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화
[이사님.
이사님은 탁 트인 들판에서 소리친 제게 돌아온 메아리였습니다. 절대 돌아올 리 없는 반사광이자 영혼의 공명이었습니다.]
성필은 고백하는 도중, 백설하에게 받았던 편지 문구 중 하나가 떠올랐다.
문득 떠오른 문구는 더없이 선명하여 글자 하나하나가 원본과 다르지 않았다.
탁 트인 들판에서 내지른 소리.
메아리가 돌아올 리 없다.
그런데도 돌아왔다.
백설하에게 성필은 절대 나타날 수 없던 메아리와 같았다. 꿈이란 이름의 외침이 성필이란 모습이 되어 나타났다.
[이사님은 제 꿈의 구원자이십니다.]
꿈의 구원자는 그러한 뜻이었으리라.
성필은 허공에서 흩어지려던 백설하의 꿈을 붙잡아 그녀의 앞으로 데려왔다.
[그 따스함이 지금은 제 심장을 찌릅니다. 저는 저를 향해 구원을 손길을 내밀어준 이사님에게, 말 따위로는 갚을 수 없는 상처를 보답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렇기에 백설하는 이토록 괴로워했던 것이다.
성필이 주었던 한없이 따스한 손길을, 백설하는 비수를 꽂는 것으로 갚아주었으니까.
아니, 비수를 꽂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이런 아이야.’
백설하는 이런 아이다.
성필이야말로 그녀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지평선 밖에서 돌아오는 메아리라고.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따스함과 다정함을 갖춘 인간. 그녀를 보면 사회생활을 하며 쌓여왔던 인간혐오가 눈처럼 녹아 사라진다.
인간의 하한선은 때때로 구역질이 나지만, 인간의 상한선이란 이렇게나 고귀한 거구나.
백설하라는 인간이 존재하는 것을 보니, 세상은 아직도 아름답구나.
‘이런 아이니까.’
그녀는 이딴 일에 고통받아선 안 된다.
심지어 그게 성필이 만들어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성필은 이를 적극적으로 풀어야만 한다.
이건 의무다.
성필이 적당히 둘러댔다면, 백설하는 적당히 납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적당함으로 말미암아 백설하는 성필에게 죄책감과 부채감, 또한 지금까지 보아왔던 괴로움을 떠안고 살아가겠지.
그래선 안 된다.
백설하는 그런 취급이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다.
성필은 남이 죄책감을 지니고 괴로워하는 것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질 나쁜 인간이 아니다.
타인의 오해로 받는 호의를 즐기는 저열한 인간이 아니다.
체면 때문에 불리한 이야기엔 입을 꾹 다무는 평범한 인간도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은사 허은설이 믿어준 성필이란 인간은 그보다 훨씬 낫다. 행복에 더해 고통마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평범 이상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설하는.’
단 한 점의 의혹 없이, 자신의 죄가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자신 때문에 성필이 상처받았다. 그런 있지도 않은 죄책감을 지니고 평생을 살아가게 둘 순 없다.
이후 보게 될 백설하의 미소 속에 미안함이 들어있다면, 이후 백설하가 더 살가워진다면, 이후 백설하가 성필을 더 잘 따르게 된다면, 백설하가 성필에게 ‘빚을 갚겠다’란 마음을 품고 대하게 된다면.
도리어 성필이 괴로울 것이고, 후회할 것이고, 그걸 알기에 그렇게 두지 않는다.
성필은 그녀의 마음에서 마지막 하나의 의심조차 지워야만 한다.
설령 그게.
“발기, 했었어…….”
백설하가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결말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성필은 감수한다.
백설하가 존재하지도 않던 성필의 고통으로 괴로워할 바에야, 성필 자신이 백설하에게 미움받는 쪽이 훨씬 낫다.
그래,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할 바에야.
‘나를 혐오해.’
그러니까 이젠 네가 아침마다 보내왔던 톡과, 정성 들여 썼던 편지와, 눈물을 흘리며 뱉었던 모든 사과의 말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결백을 알고, 믿고.
그 모든 고통을 지워버리고.
“미안, 설하야, 미안해…….”
더는 괴로워하지 말아줘.
성필은 자신이 쌓아왔던 명예를 내던지며, 백설하가 허황된 죄책감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길 염원했다.
이런 자신이 과연 어떻게 보일까.
잘 안다. 알기에 저지른 일이다.
이 숙소에 오기로 했을 때부터 품어왔던 결심. 그건 백설하와의 관계가 파탄 나는 것이었다.
이제 끝이다.
백설하와의 모든 행복했던 세월을 지워버리고, 행복했을 미래를 스스로 불태우고, 성필이 손에 쥐는 건 참으로 혹독한 현실일 테지.
그렇기에 지금부터 그 혹독한 현실만이 성필의 유일한 명예가 될 것이다.
백설하와의 관계가 끝나는 대신, 그녀가 지닌 오해를 완벽히 풀어 고통을 끝내주었다.
백설하가 괴로워하지 않는단 게, 성필이 가져야 할 유일한 명예였다.
그런데.
“이사님,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상황은 성필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갔다.
백설하가, 성필이 가져야 할 것 이상을 주려고 했다.
“울지 마세요.”
백설하가 성필을 안아서 달래주었다.
* * *
“지루해요.”
진소유 TF(Task Force, 특정 프로젝트를 위해 소집된 집단)팀은 그녀의 한마디에 얼어붙었다.
각 프로듀싱 파트마다 담당자가 한 명씩 불려와 있었는데, 가장 긴장한 건 비주얼과 컨셉 파트의 인원이었다.
“지루하다구요, 제 말 이해하셨어요?”
방금 비주얼―컨셉 담당자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그리고 진소유는 그들의 스토리보드를 보곤 ‘지루하다’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너어무 진부해요.”
진소유의 ‘하나였어’ 뮤직비디오의 스토리라인은 대략적으로 이러하다.
진소유와 그 상대(아마도 장하양)가 겪어왔던 전생의 인연, 그리고 현재를 교차편집하는 방식이다. 거기에 퍼포먼스가 중간중간 더해진다.
‘내러티브형’ 연출과 ‘이미지 예술형’ 연출을 적절히 섞었다.
뮤직비디오의 두 주인공인 그들은(혹은 그녀들은) 고대에서, 중세에서, 근대에서, 현대에서도 인연을 맺어왔다.
전생과 현생, 미래를 넘어 무한의 세대를 이어갈 운명의 연인인 것이다.
하지만 뮤직비디오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가 아니다. 스토리를 차근차근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소품과 복장, 이펙트가 중요하다. 시청자가 한눈에 배경을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한다.
즉,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누구나 아는 문화적 텍스트를 이용하거나 역사적 소품을 배치하는 것이다.
누구나 알기에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보는 것만으로 그 문화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에.
“KS 엔터 프로듀싱팀이 이것밖에 안 돼요?”
그런데 진소유가 보기에 TF팀이 제시한 뮤직비디오의 서사는 너무나 진부했다.
“마법사와 농부 소녀, 기사와 귀부인, 사교계 데뷔탕트를 막 치른 귀족 영애와 고위 장교, 학교 선후배…….”
진소유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고 쳐요. 어차피 비주얼 표현이 중요한 거니까요. 그건 여러분들이 저보다 더 전문가라고 믿어요. 진부한 주제를 참신하게 선보이는 게 여러분들의 특기잖아요.”
케이어스도 그런 그룹이었다.
여태껏 케이어스가 발표했던 모든 디스코그래피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녀들은 신화적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차용해 왔다.
데뷔곡 카오스부터 가이아, 타임, 넥타르까지 말이다.
자칫하면 고정관념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할 컨셉을, KS 엔터는 마법처럼 현대적으로 표현해왔다.
“그런데 스토리텔링이 못 봐줄 수준이네요.”
뮤직비디오에서 그리는 진소유와 상대(아마 장하양)의 관계는 이러했다.
찾는 자와 찾아지는 자.
그리워하는 자와 잊어버린 자.
숭배하는 자와 숭배받는 자.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생에서 상대…… 장하양(임시)을 찾아다니는 건 모두 진소유다.
진소유가 마주한 장하양은 애틋한 사랑의 대상이면서, 쉽게 범접하지 못할 숭배의 대상이다.
장하양은 쟁취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만 그려진다. 그리고 결국 장하양은 진소유와의 인연을 깨닫게 되어, 온갖 고난을 겪어온 진소유를 구원한다.
“배우신 분들이 쓸 캐릭터 조형법이 ‘성녀―창녀 이분법’밖에 없나요?”
‘성녀―창녀 이분법’이란 문화의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가 아니라 문화 자체에 대한 분석적, 반성적 방법론) 중 하나다.
이러한 이분법은 인류 문화사 내내 이어져 온 유서 깊은 방법이다.
예수를 낳은 동정녀 마리아, 왕을 홀려 선지자의 목을 베게 한 살로메, 구국의 성녀 잔 다르크, 로마의 적 클레오파트라.
살인자 라스콜니코프를 용서하고 보듬어준 소냐. 사씨에게 누명을 씌워 쫓아낸 후 정실의 자리를 차지한 교채란.
기사도 문학(무훈시)의 기품 있고 성스러운 귀부인들과, 이교도였기에 중세 작가들이 마음껏 육감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사악하고 매혹적인 이슬람 공주들.
이 이분법은 역사, 문화, 신화의 작가들이 줄기차게 사용해왔던,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히로인 캐릭터 창작법’이다.
“하양이를 그냥 뭐.”
진소유가 픽 웃었다. 그리고 급히 표정을 다잡고 발언을 수정했다.
“아니, 상대를 성녀로 묘사해뒀네요.”
진소유가 표현하는 성녀란 문자 그대로의 ‘성자인 여성’이 아닌, 문화적인 캐릭터로서의 성녀였다.
“이런 캐릭터는 너무 진부해요. 그리고 하양, 아니, 상대보다는 덜하지만 저도 그래요. 저한테는 ‘전사’ 이미지를 씌웠잖아요.”
여자 캐릭터 창작법에 ‘성녀―창녀 이분법’이 있다면 남자 캐릭터 창작법엔 ‘전사―시인 이분법’이 있다.
남자 캐릭터들은 쟁취하고 정복하고 승리하는 전사다. 아니면 지적이고 사려 깊은 시인이다.
‘하나였어’의 스토리텔링은 인류 문화사 5,000년을 이어져 온 클리셰 서사 구조의 집합체였다.
진소유가 장하양(임시)에게 사랑을 깨닫게 하여 결과적으로 쟁취해내는 이야기이니.
“아시겠어요? 아무리 뮤직비디오가 짧은 시간 이내에 직관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지만, 이런 얄팍한 캐릭터 창작은 욕먹기 딱 좋아요.”
스토리라인에 묘사된 장하양(임시)은 성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따랐다.
무슨 뜻이냐면, 영상적으로 성스러운 분위기를 뿜어낸단 뜻이었다. 소품, 의상, 배경, 메이크업, 모든 게 그러했다.
TF팀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뮤직비디오는 소설이 아니다. 어째서 주인공이 상대를 사랑하는가를 줄줄이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아, 이래서 사랑하는구나’를 알게 해야 한다.
가장 적합한 모델이 바로 성녀였다. 보는 것만으로 숭고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인간 말이다.
물론 TF팀은 진소유가 언급한 문화적 접근 방식으로 성녀 이미지를 쓴 게 아니었다. 만들다 보니 그런 이미지가 가장 적합했던 것에 불과했다.
솔직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진소유의 비판에 얼이 빠졌다.
연습생일 때부터 정호환이 책을 읽혔다더니, 고졸임에도 지식 수준이 대학생 이상이다.
“요즘은 연애 소설도 이런 캐릭터 안 써요. 진부하고, 고루하고, 시대에 뒤떨어졌어요. 인간 같지가 않잖아요. 여러분은 ‘죄와 벌’의 소냐가 이해 가세요? 어떤 미친 인간이 ‘내가 위버멘쉬인지 아닌지 증명하겠다’는 이유로 노파를 죽인 남자를 용서해줘요? 용서하는 것 이상으로, 시베리아까지 따라가서 라스콜니코프가 형기를 마칠 때까지 면회 가고 뒷바라지를 하는 게 말이 돼요? 그게 인간이에요? 남자가 망상한 걸 다 끌어다 모은 덩어리지.”
도스토옙스키(망상의 결정체를 만든 사람)가 무덤에서 일어나 키보드배틀을 뜨려고 할 만한 발언이었다.
노어노문학과 중퇴인 컨셉 기획팀 직원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그의 젊음을 모두 바쳤던 도스토옙스키가 모욕당함에도 한마디도 꺼낼 수 없는 현실이 분했다.
“그, 그럼.”
비주얼 파트 직원이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소유 씨가 바라는 상대의 캐릭터성은 어떤…… 어떤 겁니까?”
“그걸 생각하라고 여러분이 월급을 받지 않겠어요?”
비주얼 파트 직원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그런데 그 욕지거리는 진소유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쏙 들어갔다.
분노가 사라지는 것을 넘어 ‘그래,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경국지색의 달기가 살아 돌아오면 진소유같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굳이 첨언하자면…….”
진소유가 프로젝터 스크린에 뜬 스토리보드를 보았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모든 직원이 볼펜, 스마트 펜슬 등의 필기도구를 들었다.
“만약 상대가 하양이라면, 이런 고민이 필요 없겠죠.”
“……네?”
“존재가 아우라니까.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의 이유가 설명되니까. 하양이란 인간의 존재가 곧 사랑의 이유예요.”
“곡의 화자가 얼빠(얼굴만 보는 사람)인가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굳이 캐릭터를 묘사할 필요가 없을 거란 뜻이에요. 하양이를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모르실 테지만.”
진소유는 다시 테이블 위에 올라온 기획서를 훑었다. 뮤직비디오 스토리라인에 등장한 상대, 장하양이 표현되는 방식을 보니 또 불쾌감이 치밀어오른다.
‘하양이는 이런 전형적인 표현법으로 묘사되어도 좋을 만한 여자가 아니야.’
아니, 이딴 걸로 묘사할 수 없단 게 정확하겠지.
진소유는 자신의 눈이 렌즈가 되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보는 걸 세상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아무튼.”
진소유가 기획서를 손으로 집어 팔랑 떨어뜨렸다.
“이런 건 안 돼요. 한없이 자비로운 성녀가 죄악에 빠진 기사를 구원해준단 옛날이야기는, 이제 질릴 때도 됐어요. 저는 인간을 바라요. 그리고 단언컨대, 이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도스토옙스키의 부패한 뇌 안에 캐릭터로나 있겠죠.”
노어노문학과 중퇴 컨셉 기획팀 직원이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옆의 다른 직원이 그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해주었다. 진소유가 기획을 반려해서 우는 줄 알았던 것이다.
컨셉 기획팀 직원은 눈물을 훔쳤다.
동시에 진소유가 ‘전쟁과 평화’의 보리스와 나타샤를 예로 들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만약 톨스토이까지 들먹였다면, 그는 더 이상 진소유를 용서할 수 없었을 테니까…….
* * *
백설하는 의자에 앉은 성필에게로 걸어와 안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녀는 우는 성필을 상대로 ‘괜찮아요’란 말을 반복했다. 그 시간이 오래됐다.
성필은 그녀를 떨어뜨리려 했다. 그때마다 백설하가 품에 준 힘을 더했다.
성필이 그녀를 밀려는 건 반응이 와서, 가 아니었다. 자아 찾기 여행 중 육체는 영양제의 힘을 잃고 그의 통제 아래에 들어왔다.
그가 백설하를 밀어내는 건,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괜찮아요.”
그럼에도 백설하는 이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겨우 정신을 차린 성필은 그녀를 설득하려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설하야, 이러지 마. 안 이래도 돼…….”
성필은 백설하가 불쾌함을 참고, 이전까지의 정을 보아서 자신을 달래주는 거라고 여겼다.
우는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할 아이니까. 마치 우물로 걸어가는 아이를 보았을 때처럼 반사적으로 따스함을 베푸는 것이겠지.
용서가 아니라 측은지심이다.
“하지 마…….”
백설하가 편지를 주며 사과했을 때, 그녀는 이런 말을 했었다.
‘차라리 이사님이 저를 욕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사님이 저를 비난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아요……. 제가 잘못했다고,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렇게 저를 욕하시면 할수록 제가 더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아요……. 해주실래요……? 정말, 어떤 말이든 하셔도 괜찮아요……. 이사님의 슬픔을 이해하니까…….’
백설하는 그때 성필이 억지로 사과를 받았다고 여겼다. 그랬기에 차라리 본심을 드러내어 욕하고 비난을 퍼부어주길 원했던 것이었다.
지금 성필의 마음이 그러했다.
당시 백설하의 말을 들을 땐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했으나, 이 상황에 되어보니 알겠다.
추악한 자신을 동정으로 보듬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욕하고 화냈으면 한다. 그게 훨씬 기분이 나을 것이다.
“이사님, 많이 힘드셨죠? 이해해요.”
성필이 움찔했다.
‘이해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거짓말일 것이다. 거짓말일 게 분명하지만, 성필에겐 ‘이해한다’란 말이 구원과 같았다.
정말일까?
백설하가 정말 자신을 이해하는 걸까?
사과했던 당시의 백설하가 현재의 성필과 비슷한 마음이었을 테니, 그 마음을 이해한단 걸까?
“이사님이 왜 갑자기 사라지셨는지 알겠어요.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성필은 백설하의 품에서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래서 겨우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성당의 중심에 안치된 성모상처럼 자애롭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사님을 이해하지만, 저는 이사님이 왜 미안해하는진 이해 못 하겠어요.”
“……어?”
성필은 얼이 빠졌다.
“마, 말했었잖아. 나는, 프로듀서인데, 그런데도, 그때 네 앞에서…….”
“아니이…….”
백설하가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남자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저도 알아요.”
“여, 연애하면 바로 회사에 말하라고 했…….”
“아니! 지, 직접 뭐 보고 실험해봐서 안단 게 아니라요!”
백설하가 드디어 성필을 품에서 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어 바쁘게 손을 놀렸다.
“아, 그게, 뭐더라…….”
3분이 지났다. 백설하가 ‘아!’ 소리를 내며 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연애 상담 아이튜버의 쇼츠 영상이었다. 아이튜버는 남자였다.
[자, 오늘의 마지막 상담! 이건 진짜 간단한 거라서 빨리 끝나. 그래서 일부러 뒤로 빼놨어. 우리 시청자가 이런 질문을 보냈는데.]
아이튜버가 화면에 질문을 띄우자마자 박장대소했다.
[그, 남자의 소중한 친구 있잖아. 아래쪽에 있는 친구. 그 친구가 막 열정이 넘치고 그러잖아 어! 근데 이 시청자는, 남친이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이 친구가 막 열정이 넘친다! 그래서 이거 보고 뭐야 내 남친 변태인가? 이거 위험한 새끼 아니야? 미친놈인가? 이걸 질문을 준 거야.]
아이튜버가 정색했다.
[우리 시청자야, 이게 우리 마음대로 켜고 끌 수 있는 게 아니야! 위의 뇌랑 아래의 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돼. 아니, 이거 혹시 몰랐어 다들?]
[질문자가 많이 예쁘나 보다
몰랐덩
알았는데
엉….
나 몰랐는뎈ㅋㅋㅋ
어리면 모를 수도 있지 ㅎㅎ
첨 알았다….]
[아니! 이거 안다는 애들도 모르는 걸 수도 있어. 막 분위기가 그렇거나 야한 생각 하면 ON, 야한 생각 안 하면 OFF. 이렇게 아는 건 아니지? 내가 ON/OFF가 자유가 아니랬잖아! 어느 정도는 되는데, 진짜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도 ON이 될 때가 있어 어!]
[막 하늘 보다가도 어흡! 이럴 수도 있어. 진짜 뜬금없어서 미칠 때도 많아. 어 그래! 남자 학생들 수업 시간! 종 치고 친구가 ‘매점 가자’ 이러면 자, 잠깐만아핳! 또 이거 남자들 공감할 텐데 흐흨. 연애 처음 시작할 땐 폰에 상대 이름이 뜨잖아? 그것만으로도 열정이 막 넘칠 수가 있어! 이름만으로도!]
[해결법? 아니, 자제력이랑 관련이 없어. 그리고 이건 해결이 되면 안 돼! 남자는 어? 해결이 되면 안 된다고! 해결이 된다? 그럼 늙었단 뜻이거든.]
[야이 씨 남자들! ‘당연히 아는 거 아님? ㅋㅋ’ 이러고 있네. 니들도 똑같아! 똑같을 수 있어! 지금 이거 보는 남자들도 여자에 대해 모르는 거 있을걸? 아니, 달거리를 한 달에 딱 하루만 한다고 아는 애들도 있었어!]
[에이 여자들도 ‘그걸 몰라?’ 이러네. 암튼 그래서 막 ‘어? 너 어제 했잖아 왜 오늘도 아파?’ 이러고 여친한테 개쳐맞고하하핳! 남자분들, 케바케 사바사입니다.]
[그리고 달거리 휴가 있잖아? 그거 하루 주는 거 때문에 남자들은 이게 정확히 계산이 되는 줄 알기도 하는데, 아닙니다. 예상이 되는 기간은 있어요. 근데 언제 그 친구가 찾아올지 몰라! 아침, 낮, 밤, 새벽, 다음 날 아님 다다음 날. 그러니까 휴가가 있어도 정확히 그날 쓸 수가 없어! 여자애들 ‘어이없네 그것도 모름?’ 이러지 마. 모를 수 있어. 근데 모르는 애한테 ‘왜 몰라 이 X발새끼야!’ 이러면 안 되지. 서로 알면 돼. 알아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 아까 말했듯 케바케 사바사고. 암튼 오늘의 결론, 대한민국은 성교육을 더 철저히 해라.]
[잠만 나 가기 전에 하나만 더 말하고. 저번에 이런 애 있었어. 아니, 달거리 그거 나오는 걸 소변처럼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다고 아는 남자애가 있…….]
백설하가 허겁지겁 영상을 끄려고 했다. 그런데 그 영상은 방금 그 부분에서, 굉장히 미묘한 부분에서 급히 끝났다.
그리고 ‘풀버전에서 확인하세요’란 글자가 뜬 후 바로 다음 영상으로 넘어갔다. 아이튜브 숏츠는 영상이 끝나자마자 다음 영상이 재생된다.
이번에도 똑같은 아이튜버의 영상이었다.
[자, 연상 꼬시기 특강 들어갑니……!]
이번에야말로 백설하가 영상을 종료했다.
“그, 그으.”
백설하는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당연했다. 남녀가 서로의 신체적 현상에 대한 내용을 보았으니 부끄러울 만도 했다.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도 어른, 이잖아요. 26년이나 살았고, 다 알아요…….”
“…….”
성필은 떨리는 손을 모아 기도하듯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방금 보았던 그 아이튜버에게 마음의 108배(拜)를 보냈다.
백설하가 사과할 당시 억울했던 점 하나가, 그 아이튜버의 말을 빌리자면 성필은 이미 ‘열정적인’ 상태였었다.
그래서 대화를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지만, 후회할 미래가 보여버렸다. 결국 그녀와 ‘열정적인’ 상태로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보았던 영상의 내용은, 성필이 변명으로 꺼내고 싶었으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던 것이었다.
‘그래, 알았구나. 알고 있었구나…….’
성필은 백설하와의 관계가 끝장나는 것을 감수하고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당연히,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왕이면 좋게 끝났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니 숙소로 오면서 백설하에게 할 변명 목록을 수도 없이 떠올렸다. 하지만 구차하고 구질구질하여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오히려 백설하가 성필을 더 나쁘게 볼 것 같기도 했고.
큰 짐을 덜었다.
만약 그 연애 상담 아이튜버가 연예계에 데뷔할 생각이라면, 성필은 전심전력으로 그를 도울 것이다. 그런 마음마저 절로 솟아났다.
그러나, 백설하가 이해해준다고 끝난 게 아니다.
“설하야, 물론 그래.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너랑 나 사이는 다르잖아. 나는 프로듀서고 너는 아이돌이야. 다른 남자들은 다 그럴 수 있어도, 나는 너한테 그래선 안 돼. 적어도 너랑 마주했을 땐 수, 수그러, 그랬어야, 했는데. 이, 이런 이유로 네가 오해하게 만들고 상처를 줬고. 그리고 또, 앞으로…….”
성필은 다시금 목이 막혀왔다.
“앞으로, 분명 이럴 거야. 나를 마주할 때마다 내 고백이 떠오를 거야. 더는 옛날같이 될 수 없어. 설하는 나를 믿어서 가장 내밀한 고민도 털어놨고, 나를 믿어서 친밀한 관계를 쌓아왔던 거잖아. 그런데 나는 그 믿음을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야.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네가 나를 완전히 용서할 순 없어. 없겠지, 그렇겠지…….”
마지막 말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설하야, 만약 정말 나를 용서해주고자 한다면 여기서 전부 털어놔 줘. 네 배신당한 믿음에 복수해줘. 나를 욕하고 비난해줘. 나는, 난 가면을 쓴 너를 보고 싶지 않아…….”
오늘 둘의 대화는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어야만 한다.
더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이상적인 프로듀서와 이상적인 아이돌의 관계는 끝나고, 서로를 남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둘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다시 정립해야 한다. 그게 둘 모두에게 이롭다.
“가면을 쓰는 너도 괴로울 거야. 난 널 이해해. 설령 네가 날 경멸한다고 해도, 그걸 이유로 업무상 어떤 불이익도 없을 거야. 약속해. 그러니까, 진심을 보여줘…….”
백설하는 성필을 응시했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성필은 그 시간이 단두대에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계단씩 밟을 때마다 자신의 목을 떨어뜨릴 단두대가 가까워져 온다.
하지만 감내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 한 고백이었…….
“이사님, 백설하로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상상해보신 적 있으세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백설하로, 너로 살아가는 거?”
“네.”
뜬금없었지만, 성필의 머리는 그녀의 말대로 ‘백설하로 살아가는 것’을 상상했다.
처음엔 막연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아이돌로서의 일과였다. 그렇지만 그 생각의 흐름은 점점 어떠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왜 백설하가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아마 그녀의 질문은…….
‘백설하의 정신이 아니라, 백설하의 몸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일이겠냐는 건가?’
그걸 깨달은 순간, 성필은 백설하의 질문을 온전히 이해하게 됐다.
“꽤 어릴 때부터요, 익숙했어요.”
익숙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했다.
어떤 시선?
“예를 하나 들자면, 거리를 걷는데 맞은편에도 다른 사람이 똑같이 걸어오고 있는 거예요. 멀리서부터 보여요, 어딜 보고 있는지.”
백설하의 삶은 곧 시선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땐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 사람들은 시선 처리란 걸 모르나? 아니면 일부러 나한테 치욕감을 주려고 이러는 건가? 거리의 모르는 사람부터 같은 학교 애들, 어른들, 그냥, 만나는 사람마다 그랬어요.”
얼굴, 다음은 몸.
백설하를 마주하는 이들은 꼭 한 번씩 눈동자가 빨라지는 순간까지 있다.
본인 입장에선 시야가 순식간에 뒤바뀌니, 분명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맞은편에 선 백설하는 전부 보인다.
흰자 안에 검은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아무리 빠르더라도 안 보일 리 없다.
자연스럽게 슥 움직이는 것도 전부 다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집중된 시선을 받아본 경험이 없으니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때때론 지극히 노골적인 시선마저 있곤 한다.
“우울했어요. 왜냐면,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나와 마주하는 모든 남자들은 전부 내 몸이 목적인가? 머릿속으론 대체 뭘 상상하고 있을까? 대화 한마디 나누지 않은 사람조차 저러는데, 내 곁에 있는 인간들은? 겉으로는 살갑게 대하면서, 실은 나 한번 자빠뜨릴 기회만 노리는 게 아닐까…….”
백설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얼굴과 신체로 살아간단 건 이런 의미였다.
그런 관심을 즐기는 성격이었다면 인생이 참 재밌었겠지만, 백설하는 아니었다.
“사실 나란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내 몸만 보는 게 아닐까? 백설하란 이름 세 글자, 백설하란 사람의 성격은 내 몸에 붙은 부산물이나 찌꺼기에 불과하지 않나…….”
아까 백설하가 ‘우울하다’고 했던 건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정말로 우울해진다.
선망의 대상이 된다고? 잘 태어났으니 부럽다고? 아니, 원치 않는 이들에게 그런 눈빛을 받아봤자 전혀 즐겁지 않다.
차라리 다들 신경을 꺼주었으면 싶다.
“옛날에…… 이사님이 물어보신 적 있잖아요. 그땐 저를 ‘설하 씨’라고 부르셨죠.”
백설하가 낮게 웃었다.
“왜 박시(Boxy)한 옷만 입냐구요.”
성필은 그때가 똑똑히 기억났다.
소녀연맹 데뷔 전, 장하양이 자신에게만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 주어서 한껏 심란해졌을 때였다.
혼자 소파에 앉아 심각해 있는데, 백설하가 다가와 고민이 있냐고 물었었다. 성필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질문을 던졌었고 말이다.
백설하는 이렇게 답했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라고.
“그땐 박 이사님이 저를 놀리시는 줄 알았어요. 아니면, 아, 아니면 희로옹…… 같았구요……. 진짜 몰라서 물어보시는 건지 헷갈려서요. 근데, 아, 그런데…….”
백설하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정말, 모르셨던 거네요……. 저를, 한 번도, 그렇게, 본 적이, 없으시니까…….”
백설하가 나지막한 흐느낌을 뱉었다. 그건 한숨과 비슷했다. 울음 대신 뱉은 것이었다.
어째서일까.
성필이 자신을 이성적으로 인식한 적 없단 사실이 자존심 상해서? 남자를 상대로 자신의 가장 내밀한 상처를 보이는 게 수치스러워서? 화내도 모자랄 판에 성필을 달래주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워서? 아니면 성필의 휴가 내내 고민을 거듭했던 과거가 어처구니없어서?
성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저를 보고 성적인 상태가 되셨었다고, 울면서 고백하고, 죄송해하는 이사님을 보니, 네, 확신이 들어요. 이사님에게 저는 정말로, 진실로, 아이돌이었네요.”
백설하는 입과 눈을 닫고 가만히 있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듯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 우울함이…… 제 인생을 따라다녔던 실망감은…… 사실 소녀연맹으로 활동하고 나서 더 심해졌어요. 이사님은 되도록 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저는 인터넷에 제 이름을 자주 검색해봤어요. 그럼 보기 싫어도 보이거든요. 제 모습을 움짤로 따서…… 특정 움직임과 신체 부위를 부각한 글이나 사이트들…… 그리고 글 제목이랑 거기 적힌 댓글들…….”
차마 떠올리기도 싫은 말들.
얘를 어떻게 하고 싶다.
얘는 어디서 어떻겠지.
얘는 이런 애겠지.
“‘더 언노운 싱어’ 때 세라랑 나눴던 얘기들, 이사님도 기억하시죠? 저는 그때까지도 제 몸이 주목받는 게 싫었어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백설하란 인격이 제 몸에 들러붙은 찌꺼기처럼 느껴졌으니까요. 미래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 사람조차 제 몸만 있으면 제 정신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만 자꾸 들어서, 계속 괴롭고…….”
“…….”
“그런데 이젠…….”
백설하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가로 웃음이 잡혔다.
“그러려니 해요. 그냥, 남자분들은 원래 이런 거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물론 저보고 이러니저러니 이상한 말을 쓰는 사람들이 괜찮단 건 아니에요. 웬만하면 그런 분들은 살면서 안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됐단 거예요. 내 몸이 그런 거구나. 그리고 어떤 거든 앞뒤가, 빛이랑 그림자가 있어요. 저는, 헤헤.”
백설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행운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제가 자빠뜨리려고 마음먹은 남자는 거의 99% 넘어온단 뜻이잖아요? 그건 엄청난 행운이잖아요. 사랑이 삶의 전부라는데, 저는 그 전부를 거머쥘 힘을 가지고 태어났어요. 그렇죠? 그리고 저를 워너비로 생각해주는 팬들, 매력적으로 느껴주시는 팬들, 또 제 재능으로 한 분에게라도 더 제 노래를 전할 수 있으니.”
백설하는 말한다.
“저는 감사해요. 그렇게 살아가기로 했어요. 그게 제가 26년 동안 살아오면서 내린 답이에요. 그러니까 이사님, 이사님의 사과는 저한텐 이상하기까지 해요. 아니다, 이상한 게 아니고, 특별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걸 사과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백설하가 성필에게로 다가갔다.
아주 조금, 한 발자국보다 짧은 거리였다.
“이사님의 고백을 이해하면서, 또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사님이 제가 사과할 때 그러셨잖아요.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라구요.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사과할 필요는 없다구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이사님을 이해한단 건, 그런 의미에요.”
백설하가 또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사님의 고백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래서 이사님의 진심을 믿을 수 있어요. 보통은 돌려서 말하거나 적당히 둘러대잖아요. 이사님도 그러실 수 있으셨을 거예요. 그런데도 저에게 직설적으로 말씀하신 건…… 저를 소중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아까 성필이 했던 말이다.
성필은 백설하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이다.
그러니 백설하에게라면 얼마든지 상처 입어도 괜찮다. 성필은 그리 말했었다.
“이사님 말씀이 옳아요. 이사님이 이사님의 체면 때문에…… 무, 물론 저는 이사님이 체면을 챙겨주시는 편이 더 좋았겠지만…… 이사님한테도…….”
백설하가 헤헤 웃었다.
“체면 때문에 이사님이 둘러대셨다면, 저는 용서받은 걸 기뻐하면서도 계속 마음의 짐을 지고 있었을 거예요. 나는 이사님께 잘못했어. 그러니까 갚아야 해. 나는 죄인이니까. 그런데 이사님은 저를 소중히, 정말 소중히 생각하시니까, 제가 짐을 지는 건 못 보셨던 거예요. 정말…….”
입 밖으로 내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진심인 사람.
“이렇게 다정하신 분이 아니면, 누가 제 프로듀서가 될 수 있겠어요? 저…….”
백설하의.
“최고의 아이돌의 프로듀서가, 이사님 외에 누가 되겠어요?”
“…….”
“고마워요 이사님. 이사님이 저를 소중히 여겨주시는 것처럼, 저도 이사님이 소중해요. 이제 그만 우세요. 이사님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지만, 저는 사과를 받을게요. 용서해요. 자, 그럼 이제.”
백설하가 포옹하려는 듯 팔을 펼쳤다.
“저번에 안 받아주신 사과를 받아주세요.”
성필이 백설하를 와락 끌어안았다.
현관문이 쾅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작 몇 초 지나지 않아 거실문이 세차게 열리며 신아름이 튀어나왔다.
“백설하아아아아―!”
그와 거의 같은 타이밍에 장하양이 달려와 신아름을 뒤에서부터 쓰러뜨렸다.
쓰러져 엎드린 신아름의 위에 장하양이 올라타 팔을 포박했다.
“언니, 어서 도망……!”
장하양의 눈에 격정적으로 끌어안은 성필과 백설하가 들어왔다.
장하양이 사냥개를 풀 듯 신아름을 놓았다.
“가서 찢어라.”