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아름이를 놓으면 어떡하나요!”
한 박자 늦게 리카가 거실로 진입했다. 그녀는 장하양을 대신해 신아름의 등을 눌러 제압했다.
“흐엑, 헤그엑……!”
뒤늦게 조아라도 거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벽을 붙잡고 ‘욱, 우욱!’ 토할 것처럼 헛구역질을 했다.
조아라는 전신이 땀범벅이었다. 그녀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러했다.
“자, 즈, 우윽!”
조아라는 신아름을 붙잡으려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아예 무릎을 꿇고 구역질했다.
하지만 신아름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장하양에게 제압된 직후부터 움직임이 없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성필과 백설하를 지켜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당황했던 것도 잠시, 성필과 백설하가 아무 일 없었단 듯 슬며시 떨어졌다.
“둘이…….”
신아름은 숨이 벅찬 다른 멤버들과 비교하여 놀랍도록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 뭐 하고 있던 거예요……?”
“아…….”
“아니, 쌤이 말 안.”
신아름의 눈썹이 도끼를 들어 올리듯 거세게 올라섰다.
“네가 말 안 해도 알아.”
“어, 어어……?”
“마음씨 착한 우리 팀장님이 네 어쭙잖은 사과를 듣고 용서해준 거겠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팀장님이 얼마나 괴로운지도 모르고오!”
“아름아.”
성필이 엎드려 제압된 신아름에게로 다가갔다.
신아름의 기세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팀장니임…… 힘들었죠? 혼자 여행을 떠나야 할 만큼이나……. 저한테 말씀해주셨으면 제가 위로해드렸을 텐데…….”
“아름아, 내가 여행을 떠난 건 그거 때문 아니야.”
성필은 멤버들이 백설하와 같은 오해를 품었단 걸 간파했다. 어차피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설하가 모르고 했던 말이잖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은 말을 듣고 내가 쉬기까지 했겠어?”
“거짓말!”
신아름이 성필의 답을 거짓말이란 말로 일축했다.
“거짓말하지 마요! 그럼 왜 여기 왔는데요! 쟤(백설하 26세)가 울고불고 질질 짜서 온 거잖아요!”
“……설하야, 어디까지 얘기했어?”
성필이 고개를 돌려 백설하를 보자 그녀는 아니란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곧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아까부터 묘하게 침착한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모두의 시선을 받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연극배우가 연기하듯 과장된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가 변명하는 것처럼 팔을 펼쳤다.
“네, 제가 말했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요! 아라가 이사님이 자아 찾기 여행을 떠난 게 자기 때문이라면서 자학했으니까요! 저는 그걸 두고 볼 수 없었어요! 비록 언니와 이야기하지 않기로 약조했다지만, 아라가 괴로워하는 걸 두고 볼 순 없었어요! 언니, 비난하려면 마음껏 하세요!”
“아, 안 해…….”
“입이 가벼웠던 죄와 저에게 씔 낙인은 얼마든지 짊어질게요. 하지만, 저는 설령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저는 같은 선택을 해요. 아라의 고민을 덜어줬을 거예요. 그게 저의 휴머니티(인간성)……!”
“알겠어, 그만해도 돼.”
“팀장님, 사실대로 말하세요. 쟤(백설하 26세, 3살 언니)가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상처받으신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제가 옛날에 ‘팀장님 엄마 아빠는 체육대회 때 안 오셨어요? 사랑이 부족하네’라고 했을 땐 오열하셨잖아요! 근데 쟤(백설하 26세, 3살 언니, 소녀연맹의 리더)가 한 말은 괜찮다고요?!”
“그땐 어렸, 젊었으니까. 대학 갔으면 대학 겨우 졸업했을 나이였어. 그리고 난 곧 불혹(不惑, 40세)이잖아.”
“그럼 왜요!”
“맞아요, 왜 그랬는데요 그럼.”
간신히 호흡을 되찾은 조아라까지 가세해왔다.
“왜, 왜 최근에 나만 보면 도망가고 자아 찾기 여행까지 떠난 건데요……?”
“리카, 날 놔! 놓으라고! 날 해방해애!”
“아름이가 그런 중간보스 같은 대사 쳐도 클리셰처럼 놔주진 않아!”
“놔아아아아아!”
“아라 말이 맞아요.”
자신에 대한 혐의가 희미해지자 장하양이 끼어들었다.
“이사님이 쌤의 사과를 받으러 이곳에 온 게 아니라면 어째서 두 분이 격정적으로 포옹하고 계셨던 건지 명확하고 명백하고 명징한 설명을 요구할 권리가 저에게도 있단 직관이 들어요.”
“…….”
성필은 네 명의 멤버들과 똑바로 마주했다. 그는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뒤에 있던 백설하가 움찔했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성필은 식탁 위에 올라온 아르기닌 통을 보고 있었다.
그는 결심한 듯 다시 네 명의 멤버들을 보았다.
“얘들아.”
백설하는 그의 등으로부터 위광을 보았다.
그에겐 운명을 짊어진 필멸자의 고뇌와, 그걸 감당하려는 용기가 있었다.
그래서 백설하는 그를 급히 말렸다.
“이, 이사님!”
“설하야 말리지 마. 아라의 눈만 봐도 알겠어. 아라도 너랑 같은 이유로 괴로워했던 거야. 나에겐 그걸 설명할 의무가 있어. 나도 알아. 네가 특별했단 걸. 모두가 이해하진 않겠지.”
“…….”
아주 잠깐, 백설하는 망상에 빠져들었다.
다른 멤버들에게 미움받게 된 성필은 절망한다. 그와 대화하는 멤버는 백설하뿐이다.
성필에게 백설하는 유일한 구원인 것이다.
‘설하야, 난 대체 어떡하면…….’
‘괜찮아요. 저는 이사님이 착한 분이란 걸 알아요. 저는 이사님의 잘못이 없단 걸 아니까, 저는 앞으로도 이사님의 편이니까, 울지 마세.’
망상 그만해!
“나는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제, 제가 애들한테 말할게요!”
백설하는 성필의 연극 독백을 멈추었다. 그는 현재 자기 자신에게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성필은 성인이 된 후 무단횡단한 적 없단 것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다. 때때로 그걸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도덕 중독자다.
도덕 때문에 일시적인 불이익을 입더라도, 그에겐 도덕을 지켰단 사실이 훨씬 소중하다.
일신의 안정보다 대의를 쫓는 인간이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게 성필이란 인간이고, 자아의 중심을 구성하는 명예이니까.
그 성격이 지금도 발휘되고 있었다.
그러니 말려야 했다.
“제가 말할 테니까요!”
모두 백설하처럼 성필을 이해하고 용서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같은 여자인 백설하가 설명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얘들아.”
백설하는 성필의 앞으로 나와 멤버들과 마주했다.
“이런 일을 예상했어.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고 쭉 상상해왔지. 차라리 일찍 와서 다행…….”
성필은 계속 눈을 감고 연극 독백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를 담금질하는 모양이다.
백설하는 뒤에 선 그를 무시하고 멤버들에게 말했다.
“일단 우리 방에 가자.”
“난 아직 널(백설하 26세, 3살 차이, 소녀연맹의 리더, 별명 쌤) 용서하지 않았어!”
“이사님은 나한테 사과하러 오셨던 거야.”
신아름이 순식간에 입을 닫았다.
다른 멤버들은 놀라서 성필을 보았다.
“그렇죠, 이사님?”
백설하가 묻자 성필은 독백을 끝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막을 들려줄게. 그러니까 방으로 가자.”
* * *
백설하는 설명을 끝냈다. 그리고 손에 든 아르기닌 통을 장하양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침대엔 동생 라인이 쪼르르 앉아 있었고, 장하양은 창문 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장하양은 책상 위에 올라온 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백설하의 이야기는 장황했으나, 요약하자면 명확했다.
“아, 아저씨가…….”
조아라가 어안이 벙벙한 채 말했다.
“우리 보고 야한 생각을 해서, 그게, 어, 섰었다고……? 그래서 최근에 도망, 자괴감 느끼고, 어, 여행……?”
조아라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저씨가 우리 보고……!”
“아라쨩, 남자는 야한 기분이 아니어도 그렇게 될 수 있어.”
“……뭐? 그런 기분이 아닌데 왜……?”
“그렇게 태어난 거야.”
“너 말투는 왜 그래?”
“그렇게 태어난 거야!”
“어떻게 아는데 네가?”
“유우쨩이 있으니까! 누나랑 여동생 있는 사람이 그쪽을 잘 알잖아? 그거야!”
“…….”
조아라는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고민을 이어가던 그녀는.
“그럼 아저씨가 왜 사과해? 원래 그런 거면?”
“팀장님은 이런 적이 없으셨던 거니까.”
신아름의 목소리엔 언짢음이 섞여 있었다.
“프로듀서랑 아이돌의 사이는 비즈니스잖아. 건조해야 해. 근데 나는 그것보다 더 특별하고.”
“너만?”
“……생각해봐, 팀장님은 우리가 학생일 때부터 봐오셨어. 특히 나는 중학생 때 만났고.”
신아름은 백설하와 장하양을 자연스럽게 주제에서 제외시켰다.
“굳이 비슷한 관계를 찾으려면, 교사랑 학생이야. 죄책감을 느끼셨겠지.”
“원랜 안 그랬는데?”
“어.”
“한 번도? 단 한 번도? 남자는 원래 그런 거라면서. 근데 우리랑 지낸 시간이 4년이 넘는데, 단 한 번도?”
“쌤이 그렇다고 하잖아.”
신아름이 백설하를 부르는 호칭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팀장님한텐 그 일이, 알이 깨지는 대사건이었던 거야.”
“알이 깨져? 그것도 뭐…… 성적인 비유야?”
“아니 데미안 말야 데미안! 너 데미안도 안 읽었어?”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소설 속 주인공인 데미안은 알을, 하나의 세계를 깨부수고 마침내 어른이 되었다.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을 겸하는 신이다.
즉, 알을 깬다는 건 어른이 된단 뜻. 타인이 결정하고 규정한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판단한 선과 악으로 살아감을 의미한다.
자칭 소녀연맹 다독왕인 조아라는 부끄러워져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신아름이 설명을 이었다.
“팀장님은 처음이셔서…… 혼란스러우셨을 거야. 어린애들이 이차성징 오면 그런다잖아. 우리도 그랬고.”
성필이 자아 찾기 여행을 떠났을 때 리카는 ‘어느 날 머리에서 뿔이 자랐다’고 말했었다.
뿔은 사춘기의 비유라고.
성필은 어느 날 돋아난 뿔을 보고 어쩔 바를 모르고, 자기 혼자 이상한 것 같고, 괴물이 된 것처럼 자괴감이 들고, 그렇게 떠나버린 것이다.
뿔을 없애기 위해서.
하지만 이차성징, 즉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에겐 부모가 꼭 말해준다. 그건 이상한 게 아니라 네가 비로소 어른이 되었단 증거라고.
축하할 만한 일이라고.
물론 멤버들이 성필에게 ‘잘됐네요’라고 말하진 않으리라. 잘됐다고 말할 것도 아니고.
비유일 뿐이다.
다만, 성필에겐 사춘기 소년·소녀의 부모처럼 다정하게 ‘괜찮다’라고 말해준 인물이 있었다.
“쌤은…….”
신아름은 아까 자신이 벌인 추태가 떠올랐는지 백설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팀장님한테 뭐라고 했어요?”
“뭐…… 말할 게 있어? 괜찮다고 말씀드렸지. 보, 본인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저 아르, 알, 저게 뭔데요?”
조아라는 책상 위에 올라온 플라스틱 통을 쥐었다.
“이거 무슨 최음제예요?”
“영양제야.”
대답한 건 장하양이었다.
“나 운동할 때 먹을 영양제 고를 때 찾아봤었어. 오메가3처럼 혈류 관련된 거야.”
“혈류……. 언니도 먹어요?”
“아니. 최근에 뜬 영양제인데, 내 생각엔 바이럴 같아. 차라리 BCAA나 닭가슴살 한 입이라도 더 먹는 게 낫지.”
“근데 아저씨는 왜 그런데요?”
“글쎄…….”
장하양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로 햇빛이 떨어져 은은히 빛났다.
“말 그대로, 박 이사님도 어른이 되신…….”
“하, 하양아 그렇게 말하면 박 이사님이 뭐가 돼…….”
장하양은 아르기닌의 효과를 의심하는 듯하다. 그러니 저런 결론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다.
백설하는 장하양의 눈치를 보았다. 갑자기 성필의 뿔이 돋아난 이유를 믿지 않는 듯하니, 더 설득하려는 건 역효과일 것이다.
‘이사님, 죄송해요.’
하양이를 설득할 순 없었어요…….
최선을 다했지만, 장하양은 백설하의 우려대로 성필을 지금까지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될 듯하다.
마음이 아프다.
둘은 성묘를 함께 갈 정도로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래, 가족이다. 그런데 성필이 우연찮게 복용하게 된 영양제 때문에 그 관계가 파탄 날 위기에 놓이다니…….
“다들…… 어떻게 생각해?”
백설하는 모두의 눈치를 보았다.
과연 그녀들은 백설하처럼 납득할 것인가?
아니면 장하양처럼 의구심을 품고 성필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할 것인가.
“쫌 얼떨떨하긴 한데…….”
조아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저씨가 나 때문에 여행 간 거 아니고, 내가 특히 더 싫었던 것도 아닌 거죠? 됐어요 그럼. 남자는 원래 그런 거라면서요. 어? 그러면 회사의 다른…….”
“아라쨩 아직도 이해 못 했구나……. 우리를 보고 그렇게 되신 게 아니라, 그런 상황이 찾아와서 우리를 피하신 거야! 다른 회사분들도 그러실 거구! 그러니까 아라쨩만 피해 다닌 건 아라쨩이 유별나게 세쿠시(섹시)해서가 아냐! 기적적인 확률로 아라쨩이 이사님이 파이팅 넘칠 때만 찾아간 거야!”
그 대화를 들으며, 백설하는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안 게 자신이라 다행이라고 여겼다.
만약 조아라가 최초로 알게 되었다면, 과연 그녀가 성필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그런…… 건가?”
“그런 거야!”
“그러면…….”
리카는 조아라가 입 밖으로 내려던 오해를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즉시 수정해주었다.
조아라는 창피당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며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암튼, 난 됐어요.”
백설하는 안도하며 다음 타자 리카를 보았다.
“아타시(저)는 어른이니까 이해해요! 제가 남자의 은밀한 상태에 대해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유우쨩이 가족과의 단란한 저녁…….”
“됐어 말 안 해도 돼!”
백설하는 이시카와 유우토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리카의 말을 끊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앞으로 회사에서 마주치면 유우토 얼굴을 어떻게 볼까.
“그, 아름이는?”
조아라에게 ‘아저씨 딸’로 불리는 신아름.
그녀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백설하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신아름은 충격을 많이 받았을 듯하다.
그녀가 성필에게 부성애적 의존성을 지녔다면, 이 사건은 절대 발생하지 않아야만 했다.
어쩌면 이 사건 이후 가장 큰 관계 변화를 겪는 건 성필과 신아름일 수도 있다. 아니, 반드시 그럴 것이다.
“나도 딱히 신경 안 써요.”
“어?”
“아니 쌤, 나랑 팀장님이 가족 같다지만 진짜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옛날이 팀장님이랑 저랑 그거 관련해서 얘기 나눈 적 있어요.”
“어?!”
2년 전 명절, 성필이 신아름의 집에 찾아갔을 때였다. 김민주에게 쉽게도 패배한 후 코알라 뽀뽀를 당했던 아육금이 방영되었던 당시.
보일러가 고장 나 불가피하게 어머니, 신아름, 성필이 한 이불을 덮고 자게 되었다.
그때 늦게까지 깨어있던 신아름과 성필은 여러 대화를 주고받았었다.
반쯤 장난이었던 ‘팀장님은 잠 안 와요?’, ‘나중에 짝 없으면 결혼할래요?’, ‘팀장님은 저 옆에 누워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같은 것들.
다시 생각하니 밤기운에 정신이 나갔었던 것 같다.
“멀쩡한 상태에서 우리만 보면 막, 이렇게, 막 됐다! 이러면 팀장님한테 쫌 실망할 수도 있겠는데, 이번 일은 약 때문이잖아요. 어쩔 수 없는 일에 이러쿵저러쿵할 순 없죠.”
백설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은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우수에 잠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설하는 부정적인 답이 돌아올 것을 각오하곤 물었다.
“하, 하양이는……?”
“그는 남자였고, 그녀는 여자였다.”
“어?”
“그것이 그들 명예의 전부였다…….”
장하양이 창밖으로부터 천천히 백설하에게로 시선을 움직였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에 나오는 문장이에요. 남녀의 사랑을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요. 네, 사랑이란 그런 거죠. 사회가 붙인 모든 가치 기준은 상관없어지고, 서로의 몸만이 서로가 가진 모든 것일 때 발생하는 강렬한 스파크. 서로가 온전히 가진 유일한 자산만이, 서로를 사랑할 유일한 이유가 되는 순간. 옷 따위 걸치지 않고 태어났던 태초의 명예를 회복한 남녀가 서로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기쁨.”
“하양아……?”
“요컨대, 자연스러운 일이란 뜻이에요.”
장하양이 싱긋 미소 지었다.
“저는 성욕을 죄악시한 중세 수도사들이 만들어낸 찬란한 업적들을 존경해요. 하지만 동시에, 퇴폐적으로 시대를 빨아먹고 그 자양분을 아낌없이 세상으로 배출한 스타들도 동경해요.”
아까부터 묘하게 장하양이 시적이다.
“자신의 피조물을 경배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피그말리온처럼 피조물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죠.”
“하양아 내 말 들었던 거 맞지? 이사님은…….”
“알아요. 요컨대, 자연스러운 일이란 거예요. 네, 저는 이사님을 이해해요.”
백설하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들 고마워어…….”
“왜 쌤이 고마워해요?”
“저어.”
왠지 모르게 감동적인 분위기가 되려던 때, 리카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그래서 이제 저희 뭐 하나요!”
다시 방이 침묵에 잠겼다.
“……이사님을 봬야 하나요!”
정적.
“내가 생각하기에.”
장하양이 입을 열었다.
“박 이사님이 많이 창피하실 테니까, 우리는 자리를 피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찬성이에요!”
“나도.”
“저도요.”
장하양은 동생 라인을 인솔하여 방을 나섰다. 곧이어 그녀들은 현관문을 열고 숙소를 빠져나갔다.
왔을 때처럼 바람과 같았다.
백설하는 그녀들이 나선 현관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다시금 거실로 들어갔다.
성필은 식탁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굳은 목을 겨우 움직여 백설하를 보았다.
“이사님.”
“……한 번에, 직설적으로 말해줘. 아니, 일단, 미안. 애들한테 말하는 게 쉽지 않았지? 미안해, 너한테 책임을 떠넘겨서.”
“보세요.”
백설하가 검지와 엄지를 맞붙여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성필이 안심하도록 자애로운 미소를 띠었다.
“다들 이해한대요!”
“……아.”
성필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고 흐느꼈다.
“아, 아아…….”
계속 의아했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어째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걸까.
왜 백설하가 사과하던 순간에 후회할 미래가 보였던 걸까.
누가 보아도 미래보다 현재가 더 최악이 아닌가.
능력이 고장 난 건가?
그래, 그럴지도 몰라.
나 같은 놈에게 이런 축복이 계속 주어질 리 없지.
이건 벌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게 최선.’
성필이란 인간의 인격을 유지하고, 백설하의 고뇌를 풀며, 모두를 납득시킨.
바로 이 순간이 그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미래다.
오늘 백설하의 고백을 들으니 확신이 생긴다.
성필이 보았던 미래에서 백설하는 끝없는 자기혐오의 구렁텅이로 빠졌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움츠러들었으며, 성필에게 지나친 죄책감과 과한 의존성을 보였었다.
그 미래를 본 성필은 당황했었다.
‘아니, 나가라는 말 하나로?’
그런데, 당시의 백설하는 진실로 궁지에 몰려 있던 것이다. 돌아올 리 없는 메아리이자 영혼의 공명인 성필에게 미움받는단 게, 그녀에겐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었다.
성필은 미래의 그녀를 이해한다.
당장 방금까지 성필이 그와 같았었으니 말이다.
백설하의 용서를 구할 수만 있다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발가락이라도 핥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백설하는 몸에 붙은 찌꺼기이자 부산물…… 이라고 했었지.’
정신과 육체 모두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백설하는 육체보다는 정신에, 자아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었다.
본인의 자아는 육체 못지않은 가치가 있노라고 믿어오며 정신을 다잡아왔다.
그런데, 그 정신은 자기가 믿어왔던 것처럼 고귀하지 않았다. 은인인 성필을 상처입혔으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이토록 가볍게 여기는 얼굴과 몸이 아니었다면, 성필이 말이나 걸어주었을까.
백설하란 인격은 정말 찌꺼기고 부산물이었구나.
그녀를 지켜오는 최후의 자존감마저 바스라진다.
아마 성필이 보았던 미래의 백설하는 그런 식으로 무너져갔으리라.
‘그러니까, 현재가 최선.’
둘은 서로에게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로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이전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됐다.
성필은 짙은 안도감에 사로잡혀 한동안 흐느끼기만 했다. 그리고 울음이 그쳐갈 즈음, 바로 앞에서 일정한 박자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필은 눈을 가린 손바닥을 내렸다.
바로 앞에 선 백설하가 스텝을 밟고 있었다.
퀵, 퀵, 슬로우, 슬로우.
성필은 시선을 위로 올렸다. 백설하가 미소 지으면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춤추실래요?”
“지금?”
“지금이니까요.”
백설하가 성필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성필의 손바닥엔 눈물이 묻어 있었다. 그가 껄끄러워서 손을 빼려고 하자, 백설하가 더 강하게 붙잡았다.
“이 눈물은 모든 게 잘 끝났다는 증거잖아요. 그 증거가 저희 손 안에 있는 거예요. 지금이니까 함께 쥘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어.”
“자, 그럼 리더(Leader)?”
성필은 감격에 젖은 채 발을 뻗었다.
옛날에 백설하가 가르쳐주었던 대로, 이렇게 깊이 들어가도 괜찮을까 싶을 만큼 멀리.
그녀의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으로.
“설하야.”
“네.”
스웨이.
“넌 네 몸에 붙은 부산물 같은 게 아니야.”
“알아요.”
턴.
“내가 너한테 말을 걸었던 건, 네가 설하라서야.”
“알아요.”
스핀.
“이사님.”
“어.”
턴.
“이사님은 제 은인이세요.”
“그래.”
스웨이.
“하지만, 만약 과거의 제게 기회를 주었던 게 이사님이 아니었다면 따라가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사님이 아니시면 누가 제 프로듀서가 될 수 있겠어요? 제가 그날 이사님을 따라갔던 건.”
성필이 성필이었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아니라 그였기 때문이다.
둘은 멈춰서 서로를 보았다.
음악 없는 춤은 알고 있는 동작을 모두 소진하자 끝났다.
그러나 이 순간에 춤을 이어가기 위한 음악 따위는 필요 없었다.
춤이란 기쁨을 위한 도구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기쁘다면 춤을 출 필요는 없다.
또한 음악이란 인간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모아둔 것. 지금은, 둘에게 가장 듣기 좋은 소리란 서로의 목소리였다.
음악은 한없이 목소리의 모방일 수밖에 없다.
인간 감정을 열화시킨 것, 그래서 인간에게 닿으려 노력하는 것.
인간 그 자체에 비하면 음악이든 춤이든 색이 바랜다.
“오늘 아침까지 괴로워했던 제가 바보 같아요.”
“아까까지 고통스러웠던 내가 바보 같아.”
“이사님이 저를 싫어하실 리 없는데.”
“설하가 나를 안 믿을 리 없는데.”
둘은 음악과 춤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이돌이 되어줘서 고마워.”
서로에게 가장 달콤한 말과.
“제 프로듀서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서로가 소중함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며.
성필과 백설하는 서로의 명예가 되었고.
성필의 머리에 자라난 뿔은 왕관이 되었다.
자아 찾기 여행,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