이퍼센트는 케이팝 시장의 팽창으로부터 떨어진 콩고물을 핥아 먹었다. 그리하여 겨우 10만 장을 채웠다.
웨이퍼센트가 마주한 현실은 축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축제가 끝난 뒤 찾아온 어지럽고 나른한, 그리고 고요한 정적뿐이었다.
모두가 그들이 없는 축제를 즐긴 후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춤이랑 노래를 연습하는 것뿐이라,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 아…….”
노력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그제야 그들은 인정했다.
자신들은 뒤처진 것이다.
버려진 것이다.
시대로부터 버림받았다.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데, 사람들은 벌써 4세대의 개막을 왁자지껄 축하한다. 그곳엔 또 다른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웨이퍼센트가 고개조차 내밀 수 없는, 젊은 자들의 축제였다.
웨이퍼센트는 낡고 늙었고 녹슬었다.
그렇게 버려졌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대서,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
필터(Filter). 성필은 3세대에서 4세대로 넘어가는 통로를 그렇게 불렀다.
필터는 4세대로 향할 이들을 잔인하게 선별한다. 필터를 넘지 못하면 낡은 것으로 취급받으며 사라진다.
보이그룹보다 한발 늦게, 걸그룹에게도 4세대가 찾아온다.
곧 ‘기적의 해’가 시작될 것이다.
데뷔 초동 판매량 기록이 달마다 깨지고, 걸그룹 밀리언셀러 기록이 나오며, 4세대라 불릴 신인들이 새 시대를 쓴다.
그리고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 3.5세대의 아이돌들은 새 시대에 끼지 못하고 낡아갈 것이다.
웨이퍼센트는 소녀연맹이 맞이해야 할 시련을 먼저 겪고, 먼저 나가떨어졌다. 시장이 커진다고 모두가 수혜를 입진 않는단 사실을 입증했다.
“저희는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풍경처럼 보는 수밖에 없어요. 손에 닿지도 않는, 저 멀리 늘어선 풍경이요…….”
강현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었다.
“이사님, 앞이 안 보여요. 저도 춤추고 노래하고 싶어요.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배운 게 그거뿐인걸요. 팬들을 두고 떠나가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어떡하면 좋을까요? 성공이 노력에 비례하지 않는다면, 미래를 버린 선택으로 돌아온 결과가 같은 연배 직장인과 다를 바 없다면, 미래를 버리고 뛰어들었는데 그만큼의 리턴이 없다면…….”
미래를 버린 선택으로 돌아온 결과가 같은 연배의 회사원과 다를 바 없다.
남들이 스펙을 쌓고 취직할 시간에, 웨이퍼센트는 춤과 노래에 매진했다. 그에 걸맞은 대가를 얻지 못하면, 그들은 커다란 페널티를 지니고 살아가야만 한다.
강현의 설명 중 틀린 부분이 하나 있다면, 웨이퍼센트가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는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신대영 대표가 멤버들의 몫을 훔쳤으니.
성필은 그 부분을 짚어주지 않았다. 강현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들었다.
“이젠.”
강현은 목을 메운 물기를 삼켰다.
평범한 인생보다 뒤떨어졌음을 인정하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평범한 인생의 길로 돌아와 수십 걸음 늦게 평범한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꿈에 매진한 대가는 때론 잔인하게 돌아온다.
“이젠, 그만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강현은 쓸쓸히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이미 끝나버린 축제 속을 유유히 걷는다.
남들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보면서 감상에 젖어 드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저 멀리 산 너머에선 이전의 축제보다 거대한 함성과 음악이 메아리친다.
이번엔 배경으로도 참여할 수 없다.
강현이 흘렸던 피, 땀, 눈물은 그 가치를 잃고 마른 땅에 스며들었다. 그가 외쳐댔던 노래는 옛것으로 취급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
기차는 매정하게 그를 내버려 두고 다음 역으로 출발했다. 그에겐 표가 없었고, 노력하여도 그 표를 살 수 없었기에, 떠나가는 기차를 바라봐야만 했다.
“연습생 시절까지 합쳐서 8년. 제가 손에 쥔 건 저금 2,000만 원이 전부예요. 그마저도 일이 바빠서 쓸 시간이 없어서 모았던 거고요. 남들이 번듯한 학위를 갖고 취직해서 사회인이라고 불릴 나이에, 제게 남은 건 고졸 딱지랑 뭘 해볼 수도 없는 저금이 전부예요. 견적이…… 견적을 안 내려고 해도, 나올 수밖에 없어요…….”
강현이 물기로 목이 막힌 채 말했다.
“저는 다키스트처럼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젠 꿈에서 깨어날 때예요. 언제까지고 꿈을 붙잡고 있을 순 없잖아요. 3년 더…… 재계약이 웨이퍼센트를 극적으로 바꾸리란 생각은 안 들어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래서, 재계약은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재계약까지 해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하면, 30대에 아무것도 없이 사회로 내던져지니까. 네,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건전지가 다 되어가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처럼 먹먹했다.
“다키스트처럼 되는 게 꿈…….”
강현이 이야기를 끝내고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성필이 입을 열었다. 그는 미소를 머금었다.
“멋지네요.”
“……하하, 멋지긴요. 앞뒤 분간 못 하는 어린애가 하는 품은 꿈이었는데…….”
“강현 씨, 작년 HPT 시상식 보셨어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강현은 고개를 들었다. 성필은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동자였다.
“‘올해의 총괄 프로듀서, 정호환’. 전광판에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KS 엔터의 모든 아이돌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쳤죠. 다키스트, 븨이에스, 부테스, PTR―17, 케이어스, 솔로 아티스트들과 아이돌계의 대선배들까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아이돌의 첨단부터 역사가 된 선배들까지.
“제 꿈 중 하나는 ‘올해의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이에요. 소녀연맹 애들이랑 약속했거든요. 그런데 그 꿈은 소녀연맹만으론 이룰 수 없어요. 또 그룹이나 아티스트 두세 개 총괄하는 걸로도 부족하고요.”
소녀연맹이 최고의 아이돌이 된다면, 성필이 올해의 프로듀서로 꼽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총괄 프로듀서 중 최고는 아닐 것이다.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란 케이팝 씬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고 유지하는 이에게 선사되는 이름이니까.
“저는 제 능력을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증명해야 해요. 많은 그룹을 디렉팅한 커리어가 필요해요. 저는 웨이퍼센트가 필요해요.”
“저희가요…….”
최고의 프로듀서가 강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강현의 반응은 극적이지 않았다.
수많은 동료 그룹들이 필터 앞에 좌절하여 무너지는 걸 봐서였다.
대형, 중견 기획사마저 시대의 흐름을 붙잡지 못하고 기존의 그룹을 버리곤 했다.
버려진 그룹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기다리지만, 기회는 웬만해선 찾아오지 않는다. 오더라도 역시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고 좌절한다.
시간으로 인한 변화는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에 속한다.
“이사님, 외람되지만, 저희는 늙었어요. 저희에게 남은 시간은 2년도 안 되고, 재계약 3년을 합쳐도 5년이 안 돼요. 그동안 저희보다 잘생기고, 젊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겠어요. 게다가…….”
이미 할 만큼 해봤다.
동년배들과의 경쟁에서도 뒤처졌건만, 젊은 세대와 경쟁해서 좋은 성과를 거두리란 생각은 안 든다.
강현은 실패와 실망에 적응했다. 개인의 노력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게 존재한단 사실을 깨달았다.
신대영의 말이 맞다.
자신은 ‘버러지’다.
“저희는, 적어도 저는 이사님이 기대하시는 재목이 아니에요. 제 한계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아니요, 강현 씨는 본인의 재능을 모르고 계세요. 웨이퍼센트 멤버분들 모두요.”
“……예?”
성필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자본주의는 희귀하고, 특수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재능에 보상해줘요.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체제예요. 그리고 강현 씨에겐 재능이 있어요. 아주 큰 재능이요.”
강현은 울컥했다.
여태껏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불만이 성필의 말 한마디에 터져 나왔다.
그건 불만이면서 동시에 기대였다.
회사로부터, 사회로부터, 업계로부터, 제대로 된 인정 한번 받지 못한 강현은 ‘재능이 있다’는 말에 크게 흔들렸다.
“재능에 대한 보상이요……? 제 재능은 5년간 쉬지도 못하고 일해서, 2,000만 원을 모을 정도인가요? 만약 이사님이 제게 큰 재능을 보셨고, 그게 사실이라면, 자본주의란 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애초에…….”
강현은 아이돌을 그만둘 결심을 하며 몇 번이고 되새겼던 암시를 입 밖으로 뱉었다.
“저에겐 재능 따윈 없었던 거예요……. 노력 위에 노력을 쌓아도 발톱만 한 보상이 전부인, 그 정도인 재능밖엔…….”
“그래서 제가 강현 씨 앞에 있잖아요.”
“…….”
강현은 두 눈을 껌뻑였다.
성필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제가 강현 씨 앞에 있어요. 자본주의를 대신해서, 강현 씨의 재능에 보상을 주려고요.”
사실 웨이퍼센트의 재능은 그냥 재능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그야말로 악마의 재능이다.
옐로 서브마린 엔터 같은 쓰레기 회사도 웨이퍼센트를 데리고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으니 말이다.
웨이퍼센트는 ‘10만 장벽’이란 조롱 조의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성필에겐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그들은 사막에 피어나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했지만, 결코 스러지지 않는 꽃봉오리였다. 반가운 구름이 찾아오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찬란하게 피어날 것이다.
“강현 씨, 아까 제 꿈을 말씀드렸죠. 올해의 총괄 프로듀서가 꿈이라고. 상상해보세요.”
시상식.
전광판에 ‘올해의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이 떠오른다. 그리고 대기석의 아이돌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소녀연맹을 시작으로 우효민, 가로 엔터의 차기 그룹들과 가로 엔터가 키워낼 또 다른 아티스트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웨이퍼센트까지. 강현 씨는 제 훈장이 될 거예요.”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가 키워낸 보석으로서, 웨이퍼센트는 축제의 중심에 설 것이다.
“미래의 웨이퍼센트는 저를 정상으로 데려가 줄 거예요. 그렇게 판단했기에 가로 엔터로 데려오고자 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겐 그만한 능력이 있어요.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웨이퍼센트는, 강현 씨는 저의…….”
다키스트가, 븨이에스가, 부테스가, PTR―17이 되어 시상대 위에 선 성필에게 갈채를 보낼 것이다.
정호환의 아이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게 어떤 뜻인지 아시죠?”
“…….”
알다마다.
강현은 그 광경이 절로 떠올랐다.
성필이 정점에 서고 그가 디렉팅한 아이돌들이 갈채를 보낸단 건, 그 아이돌들이 정점의 증거가 된단 뜻이다.
정호환이 키워낸 수많은 그룹이 그의 훈장이 되고 케이팝의 역사가 되었듯이.
“그때가 되면, 강현 씨가 바라보았던 축제의 풍경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게 될 거예요. 강현 씨를 버리고 갔던 시대란 이름의 풍경이, 강현 씨의 배경이 되어 누구보다 강현 씨를 빛나게 할 거예요. 최고의 프로듀서가 약속합니다.”
성필이 손을 내밀었다.
“강현 씨의 재능에 모자람 없는 보상과 대우를.”
강현은 성필이 내민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성필이 한 말이 머리를 맴돈다.
축제. 풍경. 최고. 훈장. 배경. 보상. 시상식. 시대. 최고의 프로듀서. 재능. 노력. 세대. 정호환.
“그리고, 딱히 강현 씨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재계약에 동의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2년 후 본인의 위치를 보게 되시면,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을 테니까요.”
단어들이 끊임없이 강현의 머릿속을 맴돌다가, 이내 먼지 덮인 꿈에 이르렀다.
나이 먹은 현재엔 감히 입에 담기조차 부담스러운 그 이름.
다키스트.
“이사님…….”
강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못, 잡겠어요. 저 스스로는, 저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러니까.”
성필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강현이 물었다.
“다시 저를, 믿어도 될까요?”
“마지막 기회예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세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가 아니면 다시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에요. 강현 씨는.”
성필이 악수를 멈추려는 듯 그의 손을 잡은 힘을 서서히 뺐다.
“아이돌을 그만둔 2년 후,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최고의 프로듀서를 앞에 두었던 이 순간.
미래의 정점에 선 총괄 프로듀서인 성필이 자신을 바랐던 바로 이 순간을.
“강현 씨의 꿈을 향해 ‘이만하면 됐어’라고 당당히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성필이 힘을 뺀 만큼 강현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남은 한 손으로도 성필의 손을 쥐었다.
성필의 오른손 위에 떨리는 강현의 손이 포개어졌다.
“이사님이…….”
강현이 흐느끼며, 동시에 단호히 선언했다.
“이사님이, 최고의 자리로…… 가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강현은 웨이퍼센트와 함께 시대를 따라잡지 못했던, 그리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던 동료들을 전부 잊어버렸다.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다르겠지’라 믿기로 했다.
다시 청춘이 되기로 결심했다.
* * *
신대영 대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약 30분간, 한구인은 옐로 서브마린 엔터의 부정을 매우 조리 있게 설명했다. 그리고 법정에 제출할 자료를 줄줄이 읊었다.
신대영은 그가 언급한 자료 이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한구인조차 모르는 비밀 장부들이 더 큰 공포가 되어 신대영을 옥죄었다.
그리고 더 끔찍한 게 있었다.
“아마 지금 자료를 전부 은닉하거나 소각한 뒤 그저 그런 변호사를 불러 질질 끌려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그다지 추천하고 싶진 않군.”
한구인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홍규헌의 집안을 입에 담았다. H&P 문화 그룹의 막내딸이 홍규헌이라고.
즉, 재벌.
부와 권력을 혈통으로 세습하는 집단이다.
학자들은 한국의 재벌(chaebol)을 중세적 성격의 혈족 집단으로 구분한다.
그들은 혼약과 혈통으로 울타리를 쳐서 외부인에게 권력이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봉건 왕국의 군주처럼 계열사를 지배한다.
재벌의 힘은 한국에 한정해서 외국의 부자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들이 쌓은 힘은 세대를 거쳐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으며, 투사할 수 있는 힘은 재력을 상회한다.
“사장님이 힘을 쓴단 건, 그냥 돈 좀 많은 ‘졸부’들이 법으로 후려 패겠단 것과 차원을 달리한다.”
재벌은 현대의 귀족이다.
재력 이상의 힘을 휘두를 수 있다.
사람 하나 사회적으로 죽여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너도 네 가족은 소중하겠지? 상상해봐라. 자랑스러운 아빠의 꼴이, 남편의 꼴이 점점 피폐해지고 종국엔 말라비틀어진 시체처럼 변해버리는 걸. 네 가족들이 참으로 좋아하겠군.”
“지, 지금 협박하는 거냐?”
“어디서 반말이야?”
“…….”
“이건 협박이 아니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예고해주는 거지. 자랑스러운 아버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범죄자 쓰레기가 될 거다. 연일 기사가 뜰 거다. 네 자식은 범죄자의 자식으로 불릴 거다. 네 아내는 친구들과 연락을 모두 끊어야 할 거다. 밖으론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지. 성난 대중들이 네 신상을 알아내고 온갖 사이버 테러를 자행할 거다. 이름이, 집이, 가족관계가, 모든 게 까발려지겠지. 네 자식은 SNS를 하나? 나라면 계정을 삭제하라고 충고할 거다.”
신대영의 턱을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턱에 맺힌 땀이 툭 떨어졌다.
호흡이 거칠었다.
한구인이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상상이 가나? 사회적으로 죽는단 게.”
“그, 그렇게, 내가, 제가, 잘못…….”
“그래.”
한구인이 즉답했다.
“넌 실제로 범죄자 쓰레기다.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을 이용하고, 착취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 인생을 망친 거야. 현대법 이념이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아닌 걸 감사히 여겨라.”
“…….”
신대영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렀다.
산소가 모자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알겠.”
그는 겨우 말을 뽑아냈다.
“알겠습니다. 이, 이 일은, 예, 반성하는 마음가짐으로, 예, 추후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신대영은 겁먹었다.
하지만, 한구인이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란 보장은 없었다.
홍규헌의 성씨가 우연히 홍 씨일 가능성도 있다. 혹은 한구인이 말하는 것만큼 잔혹한 일 처리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렇게 강한 압박을 하는 건, 신대영이 손을 쓰기 시작하면 일이 불리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한다.
나가서 주변에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일단 오늘 자리는 파하고…….”
한구인이 웃었다.
“오늘 자리는 파하고, 나중에 답을 준다고? 그리고? 비빌 언덕이 생긴 다음에는 또 뭐라고 할 거지?”
“……예?”
“시간을 조금 더 주십시오. 지금은 전화를 받기 힘든 입장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회사에 없습니다. 대화는 변호사와 나눠주세요. 이야기는 법정에서 합시다. 법으로 결판을 냅시다. 그딴 식으로, 얼마나 질질 끌 거냐?”
“…….”
“잘 들어라.”
한구인이 품에 넣어두었던 서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알겠나? 다시 말하지. 바로 이 순간, 지금 이 장소, 너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지금이 네가 가질 수 있는 최후의 기회다. 만약 여기에 사인하지 않고 자리를 뜬다면.”
아까부터 신대영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상황이 매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래, 드라마나 영화처럼.
마치 꿈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비현실적이야.
그리고 이 시점에 도달해서, 신대영은 그 이유를 눈치챘다. 왜냐하면, 이건 정말 비현실적인 상황이니까.
“너는.”
현실의 인간은.
평범한 인간들은.
신대영이 살을 부대끼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이런 말을 입에 담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죽는다.”
신대영은 인생 최초로 진짜 권력을 가진 인간과 마주했다. 진짜 문자 그대로, 인간을 죽일 수 있는 인간과 마주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